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영어교육도시 내 국제학교 입학생들의 상당수가 서울의 이른바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출신이며 학비가 연간 5000여만원으로 4년제 사립대학교의 등록금보다 7배 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박주선 의원이 29일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제주영어교육도시 관련 현황'에 따르면 현재 제주영어교육도시 내에는 사립 국제학교 두 개, 공립 국제학교 한 개 등 총 세 개의 국제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사립국제학교인 노스런던컬리지어트스쿨 제주(NLCS jeju)의 경우 내국인 학생 707명 가운데 47.9%인 339명이 서울 출신이었으며, 특히 서울의 강남·서초·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 3구' 출신 학생이 31.0%(219명)에 달했다. 또 다른 사립국제학교인 브랭섬홀아시아(BHA)는 전체 내국인 학생 중 서울 출신 학생이 40.6%, 강남 3구 출신 학생은 23.0%로 나타났으며, 공립국제학교인 한국국제학교 제주(KIS Jeju)는 강남 3구 출신 학생이 17.1%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학교의 등록금과 기숙사비 등을 포함한 학비는 NLCS jeju가 초등학교 과정의 경우 연간 수업료가 2579만원, 중학교 과정은 2700만원, 고등학교 과정은 3253만원이다. 여기에 초등학생 1491만원, 중학생 1615만원, 고등학생 1646만원의 기숙사비를 합하면 연간 학비가 최대 5000여만원에 이른다. BHA도 고등학생의 경우 연간 수업료 3126만원에 기숙사비 1992만원을 합하면 연간 학비가 5100만원이 넘는다. 공립학교인 KIS jeju 조차 고등학생 경우 연간 수업료 1974만원, 기숙사비 1250만원를 합하면 연간 학비가 3300여만원에 달한다. 박 의원은 "제주영어도시 내 국제학교가 부유한 집 자녀가 아니면 다닐 수 없는 귀족학교라는 우려가 현실화되었다"면서 "공립학교로 설립된 한국국제학교마저 연간 3300여만원의 학비를 요구하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차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박 의원은 "또 하나의 귀족학교로 비판받는 로스쿨과 마찬가지로 저소득층에 대한 장학혜택을 늘리는 등 교육기회의 평등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wonder@fnnews.com 정상희 기자
2014-09-29 08:53:50최다니엘이 ‘2013 학교’에 전격 캐스팅됐다. 최근 최다니엘은 KBS2 새 월화드라마 ‘2013 학교(가제)’(극본 이현주,고정원/ 연출 이민홍,이응복/ 제작 학교문화산업전문회사)에 전격 캐스팅돼 장나라와 또 한 번 호흡을 맞춘다. 극 중 최다니엘은 명품 외모, 부드러운 매너, 그리고 유능한 능력으로 학부모와 학생을 열광하게 하는 전직 언어영역 일타강사이자 현직 ‘귀족 기간제 교사’ 강세찬 역으로 캐스팅 된 것. 특히 직설적이면서도 능숙한 언변과 카리스마, 학생들의 능력치를 최대로 이끌어 내는 능력자로 기간제 교사 중에서도 최고 대접을 받으며 들어온 ‘귀족 기간제 교사’ 강세찬을 연기할 최다니엘은 선생의 질이 아이들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믿으며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신자본주의형 신개념 교사상을 그려낼 전망이다. 또한 최다니엘은 극중 임용고시 2% 합격 현실에 치여 ‘푸어(Poor) 기간제 여교사’가 된 정인재 역의 배우 장나라와 KBS2 ‘동안미녀’ 이 후 두 번째 호흡을 맞출 예정이어서 두 사람의 환상 조화가 시청자들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2013 학교(가제)’의 제작사 관계자는 “최다니엘이 엘리트 적인 모습부터 단 번에 학생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까지 두루 갖춘 신개념 교사 강세찬 역할을 잘 소화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또한 장나라와 보여줄 환상 호흡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라고 전했다. 이어 “이번 드라마 ‘2013 학교(가제)‘는 기존 학교 시리즈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정말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교사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학교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가 고민 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고자 하니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라고 차별성을 강조했다. 한편 ‘2013 학교(가제)’는 학교 1의 연출자 이민홍 감독과 드림하이 이응복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으며 10년 만에 부활한 청춘 드라마 ‘학교’ 시리즈의 신화를 뛰어넘을 올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이다.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gnstmf@starnnews.com이슬 기자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starnnews.com
