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경북 봉화 아연광산에서 221시간 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두 광부들의 건강이 많이 호전된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에서도 커피믹스를 찾을 만큼 안정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8일 보호자들에 따르면 작업반장 박정하(62)씨는 며칠 전 아들에게 “커피믹스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씨는 아들이 사다준 커피를 마시면서 “밖에 나와서 마시는 커피믹스도 맛있네. 허허”라고 농담도 했다. 박 씨는 커피믹스를 매끼 식사 후 1봉지씩 하루 3봉지 정도 마시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흘째 안동병원에 입원중인 두 광부는 몸 상태가 계속 좋아지고 있다고 병원 측은 전했다. 이들은 눈과 안면부의 부기가 빠졌고, 취침 중 갑자기 깨거나 악몽을 꾸는 수면 장애와 가벼운 경련 증상도 많이 나아졌다. 다만 작업반장 박 씨의 경우 허리 통증을 호소해 정형외과 진료도 받고 있으며, 보조작업자 박 씨는 토하는 증상 등을 보여 관련 진료를 할 것으로 전해졌다. 또 두 명 모두 지하 190m 아래 환경이 좋지 않은 장소에 장시간 고립돼 알레르기 발진 등 피부 이상 증상이 있어 관련 처방을 받았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을 보인다고 병원 관계자는 말했다. 두 사람은 지난달 26일 봉화군 소천면 서천리 아연광산 지하에서 일하다가 토사가 쏟아지면서 갱도에 갇혔다. 이들은 갱도에 가지고 간 커피믹스 30봉지를 타 먹으며 극한의 상황을 버텼고, 사고 221시간 만인 지난 4일 오후 11시3분 구조됐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2-11-09 07:46:59[파이낸셜뉴스]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에서 발생한 갱도 붕괴 사고로 고립됐던 광부 2명이 9일 동안 지하수와 믹스커피를 마시며 버텼다는 사실이 전해진 가운데, 한 네티즌이 남긴 댓글이 주목받고 있다. 봉화 아연광산 사고로 고립됐던 작업조장 박모(62)씨와 작업보조원 박모(56)씨가 지난 4일 오후 11시3분쯤 구조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갱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고 발생 221시간 만이다. 두 사람은 경북 안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받고 있다. 광부들은 흐르는 지하수와 믹스커피(커피 믹스)를 마시며 221시간을 버틴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광부들은 믹스커피 30봉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믹스커피가 비상식량 역할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온라인에서는 한 네티즌이 남긴 댓글이 화제가 됐다. 이 네티즌은 붕괴 사고 게시물 밑에 “내일 아침에 커피 믹스 드시면서 나타나실 거예요. 낮밤이 바껴서 주무시는 듯”이라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이 댓글에 대한 반응은 초반엔 엇갈렸다. 일부 네티즌은 이 댓글을 보고 최초 댓글 작성자가 광부들을 모욕했다고 오해했다. 그러자 작성자는 “내시경 카메라에 안 보이신다고 하니 그런 거다. 커피믹스 가지고 계신다고 하더라. 저도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나오시길 바란다”며 해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광부들이 믹스 커피로 버텼다는 보도가 나오자, 분위기는 단번에 역전돼 ‘성지순례지’가 됐다. 네티즌들은 “예언 성공?” “여기가 성지이군요” 등의 반응을 보이며 신기해 하고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2-11-06 10:12:16[파이낸셜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5일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광산 매몰사고로 고립됐던 광부 2명이 사고 발생 221시간 만에 극적 귀환한 것에 대해 "무사히 돌아오셔서 감사드린다. 가슴 졸이며 애타게 기다리셨던 가족분들께도 진심 어린 마음을 전하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어젯밤 전해진 기쁜 소식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이같이 적었다. 이 장관은 "두 분을 구조하기 위해 밤낮없이 필사의 노력을 해주신 동료 작업자 여러분께 특히 감사드린다"며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소방 구조대원, 군 장병, 봉화군 공무원, 영주고용노동지청·대구고용노동청 감독관 등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 장관은 "앞으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며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구조된 노동자분들과 그 가족분들께 산업재해 보상 서비스를 안내해 드리고, 치료와 회복이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는 "온 국민이 마음을 모아 기적을 이뤄냈다"며 "일터에서의 안전을 염원하는 국민의 마음을 받들어 일하는 모든 분이 일터에서 건강하게 일하시고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고는 지난달 26일 오후 6시께 경북 봉화 재산면 아연 채굴광산 제1 수직갱도에서 펄(토사) 약 900t(업체 측 추산)이 쏟아지며 수직 아래로 쏟아지며 발생했다. 두 사람은 제1 수직갱도 지하 190m 지점에서 고립됐다. 이들은 작업 당시 챙겨간 커피믹스와 물을 마시며 버텼고, 이마저도 다 떨어지자 갱도 안에 떨어지는 물을 받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mkchang@fnnews.com 장민권 기자
