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경찰이 '썩은 어묵 군납 의혹' 관련 식품업체 대표로부터 금품을 건네받고 사건을 무마한 의혹과 관련, 검찰이 3일 경남 사천경찰서를 압수수색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부장검사 강성용)는 이날 오전 9시부터 6시께까지 경남 사천경찰서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검찰은 사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에서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킥스) 수사 내부자료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동호 전 고등군사법원장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를 받는 식품가공업체 M사 대표 정모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정씨가 사천경찰서장이었던 A씨에게 금품 등을 제공한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천경찰서는 2016년 M사가 유통기한이 지난 어묵을 군납한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접수받았지만, 이후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내사 종결 처리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A 전 사천서장이 사건 무마에 관여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씨는 M사의 군납 문제를 무마하거나 군사법원 관련 새 사업을 따내는 대가로 수년간 1억원에 가까운 돈을 이 전 법원장에게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사업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수백억원대 식품을 납품하는 한 대형마트 임직원들을 접대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M사는 2017년 11월 '썩은 어묵 군납' 의혹을 받았지만 이 대형마트는 이듬해 5월부터 M사 어묵 판매를 재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가 거래처로부터 대금을 현금으로 받고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수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도 받고 있다. 앞서 검찰은 뇌물공여 등 혐의로 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사안이 중하나 증거인멸이나 도망 염려 등 구속 사유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군납비리의혹 #사천경찰서 #서울중앙지검 jasonchoi@fnnews.com 최재성 기자
2019-12-03 20:14:08[파이낸셜뉴스] 도로에서 속옷만 입은 채 오토바이를 난폭운전을 한 10대가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 22일 경남 사천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7일 오전 6시20분께 사천시 사남면 한 국도에서 한 남성이 속옷만 착용한 채 일행 3명과 함께 20분가량 오토바이를 난폭하게 운전했다. 당시 이 남성은 상·하의를 입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일행과 함께 차량 사이에 끼어들거나 지그재그 운전을 하는 등 난폭하게 오토바이를 운전했다. 남성의 일행들은 옷은 입고 있었으나 헬멧은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남성은 역시 헬멧을 착용하지 않고, 한 손으로 운전하며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거나 온몸을 들썩거리기도 했다.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은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됐다. 해당 사건에 대한 신고는 없었으나, 온라인상에서 당시 장면이 담긴 영상과 목격담이 올라오면서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이 폐쇄회로(CC)TV를 입수해 번호판 등을 확인한 결과 속옷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운전한 남성은 10대 A군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우선 A군만 조사 대상이고 함께 오토바이를 함께 몬 일행을 같이 수사할지 결정되지 않았다"며 "속옷 차림이었기 때문에 공연음란죄 등이 적용 가능한지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한편 공연음란죄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 등에 처할 수 있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4-07-23 10:45:09필자는 1960년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경남 함안에서 성장했다. 먼저 칠원면에 살았다. 칠원은 가야읍의 동쪽에 있는 면으로 칠원, 칠북, 칠서면을 합하여 삼칠면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삼칠면은 칠원현으로 함안군과 분리된 행정구역이었다. 참고로 칠원현은 현재의 마산 남쪽의 땅을 월경지로 가졌다. 