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한갑수 기자】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수립 주역인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역사거리가 조성된다. 인천시와 중구는 중구 신포로 일부를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 역사거리’로 조성한다고 6일 밝혔다. 백범 역사거리로 조성되는 신포로는 김구 선생이 청년시절 투옥됐던 인천감리서(조선 고종때 개항장의 통상업무를 담당하는 관청)가 위치했던 곳이다. 백범 역사거리 조성사업은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특별교부세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았으며 여기에 구비 1억원을 더해 총사업비 2억5000만원이 투입된다. 이 사업은 김구 선생이 투옥됐다 탈옥한 인천감리서 터를 정비하고 탈출경로 150m를 역사거리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인천시 중구는 현재 인천감리서 터에 설치된 채 방치되다시피한 표지판·표지판과 주변 환경을 정비한다. 도로와 접해 있는 계단·담장·옹벽에 김구 선생 관련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도 설치할 예정이다. 역사거리가 시작되는 도로 입구 쪽에는 관광객이 안전하게 왕래할 수 있도록 80m 가량 인도를 설치한다. .중구는 청년 김창수 역사거리가 조성되면 인근 신포 문화의 거리, 신포시장, 인천개항장 등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접근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천시는 남동구 인천대공원에 조성된 김구 동상과 백범광장을 이전을 추진한다. kapsoo@fnnews.com
2019-02-01 09:55:16[파이낸셜뉴스] 국가보훈부는 오는 15일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미국과 중국, 카자흐스탄 등 3개국에 거주하는 30명을 초청, 이달 11일부터 17일까지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방한 행사를 진행한다고 9일 밝혔다. 이번 행사는 '세계 속 우리, 빛나는 대한민국'이란 주제로 진행하며 3·1운동을 비롯해 무장투쟁, 교육, 외교, 독립운동 자금 지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의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독립유공자 21명의 후손 30명이 참여한다. 만주와 연해주 방면에서 무장투쟁을 펼치고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도 활동한 김경천 지사(1998년 대통령장)의 후손 헤가이 스베틀라나(50·카자흐스탄), 헤가이 다니일(15·카자흐스탄)과 1907년 13도 창의군 결성 당시 관동창의대장으로서 서울진공작전을 지원했던 의병장 민긍호 지사(1962년 대통령장)의 현손 민 안나(20·카자흐스탄) 씨도 선열들의 조국을 찾는다. 부부 독립유공자 후손들도 방한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한 오영선(1990년 독립장)·이의순(1995년 애국장) 지사의 후손 호패중(65·중국), 호건성(22·중국), 심운(54·중국)을 비롯해 중국 방면에서 광복군 활동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신정숙(1990년 애국장)·장현근(1990년 애족장) 지사의 외증손자 김진(19·미국)씨가 한국을 방문한다. 특히 유관순 열사의 사촌으로, 유관순 열사와 함께 3·1운동에 참가했던 유예도 지사(1990년 애족장)의 증손자 김재권(44·미국) 씨가 한국을 찾는다. 유관순·유예도 지사의 가문은 3대에 걸쳐 총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12일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를 비롯해 한글박물관과 인사동 거리에서 서예와 문화 체험을 한다. 이어 13일 독립기념관과 진관사, 14일 국립중앙박물관과 인천 백범 김구 역사 거리 등에서 일정을 갖고 15일엔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한 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 등을 한다. 16일엔 임진각과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방문하는 안보 견학에 이어 강정애 보훈부 장관이 주관하는 환송 만찬에 참석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고 17일 출국한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4-08-09 17:05:40【 인천=한갑수 기자】 개항기 제물포 조약(1882년)으로 제물포가 개항된 이후 일본인과 청나라, 미국 등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인 조계지(1884년)가 속속 생겨나면서 이곳에 자생적으로 생긴 시장이 신포국제시장이다. 인천 최초로 개설된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 상인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인천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배추, 무, 양파, 피망, 당근 등의 농사를 지어 일본인들에게 내다 팔았다. 이곳에는 연안에서 잡은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시장과 닭 전 거리도 있었다. 신포국제시장은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인천시청이 1985년 중구청 자리에서 현재 위치인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중수교보다 2년 앞선 1990년 인천항과 중국 웨이하이를 운항하는 한중 카페리가 운항하면서 중국 관광객이 인천항으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차이나타운이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신포국제시장이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제2 전성기를 맞았다.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 시장신포국제시장은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과 지리적으로 연결돼 있다. 노포와 숨은 맛집이 즐비해 이곳을 오랫동안 단골로 찾는 사람도 많지만 개항장과 차이나타운을 찾은 관광객들도 한 번 정도는 꼭 들르는 곳이다. 신포국제시장을 이야기 할 때 개항장과 차이나타운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일대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천을 대표하는 음식이 짜장면과 쫄면이다. 짜장면은 한·중·일 3개 국가의 음식문화가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를 거듭한 끝에 탄생한 음식이다. 짜장면에 고춧가루(한국)를 뿌려서 타쿠앙(일본)을 반찬으로 놓고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나타운을 즐기는 비법 한 가지를 소개하면 짜장면 순례를 하는 것이다. 짜장면은 아무 중국집에서나 먹을 수 있지만 차이나타운에서는 맛과 재료가 특별하다. 백년짜장, 하얀짜장, 고기짜장 등 중국집마다 특색 있어서 한집씩 짜장면 순례에 나서는 것도 좋다. 쫄면은 1970년대 초 신포국제시장 건너편인 경동 광신제면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일반 면발에 비해 녹말가루를 더 넣는 바람에 냉면보다 덜 질기면서도 더욱 쫄깃한 면발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굵고 쫄깃한 면발에 고추장을 비롯한 갖은 양념을 넣고 콩나물 등 신선한 각종 야채를 함께 비벼 먹는 쫄면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여름의 별미인 냉면은 이북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그 유래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장 일대에도 냉면이 유명한데 동인천역 뒤편 화평동에 냉면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곳은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하다. 