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21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중국 방문으로 국제정세의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는 오랜 동반자 대만을 버리고, '신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을 만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내용을 포함한 '하나의 중국 원칙', 당시 소련을 겨냥한 '아태지역에서 패권추구 반대' 등을 담은 양국 공동 외교선언인 '상하이 코뮈니케'도 발표했다. 두 나라는 수교의 기틀을 닦았고, '공동의 적' 소련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그해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수교는 1979년 1월로 늦춰졌지만, 그의 행보는 기존 질서를 허물고 냉전과 세계 질서의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닉슨의 중국 접근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미국의 아시아 맹방으로 자부하던 일본은 상상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닉슨과 그의 외교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귀띔도 없었고, 그 몇 해 전인 1969년 7월 전격 발표된 '닉슨독트린'과 더불어 안보환경에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분수령적 사건이었던 탓이다. 베트남에서 명예롭게 빠져나오려는 미국과 문화대혁명의 폐허 속에서 국제사회로 나아가려는 중국의 접근은 일본에 몰려오는 쓰나미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는 닉슨의 중국 방문 7개월 만인 그해 9월 29일 베이징에서 중국과 전격 수교 및 대만 단교를 발표하면서 급변하는 국제 질서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려는 발빠른 대응으로 일본은 중국 시장 선점, 전략적 공존구도 구축 등 미국의 질서 재편에 편승할 수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1972년 닉슨 쇼크는 일본에 동맹의 배신에 대한 깊은 불안을 체험하게 하고, 각인시켰다. 2010년대 중반 3년여 동안 도쿄에 살면서 중국의 부상에 위축되고 극도로 민감한 일본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는데, 그 밑바닥에는 동맹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깔려 있었다. 기자가 만났던 대부분의 일본 외교안보 관계자와 학자 등은 중국의 국지적 도발에 미국이 도와주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면서 동맹의 역할에 회의하고 있었다. 2010년 이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일중 갈등의 격화 속에서, 중국의 기습공격을 통한 실효지배(점령) 시나리오가 심각한 이슈로 떠올랐는데, 주일미군은 수수방관할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 기간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일본 방문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센카쿠열도를 거명하면서 방위공약을 재확인했다. 주일미군은 해외주둔군 가운데 최대 규모였고, 미국은 플루토늄 재처리도 허용했지만, 일본은 자국의 사활적 이해가 무시되고 생존공간이 줄어들 수 있는 두 강대국의 빅딜이나 충돌을 우려하며 신경을 곤두세워 왔다. 지난 10일(현지시간) 안드리우스 쿠빌리우스 유럽연합 집행위원은 유럽 방위·안보 연례회의 기조연설에서 "'퍼펙트 스톰'에 직면했다"면서 "곧 있을 미국 병력의 유럽 철수는 새 현실"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과) 감정적 결별(angry divorce)은 피하면서 안보 자강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트럼프가 일으킨 미국 중심주의·고립주의 폭풍은 닉슨 쇼크보다 더 파괴적이고 광범위하다. 지구촌 안전과 질서를 위해 미국은 더 이상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임도 분명히 했다. 쿠빌리우스의 발언도 '집으로 돌아가는 미군'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민을 담았다. 한반도는 예외일까. 지난 80년 동안 번영과 평화를 지켜주던 기존 질서의 붕괴에 어떻게 응전해야 자존을 지켜낼 수 있을까. 당파성을 넘어 외교안보정책의 국민적 컨센서스와 응집력을 모으는 작업은 이제 생존공간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발등의 불이다. 세계는 다극과 약육강식의 정글로 되돌아 가고 있고, 더 거칠어진 거인들 사이에 우리는 끼어 있다. june@fnnews.com 국제부장
2025-06-12 18:57:56【베이징·도쿄=정지우 김경민 특파원】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양국 국교정상화(수교) 50주년을 맞은 29일 그간 교류와 협력 성과에 대해 서로 칭찬하면서 향후 관계 발전에 공감대를 모았다. 이날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에 따르면 시 주석은 축전에서 “중일 관계 발전을 고도로 중시한다”면서 “기시다 총리와 함께 양측의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삼아 시대의 조류와 대세에 순응하며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중일 관계를 구축하는 데 공동으로 노력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또 “50년 전 오늘, 중국과 일본의 선배 지도자들은 중일 국교정상화의 중대한 정치적 결단을 함으로써 양국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며 “양국 정부와 인민의 공동 노력으로 양측은 4개의 정치 문서와 일련의 중요한 합의에 도달했으며 각 분야의 교류와 협력은 끊임없이 심화됐다”고 평가했다. 기시다 일본 총리는 축전을 통해 “일중 양국은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대해 큰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향후 50년을 내다보고 각하(시 주석)와 함께 양국뿐 아니라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일중 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50년 전 일중 양국 지도자들은 전략적 사고와 정치적 용기로 일중 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면서도 “현재 일중 관계는 여러 가능성과 함께 수많은 과제와 현안에도 직면해 있다. 50년 전 양국 수교 정상화를 이뤄낸 원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함께 일중 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양국은 1972년 9월 29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가 베이징에서 ‘항구적 평화 우호 관계를 확립한다’는 취지의 중일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중일 관계도 현 시점에선 삐걱거리고 있다. 