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흑백요리사'가 인기를 끈 가운데 LG유플러스 콘텐츠 전문 스튜디오 STUDIO X+U가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금수저 전쟁’을 공개하고 예능 콘텐츠 라인업을 확대한다고 4일 밝혔다. '흑백요리사'는 입지전적인 명성을 가진 20명의 '백수저' 요리사와 이름이 비교적 덜 알려졌으나 뛰어난 실력을 갖춘 '흑수저' 요리사 80명의 요리 대결을 다룬 작품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금수저 전쟁은 흔히 ‘금수저’로 불리는 한국의 젊은 자산가 출연진들이 집안이나 배경 없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으로 승부하며 무일푼에서 돈을 불려나가는 모습을 담은 콘텐츠다. 이들은 자신의 배경을 잠시 내려놓고 평범한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과제와 난관을 해결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개인의 역량을 증명한다. 출연진으로는 SK 창업주 외손자 이승환, 연 매출 3400억 건설사 장남이자 호텔 대표 김헌성, 글로벌 코스메틱 브랜드 후계자 박무현, 1000억 규모 풍력에너지 기업 대표 임재겸, ‘더 지니어스’ 준우승자 김경훈, 남미 보석 사업 후계자 이윤선, 7개 벤처 IT기업 창업가 자녀 이지나, 부산 1위 택시회사의 3세 이준석 등이 합류했다. 금수저 전쟁은 회당 30분 내외 미드폼 형식, 총 16부작으로 구성됐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0시에 한 회씩 U+모바일tv에서 공개되며 1화는 4일 0시 공개됐다. 신정수 LG유플러스 STUDIO X+U 제작센터장은 “MZ세대가 선호하는 관찰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시도로 시청자들에게 차별적인 시청 경험을 제공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보다 실험적인 방식으로 다양한 콘텐츠들을 선보일 수 있도록 아이템을 지속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solidkjy@fnnews.com 구자윤 기자
2024-11-04 10:57:42[파이낸셜뉴스] 최근 국내 금값이 상승세를 보이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국제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금으로 수요가 몰렸기 때문이다. 18일 한국거래소(KRX)에 따르면 전날 기준 금 1돈(3.75g)은 35만4000으로 전일 대비 2000원 올랐다. 지난달 28일 37만4000원으로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금값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직후인 지난달 10일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해 한 달 여 만에 10% 넘게 올랐다. 지난 16일 뉴욕 상업거래소에서 8월물 금 가격은 전일 대비 23달러(1.17%) 급등한 온스당 1987.3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금값이 오르며 대표적인 금 제품인 돌반지 가격도 함께 비싸졌다.돌반지를 하나를 맞추려면 금 시세와 세공비를 포함하면 40만 원을 넘는다. 실제 한국금거래소에서는 순금 돌반지 1돈이 41만3000원, 순금 돌팔찌는 46만8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중고 거래도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당근마켓 등 온라인 거래사이트엔 돌반지를 판매한다는 글이 하루에 3~4건씩 올라오고 있다. 고금리·고물가로 인한 대출이자 부담과 생활비 마련 등을 위해 돌반지를 금값이 오를 때 팔려는 것이다. 선물용 돌반지 구입 부담이 커지자 무게를 4분의 1정도로 줄인 1g짜리 돌반지와 금수저, 0.2g 골드바를 끼워 넣은 종이 돌반지까지 주목 받고 있다. 또 1㎏ 단위가 부담스러운 개인투자자들이 늘면서 100g짜리 미니금 거래량도 증가했다. 금 1g의 가격은 지난달 30일에는 8만6820원으로 반년 만에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KRX 금시장에서는 ‘금 1kg’과 ‘미니금 100g’ 두 가지 상품이 거래된다. 1㎏짜리 금 거래량은 최근 한 달 간 27% 가량 늘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11-19 11:28:31[파이낸셜뉴스] 부를 물려받은 진도준(송중기 분)이 가난을 대물림받은 윤현우(송중기 분)를 바라보며 14회가 끝났다. 매회 시청률 경신 중인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이 시청률 26.9%를 돌파하며 역대 JTBC 드라마 시청률 2위에 올랐다. 14회 시청률은 전국 24.9% 수도권 26.9%를 기록, 자체 최고를 다시 한 번 경신했다. 전 채널 1위다. 19일 JTBC에 따르면 이는 지난 2018년 ‘SKY 캐슬’이 기록한 24.6%(수도권 기준)를 넘은 것으로, 역대 JTBC 드라마 시청률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연출 정대윤∙김상호, 극본 김태희∙장은재) 13, 14회에서는 진양철(이성민 분)의 죽음이 불러온 순양가의 지분 전쟁이 그려졌다. 유산을 단 한푼도 상속받지 못한 진도준(송중기 분)은 진양철의 충신이던 이항재(정희태 분)의 배신으로 후계자의 위치를 빼앗기는 듯했다. 이에 그는 순양금융지주회사의 설립을 무산시키는 대담한 작전으로 순양에 치명타를 입힌다. 여기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진양철의 진짜 유산, 순양마이크로의 존재는 진도준의 전생과 이번 생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며 강렬한 충격을 남겼다. ■ 진양철이 그린 큰 그림 환생한 진도준은 2002년 월드컵 광풍을 알고 있다. 이에 순양자동차 아폴로 홍보에 월드컵을 활용하고 모두의 예상을 깨며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 그사이 급격히 쇠약해진 진양철은 결국 진도준의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양철은 그토록 총애했던 손자 진도준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반면 진영철의 아내 이필옥(김현 분)이 차명으로 순양생명 지분을 상당수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것이 진도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중 서민영(신현빈 분)의 수사는 후계자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생전 진양철과 진도준의 교통사고 살인교사범의 증거를 찾던 서민영은 이필옥이 범인이라는 물증까지 얻었다. 이로 인해 검찰 소환 조사를 받게 된 이필옥은 겁에 질려 진도준에게 순양생명 지분을 넘긴 뒤 해외로 도피했다. 전말을 알게 된 서민영은 크나큰 실망감에 진도준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필옥이 넘긴 지분으로 진도준은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듯했지만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지주사 대표이사를 선임하기 위한 주주총회가 열린 당일, 참석한 모두에게 의문의 문자가 날아온 것. 진도준이 유언장 내용을 불만을 품고 진양철과 언쟁을 벌이다 진양철이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진도준의 적수는 진양철의 첫 손주 진성준(김남희 분)으로 좁혀지고 있다. 흙수저 윤현우로 살 당시 자신이 모셨던 보스이자, 자신의 목숨을 빼앗은 바로 그 장본인이다. 진성준(김남희 분)은 결백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진양철 병실 CCTV 영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래 전 진성준에게 매수된 이항재는 자신이 진도준의 지시로 CCTV를 지웠다고 진술하고 진도준은 이항재에 대표직을 빼앗겼다. 