세숫대야 같은 큰 그릇에 나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 만큼 양도 많고 맛도 좋다. 신포국제시장은 코로나19 발생 이전에는 평일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중국·일본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해외 관광객이 단체 투어를 올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겼다. 최근에는 주말에만 소수의 중국 관광객과 한국인 관광객들이 시장을 방문하고 있다. ■주말 국내외 관광객 문전성시개항장 일대에는 개항과 더불어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인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국내외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상권도 번성했다. 이때 세워진 근대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물포 구락부(현 인천시 역사자료관),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현 개항박물관), 인천우체국 등 많은 근대문화자산이 남아 있다. 개항장은 일본과 청나라, 미국, 러시아 등 열강이 각축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이곳에 일본 조계, 청 조계, 각국공동조계(미국인, 영국인, 일본인, 청국인, 독일인, 러시아인, 프랑스인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가 세워지면서 개항장은 신문물 도입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묵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개항장에 들어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볼 요량으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중국집인 태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가게에 손님들로 가득 차 빈 자리가 없었다. 관광객들이 거리 대신 여기 모여 있었다. 잠시 기다린 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다른 중국집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주말이면 대부분 가게가 손님들로 가득 찬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나오자 건물과 거리는 마치 중국에 와 있는 것처럼 중국풍으로 확 바뀌었다. 1960년대 설립 당시 중국 화교들의 성당이었던 천주교 해안성당을 지나자 짜장면 박물관이 보였다. 짜장면 박물관에서 중국성, 최초로 짜장면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 연경, 만다복, 신차이로 이어지는 차이나타운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야 할 정도였다. 몇몇 공갈빵 가게와 꼬치 가게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는 젊은 직원들이 관광객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수제 공갈빵 있어요. 맛 보고 가세요!" ■100년 이상 역사와 함께한 신포국제시장때 이른 초여름 날씨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할 즈음 자유공원에 도착했다. 눈앞에 광장이 펼쳐졌다. 광장에 전망대는 따로 없지만 인천내항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내항은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부두이다. 우리 국민들을 강제 동원해 삽이나 곡괭이도 주지 않고 맨손으로 땅을 파게 해 부두와 갑문을 건설했다. 백범 김구는 서간도에서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모으다가 1910년 체포(안악사건), 서울서 옥살이를 하다가 1914년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백범은 1부두 축항 공사장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백범은 1896년 명성왕후 시해범을 살해해 인천감리서에 갇혔었는데 신포시장 상인들이 주축이 된 인천객주회가 백범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개항장에서 신포국제시장으로 넘어가는 길인 신포패션 문화의 거리 입구에서 인천 내동교회까지 이르는 '청년 백범 역사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자유공원 광장 끝에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이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면서 맥아더 장군 동상은 보수의 상징처럼 돼 논란의 중심이 되기 일쑤였다. 요즘 이 동상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를 새로 바꾸느냐, 이참에 철거하느냐를 두고 인천시가 시끄럽다. 현재의 부조는 인천상륙작전 모습이 아니라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탈환 작전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유공원에서 개항장 뒷길을 걸어 신포문화의 거리로 내려왔다. 뒷길에도 오래된 맛집이 있긴 하지만 신포문화의 거리에는 알려진 맛집과 숨겨진 맛집이 즐비하다. 청실홍실, 대성불고기, 등대 경양식, 민어횟집, 일본식 다다미 건물에 자리 잡은 작은 선술집, LP 뮤직 카페 등 가게마다 개성 있는 맛과 특색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개항장과 신포동 문화의 거리에는 70∼80년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LP판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무디 블루스', '흐르는 물' 등 LP 뮤직 카페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LP 뮤직 마니아들 사이에선 성지로 불린다. 이곳에는 대부분 뮤직 박스를 갖추고 있으며 호젓한 저녁 시간이면 가수들의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소문난 맛집보다 숨겨진 맛집이 더 많아신포국제시장은 조성 당시 '새로운 항구'라는 의미의 신포(新浦)시장으로 불리다 2010년에 신포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포국제시장에는 140여 개의 점포가 있으며 신포 닭강정, 공갈빵, 신포만두, 에그 타르트 등이 유명하다. 시장 내 칼국수 가게가 모여 있는 칼국수 골목, 생선 골목, 옷을 수선하는 수선 골목이 있다. 개항장과 차이나타운, 인현동, 신포지하도상가까지 포함할 경우 점포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신포국제시장에는 시장의 유래를 알려주는 푸성귀전 조형물과 우리나라 전통시장으로는 유일하게 소규모 등대공원이 설치돼 있다. 신포국제시장은 5개 골목으로 구성돼 있는데 어떤 골목은 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어떤 골목은 소수의 관광객만 보일뿐 한산했다. 신포 닭강정과 공갈빵 가게 등 일부 유명 점포 앞에는 물건을 사려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신포국제시장과 개항장 일대에는 매스컴에 알려진 맛집도 많지만 그 보다는 노포와 지역 주민들만 아는 알려지지 않은 맛집이 훨씬 더 많다. 인천시 관계자는 "인천 개항장 일대에는 한국 최초의 유·무형 자산이 많아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것 못지않게 알려지지 않은 맛집도 많아 미식의 성지로 불린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2023-05-28 19:33:30【인천=한갑수 기자】 개항기 제물포 조약(1882년)으로 제물포가 개항된 이후 일본인과 청나라, 미국 등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인 조계지(1884년)가 속속 생겨나면서 이곳에 자생적으로 생긴 시장이 신포국제시장이다. 