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 제임스 쿡 선장(1728~1779)이 내놓은 항해기에는 폴리네시아섬 사람들의 문신(文身)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후 폴리네시아에 식민지를 소유한 프랑스 의사들이 피부병과 관련해 문신에 대한 연구작업을 시작했다. 파리인류학회가 간행했던 '파리인류학회잡지'(1860년)에 실린 에흐네스트 베흐숑의 '마르케사스 섬의 타투'가 인류학 분야 최초의 문신 연구논문이며, 그의 단행본인 '타투의 의료사'(1869년)가 전해진다. 항해외과의사였던 베흐숑은 식물학자이면서 폴리네시아를 탐험하고 문신의 정보를 담았던 아돌프 레송의 '망가레바 섬의 탐험'(1844년)을 참고했다. 1850년대까지 모든 섬 사람들이 문신을 하고 있었다는 정보는 환상을 넘어서는 면전에 펼쳐지는 장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베흐숑의 연구에 이어서 폴리네시아 전문의 인류학자인 윌로딘 핸디가 '마르케사스의 타투'(1922년)라는 소책자를 하와이의 비숍박물관에서 발행했다. 마르케사스의 타투 전문가는 '투후나'이고, 야자 기름이 중요한 재료이며, 12세가 되면 시행하는 타투의 각종 문양에 대한 명칭들을 소상하게 소개했다. 피부질환의 문제로 의사들의 주목을 받았던 문신은 근대화의 위생이라는 개념 앞에 무릎을 꿇고 사라진 역사가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부활하는 문신을 문화재생운동으로 볼 것인가? 인공지능(AI)이 장착된 문화유산 재창조의 길이 열릴 것인가? 마르케사스가 타투 연구의 발상지이며, 이후 잠깐 전파론자들의 주종목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폴리네시아로부터 미크로네시아로, 이어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전파된 타투에 관심을 갖게 된다. 피부가 검은색인 블랙아프리카와 멜라네시아에서는 문신의 보고가 없다. 도쿄대학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했던 해양동물학자 루트비히 되덜라인이 1880년 관찰한 아마미오시마의 왼 손등 사례가 동아시아 최초의 타투인데, 마르케사스의 문양과 너무나 흡사하다. 한반도에서는 '신체발부수지부모'로 표현된 주자학 사상의 도입이 과거에 있었던 문신 관습을 지워버린 것으로 생각되며, 자청(刺靑)이나 입묵(入墨)으로 기록된 우리나라의 문신은 죄인의 표시로 인식되어 왔다. 깡패나 야쿠자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문신 또는 타투는 단순한 상업적인 유행의 범주를 넘어서서, 지역마다 존재 이유가 명확한 문화유산임이 확인된다. 마오리의 전사들은 적에 대한 위협으로, 타히티와 이푸가오(필리핀) 및 아이누의 여성들은 성인식과 악귀로부터의 보호, 오키나와와 아마미오시마의 여성들은 성인식으로 왼 손등에, 혼례 이후에는 오른 손등에 입묵을 하였다. 각종 사회적 및 신앙적인 관습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이 문신이고 타투이며, 그 저변에는 발굴을 기다리는 철학과 사상과 미학이 간직되어 있다. 따라서 당연히 문신 전문가의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며 특별한 도구가 사용된다. 문양의 의미가 문화전통의 핵심적 요소로 전승되기 때문에 문신은 집단의 아이덴티티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점도 중요한 측면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 항목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었던 정책이 문신 금지령이었던 것은 문화말살(cultural genocide)을 거론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집단 정체성이 신체화(身體化)로 표현된 강력한 생물문화적 상징으로 인식된 문신이었기 때문에, 식민통치자들의 일차적 탄압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푸가오의 문신 바늘(푼바톡·punbatok)은 목제 손잡이 끝에 철제 바늘이 꽂혀 있고, 바늘의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다. 다양한 문양의 디자인에는 별을 그린 '비닛투원'(binittuwon), 전갈 문양인 '호모호모'(homo-homo), 개를 그린 '키나카후'(kinah-ka-huh), 대형 고사리 문양인 '이납압아팟'(inap-ap-apat), 지네 문양인 '기나이가얌'(ginay-gayam), 번개를 상징하는 '티닉틱쿠'(tiniktikku), 사람 모양인 '타나구타구'(tanagu-tagu) 등이 있다. 문신 기술은 비전의 상속 재산이었다. 도쿄 아사쿠사의 센소지(淺草寺)에서 개최되는 여름 마쓰리는 자기 동네의 신을 태운 100개 팀의 가마가 참여한다. 2004년에 만났던 30여명으로 구성된 한 팀은 전원이 전신에 울긋불긋한 문신을 했다. 정수리부터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채로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가마를 메고 들썩이는 청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들은 야쿠자냐?"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모르는 것이 특권으로 인식될 때가 있다. 한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그는 "아니다. 우리는 한 동네 사람들이다"라는 답이었다. 동네의 목욕탕(센토)에 가면 거의 모든 사람이 다 문신을 한 상태라면서, 대화가 이어졌다. 전신의 문신을 하는 데 8년이 소요되었으며, 금액은 3000만엔이 들었단다. 그 동네의 할머니 한 분이 가장 아름다운 전신 문신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동네로 오면 안내하겠다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그 옆의 청년은 미완성의 검은색 밑그림만 그린 상태였다. 앞으로 채색 작업의 시간과 자금 투자가 남았단다. 동남아시아의 타투에 관한 서적을 제작한 바 있는 부경환군과 함께 2019년 7월 요코하마의 타투 전문점을 찾았다. 노련한 전문가는 문신과 관련된 문헌과 실물 자료들을 진열한 박물관 같은 별도의 공간을 갖추었고, 시술 장면의 참관이 허락되었다. 전문가도 정수리부터 전신의 문신을 갖추고 있었다. 아픔을 참고 엎드린 청년은 밑그림 시술의 마지막 단계의 과정에 있었다. 남매의 가장인 그는 문신을 함으로써 생활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중에는 히키코모리 상태로 주저앉은 이들이 200만명이라는 통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수없이 반복되었던 문화말살의 식민지 탄압정책으로 희생된 문화 항목들은 문신만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을 구가하던 시절에 '헌마을'이 생겨났고, '헌마을'의 살림살이는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던 광경이 안전에서 펼쳐진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승자의 업적만을 축적한 역사가 가려버린 인류문화의 뒷골목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승자와 패자의 갈라치기로 역사를 재단하는 삶의 방식이 지고선인가? 