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사촌 동생의 후손 등이 국가에 귀속된 토지를 돌려달라며 낸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서울고법 행정7부(곽종훈 부장판사)는 친일재산 국가귀속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고종황제 사촌 동생 이재완(1855~1922)의 아들 이달용(1883~1948)의 후손이 법무부를 상대로 낸 국가귀속처분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1심에 이어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4일 밝혔다. 재판부는 “당시 임야의 이용상황이나 조선 왕실 일가가 인근 토지에 분묘를 설치해왔고 토지ㆍ임야조사 사업에 따른 사정 절차를 통해 1917년 토지를 사정받기전 이미 소유한 상태였던 점을 고려하면 일제에 대한 협력의 대가로 임야를 취득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달용의 후손은 지난 2009년 경기도 남양주시 44만㎡의 땅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지자 “일제로부터 정식 사정받기 전에 이미 임야를 취득한 상태였다”며 같은 해 7월 소송을 냈다. 고종의 종형제인 이재완은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고, 이달용은 아버지 사망 후 작위를 다시 물려받아 이들은 친일인사로 분류돼 있다. 같은 재판부는 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친일파 박희양(1876~1932)의 후손들이 2009년 국가 귀속처분이 내려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5100㎡의 토지에 대해 낸 같은 취지의 소송에서도 지난달 1심을 파기하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해당 임야는 우리의 전통적 사고에 따라 분묘의 설치ㆍ관리를 위해 종손에게 소유권이 물려 내려오던 묘산으로 보인다”며 “사정 당시 이미 사유 요건을 갖춘 만큼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ksh@fnnews.com 김성환기자
2011-12-14 08:39:21[파이낸셜뉴스] 고종황제 증손자가 '고종이 여자를 밝혀 밤마다 파티를 했고 나라가 망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경기 수원정 국회의원 후보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대한황실문화원은 지난 2일 성명을 내고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라고 자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망언”이라며 "김준혁 후보는 대한민국 황실을 모독한 역사 왜곡에 대해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하고 바로잡길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 김 후보는 2017년 9월 8일 유튜브 채널 ‘국민TV’의 ‘색수(嗦獸) 가라사대. 인류는 섹X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방송에 나와 “고종이 그렇게 여자를 밝혔어. 그래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밤마다”라고 말했다. 여성 진행자가 “섹X 파티?”라고 묻자, 김 후보는 “예 뭐, 하여튼 그렇지”라고 답했다. 김 후보는 이어 “그래서 고종이 나라를 망친 거야”라고 했다. 그러면서 “밤만 되면 매일같이 새벽 4~5시까지 (파티를) 하고 자다가 오후에 늦게 일어나서 잠깐 업무보고 밤마다 또 파티를 하고”라고 말했다. 진행자인 김용민씨는 이 말을 받아 “나이트 죽돌이(나이트클럽에서 매일 죽치고 노는 사람을 지칭하는 은어) 스케줄”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김 후보 발언에 대해 고종황제 증손자인 대한황실문화원 이원 총재는 “우리 역사가 단죄해야 할 대상은 친일 역적 매국노와 일본 제국주의자”라며 “그런데도 김준혁 후보는 고종황제 폐하를 능멸하는 발언을 전 국민, 더 나아가 세계인이 볼 수 있는 유튜브에서 했다”고 했다. 이어 “대한황실문화원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훼손되고 왜곡된 대한제국황실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역사적 자존감을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김 후보는 대한제국황실을 모독한 역사 왜곡에 대해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하라”라고 했다. 이 밖에도 김 후보는 '박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에 정신대, 종군위안부를 상대로 XX(성관계)를 했었을 것',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미군 장교들에게 이대생들을 성상납하게 했다' 등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논란이 계속되자 김 후보는 지난 2일 개인SNS를 통해 사과했다. 그는 "제가 전공한 역사를 대중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소개하면서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방법이 적절치 않았다"며 "좀 더 쉽고 직설적이며 흥미를 이끄는 표현을 다수 사용하면서 결과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부적절한 비유와 혐오 표현이 사용됐고 많은 분께 의도치 않은 불편을 드렸다"고 했다. 이어 "이제 막 정치를 시작하는 정치 신인으로서 과거 발언이 너무나 경솔했음을 진심으로 반성한다"며 "우리 사회의 통념과 기대에 크게 어긋났음을 인정하고 또 반성한다"고 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4-03 18:30:44상식을 깨는 막말 공세로 4·10 총선의 혼탁상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5일부터 이틀 동안은 사전투표가 실시된다. 유권자의 냉정한 선택이 더 중요해졌다. 여야 할 것 없이 후보들이 쏟아내는 막말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과거 발언도 있고, 유세장에서 만들어낸 것도 있다. 지도부라고 다를 것이 없다. 총선일이 다가올수록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나경원 후보(서울 동작을)를 향해 "나베"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나베'는 나 후보와 일본의 고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섞은 말로, 다른 일본 말로는 냄비를 뜻하기도 한다. 경기 수원정에 출마한 김준혁 후보는 '김활란(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이대생을 미군 장교에게 성 상납시켰다'는 과거 발언으로 사퇴 논란에 휩싸였다. 김 후보는 '고종이 여자를 밝혀 밤마다 파티를 했고 나라가 망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도 드러나 조선 황실 후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쯤 되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후보의 자질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공정선거와 클린선거가 헛된 구호로 전락한 모양새다. 