인천 최초로 개설된 근대적 상설시장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 상인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인천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배추, 무, 양파, 피망, 당근 등의 농사를 지어 일본인들에게 내다 팔았다. 이곳에는 연안에서 잡은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시장과 닭 전 거리도 있었다. 신포국제시장은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인천시청이 1985년 중구청 자리에서 현재 위치인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중수교보다 2년 앞선 1990년 인천항과 중국 웨이하이를 운항하는 한중 카페리가 운항하면서 중국 관광객이 인천항으로 입국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차이나타운이 관광지로 각광받으며 신포국제시장이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제2 전성기를 맞았다.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 시장신포국제시장은 인천 개항장, 차이나타운과 지리적으로 연결돼 있다. 노포와 숨은 맛집이 즐비해 이곳을 오랫동안 단골로 찾는 사람도 많지만 개항장과 차이나타운을 찾은 관광객들도 한 번 정도는 꼭 들르는 곳이다. 신포국제시장을 이야기 할 때 개항장과 차이나타운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일대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천을 대표하는 음식이 짜장면과 쫄면이다. 짜장면은 한·중·일 3개 국가의 음식문화가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를 거듭한 끝에 탄생한 음식이다. 짜장면에 고춧가루(한국)를 뿌려서 타쿠앙(일본)을 반찬으로 놓고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나타운을 즐기는 비법 한 가지를 소개하면 짜장면 순례를 하는 것이다. 짜장면은 아무 중국집에서나 먹을 수 있지만 차이나타운에서는 맛과 재료가 특별하다. 백년짜장, 하얀짜장, 고기짜장 등 중국집마다 특색 있어서 한집씩 짜장면 순례에 나서는 것도 좋다. 쫄면은 1970년대 초 신포국제시장 건너편인 경동 광신제면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일반 면발에 비해 녹말가루를 더 넣는 바람에 냉면보다 덜 질기면서도 더욱 쫄깃한 면발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굵고 쫄깃한 면발에 고추장을 비롯한 갖은 양념을 넣고 콩나물 등 신선한 각종 야채를 함께 비벼 먹는 쫄면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여름의 별미인 냉면은 이북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그 유래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개항장 일대에도 냉면이 유명한데 동인천역 뒤편 화평동에 냉면거리가 조성돼 있다. 이곳은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하다. 세숫대야 같은 큰 그릇에 나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 만큼 양도 많고 맛도 좋다. 신포국제시장은 코로나19 발생 이전에는 평일이나 주말을 가리지 않고 중국·일본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해외 관광객이 단체 투어를 올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겼다. 최근에는 주말에만 소수의 중국 관광객과 한국인 관광객들이 시장을 방문하고 있다. 주말 국내외 관광객 문전성시개항장 일대에는 개항과 더불어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인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국내외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상권도 번성했다. 이때 세워진 근대 건축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물포 구락부(현 인천시 역사자료관), 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현 개항박물관), 인천우체국 등 많은 근대문화자산이 남아 있다. 개항장은 일본과 청나라, 미국, 러시아 등 열강이 각축전을 벌였던 장소이다. 이곳에 일본 조계, 청 조계, 각국공동조계(미국인, 영국인, 일본인, 청국인, 독일인, 러시아인, 프랑스인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가 세워지면서 개항장은 신문물 도입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묵었던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개항장에 들어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대불호텔은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성행했다. 경인선이 건설되면서 서울로 가는 시간이 줄어들어 굳이 개항장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대불호텔은 1978년 철거됐다가 문화재청이 보존을 추진해 2018년 개항기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됐다. 지금은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개항 박물관에서 외국인 사교클럽인 제물포구락부, 대불호텔 전시관이 있는 일본인 거리와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을 거쳐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향했다. 차이나타운 입구임을 알리는 패루(중국식 대문)를 지나자 태림봉을 시작으로 거리 양쪽에 중국집들이 이어졌다. 점심을 먹고 돌아볼 요량으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중국집인 태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가게에 손님들로 가득 차 빈 자리가 없었다. 관광객들이 거리 대신 여기 모여 있었다. 잠시 기다린 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다른 중국집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주말이면 대부분 가게가 손님들로 가득 찬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나오자 건물과 거리는 마치 중국에 와 있는 것처럼 중국풍으로 확 바뀌었다. 1960년대 설립 당시 중국 화교들의 성당이었던 천주교 해안성당을 지나자 짜장면 박물관이 보였다. 짜장면 박물관에서 중국성, 최초로 짜장면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공화춘, 연경, 만다복, 신차이로 이어지는 차이나타운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야 할 정도였다. 몇몇 공갈빵 가게와 꼬치 가게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손님이 없는 가게에는 젊은 직원들이 관광객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수제 공갈빵 있어요. 맛 보고 가세요!” 100년 이상 역사와 함께한 신포국제시장때 이른 초여름 날씨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할 즈음 자유공원에 도착했다. 눈앞에 광장이 펼쳐졌다. 광장에 전망대는 따로 없지만 인천내항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내항은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부두이다. 우리 국민들을 강제 동원해 삽이나 곡괭이도 주지 않고 맨손으로 땅을 파게 해 부두와 갑문을 건설했다. 