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야간에 갑자기 도로 위로 튀어나온 검은색 반려견을 치어 숨지게 한 뒤 현장을 이탈한 운전자에게 뺑소니 죄를 묻기는 어렵다는 판결이 나왔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춘천지법 형사1부(심현근 부장판사)는 도로교통법상 사고 후 미조치 혐의로 기소된 A씨(38)에게 원심과 같은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해 4월1일 저녁 7시30분께 강원 정선군의 한 도로 왼쪽 주거지에서 도로에 진입한 B씨 소유의 개를 피하지 못하고 들이받아 숨지게 하고 그대로 현장을 이탈한 혐의로 약식 기소됐다. A씨는 벌금형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그는 "산짐승이라고 생각했고, 해당 동물이 사망했다고 인식하지 못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당시 상황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을 보고 개로 보이긴 하나 야간인 데다 검은색 계열의 개였던 점과 개가 튀어나온 곳이 어디인지 명확히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A씨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사고 당시 블랙박스 충격감지음이 울렸고 A씨가 '아'라고 말했으나 그로 인해 개가 도로 위에서 숨졌다는 점을 인식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1심을 맡은 춘천지법 영월지원은 "검은색 반려견이 사각지대에서 빠른 속도로 갑자기 튀어나왔다"며 "A씨가 과속 등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정은 보이지 않고, 발견 즉시 감속해도 사고를 피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도 "무죄로 판단한 원심 판결은 정당한 것으로 수긍이 가고, 검찰이 유죄 주장에 인용한 대법원 판례는 이 사건과는 사안이 달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라며 기각했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3-04-02 12:19:22중국 남부의 호남, 귀주, 운남, 그 남쪽으로 광서성을 가로지르는 산맥이 남령회랑(南嶺回廊)이다. 그 회랑은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태국과 미얀마까지 이어진다. 중국인들이 이곳을 '회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동하며, 살고 있는 지역의 의미로 읽힌다. 지난 7월 타계한 예일대학의 제임스 스콧(1936~2024)이 2009년에 '조미아'(Zomia·연세대 이상국 교수 번역)라고 명명했던 남중국과 내륙동남아를 연결하는 가파른 비탈의 산악이다. 한때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양귀비 재배로 소탕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북조선 동포들의 탈북 루트였다. 공자시대부터 정치권력을 피해 안식처를 찾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지배와 통제가 없는 무릉도원으로 여겼던 곳이다. 체구는 작지만 '잘 먹고 잘 살며', 심신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이곳의 주인공인 '야오(Yao)'다. 문자 역사를 자랑하는 한족들은 야오 사람들을 지칭하는 글자의 변천사를 보인다. 오랜 문서들은 '요(猺)', 중공시대부터는 '요(徭)', 요즈음은 '요(瑤)'라고 적는다. 개 구(狗) 변에서 두 인(人) 변, 구슬 옥(玉) 변으로 바뀌었다. 털북숭이 짐승 취급을 하다가 사람을 거쳐서 귀한 옥의 의미를 부여한다. 순제(舜帝)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내력을 전설로 이어오면서, 화전으로 곡식을 키우고 닭과 돼지와 함께 살아가는 '산악 노마드'다. 산의 정령이 야오에게 내려준 이슬이 가계 전래의 발효차 원조인 육보차(六保茶)이며, 요순남진(堯舜南進)과 다라낭(茶箩娘) 전설이 차문화의 관념적 배경이다. 불과 물의 조화가 생명줄이고, 화전할 땅을 찾아 다닌다. 이동단위는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결속력이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강력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조도(祖圖)엔 개 중에는 으뜸인 '용견'(龍犬)이 등장한다. 개가 조상인 토템신앙이다. 주몽설화와도 통하는 물을 건너는(過海) 그림도 포함한다. 첩첩산중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령(anima)뿐이다. 죽은 조상이 정령에 가담한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 묘를 쓴다. 5대까지의 묘소는 기록으로 남겼다. 성묘를 하기 위해서 과거의 터전을 찾아가는 길은 월경(越境)일 수밖에 없다. 글자가 없었던 야오 사람들은 중국의 한자를 빌려서 자신들의 내력을 기록했다. '가선단'(家先單)과 '조도'라는 이름의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가보 문서다. 