막말 논란은 진영논리와 맞물려 팬덤정치를 타고 산불처럼 번지는 양상이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사퇴는커녕 팬덤을 통해 표를 결집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냄비'가 여성을 비하하는 속어인 것쯤은 청소년들도 안다. 이런 저질 발언과 흑색선전은 방송을 타고 버젓이 시민들 앞에 공개되고 있다. TV 드라마든 영화든 도덕적·윤리적 문제가 있는 콘텐츠는 제재를 받는다. 정치권의 막말은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어느 정당이든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절박하고도 중대한 목표다. 그렇다고 금도를 넘어서서 멋대로 없는 사실을 지어내고 역사를 왜곡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말로도 모자란다. 도대체 이런 인물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한국 정치의 앞날이 어둡다. 유권자를 자극하는 데 매몰되다 보니 정책선거는 실종됐다. 그나마 공표되는 정책들도 선심성 포퓰리즘이 드러나는 빈껍데기들뿐이다. 돈을 뿌려 유권자의 이목을 끌려는 데만 몰두해 있다. 막말로 도배되는 선거판이 될수록 정치에 대한 혐오 게이지는 더욱 높아질 뿐이다. 이는 투표율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특히 미래세대의 정치외면을 심화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유권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지난 총선 때보다 선거에 대한 관심도와 투표참여 의향이 2030세대에서 줄었다. 혼탁한 선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4일부터 총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됐다. 유권자로서는 여론 동향을 알 수 없다. 한 표라도 더 얻으려는 마음에 온갖 마타도어와 막말이 난무할 수 있다. 유권자가 냉철해져야 한다. 근본 자질이 의심스러운 후보들은 아예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 도저히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유권자들이 걸러내 심판하는 도리밖에 없다.
2024-04-04 18:14:31【파이낸셜뉴스 수원=장충식 기자】 경기도는 흥선대원군의 묘소인 남양주 '흥원'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해 도민에게 개방했다고 12일 밝혔다. 흥원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역으로,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흥선대원군 사망 이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공덕동)에 조성됐고, 1908년 파주군 대덕리에 이어 1966년 현재 장소인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로 이장됐다. 도는 2018년 흥선대원군의 5대 후손인 이청 씨로부터 흥선대원군 묘역과 주변부지 12만6903㎡를 기부받아 2021년부터 화장실과 주차장, 둘레길 조성 등의 정비를 진행했다. 둘레길은 바람길, 사색길, 석파길, 소리길 등 총 4개의 코스로 구성됐다. 도는 향후 흥원 인근 학술조사, 편의시설 보완 등을 추진해 도민들이 쉽게 흥원을 이용하고, 흥원에 대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할 예정이다. jjang@fnnews.com 장충식 기자
2023-10-12 09:44:22[파이낸셜뉴스] 경북 북부지방 상류주택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경북 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상주 수암종택’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22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상주 수암종택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1582~1635)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로,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맥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ㅁ자형 본채를 중심으로 별동의 녹사청과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류성룡의 수제자인 상주 출신 우복 정경세(1563~1633)가 집터를 정해줬다고 하며, 실제 우복 종택은 약 32km 떨어져 있다.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 건물로, 경북 북부지방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고, 특히 안채 대청 우측 마루방의 지면을 들어 올려 누마루처럼 꾸민 점은 다른 고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이다. 또한, 안채 대청 상량묵서에서 건립연대(1858)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등 비교적 원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녹사청은 본채 전면에 있는 ㄱ자형 건물로,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류후조(1798~1876)가 1872년 봉조하를 제수받은 후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들을 맞이하거나 묵게하는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건물이 민가에 남아 있는 것이 희소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청백리 집안답게 별다른 장식없이 소박하지만 당시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야사에 따르면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한때 수암종택에 머물면서 영남지역 인물들을 파악하며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종가에서 전해오는 죽병(대나무 병풍)이 당시 흥선대원군이 그려준 것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집권 후 남인계 중용책에 따라 류후조는 1864년(고종 1년) 이조참판, 1866년 우의정, 1867년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상주 수암종택은 불천위 제사 외에도 기제, 묘제 등 제례문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고, 녹패, 간찰, 문집 등 고문헌과 등롱, 가마, 관복 등 민속유물이 다수 남아 있어 19세기 이전 상주지역 상류주택에서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류진이 남긴 ‘임진록’, ‘임자록’과 흥선대원군과 류후조가 주고 받은 ‘운현간첩’ 등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조선의 정치.