백범 김구는 서간도에서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모으다가 1910년 체포(안악사건), 서울서 옥살이를 하다가 1914년 인천감리서로 이감됐다. 백범은 1부두 축항 공사장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백범은 1896년 명성왕후 시해범을 살해해 인천감리서에 갇혔었는데 신포시장 상인들이 주축이 된 인천객주회가 백범 구명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개항장에서 신포국제시장으로 넘어가는 길인 신포패션 문화의 거리 입구에서 인천 내동교회까지 이르는 ‘청년 백범 역사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자유공원 광장 끝에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이 위용을 자랑한다.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면서 맥아더 장군 동상은 보수의 상징처럼 돼 논란의 중심이 되기 일쑤였다. 요즘 이 동상 받침대에 새겨진 부조를 새로 바꾸느냐, 이참에 철거하느냐를 두고 인천시가 시끄럽다. 현재의 부조는 인천상륙작전 모습이 아니라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필리핀 레이테섬 탈환 작전 모습이라는 것이다. 자유공원에서 개항장 뒷길을 걸어 신포문화의 거리로 내려왔다. 뒷길에도 오래된 맛집이 있긴 하지만 신포문화의 거리에는 알려진 맛집과 숨겨진 맛집이 즐비하다. 청실홍실, 대성불고기, 등대 경양식, 민어횟집, 일본식 다다미 건물에 자리 잡은 작은 선술집, LP 뮤직 카페 등 가게마다 개성 있는 맛과 특색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개항장과 신포동 문화의 거리에는 70∼80년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LP판을 들으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무디 블루스’, ‘흐르는 물’ 등 LP 뮤직 카페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LP 뮤직 마니아들 사이에선 성지로 불린다. 이곳에는 대부분 뮤직 박스를 갖추고 있으며 호젓한 저녁 시간이면 가수들의 라이브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소문난 맛집보다 숨겨진 맛집이 더 많아신포국제시장은 조성 당시 ‘새로운 항구’라는 의미의 신포(新浦)시장으로 불리다 2010년에 신포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포국제시장에는 140여 개의 점포가 있으며 신포 닭강정, 공갈빵, 신포만두, 에그 타르트 등이 유명하다. 시장 내 칼국수 가게가 모여 있는 칼국수 골목, 생선 골목, 옷을 수선하는 수선 골목이 있다. 개항장과 차이나타운, 인현동, 신포지하도상가까지 포함할 경우 점포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신포국제시장에는 시장의 유래를 알려주는 푸성귀전 조형물과 우리나라 전통시장으로는 유일하게 소규모 등대공원이 설치돼 있다. 신포국제시장은 5개 골목으로 구성돼 있는데 어떤 골목은 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어떤 골목은 소수의 관광객만 보일뿐 한산했다. 신포 닭강정과 공갈빵 가게 등 일부 유명 점포 앞에는 물건을 사려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신포국제시장과 개항장 일대에는 매스컴에 알려진 맛집도 많지만 그 보다는 노포와 지역 주민들만 아는 알려지지 않은 맛집이 훨씬 더 많다. ‘청년 백범 역사의 거리’를 따라 넘어가면 전기구이 통닭과 삼계탕, 삼치골목으로 유명한 인현동이다. 동인천역 건너편인 이곳은 70∼80년대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했다. 이곳에는 대한서림, 동인서관이 있었으며 인근 제물포고, 인성여고, 인일여고와 여러 중학교에서 사용하는 참고서 수요가 많아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음악다방과 길 건너편의 애관극장, 미림극장 등 문화·휴게시설도 많아 젊은이들뿐 아니라 시인·소설가·예술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또 이곳에는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 3대 주류 종파(개신교, 천주교, 성공회)가 위치한 기독교 성지이기도 하다. 인천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답동성당과 한국 감리교의 발상지 내리교회,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 내동교회가 위치해 순례객들이 많이 찾는다. 동인천역에서 답동성당 앞 사거리까지 700m에 이르는 지하도상가는 국내에서 처음 지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지하도상가는 1967년 서울시청 앞 을지로1가에 세워진 ‘새서울지하상가’가 공식적인 국내 최초이다. 그러나 이보다 4년 앞선 1963년에 일명 ‘굴다리’로 불렸던 ‘동인천지하도’가 건설됐으나 인근 상인들의 반대로 상가 없이 지하도만 개통했다. 8년 뒤 정상 개장했지만 한국 최초로서의 기록은 날아간 뒤였다. 인천시 관계자는 “인천 개항장 일대에는 한국 최초의 유·무형 자산이 많아 볼거리를 제공하고 이것 못지않게 알려지지 않은 맛집도 많아 미식의 성지로 불린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3-05-28 12:23:55[파이낸셜뉴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맞아 가수 송가인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의기투합해 백범 김구에 관한 영상을 다국어로 제작해 국내외에 공개했다. 서 교수는 지난 삼일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을 맡았던 수당 정정화를 소개한 다국어 영상을 공개하는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을 국내외에 꾸준히 알리고 있다. 11일 서 교수에 따르면 4분 분량의 이번 영상은 국가보훈처 인천보훈지청과 공동 제작했으며, 한국어 및 영어로 각각 제작해 국내외 누리꾼에게 널리 전파중이다. '인천을 만난 김구, 청년에서 거목으로'라는 제목의 이번 영상에서는 백범 김구가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각성한 계기가 되었던 인천과 김구의 인연을 재조명했다. 김구가 수감됐던 인천감리서터를 시작으로 백범일지에 나온 탈출 경로와 청년 백범 김구거리 등 김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인천의 주요 장소들을 소개한다. 서 교수는 "국내외 젊은 누리꾼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크나큰 업적을 남긴 백범 김구를 널리 알리고 싶었다. 이번 영상을 통해 김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인천의 주요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다크 투어리즘'(역사적 현장을 둘러보는 여행)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한국어 내레이션을 맡은 송가인은 "백범 김구의 삶을 목소리로 직접 소개하게 돼 기쁘며, 국내외 많은 누리꾼이 시청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3-04-11 08:31:11[파이낸셜뉴스] 최근 3·1절 일장기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 용산구가 3·1절을 기념해 효창공원역 인근에 조성했던 '태극기 거리'에도 여러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7일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SNS)에는 지난 5일까지 효창공원 인근에 조성된 '태극기 거리' 목격담이 올라왔다. 한 트위터 이용자는 지난 3일 "벛꽃 핀 줄 알고 너무 기뻐서 달려갔는데 태극기였다. 이게 뭐냐"며 사진 두 장을 공유했다. 사진을 보면 아직 새순이 돋지 않아 앙상한 가로수에 태극기가 가득 매달려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태극기임을 인지할 수 있지만 멀리서는 나무에 흰색 꽃이 만개한 모습 같았다. 태극기 나무 여러 그루가 길을 따라 줄지어 있어 마치 벚꽃길을 연상하기도 했다. 