주자학의 도배로 묻혀버린 신앙과 사상에 이어서 근대화의 파도에 휩쓸려버린 살림살이는 쓰레기인가? 경복궁의 기왓장과 주춧돌과 백제 왕릉은 유형유산이고, 봉산탈춤과 종묘제례는 무형유산이란다. 사람이라는 동물체가 춤을 추고, 대금이라는 악기의 물체가 소리를 내는데, 사람도 대금도 모두 형체가 없는 '무형'으로 간주하는 물신숭배의 문화유산 정책이 왜곡의 현대적 원흉이 아닌가. 눈 뜬 사람 코 베어갈 일이다. 왜곡 다음은 화석화고, 화석화 다음엔 말살이 온다. 패자의 살림살이 속에 진정한 역사가 간직되어 있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2025-04-28 18:18:2018세기 말 제임스 쿡 선장(1728~1779)이 내놓은 항해기에는 폴리네시아 섬 사람들의 문신(文身)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후 폴리네시아에 식민지를 소유한 프랑스의 의사들이 피부병에 관련해 문신에 대한 연구작업을 시작했다. 파리인류학회가 간행했던 '파리인류학회잡지'(1860년)에 실린 에흐네스트 베흐숑의 ‘마르케사스 섬의 타투’가 인류학 분야 최초의 문신 연구 논문이며, 그의 단행본인 '타투의 의료사'(1869년)가 전해진다. 항해외과의사였던 베흐숑은 식물학자이면서 폴리네시아를 탐험하고 문신의 정보를 담았던 아돌프 레쏭의 '망가레바 섬의 탐험'(1844년)을 참고했다. 1850년대까지 모든 섬 사람들이 문신을 하고 있었다는 정보는 환상을 넘어서는 면전에 펼쳐지는 장관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베흐숑의 연구에 이어서 폴리네시아 전문의 인류학자인 윌로우딘 핸디가 '메르케사스의 타투'(1922년)라는 소책자를 하와이의 비숍박물관에서 발행했다. 마르케사스의 타투 전문가는 ‘투후나’이고, 야자 기름이 중요한 재료이며, 12살이 되면 시행하는 타투의 각종 문양에 대한 명칭들을 소상하게 소개했다. 피부 질환의 문제로 의사들에 의해서 주목받았던 문신은 근대화의 위생이라는 개념 앞에 무릎을 꿇고 사라진 역사가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부활하는 문신을 문화재생운동으로 볼 것인가? AI가 장착된 문화유산 재창조의 길이 열릴 것인가? 마르케사스가 타투 연구의 발상지이며, 이후 잠깐 전파론자들의 주종목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폴리네시아로부터 미크로네시아로, 이어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전파된 타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피부가 검은색인 블랙아프리카와 멜라네시아에서는 문신의 보고가 없다. 도쿄대학에서 초빙교수로 근무했던 해양동물학자 루드비히 되덜라인이 1880년 관찰한 아마미오오시마의 왼손 등 사례가 동아시아 최초의 타투인데, 마르케사스의 문양과 너무나 흡사하다. 한반도에서는 ‘신체발부수지부모’로 표현된 주자학 사상의 도입이 과거에 있었던 문신 관습을 지워버린 것으로 생각되며, 자청(刺靑)이나 입묵(入墨)으로 기록된 우리나라의 문신은 죄인의 표기로 인식되어 왔다. 깡패나 야쿠자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문신 또는 타투는 단순한 상업적인 유행의 범주를 넘어서서, 지역마다 존재 이유가 명확한 문화유산임이 확인된다. 마오리의 전사들은 적에 대한 위협으로, 타히티와 이푸가오(필리핀) 및 아이누의 여성들은 성인식과 악귀로부터의 보호, 오키나와와 아마미오오시마의 여성들은 성인식으로 왼손 등에, 혼례 이후에는 오른손 등에 입묵을 하였다. 각종 사회적 및 신앙적인 관습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것이 문신이고 타투이며, 그 저변에는 발굴을 기다리는 철학과 사상과 미학이 간직되어 있다. 따라서 당연히 문신 전문가의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며, 특별한 도구가 사용된다. 문양의 의미가 문화전통의 핵심적인 요소로 전승되기 때문에, 문신은 집단의 아이덴티티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점도 중요한 측면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 항목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었던 정책이 문신 금지령이었던 것은 문화말살(cultural genocide)을 거론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집단 정체성이 신체화(身體化)로 표현된 강력한 생물문화적 상징으로 인식된 문신이었기 때문에, 식민통치자들의 일차적 탄압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푸가오의 문신 바늘(푼바톡, punbatok)은 목제 손잡이 끝에 철제 바늘이 꽂혀 있고, 바늘의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다. 다양한 문양의 디자인에는 별을 그린 ‘비닛투원’(binittuwon), 전갈 문양인 ‘호모-호모’(homo-homo), 개를 그린 ‘키나카후’(kinah-ka-huh), 대형 고사리 문양인 ‘이납압아팟’(inap-ap-apat), 지네 문양인 ‘기나이-가얌’(ginay-gayam), 번개를 상징하는 ‘티닉틱쿠’(tiniktikku), 사람 모양인 ‘타나구-타구’(tanagu-tagu) 등이 있다. 문신 기술은 비전의 상속 재산이었다. 도쿄 아사쿠사의 센소지(浅草寺)에서 개최되는 여름 마츠리는 자기 동네의 신을 태운 100팀의 가마가 참여한다. 2004년에 만났던 30여명으로 구성된 한 팀은 전원이 전신에 울긋불긋한 문신을 했다. 머리 정수리부터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채로 구름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 사이로 꿈틀 거리는 용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 가마를 메고 들썩이는 청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들은 야쿠자냐?”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인터뷰를 하다 보면, 모르는 것이 특권으로 인식될 때가 있다. 한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그는 “아니다. 우리는 한 동네 사람들이다”라는 답이었다. 동네의 목욕탕(센토)에 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문신을 한 상태라면서, 대화가 이어졌다. 전신의 문신을 하는데 8년이 소요되었으며, 금액은 3000만엔 들었단다. 그 동네의 할머니 한 분이 가장 아름다운 전신 문신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동네로 오면 안내하겠다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그 옆의 청년은 미완성의 검은색 밑 그림만을 그린 상태였다. 앞으로 채색 작업의 시간과 자금 투자가 남았단다. 동남아시아의 타투에 관한 서적을 제작한 바 있는 부경환군과 함께 2019년 7월 요코하마의 타투 전문점을 찾았다. 노련한 전문가는 문신과 관련된 문헌과 실물 자료들을 진열한 박물관 같은 별도의 공간을 갖추었고, 시술 장면의 참관이 허락되었다. 전문가도 정수리부터 전신의 문신을 갖추고 있었다. 