사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이들 자료들은 상주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경북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 기증.기탁되어 보존되고 있다. 한편, 상주 수암종택에는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절조를 지켜 청렴했던 류후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오는데, 녹봉이 떨어졌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백비탕(白沸湯)을 놋그릇에 담아 정성껏 대접하여 손님에 대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이같은 기상은 후손에게 이어졌다. 류진의 11대손 류우국(1895~1928)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고, 1923년 조선의열단에서 김지섭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북경에서 ‘혁명도보’, ‘혈조’와 같은 신문과 잡지를 발행했다. 이후 1926년 독립운동 자금 조달 차 국내에 잠입해서 활동하던 중 1928년 급병으로 요절했으며,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2-08-22 09:13:00[파이낸셜뉴스] 11일 국가보훈처는 직계 후손이 없는 '무(無)호적' 독립유공자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 지사를 비롯한 156명에게 대한민국의 '적(籍)'이 부여한다고 밝혔다. 이날 보훈처는 "윤 지사 등 무호적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추진,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으로 등록기준지를 부여할 예정"이라고 11일 밝혔다. '등록기준지'는 옛 '호적법'상의 '본적'을 뜻한다. 보훈처에 따르면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이 추진되는 무호적 독립유공자들은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 '조선민사령' 제정 이전에 국외로 이주해 독립운동 등을 하다 1945년 광복 이전 사망, 대한민국 공적서류상 '적'을 한 번도 갖지 못한 이들이다.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대상 유공자 중 윤 지사(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는 '서시'(序詩)로 널리 알려진 저항시인이고, 장인환 의사(1962년 대통령장)는 일제 침략을 적극 옹호했던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1908년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처단한 인물이다. 또 홍범도 장군(1962년 대통령장·2021년 대한민국장)은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승리의 주역이고, 오동진 지사(1962년 대한민국장)는 광복군총영(總營)을 조직했다. 윤 지사의 고종사촌 형 송몽규 지사(1995년 애국장)와 홍 장군 가족(부인 및 장·차남) 등도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대상에 포함됐다. 보훈처는 내달 15일 광복절 이전에 이들 무호적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되도록 서울가정법원과 긴밀히 협의한다는 계획이다. 보훈처는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이 완료되면 8월 중 등록기준지인 독립기념관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하는 창설 완료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편, 정부는 지난 2009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 개정 뒤 직계 후손이 있는 독립유공자에 한해 후손의 신청에 따른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지원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가 직권으로 직계 후손이 없는 무호적 독립유공자의 가족관계등록부를 만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2-07-11 09:40:56【파이낸셜뉴스 남양주=강근주 기자】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종걸)가 주최하고 남양주시(시장 조광한)가 후원하는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8주기 추모식’이 오는 16일 이석영광장과 REMEMBER 1910에서 개최된다. 이석영 선생 추모식은 작년 2월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순국 87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열렸다. 올해 추모식에는 이석영 선생 후손인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종걸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해 조광한 시장, 한국성 경기북부보훈지청장, 이철영 남양주시의회 의장 등 5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서 이회영 선생으로 열연한 배우 정동환이 작년에 이어 올해 추모식 사회를 맡아 눈길을 끈다. 추모식은 영상을 통한 이석영 선생 약력 소개를 시작으로 이종걸 회장 기념사와 내빈 추모사 낭독 및 헌화, 남양주시립합창단의 ‘신흥무관학교 교가’ 등 추모가 합창, 유족 대표 인사 순으로 진행된다. 영석 이석영(潁石 李石榮, 1855~1934몰) 선생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 11세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귤산 이유원 양자로 입양되면서 물려받은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토지 등 전 재산(현재 가치로 약 2조원)을 독립운동을 위해 헌납한 남양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남양주시는 2019년부터 이석영광장과 역사체험관 REMEMBER 1910,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 청년층 창업지원 공간인 이석영신흥상회 등 역사적 가치를 담은 시민 공간에 이석영 선생 이름을 붙이며 선생이 평생 실천한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석영 선생의 후손인 이종걸 회장은 “작년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열린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에 이어 올해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REMEMBER 1910에서 추모식을 열게 돼 매우 기쁘다”며 “남양주시민의 따뜻한 뜻으로 선생 위업이 복원되고 있어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감사하다”고 말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22-02-15 07:35:33【파이낸셜뉴스 남양주=강근주 기자】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남양주시가 후원하는 ‘영석 이석영 선생 순국 88주기 추모식’이 오는 16일 이석영광장과 REMEMBER 1910에서 개최된다. 