세월이 흐르면서 야오 사람들이 사용하던 한자의 모습도 바뀌었다. 조상의 초혼굿을 위한 제례문은 모두 칠언시(七言詩)다. 해독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음차와 새로 만든 한자들이 상당수 가미되었다. 미얀마든, 태국이든, 베트남이든, 라오스든, 광서성이든 야오 사람들의 구성진 가락이 붙은 칠언시 초혼문서의 형식은 동일하다. 굴원(屈原)의 '초혼사'보다도 자연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야오의 아이덴티티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이어가는 문화과정이 조상을 위한 제례다. 항상 새로운 산을 찾아서 개산(開山)을 하고 화전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과정이 녹록지 않다. 정령의 허락이 있어야 개산도 농사도 가능하다. 문화내탄(文化耐彈·cultural resilience)의 조상제사는 그 자체가 생존전략이자 삶의 구심점이다. 서양학자든 동양학자든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야오의 종교가 도교라고 규정하고, 도교의 논리로 야오의 종교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지만, 아니다. 그것은 겉모양만 도교이고 도사라는 직함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대전통(大傳統)의 껍데기를 둘러쓴 겉모양만 본 것이다. 야오의 정신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대전통의 굴레 속에 꼭꼭 숨어 있다. 한자와 도교의 중국식 대전통은 야오의 소전통(小傳統)이 살아남기 위한 방패 역할을 해준다. 마치 누에의 번데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고치라는 방탄막을 둘러쓰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이러한 현상을 포낭주의(包囊主義·cocoonism)라고 부른다. 자연의 은혜로 살아가는 야오 사람들의 문화에 비친 현대인류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가권력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국경이라는 괴물이 야오 사람들의 이동 루트를 점점 더 철통같이 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오 사람들은 월경하는 성묘길을 다닌다. 닭을 키워서 조상에게 바치는 제례를 지킨다. 돼지도 새해와 추석의 조상맞이에 동원된다. 닭과 돼지를 키우는 일은 집안의 노인 몫이다. 조상 되기 전의 인생 단계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육도와 좁쌀로 만든 떡이 조상께 바치는 젯밥이다. 혼인에도 조상이 개입한다. 청혼을 받은 측은 며칠 동안 조상의 허락을 기다린다. 그동안 집안에 궂은일이 생기면 조상이 허락하지 않는 혼인이라는 판단이 선다. 산을 지고 바람을 맞으며 나무와 짐승들 사이에서 음식을 구해야 하는 야오 문화의 이해는 애니미즘(animism)의 소환 공부를 재촉한다. 국가주의에 멍든 인류문화의 모순판이 야오 사람들에 의해서 드러나는 '조미아' 문화가 탈국가 체제의 미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다. 국가주의의 희생양으로 세상을 떠도는 중동의 쿠르드는 인터넷상의 가상국가를 만들었다. 언젠가는 생명이 다할 국가주의를 대체할 인류의 아이디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것을 찾는 작업이 인류학자에게 부여된 사명일 수 있다. 에드워드 타일러의 '원시문화'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늘 푸른 시월 중순, 이틀간 요코하마의 카나가와대학에서 '야오의 다면성과 통일성'이라는 제목의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일본을 비롯해 중국 남령회랑의 성들과 홍콩과 대만에서 그리고 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국의 학자들과 미국에 거주하는 라오스 출신의 야오 가족도 참석했다. 야오 공동체를 형성한 식탁에서 "효이윱!"이라는 건배사로 술판이 벌어졌다. 평생 야오를 연구해온 야오족문화연구소장 히로타 리츠코(廣田律子) 교수의 각고의 노력 끝에 맺은 결실이다. 24편의 논문과 40여명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재일교포 중국문학자인 교토대학의 김문경 교수도 토론자로 참석했다. 라오스에 근접한 태국 북부 치앙라이에서 온 사엘리오 박사의 자민속지(自民俗誌) 내용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야오의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김 교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재일교포의 삶과 겹치는 장면들을 읽었을 것이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0-21 18:34:02중국 남부의 호남, 귀주, 운남, 그 남쪽으로 광서성을 가로 지르는 산맥이 남령회랑(南嶺回廊)이다. 그 회랑은 베트남과 라오스 그리고 태국과 미얀마까지 이어진다. 