아픔을 참고 엎드린 청년은 밑그림 시술의 마지막 단계의 과정에 있었다. 2남매의 가장인 그는 문신을 함으로써 생활의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 중에는 히키고모리 상태로 주저앉은 이들이 200만명이라는 통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수없이 반복되었던 문화말살의 식민지 탄압 정책으로 희생된 문화 항목들은 문신만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을 구가하던 시절에 ‘헌마을’이 생겨났고, ‘헌마을’의 살림살이는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던 광경이 안전에서 펼쳐진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승자의 업적만을 축적한 역사가 가려버린 인류문화의 뒷골목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승자와 패자의 갈라치기로 역사를 재단하는 삶의 방식이 지고선인가? 주자학의 도배로 묻혀버린 신앙과 사상에 이어서 근대화의 파도에 휩쓸려버린 살림살이는 쓰레기인가? 경복궁의 기왓장과 주춧돌과 백제 왕릉은 유형유산이고, 봉산탈춤과 종묘제례는 무형유산이란다. 사람이라는 동물체가 춤을 추고, 대금이라는 악기의 물체가 소리를 내는데, 사람도 대금도 모두 형체가 없는 '무형'으로 간주하는 물신숭배의 문화유산 정책이 왜곡의 현대적 원흉이 아닌가. 눈 뜬 사람 코 베어갈 일이다. 왜곡 다음은 화석화고, 화석화 다음엔 말살이 온다. 패자의 살림살이 속에 진정한 역사가 간직되어 있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5-04-25 11:22:49[파이낸셜뉴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안동병산서원에서 KBS 드라마 촬영팀이 소품 설치를 위해 건축물 기둥에 못을 박은 일이 알려져 논란이다. KBS는 2일 이 문제가 일파만파 커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고, 정확한 피해 확인과 수습 대책을 진지하게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KBS 측은 입장문을 통해 "제작진은 지난 연말 안동병산서원에서 사전 촬영 허가를 받고, 소품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현장 관람객으로부터 문화재에 어떻게 못질을 하고 소품을 달수 있느냐는 내용의 항의를 받았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이유 불문하고 현장에서 발생한 상황에 대해 KBS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현재 정확한 사태 파악과 복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논의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해당 드라마 관계자는 병산서원 관계자들과 현장 확인을 하고 복구를 위한 절차를 협의 중에 있다"며 "앞으로 재발 방지 대책과 추가로 발생할 수 있는 피해 상황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건축가 민서홍씨 "한옥 살림집에서도 못 하나 박으려면 주저하는데..." 앞서 건축가인 민서홍씨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병산서원 목격담을 기록한다'며 드라마 스태프들이 소품 등을 달기 위해 나무 기둥에 못을 박고 있었다는 내용의 게시글을 올렸다. 그는 지난 12월 30일 오후 3시경 병산서원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드라마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병산서원은 사적 제26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소중한 문화재이기에 조금은 불쾌한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고 돌이켰다. 이어 "황당한 상황을 목격했다"며 "서원 내부 여기저기에 드라마 소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몇몇 스태프들이 등을 달기 위해 나무 기둥에 못을 박고 있었다. 둘러보니 이미 만대루의 기둥에는 꽤 많은 등이 매달려 있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중년의 신사분이 스태프들에게 항의하고 있었고, 가만 보고 있을 수 없어 나도 문화재를 그렇게 훼손해도 되느냐며 거들었다"고 전했다. 이후 그는 안동시청 문화유산과,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에 신고하고, MBC, JTBC 등 언론에 제보하고, 연세대 이모교수와 홍익대 윤모교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하던 중,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며 "특히 근대 유적지에서는 촬영을 목적으로 기둥이나 벽들을 해체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는 더욱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우려를 표했다. "쉽게 생각하면 못 좀 박는게 대수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옥 살림집에서도 못하나 박으려면 상당히 주저하게 되는데 문화재의 경우라면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며 "또한 문화재를 촬영장소로 허락해주는 것도 과연 올바른 일일까 의문이다"고 꼬집었다. "더욱이 공영방송 KBS의 드라마 촬영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개탄스럽다"고 부연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5-01-02 17:30:56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면서 중등 교과서에도 실린 '메밀꽃 필 무렵'과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로 잘 알려진 작가 가산 이효석(1907~1942)은 근현대 문학가 중에서 구체적으로 지리와 지리적 개념을 많은 작품과 글에 직접 언급한 보기 드문 작가다. 이효석은 태생적인 자연미(自然美)를 존중하면서도 '첨단의 도시미(都市美)'에도 천착한다. 자연미와 도시미, 서구미(西歐美) 등과 함께 도시와 농촌, 산골, 해안, 대하천 등에 있어서 장소와 지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분석과 기술이 탁월하다. 이효석은 한국 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비교하면서 풍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위도와 지리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 풍토 내지 문학과 기후는 결코 새로운 제목은 아닐 것이다. 풍토와 기후는 생활을 규정하고, 생활을 비추어낸 것이 문학일지니 문학과 풍토의 관련은 심히 큰 것이다. 격정이 없는 이 가난한 풍토와 거세된 환경에서 발자크적 훌륭한 문학을 낳는다는 것은 극난의 일이다."