이석영 선생 추모식은 작년 2월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순국 87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열렸다. 올해 추모식에는 이석영 선생 후손인 이종찬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 이사장과 이종걸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해 조광한 시장, 한국성 경기북부보훈지청장, 이철영 남양주시의회 의장 등 5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서 이회영 선생으로 열연한 배우 정동환이 작년에 이어 올해 추모식 사회를 맡아 눈길을 끈다. 추모식은 영상을 통한 이석영 선생 약력 소개를 시작으로 이종걸 회장 기념사와 내빈 추모사 낭독 및 헌화, 남양주시립합창단의 ‘신흥무관학교 교가’ 등 추모가 합창, 유족 대표 인사 순으로 진행된다. 영석 이석영(潁石 李石榮, 1855-1934) 선생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 11세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귤산 이유원 양자로 입양되면서 물려받은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토지 등 전 재산(현재 가치로 약 2조원)을 독립운동을 위해 헌납한 남양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남양주시는 2019년부터 이석영광장과 역사체험관 REMEMBER 1910,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 청년층 창업지원 공간인 이석영신흥상회 등 역사적 가치를 담은 시민 공간에 이석영 선생 이름을 붙이며 선생의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석영 선생의 후손인 이종걸 회장은 “작년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열린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에 이어 올해는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REMEMBER 1910에서 추모식을 열게 돼 매우 기쁘다”며 “남양주시민의 따뜻한 뜻으로 선생 위업이 복원되고 있어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감사하다”고 말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22-02-15 07:28:44[파이낸셜뉴스] ‘데니 태극기’등 태극기 유물 3건이 보물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데니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을 포함한 총 7건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보물 ‘데니 태극기’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가 소장했던 것으로,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태극기의 존재는 1977년 미국인 역사학자 로버트 R. 스워타우트 교수에 의해 오리건 대학교에 보관된 ‘데니문서’가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데니 태극기’는 세로 182.5cm,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제작기법 측면에서도 근대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 정세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서양 국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참조한 것으로, △전통적인 손바느질이 아닌 상하 90cm 정도 크기의 넓은 폭의 면직물을 바탕재료로 하여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했다는 점, △청색.홍색 태극과 청색의 4괘(四卦)를 부착하는 데 있어 바탕천을 오려내고 두 줄로 박음질해 멀리서도 문양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꾀한 점 등 초창기 국기 제작법을 적용해 매우 정교하고 정성껏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데니 태극기’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한 미국인 외교관 가문이 90여년 넘게 간직해 오다 우리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진정한 호혜(互惠)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 △국기를 제정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유물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의 상징이 된 태극기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태극기라는 점 등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할 사유가 충분하다. 보물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세로 44.3cm, 가로 62cm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의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소형 태극기다. 깃대는 오른쪽에 천을 덧대어 만들었으며, 괘는 가로 상단에 건괘(乾卦)와 감괘(坎卦), 하단에 이괘(離卦)와 곤괘(坤卦)가 배치되어 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묵서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작고 네모난 인장이 찍혀 있다. 이 태극기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명문에서 김구는 망국의 설움을 면하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광복군을 도와줄 것을 강하게 호소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19세기~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제작 시기가 정확히 알려진 유일한 자료라는 점, △매우사 신부로부터 안창호 선생의 부인이 태극기를 전달받기까지 상황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어 전래 경위가 분명하다는 점,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신념이 대표적으로 담겨있다는 점,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극기의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되어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ㆍ학술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보물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됐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1-10-25 09:26:46[파이낸셜뉴스] "...