일찌감치 친미적 기조를 밝혀온 일본은 중국을 미국 주도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세력이자, 자국 안보의 실질적 위협으로 보고 있다. 반면 미국에 맞서 우호국 결집이 절신한 중국은 미국 편에 선 일본에 대해 외교적으로 날을 세우고 있다. 다만 중국이라는 통일된 거대 인근 시장의 존재는 일본 경제에 여전히 중요한 상황이다. 중국도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강국이면서 주요 교역 파트너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전날 사설을 통해 “중일 관계가 미국 요인에 의해 깊이 억제되고 있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미국이 그런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해도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전적으로 명령을 하달 받는 하인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중일관계 전문가 견해를 소개한 같은 날 기사에서 “미국과의 심화하는 경쟁에 집중하고 있는 중국으로선 국익이 중일관계의 긴장 고조에 있지 않은 데다, 세계 2, 3위 경제대국 간에 무역과 투자에 호혜적 측면이 있다는 점은 관계 개선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제공한다”고 진단했다. 중일 정상 대화는 지난해 10월 통화 이후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대면 회담은 2019년 12월이 마지막이었다. 만약 회담이 이뤄지면 올해 가을 화상 방식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은 지난 8월 현지 매체와 인터뷰를 갖고 “양국 정부가 정상회담을 위해 조율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jjw@fnnews.com 정지우 김경민 기자
2022-09-29 15:45:12【도쿄=조은효 특파원】 1970년대 중반 '록히드 사건'으로 최고 권력자인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를 사임케 한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가 지난 4월 30일 급성관상동맥증후군(ACS)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이 23일 일본 언론에 뒤늦게 보도됐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 1974년 월간 '문예춘추 11월호에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검은 돈 줄'을 해부한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을 보도, 일본 정가를 뒤흔들었다. 이 보도로 결국 다나카 총리가 퇴진했다. 다나카 총리의 인맥을 샅샅이 훑고, 회사 등기부등본 등 갖가지 자료를 모아서 분석하는 방법으로 뇌물 관련 의혹을 드러내 '탐사보도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0년 나가사키현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4년 도쿄대 문학부 프랑스 문과를 졸업했다. 문예춘추사에 입사했으나 2년 후 퇴사, 도쿄대 문학부 철학과에 다시 들어가 재학 중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자유기고가로서, 월간지 등에 르포 기사나 평론 등을 게재했다. 그는 정치 뿐만 아니라 우주, 역사, 저널리즘 등 분야를 넘나들며 취재했으며, 저술활동도 왕성하게 했다. 대표 저서로는 '일본공산당 연구'(1978), '저널리즘을 생각하는 여행'(1978),'록히드 재판 방청기'(1981∼1985), '우주로부터의 귀환'(1983), '뇌사'(1986), '뇌사 재론'(1988), '21세기 지의 도전'(2000), '시베리아진혼가-가즈키 야스오의 세계'(2004) 등이다. 장서가 약 10만권에 이르는 독서가로도 유명했다. 불어나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서 지상 3층, 지하 1층의 서재용 빌딩을 지었을 정도다. 지난해 저서 '지식의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에 "장례식에도, 묘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을 남긴 데 따라서 장례는 수목장으로 치러진 것으로 알려졌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21-06-23 16:29:28【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각국의 코로나19 대응과 관련 "일본의 정치가가 최악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아베·스가 정권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무라카미는 일본 주간지 다이아몬드 온라인판에 27일 보도된 인터뷰에서 이런 지적과 함께 일본 정치인의 가장 큰 문제로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못 한다"고 말했다. 무라카미는 "지금 총리도 종이에 쓰인 것을 읽고 있을 뿐이지 않냐"며 기자회견이나 국회 답변 때 질문과 상관없이 준비된 원고를 마냥 낭독하는 스가 총리를 꼬집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유권자와 소통하려고 노력했던 정치인으로 미국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와 일본 총리를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꼽았다. 그는 그러면서 '아베노마스크를 배포한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고투를 지금 하는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고 제대로 말로 인정하면 된다"고 예를 들었다. 무라카미는 "그런데도 많은 정치가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쓸데없이 정치에 대한 불신이 확산하는 것이다. 일본 정치가의 근본적인 결함이 코로나19로 드러났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20-12-27 21:28:26【 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 정가가 심상치 않다.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여론 악화에 시달리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0만엔 현금급부' 정책으로 당정 간 불협화음까지 빚으면서 정권 붕괴로 가는 전조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자민당 내에서조차 총리의 독단과 아집을 꼬집어 "정권 말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통탄할 정도다. 