궁지에 몰린 진도준은 아예 판을 엎기로 한다. 그는 진양철의 사위인 검사 출신 정치인 최창제(김도현 분)를 이용해 금산분리완화법 제정을 부결시켰고, 이는 지주사 설립 무산으로 이어졌다. 순양에게 상속세를 비롯해 주가 폭락까지 안겼지만, 그 과정에서 진양철을 향한 여론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씁쓸한 승리를 맞은 진도준 앞에 진양철의 선물이 도착했다. 실은 유언장을 둘러싼 모든 일이 자신을 밟고 갈 만큼 진도준이 강해지길 바랐던 진양철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었다. 여기에 그 유산의 실체가 윤현우(송중기 분)를 죽음으로 내몬 순양마이크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진도준의 복수는 계속된다 완벽한 비자금인 순양마이크로를 얻은 진도준은 계속해서 형제들을 겨냥해갔다. 그는 형제들의 이권 다툼을 최대한 이용했다. 진양철의 둘째, 진동기(조한철 분)가 순양그룹 총수 자리를 포기하고 금융그룹으로 계열사 분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진도준은 순양카드를 사겠다는 진동기의 제안을 들고, 진영기(윤제문 분)까지 끌어들여 판을 키웠다. 형이 선수를 칠까 조급해진 진동기는 순양물산 지분을 담보로 걸며 카드사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대금을 채 갚기도 전, 순양카드에 부도 위기가 찾아왔다. 진도준의 손에 순양물산의 지분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안 진영기는 두 배의 대금을 주고 채권을 사들였다. 부채의 늪에 빠진 서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돈으로 순양카드를 살리는 대신 총수 자리를 선택한 것. 재벌가의 이기심이 그대로 투영된 진영기의 선택은 진도준에게 쓰라린 전생을 떠올리게 했다. 윤현우는 아픈 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사채를 쓴 무기력한 아버지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투잡을 뛰면서 악전고투한다. 계약직이라 대출도 못받은 그는 대리운전을 하다 졸음운전을 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뺨을 때리고 이 모습을 본 차주에게 쫒겨나는 수모를 켞는다. 우연히 옆을 지다가던 진도준은 차에 내려 도로에 주저앉은 윤현우를 바라본다.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매주 금, 토, 일 밤 10시 30분 방송된다. 종영까지 단 2회만을 남겨뒀다. .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2-12-19 09:10:26[파이낸셜뉴스]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개인 4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한국에서 ‘부자’라 여겨지기 위해서는 ‘총자산 100억원 이상’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를 축적하는 데는 ‘사업소득’의 기여도가 가장 컸다. 4일 KB금융그룹이 발간한 ‘2022 한국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금융자산 10억원 이상 개인)의 51.3%는 금융과 부동산 등 모든 자산을 통틀어 총자산 100억원 이상을 부자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가장 많이 제시한 부자의 기준 금액은 ‘총자산 100억원’으로 27.0%가 선택했다. ‘총자산 50억원(17.5%)’가 뒤를 이었다. 특히 보고서는 30~49세에 금융자산 10~20억원을 보유하며, 이제 막 부자에 진입한 개인을 ‘신흥부자’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금융자산 20억 원 이상을 보유한 50대 이상의 ‘전통 부자’와 이들을 비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신흥 부자’가 금융자산 10억원을 넘기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사업소득’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투자’(26.4%), ‘상속/증여’(20.7%)가 뒤를 이었다. 특히 신흥부자의 경우 전통부자에 비해 ‘부동산투자’나 ‘상속/증여’를 부의 원천이라고 꼽은 경우가 더 많았다. 이른바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아 부자가 된 금수저 비중이 전통 부자에 비해 더 큰 셈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신흥 부자는 7만8천명으로,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부유한 전체 부자의 18.4%를 차지했다. 이들이 보유한 금융자산 규모는 99조5천억원으로 부자의 총금융자산 중 3.5%를 차지했다. 이들 ‘신흥부자’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종잣돈(Seed Money)의 규모를 ‘7억원’이라 답했으며, 이들이 종잣돈을 모았던 주된 방법은 전통부자에 비해 ‘근로소득을 모아서’(+14.8%p), ‘부모로부터의 지원·증여·상속으로’(+11.4%p)라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반면 ‘디지털자산 등 기타자산에 투자’가 종잣돈을 마련한 주된 방법이라고 꼽히지는 않았다. 신흥 부자의 최근 자산관리 관심 분야는 ‘국내 금융 상품 투자(36.8%)’가 가장 많이 거론됐다. ‘경제 동향 정보 수집(32.2%)’ ‘국내 부동산 투자(26.4%)’ ‘소비·지출 관리(23.0%)’ ‘자산 포트폴리오 조정(23.0%)’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들은 또 금리 인상(47.0%), 인플레이션(39.8%), 부동산 규제(35.8%),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35%), 세금 인상(32.5%) 등을 경제 주요 위험 요인으로 꼽았다. KB금융은 “부자들은 위험 요소를 예상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최근에는 강달러를 기반으로 달러 매입을 계획하고 주식은 저가 매수 시기를 보고 있으며 부동산 가격 하락에 대비해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sanghoon3197@fnnews.com 박상훈 기자
2022-12-05 08:05:30프랑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동맹국에 패해 한 시대를 마감했던 때가 1815년이다. 전쟁 직후 빈 회의에서 유럽의 국경은 새로 그려진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초석이 마련된 것이 이때다. 당시 회의를 이끌었던 영국 총리가 로버트 젱킨슨(1812~1827 재임)이다. 영국 내부적으로는 급진 사상으로 혼돈의 정국이었다. 경제는 만성실업, 거듭된 수확실패로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젱킨슨은 과감하게 법을 뜯어고치며 이를 수습했다. '잊을 수 없는 개혁파 리더'였다는 게 역사의 평가다. 젱킨슨이 총리에 오른 나이는 42세다. 40대 영국 총리는 그 후로 무려 180여년이 흐른 뒤 배출된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바통을 이었다. 당시 나이 44세. 다시 이를 뒤집은 건 데이비드 캐머런이다. 2010년 13년 만에 노동당을 꺾고 총리가 됐을 때 캐머런은 43세였다. 지난 9월 취임했던 리즈 트러스는 47세다. 하지만 트러스는 감세정책 대실패로 세계 시장을 대혼란에 빠트리면서 44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25일(현지시간) 영국의 새 리더가 된 리시 수낵은 젱킨슨 이후 최연소이자 인도계 첫 총리로 주목을 받고 있다. 수낵의 나이도 젱킨슨과 같은 42세다. 그 앞에 놓인 경제사정도 젱킨슨 때와 비슷하다. 