(중략)...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관군 좌선봉장 이규태 증언 中 19세기 말 이전까지 조선에서 발생했던 개혁이나 혁명은 지배층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개혁, 혁명이 전부였다. 근대(近代) 사회에 들어와 발생했던 대표적인 개혁 운동인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개혁(甲午改革)도 소수 지배층의 주도로 위로부터 시행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하층부에 있는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바람(토지 개혁 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외세의 침략과 내정의 문란 등으로 국가의 앞날이 대내외적으로 불투명하던 1894년에, 그동안 조선 역사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성격을 띤 혁명이 발생했다. 바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말 그대로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중심이 돼 일어난 반봉건(反封建) 개혁운동이었다. 농민들은 그 당시 사회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개선 방안을 고스란히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 담아 시행하려고 했다. 핵심은 전 근대 사회에서 불평등한 사회 관계를 규정했던 신분제(身分制) 폐지와 토지의 균등 분배 등이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는데, 이에 맞서 분연히 들고 일어나며 반외세(反外勢) 민족운동을 지향했던 것이다. 무능한 민씨 정권이 일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이를 대신해 농민군이 국권 회복을 위해 앞장서 싸웠던 셈이다. 다만, 동학농민혁명은 한계도 내포하고 있었다. 무기 등에서 충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일본군 및 관군과 맞선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사회 개혁을 지향하면서도 구(舊)세력이었던 흥선대원군과 손을 잡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는 대원군의 '감국'(섭정)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농민군이 대원군의 영향력에 어느 정도 의지를 했고 대원군은 농민군을 이용해 다시금 권력을 잡으려 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농민군 내부에서 완전히 연대하지 못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단 조직인 남접(南接) 내 온건파(전봉준, 왕조 인정)와 강경파(김개남, 왕조 부정) 간의 노선 갈등, 그리고 남접과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는 교단 조직인 북접(北接) 간 대립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은 결국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귀결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비록 동학농민혁명이 당대에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이후의 역사에서 적지 않게 계승, 발전됐다. 반봉건 노선의 핵심이었던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 때 상당 부분 수용됐고, 항일로 대변되는 반외세 노선은 의병 투쟁과 무장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대항해 역사 발전의 '주체'(主體)로 등장했다는 점은 이후 거국적인 민족 운동인 '3.1 운동'으로 계승되기도 했다. 조선사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전말을 되돌아봤다. ■동학의 기원 동학(東學)은 1860년 4월 경주의 몰락양반 후손이자 서자였던 최제우에 의해 창시됐다. 동학은 서학(西學)과 같은 하늘의 도(道)를 추구하지만, 동쪽에서 태어난 종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무속에서의 신병체험과 유사한 강신체험(降神體驗)을 했고, 이 체험을 통해 '한울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를 깨우치기 위해 성심껏 한울님을 모셔야 한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설파했다. 시천주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조(敎祖)인 손병희 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재해석됐다. 이 같은 동학 사상은 한문책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한글 가사체 책인 용담유사(龍潭遺詞)로 정립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이전과는 색다른 사상을 표방한 동학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졌고, 시간이 갈수록 동학에 가입하는 농민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동학은 각 지역의 교도들을 관리, 통솔할 책임자로서 '접주'(接主)들을 임명했고, 그 접주들이 관리하는 지역은 '접소'(接所)라고 불렀다. 교단 조직은 대표적으로 전라도의 남접과 충청도의 북접이 있었는데, 이 두 개의 조직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남접에는 가난한 하층 농민이 많았고, 북접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민(富民)이 많았다. 남접은 사회 개혁에 대한 열망이 높아 조정과 외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성향을 띄었고, 북접은 사회 개혁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동학의 세력이 커지면서 가장 큰 위기감을 느낀 것은 당시 조정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이었다. 결국 대원군은 세상 사람들을 속여 정신을 홀리고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뒤집어씌워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했다. 