당의 위기감은 선수교체, 정국개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자민당 내에선 아베 총리의 6월 실각설을 제기하는 마당이다. 아베 총리의 실책은 누군가에겐 덩달아 '위기'요,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다. '포스트 아베' 차기 총리주자들의 명운이 엇갈리는 모양새다. 코로나19 사태가 정국개편의 주된 변수로 부상하면서 포스트 아베들의 몸풀기가 본격화되는 모양새다. 자민당 킹메이커들의 움직임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누가 울고, 누가 웃을지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 ■'선전전의 여왕' 고이케 코로나19 정국의 최대 수혜자라 함은 단연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라고 할 수 있다. 고이케 지사는 아베 총리나 일본 정부보다 앞서서 '도쿄 봉쇄' 가능성은 물론이고, '감염폭발 중대국면'을 외치며 코로나19 확산에 경고사인을 보냈다. 이달 들어선 거의 매일 오후 6시30분~8시께, 저녁 황금시간대에 마치 뉴스 앵커처럼 앉아 코로나19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오는 7월 도쿄도지사 재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선거전은 없다.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의 깔끔한 말솜씨, 트레이드 마크인 진한 화장, 각종 무늬가 들어간 천마스크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근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자숙을 촉구하는 내용의 TV 광고까지 찍었다. 무관심보다는 악평이 낫다는 정가에서 '선전전의 여왕'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일부에선 고이케 파워가 과거 '도쿄도가 일본 전체를 움직인다'고 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던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재임기간 1999~2012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아베 내각이 난색을 표했던, 자발적 휴업점포에 대한 지원금 정책은 이미 주요 광역지자체로 확산되면서 고이케가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 이 정책은 소규모 점포 등 소상공인을 당원 및 지지층으로 두고 있는 공명당과 자민당 본류로 복귀하기 위해선 세 불리기가 필요했던 고이케의 합작품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2016년 도지사 선거 당시 아베 총리가 다른 후보를 밀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돌풍을 일으킨 고이케는 재선에 도전하며, 자민당 2인자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의 지원을 물밑에서 약속받았다. 재선 시 친정 복귀는 물론이고, 나아가 총리 후보군 대열에 오를 것으로 관측된다. ■'킹메이커' 니카이 존재감 과시 81세의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중의원 12선)은 지난 22일로 간사장 재직일 통산 1359일을 찍으며, 모리 요시로 전 총리(현 도쿄올림픽조직위원장)의 간사장 기록을 제치고 역대 2위 기록을 차지했다. 오는 9월 8일이 되면 '정치스승'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총리 재임 1972년 7월~1974년 12월)을 넘어 역대 최장 간사장이 된다. 니카이 간사장이 노익장을 과시한 건 다름아닌 10만엔 현금 급부정책이다. 아베 총리와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는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이 만든 '소득기준 가구당 30만엔 급부 정책'의 판을 뒤엎은 것이다. 현금 급부를 골자로 한 추가경정예산안이 이미 각의(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 처리를 앞둔 상황에서 정책이 바뀐 건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연립여당인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가 아베 총리를 만나 전 국민 1인당 10만엔씩 현금을 주는 것으로 '담판'을 지은 것으로 돼 있으나, 그에 앞서 당내 2인자인 니카이 간사장의 1인당 10만엔 주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니카이 간사장은 지난 2017년 당내 반발을 틀어막고, 자민당 총재 연임규정을 고쳐(2연임·6년→3연임·9년) 아베 총리에게 3연임을 안겨줬다. 아베 총리 장기집권의 일등공신이자 킹메이커였던 것. 그러나 최근 둘 사이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최근 아베 총리의 잇단 실책으로 자민당이 공멸의 길로 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제기되자 주변에 아베 총리 '6월 퇴진설'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국회가 있는 나카타초(한국의 여의도 격)에선 니카이파(소속 중의원 40여명)를 이끌고 있는 그가 '누구와 손잡느냐'가 차기정권 탄생의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니카이가 '키맨'이란 얘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 후보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이나 도쿄도지사 재선을 발판으로 차기 레이스를 노리는 고이케 지사 등 포스트 아베 후보군들이 니카이 간사장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등 그를 우군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체면 구긴 포스트 아베' 기시다 아베 총리는 차기가 누가 될지 공개적으로 밝힌 바는 없으나, 이번 코로나19 사태 직전까지만 해도 일본 정가에선 아베 총리가 4연임에 나서지 않는다면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당 정책위의장)이 사실상 추대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시바 전 간사장과 과거 2012년, 2018년 두 차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맞붙었던 좋지 않은 기억도 있고 기시다 정조회장이 잠자코 순서를 기다렸던 측면도 있기에 아베 총리가 이번엔 기시다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그가 아베 총리의 코로나19 실책의 최대 희생양이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초 아베 총리와 보조를 맞춰 소득이 감소한 가구에 한해 30만엔을 주는 정책을 추진해 온 그는 각의까지 통과한 정책이 당 2인자인 니카이 간사장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합작으로 1인당 10만엔으로 수정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으면서 정조회장으로서 체면을 구겼다. 