2012-10-23 09:51:17‘중국 학생들이 우리 교복을 입는다.’ 홍종순 에리트베이직 대표이사는 30일 서울 태평로 프라자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중국 귀족학교인 쏭청화메이와 엘리트학생복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귀족학교란 1년 동안 학비로 500만∼2000만원의 학비를 내야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홍대표는 “현재는 1000여명에게 2억원 상당의 9월 신학기용 교복과 10월 동복을 공급할 예정이지만 중국의 사립학교수가 8만여개에 이르고 학생수도 8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할 때 상당히 큰 시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일본 등 해외 교복업체들도 중국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시장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재 중국 교복 시장에 진출한 해외 업체는 에리트베이직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번에 중국에 선보인 에리트교복은 중국 원단을 이용해 중국에서 봉제과정을 거치지만 고품질과 뛰어난 디자인을 인정받아 현지 교복 가격의 3배 정도를 받게된다. 홍대표는 “현재 6개 학교와 협상중에 있으며 연내 5∼10개 학교와 계약, 10억원에서 2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현지에 맞는 기능성 소재를 개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중국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편, 중국 문화부는 오는 2006년 하반기중 세계 각국이 참가하는 학생복 경연대회를 추진하는 등 교복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nanverni@fnnews.com 오미영기자
2005-08-30 13:37:43[파이낸셜뉴스] 배우 이시영(42)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공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시영은 지난 21일 자신의SNS를 통해 6살 아들의 근황이 담긴 사진을 여러 장 올렸다. 이때 사진 속에서 아들의 가방에 새겨져 있던 학교명이 노출됐다. 이시영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인천 송도에 위치한 '채드윅 국제학교'다. 국내에서 학비가 비싼 곳으로 손꼽히는 곳인데, 유치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치는 데 드는 교육비가 약 7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권 통학이 가능하고 외국 거주 조건 없이 내국인 입학이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입학 경쟁률이 높다. 정치권에서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딸이 이 학교 출신이다. 연예계에서는 배우 전지현과 방송인 현영의 자녀가 재학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얼마 전 현영은 해당 학교에 재학 중인 두 자녀 학비로만 연간 1억원을 쓴다며 졸업까지 총 12억원이 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유진·기태영 부부, 김남주·김승우 부부 등 다수의 연예인들도 자녀의 해당 학교 입학을 위해 송도로 이사를 한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이 학교는 모든 과목 수업이 영어로 진행돼 해외 명문대 진학을 준비하는 데 유리하다. 매년 이 학교에서는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 보스턴대 등 세계 유명 대학 합격생이 다수 나오고 있다. 이시영의 각별한 아들 사랑은 유명하다. 앞서 아들을 위해 삼성동에서 인천 송도로 이사갔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10일에는 SNS에 아들을 등에 업고 히말라야 해발 고도 4000m까지 오르는 데 성공했다는 인증샷을 남겨 화제가 됐다. 이시영은 2017년 9살 연상의 요식업 사업가와 결혼해 슬하에 6세 아들을 두고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11-22 16:27:45그룹 방탄소년단이 1일 오후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진행된 '2018 멜론뮤직어워드' 레드카펫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totopurdy_star@fnnews.com fn스타 이승훈 기자
2018-12-01 20:49:46'음악을 한다는 것은 연주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들을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클라우디오 아바도) 국내외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풍월당'을 설립한 박종호(64) 대표는 지난 2021년 발간된 음악 교양서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의 첫 장에 이 문장을 실었다. 당시 클래식이란 무엇이고 왜,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또 무슨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 채 시류와 유행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박 대표는 자신이 문화관광해설사 같은 역할을 할 뿐, 각자의 인생에서 클래식을 탐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람과 달의 운치를 이름에 담은 '풍월당'은 지난 2003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레코드 가게'로 처음 손님을 맞이했다. 이후 클래식 음반 매장이자 카페, 아카데미, 여행 콘텐츠, 기획 출판과 전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객들과 소통하는 인생학교로 진화해왔다. 박종호 대표는 본업인 정신과 전문의를 그만둔 뒤로는 아카데미 강의와 도서 집필 등 풍월당 운영에만 전념하고 있다. ―클래식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클래식은 '클래스'(class)에서 나온 말이다. 또 클래스는 고대 로마시대에 계급을 일컫는 데서 유래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을 6단계의 계급으로 분류했는데, 가장 높은 계급을 라틴어로 '클라시쿠스'(Classicus)라 불렀다. 