(수필 '북위 42도' 중) 작가는 1907년 강원 평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평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봉평의 자택과 거리가 40㎞ 떨어져 있는 학교 인근에서 하숙을 했다고 하는데, 이 초등학교가 평창군에서 유일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친은 진부면장을 지내고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친의 직장(교육직 공무원)으로 인해 경성(서울)에서 잠시 살았지만 다시 평창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입학을 한다. 그 후 경기고보와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도서과 검열계에 취업해 있는 동안, 서울에서 1920년부터 1930년까지 10년을 살았다. 이효석은 또 1931년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신의 미술학도 이경원과 결혼을 하면서 함경북도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약 4년을 살게 된다. 그 뒤 이효석은 1934년부터 1942년 세상을 뜰 때까지 평양에서 지내게 된다. 평양에서는 숭실전문학교(1936~1938)와 대동공업전문학교(1939~1942) 영어과 교수로 재직했다. 사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함북 경성과 평양에서 만들어졌다. 경성과 평양에 있는 동안에는 만주와 연해주 등을 자주 여행했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만주와 연해주 외 일본, 중국 등 가까운 해외 방문 관련 내용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평양에 대한 작품들에서 대동강 지형, 평양의 문화유적, 대동강 보트 놀이, 평양의 식당, 다방, 꽃집, 주점, 공연장들은 평양의 도시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언급된 시설들이다. 그는 다방을 비롯한 주점과 요정도 늘어나서 평양의 중심가가 번성하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물위' '유도소식' 등). 또한 대동강, 을밀대, 부벽루, 전금문(轉錦門), 청류정(淸流亭), 대성산 고구려 유적 등의 명승과 문화유산 등을 묘사한다('은은한 빛'). 그 외 반월도('물위'), 주암산('유도소식') 등의 자연 경관들도 언급된다. 평양의 도시 구조와 인접한 근교와 원교를 결합한 거대 도시권에 대한 의견도 가진다. "광장이 있고 언덕이 있으며 폭포가 있고 호수가 있어서(…) 호수에 배를 띄우고 광장에 홀을 만들고 조명을 밝히고(…) 온갖 근대시설을 갖춘다면(…) 평양이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로 발전하여(…) 평양은 가까이에 강을 끼고 있으니 행복한 줄 알아야(…) 여름철에 평양부 인구의 몇 분의 일이 (여기서) 살다시피한다."('물위' 중) '메밀꽃 필 무렵'을 제외하면 그의 다양하고 방대한 작품들은 대부분 현대적, 도시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의 일상생활 장소와 지역들은 도시, 도심지와 교외 주택, 휴양지, 국내외 여행지 등이 주류를 이룬다. 도회적, 모더니즘적 취향이 많았던 이효석의 작품에서 도시적인 '경물(景物)'에 대한 것이 많다. 작품에 언급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커피(자바, 모카 등 품종도 언급), 맥주, 위스키, 포도주, 머루주, 아파트, 호텔, 백화점, 서점, 다방, 레스토랑, 카바레, 방송국, 신문사, 음악 연주홀, 영화관, 토키(talkie), 대학 강의실, 만찬, 정원수, 보일러, 욕실, 목욕실, 목욕통, 보트, 별장, 극장, 냉난방, 온실산 양딸기, 잼, 소시지, 버터, 통조림, 우유, 크리스마스 트리, 색 전기(크리스마스 트리 전구), 스키, 스케이트, 등산 피켈 등이 보인다. 이러한 용어들은 지금으로 보아도 그리 오래되거나 낯설지 않고, 경제적 수준 면에서도 높은 편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앞선 '댄디보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셈이다. 이효석의 잘 알려진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는 그의 서구적 모더니즘을 매우 잘 보여준다. 어두운 식민지 시절에 이러한 낭만적인 모습을 글로 남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혹은 어두운 시기를 기피하면서 개인적인 생활에 은닉되는 모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0여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 시중은 조련치 않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낟은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 전기로 장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특별한 예를 들면 그의 수필 '채롱'(조선일보 1938년 4월 28일~5월 5일)의 '우유' 편을 본다. 우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으며 시민들의 생활과 연관된 미래지향적 도시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현대인의 환상'이기도 하다. "시민마다가 우유를 풍족히 마실 수 있다면(…) 거리의 복판마다 우유 탱크를 세우고(…) 시민에게 자유롭게 마시게 하거나(…) 수도와 마찬가지로 우유도(牛乳道)를 만들어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언제든지 쏟아지게 하는 설비를(…) 충심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효석의 작품들 중에서 공간 인식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작가 이효석은 공간과 장소에 관해 서지학적 발굴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자신의 평전적 요소와 함께 문학지리 분석의 대상이다. 평양에서의 생활을 담은 그의 작품들이 좋은 사례이다. 이는 100년 전 평양 연구의 역사지리이기도 하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2-23 18:44:37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면서 중등 교과서에도 실린 '메밀꽃 필 무렵'과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로 잘 알려진 작가 가산 이효석(1907~1942)은 근현대 문학가 중에서 구체적으로 지리와 지리적 개념을 많은 작품과 글에 직접 언급한 보기 드문 작가다. 가산은 태생적인 자연미(自然美)를 존중하면서도 ‘첨단의 도시미(都市美)’에도 천착한다. 자연미와 도시미, 서구미(西歐美) 등과 함께 도시와 농촌, 산골, 해안, 대하천 등에 있어서 장소와 지리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분석과 기술이 탁월하다. 이효석은 한국 문학과 프랑스 문학을 비교하면서 풍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위도와 지리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문학과 풍토 내지 문학과 기후는 결코 새로운 제목은 아닐 것이다. 풍토와 기후는 생활을 규정하고, 생활을 비추어낸 것이 문학일지니 문학과 풍토의 관련은 심히 큰 것이다. 