자민당의 한 참의원은 최근 아사히신문에 기시다를 가리켜 "가장 큰 망신을 당했다"며 "당내 구심력이 약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1일엔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휴업을 실시한 점포에 지원금을 주는 정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도 고이케에 밀려 뒷북정책이란 평가가 나온다. 니카이 간사장과의 알력싸움이 원인이 됐다는 게 지배적 분석이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3일 총리관저에서 아베 총리와 회동 직후 "소득이 감소한 가구에 30만엔을 지급하는 문제에 대해 총리와 인식을 같이했다"고 밝힌 직후 니카이 간사장이 "간사장실에 일절 상담이 없었다"면서 진노했다고 보도했다. 니카이와 기시다 간 갈등이 촉발한 건 지난해 가을이다. 아베 총리가 니카이 간사장을 제치고 기시다를 새 간사장에 올리려 했던 게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양측 간에 종종 충돌이 있었으나, 이번엔 선을 넘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시다 정조회장이 이끄는 파벌인 굉지회(기시다파·중의원 49명)는 경제정책 중심의 친아시아정책을 표방하는 자민당 온건파 계열이다. ■'힘빠진 레이와 아저씨' 스가 지난해 일본의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발표해 일명 '레이와 아저씨'로 한때 포스트 아베 후보군에 포함됐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존재감은 최근 크게 약화됐다. 역대 최장수 관방장관인 스가 장관은 노련하고 매끄러운 브리핑, 실수하지 않는 브리핑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전형적 참모 스타일로 정권의 위기관리를 담당해 왔다. 그런 그가 최근 총리관저의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면서 아베 내각의 우왕좌왕이 심화됐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이른바 '위기관리 시스템의 붕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스가 장관이 가구당 30만엔 현급 급부정책이 1인당 10만엔으로 뒤집히는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기존엔 스가 장관이 니카이 간사장, 공명당과 관저를 잇는 '파이프' 역할을 해 왔으나, 이번엔 아베 총리 주변의 참모들이 정책을 주도하면서 스가 장관이 배제됐다는 것. 최근 일본의 시사잡지 주간 문춘은 국민적 공분을 산 '아베노마스크'로 불리는 천마스크 정책을 내놓은 건 다름아닌 경제산업성 출신의 관저 참모인 사에키 고조 총리 비서관이었다고 폭로했다. 이런 정책 결정 과정에 스가 장관이 제대로 관여하지 못한 게 패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스가 장관은 이미 포스트 아베에서 멀어진 상태다. 아베 총리와 스가 장관 간에 금이 간 건 지난 9월 개각 이후부터다. 스가 장관이 추천한 장관 두 명이 비위로 날아가면서 입지가 좁아진 데다 '벚꽃보는 모임' 스캔들 때나 지난 2~3월 크루즈선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했을 때도 스가 장관의 대응에 아베 총리의 불만이 폭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관저 참모들이 주도한 갑작스러운 휴교령, 긴급사태 선언 늑장대처, 천마스크 정책, 휴일 트위터 투고는 이보다 더 큰 악수였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20-04-26 18:02:23【 도쿄=조은효 특파원】 "아베노믹스? 대기업과 주주를 위해 주가 올린 것 아닌가." 일본의 유력한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이시바 시게루 자민당 전 간사장의 아베노믹스에 대한 촌평이다. 아베노믹스에 대해 "좋은 부분은 계속하고, 개선해야 할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면서도 "국민의 소득이 얼마나 높아졌는가. 금융완화를 계속 한다고 해서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지는가.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반문이 이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코로나19 방역 대응에 사실상 실패하면서 자민당에선 6월 퇴진설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의 실책과 비판여론이 커질수록 지난 2012년과 2018년 두 차례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총리와 맞붙었던 이시바 전 간사장의 등판설이 부상하고 있다. 아베 총리의 '맞수' 이시바에 대한 강한 견제로 그의 파벌은 축소될 대로 축소돼 있지만, 자민당이 코너에 몰리면 몰릴수록 국면전환 카드로 결국엔,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감으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시바 전 간사장을 소방수로 투입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피어나고 있는 것. 이른바 '이시바 시게루 대망론'이다. '포스트 아베' 대표주자가 품고 있는 생각이 궁금해졌다. 도쿄 나카타초 중의원회관에서 이시바 전 간사장을 만나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한·일 관계, 북·일 관계, 일본 정치와 개헌 문제, 일본 경제에 대해 폭넓은 대화가 오갔다. 그의 사무실 서고엔 칸칸이 다케시타 노보루, 다나카 가쿠에이, 하시모토 류타로, 후쿠다 야스오,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역대 일본 총리들의 사진이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7년여에 걸친 아베노믹스의 평가는. ▲아베노믹스의 효과? 그건 주가 올린 것 아닌가. 주주와 대기업의 이익이 커진 것, 그게 아베노믹스 최고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소득이 얼마나 올라갔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누가 정권을 잡는다 해도 앞으로는 국민의 소득을 늘려야 한다. 대기업, 주주, 경영자, 그리고 도쿄(수도권)의 이익이 일반 국민과 중소기업, 지방으로 이어질 것이란 (낙수효과)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정권을 잡게 된다면, 이시바 전 간사장이 구상하는 경제정책, 소위 '이시바노믹스'가 있다면. ▲지금까지 아베노믹스의 성공은 도쿄, 대기업, 남성을 중심으로 전개돼왔으나 이제 이런 식의 경제정책은 한계에 다다랐다. 잠재력이 있으나 이제껏 중심에 서지 못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 중소기업, 서비스업, 고령자, 여성, 지방, 농업·어업·임업 등 1차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아베노믹스의 재정확대, 금융완화는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좋은 부분은 계속하고, 개선해야 할 부분은 개선해야 한다. 