이후 클래식은 어떠한 분야에서 최상위의 가치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사람들은 음악이나 문학, 저술 분야에서 최상위의 것들을 클래식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걸작, 영구불변의 가치를 지닌 대상들이 클래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클래식 음악에 어떤 가치가 있나. ▲클래식을 고전음악이라고도 부른다. 간혹 지금의 클래식이 과거에는 대중음악이었다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 바흐나 모차르트 시대에도 클래식 음악, 그리고 가요나 민요 등 민중을 위한 음악은 확연히 구별됐다. 클래식 음악은 하나의 정연한 규칙과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에도 여러 음악 중 최상의 형태를 지녔고, 가장 높은 이상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이나 가치관, 인생까지 변화시키는 큰 힘이 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비교한다면. ▲음악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며 우열을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또 나누더라도 의미가 없다. 다만 클래식이 가진 고유의 가치는 말할 수 있다. 클래식에 '고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클래식이 여흥이나 오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기여하고 그 정신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클래식이 귀족의 여흥을 위해 봉사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바로크 시대, 즉 모차르트와 하이든 이전의 이야기였다. 1800년대 이후 100여년이 클래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의 클래식은 즐거움이 아니라 사상을 표현한 음악이었다. 클래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역사상 인류를 선도했던 위인들을 만나는 셈이다. ―클래식의 대중화가 가능할까. ▲사회 곳곳에서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클래식과 대중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단어들이고 의미 자체가 충돌한다. '동쪽의 서쪽화'라는 말이 모순인 것처럼 표면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모차르트는 인간의 숭고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그너는 시대적 혁명의 의미를, 베르디는 조국 독립의 갈망을 자신의 음악에 담으려 했다. 일반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시대적 정신을 지킨 것이어서 클래식으로 평가받았는데 그것이 대중화가 된다면 그 자체로 클래식의 정신이 훼손된 거다. 반대로 '대중의 클래식화'가 돼야 한다고 본다. ―'대중의 클래식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나. ▲클래식을 조미해 원래의 맛을 변형시킨다면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대중이 클래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물론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이 음악회에서 하는 짧은 해설이나 TV나 라디오 프로에서 음악가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긴 시간을 두고 능동적이고 포괄적인 공부를 해서 스스로 음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히려 대중이 개별화돼야 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 본인의 지성에 부합하는 음악을 찾으면 된다. 클래식을 듣는 행위는 내가 선택하고 나의 취향과 즐거움을 위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탐구하고 섭렵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가 필요한가. ▲음악 감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나 악기부터 먼저 배울 것이 아니라, 다른 공부도 필요하다. 특히 역사와 사회, 문학 등 다른 예술 분야를 접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좋다. 결국 음악도 인문학의 하나이며, 음악 감상의 주류가 된 바로크 이후의 클래식은 인문 정신의 총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음악은 그가 살았던 유럽의 정치적 배경과 나폴레옹 전쟁, 귀족 계층의 쇠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명곡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의 나열만이 아니라 심오한 사상의 또 다른 표현들인 것이고 클래식 감상은 위대한 사상을 배우는 인문 공부다. 혹여 지금은 공부 생각이 없더라도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면 저절로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입문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클래식의 세계에 들어갈 때 클래식 감상의 몇 가지 특징을 알아두는 게 좋다. 먼저 클래식 감상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임의로 시간 조절이 가능한 미술 관람이나 독서와 달리 1시간짜리 교향곡이나 3시간짜리 오페라는 공연장에 들어앉은 이상 꼼짝없이 들어야 한다. 또 클래식은 명상하듯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만약 일하거나 놀면서 베토벤을 틀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배경음악으로 그칠 뿐이다. 