2022-11-05 13:16:05[파이낸셜뉴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5일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광산 매몰사고로 고립됐던 광부 2명이 사고 발생 221시간 만에 극적 귀환한 것에 대해 안전 대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며 "어려움 속에서도 잘 버텨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기다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시게 돼 기쁘다"고 적었다. 그는 "그동안 지하 190m 갱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고립자 구조 작업을 펼친 광산 구호대, 소방청 구조대, 시추대대 군 장병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현장에서 24시간 구조 활동을 지휘해온 산업부 동부광산안전사무소, 자원산업정책국 등 2차관실 직원들도 고생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유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 대책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사고는 지난달 26일 오후 6시께 경북 봉화 재산면 아연 채굴광산 제1 수직갱도에서 펄(토사) 약 900t(업체 측 추산)이 쏟아지며 수직 아래로 쏟아지며 발생했다. 두 사람은 제1 수직갱도 지하 190m 지점에서 고립됐다. 이들은 작업 당시 챙겨간 커피믹스와 물을 마시며 버텼고, 이마저도 다 떨어지자 갱도 안에 떨어지는 물을 받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mkchang@fnnews.com 장민권 기자
2022-11-05 10:34:28【파이낸셜뉴스 봉화=김장욱 기자】 '기적이 일어났다!'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 사고로 고립됐던 광부 2명이 지난 4일 밤 무사히 생환했다. 이는 사고가 발생한 지 열흘째인 221시간 만이다. 광부 2명은 119 소방당국에 의해 안동병원으로 옮겨졌고, 모두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구조 당국이 갱도 내 막혀 있던 최종 진입로를 확보하면서 구조된 것으로 전해졌다. 5일 구조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11시 3분께 고립됐던 작업반장 박씨(62)와 보조 작업자 박씨(56)가 갱도 밖으로 걸어서 나왔다고 밝혔다. 이들은 케이블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제2 수직갱도 구조 경로를 통해 걸어서 지상으로 이동했다. 구조 당국은 "발견 당시 이들은 폐갱도 내에서 바람을 막기 위해 주위에 비닐을 치고, 모닥불을 피워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했다. 구조 지점은 이들이 사고 당시 작업을 했던 곳 인근이었다. 2명은 갱도에 갇힌 후 2~3일 동안 탈출하기 위해 갱도 안을 돌아다녔지만 출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그곳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작업반장이 근처에 있던 비닐과 마른 나무 등을 모아 사다리를 타고 70도 아래 지점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바닥부터 천장까지 닿는 나무막대로 막사 모양을 만든 뒤 비닐을 둘러 추위를 막았다. 또 비닐 막사 안에서 마른 나무로 모닥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작업할 때 가져간 커피 믹스를 조금씩 먹으며 허기를 달래다 이후 떨어지는 물방울을 마시며 장장 열흘을 버텨냈다. 고립된 광부 2명 중 60대인 작업반장은 겁에 질린 50대 보조 작업자를 안심시키며 구조대를 기다렸고, 발파소리를 듣자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고립 열흘째인 이날 오후 체념 상태에 빠졌고, 포기하려는 순간 극적으로 구조대를 만나 '봉화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구조 당시 소방구조 대원 1명과 광산 구조대 관계자 1명이 공동으로 수색에 참여했다, 2명은 부축을 받아 스스로 걸어 나온 뒤 구급차에는 구급 대원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당국은 구조된 두 광부의 건강 상태를 간단히 확인하고, 이불을 덮은 채 1분 간격으로 안동병원으로 이송했다. 작업반장 박씨의 아들 박근형씨(42)와 보조 작업자 조카(32)는 "두 분 모두 너무도 건강하게, 두 발로 걸어 갱도 밖으로 나오셨다. 기적이다"면서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다. 건강 상태가 괜찮아서 너무 다행이다"라고 울멱였다. 구조 당국은 두 사람이 고립된 지점을 2곳으로 특정하고 그동안 생존 반응 확인과 구조 진입로 확보 작업을 진행해 왔으나 어려운 갱도 상황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한편 봉화 광산 매몰사고는 지난달 26일 오후 6시께 경북 봉화 재산면 아연 채굴광산 제1 수직 갱도에서 펄(토사) 약 900t(업체 측 추산)이 수직 아래로 쏟아지며 발생했다. 이 사고로 작업반장 박씨 등 2명이 제1 수직갱도 지하 190m 지점에서 고립됐다. gimju@fnnews.com 김장욱 기자
2022-11-05 06:58:37쿠르르릉…." 선탄장에 석탄 덩어리들이 쏟아지면 산 중턱에 돌 구르는 소리가 육중하다. 지하 수천m에서 캐 모은 탄 덩어리들이 수직갱을 통해 굴 밖으로 실려 나오면 산 중턱에 자그마한 검은 산 하나가 또 만들어진다. 이곳은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살아 있는' 탄광, 한국석탄공사 산하 철암역두 선탄장(등록문화재 제21호)이다.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우리나라 산업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이다. 태백 사람들은 석탄공사가 직영하는 이 장성광업소를 '석공'이라고 불렀다. 탄광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야트막한 산 중턱을 온통 석탄 가루가 뒤덮고 있다. 무연탄과 잡석을 분리하고 석탄의 질과 종류를 구분하는 선탄작업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 선탄장과 마주보고 있는 건너편 산 중턱엔 삼방동 마을이 있다. 