금융완화를 계속한다고 해서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나. 재정을 엄격히 한다는 건 중요한 문제이나 교육, 청년, 결혼과 육아 등 그간 배분하지 않았던 분야로 재정의 중심을 조금 옮겨가고 싶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재정확대 및 금융완화와 관련, '큰 폭의 궤도수정' 여부에 대해선 비교적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다만, 정책대상에 대한 일정폭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한·일간 관계 악화가 지속되고 있는데.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목소리를 높여 강조). 양국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불사하지 않아야 한다. 정상 간에 교류가 없는 건 굉장히 큰 손해다. 일본으로선 한국 대통령과 신뢰 관계를 높여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감정을 정치로 이용하는 건 전혀 좋은 정치가 아니다. 아베 정권이 얼마나 계속 갈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한·일 관계가 나빠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관계 개선을 위해 공유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과거 김대중 대통령,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양자 공히 균형감각이 뛰어난 정치가였고 (반일·반한의) 편가르기가 아닌, 어떻게 하면 양국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해 노력했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양국 국민의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에) '반일종족주의'라는 주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관계 개선에 나서려면 한국 쪽이 더 어려울지 모른다. 일본 역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허나 정치가라면, 설득해 나가야 한다. 아무리 각자 주장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해도 관계 개선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과거 위안부 문제와 관련,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는 소신 발언을 펼친 바 있는데, 징용 문제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1965년 한·일 기본조약 협상 당시 일본에서 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싶다는 제안을 내놨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가 '왜 일본 정부가 한국 국민에게 배상을 하느냐'라면서 거절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내에서 그 부분을 다시 검토해봤으면 좋겠다. 실제 그로 인해 한국에서 (노무현정부 당시) 개인에게 돈을 지급한 바가 있지 않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나 징용 문제에 대해 (과거사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한국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에도 일본은 여전히 수출규제를 지속하고 있다. ▲징용 문제와 수출규제는 별개의 문제다. 일본 정부가 특별히 한국에 대해서만 차별적 정책을 취하고 있다곤 생각하진 않는다. (아베 정권에서) 징용과 수출규제가 관계가 있는 것처럼 발신한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북한으로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면, 일본으로선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이 유출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면 다시 화이트국으로 복귀할 것이다. 한국으로선 일본이 안심하도록 설명해야 하며 일본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측에 설명을 구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문 대통령은 한·일 관계보다 한반도 통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친북좌파정권이라는 시각도 많지만 실제 그런지 아닌지는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보지 않고선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로 뽑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일본 국민으로서 존중할 필요가 있다. ―북·일 관계에 대한 구상은. ▲과거 30년 전 김일성 주석이 생존할 당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만나보지 않아 어떤 지도자인지, 뭘 생각하는 정권인지 역시 판단할 도리가 없다. 북한이 주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북·일 관계에서 보자면) 평양과 도쿄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게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통일 시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게 될지,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될지 그런 문제까지 시야에 놓고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북·일간 연락사무소 설치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일본의 총리가 된다면 북·일 대화에 적극 임할 생각인가. ▲납치, 핵, 미사일 문제에 대해 북·일 간에 정부 대 정부로서 확실한 교섭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핵 문제에 있어 북한이 상대하려는 건 미국뿐이며, 여태까지 북·일 관계는 북·미 관계에 좌우돼 왔다. 모든 안보를 미국에 맡기는 외교는 제대로 된 외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2002년 9월)한다고 했을 때 미국의 반대가 컸다. 일본 외교로선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일본 독자적 외교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게 비록 인기를 끌 소재가 못된다고 해도 말이다. (그다음 단계인) 북·일 간 국교정상화와 관련해선 핵, 미사일, 납치 3대 문제의 '선 해결, 후 수교' '선 수교, 후 해결' 두 가지가 있으나, 어느 쪽이 메리트가 있는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국교정상화를 무조건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나 그런 논의를 빨리 전개하는 편이 좋다. ―아베 총리는 개헌을 추진 중이다. 