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

[fn광장] AI 상담원에 발 묶인 고객

금융사 콜센터 인력 대폭 줄여놓고
복잡한 민원·분쟁까지 AI에 맡겨
비용 줄어도 고객 스트레스는 늘어
AI 잘하는 일은 과감하게 맡기되
예외상황·디지털 취약 고객에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사람이 응대해야

[fn광장] AI 상담원에 발 묶인 고객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
얼마 전 카드 결제와 관련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려고 카드사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인공지능(AI) 상담원이 받았다. 본인 확인도 하고, 개인정보도 입력하고, 몇 가지 질문에도 답했다. 여기까지는 꽤 그럴듯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내가 겪은 일은 정해진 메뉴에 딱 들어맞지 않는 조금 복잡한 경우였다. 몇 번 설명해 봤지만 AI는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사람 상담원으로 바꿔 달라"고 했는데, 이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처음부터 다시 상담원 연결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대기시간이 문제였다. 기다리다 지쳐 번호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카드사의 연락은 하필 그날 저녁 어려운 식사 자리에 있을 때 왔다. 당연히 받지 못했다. 다음 날 다시 처음부터 전화를 걸었다. 또 AI 상담원이었다. 사람과 연결되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뒤 카드 대금을 갚으라는 독촉전화가 왔다. 드디어 '사람과 통화하게 됐구나' 반가운 마음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저는 연체 안내만 담당해서 그 문제는 처리할 수 없습니다." AI 상담원과 나눴던 대화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다시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처음부터 설명해야 했다.

AI 상담을 이용하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AI의 도움을 받는 것인지, AI를 훈련시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은행, 카드, 보험 등 금융회사들은 앞다퉈 AI 상담원과 챗봇을 도입하고 있다. 방향 자체는 자연스럽다. 잔액 조회, 결제일 확인, 카드 분실 신고처럼 질문과 답이 정형화된 업무라면 AI가 사람보다 빠르고 편리할 수도 있다. 24시간 응대가 가능하고 반복 업무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런 일까지 사람이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AI가 아직 잘하지 못하는 일까지 사람 대신 AI에 맡기려 할 때 생긴다.

금융의 고객 상담에는 생각보다 '예외'가 많다. 복잡한 민원이나 분쟁, 여러 거래가 얽힌 문제, 고객의 사정을 듣고 판단해야 하는 일은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만으로 처리하기 어렵다. 고령자나 디지털 취약계층처럼 설명 방식 자체를 달리해야 하는 고객도 있다. 금융사고나 사기 피해처럼 고객이 크게 불안하거나 화가 난 상태에서 전화를 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맥락을 이해하고, 고객의 말을 끝까지 듣고, 때로는 정해진 절차를 넘어 해결책을 찾아주는 '사람'이다.

AI 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말 가운데 '휴먼 인 더 루프(Human in the Loop)'가 있다. AI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순간에는 사람이 개입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뜻이다. 금융에서는 특히 중요하다. 돈과 신용을 다루는 만큼 작은 오류도 고객에게 큰 피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AI로 무엇을 더 잘할 수 있을까'보다 '사람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가 먼저 오는 것이다. 더욱이 금융사의 콜센터는 외주업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인건비 절감이 AI 도입의 중요한 이유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상담 인력을 줄여놓고 성능이 충분치 않은 AI가 그 빈자리를 메우게 하면 비용은 줄어도 고객의 시간과 스트레스는 늘어난다. 기업이 아낀 비용을 고객이 불편으로 대신 부담하는 셈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AI에 대한 맹신이다. 기술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다 보니 지금의 한계도 곧 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사람의 역할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AI가 단순한 일을 더 많이 맡을수록 사람에게 남는 일은 더 복잡하고, 더 예외적이며, 더 높은 판단을 요구하는 일이 된다.

금융회사들이 해야 할 일은 AI와 사람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제대로 긋는 것이다. AI가 잘하는 일은 과감하게 맡기되 복잡한 민원이나 분쟁, 취약고객 보호, 예외 상황에는 사람이 쉽게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고객이 원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사람 상담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


AI 전환은 빠른 것이 능사가 아니다. 금융에서 좋은 AI란 사람을 가장 많이 줄여주는 AI가 아니라, 고객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주는 AI다. 그리고 가장 좋은 AI 서비스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순간을 알아채고, 그때 사람에게 바통을 넘기는 서비스일 것이다.

손병두 토스인사이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