교조가 허무하게 죽자 동학교도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동학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고, 되레 교도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동학교도들은 1892~1893년에 2대 교조였던 최시형의 주도로 조정에 최제우의 원통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교조신원(敎祖伸寃)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동학교도들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관련 집회를 가졌다가 전라 감사의 거부로 실패한 후에 한양으로 대거 올라와 왕에게 복합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다. 조정은 일단 동학교도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척하면서 회유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는 기만책에 불과했다. 대원군에 이어 권력을 잡은 민씨 정권은 궁궐 앞에서 복합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색출해 탄압하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3만 여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북도 보은(報恩)에 집결해 돌로 성을 쌓고 대규모 집회를 벌이며 결기를 다졌다. 특히 이전까지 단순 종교적 구호를 외치는데 그쳤던 동학교도들은 이 보은 집회 때 국정을 보살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일본 및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떨치자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등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서 점차 농민혁명의 성격을 띄어갔다. ■탐관오리 탐학, 최초 봉기 동학농민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을 시점에 조선의 상황은 매우 악화돼 있었다. 사회적으로 부패가 심화돼 국가 재정의 근간이었던 전세, 군포, 환곡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나타났고, 돈이나 재물로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賣官賣職)도 성행했다. 일본에 배상금 지불 등의 명목으로 민중들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무능한 민씨 정권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세우려하기는커녕 청나라와 밀착해 기득권 지키기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동학혁명을 촉발하게 만드는 사건이 1894년 전라북도 고부에서 발생했다. 2년 전 부임한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탐관오리가 전횡(專橫)을 일삼아 그동안 쌓여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당시 조병갑은 농민들을 무리하게 동원해 만석보(萬石洑)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여기에서 과도한 수세(收稅)를 징수했다. 또한 자신의 부친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 건립을 명분으로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외에 여러 농민들에게 온갖 트집을 잡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농민들은 조병갑의 전횡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당시 남접을 이끌었던 접주 전봉준을 앞세워 조병갑에게 세금을 낮춰 달라는 등의 요구를 강력하게 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이 요구를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주모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의 이름을 적은 통문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만들면서 비로소 봉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동지들과 함께 조병갑 제거와 군기창(軍器廠) 점령, 전주영 함락 등을 담은 구체적인 행동 강령들까지 제정했다. 이후 1894년 2월(음력)에 비로소 봉기해 고부 관아를 습격했고, 조병갑이 불법적으로 수탈했던 수세미 등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반환했다. 이렇게 최초 봉기가 성공한 후 전봉준 등은 일단 해산했다. 고부 봉기 소식을 접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즉시 진상조사를 했고,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 등을 기반으로 조병갑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조정은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이라는 사람을 새로이 고부군수로 임명했다. 아울러 농민들을 달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런데 이용태는 사태 수습은커녕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사태 수습을 명분으로 전봉준 등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차 동학농민혁명, 반봉건 이에 대응해 1894년 4월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은 40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무장현에 모여 창의문(무장동학포고문)을 발표했다. 창의문에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일본을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등을 나타내는 보국안민 및 외세 배격 등이 담겼다. 이를 위해 주변 지역의 농민들이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내 1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라간 것이다. 이후 전봉준은 백산(현재 전북 부안)에서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됐고, 손화중과 김개남은 전봉준을 보좌하는 총관령(總管領)이 됐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비로소 농민군이 제대로 된 진용(陣容)을 갖췄다. 이 때 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무려 8000여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 사관은 이 광경을 '앉으면 죽산(농민군이 앉으면 손에 든 죽창만 보이고), 서면 백산(다 일어나면 흰 옷 입은 사람만 보인다)'이라고 묘사했다. 동학농민군의 첫번째 목표는 부안 관아였다. 농민군이 이 곳을 습격해 손쉽게 점령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특수한 지역을 수비하기 위해 그 부근 장정을 뽑아 편제한 군사들인 별초군(別抄軍) 및 보부상이 중심이 된 관군으로 하여금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기가 드높은 농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황토현(현재 전북 정읍)에서 관군 등은 대패했다. 