칠원초등학교 때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열악해 교실에서는 책걸상 없이 엎드려서 공부를 했다. 당시를 기억하면 한국의 발전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어린시절 생활의 거의 모두는 함안군 가야읍에서 이루어졌다. 가야 지명은 함안 외에도 많다. 삼한과 가야 시대 역사로 부산, 창원, 창녕, 고령, 고성 등에 가야 지명이 남아 있다. 가야 말이산 고분군은 함안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당시는 말산리로 불렀다. 필자의 집도 말산리에 속했다. 당시 우리 국민 대부분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미국의 구호물자로 강냉이(옥수수)가 배급됐고, 학교에서는 점심 도시락 못 싸는 힘든 학생들에게 강냉이죽 혹은 강냉이빵을 주었다. 개교기념일에는 학교 잔치를 열고 전교생에게 강냉이빵을 나누어주었다. 당시는 즐거운 축제였다. 여름철 논 잡초 피 뽑기, 메뚜기 잡기, 추수 후 이삭 줍기 등으로 어린 학생들도 지역경제에 나름으로 기여했다. 과거 조선시대 함안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안면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철도가 가야면을 지나면서 가야면이 성장하고 6·25전쟁 이후 군청과 경찰서 등 주요 군 단위 관공서가 가야로 옮겨왔다. 당시 함안면민들은 함안면을 여전히 함안읍이라 불렀다. 그러나 당시 가야나 함안은 모두 읍이 아니고 면이었다. 함안면은 함안에서 가장 높은 남쪽의 여항산 쪽으로 들어가 있어 고도가 약간 높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중심지답게 함안의 향교가 위치한다. 우리 마을 뒤편 언덕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도 더러 놀러 가던 곳이었다. 성당의 분위기대로 조용히 놀다 왔다. 1960년인가 함안에서 처음으로 성당에서 유치원을 만들어 초등학교 가기 전 어린이들이 즐겁게 다닌 것 같다.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간 필자는 못 다녔다. 조선시대에 가야면은 함안면에 비해 저습지가 많아서 살기 힘든 곳이었다. 가야면은 남강의 지류인 함안천을 끼고 있고, 칠원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광려천을 끼고 있다. 함안군 남쪽의 함안면과 여항면은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 지역에 위치한다. 함안천의 상류나 중류의 자갈하상과 모래하상은 물이 깨끗해 멱을 감고, 물고기도 잡았다. 작은 웅덩이에는 독풀을 풀어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기도 했고, 어른들은 낚시나 그물을 이용해 잡았다. 어른들은 잡은 고기를 더러 그 자리에서 회를 쳐 먹기도 했는데, 디스토마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늪지대의 뻘이 조금 말라 물렁해지면 학교 미술시간에 공작용으로 사용했다. 더하여 함안에는 철광석, 구리, 고령토 등 광산이 발달했다. 1971년 국가 광산 생산 실적표를 보면 동광으로 국내 1위가 함안 군북으로 생산량이 5551t이고 고령토는 법수가 국내 4위로 생산량은 7850t이었다. 함안의 그 넓은 습지대는 마을과 농경지 확장과 도로건설 등으로 개발되면서 제방, 배수로, 배수장, 유수지 등 관리시설이 많았다. 특히 남강이 잘 범람하므로 매우 많은 제방을 지니고 있다. 남강 수위가 올라가면 함안들의 물은 빠져나갈 길이 없이 흥건히 잠긴다. 또한 집중호우가 오면 제방이 터질까봐 걱정이 많았고, 더러 제방이 터지곤 하여 농경지가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공식 국가 지도에도 '한바다'라는 지명이 있다. 원래 넓은 밭인 '한밭'인데 가끔 한바다로 불리면서, 홍수가 되면 그대로 바닷물의 한바다가 되어 말산리에서 검암리까지 나룻배도 다녔다. 함안은 당연히 많은 둑방을 건설하면서 현재 총길이가 338㎞에 달한다. 시군 단위로 전국 최고일 것이다. 남강·낙동강변은 물론, 함안천·신음천·검암천 등 크고 작은 거의 모든 하천에 둑방을 조성했다. 특히 법수면 악양 둑방길은 꽃길을 조성해 전국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남강댐이 범람하게 되면 인공수로인 가화천을 통해서 사천만으로 직접 물을 빼 홍수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 농사가 불리한 평지에서는 소와 말, 염소 등의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지도에는 '마구들'이 나온다. 방목장이다. 당시 1960년대 중반 우유 없던 시절 염소유가 공급되었다. 고급 음료였다. 가야 충무동에서 도항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방목고개라 했다. 지금도 방목1길 등 도로주소로 남아 있다. 1960년대 기억에 방목이 들어간 상호가 더러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함안의 승마공원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저습지가 많으니 쌀농사 외에 연뿌리, 미나리 농사도 많았다. 마름이라 하여 물에서 건져올려 삶으면 밤 같은 맛이 나는 물 속 열매도 있었다. 함안에서도 강화와 같은 화문석을 만들었다. 고급 바닥깔개였다. 골, 큰 것은 왕골이라 하여 삼각형의 줄기를 가지는 습지형 줄기식물로서 껍질을 벗겨서 흰 속살를 말려 방석 등 다양한 화문석을 만들었다. 강가의 모래 땅에는 땅콩도 심었다. 