막대한 부채, 기록적인 인플레, 장기침체, 구조적 위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오롯이 그의 몫이 됐다. 수낵은 인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옥스퍼드대 출신으로 상류 엘리트 코스를 밝았다. 그의 장인은 시가총액이 100조원을 넘는 인도 IT기업 인포시스 창업자다. 수낵 부부 재산은 7억3000만파운드(1조1900억원)에 이른다. 아내는 상속재산의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수낵은 명품 프라다 양복과 신발, 값비싼 펠로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인도계 '금수저' 총리는 전임 트러스와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인가. 영국 보수당 운명도 거기에 달려 있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2022-10-25 18:23:45[파이낸셜뉴스] "그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무척 애석한 일이다. 내 친구 중에 이 사건을 잘 아는 이가 있는데, 그는 어쩌다 조선의 최고 수재들이 일본인에게 이용당해서 그처럼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참으로 애석하다고 했다. 어찌 일본인이 조선의 운명과 그들의 성공을 위해 노력을 다했겠는가. 우리가 만약 국가 발전의 기미를 보였다면 일본인들은 백방으로 방해할 것이 자명한데 어찌 그들을 원조했겠는가. 당시 일본은 청국의 위세를 꺾으려고 온갖 계략을 세우고 있었는데, 우리 청년 수재들은 일본의 신 풍조에 현혹되어 일본인들의 힘을 빌려 청국으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했으니...(중략)...젊은 혈기가 이들의 지혜를 눌렀다." -박은식 '한국통사' 中 19세기 말, 열강들의 전방위적인 침탈로 조선의 국력이 점차 쇠퇴할 때 자주적인 근대화를 지향하며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천명하고 나선 일단의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開化黨)이다. 이들은 단순한 주장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의 정변까지 일으켰는데, 역사는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부른다. 갑신정변은 조선을 중세 봉건 국가에서 벗어나 '근대(近代)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 최초의 개혁 운동이었다. 여기에서 표방했던 것들은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사대 관계 청산, 인민 평등, 조세 개혁 등 이전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파격 그 자체였다. 이는 훗날 우리나라 역사의 개화 운동과 민족 운동 등에도 큰 영향을 끼치며 계승, 발전됐다. 다만,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추진됐던 '위로부터의 개혁'은 명백한 한계도 노정하고 있었다. 개혁 실행 과정에서 외세를 개입시켰고, 일반 민중들에 대한 충분한 고려도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은 아직 개화당의 급진적인 개혁 노선을 따라올 만한 의식과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개화당의 개혁에는 민중들이 정말로 원했던 '토지 개혁'이 담기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개화당이 숙적(宿敵)인 '일본'까지 끌어들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민중들 사이에서는 큰 반감이 일어났고, 이후 전격적으로 청(淸)나라의 군대마저 개입하면서 갑신정변과 개화당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원대한 꿈을 꿨지만 '3일 천하'로 끝나고 만 금수저 청년들의 '갑신정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청의 내정간섭 심화 1882년, 구식 군인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촉발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대원군과 수구적인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재집권을 불러왔다. 이들은 민씨 외척 세력 척결 및 외세 배척 등을 표방하며 한 때 성공하는 듯이 보였지만,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급파된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몰락했다.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된 줄 알았던 중전 민씨는 충주에서 멀쩡하게 환궁(還宮)했고, 청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민씨 외척 세력이 다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민비는 임오군란에서 사실상 죽다 살아났기 때문에, 이때부터 과거에 잠시 표방했던 개혁 노선은 완전히 접고 오로지 신변의 안전만을 위해 청나라에 철저히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따라 조선의 각 분야에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노골화됐다. 우선 임오군란 진압 때 청나라 군대를 이끌었던 위안스카이와 오장경 등은 조선의 군권(軍權)에 깊숙이 관여했다. 청나라의 실권자인 이홍장의 추천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인 고문으로 부임한 묄렌도르프는 통리아문의 외무협판으로서 외교권과 해관총세무사로서 해관까지 넘봤다. 조선과 청나라 간 통상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따라 상무총판(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은 사실상 조선의 재정권을 장악했다. 궁극적으로 청나라는 상민수륙무역장정 전문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을 '속방'(屬邦)화 하려 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고종은 무력했고, 민씨 외척 세력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다. 그런데 저편에서 이를 매우 심각하게 목도(目睹)하고 있던 한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급진개화파)'이다. ■개혁정치와 좌절 개화당 중심 인물들의 배경은 매우 화려했다. 우선 수장인 김옥균은 명문가인 안동 김씨 집안 출신으로 22세에 장원 급제를 했고 호조참판(현 기획재정부 차관), 외아문현판(현 외교통상부 장관)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박영효는 조선의 제 25대 임금인 철종의 사위로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 등을 역임했다. 홍영식은 영의정이었던 홍순목의 차남으로 정변 당시 우정총국 책임자였다. 서재필은 일본 육군학교를 졸업했고, 조련국(임시사관학교) 사관장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당시 양반 사대부들이 모여 살고 있던 '북촌'(北村)에 거주했고, 평균 연령은 고작 20대 후반에 불과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금수저' 청년들이었다.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개화당이 지향하는 개혁은 '급진적'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서양의 과학기술과 함께 근대적인 사상, 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 조선의 정치·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변법론'(變法論)을 주장했다. 