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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진의 건축시선] 한국 혁신의 다음 단계

[황두진의 건축시선] 한국 혁신의 다음 단계
황두진 건축가
필자가 운영하는 건축 설계사무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준비를 시작해 올해 상반기, 설계 시스템을 25년 가까이 사용해 온 CAD에서 BIM으로 전환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CAD는 컴퓨터를 이용해 도면을 그리는 도구이고,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은 벽과 창문, 재료와 설비 등 건물을 이루는 요소에 각종 정보를 부여해 컴퓨터 안에 실제 건물에 가까운 가상의 건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즉 이는 단순히 이전과 다른 프로그램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놀라운 도구가 우리 시대에 제공된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라는 말로 의견을 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익숙했던 작업 방식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역시 신중하게 의견을 구하고 여러 세미나에 참석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이유는 단 한 가지, BIM이 건축의 미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 정부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국토교통부는 2020년 '2030 건축 BIM 활성화 로드맵'을 발표하고 2025년 건설산업 전반에 BIM 설계를 적용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공공건축에서 시작해 민간건축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는 구체적인 일정도 제시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사무실이 BIM으로 옮겨가는 사이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4월 국토부는 당초 로드맵에서 제시했던 공공공사 BIM 발주 의무화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계획을 수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무화는 BIM 적용 여부를 '검토'하는 수준으로 후퇴했다. 6년 전 들었던 깃발을 정부 스스로 내려놓은 셈이다. 물론 우리는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 깃발을 계속 들고 가려고 한다.

이 작은 사례는 한국 사회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혁신국가다. 국내에서는 잘 실감하지 못하지만 각종 국제 혁신지수에서 지속적으로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돌이켜보면 혁신은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전략에 가까웠다. 자원도 부족하고 내수시장도 작은 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출입국과 기술보국을 내걸었고, 정부가 목표와 방향을 정하면 기업과 국민이 빠르게 따라갔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정보통신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한국을 만든 산업의 배경에는 이런 정부 주도형 성장모델이 있었다. 그런데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BIM 로드맵의 후퇴 하나를 놓고 정부 주도 혁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에 우리가 겪은 경험이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말은 할 수 있다.
이제는 정부가 로드맵을 제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먼저 움직여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한국 혁신의 다음 단계일 수 있다. 정부가 앞에서 끌어주지 않아도 기업과 개인이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사회. 물론 우리 사무실의 BIM 전환은 그 거대한 변화에 비하면 아주 작은 사건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들고 달려온 혁신의 깃발을 이제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 앞으로 한국의 성장동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황두진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