중국인들이 이곳을 '회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동하며, 살고 있는 지역의 의미로 읽힌다. 지난 7월 타계한 예일대학의 제임스 스콧(1936~2024)이 2009년에 '조미아'(Zomia, 연세대 이상국 교수 번역)라고 명명했던 남중국과 내륙동남아를 연결하는 가파른 비탈의 산악이다. 한때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양귀비 재배로 소탕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북조선 동포들의 탈북 루트였다. 공자시대부터 정치권력을 피해 안식처를 찾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지배와 통제가 없는 무릉도원으로 여겼던 곳이다. 체구는 작지만 '잘 먹고 잘 살며', 심신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이곳의 주인공인 '야오(Yao)'다. 문자 역사를 자랑하는 한족들은 야오 사람들을 지칭하는 글자의 변천사를 보인다. 오랜 문서들은 '요(猺)', 중공시대부터는 '요(徭)', 요즈음은 '요(瑤)'라고 적는다. 개 구(狗) 변에서 두 인(人) 변, 구슬 옥(玉) 변으로 바뀌었다. 털북숭이 짐승 취급을 하다가 사람을 거쳐서 귀한 옥의 의미를 부여한다. 순제(舜帝)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내력을 전설로 이어오면서, 화전으로 곡식을 키우고 닭과 돼지와 함께 살아가는 '산악 노마드'다. 산의 정령이 야오에게 내려준 이슬이 가계 전래의 발효차 원조인 육보차(六保茶)며, 요순남진(堯舜南進)과 다라낭(茶箩娘) 전설이 차문화의 관념적 배경이다. 불과 물의 조화가 생명줄이고, 화전할 땅을 찾아 다닌다. 이동 단위는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결속력이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강력하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조도(祖圖)엔 개 중에는 으뜸인 '용견'(龍犬)이 등장한다. 개가 조상인 토템신앙이다. 주몽설화와도 통하는 물을 건너는(過海) 그림도 포함한다. 첩첩산중에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령(anima) 뿐이다. 죽은 조상이 정령에 가담한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묘를 쓴다. 5대까지의 묘소는 기록으로 남겼다. 성묘를 하기 위해서 과거의 터전을 찾아가는 길은 월경(越境)일 수밖에 없다. 글자가 없었던 야오 사람들은 중국의 한자를 빌어서 자신들의 내력을 기록했다. '가선단'(家先單)과 '조도'(祖圖)라는 이름의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가보 문서다. 세월이 흐르면서, 야오 사람들이 사용하던 한자의 모습도 바뀌었다. 조상의 초혼굿을 위한 제례문은 모두 칠언시(七言詩)다. 해독이 가능할 것 같지만, 음차와 새로 만든 한자들이 상당수 가미되었다. 미얀마든, 태국이든, 베트남이든, 라오스든, 광서성이든, 야오 사람들의 구성진 가락이 붙은 칠언시 초혼문서의 형식은 동일하다. 굴원(屈原)의 ‘초혼사’보다도 자연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야오의 아이덴티티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이어가는 문화과정이 조상을 위한 제례다. 항상 새로운 산을 찾아서 개산(開山)을 하고 화전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과정이 녹녹치 않다. 정령의 허락이 있어야 개산도 농사도 가능하다. 문화내탄(文化耐彈, cultural resilience)의 조상제사는 그 자체가 생존전략이자 삶의 구심점이다. 서양학자든 동양학자든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야오의 종교가 도교라고 규정하고, 도교의 논리로 야오의 종교를 분석하는 논문을 쓰지만, 아니다. 그것은 겉모양만 도교이고 도사라는 직함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대전통의 껍데기를 둘러쓴 겉모양만 본 것이다. 야오의 정신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대전통(大傳統)의 굴레 속에 꼭꼭 숨어 있다. 한자와 도교의 중국식 대전통은 야오의 소전통(小傳統)이 살아남기 위한 방패 역할을 해준다. 마치 누에의 번데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고치라는 방탄막을 둘러쓰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이러한 현상을 포낭주의(包囊主義, cocoonism)라고 부른다. 자연의 은혜로 살아가는 야오 사람들의 문화에 비친 현대인류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국가권력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국경이라는 괴물이 야오 사람들의 이동 루트를 점점 더 철통같이 막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오 사람들은 월경하는 성묘길을 다닌다. 닭을 키워서 조상에게 바치는 제례를 지킨다. 목에서 나온 계혈은 조상맞이를 위한 제례장소를 씻기 위해 뿌려진다. 돼지도 새해와 추석의 조상맞이에 동원된다. 네 발 묶인 돼지는 멱을 따서 돈혈을 받는다. 제(祭)라는 글자가 '혈식'(血食)이라는 의미가 와 닿는다. 