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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 지역의 술, 세계의 명주로

[차관칼럼] 지역의 술, 세계의 명주로
이승돈 농촌진흥청장
세계 시장에서 땅의 이름이 곧 품질과 가치를 증명하는 '명주(名酒)'들이 있다. 멕시코 작은 마을 이름을 세계적 브랜드로 만든 '테킬라',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엄격한 품질기준 없이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샴페인'이 대표적이다. 주산지 이름이 세계적 프리미엄으로 인정받기까지 개별 농가의 노력을 넘어 국가 차원의 품질기준과 과학적 검증체계가 뒷받침됐다.

글로벌 명주의 핵심은 경험이 아닌 '기록'과 '과학'에 있다. 프랑스 와인은 포도 당도와 산도를 해마다 측정해 데이터로 관리하고, 일본 사케는 쌀 깎기(도정)를 규격화해 품질을 보장한다. 우리에게도 기록유산이 있다. 1670년경 안동 장씨 부인이 한글로 지은 '음식디미방'에는 이화주를 비롯한 51가지 술의 제법과 원료 비율, 제조 시기가 정교하게 담겨 있다. 선조들 역시 양조의 핵심이 정확한 기준과 재현성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농촌진흥청은 전통의 지혜 위에 현대 생명공학과 데이터 과학을 결합해 K명주의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한다. 내년부터 추진하는 전통발효유산 과학화를 통한 K명주 세계화 사업은 단순히 술 빚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주의 가치를 과학적으로 다시 정의하는 과정이다. 전용 쌀 품종 개발부터 토착 균주 확보, 제조과정 표준화까지 데이터로 관리할 계획이다.

과학으로 세운 기준은 지역 농업을 살리는 새로운 계기가 된다. 양조 전용 벼의 보급은 쌀 소비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농가에 안정적인 소득원을 제공하고, 지역 고유의 이야기가 더해질 때 술 한 잔은 깊은 문화적 경험이 된다. 충남 당진의 신평양조장이 좋은 본보기다. 1933년 창업해 3대째 계승하며, 2013년 농림축산식품부 '찾아가는 양조장' 1호로 지정된 이후 지역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전통방식에 체험 콘텐츠를 결합해 외국인 체험관광과 수출제품을 생산하는 양조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명절이면 대통령이 전하는 선물세트에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주가 담기듯, 그 술은 지역 농특산물과 전통문화 품격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이번 연구개발 목표를 '한 지역, 한 명주'로 삼은 이유다. 그 고장의 쌀과 특산 원료, 토착 미생물, 고유한 서사를 오롯이 담은 대표 술을 키워내겠다. 과학으로 검증된 명주가 국빈 만찬에서 건배주로 쓰이는 날, 또 하나의 마을이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될 것이다.

전통을 미래로 잇는 이 과정은 민·관·학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농촌진흥청과 도농업기술원이 원천기술과 실증모델을 구축하고, 지방정부가 원료 수급과 관광 상품화를 뒷받침해야 한다. 연구기관이 엄격한 품질 인증체계를 운영하는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K명주의 완성도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농업의 미래는 단순한 생산을 넘어 문화와 기술, 관광이 어우러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 외국인 관광객이 오직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술을 찾아 발길을 옮기고, 한국의 정취가 담긴 명주 한 병을 소중히 품고 돌아가는 풍경.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농촌의 미래이자 K명주 세계화 사업이 열어갈 대한민국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이승돈 농촌진흥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