이 소식은 조정에 급히 전해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민씨 정권은 무장인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의 경군 800여명을 전주성으로 파견했다. 이 군사들은 외국 교관에게 훈련을 받은 강한 군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홍계훈의 경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후 사기가 저하된 탈영병들이 속출했다. 이에 홍계훈은 조정에 증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황헌주가 이끄는 총제영의 중군이 추가로 파견됐다. 증원군 파견 소식에 고무된 홍계훈은 경군을 이끌고 전주성을 나와 농민군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추격 도중에 홍계훈은 황헌주의 중군과 합세했고, 마침내 장성 남쪽 황룡촌(黃龍村)에서 조정의 중앙군과 농민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초반에는 비교적 우수한 전력을 가진 중앙군이 우세한 듯 했지만, 농민군은 사력을 다해 반격했고 전세(戰勢)는 차츰 농민군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중앙군은 농민군에 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홍계훈의 경군이 있었던 전주성으로 쳐들어갔다. 예상 외로 강력한 농민군에 놀란 전주성 내 관군들은 더 이상 전주성을 사수하지 않고 급히 도망쳤다. 이로써 1894년 4월 27일에 농민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13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한 철저한 징계와 개항 후 나타난 교역의 모순 제거 등이 담겼다. 당시 개항 후 침투해 온 외국 상인 등으로 인해 미곡의 국외 유출과 더불어 물가 폭등이 나타나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개혁안은 사회 변화를 바라는 농민들의 여망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다만, 13개조 폐정개혁안에는 국태공(흥선대원군)의 국정 간여를 통한 민심 회복이라는 조항도 담겨있었는데, 이는 농민군이 구 세력으로 여겨졌던 대원군과 손을 잡은 것으로서 본래 개혁을 지향했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실제 대원군은 농민군의 봉기 초기부터 이들과 접촉하며 자신의 권력 회복을 도모하려 했고, 농민군 내 온건파는 대원군의 영향력에 어느 정도 의지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에 전주성 인근에서는 이 곳을 탈환하려는 관군과 사수하려는 농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선제 공격을 했음에도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런 가운데 다급해진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파병된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했고, '텐진조약'으로 동등한 파병권을 획득한 일본군도 제물포에 상륙했다. 민씨 정권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서슴없이 외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농민군은 전주성 인근 전투에서의 패배로 기세가 한풀 꺾였고, 청나라와 일본 군대의 조선 주둔에 빌미를 주는 것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정은 홍계훈을 앞세워 탐관오리들을 벌할 테니 농민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했다. 전봉준 등은 고심 끝에 24개조 폐정개혁안을 제시했고, 이를 조정에서 받아들이면 해산할 것이라고 답했다. 24개조 폐정개혁안은 앞서 제시된 폐정개혁안이 보다 구체화된 것으로, 농민들의 봉기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탐관오리 숙청, 매관매직 청산 등 정치기강 문란의 시정을 주장했고, 경제적으로는 전세·군포·환곡 등 삼정의 문란 시정과 개항 후 발생한 외국 상인 및 독점 상인들의 횡포를 금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 같은 개혁안을 조정에서 받아들임으로서 1894년 5월 7일에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해 해산했다. 전주화약 후 조정과 농민들은 전라도 지역의 개혁 사무를 관장할 자치 기구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했고,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시행에 착수했다. 집강소를 통한 폐정개혁은 이전의 폐정개혁들이 수정, 보완돼 12개조로 재정립됐다. 주요 내용들을 보면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 개선, 청춘과부(靑春寡婦) 개가 허용, 토지의 평균 분작(分作), 일본과 간통(奸通)하는 자 엄징 등이 있었다. 이는 토지 개혁 등이 담겼다는 점에서 갑신정변 때 제시된 혁신정강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2차 동학농민혁명, 반외세 하지만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은 순조롭게 시행되지 못했다. 엄연히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파격적인 반봉건 개혁안이 담긴 만큼 조정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당초 농민군과 했던 약속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 했다. 더욱이 당시 국내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텐진조약에 근거해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급기야 일본군이 무력을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민비를 유폐시킨 '경복궁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김개남이 중심이 된 농민군 내 강경파들은 1894년 8월 말에 남원에서 재봉기를 결의했다. 초반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전봉준도 9월 초에 삼례에서 재봉기했다. 이 때 집강소를 통해 모여든 농민군은 수만명에 이르렀다. 반외세, 항일(抗日)로 대변되는 2차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라간 것이다. 2차 혁명 때는 참여 세력들이 1차 혁명 때에 비해 눈에 띄게 불어났다. 1차 혁명의 경우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의 남접만 참여했는데, 2차 혁명 때는 최시형이 이끄는 충청도의 북접도 참여했다. 당초 북접은 남접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사회 개혁보단 종교 활동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항일이라는 더 큰 대의 앞에 남접과 북접이 한데 뭉친 것이다. 