멜로디를 따라 음악이 진행되는 과정을 들을 줄 알게 되면 음악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클래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지식을 깨우치는 것, 결국 그것이 클래식을 듣는 진짜 이유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2024-11-19 18:26:59‘음악을 한다는 것은 연주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들을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클라우디오 아바도) 국내외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명성이 높은 ‘풍월당’을 설립한 박종호(64) 대표는 지난 2021년 발간된 음악 교양서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의 첫 장에 이 문장을 실었다. 당시 클래식이란 무엇이고 왜,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또 무슨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 채 시류와 유행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박 대표는 자신이 문화관광해설사 같은 역할을 할 뿐, 각자의 인생에서 클래식을 탐험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바람과 달의 운치를 이름에 담은 ‘풍월당’은 지난 2003년 서울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레코드 가게’로 처음 손님을 맞이했다. 이후 클래식 음반 매장이자 카페, 아카데미, 여행 콘텐츠, 기획 출판과 전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고객들과 소통하는 인생학교로 진화해왔다. 박종호 대표는 본업인 정신과 전문의를 그만둔 뒤로는 아카데미 강의와 도서 집필 등 풍월당 운영에만 전념하고 있다. 다음은 박 대표와의 일문일답. ―클래식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클래식은 ‘클래스’(class)에서 나온 말이다. 또 클래스는 고대 로마시대에 계급을 일컫는 데서 유래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을 6단계의 계급으로 분류했는데, 가장 높은 계급을 라틴어로 ‘클라시쿠스’(Classicus)라 불렀다. 이후 클래식은 어떠한 분야에서 최상위의 가치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 사람들은 음악이나 문학, 저술 분야에서 최상위의 것들을 클래식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걸작, 영구불변의 가치를 지닌 대상들이 클래식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클래식 음악에 어떤 가치가 있나. ▲클래식을 고전음악이라고도 부른다. 간혹 지금의 클래식이 과거에는 대중음악이었다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 바흐나 모차르트 시대에도 클래식 음악, 그리고 가요나 민요 등 민중들을 위한 음악은 확연히 구별됐다. 클래식 음악은 하나의 정연한 규칙과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에도 여러 음악들 중 최상의 형태를 지녔고, 가장 높은 이상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이나 가치관, 인생까지 변화시키는 큰 힘이 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비교한다면. ▲음악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며 우열을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또 나누더라도 의미가 없다. 다만 클래식이 가진 고유의 가치는 말할 수 있다. 클래식에 ‘고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클래식이 여흥이나 오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기여하고 그 정신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클래식이 귀족의 여흥을 위해 봉사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바로크 시대, 즉 모차르트와 하이든 이전의 이야기였다. 1800년대 이후 약 100여년이 클래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데, 이때의 클래식은 즐거움이 아니라 사상을 표현한 음악이었다. 클래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역사상 인류를 선도했던 위인들을 만나는 셈이다. ―클래식의 대중화라가 가능할까. ▲사회 곳곳에서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클래식과 대중은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단어들이고 의미 자체가 충돌한다. ‘동쪽의 서쪽화’라는 말이 모순인 것처럼 표면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모차르트는 인간의 숭고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그너는 시대적 혁명의 의미를, 베르디는 조국 독립의 갈망을 자신의 음악에 담으려 했다. 일반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시대적 정신을 지킨 것이어서 클래식으로 평가받았는데 그것이 대중화가 된다면 그 자체로 클래식의 정신이 훼손된 거다. 반대로 ‘대중의 클래식화’가 돼야 한다고 본다. ―‘대중의 클래식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나. ▲클래식을 조미해 원래의 맛을 변형시킨다면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대중이 클래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물론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이 음악회에서 하는 짧은 해설이나 TV나 라디오 프로에서 음악가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긴 시간을 두고 능동적이고 포괄적인 공부를 해서 스스로 음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히려 대중이 개별화 돼야 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 본인의 지성에 부합하는 음악을 찾으면 된다. 