이를 본 누리꾼들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태극", "애국화", "멋지다", "예술이다", "어디냐. 가고 싶다", "절대 지지 않을 꽃", "벚꽃보다 훨씬 예쁘다", "애국자 나무", "이곳엔 독립운동가의 묘가 있으니 딱 맞는 꽃이네" 등 반응을 보였다. 또 "다음주에 근처 가는데 직접 보고 싶다" "용산에 가면 볼 수 있을까?" 등 '태극기 꽃'을 직접 보고 싶다는 반응도 나왔다. 온라인 상에서 화제를 모은 이 '태극기 거리'는 서울 용산구가 제104주년 3·1절을 기념해 효창공원 인근에 조성한 것이다. 일상에서 독립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고자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5일까지 9일간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부터 그 일대 나무에 태극기를 달았다.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과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임정 요인(이동녕·조성환·차리석) 등 7위 선열과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독립운동의 성지로 의미가 깊은 장소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3-03-07 22:36:50#.1884년 처음 완성된 한글 모스부호. 과거 모스부호 4개 숫자로 이뤄진 복잡한 한문 모스부호를 사용해야 했던 불편함이 사라진 순간이다. 화면 속에 등장한 음향 전신기에 마우스를 옮겨 클릭하자 한글 모스부호에 맞춰 '뚜' 소리가 들린다. 한글 모스부호로 완성된 단어는 '고마워'다. KT가 135년 통신 역사를 담은 온라인 전시관 KT 텔레 뮤지엄이 개관했다. 텔레 뮤지엄은 원격을 뜻하는 텔레(Tele)와 박물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을 합쳐 만든 단어로 온라인 전시와 통신 등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 뮤지엄은 KT가 소장한 6000여점의 통신 사료를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체험할 수 있다. KT 관계자는 5일 "KT는 현재 약 6000여점의 통신 사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훼손, 분실의 우려로 연구 목적 외에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최근 코로나19 이슈로 집안에 있는 많은 국민분께 온라인으로 즐길거리를 제공 해보자는 생각으로 기획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텔레 뮤지엄에서는 1885년 고종이 최초로 사용한 근대 통신인 자석식 전화기 체험도 가능하다. 자석식 전화기는 궁에 설치된 후 고종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와 통화를 하는데 사용됐다. 신하는 의관을 정제하고, 네번의 큰 절을 올린 후 두손 공손히 고종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고종은 인천 감리에게 직접 전화해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중지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텔레 뮤지엄에서는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남아있는 경성영등포전화번호부 △1962년 서울 종각 맞은편 화신백화점에 처음 설치된 무인전화기 △1990년대 주요 통신 수단인 삐삐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PC통신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체험 이벤트가 준비돼 있다. 텔레 뮤지엄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양율모 KT 홍보실장 상무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을 연결했던 통신과 관련된 따듯한 추억을 되새기고자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syj@fnnews.com 서영준 기자
2020-10-05 17:19:36[파이낸셜뉴스] #.1884년 처음 완성된 한글 모스부호. 과거 모스부호 4개 숫자로 이뤄진 복잡한 한문 모스부호를 사용해야 했던 불편함이 사라진 순간이다. 화면 속에 등장한 음향 전신기에 마우스를 옮겨 클릭하자 한글 모스부호에 맞춰 '뚜' 소리가 들린다. 한글 모스부호로 완성된 단어는 '고마워'다. KT가 135년 통신 역사를 담은 온라인 전시관 KT 텔레 뮤지엄이 개관했다. 텔레 뮤지엄은 원격을 뜻하는 텔레(Tele)와 박물관을 뜻하는 뮤지엄(Museum)을 합쳐 만든 단어로 온라인 전시와 통신 등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텔레 뮤지엄은 KT가 소장한 6000여점의 통신 사료를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체험할 수 있다. KT 관계자는 5일 "KT는 현재 약 6000여점의 통신 사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그동안 훼손, 분실의 우려로 연구 목적 외에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최근 코로나19 이슈로 집안에 있는 많은 국민분께 온라인으로 즐길거리를 제공 해보자는 생각으로 기획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텔레 뮤지엄에서는 1885년 고종이 최초로 사용한 근대 통신인 자석식 전화기 체험도 가능하다. 자석식 전화기는 궁에 설치된 후 고종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와 통화를 하는데 사용됐다. 신하는 의관을 정제하고, 네번의 큰 절을 올린 후 두손 공손히 고종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고종은 인천 감리에게 직접 전화해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중지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텔레 뮤지엄에서는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남아있는 경성영등포전화번호부 △1962년 서울 종각 맞은편 화신백화점에 처음 설치된 무인전화기 △1990년대 주요 통신 수단인 삐삐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PC통신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체험 이벤트가 준비돼 있다. 텔레 뮤지엄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달 중으로는 국립과천과학관 공동 기획 전시도 계획돼 있다. 양율모 KT 홍보실장 상무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오랜 시간 사람들을 연결했던 통신과 관련된 따듯한 추억을 되새기고자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syj@fnnews.com 서영준 기자