산비탈을 층층이 깎아 집터를 만들고 이곳에 올망졸망 집들이 들어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 양쪽 산봉우리를 사이에 둔 골짜기에는 철암천이 조용히 흐르고 기차역과 상가 밀집지역, 시장이 들어서 철암 마을이 됐다. '철암 탄광역사촌', 태백시가 이름 붙인 이곳엔 역사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아직 생업에 열심인 주민들이 있고, 탄광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그러나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쓸쓸한 시골 마을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만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적한 길가에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 왔다.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관광열차가 철암역에 도착한 것이다. 빨강 노랑 등산복을 차려입은 도회지 사람들이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쓴 선탄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삼삼오오 역을 빠져나와 100m가량 떨어진 옛날 철암역이 있던 자리에 다다랐다. 철암역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8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전국으로 발송했던 매우 큰 역이었으나 석탄산업합리화에 따른 석탄생산 감소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탄광촌이 활황기였던 1970년대엔 서울 명동 거리만큼 붐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떠난 한양다방, 봉화식당 같은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에너지산업의 중추였던 1960~1970년대 탄광촌의 그 옛날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에 석탄이 없었다면 여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태백시 인구는 5만명이 채 못되는데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 어떤 사람은 탄광촌에 발을 들인 이들을 '막장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서울 종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대구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여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영등포나 동대문에 비견될 만한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10여동이 남아 있어 시는 이 건물들을 보존하기로 했다. 철도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이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들은 주인이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봉화식당, 호남수퍼…." 최근까지도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전시물 중에 탄광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고향에 있는 형이 보낸 편지가 눈에 띄었다. 돈이 궁했던 형이 동생에게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급전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릴 돈 십만원이 그날이 기한이니 동생이 난처하지만 몇 달만 좀 보아 주었으면…(중략)…5월 25일날 돈을 못 구하게 되면 큰 변이 있을 것 같군. 미안한 말이지만 요사이 집에 있기도 싫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군"(철자 교정·원문 사진 참고) 까치발 건물 뒤로 흐르는 철암천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오르게 된다. 여기가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 마을이다.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다. 지금은 거의 빈집으로 지역 화가들이 그려 놓은 벽화만 낯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골목을 산책 삼아 걷다 보니 어느 한 집에서 아저씨 한 분이 고개를 내민다. "탄광마을을 좋게 꾸며 놓아 구경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해서 찾아온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집안으로 들어 오라며 믹스커피 한 잔을 권했다. 탄광에서 운전직으로 수십년 일했던 고영간씨(66)는 이 마을이 과거에 어땠는지 묻자 금세 얼굴이 밝아지면서 "그땐 참 좋았지요. 탄광에서 보수가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거렸으니까"라고 말했다. 고씨는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도시로 보내고 자신과 부인 둘만 삼방동을 지키고 있었다. 고씨는 "이 마을에서 젊을 때부터 살았고 익숙하니까 떠날 생각은 없다"며 "시에서 새롭게 개발해서 좋게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로 탄광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철암은 급속히 쇠퇴했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마을을 떠났지만 당시의 마을 풍경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것이 요즘엔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살아 있는 탄광촌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낡은 옛 모습을 쓸어버리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관광객을 받자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탄광촌의 역사가 사라지고 개성도, 사연도 없는 현대식 건물을 보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난날 전국적으로 탄광촌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붐을 이뤘다. 