클래식을 듣는 행위는 내가 선택하고 나의 취향과 즐거움을 위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탐구하고 섭렵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부가 필요한가. ▲음악 감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나 악기부터 먼저 배울 것이 아니라, 다른 공부도 필요하다. 특히 역사와 사회, 문학 등 다른 예술 분야를 접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좋다. 결국 음악도 인문학의 하나이며, 음악 감상의 주류가 된 바로크 이후의 클래식은 인문 정신의 총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음악은 그가 살았던 유럽의 정치적 배경과 나폴레옹 전쟁, 귀족 계층의 쇠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명곡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의 나열만이 아니라 심오한 사상의 또 다른 표현들인 것이고 클래식 감상은 위대한 사상을 배우는 인문 공부다. 혹여 지금은 공부 생각이 없더라도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면 저절로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입문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클래식의 세계에 들어갈 때 클래식 감상의 몇 가지 특징을 알아두는 게 좋다. 먼저, 클래식 감상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임의로 시간 조절이 가능한 미술 관람이나 독서와 달리 1시간짜리 교향곡이나 3시간짜리 오페라는 공연장에 들어앉은 이상 꼼짝없이 들어야 한다. 또 클래식은 명상하듯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만약 일하거나 놀면서 베토벤을 틀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배경음악으로 그칠 뿐이다. 멜로디를 따라 음악이 진행되는 과정을 들을 줄 알게 되면 음악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클래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지식을 깨우치는 것, 결국 그것이 클래식 듣는 진짜 이유다. ―풍월당의 운영 철학은. ▲지금까지 직업도 나이도 국적도 다양한 사람들이 풍월당과 인연을 맺어왔다.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나 역시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강의를 꾸준히 듣는 회원들 덕분에 풍월당이 유지된다고 봐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운영의 어려움이 커지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풍월한담’이라는 무크지를 발행해 고객들과 연결고리를 이어갔다. 또 유료 구독서비스를 도입해 기획 음반과 예술 서적, 굿즈 등을 매달 구독자들의 집으로 배송한다. 구독자는 4년간 700명까지 늘었다. 강의는 15년째 비공개로 운영 중인데 매년 봄·가을학기로 나눠 진행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 역시 클래식으로 안내하는 부수적인 방법들에 지나지 않는다. 클래식의 가치를 공유하고 함께 공부해나가는 일의 본질을 함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2024-11-19 13:13:59[파이낸셜뉴스] 전국 의과대학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들이 정부에 의대 증원 정책을 중단하고 학습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18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국의대생학부모연합은 17일 오후 4시께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일부 언론 기사처럼 의대생 자녀를 특혜받는 ‘금쪽이’로 키우고 싶지 않고, 드러누워도 면허를 받는 ‘천룡인’으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학교로 돌아가 수업을 받게 하고 싶을 뿐”이라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천룡인은 일본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귀족 계층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이날 학부모연합은 ‘사회주의 좌파 학자와 관료에게 놀아난 포퓰리즘 정책 중단하라’ ‘의료 체계 붕괴 정책 전면 중단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10년 전부터 지켜온 대입 사전 예고제를 무시하고 사교육을 조장하는 2025년 급격한 의대 증원 정책을 멈춰달라. 1만8000명 의대생의 학습권을 보장하라. 당장 내년 3월 3~4배 늘어난 25학번 의대 신입생의 교육 공간이 마련되는지, 그 예산은 어디서 나오는지 묻고 싶다”고 주장했다. 또 학부모연합은 교육부가 앞서 발표한 ‘의대 학사 탄력 운영 가이드라인’에 대해 “F 학점을 진급시켜 3학기 제로 ‘I(Incomplete·미완)’ 학점까지 만들며 오직 24학번을 진급시키겠다는 목적”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의대생 진급만을 위한 이 같은 특례 조치가 대학 교육 전체를 망칠 것이다. 바라지도 않는 교육부의 특례 조치와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으면 제적시키겠다’는 대학 총장 발언은 학부모들의 분노를 일으킬 뿐이다. (의대생 자녀가) 부실 교육으로 실력 없는 의사가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많은 의대생이 여전히 학교 수업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텔레그램에서 복귀한 것으로 추정되는 학생 명단이 공개되며 파문이 인 바 있다. 