돼지는 삼등분으로 각을 낸다. 머리를 자르고, 목 부분에서 세로로 몸통을 절반으로 가른다. 닭과 돼지를 키우는 일은 집안의 노인 몫이다. 조상되기 전의 인생 단계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육도와 좁쌀로 만든 떡이 조상께 바치는 젯밥이다. 혼인에도 조상이 개입한다. 청혼을 받은 측은 며칠 동안 조상의 허락을 기다린다. 그동안 집안에 궂은 일이 생기면, 조상이 허락하지 않는 혼인이라는 판단이 선다. 씨받이 역할을 해야 하는 데릴사위를 들이는 과정에서도 조상이 개입한다. 산을 지고 바람을 맞으며 나무와 짐승들 사이에서 음식을 구해야 하는 야오 문화의 이해는 애니미즘(animism)의 소환 공부를 재촉한다. 국가주의에 멍든 인류문화의 모순판이 야오 사람들에 의해서 드러나는 ‘조미아’ 문화가 탈국가체제의 미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다. 국가주의의 희생양으로 세상을 떠도는 중동의 쿠르드는 인터넷상의 가상국가를 만들었다. 언젠가는 생명이 다할 국가주의를 대체할 인류의 아이디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것을 찾는 작업이 인류학자에게 부여된 사명일 수 있다. 에드워드 타일러의 '원시문화'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늘 푸른 시월 중순, 이틀간 요코하마의 카나가와대학에서 '야오의 다면성과 통일성'이라는 제목의 국제심포지움이 열렸다. 일본을 비롯해 중국 남령회랑의 성들과 홍콩과 대만에서, 그리고 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국의 학자들과 미국에 거주하는 라오스 출신의 야오 가족도 참석했다. 야오 공동체를 형성한 식탁에서 “효이윱!”이라는 건배사로 술판이 벌어졌다. 평생 야오를 연구해온 야오족문화연구소장 히로타 리츠코(廣田律子) 교수의 각고의 노력 끝에 맺은 결실이다. 24편의 논문과 40여명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재일교포 중국문학자인 교토대학의 김문경 교수도 토론자로 참석했다. 라오스에 근접한 타이 북부 치앙라이에서 온 사엘리오 박사의 자민속지(自民俗誌) 내용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야오의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김 교수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 재일교포의 삶과 겹치는 장면들을 읽었을 것이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0-20 11:27:32[파이낸셜뉴스] 등산을 마친 산악회 회원들이 대로변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8일 JTBC '사건반장'은 지난달 18일 광주 북구의 한 상가 앞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산악회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을 보면 관광버스 한대가 상가 옆 대로변에 멈춰 섰고, 이어 산악회원들이 하차하며 버스에서 짐도 내렸다. 하지만 이 산악회원들은 각자 짐을 챙기면서도 쓰레기로 보이는 스티로폼 상자 등 일부 짐을 대로변에 그대로 두고는 길을 건너 사라져 버렸다. 제보자인 상가 관리인 A씨는 "이들이 버리고 간 스티로폼 상자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직접 쓰레기를 치우고 산악회를 구청에 신고했다. 그러나 구청은 "상자 안에 어떤 쓰레기가 있었는지 사진을 찍어 놓지 않아 처벌이 어렵다"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진행자인 양원보는 "도로에 저렇게 쓰레기를 버리는 것을 보면 산에서는 더 많은 쓰레기가 버려질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은 "저 많은 일행 중 한 명도 제지를 안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취미생활 존중받고 싶으면 남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 “과태료 부과가 왜 안 되는지 모르겠다” "구청 대처에 화난다" 등의 반응을 나타냈다. 한편 경범죄 처벌법 제3조 제1항11호(쓰레기 등 무단투기)에 따르면 담배꽁초, 껌, 휴지, 쓰레기, 죽은 짐승, 그 밖의 더러운 물건이나 못쓰게 된 물건을 함부로 아무 곳에나 버리는 행위를 할 경우 10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과료 등을 부과 받을 수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9-09 07:51:23빗속 7월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조금 부산스러웠지만 지금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여행은 번개처럼 지나가고 오래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닌지요. 8월 여행이야말로 여름여행이지 않을까요. 여행은 무조건 즐거운 것이니까 여행하면 콧노래부터 나오는 것 아닐는지요. 그런데 극한폭염입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리듬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여행가방은 지금 어디쯤 있는지요. 