지금 보면 소규모이지만 참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다. 함안은 남쪽이라 이모작이 가능했다. 겨울과 봄에는 보리농사가 성했다. 당시 영남의 보리는 겉보리라 하여 껍질이 매우 단단한 보리로서 매우 껄끄러운 보리밥으로 만들어졌다. 보리밥도 건너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서릿발이 끼지 않도록 학생들이 단체로 보리밟기에 동원됐다. 일렬로 기차놀이 하듯이 밟고 나갔다. 봄철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바로 물 대고 쌀농사 모내기를 했다. 보리밥이 너무 잦아 질린다 싶으면 보리 대신에 콩나물, 무, 고구마, 감자 등을 혼합하기도 했다. 함안을 포함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1960년대 당시에도 유명했고 지금도 여전한 명품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파수 곶감, 월촌 수박이 있었다. 함안은 따뜻한 지역이었으므로 탱자나무도 많았다. 1922년에 개교한 함안가야학교 울타리는 거의 모두 탱자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겨울철 교실 난로 땔감으로 탱자나무의 마른 가지 부스러기도 모아 사용했다. 학교 교정에는 은행나무, 오동나무가 있었고 낡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교실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함안은 습지의 고장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로 많은 습지들이 사라졌지만 일부 보호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강변 습지에 조성된 함안의 경비행장도 볼만하다.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4-06-03 20:03:21필자는 1960년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경남 함안에서 성장했다. 먼저 칠원면에 살았다. 칠원은 가야읍의 동쪽에 있는 면으로 칠원, 칠북, 칠서면을 합하여 삼칠면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삼칠면은 칠원현으로 함안군과 분리된 행정구역이었다. 참고로 칠원현은 현재의 마산 남쪽의 땅을 월경지로 가졌다. 칠원초등학교 때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열악해 교실에는 책걸상 없이 엎드려서 공부를 했다. 당시를 기억하면 한국의 발전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어린시절 생활의 거의 모두는 함안군 가야읍에서 이루어졌다. 가야 지명은 함안 외에도 많다. 삼한과 가야 시대 역사로 부산, 창원, 창녕, 고령, 고성 등에 가야 지명이 남아있다. 가야 말이산 고분군은 함안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당시는 말산리로 불렀다. 필자의 집도 말산리에 속했다. 당시 우리 국민 대부분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미국의 구호물자로 강냉이(옥수수)가 배급됐고, 학교에서는 점심 도시락 못싸는 힘든 학생들에게 강냉이죽 혹은 강냉이빵을 주었다. 개교기념일에는 학교 잔치를 열고 전교생에게 강냉이빵을 나누어주었다. 당시는 즐거운 축제였다. 여름철 논 잡초 피 뽑기, 메뚜기 잡기, 추수 후 이삭줍기 등으로 어린 학생들도 지역경제에 나름으로 기여했다. 과거 조선시대의 함안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안면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철도가 가야면을 지나면서 가야면이 성장하고 6·25전쟁 이후 군청과 경찰서 등 주요 군 단위 관공서가 가야로 옮겨왔다. 당시 함안면민들은 함안면을 여전히 함안읍이 불렀다. 그러나 당시 가야나 함안은 모두 읍이 아니고 면이었다. 함안면은 함안에서 가장 높은 남쪽의 여항산 쪽으로 들어가 있어 고도가 약간 높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중심지답게 함안의 향교가 위치한다. 우리 마을 뒤편 언덕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도 더러 놀러 가던 곳이었다. 성당의 분위기대로 조용히 놀다 왔다. 1960년인가 함안에서 처음으로 성당에서 유치원을 만들어 초등학교 가기 전 어린이들이 즐겁게 다닌 것 같다.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간 필자는 못다녔다. 조선시대에 가야면은 함안면에 비해 저습지가 많아서 살기 힘든 곳이었다. 가야면은 남강의 지류인 함안천을 끼고 있고, 칠원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광려천을 끼고 있다. 함안군 남쪽의 함안면과 여항면은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 지역에 위치한다. 함안천의 상류나 중류의 자갈하상과 모래하상은 물이 깨끗해 멱을 감고, 물고기도 잡았다. 작은 웅덩이에는 독풀을 풀어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기도 했고, 어른들은 낚시나 그물을 이용해 잡았다. 어른들은 잡은 고기를 더러 그 자리에서 회를 쳐 먹기도 했는데, 디스토마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늪지대의 뻘이 조금 말라 물렁해지면 학교 미술시간에 공작용으로 사용했다. 더하여 함안에는 철광석, 구리, 고령토 등 광산이 발달했다. 1971년 국가 광산 생산 실적표를 보면, 동광으로 국내 1위가 함안 군북으로 생산량이 5551t이고 고령토는 법수가 국내 4위로 생산량은 7850t이었다. 