격정이 없는 이 가난한 풍토와 거세된 환경에서 발자크적 훌륭한 문학을 낳는다는 것은 극난의 일이다.”(수필 '북위 42도' 중) 작가는 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평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봉평의 자택과 거리가 40㎞ 떨어져 있는 학교 인근에서 하숙을 했다고 하는데, 이 초등학교가 평창군에서 유일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친은 진부면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부친의 직장(교육직 공무원)으로 인해 경성(서울)에서 잠시 살았지만 다시 평창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입학을 한다. 그 후 경기고보와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도서과 검열계에 취업해 있는 동안, 서울에서 1920년부터 1930년까지 10년을 살았다. 이효석은 또 1931년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신의 미술학도 이경원과 결혼을 하면서 함경북도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약 4년을 살게 된다. 그 뒤 가산은 1934년부터 1942년 세상을 뜰 때까지 평양에서 지내게 된다. 평양에서는 숭실전문학교(1936~1938)와 대동공업전문학교(1939~1942) 영어과 교수로 재직했다. 사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함북 경성과 평양에서 만들어졌다. 경성과 평양에 있는 동안에는 만주와 연해주 등을 자주 여행했다. 개인적인 어려움과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만주와 연해주 외 일본, 중국 등 가까운 해외 방문 관련 내용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평양에 대한 작품들에서 대동강 지형, 평양의 문화유적, 대동강 보트 놀이, 평양의 식당, 평양의 다방, 꽃집, 주점, 공연장들은 평양의 도시 구조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언급된 시설들이다. 그는 다방을 비롯한 주점과 요정도 늘어나서 평양의 중심가가 번성하고 있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물위' '유도소식' 등). 또한 대동강, 을밀대, 부벽루, 전금문(轉錦門), 청류정(淸流亭), 대성산 고구려 유적 등의 명승과 문화유산 등을 묘사한다('은은한 빛'). 그 외 반월도('물위'), 주암산('유도소식') 등의 자연 경관들도 언급된다. 평양의 도시 구조와 인접한 근교와 원교를 결합한 거대 도시권에 대한 의견도 가진다. “광장이 있고 언덕이 있으며 폭포가 있고 호수가 있어서(...) 호수에 배를 띄우고 광장에 홀을 만들고 조명을 밝히고(...) 온갖 근대시설을 갖춘다면(...) 평양이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로 발전하여(...) 평양은 가까이에 강을 끼고 있으니 행복한 줄 알아야(...) 여름철에 평양부 인구의 몇 분의 일이 (여기서) 살다시피한다.”('물위' 중) ‘메밀꽃 필 무렵’을 제외하면 그의 다양하고 방대한 작품들은 대부분 현대적, 도시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의 일상생활 장소와 지역들은 도시, 도심지와 교외 주택, 휴양지, 국내외 여행지 등이 주류를 이룬다. 도회적, 모더니즘적인 취향이 많았던 이효석의 작품에서 도시적인 ‘경물(景物)’에 대한 것이 많다. 작품에 언급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커피(자바, 모카 등 품종도 언급), 맥주, 위스키, 포도주, 머루주, 아파트, 호텔, 백화점, 서점, 다방, 레스토랑, 카바레, 방송국, 신문사, 음악 연주홀, 영화관, 토키(talkie), 대학 강의실, 만찬, 정원수, 보일러, 욕실, 목욕실, 목욕통, 보트, 별장, 극장, 냉난방, 온실산 양딸기, 잼, 소오세지, 버터, 통조림, 우유, 크리스마스 트리, 색 전기(크리스마스 트리 전구), 스키, 스케이트, 등산 피켈 등이 보인다. 이러한 용어들은 지금으로 보아도 그리 오래되거나 낯설지 않고, 경제적 수준 면에서도 높은 편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앞선 ‘댄디보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셈이다. 이효석의 잘 알려진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는 그의 서구적 모더니즘을 매우 잘 보여준다. 어두운 식민지 시절에 이러한 낭만적인 모습을 글로 남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혹은 어두운 시기를 기피하면서 개인적인 생활에 은닉되는 모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0여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 시중은 조련치 않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낟은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 전기로 장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특별한 예를 들면, 그의 수필 '채롱'(조선일보, 1938년 4월 28~5월 5일)의 '우유' 편을 본다. 우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고 있으며 시민들의 생활과 연관된 미래지향적 도시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현대인의 환상’이기도 하다. “시민마다가 우유를 풍족히 마실 수 있다면(...) 거리의 복판마다 우유 탱크를 세우고(...) 시민에게 자유롭게 마시게 하거나(...) 수도와 마찬가지로 우유도(牛乳道)를 만들어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언제든지 쏟아지게 하는 설비를(...) 충심으로 원하는 바이다.” 이효석의 작품들 중에서 공간 인식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작가 이효석은 공간과 장소에 관해 서지학적 발굴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자신의 평전적 요소와 함께 문학지리 분석의 대상이다. 평양에서의 생활을 담은 그의 작품들이 좋은 사례이다. 이는 100년 전 평양 연구의 역사지리이기도 하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2-17 14:12:55용산과 여의도, 그리고 서초동은 이 나라 국가권력의 3대 중심지다. 권력의 지나친 집중과 독주를 막기 위해 헌법이 정부, 국회, 사법부의 삼권분립 원리를 천명했고 이를 근간으로 민주적 헌정질서가 이뤄진다. 이들 중 하나가 건강한 견제권력이 아닌 독단적 지배권력이 된다면 국가체제는 방향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국가의 엘리트 권력집단의 직종 이동과 업무 수행의 상호교차성이 지나치게 높은 데 있다. 