높은 선반 위에, 어두운 창고 속에 아니면 숨 쉬지 못하고 쟁여있는 물건들 속에 가슴 답답하게 숨 쉬지 못하고 누워있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아예 지난여름 여행이 끝나고 넣어둔 그대로 단 한 번도 그 가방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신지요. 아, 내가 너무 미련스럽게 말했나요. 어쩌면 당신은 이미 여름이 오기 전에 가방을 꺼내 바람과 햇살을 조금 먹이고 그리고 탈탈 먼지도 떨어서 눈에 보이는 곳에 잘 놓아두고 여름여행을 꿈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녹음의 계절을 지나는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는 폭염보다 뜨거운 것이 일궈지고 있지요. 그것은 가을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겠는지요 어쩌다 생각이 나면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루 하나씩 넣어두면서 벌써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곧 출발할 것이라고 여행의 준비는 지금 되어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거기서부터 여행이지요. 갈 곳을 정하고, 날짜를 정하고, 가방을 꺼내고 아니면 오래전 준비된 가방을 더 빠른 속도로 점검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가슴 뛰는 시간입니까. 여행은 아직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메라를 준비하고 약과 화장품을 챙기고 그리고 옷을 수북이 꺼내놓고 가져갈 옷을 고르는 그 순간 여행은 오히려 절정이 아닌가 합니다. 기차나 비행기를 타는 시간은 사실 절정은 아닐지 모릅니다. 마치 결혼식이 절정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결혼의 절정은 결혼식이 아니라 서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부모님을 만나고, 예물이 오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신혼여행지를 정하고, 돈을 내고, 여행가방을 챙기는 그 순간들일 것입니다. 결혼식장까지 오는 데 너무나 많은 감정과 마음 쓸 일들과 시간이 흘러가서 결혼식장까지 오는데 다 늙어버렸다는 신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준비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 일도 없다고 어떤 중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지만 바로 오늘 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는 새로운 일들을 만나지요.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은 두렵고도 감사한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하지는 않을까요. 다만 앞으로의 행운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지금 짙푸른 녹음의 계절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디를 봐도 수북한 녹음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짐승 같기도 합니다. 그 푸른 짐승은 도도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힘있는 계절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극한폭염의 뜨거운 계절이지요. 기온이 뜨거운 것 그 속에 우리들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라 더위라는 물리적인 방해꾼을 밀쳐내고 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일구어내는 농작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그 여름의 위대함이야말로 가을의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겠는지요. 그 마음속 열정을 꺼내 짐을 챙겨보세요. 어디든 떠나야 하니까요. 푸른색 안경, 비키니… 그리고 시집 한권이 있다면 더 좋겠지요. 당신의 길에 이 계절의 찬미가 가득하기를 천마리의 새끼를 한꺼번에 낳았는지 살냄새가 진동하는 여름짐승 헐떡 헐떡 7월 지나 8월 낮 오를대로 오른 본능의 짙푸른 질주가 검푸르게 출렁거린다 초록이 무거워라 산벗 나무 잎 하나가 늙은 여자 하나를 쓰러트린다. '여름산'이란 졸시의 한 부분입니다. 짙푸르게 검푸르게 익어가는 초록잎이 무거워 보이고, 힘찬 질주가 진행되고 있는 힘의 여름산을 읊은 한 부분입니다. 이 여름은 날씨의 온도를 뛰어넘어 그야말로 자신의 뜨거움으로 한 계절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더위, 폭우, 장마 그런 따위를 거론하지 말고 자신의 가슴속 열정을 여름보다 더 뜨겁게 높여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일에 땀 흘려야 하는 것이지요. 