함안의 그 넓은 습지대는 마을과 농경지 확장과 도로건설 등으로 개발되면서 제방, 배수로, 배수장, 유수지 등 관리시설이 많았다. 특히 남강이 잘 범람하므로 매우 많은 제방을 지니고 있다. 남강 수위가 올라가면 함안들의 물은 빠져나갈 길이 없이 흥건히 잠긴다. 또한 집중호우가 오면 제방이 터질까봐 걱정이 많았고, 더러 제방이 터지곤 하여 농경지가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공식 국가 지도에도 ‘한바다’라는 지명이 있다. 원래 넓은 밭인 ‘한밭’인데 가끔 한바다로 불리면서, 홍수가 되면 그대로 바닷물의 한바다가 되어 말산리에서 검암리까지 나룻배도 다녔다. 함안은 당연히 많은 둑방을 건설하면서 현재 총길이가 338㎞에 달한다. 시군 단위로 전국 최고일 것이다. 남강, 낙동강변은 물론, 함안천, 신음천, 검암천 등 크고 작은 거의 모든 하천에 둑방을 조성했다. 특히 법수면 악양 둑방길은 꽃길을 조성해 전국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남강댐이 범람하게 되면 인공수로인 가화천을 통해서 사천만으로 직접 물을 빼 홍수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 농사가 불리한 평지에서는 소와 말, 염소 등의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지도에는 ‘마구들’이 나온다. 방목장이다. 당시 60년대 중반 우유 없던 시절 염소유가 공급되었다. 고급 음료였다. 가야 충무동에서 도항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방목고개라 했다. 지금도 방목1길 등 도로주소로 남아 있다. 1960년대 기억에 방목이 들어간 상호가 더러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함안의 승마공원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저습지가 많으니, 쌀농사 외에 연뿌리, 미나리 농사도 많았다. 마름이라하여 물에서 건져올려 삶으면 밤 같은 맛이 나는 물 속 열매도 있었다. 함안에서도 강화와 같은 화문석을 만들었다. 고급 바닥 깔개였다. 골, 큰 것은 왕골이라 하여 삼각형의 줄기를 가지는 습지형 줄기 식물로서 껍질을 벗겨서 흰 속살를 말려서 방석 등 다양한 화문석을 만들었다. 강가의 모래 땅에는 땅콩도 심었다. 지금 보면 소규모이지만 참으로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했다. 함안은 남쪽이라 이모작이 가능했다. 겨울과 봄에는 보리농사가 성했다. 당시 영남의 보리는 겉보리라 하여 껍질이 매우 단단한 보리로서 매우 껄끄러운 보리밥으로 만들어졌다. 보리밥도 건너띄는 사람들도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서릿발이 끼이지 않도록 학생들이 단체로 보리밟기에 동원됐다. 일렬로 기차놀이 하듯이 밟고 나갔다. 봄철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바로 물 대고 쌀농사 모내기를 했다. 보리밥이 너무 잦아 질린다 싶으면 보리 대신에 콩나물, 무, 고구마, 감자 등을 혼합하기도 했다. 함안을 포함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1960년대 당시에도 유명했고 지금도 여전한 명품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파수 곶감, 월촌 수박이 있었다. 함안은 따뜻한 지역이었으므로 탱자나무도 많았다. 1922년에 개교한 함안가야학교 울타리는 거의 모두 탱자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겨울철 교실 난로 땔감으로 탱자나무의 마른 가지 부스러기도 모아 사용했다. 학교 교정에는 은행나무, 오동나무가 있었고, 낡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교실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함안은 습지의 고장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로 많은 습지들이 사라졌지만, 일부 보호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강변 습지에 조성된 함안의 경비행장도 볼만하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6-03 09:44:41[파이낸셜뉴스] 길을 가던 한 여성의 남성의 체액을 맞았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용의자 귀가하던 여성에 체액 던져 용의자는 지난 21일 저녁 7시 40분쯤 서울 관악구 한 길거리에서 귀가하던 여성에게 체액을 던져 옷에 묻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서울 관악경찰서는 체액을 채취해 국과수에 정확한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또 주변 CCTV 등을 확인하며 용의자를 특정하는데 주력, 피해자 옷에 체액이 묻은 만큼 강제추행 혐의를 적용할 방침이다. 체액 테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6일 경남 사천에서 한 남학생이 여성 교사의 텀블러에 체액을 넣은 사건이 전해졌다. 한달 전인 2월에는 충남 서산 스터디카페에서 한 남성이 앞에 앉은 여고생 머리에 체액을 뿌린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관련 법적 근거 미비, 처벌 실효성 부족 문제는 이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미비해 처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체액 테러 사건은 피해자에게 성적 불쾌감을 준다는 측면에서 성범죄로 볼 수 있지만, 관련 법 규정이 없어 주로 타인의 물건을 손상시킨 혐의(재물손괴죄)로 다뤄진다. 