지난 7일 텔레그램에 개설된 ‘의사-의대생 선생님 감사합니다’라는 이름의 채팅방에는 학교에 복귀한 의대생과 병원으로 돌아간 의사 등의 실명이 담긴 명단이 올라왔다. 21개 의대에서 총 95명의 이름과 학년 등 정보가 공개됐다. 이와 관련해 경찰은 이를 유출한 의사와 의대생 등 13명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로 지난 15일 불구속 송치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07-18 15:36:56부산 영도(影島)는 영도다리, 태종대, 봉래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14.13㎢이며 2000년 13.95㎢에서 매립으로 0.18㎢ 늘어났다. 인구는 2024년 현재 10만6108명으로 2013년 13만5816명 이후 꾸준히 줄었다. 부산 구도심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보인다. 10만명은 유지했으면 한다. 영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절영도(絶影島)다. 명마들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거의 절영(絶影), 절영도(絶影島)로 나온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장이 있어서 목도(牧島), 목지도(牧之島)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도로 부르면서 그림자 섬이 되었다. 1960년경 부산 해도에 봉래산이 목도산(牧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도가 목도(牧嶋)로도 불린 것이다. 모두 목마장과 연관된다. 영도 목마장 기록은 신라 성덕왕과 김유신 장군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당시 조정과 진골 귀족들이 마장을 운영했다. 명마는 군사와 운송 용도는 물론, 귀족의 자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영도를 제주 말의 임시 거처로 삼고 군사 훈련에 임했다. 영도의 지형은 내륙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봉래산(395m), 남쪽 동삼동의 진후산(150m), 그리고 태종대 해안의 태종산(252m) 등 3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룬다. 해안에서는 해식애, 간석지와 평야, 자갈해안 등이 펼쳐진다. 섬의 북쪽은 완만해 부산 도심과 연계되면서 도시화가 잘 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산지와 식생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영도는 남서-북동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부산항의 천연의 방파제 기능을 한다. 그 징표로 영도의 서부해안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식애와 좁은 자갈 해안들이 발달해 있다. 영도는 중심지에 인접한 주요 주거지가 되었다. 항만 해안가에는 조선업, 선박수리와 장비 관련 산업체가 집중했다. 항만 관련 창고업도 성행했다. 해방되면서 부산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 해방과 6·25전쟁으로 북한 사람들의 남하 영향이 컸다. 급격한 인구와 인구밀도 증가로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다.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 했고 이름에 가마솥(釜)이 있어 그런가 우스개 말들을 했다. 유명한 사건들로 국제시장 화재(1953년 1월), 부산역전앞 화재(1953년 11월), 그리고 용두산, 영주동 피란민촌 화재(1953년 12월) 등이 있다. 영도는 피란민과 화재 재난민들의 입주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경남인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부산은 산업과 학업의 중심지였다. 1960년대 부산은 선박과 해양, 그리고 합판, 신발 산업 등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했다. 한국 조선공업은 부산이 기원이다. 1930년대 조선중공업과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가 이를 주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북양 명태나 남양 참치잡이 등으로 원양업 종사자도 많았다. 영도는 이를 위한 공단과 주거지를 제공했다. 해양수산 사업이 많은 부산은 안전을 하늘과 신선에 기원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영도의 동이름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봉래동(蓬萊洞), 신선동(神仙洞), 영선동(瀛仙洞), 청학동(靑鶴洞)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대평동(大平洞), 남항동(南港洞), 대교동(大橋洞)은 개항 이후 간척과 매립, 항만건설, 영도대교 설립에서 유래하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동명들이다. 영도는 신선사상과 현대화가 대조적으로 지명에 반영되어 있다. 동삼동(東三洞)은 섬 동쪽에 상리, 중리, 하리 등 세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삼동은 영도 면적의 57%, 인구의 40%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다. 중리 지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도의 인구와 시설이 밀집하면서 도심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자연지형과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동삼동이 도시화된다. 교육시설만 보아도 초등학교 6개, 중학교 3개, 고교 5개, 대학 캠퍼스 3개가 자리잡았다. 