현대화한답시고 탄가루 묻은 옛 건물과 시설을 모두 걷어낸 뒤 잔디밭 깔고 주차장 짓고, 태양열발전 패널을 세웠던 곳들은 현재 아무도 찾지 않는 박제된 시설로 전락했다. 탄광을 재현한다며 세워둔 플라스틱 모조품과 밀랍인형은 불 꺼진 전시실 한쪽을 장식할 뿐이다. 그런데 철암은 다행히 이제 개발을 시작했다. 옛 탄광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역사촌 운영을 맡은 태백탄광문화연구소도 옛 모습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백탄광문화연구소 김기동 대표는 "탄광촌의 옛 영화를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주민과 연계성을 가지면서 관광지로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14-03-14 09:42:52관련기사 ☞ 기획연재 [이젠 도시재생이다] 쿠르르릉…." 선탄장에 석탄 덩어리들이 쏟아지면 산 중턱에 돌 구르는 소리가 육중하다. 지하 수천m에서 캐 모은 탄 덩어리들이 수직갱을 통해 굴 밖으로 실려 나오면 산 중턱에 자그마한 검은 산 하나가 또 만들어진다. 이곳은 국내에 몇 남지 않은 '살아 있는' 탄광, 한국석탄공사 산하 철암역두 선탄장(등록문화재 제21호)이다. 국내 최초의 무연탄 선탄시설로 우리나라 산업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이다. 태백 사람들은 석탄공사가 직영하는 이 장성광업소를 '석공'이라고 불렀다. 탄광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야트막한 산 중턱을 온통 석탄 가루가 뒤덮고 있다. 무연탄과 잡석을 분리하고 석탄의 질과 종류를 구분하는 선탄작업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 선탄장과 마주보고 있는 건너편 산 중턱엔 삼방동 마을이 있다. 산비탈을 층층이 깎아 집터를 만들고 이곳에 올망졸망 집들이 들어서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됐다. 양쪽 산봉우리를 사이에 둔 골짜기에는 철암천이 조용히 흐르고 기차역과 상가 밀집지역, 시장이 들어서 철암 마을이 됐다. '철암 탄광역사촌', 태백시가 이름 붙인 이곳엔 역사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아직 생업에 열심인 주민들이 있고, 탄광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그러나 동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쓸쓸한 시골 마을이다. 손님을 기다리는 식당 주인만 얼굴을 내밀고 있는 한적한 길가에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 왔다.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관광열차가 철암역에 도착한 것이다. 빨강 노랑 등산복을 차려입은 도회지 사람들이 새까만 탄가루를 뒤집어쓴 선탄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삼삼오오 역을 빠져나와 100m가량 떨어진 옛날 철암역이 있던 자리에 다다랐다. ▲ 탄광촌의 옛 영화를 상징하는 까치발 건물에서 광부와 아내가 출근길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이제 조형작품으로만 볼 수 있다.철암역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 8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 태백지역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전국으로 발송했던 매우 큰 역이었으나 석탄산업합리화에 따른 석탄생산 감소로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탄광촌이 활황기였던 1970년대엔 서울 명동 거리만큼 붐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이 떠난 한양다방, 봉화식당 같은 빈 건물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에너지산업의 중추였던 1960~1970년대 탄광촌의 그 옛날로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철암이라는 산골 동네에 석탄이 없었다면 여긴 그저 화전민이 살았던 이름 없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대 규모를 다투는 석탄공사, 강원산업 등 주요 탄광이 밀집되면서 여느 도시 못지않은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태백시 인구는 5만명이 채 못되는데 광산이 호황일 때는 12만명에 달해 강원도 최대 도시였다. 어떤 사람은 탄광촌에 발을 들인 이들을 '막장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사람이 몰려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2~3배에 달했고, 연탄과 쌀은 공짜로 제공됐다. 자녀들은 3명까지 대학 학자금을 대줬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1962년엔 이 작은 마을에 서울 종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철암극장까지 등장했다. 다방과 술집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대구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 여주인은 얼굴이 말끔한 사람은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광부들은 탄을 캐다 보면 눈가에 검은 자국이 생기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아 공무원이나 사무원과 확연히 구분됐다. 대구관 여주인은 광부들의 호탕한 씀씀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석공 광부증명만 있으면 술은 얼마든지 외상을 줬다. 