재물손괴죄의 형량은 3년 이하 징역 700만원 이하로, 공중밀집 장소에서의 추행(3년 이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보다 약하다. 그럼에도 관련 법 개정은 제자리걸음이다. 2021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기 성적 욕망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물건을 상대방의 주거·직장·학교 그 밖에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장소에 두어 상대방에게 도달하게 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을 추가한 성폭력 처벌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소관위원회에서 한 차례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gaa1003@fnnews.com 안가을 기자
2024-04-24 10:36:40[파이낸셜뉴스] 고등학교에서 한 남학생이 여교사의 텀블러에 체액을 넣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피해 교사가 당시 상황을 직접 전했다. 지난 28일 JTBC '사건반장'에는 여교사 A씨가 당시 겪은 상황이 전해졌다. 처음에 손 소독제 인줄 안 교사, CCTV 돌려보니.. A씨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경남 사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계약직 교사로 일하던 중 기숙사에 있는 야간 자율학습실에서 학생들을 감독했다. 그러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자신의 텀블러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A씨는 매체에 "물을 마시려고 텀블러를 들었는데 입구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라며 "누군가 뚜껑을 열었다 닫은 걸 알아채고 열어봤는데 손 소독제 같은 게 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A씨는 학생들이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것이라 생각해, 당시 기숙사에 있던 상담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학교 복도 폐쇄회로(CC)TV를 확인한 결과 남학생 B군이 A씨의 텀블러를 가지고 세탁실과 정수기 쪽으로 갔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B군은 증거가 나오자 결국 자백했다. 그는 "음란물을 보다가 순간 책상에 있던 여교사의 텀블러를 보고 성적 충동이 들었다"라며 "그래서 체액을 넣었는데 다시 씻으려고 세탁실 내부의 세면대로 갔다"라고 말했다. 학생 인생 위해 선처했지만.. 학부모 사과 한마디 없자 '고소' A씨는 사건 직후에는 "학생의 인생에 영향을 끼칠 만한 고소나 퇴학 등의 처분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고 학교 측은 이를 받아들여 B군에게 '특별 성교육' 등의 자체 징계를 내리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A씨는 결국 B군을 고소했다. 그 이유는 A씨의 배려에도 B군과 그 부모에게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으며 학교 측은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A씨는 "학교 측도 '얌전하고 착한 학생'이라며 학생을 감싸면서 2차 가해를 해 고소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도교육청 관계자는 "피해 회복(보상)을 위해 노력했고, B군은 특별교육 이수 등을 조처했다"라며 "감사관실에서 학교 방문 등을 통해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해 대응하겠다"라고 말했다. 기간제 교사였던 A씨는 계약 만료에 따라 근무하던 학교를 사직했고, 이번 사건과 관련해 산업재해를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해당 사건은 A씨의 주거지인 경기도 인근 경찰서에 접수된 상태다. yuhyun12@fnnews.com 조유현 기자
2024-03-29 06:18:00[파이낸셜뉴스] 경남 사천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남학생이 여교사의 텀블러에 체액(정액)을 넣는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27일 경남교육청 등에 따르면 여교사 A씨는 지난해 9월 사천의 한 사립고 기숙사에서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텀블러에 남학생 B군이 체액을 넣는 피해를 당했다. A씨는 “애초 마음 한구석에 교사라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가해 학생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고소나 퇴학 등 처분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면서 “원했던 것은 학교와 학생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였지만 가해자와 그 부모에게 직접적인 사과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학교는 자신들에게 피해가 올까 봐 소극적인 태도로 사건을 덮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지난 20일 이 같은 피해 내용을 국민신문고에 올렸으며 최근 B군을 경찰에 고소했다. 