이는 청나라의 양무(洋務) 운동(중체서용)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즉 서양의 기술과 문물은 수용하되 법, 제도, 사상 등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것을 지켜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을 취했던 온건 개화파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당초 고종은 개화당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구 열강과 교류가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고종은 새로운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느꼈고, 해외의 발전된 제도, 문물 등에 대한 식견을 갖고 있는 젊은 신진 관료들을 중용해 크게 쓰려 했다. 고종의 신임에 힘입어 개화당은 초반에 각종 개혁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려 했다. 대표적으로 신식 행정관서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설치,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 및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 파견, 기무처(機務處) 설치, 최초의 영어 학교인 동문학(同門學) 설립,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창간, 근대 우편 제도 창설 등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하던 청나라는 개화당의 정책이 조선의 독립을 지향한다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와 밀착하고 있던 민씨 세력도 개화당의 개혁 정책에 눈살을 찌푸렸다. 더욱이 개혁 정책의 뒷받침이 될 만한 재정도 부족했다. 이에 김옥균이 일본에서 자금을 빌려와 재정 문제를 해결해 상황 반전을 노려보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함에 따라 개화당의 입지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축소됐다. 큰 정치적 위기가 엄습하면서 개화당은 초조해졌다. 이에 따라 개화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가 어렵다고 보고, '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청나라 및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과감하지만 위험한' 생각을 갖게 된다. ■갑신정변 개화당이 정변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봄으로 알려졌다. 개화당은 틈 날 때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여 거사를 일으킬 기회를 엿봤다. 그러다가 1884년 5월 이후부터 기회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청나라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 일부를 빼내 베트남으로 보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본래 개화당에 적대적이었던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태도를 바꿔 일본군 150명을 빌려주면서 개화당의 정변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힘입어 개화당은 그해 12월 4일에 열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일로 잡았다. 정변 당일 우정총국 축하연에는 개화당 인물들과 민씨 일족 및 고위 관료들, 주한외교사절 등이 참석했다. 개화당은 우선 축하연에 온 민씨 일족 및 고위 관료들을 척살한 뒤 창덕궁(昌德宮)으로 진격해 고종의 신변을 확보할 예정이었다. 축하연은 저녁 7시에 시작됐다. 약 3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 갑자기 우정총국에서 불이 났다. 사전에 개화당에게 매수된 궁녀가 사제폭탄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졌다. 민씨 일족과 고위 관료들이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미리 매복해있던 개화당 장사(將士)들이 이들을 덮쳤다. 이 자리에서 민비의 조카이자 김옥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민영익은 칼을 무려 33방이나 맞았다. 개화당은 아수라장이 된 우정총국을 뒤로 하고 우선 일본 공사관을 찾아 군대 지원 여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확답을 받은 후 고종이 거처하는 창덕궁으로 향했다. 개화당은 잠들어있던 고종을 깨워 '변고'(變故)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경우궁(景祐宮)으로 자리를 피할 것을 청했다. 경황이 없던 고종과 민비는 이들의 요청에 응했고, 창덕궁을 떠나 근처에 있던 경우궁으로 피신했다. 개화당은 경우궁 안팎에 40여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대문 쪽에 일본군 150여명을 배치해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개화당이 굳이 경우궁을 고종의 피신처로 선택한 것은 넓은 창덕궁에 비해 협소한 장소여서 수비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새벽에 개화당은 조영하, 민영목, 민태호 등 군사 지휘권자들과 권력의 핵심 실세들을 어명(御命)으로 불러들여 척살했다. 이때 고종은 연거푸 "죽이지 마라"는 전교(傳敎)를 내렸지만, 개화당은 왕의 명을 전혀 듣지 않았다. 정변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후 개화당은 마라톤 회의를 한 끝에 개화당 핵심 인물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한 (우의정 홍영식, 호조참판 김옥균, 좌우영사 박영효와 서재필, 서리독판교섭통상사무 서광범, 도승지 박영교) 신 정부 명단과 국가 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혁신정강 14개조'를 왕의 전교 형식으로 공포했다. ■46시간의 개혁 개화당이 공포한 혁신정강 중 대표적인 것은 우선 1조 청나라에 끌려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고 종래 청나라에 행하던 조공의 허례(虛禮)를 폐지해 사대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흥선대원군은 개화당과 대척점에 서있는 수구적인 인물이지만, 왕의 아버지가 다른 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있으면 조선을 자주적인 국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혁신정강 첫머리에 넣었다. 2조는 문벌을 폐지해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는 것이다. 이는 10년 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신분 제도 폐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3조는 토지 수익에 매기는 조세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인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조는 모든 재정을 호조(戶曹)로 통할해 일원화한다는 것이다. 