검사와 판사가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중앙부처나 대통령실의 고위직으로 일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국민이 법조 출신 율사들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연역적 법 논리로 인해 꽉 막혀 있는 국정 현안을 입법으로 풀어 달라는 국민의 기대감 때문이다. 또한 국민은 정부 관료로서의 경륜과 전문성을 입법에 반영해 우리 경제의 미래, 국가경제와 사회 변혁에 기여하리라는 기대에서 이들을 선출한 것이다. 그러나 주거지를 옮긴 이후에도 계속 옛 주소지 주위에서 어른거리거나 직종을 전환하고도 여전히 지난 직종의 일을 되풀이한다면, 이건 문제다. 따지고 보면 지금 이 나라 국정에서 벌어지는 많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 같다. 용산이 국회의원 공천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의도의 다수당은 탄핵을 운운하며 서초동을 압박하는 한편, 국가예산 심의·확정권을 무기로 과도한 힘을 행사한다. 서초동의 사법적 판단 하나하나가 정치적 배경에 의해 해석되는 것도 분명 정상이 아니다. 용산과 여의도, 그리고 서초동이 자신의 할 일보다 담장 너머 이웃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문제다. 역사 속에서 근대사회는 권력의 수렴과 통합의 원리에 의해 운영됐다. 삼권분립은 권력 수렴과 통합 과정을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적 장치다. 그런데 고도로 다원화된 후기 근대사회에 이르러 바로 이 수렴과 통합의 원칙 자체가 한계를 맞고 있다. 정당 등 다양한 이해집단은 자신의 얘기를 할 뿐 상대방의 얘기는 듣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깊은 동굴에 들어가 나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결론을 열어 놓은 정상적 토의는 실종됐고 극단적인 행동주의만 극성이다. 용산, 여의도, 서초동에서 시작된 후기 근대사회 권력투쟁은 길거리와 온라인 공간에서 전 국민이 편을 나누어 참전하는 격렬한 전투로 확대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문화역사 석학 굼브레히트 교수는 최근 한 국내 강연에서 이 시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품격 있는 다원성'(qualified divergence)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다원주의에 민주주의의 미래를 더 이상 맡길 수 없으며, 이제는 지성의 공론장에서 다원주의 시대의 사회적 신뢰와 책무성을 차분히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필자의 언어로 다시 쓰면, 현재 우리 민주주의는 '성찰적 다원성'(reflexive divergence)의 사고를 요구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지난 수세기 동안 실험한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는 삼권분립 원칙의 와해, 국가비전의 부재, 의견의 극단적 균열과 양극화, 정치 표현의 폭력화, 과도한 행동주의, 인류 역사에서 처음 당면한 사회문제의 실질적 문제해결에 대한 리더십 결여 등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깊은 성찰 없이 다원성의 시대를 맞이한 것은 우리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고, 미국과 유럽 국가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시대적 난제다. 5년 단임 대통령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가 과거 어느 시점의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은 맞지만, 과연 이들이 현재와 미래의 시대성을 담은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재성찰이 필요하다. 용산, 여의도, 서초동이 빨리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의 권력분립 원리에 대한 미래지향적 대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해 보자. 마동훈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2024-12-03 19:14:04[파이낸셜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10일 "제가 이끄는 국민의힘에선 (명태균·김대남 씨와 같은) 정치 협잡꾼·브로커는 발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이날 인천 강화군 강화문화원에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명태균이라는 사람이 국민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 대표는 "명태균 씨, 김대남 씨와 같은 협잡꾼, 정치브로커들이 정치권 뒤에서 음엄하게 활개친 것은 국민들이 몰랐을 것"이라며 "전근대적인 구태 정치"라고 비판했다. 이어 한 대표는 "정치브로커가 자기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을 국민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겠나"라며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한다. 관련된 분들은 자신있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모든 것을 밝혀라"라고 촉구했다. 한 대표는 "이런 정치 협잡꾼에게 대한민국 정치가 휘둘리고 끌려다녀서야 되겠나"라며 "국민의힘에선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jhyuk@fnnews.com 김준혁 기자
2024-10-10 11:43:30세계 28개국 해양학자 300명이 부산을 찾았다. '해양사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9회 세계해양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해양분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19일부터 24일까지 한국해양대학교 일원에서 다채롭게 진행된다. 한국해양대학교(총장 류동근)와 세계해양사학회가 주최하고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소장 정문수)와 해양사학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에는 세계 28개국, 80개 패널, 295명이 참가했다. 이 가운데는 외국에서 찾은 해양학자가 200명이 넘는다. 올해 제9회 세계해양사대회는 4명의 기조연설자와 78개 세션 발표자 273명 등 총 277편의 발표가 이뤄진다. 이처럼 대규모 학술대회 발표자가 참가자 자비 부담으로 한꺼번에 부산을 찾은 경우는 처음이다. 제9회 세계해양사대회 대주제는 '바다 : 지방적 차원의 이동성, 지구적 차원의 연결성(Oceans : Local Mobility, Global Connectivity)'으로 정해졌다. 