시집 오겠다는 처자도 줄을 섰다. 장사가 잘되다 보니 건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철암역 앞엔 노점이 북적거려 매일 장이 섰다. 요즘 서울의 영등포나 동대문에 비견될 만한 문전성시였다. 노점도 부족해 건물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철암천을 등진 상가 밀집지역 건물들은 천변 쪽으로 발코니 형태의 공간을 증축하면서 하천 바닥에 기둥을 세워 떠받쳤다. 이 기둥 모양이 까치발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까치발 건물'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철암의 옛 영화를 증거하는 유물이 됐다. 몇 차례의 태풍으로 많은 까치발 건물이 쓸려 갔지만 현재 10여동이 남아 있어 시는 이 건물들을 보존하기로 했다. ▲ 그 옛날 광부로 일하던 동생에게 급전을 부탁하는 형의 편지.철도 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도 이 까치발 건물이다. 건물들은 주인이 모두 떠나고 허름한 간판만 남았다. "젊음의 양지, 중화요리 진주성, 봉화식당, 호남수퍼…." 최근까지도 영업을 했던 이 건물들의 낡은 겉모양도 앞으로 계속 보존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그냥 폐점한 가게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철암의 옛날을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공간이 펼쳐진다. '호남수퍼'는 현대적 회화를 전시하는 갤러리가 됐고, '진주성'은 특산물 판매점으로 태어났다. 주점인 '젊음의 양지'에는 설치미술, '제일다방' 옥상은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분위기 좋은 목조 전망대로 꾸몄다. 전시물 중에 탄광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고향에 있는 형이 보낸 편지가 눈에 띄었다. 돈이 궁했던 형이 동생에게 거듭 미안한 마음을 전하면서 급전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릴 돈 십만원이 그날이 기한이니 동생이 난처하지만 몇 달만 좀 보아 주었으면…(중략)…5월 25일날 돈을 못 구하게 되면 큰 변이 있을 것 같군. 미안한 말이지만 요사이 집에 있기도 싫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군"(철자 교정·원문 사진 참고) 까치발 건물 뒤로 흐르는 철암천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오르게 된다. 여기가 옛날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 마을이다. 서울의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좁은 골목이 얼기설기 이어져 집 하나 끼고 돌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이 끝났다 싶으면 또 대문이 드러나는 미로 같은 동네다. 지금은 거의 빈집으로 지역 화가들이 그려 놓은 벽화만 낯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골목을 산책 삼아 걷다 보니 어느 한 집에서 아저씨 한 분이 고개를 내민다. "탄광마을을 좋게 꾸며 놓아 구경할 것들이 많아졌다고 해서 찾아온 기자"라고 소개했더니 집안으로 들어 오라며 믹스커피 한 잔을 권했다. ▲ 지역 화가들의 미술작품도 한자리에 모여 탄광역사촌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이 고장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고 있다. 탄광에서 운전직으로 수십년 일했던 고영간씨(66)는 이 마을이 과거에 어땠는지 묻자 금세 얼굴이 밝아지면서 "그땐 참 좋았지요. 탄광에서 보수가 나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들썩거렸으니까"라고 말했다. 고씨는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도시로 보내고 자신과 부인 둘만 삼방동을 지키고 있었다. 고씨는 "이 마을에서 젊을 때부터 살았고 익숙하니까 떠날 생각은 없다"며 "시에서 새롭게 개발해서 좋게 바꿔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로 탄광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철암은 급속히 쇠퇴했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마을을 떠났지만 당시의 마을 풍경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것이 요즘엔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살아 있는 탄광촌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낡은 옛 모습을 쓸어버리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관광객을 받자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탄광촌의 역사가 사라지고 개성도, 사연도 없는 현대식 건물을 보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난날 전국적으로 탄광촌을 리모델링하는 사업이 붐을 이뤘다. 현대화한답시고 탄가루 묻은 옛 건물과 시설을 모두 걷어낸 뒤 잔디밭 깔고 주차장 짓고, 태양열발전 패널을 세웠던 곳들은 현재 아무도 찾지 않는 박제된 시설로 전락했다. 탄광을 재현한다며 세워둔 플라스틱 모조품과 밀랍인형은 불 꺼진 전시실 한쪽을 장식할 뿐이다. 그런데 철암은 다행히 이제 개발을 시작했다. 옛 탄광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역사촌 운영을 맡은 태백탄광문화연구소도 옛 모습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백탄광문화연구소 김기동 대표는 "탄광촌의 옛 영화를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지역주민과 연계성을 가지면서 관광지로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 최경환 팀장 예병정 기자 채진근 영상기자 박범준 사진기자
2014-03-02 17:2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