김옥균은 다른 관직은 마다하고 굳이 '호조참판'을 맡았는데, 이는 국가의 돈줄을 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13조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반포하고, 14조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앤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개화당은 역사상 처음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군왕은 상징적으로 존재할 뿐 실질적인 통치는 내각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정강으로 말미암아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일반 민중들이 정말로 원했던 지주-소작제 문제 해결을 위한 '토지 개혁'은 정강에서 빠졌다. 기존의 지주전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세제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 문제를 거론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일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화당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모습들을 선보이며 목표로 하는 조선의 급진적인 개혁을 의욕적으로 밀어붙일 태세였다. 고종은 혁신정강으로 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마지못해 개화당의 혁신정강을 수용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46시간에 불과했다. ■청군 개입, 개혁 실패 갑신정변 직후 경우궁으로 옮겨졌던 민비는 곧 정변의 의도가 자신의 세력을 척결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민비는 경우궁이 비좁다는 핑계를 대며 개화당에게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에서 은밀히 보낸 심상훈과 접촉하며 청나라 군대의 개입을 강력히 요청했다. 처음에 김옥균은 민비의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급기야 고종까지 나서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구했지만, 김옥균은 경우궁보다 조금 더 넓은 계동궁(桂洞宮)으로 거처를 옮겨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왕과 왕비의 요구가 빗발치자 김옥균은 일본 공사인 다케조에와 상의했다. 다케조에는 왕이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현재 일본이 보유한 병력으로 충분히 수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 말을 믿은 김옥균은 결국 고종과 민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개화당은 창덕궁에서 갖고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고종과 민비 주변을 3중(외위, 중위, 내위)으로 에워쌌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12월 6일 오후 3시에 예상보다 신속하게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두 부대로 나눠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대응해 외위(外衛)를 담당한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이 결사항전을 했지만, 궁궐로 빠르게 진입하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무너졌다. 뒤이어 중위(中衛)를 담당한 일본군이 대응해야 했지만, 이들은 별안간 철병(撤兵)했다. 개화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배신이었다. 일본은 현재 병력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로 인한 외교 마찰 등에 적지 않은 부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소수의 내위(內衛)는 청나라 군대에 의해 속절 없이 죽거나 도망쳤다. 이렇게 개화당의 정변과 개혁은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21일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국내에 남은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살해됐다. 이 밖에 갑신정변에 연루된 수많은 개화당 관련 인물들이 살해됐고, 권력은 다시금 청나라를 등에 업은 민씨 세력에게 넘어갔다. 한편, 갑신정변을 지켜본 민중들은 개화당의 개혁 정책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 왕과 왕비를 핍박했다고 여겼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은 개화당을 '왜당'(倭黨)으로 규정했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불태워버렸다. 직후에 일본은 조선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었고, 이듬해 10만원의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는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됐다. 더 나아가 일본은 청나라와 담판을 지어 앞으로 조선에 변란이 일어났을 경우 청나라처럼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 이것이 바로 '텐진조약'(天津條約)인데, 이는 약 10년 후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때 일본군 파병의 구실이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8-20 09:34:27[파이낸셜뉴스]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5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2030년까지는 모든 국민이 지금의 중산층 수준으로 살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지향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자신만의 국가비전은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를 바탕으로 △신복지 △중산층 경제 △헌법개정 △연성강국 신외교 △문화강국 등 '5대 핵심 정책'을 제시했다. 5선 국회의원부터 도지사, 국무총리 등 다양한 정치적·정책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고 새로운 경제성장 동력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다. 이날 이 후보는 온라인 출마선언을 통해 "힘겨운 국민을 더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 그 일을 제가 하겠다"며 대선 출마 이유를 밝혔다. 무엇보다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 해소를 강조하며 "모든 위협으로부터 국민 한 분 한 분의 삶을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 그 일을 제가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후보는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5대 비전을 말씀드린다"며 △신복지 △중산층 경제 △헌법개정 △연성강국 신외교 △문화강국 등의 정책비전을 제시했다. 우선 이 후보의 트레이드 마크인 '신복지' 정책에 대해 "아직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국민이 계신다"며 "우선 그런 국민이 계시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누구나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소득 뿐만이 아니다. 