일자별 분과 주제는 △1일차 : 지구화 시대의 해양 경계와 제도 변화(Maritime Borders and Institutional Transformation in an Era of Globalization) 외 25개 △2일차 : 동아시아에서 상품 및 문화 교류(Exchange of Commodities and Culture in East Asia(1)) 외 25개 △3일차 :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 이민자들의 기록 보존과 전시(People crossing the Sea border Ⅰ: Preserving and Exhibiting Immigrant Records) 외 20개 △5일차 : 서아프리카 모리타니 해역과 한국 원양어업(Mauritanian Waters in West Africa and South Korea's Deep-sea Fishery) 6개 등이다. 학술대회 대주제는 바다의 물리적 운동(海文)과 인간 활동(人文) 사이 상호작용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기 위해 설정됐다. 바다는 고대에는 인간에게 교류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여겨졌으나 근대 이후 바다에 대한 과학적 발견을 성과로 인간에게 바다는 공간적 문화적으로 멀리 분리된 사람들과 지역을 탐험하고 교류하며 연결하는 통로가 됐다. 또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며 대륙의 홍수와 가뭄 등 날씨와 지진, 화산활동을 결정하는 엔진이고 광물과 에너지 자원의 보고이며 안보와 국제적 협력의 공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번 행사 유치가 확정된 이후 국제해양문제연구소는 세계해양사학회와 공동으로 학술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 이같이 주제를 정했다.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간의 발표자 공모를 진행해 응모 논문에 대한 조직위원회 심사를 거쳐 273명의 발표자를 확정하고 별도로 4명의 기조연설자를 섭외했다. 정문수 국제해양문제연구소장은 "이번 세계해양사대회 궁극적 목적을 연구자들이 자신의 관심분야의 동료들, 인접분야 연구자들과 자신의 연구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해양사와 해문과 인문의 관계에 대한 개인·집단 연구를 위한 새로운 길을 제안하고 정의하는 한편 나아가 대한민국 해문과 인문 연구의 세계적인 발신을 도모하고자 뒀다"고 강조했다. 세계해양사대회는 4년을 주기로 개최지를 달리해 열리고 있는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다. 1992년 제1회 대회(영국 리버풀)를 시작으로 1996년 제2회 대회(네덜란드 암스테르담), 2000년 제3회 대회(덴마크 에스비에르), 2004년 제4회 대회(그리스 코르푸), 2008년 제5회 대회(영국 그리니치), 2012년 제6회 대회(벨기에 강), 2016년 제7회 대회(호주 퍼스), 2020년 제8회 대회(포르투갈 포르투)는 코로나로 인해 2년간 순연돼 2022년에 열렸다. 이번 행사는 세계 해양종주국 영연방과 유럽대륙을 벗어나 개최되는 최초의 국제학술대회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22년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열린 제8회 세계해양사대회 정기총회에서 한국해양대학교는 핀란드, 에스토니아 등과 유치 경쟁을 벌여 2차에 걸친 투표 끝에 아시아 권역 최초로 대회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아시아권에서 중국과 일본보다 앞서 대회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해운 5위 대한민국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 학자들에게 K컬처, K해양문화, K해양역사 확산을 통한 우호층 확대에도 큰 효과가 기대된다. 한국해양대학교 차원에서도 대학의 글로벌 홍보 효과를 획기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2024-08-19 18:29:05[파이낸셜뉴스] 대한민국의 첫 번재 메달은 사격에서 나왔다. 반하준·금지현이 공기소총 혼성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파리에서의 시작을 알렸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마지막 메달은? 근대5종 여자와 역도 박혜정 둘 중에 하나가 될 확률이 높다. 시간상으로 볼때는 근대5종의 경기시간이 더 올래걸리기 때문에 두 종목 모두에서 메달이 나온다면 성승민과 김선우가 마지막 메달이 된다. 하지만 만약 메달이 나오지 않으면 역도 박혜정이 한국의 마지막 메달이 된다. 2024 파리 올림픽 폐막일인 11일 '역사(力士)' 박혜정(고양시청)이 한국 역도의 새 역사 쓰기에 도전한다. 박혜정은 한국 시간으로 이날 오후 6시 30분 프랑스의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역도 여자 81㎏이상급 경기를 치른다. 2021년 도쿄 대회에서 '노메달'에 그친 한국 역도 대표팀에서 박혜정은 이번 대회 가장 확실한 메달 후보로 꼽힌다. 이 체급에는 절대강자인 리원원(중국) 외에는 박혜정을 위협할 선수가 없다. 사실 리원원이 부상 등의 이유로 갑자기 기록이 확 줄지 않는다면 차이를 줄이기는 쉽지않다. 리원원은 박혜정에게 합계 기준 30㎏ 앞선다. 박혜정은 메달권 경쟁 후보들인 에밀리 캠벨(영국), 두안각소른 차이디(태국)보다 10㎏ 정도를 더 든다. 박혜정은 리원원이 경기 중 부상을 당한 지난해 9월 세계선수권, 리원원이 부상으로 결장한 10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연거푸 우승하며 최중량급의 '확실한 2위' 자리를 굳혔다. 역대 역도 여자 최중량급 한국인 메달리스트는 장미란(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뿐이다. 장미란은 여자 최중량급 기준이 '75㎏ 이상'이던 2004년 아테네 대회(은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금메달), 2012년 런던 대회(동메달)에서 거푸 메달을 수확했다. 박혜정이 자신의 기량을 완전히 드러내 보인다면, '레전드' 장미란 이후 12년 만에 여자 최중량급 한국인 메달리스트로 우뚝 서는 영예를 누린다. 폐회식은 한국 시간으로 12일 오전 4시 생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시작한다. 올림피언들은 보름여 간 펼친 열전을 뒤로 하고 4년 뒤 로스앤젤레스(LA)에서의 재회를 기약한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2024-08-10 09:36:59문화정책이 주업인 장관이 순천만국가정원을 보고 '화난' 민심을 들먹였다. 정확한 진단이다. 개인의 '화'는 집단의 '성'으로 진화한다. 모두 '성난' 민심에 촉각을 세우고 있지만, 정치집단의 성난 민심 달래기란 제 몫 챙기는 목소리만 겨냥할 뿐 진정으로 성난 민심의 실체는 내팽개친 상태다. 성난 민심의 과거는 들불 같은 민란으로 번졌던 기억이 새롭다. '지방소멸'이 키워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되었다. '폐촌'이란 말도 있다. 조어에 능란한 일본인들이 회자하였던 '지방소멸'과 '폐촌'의 결과, 일본의 지방은 소멸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1990년 여름방학을 보냈던 일본의 산촌마을 '유스하라'는 아직도 건재하다. 주민들은 조용히 건강장수를 실천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다. 모든 면에서 속도가 느려진 사람들의 숫자는 그대로이고, 이른바 '슬로 라이프'가 안착하였다. 