해당 사건은 A씨 주거지인 경기도 인근 경찰서에 접수된 상태다. 계약직 교사였던 A씨는 지난 2월 말 해당 학교와 계약이 종료됐다. 학교 측은 이와 관련해 사건 당시 A씨와 B군의 분리 조치가 이뤄졌고, A씨가 학생에 대한 선처를 원해 자체적으로 사건을 처리했다는 입장이다. B군은 학교에서 특별교육 이수 처분 등을 받고 2주간 등교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 초임 계약직 교사가 남학생 기숙사 감독을 맡았다는 지적에 대해 학교 측은 "A씨가 기숙사 감독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다른 남자 교사와 함께 2명이 감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A씨는 "다른 남자 교사는 헬스 수업 때문에 주로 1층에 있었고, 나 혼자서 2~4층 감독을 맡아야 했다"고 반박했다. 경남교육청 관계자는 "A교사에게 성폭력 피해회복 지원 사업 등을 안내했으며, 해당 학교를 방문해 사실관계를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3-27 05:53:15[파이낸셜뉴스] 층간소음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던 이웃 여성에게 흉기를 휘두르고 달아난 5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크게 다친 30대 여성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끝내 숨졌다. 경남 사천경찰서는 살인 혐의로 50대 남성 A씨를 붙잡아 조사 중이라고 28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이날 오후 4시40분께 사천시 사천읍 사주리 한 빌라 계단에서 이웃인 30대 여성 B씨에게 흉기를 휘두른 뒤 도주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범행 직후 차량을 타고 달아났다가 범행 2시간 만인 이날 오후 6시40분쯤 경남 고성군에서 붙잡혔다. B씨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치료를 받다 결국 숨졌다. 경찰은 A씨가 자신의 주거지 윗층에 거주하는 B씨와 층간소음 문제로 갈등을 빚다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정확한 범행 및 도주 경위를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01-29 05:14:26[파이낸셜뉴스] 경남 사천에서 흉기 난동과 인질극을 벌인 남성이 피해자를 스토킹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범행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12일 사천경찰서 등에 따르면 20대 남성 A씨는 전날(11일) 오후 1시 57분쯤 자신의 전 여자친구 B씨가 거주하는 사천시 사천읍의 한 아파트에서 흉기를 휘둘렀다. A씨는 B씨를 인질로 붙잡고 4시간가량 경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오후 6시쯤 아파트 6∼7층 사이 계단에서 1층에 설치된 안전 매트로 뛰어내렸다. A씨는 경찰 인질 협상팀과 대화하던 중에 갑자기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A씨는 건물에 신체 일부를 부딪쳤다. A씨와 B씨가 인근 병원으로 각각 이송됐고, 2명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경찰특공대와 인질 협상팀을 투입해 A씨를 설득했다. 또 소방 당국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지상에 안전 매트 2개를 설치했다. A씨는 지난해 9월부터 약 한 달간 B씨에게 전화하고 문자를 보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올해 6월 약식명령으로 벌금형을 받았으며, A씨는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고, 7월부터 재판받고 있었다. 경찰은 “A씨가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3-12-12 05:26:47[파이낸셜뉴스] 경남 사천시 한 아파트에서 흉기를 든 20대 남성이 여성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다 아파트 창문으로 투신했다. 11일 사천경찰서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 57분쯤 사천읍 한 아파트에서 20대 남성 A씨가 여성 B씨를 인질로 잡았다. A씨와 B씨는 전 직장 동료 관계로 최근 스토킹과 관련한 소송 과정에 불만을 품고 인질극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B씨를 인질로 잡고 아파트 건물 6층과 7층 사이 계단에서 대치하던 A씨는 4시간 만인 이날 오후 6시쯤 혼자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A씨는 추락하면서 아파트 3층 높이의 외벽 구조물에 1차 충격 후 화단에 설치된 안전매트에 떨어졌다. A씨와 B씨는 인근 병원으로 각각 이송했고, 이들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은 정확한 범행 동기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12-11 19:4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