주거, 노동, 교육, 의료, 돌봄, 문화, 환경에서도 최저한의 생활을 국가가 보장할 책임을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중산층 경제'에 대해선 "10년 전에는 우리 국민의 65%가 중산층이었다. 지금은 57%로 줄었다. 그것을 70%로 늘리겠다"며 "중산층이 두터워지려면 좋은 일자리가 늘어야 한다. IT, 바이오, 미래차, AI 같은 첨단기술 분야를 강하게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지구를 지키는 그린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며 "금수저, 흙수저가 세습되지 않아야 한다. 계층이동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일자리와 세제와 복지가 그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덧붙였다. '헌법개정'에 대해선 "내 삶을 지켜주기 위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다"며 "생명권, 안전권, 주거권을 헌법에 신설해야 한다. 토지공개념이 명확해져 불로소득을 부자들이 독점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성강국 신외교'는 이 후보의 강점인 '외교력'을 뒷받침하는 정책이다. 이 후보는 "세계는 연성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무력과 영토보다 경제와 문화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며 "연성강국 신외교를 펼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반도 평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며 "북한 핵문제는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의 틀로 해결할 수 있다. 한국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주변국 외교에 대해선 "한미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고 상호신뢰를 높이며 일본 러시아와 최대한 협력하는 길을 열겠다"고 밝혔다. '문화강국' 비전은 문화예술산업 육성화 전략이다. 이 후보는 "문화와 예술은 간섭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창의적이고 더 아름다워진다"며 "문화 예술만큼은 철저하게 그 분들의 시장에 맡겨 놓겠다. 정부는 입을 닫고 지갑만 열어야 한다"고 했다. 이 후보는 "국민여러분께서 저의 충정을 받아주시고 저를 선택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며 "코로나든, 정치든, 경제든, 복지든, 외교든,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 우선 그런 날을 앞당기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호소했다. 다음은 이낙연 후보 출마선언문 안녕하십니까? 이낙연이라고 합니다. 저를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소개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신문기자로 일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국회의원, 도지사, 국무총리로 일하고 다시 국회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대통령후보로 나서겠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코로나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입니다. 우리는 성실하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깊고 넓어졌습니다. 자영업자들은 허리가 더 휘었습니다. 노동자, 농어민 모두 힘겹습니다. 청년의 취업문턱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습니다. 안타깝고 송구스럽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국민을 더 따뜻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그 일을 제가 하겠습니다. 사회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더 어려워지고,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졌습니다. 그러잖아도 커지던 불평등이 코로나를 겪으며 더 커졌습니다. 청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불공정에 항의합니다.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상처받은 공정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 일을 제가 하겠습니다. 지금은 불안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을 불안해 합니다. 청년도, 중년도, 노년도 불안합니다.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그런 모든 위협으로부터 국민 한 분 한 분의 삶을 국가가 보호해 드려야 합니다.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코로나 극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일상의 회복이 멀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이 사진을 기억하실 겁니다. G7 정상회의의 한 장면입니다. 어느 나라가 코로나에 가장 잘 대처했나는 물음에, 선진국 정상들이 문재인대통령을 가리킵니다. 대한민국의 위기극복능력을 세계가 평가한 겁니다. 우리의 자랑은 반도체나 K팝만이 아닙니다. 우리 의료진의 헌신과 국민의 협력에 세계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런 국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국민 한 분 한 분의 역량을 키우며, 대한민국을 더 자랑스러운 나라로 가꾸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세계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일을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민주당의 세 분 대통령을 모셨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은 저에게 학교였습니다. 저는 그분들로부터 정치를 배우고, 정책을 익혔습니다. 정치와 정책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좋은 철학은 든든하게 계승하되, 문제는 확실하게 시정해야 합니다. 그 일을 제가 하겠습니다. 내 삶을 지켜주는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은 우선 5대 비전을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신복지입니다. 우리는 김대중정부 이래 복지를 본격 추진해 왔습니다. 많은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국민이 계십니다. 우선 그런 국민이 계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삶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복지의 출발입니다. 소득 뿐만이 아닙니다. 주거, 노동, 교육, 의료, 돌봄, 문화, 환경에서도 최저한의 생활을 국가가 보장할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2030년까지는 모든 국민이 지금의 중산층 수준으로 살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지향하겠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충실한 돌봄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아이도 좋고, 부모도 좋고, 청년 일자리도 늘어납니다.