동삼동은 교육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봉래산은 영도에서 중심적 지형 요소다. 봉래산의 산신 '고갈 할매'는 영도 주민들의 바닷가 안전과 살림살이 등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복천사를 비롯해 30여개의 사찰이 밀집해 있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부산에 대략 500명의 해녀가 있었고, 그중에서 150명이 영도에 살았다. 영도의 영선동과 동삼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더러는 영도를 작은 제주라고 했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는 영도 해안길을 제2송도, 즉 이송도(二松島)라 불렀다. 여기서 해녀들의 물길질과 해변 노상판매가 이루어졌다. 영도 해녀촌과 해녀문화전시관이 그 역사를 기념한다. 부산 영도에는 해운과 수산에 관련된 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박물관 등이 몰려있다.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연구원,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해양환경교육원, 국립해양박물관, 해녀문화전시관,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선 영조시대 문신 조엄은 1764년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영도에서 최초 재배했다. 고구마 재배가 성공해 전국으로 확대되고 쌀, 보리, 감자와 함께 주작물로 자리잡았다. 영도의 고구마를 조엄과 연관해 조내기고구마라 하고, 조내기마을도 있었다. 근래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부산은 임진왜란의 시작지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가덕도 응봉의 연대봉(煙臺峰)에서 왜군들의 부산포 접근을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했다. 부산 첨사 정발도 13일 오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왜선들을 발견했다. 조공선으로 알고 느긋하다가 왜선의 조총소리에 놀라 대피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에 1592년 4월 15일 왜선 90여척이 절영도 해안에 정박했다고 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는 왜선 350척이 이미 절영도 건너 부산포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4월 16일 원균은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영도의 최고 명승지는 역시 태종대라 하겠다. 남해안과 대마도가 보인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다녀간 곳이다. 해식애 절벽, 해안단구, 그리고 파랑과 남해안 전망이 빛난다. 해식애에는 자살바위로 불리는 곳도 있다. 인근에는 인명을 구한다는 사찰 구명사(求命寺) 가 있다. 태종대 외에도 봉래산, 송남사 등 영도의 많은 곳에서 바다와 해안을 전망할 수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4-07-01 18:22:24부산 영도(影島)는 영도다리, 태종대, 봉래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14.13㎢이며 2000년 13.95㎢에서 매립으로 0.18㎢ 늘어났다. 인구는 2024년 현재 10만6108명으로 2013년 13만5816명 이후 꾸준히 줄었다. 부산 구도심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보인다. 10만명은 유지했으면 한다. 영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절영도(絶影島)다. 명마들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거의 절영(絶影), 절영도(絶影島)로 나온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장이 있어서 목도(牧島), 목지도(牧之島)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도로 부르면서 그림자 섬이 되었다. 1960년경 부산 해도에 봉래산이 목도산(牧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도가 목도(牧嶋)로도 불린 것이다. 모두 목마장과 연관된다. 영도 목마장 기록은 신라 성덕왕과 김유신 장군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당시 조정과 진골 귀족들이 마장을 운영했다. 명마는 군사와 운송 용도는 물론, 귀족의 자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영도를 제주 말의 임시 거처로 삼고, 군사 훈련에 임했다. 영도의 지형은 내륙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봉래산(395m), 남쪽 동삼동의 진후산(150m), 그리고 태종대 해안의 태종산(252m) 등 3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룬다. 해안에서는 해식애, 간석지와 평야, 자갈해안 등이 펼쳐진다. 섬의 북쪽은 완만해 부산 도심과 연계되면서 도시화가 잘 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산지와 식생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영도는 남서-북동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부산항의 천연의 방파제 기능을 한다. 그 징표로 영도의 서부해안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식애와 좁은 자갈 해안들이 발달해 있다. 영도는 중심지에 인접한 주요 주거지가 되었다. 항만 해안가에는 조선업, 선박수리와 장비 관련 산업체가 집중했다. 항만 관련 창고업도 성행했다. 해방 되면서 부산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 해방과 6·25전쟁으로 북한 사람들의 남하의 영향이 컸다. 