2020-10-05 14:21:40[파이낸셜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75주년 광복절인 15일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진정한 광복"이라며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화두로 던졌다. 문 대통령은 이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 경축사에서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과연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광복이 이뤄졌는지 되돌아 본다"며 이같이 밝혔다. 경축식이 열린 DDP(옛 동대문운동장)는 경성운동장,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을 거쳐 오는 동안 역사적 의미와 미래 지향적 이미지를 함께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특히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 임시정부요인 환국 기념행사, 김구 선생 장례식, 3.1절 국경일 기념식 등 다수의 역사적인 기념행사들이 개최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를 생각한다"며 "그것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헌법 10조의 시대다.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라고 강조했다. 또 "정부는 그동안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인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사회안전망과 안전한 일상을 통해 저마다 개성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한 사람의 성취를 함께 존중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해 왔다"고 자평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결코 우리 정부 내에서 모두 이룰 수 있는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께 드리고, 확실한 토대를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대한제국 시절 하와이, 멕시코로 노동이민을 떠나 조국을 잃고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을 기억한다. 그 눈물겨운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며 "대한민국은 이제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문 대통령은 "나라가 국민에게 해야 할 역할을 다했는지, 지금은 다하고 있는지, 우리는 물어야 한다"며 "그만큼 (대한민국은)성장했고, 그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피력했다. 한일 정부간 갈등의 핵심인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서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2005년 네 분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의 징용기업을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대법원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다"며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불법행위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의 판결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법적 권위와 집행력을 가진다"며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문 대통령은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방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왔고, 지금도 협의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편, 이번 광복절 경축식은 통상 진행되는 국가 기념식 의전과 달리 주빈이 애국지사가 될 수 있도록 애국지사 입장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문 대통령 내외가 먼저 행사장에 도착,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입장하는 생존 애국지사 4분을 맞이했다. 윤재관 청와대 부대변인은 "광복을 위해 청춘을 바쳐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애국지사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이번 광복절을 계기로 보다 격상된 예우 방안을 실천함으로써 국가유공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와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4분의 애국지사들에게는 행사장까지 별도의 이동 차량과 경찰 협조를 통한 호위 차량의 격상된 의전이 시행됐다. <다음은 문재인 대통령의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광복 75주년을 맞은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라의 독립을 이룬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정신을 되새깁니다. 오늘 경축식은 생존 애국지사님들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임우철 지사님은 101세이시고, 다른 세 분도 백수에 가까우신 분들입니다. 어떤 예우로도한 분 한 분이 만들어온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발전과 긍지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생존해 계신 애국지사님은 서른한 분에 불과합니다. 너무도 귀한 걸음을 해주신 임우철, 김영관, 이영수, 장병하 애국지사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힘찬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광복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 함께 일어나 이룬 것입니다.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룬 모든 분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선열들은 '함께하면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을 '거대한 역사의 뿌리'로 우리에게 남겨주었고, 우리는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함께 위기를 이겨내며, 우리 자신의 역량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기후이변으로 인한 거대한 자연재난이 또 한 번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시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잃은 분들을 비롯하여 재난에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재난에 맞서고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기상이변이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까지 대비하여 반복되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국민안전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되어주신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경의를 표하며, 오늘의 위기와 재난을 반드시 국민과 함께 헤쳐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가 모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조선시대 훈련도감과 훈련원 터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고, 오랫동안 동대문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땀의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그 가운데 식민지 조선 청년 손기정이 흘린 땀방울이야말로 가장 뜨겁고도 안타까운 땀방울로 기억될 것입니다. 1935년 경성운동장, 만 미터 경기 1위로 등장한 손기정은 이듬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습니다. 