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을 지옥고라고 합니다. 서울 사는 청년 3명 중 1명이 지옥고에 삽니다. 우선 지옥고부터 없애겠습니다. 신복지의 내용은 앞으로 계속 내놓겠습니다 둘째는 중산층 경제입니다. 10년 전에는 우리 국민의 65%가 중산층이었습니다. 지금은 57%로 줄었습니다. 그것을 70%로 늘리겠습니다. 중산층이 얇아지면 불평등이 커집니다. 사회가 위기에 취약해집니다. 중산층이 두터워야 불평등이 완화됩니다. 사회가 위기에 강해집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려면 좋은 일자리가 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IT, 바이오, 미래차, AI 같은 첨단기술 분야를 강하게 육성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는 그린 산업을 활성화하겠습니다. 지구는 차갑게, 사회는 따뜻하게 만들며 청년들께 보람찬 일을 드리겠습니다. 돌봄 등 사회서비스를 확대하겠습니다. 금수저, 흙수저가 세습되지 않아야 합니다. 계층이동이 더 활발해져야 합니다. 일자리와 세제와 복지가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셋째는 국가의 틀을 바꾸는 헌법개정입니다. 그동안 정치가 내 삶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내 삶을 지켜주는 정치로 발전해야 합니다. 내 삶을 지켜주기 위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강화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습니다. 생명권, 안전권, 주거권을 헌법에 신설해야 합니다. 토지공개념이 명확해져 불로소득을 부자들이 독점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땅에서 얻은 이익을 좀더 나누고 사회 불평등을 줄여야 합니다. 헌법에 나오는 행복추구, 균형발전, 국민 주권, 기회균등, 평등이 창백한 관념에 머물지 말고 생명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특히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힘차게 추진하도록 헌법에 확실한 근거를 두고 싶습니다. 넷째는 연성강국 신외교입니다. 세계는 연성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무력과 영토보다 경제와 문화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연성강국으로 도약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제와 문화가 뒷받침해줄 것입니다. 그것을 토대로 연성강국 신외교를 펼치겠습니다. 미국의 세계적 투자자는 한반도가 ‘최후 최고의 투자처’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평화와 통일을 전제로 한 말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합니다. 북한 핵문제는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의 틀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한국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대통령의 평화외교를 이어가며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겠습니다. 한미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강화하고 상호신뢰를 높이며 일본 러시아와 최대한 협력하는 길을 열겠습니다. 미중 양국은 거대한 고래 같은 존재입니다. 그 사이에 놓인 우리의 외교는 돌고래처럼 지혜롭고 민첩하며 세련돼야 합니다. 세계 모든 나라와 윈윈의 호혜적 협력을 확대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적 위상이 G10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G7의 한 나라를 제쳤습니다. 이제 G5를 꿈꾸며 나아갈 만합니다. 그에 걸맞은 역할과 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저는 국무총리로 일하면서 세계 25개국을 방문해 정상급 지도자들과 회담했습니다. 높아진 국격에 부응하는 외교를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문화강국의 꿈입니다. 우리는 BTS보유국입니다. BTS 티켓이 영국 소년의 잊을 수 없는 생일선물이 되고 있습니다. 독일소녀가 우리말을 배워 독일 오디션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LA에서는 BTS 콘서트를 보기 위해 미국 젊은이들 밤새워 줄을 섰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봉준호 보유국에 윤여정 보유국이도 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와 예술은 간섭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창의적이고 더 아름다워집니다. 문화 예술만큼은 철저하게 그 분들의 시장에 맡겨 놓을 겁니다. 정부는 입을 닫고 지갑만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받고자 여러 말씀을 드렸습니다. 국민여러분께서 저의 충정을 받아주시고 저를 선택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국민 여러분의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의 약속을 한 마디로 줄이면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함께 모여 수업을 듣는 교실. 침을 튀기며 토론하는 회사. 친구들과 한잔하는 술집. 그런 당연한 풍경들이 다시 당연해져야 합니다. 이런 노래가 있지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코로나든, 정치든, 경제든, 복지든, 외교든,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겁니다. 우선 그런 날을 앞당기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족한 사람의 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juyong@fnnews.com 송주용 기자
2021-07-05 09:52:11【파이낸셜뉴스 남양주=강근주 기자】 영석 이석영선생추모식 추진위원회와 남양주시가 오는 16일 오후 2시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남양주시 화도읍 소재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을 거행한다. 이날 추모식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유족과 남양주시 관계자를 중심으로 간소하게 진행하고 남양주시 공식 유튜브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통해 중계하고 유튜브 ‘우당TV’에도 탑재한다. 이종찬 추진위원장과 문희상 전 국회의장, 조광한 남양주시장, 황후연 경기북부보훈지청장, 이철영 남양주시의회 의장 등 30여명이 추모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영석 이석영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백사 이항복의 11세손이며, 우당 이회영-성재 이시영의 둘째 형이다. 이석영 가문은 6명의 영의정과 영의정 추증 3명 등 정승 9명을 배출한 가문으로 삼한갑족이라고 불렸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대감 양자로 입양돼 1885년 증광시(增廣試) 문과로 급제 후 1904년 종2품인 장예원(掌禮院) 소경(少卿)을 마지막으로 경술국치로 사직했다. 1910년 12월 우당 이회영, 성재 이석영 등 6형제와 같이 전 가족 40여명이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해방될 때까지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 주역으로 활동하며 광복군 주축을 이뤘다. 