이시바 전 간사장도 헌법 9조2항(전력 보유 금지)을 아예 없애는 방안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일본 헌법 9조2항엔 육군도, 해군도, 공군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건 뭔가.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공군자위대는 뭔가. 군대라는 명칭은 안되고 자위대라는 명칭으로는 된다는 것인가. 일본은 그간 국제법을 제대로 지켜왔다. 현실과 헌법에 갭이 크다는 건 그다지 옳은 상태는 아니다. 국민을 이해시키기 위해 9조2항을 변화시키는 것은(개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 보수정치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도 보수의 위기다. 보수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은. ▲보수라는 이데올로기가 따로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보수는 모든 것들을 수용하기 때문에 대립구조를 만드는 건 보수가 아니다. 매우 좁은 역사관이나, 편협한 의미에서 내셔널리즘 같은 건 보수의 본질적 가치가 아니다. 세계 평화와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 보수의 제1의 가치다. ■ 이시바 前 자민당 간사장은… 전쟁 반성않는 현실 비판한 '합리적 보수'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은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수정주의 역사관에 대해선 단호히 비판한다. 한·일간 과거사 갈등에 대해선 "일본이 전쟁 책임과 마주하지 않은 게 문제의 근원"이라며 뼈아픈 성찰을 내놓은 바 있다. 반면 징용 문제 해법에 있어선 아베 정권과 궤를 같이하고, 개헌론에 서 있다. '합리적 보수'로 자민당 온건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진중한 성미의 명문 게이오대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이다. 일본에선 드물게 기독교 신자다. '군사 오타구'이며 프라모델 만들기가 취미다. △63세 △게이오대 법학부 △중의원 11선 △자민당 간사장 △방위상 △지방창생담당상 △농림수산상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20-04-20 18:12:49【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의 유력한 차기 총리 주자로 꼽히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은 한국의 시각에서 볼 때 한 마디로 '입체적 캐릭터'의 정치인이다.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수정주의 역사관에 대해선 단호히 비판하면서도 평화헌법으로 일컬어지는 일본 헌법 9조2항에 대해선 개헌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자위대의 존재와 전력보유를 금지한 일본 헌법 9조2항간 불일치를 제기한다. 과거 자민당 총재 선거 직전 출간한 대담집 '이런 일본을 만들고 싶다'(2012년)에선 전쟁에 대한 검증과 반성을 행하지 않는 일본의 교육 현실을 비판한 바 있다. 한·일이 위안부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할 당시엔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이 납득할 때까지 사과해야 마땅하다"고 했으며, 지난해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파기 결정을 내렸던 당시엔 "일본이 전쟁 책임과 마주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근본"이라며 일본 사회에 뼈아픈 반성과 성찰을 촉구했다. 일본의 보수 정치인으로선 소신있는 발언이란 평가가 잇따랐다. 그런가하면 강제징용 문제 해법이나 이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 조치인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 있어선 아베 정권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단순히 일본의 우파적 시각이라기 보다는, 원칙론적인 입장에 가깝다. 납치, 핵, 미사일 등 북·일간 3대 쟁점에 있어선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북·일 대화엔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과거엔 신자유주의자였으나, 최근에 저출산·고령화, 지역 발전 불균형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합리적 보수'로 자민당 온건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 일본에선 드물게 기독교 신자인 점, 진중한 성미의 명문 게이오대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이라는 점 등도 입체적 캐릭터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이시바 전 간사장 모두 보수 정치를 표방하고 있으나, 계보가 엄연히 다르다. 아베 총리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매파 안보노선을 계승했다면, 이시바 전 간사장의 정치 스승은 경무장·경제발전을 강조한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자민당 온건보수파 노선을 이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다. 이런 '차이'와 '공통점'이 향후 일본의 한반도 정책에 어떤 요소로 작용하게 될 지 주목된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20-04-20 12:28:57【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 정치사의 산증인이자 일본 보수의 원류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1982년 11월~1987년 11월 재임)가 29일 타계했다. 향년 101세. 고인은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고 집권 5년간 신자유주의 기조의 '작은 정부' 기조를 표방하며, 국철(현 JR)분할 민영화·일본전신전화공사(NTT)민영화, 원전 정책을 추진했다. 외교안보적으로는 냉전체제를 활용해 일본 외교를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 보유·개헌 등 우경화 노선을 추구했다. ■ 냉전시대 자유진영 결속 주장 극우 정치인이면서도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중국과 밀월관계를 형성할 정도로 외교에선 야누스적 면모를 보였다. 1980년대 미국과 극심한 무역마찰을 겪으면서도 냉전이란 외교 지형을 고리로 미·일 동맹을 강화시켰다. 