일본 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금메달 수상자 손기정은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고, 동메달을 차지한 남승룡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위대한 승리였지만 승리의 영광을 바칠 나라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나라를 되찾는 것이자, 동시에 개개인의 존엄을 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독립과,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혁명을 동시에 이루었습니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당당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 국민의 노력은 광복 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원조를 받는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되었고, 독재에 맞서 세계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고, 인권을 억압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우리는 자유와 평등, 존엄과 안전이 국민 개개인의 당연한 권리가 되는, '나라다운 나라'를 향한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많은 위기를 이겨왔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이겨냈고,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위기도 국민들과 함께 이겨냈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로 도약하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으로 '소재·부품·장비의 독립'을 이루며, 일부 품목에서 해외투자 유치의 성과까지 이뤘습니다. 코로나 위기 역시 나라와 개인, 의료진, 기업들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극복해냈습니다. 정부는 방역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고, 국민들은 정부의 방침을 신뢰하며 스스로 방역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빠르면서도 정확한 진단 시약을 개발했고, 노동자들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방역물품을 생산했습니다. 의료진들과 자원봉사자들, 국민과 기업 하나하나의 노력이 모여 코로나를 극복하는 힘이 되었고, 전세계가 인정하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더 높은 긴장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정부는 백신 확보와 치료제 조기 개발을 비롯하여 바이러스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국경과 지역을 봉쇄하지 않고,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서 이룬 방역의 성공은 경제의 선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역의 성공이 있었기에 정부의 확장재정에 의한 신속한 경기 대책이 효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한국 경제는 올해 OECD 37개국 가운데 성장률 1위를 기록하고, GDP 규모에서도 세계 10위권 안으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있는 우리 국민들께 다시 한 번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의 안전이 '나'의 안전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판 뉴딜'을 힘차게 실행하며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을 양 날개로 우리 경제의 체질을 혁신하고, 격을 높일 것입니다.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탄소의존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꾸며 다시 한 번 도약할 것입니다. '한국판 뉴딜'의 핵심을 관통하는 정신은 역시 사람 중심의 '상생'입니다. '한국판 뉴딜'은 '상생'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이며, '고용·사회 안전망'을 더욱 강화하고, '사람'에 대한 투자를 늘려 번영과 상생을 함께 이루겠다는 약속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격차와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진정한 광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미래세대 모두를 위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에 국민 여러분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국민 여러분. 2016년 겨울, 전국 곳곳의 광장과 거리를 가득 채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정신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촛불을 들어 다시 한 번 역사에 새겨놓았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 정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과연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광복이 이뤄졌는지 되돌아보며,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헌법 10조의 시대입니다.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정부는 그동안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인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사회안전망과 안전한 일상을 통해 저마다 개성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한 사람의 성취를 함께 존중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결코 우리 정부 내에서 모두 이룰 수 있는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국민들께 드리고, 확실한 토대를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는 대한제국 시절 하와이, 멕시코로 노동이민을 떠나 조국을 잃고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을 기억합니다. 그 눈물겨운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조국은 동포들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분들은 오히려 품삯을 모으고, '한 숟갈씩 쌀'을 모아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우리는 해방된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도 끝까지 기억해야 합니다. 나라가 국민에게 해야 할 역할을 다했는지, 지금은 다하고 있는지,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장했고, 그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2018년 4월 30일, 가나 해역에서 피랍되었던 우리 선원 세 명이, 구출 작전을 수행한 청해부대 문무대왕함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018년 7월에는 리비아 무장괴한들에게 피랍된 우리 국민이, 2020년 7월에는 서아프리카 베냉 해역에서 피랍된 선원 다섯 명이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군용기를 이라크에 급파하여 우리 근로자 293명을 국내에 모셔왔습니다. 코로나 확산이 심각한 일곱 개 나라에는 특별수송기와 군용기, 대통령전용기까지 투입해 교민 2천 명을 국내로 안전하게 이송했고, 전세기를 통해 119개국, 4만6천여 명에 이르는 교민들을 무사히 모셔왔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해외 독립유공자 다섯 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신 것도 뜻깊습니다. 