급격한 인구와 인구 밀도 증가로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다.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 했고 이름에 가마솥(釜)이 있어 그런가 우스개 말들을 했다. 유명한 사건들로 국제시장 화재(1953년 1월), 부산역전앞 화재(1953년 11월), 그리고 용두산, 영주동 피난민촌 화재(1953년 12월) 등이 있다. 영도는 피난민과 화재 재난민들의 입주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경남인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부산은 산업과 학업의 중심지였다. 1960년대 부산은 선박과 해양, 그리고 합판, 신발 산업 등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했다. 한국 조선공업은 부산이 기원이다. 1930년대 조선중공업과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가 이를 주도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북양 명태나 남양 참치잡이 등으로 원양업 종사자도 많았다. 영도는 이를 위한 공단과 주거지를 제공했다. 해양수산 사업이 많은 부산은 안전을 하늘과 신선에 기원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영도의 동이름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봉래동(蓬萊洞), 신선동(神仙洞), 영선동(瀛仙洞), 청학동(靑鶴洞)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대평동(大平洞), 남항동(南港洞), 대교동(大橋洞)은 개항 이후 간척과 매립, 항만건설, 영도대교 설립에서 유래하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동명들이다. 영도는 신선사상과 현대화가 대조적으로 지명에 반영되어 있다. 동삼동(東三洞)은 섬 동쪽에 상리, 중리, 하리 등 세 마을이 있다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동삼동은 영도 면적의 57%, 인구의 40%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다. 중리 지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도의 인구와 시설이 밀집하면서 도심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자연지형과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동삼동이 도시화된다. 교육시설만 보아도 초등학교 6개, 중학교 3개, 고교 5개, 대학 캠퍼스 3개가 자리잡았다. 동삼동은 교육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봉래산은 영도에서 중심적 지형 요소다. 봉래산의 산신 ‘고갈 할매’는 영도 주민들의 바닷가 안전과 살림살이 등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복천사를 비롯해 약 30여개의 사찰들이 밀집해 있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부산에 대략 500명의 해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150명이 영도에 살았다. 영도의 영선동과 동삼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더러는 영도를 작은 제주라고 했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는 영도 해안길을 제2송도, 즉 이송도(二松島)라 불렀다. 여기서 해녀들의 물길질과 해변 노상판매가 이루어졌다. 영도 해녀촌과 해녀문화전시관이 그 역사를 기념한다. 부산 영도에는 해운과 수산에 관련된 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박물관 등이 몰려있다.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연구원,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해양환경교육원, 국립해양박물관, 해녀문화전시관,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선 영조시대 문신 조엄은 1764년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영도에서 최초 재배했다. 고구마 재배가 성공해 전국으로 확대되고 쌀, 보리, 감자와 함께 주작물로 자리잡았다. 영도의 고구마를 조엄과 연관해 조내기 고구마라 하고, 조내기 마을도 있었다. 근래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부산은 임진왜란의 시작지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가덕도 응봉의 연대봉(煙臺峰)에서 왜군들의 부산포 접근을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했다. 부산 첨사 정발도 13일 오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왜선들을 발견했다. 조공선으로 알고 느긋하다가 왜선의 조총소리에 놀라 대피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에 1592년 4월 15일 왜선 90여척이 절영도 해안에 정박했다고 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는 왜선 350척이 이미 절영도 건너 부산포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4월 16일 원균은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영도의 최고 명승지는 역시 태종대라 하겠다. 남해안과 대마도가 보인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다녀간 곳이다. 해식애 절벽, 해안단구, 그리고 파랑과 남해안 전망이 빛난다. 해식애에는 자살바위로 불리는 곳도 있다. 인근에는 인명을 구한다는 사찰 구명사(求命寺) 가 있다. 태종대 외에도 봉래산, 송남사 등 영도의 많은 곳에서 바다와 해안을 전망할 수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7-01 13:3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