특히, 당시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는 '론'과 '야스'로 서로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과시했다. '론 야스 시대'는 미·일 정상이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일본 외교를 발돋움하게 한 시기였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엔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절상시킨 플라자합의(1985년)로 인해 일본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기기도 했다. 재임 기간 한국과도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일본 보수 정치의 원류로서 '우경화 기조'와 일견 논리적으로 결을 달리했으나, 현실 정치에선 전후 최고의 '지한파' 정치인이었다. 지한파 행보로서 주목되는 몇 가지 사건 중 하나가 총리 취임 직후(1982년 11월) 이듬해 1월 첫 해외 방문지로 한국을 택한 일이다. 당시 일본 내에선 파격적 행보였는데, 일본 총리로서 사상 첫 한국 방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에 앞서 1981년 신군부가 '김대중 사형 판결'을 내렸을 땐 감형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방일 전 양국은 일본의 교과서 기술 및 한·일 경제협력차관 협상 갈등, 신군부와의 관계 설정 등으로 지금과 같이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는 취임 직후, 긴급 외교현안으로 '한·일 관계 정상화'를 내걸고, 한·일 관계 막후 실력자인 세지마 류조와 권익현 라인을 통해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당시 한·일 정상회담으로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차관 협상이 마무리됐는데, "한국이 번영해야 북한이 남침해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명분을 강조했다고 한다. 실제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과 일본은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미국과 함께 결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유진영의 한 축으로서 한·일 관계 개선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 후 술자리에서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한국말로 열창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이 일에 대해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며 두고두고 회고하기도 했다. 재임 중인 1985년 '우익 본능'에 따라 일본 총리로서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가 한국·중국의 반발을 산 뒤 중단한 일도 있다. 2000년대 들어선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 함께 한일·일한 협력위원회의 공동 회장을 맡으며,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소통의 파이프 역할을 했다. 생전에 요미우리 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선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판단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구했던) 무라야마 담화를 따라 성의 있는 표현을 시대의 흐름 속에 담아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소수파벌에서 대통령급 총리로 일본의 보수 정치인으로서 고인의 정치 인생은 '수 싸움'의 연속이었다. 1918년 도쿄 인근 군마현 출신으로 도쿄대 졸업 후 옛 내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종전 직후인 1947년 28세 때 중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후 내리 20선을 달렸다. 1966년 나카소네파를 결성, 소수 파벌로서 일본 정계의 '풍향계'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세를 불렸고, 마침내 1982년 자민당 주류인 다나카파의 강력한 지원 아래 제71대 일본 총리에 올랐다. 총리 취임 초기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영향력 밑에 있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이름을 이어 붙인 '다나카소네 내각'이란 별명이 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으나, 이른바 록히드 사건을 기점으로 다나카 전 총리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대통령급 총리'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그로 인해 아베 내각, 사토 내각, 요시다 내각에 이어 전후 4번째 장기정권을 이끌었다. 타계 직전까지 공익재단법인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세계평화연구소' 소장과 초당파 국회의원 모임인 '신헌법제정의원동맹' 회장을 맡을 정도로 일본 보수 정치의 후견자 역할을 해왔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2019-11-29 16:27:33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3연임 여부를 결정할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 총재 선거가 다음달 20일로 다가오면서 아베 총리의 독주에 맞서는 이시바 시게루 전 자민당 간사장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베 총리와 마찬가지로 우파 진영의 핵심인물인 시게루 전 간사장은 비록 도쿄에서 아베 총리의 파벌에 밀리고 있지만 지방 민심을 모아 아베 총리의 독주를 막으려 들 것으로 보인다. 1957년 2월 4일에 일본 돗토리현 야즈군에서 태어난 시게루 전 간사장은 전형적인 세습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50~70년대 4번이나 돗토리현 지사를 역임하고 1980년에 일본 자치상을 지냈던 이시바 지로의 장남으로 태어나 게이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1979년에 미쓰이스미토모은행(당시 미쓰이은행)에 입사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1981년에 부친이 타계한 이후 부친의 친우였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권유로 정치에 뜻을 품었다. 