자신의 존엄을 증명하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에 대해서도 국가는 반드시 응답하고 해결방법에 대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2005년 네 분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의 징용기업을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대법원 승소 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불법행위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법적 권위와 집행력을 가집니다.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원만한 해결방안을 일본 정부와 협의해왔고, 지금도 협의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언제든 일본 정부와 마주 앉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함께 소송한 세 분은 이미 고인이 되셨고, 홀로 남은 이춘식 어르신은 지난해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되자, "나 때문에 대한민국이 손해가 아닌지 모르겠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결코 나라에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입니다. 동시에 3권분립에 기초한 민주주의,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법의 원칙을 지켜가기 위해 일본과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본과 한국, 공동의 노력이 양국 국민 간 우호와 미래협력의 다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국민 여러분, 동대문운동장은 해방의 환희와 남북분단의 아픔이 함께 깃든 곳입니다. 1945년 12월 19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가 열렸고, 그날 백범 김구 선생은 "전 민족이 단결해 자주·평등·행복의 신한국을 건설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 7월 5일, 100만 조객이 운집한 가운데 다시 이곳에서 우리 국민은 선생을 눈물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분단으로 인한 미완의 광복을 통일 한반도로 완성하고자 했던 김구 선생의 꿈은남겨진 모든 이들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광복은 평화롭고 안전한 통일 한반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꿈과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고 남과 북의 협력을 추진하는 것도 남과 북의 국민이 안전하게 함께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가축전염병과 코로나에 대응하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유례없는 집중호우를 겪으며 개인의 건강과 안전이 서로에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했고, 남과 북이 생명과 안전의 공동체임을 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안보이자 평화입니다. 방역 협력과 공유하천의 공동관리로 남북의 국민들이 평화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되길 바랍니다. 보건의료와 산림협력, 농업기술과 품종개발에 대한 공동연구로 코로나 시대 새로운 안보 상황에 더욱 긴밀히 협력하며, 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와 함께 생명공 동체를 이루기 위한 상생과 평화의 물꼬가 트이길 바랍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인도주의적 협력과 함께,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볼 수 있게 협력하는 것이 실질적인 남북 협력입니다. 남북 협력이야말로 남·북 모두에게 있어서 핵이나 군사력의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안보정책입니다. 남북 간의 협력이 공고해질수록 남과 북 각각의 안보가 그만큼 공고해지고, 그것은 곧 국제사회와의 협력 속에서 번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전쟁 위협을 항구적으로 해소하며 선열들이 꿈꾸었던 진정한 광복의 토대를 마련하겠습니다. 남북이 공동조사와 착공식까지 진행한 철도 연결은 미래의 남북 협력을 대륙으로 확장하는 핵심 동력입니다. 남북이 이미 합의한 사항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실천하면서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해외 동포 여러분, 국가를 위해 희생할 때 기억해줄 것이라는 믿음, 재난재해 앞에서 국가가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믿음, 이국땅에서 고난을 겪어도 국가가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 개개인의 어려움을 국가 살펴줄 것이라는 믿음,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 이러한 믿음으로 개개인은 새로움에 도전하고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이러한 믿음에 응답할 때 나라의 광복을 넘어 개인에게 광복이 깃들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 한 마라톤 선수의 땀과 한,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탄식이 함께 배어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역사의 지층 위에 오늘 개인의 창의성과 개성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시작한 민주공화국의 길 너머,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대한민국을 향해 국민과 함께 가겠습니다. 선열들이 꿈꾼 자주독립의 나라를 넘어, 평화와 번영의 통일 한반도를 향해 국민과 함께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nkhy@fnnews.com 김호연 기자
2020-08-15 11:42:31[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 중구가 신포동에 추진하는 청년 김구 역사거리 조성사업이 윤곽을 드러냈다. 인천 중구는 ‘청년 김구 역사거리 조성사업’ 착수보고회를 개최하고 지난달 제안평가를 통해 선정된 사업자의 사업 기본계획과 방향에 대해 검토했다고 13일 밝혔다. 청년 김구 역사거리는 김구 선생이 청년시절 투옥됐던 인천감리서(조선 고종때 개항장의 통상업무를 담당하는 관청)가 위치했던 신포동 신포로 일대를 테마거리로 조성하는 사업이다. 인천 중구는 백범의 정신을 기리고 숭고한 역사와 문화의 힘을 기반으로 중구의 성장 동력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이번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 공모사업으로 선정돼 특별교부세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았으며 여기에 구비 1억원을 더해 총사업비 2억5000만원이 투입됐다. 중구는 이번 사업에 △청년 김구의 길 탐방로 조성사업 △감리서 터 휴게쉼터 조성 △청년 김구와 중구 기획전시 등 6개 사업을 진행한다. 이번 사업은 백범 김구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인천감리서 터 주변을 정비하고 신포로 약 200m 구간에 인도 조성, 공공조형물 등을 설치해 테마거리로 조성하는 것으로 내년 10월 준공 예정이다. 홍인성 구청장은 “이번 사업은 인천 중구와 백범 김구선생님과의 인연을 재조명하는 의미 있는 사업으로 지역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고 원도심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2020-06-12 1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