행정의 노력으로 의료 서비스가 정비되었고, 합병된 학교의 통합 운영으로 교육 서비스도 안정되었다. 의사들은 산골에서 왕진을 다니고, 교사들은 벽지로 전출한다. 의사 한 명에 배당된 환자 숫자와 교사 한 명이 감당하는 학생 숫자가 소수이기 때문에 파생되는 서비스의 질이 상승하였고, 산골에서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벽지로 유입되는 젊은이의 숫자가 노인 사망의 공간을 메운다. 선행 사례로부터 인구과소화가 결코 나쁜 현상만은 아니라는 점을 학습해야 한다. 도시의 최첨단 의료, 교육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슬로 라이프'의 안정에서 얻어낸 삶의 질이 도시의 소란스러움에서 빚어지는 악질 삶을 능가하는 만족감을 제공한다. '지방소멸'과 '폐촌'이라는 얘기를 꺼낸 이유는 후발주자의 대표 격인 한국 사회도 '슬로 라이프'를 구가하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어서다. '하면 된다'는 방식으로 '잘 살게 된' 순풍을 지탱해온 자신감이 있다. 전제조건은 '행/정'의 줄서기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간사한 무리들에 대한 심판이다. 미국 농촌과 일본 산촌에 산재한 학교들과 공공건물들은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행사의 거점 역할을 한다. 음악회와 미술전람회가 상시 개최되고, 주민들은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여 행사를 준비하는 주인공들로 참여한다. 축제라는 것이 가수 초빙의 '덩그런' 행사로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이 없다. 시집갔던 새댁이 친정 동네의 축제 참가를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일시 귀향한다. 향토의 과거와 현재의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박물관들은 주민의 살림살이를 온전히 보전하고 과거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보잘것없는 과거라고 살림살이를 내팽개치는 법이 없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안착한 대한민국에서 의료와 교육의 서비스 질은 궁극적으로 행정과 정치의 몫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토착정치와 과잉토목의 결탁으로 줄줄 새는 세금을 생각하면 '행/정' 시스템의 문제일 뿐 경제 문제는 아니다. 현재 한국 농촌의 어디를 가나 허물어져가는 농가들이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자리한다. 수도권 일극화 발전을 추구한 '행/정'의 결과다. 석양에 연기가 피어오르던 굴뚝은 사라진 지 오래고, 푸근하게 다가오던 둥그런 초가와 기왓장 추녀에서 낙숫물 떨어지던 로망스가 자취를 감춘 지는 기억에도 가물거린다. 할머니로부터 물려진 반닫이를 마르고 닳도록 닦던 어머니의 손길은 온데간데없다. 허물어진 농가와 스러져가는 흙담 사이로 어슬렁거리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지방소멸'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폐가의 구석에 자리한 뒤웅박과 깨어진 옹기, 다 뜯겨 나간 봉창이 어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살림살이가 아니었던가. 빛바랜 교과서와 아이들의 공책이 찢겨나간 모습으로 뒹구는 마당에 정 붙일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 조부모, 내 부모가 만들어왔던 고향의 살림살이! 그것이 이 땅의 근대화와 10대 강국의 밑거름이 된 역사라고 구가하는 사람들이 바로 뒤돌아서 우리의 살림살이를 내팽개친 결과가 '지방소멸'이다. 전라도 고흥 땅에서 대대로 팔영산을 바라보며 울릉도까지 노를 저었던 흥양어부의 살림살이가 있었다. 충청도 내포 들녘의 마을에서는 초상집에 동원된 개의 마릿수가 장례 행렬의 규모를 가늠케 했다. 경상도 산골짜기 영양에는 동학의 기운이 일월산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정기를 보여준다. 지방마다 가지가지 아름답던 우리네의 살림살이가 획일적인 토목공사와 아파트 건설로 무너져간 역사를 더 이상 반복하지 말라. 따뜻하던 손길의 살림살이가 내팽개쳐지는 상황을 초래하는 '행/정'이 '지방소멸'의 원인이다. 박물관이다, 미술관이다 그런 이름의 시설들이 생기는 족족 고대광실에서 배불리 먹고 기름지게 살던 흔적만을 보여준다. 왕후장상의 살림만 문화유산이라고 세금을 들인 국립박물관만 13개나 된다. 내팽개쳐진 서민의 살람살이를 돌보는 국립박물관은 달랑 한 군데 경복궁에 자리잡았다. 그것도 어느 지방으로 쫓겨갈 운명이란다. 황금만능주의가 정확하게 실천된 곳이 한국이라는 외국 학자의 비판에 부끄러움만 축적된다. 그것이 한국문화라고, 그래서 K팝 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자위 추구의 문화정책은 이제 그만해라. 그만큼 했으면 자위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자위 끝에는 허탈이 있고, 허탈 너머에는 허약이 온다. '금준미주'의 모습만을 유산이라고 생색 내는 거창한 국립박물관들이 스러져가는 살림살이가 내팽개쳐진 모습과 대각점에 있음을 잊지 말라. 일극체제 일변도가 '지방소멸'의 원흉이다. 다극체제가 해결방안의 시동 걸기 역할을 한다. 최소한도 광역지자체에는 한 군데씩 그 지방을 지켜온 서민 대중의 토속적인 살림살이를 보살피고 섬기는 국립박물관으로 보답해라. 주민 중심의 '행/정'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정신으로, 내팽개쳐진 우리네의 소박한 살림살이를 돌아보고 수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가 살아 숨쉬는 농어촌과 산골의 살림살이가 돌아올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한다. 인간만사와 살림살이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사람이 모여야 따뜻한 지방이 만들어진다. 차가운 돈잔치로 해결하려는 의료와 교육 서비스만으로는 지방소멸의 추세를 멈출 수가 없다. 주민 중심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살려야 한다. 내팽개쳐진 우리네 살림살이가 '성난 민심'의 씨앗으로 자라고 있음을 직시하라. 고향의 따뜻함이 노인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불러온다. 아름다운 살림살이가 안착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조성하자.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 전경수 교수 약력 △1949년 출생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미국 미네소타대 인류학 박사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중국 윈난대 객좌교수 △일본 규슈대 객원교수 △대표 저서 '문화의 이해' '환경친화의 인류학' '한국인류학 백년'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04-15 18:3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