그는 퇴사 후 1986년 고향 돗토리현의 중의원(하원) 선거에 출마했고 29세의 나이로 당시 일본 최연소 중의원에 당선됐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지난해 총선까지 빠짐없이 승리해 어느덧 11선 의원이 됐고 방위청 장관, 방위상, 농림수산상,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거쳐 2012년부터 2년간 자민당 간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1993년에 당 내 갈등으로 잠시 자민당을 탈당했으나 1997년에 복당한 이력이 있으며 2014년부터 아베 내각에서 지방창생·국가전략특구 담당상을 맡고 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2008년에 처음으로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했으나 아소 다로 전 총리에게 압도적으로 패했지만 2012년 총재선거에 다시 출마해 아베 총리과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자민당 총재는 지방당원과 중·참의원(상원)들의 투표를 합산해서 뽑는데 이시바 전 간사장은 2012년 선거 당시 전체 498표(지방 300표·의원 198)가운데 199표를 얻어 아베 총리(141표)를 꺾었다. 그는 이후 의원들만 참여하는 결선투표에서 19표 차이로 아베 총리에게 졌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2015년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지난 10일 오는 9월 총재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이번 선거에는 지방과 의원에 각각 405표씩, 총 810표가 배정됐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는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가 되며 자민당 내각은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해 2021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일본 내에서 우파이긴 하지만 '현실주의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2012년 총재 선거 당시 집단자위권 확보와 일본 자위대의 국방군 전환, 해병대 신설 등을 주장하며 안보 강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시바 전 간사장은 과거 태평양 전쟁에 대해 정부가 지는 전쟁에 국민들을 내몰았기에 관련 인사들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밝혔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력히 비난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국이 납득할 때 까지 위안부 문제를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바 전 간사장은 이번 선거에서 개헌 문제를 두고 아베 총리와 정면 대결을 펼쳐야 한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평화헌법 9조에서 전쟁포기를 명시한 1항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2항에 이어 자위대의 근거를 인정하는 3항을 추가하자는 입장인 반면 이시바 전 간사장은 2항과 3항을 동시에 두는 것이 모순이라고 본다. 그는 2항 삭제를 요구하면서 이를 위해 국민적 이해와 설득이 필요하다며 아베 총리가 개헌을 독단적으로 몰고 간다고 비난하고 있다. 지금 당장 판세만 보자면 아베 총리가 유리하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6일 보도에서 설문조사 결과 자민당 의원 405명 중에 70% 이상이 아베 총리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아베 총리는 이미 승리를 예상하고 최대한 압승을 거둬 3연임을 정당성을 증명하겠다는 심산이다. 한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 24~2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아베 총리와 이시바 전 간사장의 지지율은 각각 39%와 31%로 나타났다. 이시바 전 간사장이 도쿄 정치권에 싫증난 지방 민심을 잡을 수 있다면 역전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18-08-30 21:47:08일본 언론들이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해 일본과의 관계를 조망하며 애도를 표했다. 언론들은 김 전 총리를 일본 정치인들과 친분을 나눈 '지일(知日)파'라고 표현하면서, 그가 대일 청구권 협상을 주도했으며 DJ 납치 사건 당시에는 일본에 와서 일본 정부의 수사를 무마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이니치신문은 김 전 총리에 대해 "1976년 한일 의원연맹의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등 일본 정계에 지인이 많다"며 "한일 관계의 파이프(통로)로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신문은 '김종필 전 총리 별세…한일국교정상화를 정치해결' 제목의 기사에서 "김 전 총리가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외무상과 국교 정상화에 따른 경제 지원을 '무상지원 3억달러, 유상지원 2억달러'로 정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1973년 도쿄(東京)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사건에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관여했다는 의심이 커지자, 당시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1918∼1993) 총리와 회담해 일본이 수사를 사실상 종결하는 데 합의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교도통신은 김 전 총리의 별세 소식을 속보로 전하는 한편 고인에 대해 "일본 보수 정계와의 인맥을 살려서 대일 정책을 추진했다"고 소개했다. 김 전 총리는 나카소네 전 총리 외에도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1924∼2000) 전 총리,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1937∼2000) 전 총리,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자유당 대표 등 일본 정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전 관방장관은 김 전 총리의 별세 소식과 관련해 교도통신에 "한일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히 말한 정치가였다. 한일의 경제관계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시절 김 전 총리의 자택을 방문한 적 있다며 "당시 김 전 총리가 '한일관계가 경직된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인상에 남는다"고 말했다. 일본공산당의 가사이 아키라(笠井亮) 정책위원장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지지한 과거는 있지만 199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며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 성공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18-06-23 16:2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