광복군 지청천 사령관, 1지대장 김원봉, 2지대장 이범석, 3지대장 김학규 등 광복군 지휘관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이석영은 일제가 ‘불령선인’으로 지명 수배해 피신하면서 심양, 북경, 천진, 상해 등을 유랑하면서 빈곤하게 생활하다 1934년 2월16일 상해에서 타계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석영 선생은 당대 갑부였던 양부 이유원 대감의 재산을 상속받아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매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유원 재산은 “경기도 양주에서 한양까지 80리 언저리 전답이 모두 이유원 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종찬 추진위원장은 9일 “이석영 선생이 서거할 당시 임시정부가 항주로 피신 중이라 장례를 모실 분이 없어 임시로 장례를 치렀지만 왜군 공격으로 전란이 격화돼 묘지를 보살피지 못한 채 잊혀졌다”며 직계 후손이 없어 “87년 만에 추모식이 아닌 장례식을 거행하게 됐다”고 추모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경기도에는 조선시대 금수저 사대부가 모두 살았지만 국가가 기울어질 때 나서는 이는 드물었다”며 “전 재산과 목숨을 항일운동에 바친 이석영 선생 6형제는 경기도 자랑이며, 남양주 자랑”이라고 추모했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남양주 역사의 숨결 속에 여전히 살아계신 이석영 이름 석 자를 우리 시 곳곳에 새겨놓고 후대에도 영원히 기억하도록 온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21-02-10 05:21:09【파이낸셜뉴스 남양주=강근주 기자】 영석 이석영선생추모식 추진위원회와 남양주시가 오는 16일 오후 2시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남양주시 화도읍 소재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을 거행한다. 이날 추모식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유족과 남양주시 관계자를 중심으로 간소하게 진행하고 남양주시 공식 유튜브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통해 중계하고 유튜브 ‘우당TV’에도 탑재한다. 이종찬 추진위원장과 문희상 전 국회의장, 조광한 남양주시장, 황후연 경기북부보훈지청장, 이철영 남양주시의회 의장 등 30여명이 추모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영석 이석영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백사 이항복의 11세손이며, 우당 이회영-성재 이시영의 둘째 형이다. 이석영 가문은 6명의 영의정과 영의정 추증 3명 등 정승 9명을 배출한 가문으로 삼한갑족이라고 불렸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대감 양자로 입양돼 1885년 증광시(增廣試) 문과로 급제 후 1904년 종2품인 장예원(掌禮院) 소경(少卿)을 마지막으로 경술국치로 사직했다. 1910년 12월 우당 이회영, 성재 이석영 등 6형제와 같이 전 가족 40여명이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해방될 때까지 청산리 대첩 등 독립전쟁 주역으로 활동하며 광복군 주축을 이뤘다. 광복군 지청천 사령관, 1지대장 김원봉, 2지대장 이범석, 3지대장 김학규 등 광복군 지휘관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이석영은 일제가 ‘불령선인’으로 지명 수배해 피신하면서 심양, 북경, 천진, 상해 등을 유랑하면서 빈곤하게 생활하다 1934년 2월16일 상해에서 타계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석영 선생은 당대 갑부였던 양부 이유원 대감의 재산을 상속받아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매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유원 재산은 “경기도 양주에서 한양까지 80리 언저리 전답이 모두 이유원 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종찬 추진위원장은 9일 “이석영 선생이 서거할 당시 임시정부가 항주로 피신 중이라 장례를 모실 분이 없어 임시로 장례를 치렀지만 왜군 공격으로 전란이 격화돼 묘지를 보살피지 못한 채 잊혀졌다”며 직계 후손이 없어 “87년 만에 추모식이 아닌 장례식을 거행하게 됐다”고 추모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경기도에는 조선시대 금수저 사대부가 모두 살았지만 국가가 기울어질 때 나서는 이는 드물었다”며 “전 재산과 목숨을 항일운동에 바친 이석영 선생 6형제는 경기도 자랑이며, 남양주 자랑”이라고 추모했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남양주 역사의 숨결 속에 여전히 살아계신 이석영 이름 석 자를 우리 시 곳곳에 새겨놓고 후대에도 영원히 기억하도록 온 마음과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21-02-10 04:41:57[안산=파이낸셜뉴스 강근주 기자] 구한말 동북아 패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 시발점인 안산시 풍도가 126년 만에 본래 이름을 되찾는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1894년 지명을 '풍도(楓島)'에서 '풍도(豊島)'로 제멋대로 바꿨다. 안산도시공사는 작년부터 청일전쟁 도화선이 된 풍도해전 지명복원운동 등 역사 재조명 사업을 벌여 올해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3종에 풍도해전이 수록된데 이어 본래 지명 복원을 목전에 뒀다고 25일 밝혔다. 풍도는 일제가 풍도 앞바다 기습공격으로 시작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1894년 지명을 '풍도(楓島)'에서 '풍도(豊島)'로 무단 변경했다. 이에 따라 안산시와 안산도시공사는 공동으로 한자 지명 복원에 나섰다. 안산시지명위원회는 올해 5월 지명 환원을 결정하고 경기도 지명위원회, 국토부 국가지명위원회에 변경고시를 요청했다. ‘야생화 천국’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자연환경과 역사유산 등을 알리기 위한 전시회도 열린다. 안산도시공사가 위탁 운영하는 대부도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오는 28일 재개관에 맞춰 풍도해전 관련 유물과 함께 설치미술가 노동식의 콜라보를 선보이는 ‘풍도해전 상설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와 함께 지난달 박물관에 설치한 3D홀로그램을 통해 풍도해전 관련 영상을 송출해 풍도해전의 생생한 현장감도 전달할 계획이다. 양근서 안산도시공사 사장은 “풍도해전은 뒷날 일본이 국권을 강탈하는 빌미가 됐을 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아 패권경쟁을 보여주는 세계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며 “풍도 재조명으로 역사적 교훈을 얻고 풍도와 대부도 일원이 새로운 역사탐방지로 부상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일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풍도는 2005년 한 민간기업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해군 공격으로 침몰한 영국 국적의 청나라 보급선 고승호를 수중 발굴해 금과 은괴, 은화, 은수저, 소총, 아편 파이프 등을 건져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kkjoo0912@fnnews.com 강근주 기자
2020-07-26 13:5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