남·북접의 농민군은 논산에서 합세했고, 곧이어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로 북상하려 했다. 그런데 이 때 조정은 농민군의 대의에 동조하기는커녕 일본군과 합세해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참담한 결정을 내렸다. 민씨 정권은 외세와 협력하는 한이 있더라도 농민군이 표방하는 반봉건의 싹을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다. 농민군 대 일본군·관군 연합군은 11월에 목천 세성산에서 첫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북접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김복명이 전사했고, 농민군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후 일본군 및 관군은 농민군보다 먼저 공주로 진입했고, 농민군이 공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우금치와 이인, 효포 지역 등에 진을 치고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농민군이 논산과 노성을 거쳐 공주로 들어오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경천으로 해서 판치를 넘어 효포, 웅치 지역을 경유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인을 거쳐 우금치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이 때 농민군은 노성에서 두 부대로 나눠졌는데, 전봉준이 이끄는 한 부대는 판치, 효포, 웅치로 공주의 동쪽을 공격하고, 나머지 부대는 이인으로 진격해 공주의 남쪽을 공격하기로 했다. 첫 전투는 이인 지역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농민군은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했다. 그러나 효포 지역 공략은 관군의 반격으로 좌절됐고, 한동안 공주를 사이에 두고 농민군 대 일본군 및 관군이 대치하는 형국에 들어갔다. 이후 농민군은 웅치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반격에 당해 공주 남쪽으로 퇴각했다. 농민군의 사기가 저하될 즈음 전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의 농민군이 합세했다. 농민군은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했고, 판치 방면 공략에 나서 관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이 때 관군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우금치(牛禁峙)로 퇴각했다. 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우금치로 진격해 일본군 및 관군과 조선의 운명을 건 일대 혈전(血戰)을 벌였다. 우금치 전투는 무려 일주일동안 50여 회에 걸쳐 치러졌다. 농민군은 일본군 및 관군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기들을 가졌지만, 그야말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 반외세와 반봉건이라는 명확한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이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근대식 무기 앞에 농민군은 점차 한계를 드러냈고 끝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일본군의 강력한 기관총은 수많은 농민군을 마치 학살하다시피 했으며, 농민군의 시체는 산처럼 쌓였다. 마지막 몸부림으로 전봉준은 관군에게 함께 힘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 싸우자고 간절히 호소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군은 논산 방면으로 퇴각했다. 우금치 전투에 참전한 농민군 외에 다른 농민군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지만, 이 역시 역부족이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퇴각했다. 청주로 북상했던 김개남의 농민군도 일본군 및 관군의 공격을 받아 전주를 거쳐 태인 방면으로 퇴각했다.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주력부대는 본거지인 충주에서 일본군 및 관군의 공격을 받은 후 완전히 해산됐다. 이 때 농민군을 공격한 것은 비단 일본군 및 관군 만이 아니었다. 농민군의 사회 개혁을 두려워했던 양반층으로 구성된 민보군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잔혹하게 공격했고, 결국 모든 농민군은 재기 불능의 궤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을 최일선에서 주도했던 전봉준은 순창에서 은밀히 재기를 모색했지만,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인해 12월에 관군에 체포됐다. 전봉준은 이듬해 4월 손화중, 김덕명 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다른 녹두장군이었던 김개남도 옛 친구인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돼 처형됐다. 1894년 2월 고부 봉기를 시작으로 1년 여 간 지속됐던 동학농민혁명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계승, 발전 비록 외세의 개입 등으로 조선사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반봉건, 반외세의 가치는 이후의 역사에서 계승, 발전됐다. 무엇보다 폐정개혁안에 담긴 신분제 폐지 요구는 갑오개혁 때 상당 부분 수용됐다. 문벌 제도, 반상 차별, 죄인 연좌법 폐지와 조혼 금지 및 과부의 개가 허용 등이 이뤄진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수백년 간 이어져 온 대표적인 봉건적 관습들이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 투쟁의 근간이 됐다. 우선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세력들이 중심이 돼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다.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며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 등이 연이어 일어났고, 나아가 항일 무장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성격은 1919년에 발생한 '3.1 운동'으로 계승되기도 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대항해 역사 발전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이후의 3.1 운동은 상당한 연계성을 갖고 있고, 우리나라 역사 발전 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를 받는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9-18 11:5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