여름엔 나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여 땀 흘리는 경험을 쌓는 일이 바로 우주를 들어올리는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열정으로 당신의 가방을 지금 꺼내 보세요. 지난여름 다녀온 여행의 기억이 그 가방에 그대로 남아있기도 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다른 물건들에 짓눌려 있던 가방은 다시 활기를 찾고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여행은 소비가 아니라 경험이며 위로입니다. 시간과 사유를 함께 거느리며 낯선 경험에 자신을 즐기는 일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은총이 놀라운 방식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게도 됩니다. 따라서 모든 물건들도 계절에 따라 순환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의 겨울 외투가 장롱 깊은 곳에 걸려 고요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여행가방이 주인공입니다. 여름엔 어딘가로 떠나야 하지요. 그곳이 어디라도. 가능한 한 당신의 여행가방 속에 푸른색 안경과 비키니와 여권과 잠옷과 샌들과 잡다한 물건들 외에 반드시 필기도구와 메모를 할 수첩이 있기를. 그리고 빗속 여행을 떠나신 분들도 시집 한 권이 들어 있다면 가방의 노래는 더욱 맑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리듬이 그 방에 파도를 치며 바다를 먼저 듣게 하지는 않을까요. 그래요. 여름엔 지금 현주소를 떠나며 새로운 힘을 길러내야 하는 거지요. 당신의 여행에 여름의 풍성한 찬미를…. 신달자 시인
2024-08-20 18:08:48[파이낸셜뉴스] 북한산에서 한 남성이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등산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19일, JTBC '사건반장’은 지난 주말 북한산 족두리봉에서 촬영된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을 제보한 A 씨는 아들과 함께 새벽 등산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등산 코스를 오른 A 씨는 오전 7시30분께 하산하던 중 맞은편 산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A 씨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뭔지 모를 것이 왔다 갔다 해서 아들한테 '휴대전화 카메라로 좀 확대해서 확인해 봐'라고 했더니 이런 장면이 찍혔다"고 했다. 영상에는 한 남성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위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남성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붓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기도 했다. A 씨는 "거긴 산 중턱에다가 등산로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들어갔나 싶었다. 더 황당했던 건 어제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또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정도다. 등산객에게 민폐다"라고 토로했다. 이를 본 박지훈 변호사는 "탐방로를 이탈한 것, 나체로 돌아다닌 것, 물을 부어 씻는 행동 모든 게 문제이긴 하나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보기엔 어려워 공연음란죄가 성립되진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다만 "과태료가 적용될 수는 있어 보인다"며 "북한산국립공원 측에서는 탐방로를 벗어나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된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08-20 15:21:47[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옛날 어느 여름날, 중앙 관리 중 승상이 두통을 앓았다. 뇌가 울리면서 아팠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뇌통(腦痛)이라 할 만했다. 많은 의원들이 승상의 뇌통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사실 무엇 때문에 생긴 뇌통인지 알 수 없었다. 태의 중의 한 명이 진료를 맡았다. 태의 또한 진맥을 해 봤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 고민을 해도 도대체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대부분 음식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태의는 승상에게 “승상께서는 평소에 어떤 음식을 많이 드십니까?” 그러자 승상은 “요즘 들판에 꿩과 자고새가 많아서 꿩과 자고새를 사냥해서 즐겨 구워 먹었소. 그 이외에 특별하게 먹는 별다른 음식은 없었소.”라고 대답했다. 자고새는 꿩과에 속한 야생 새다. 태의는 ‘꿩과 자고새를 먹었다고 해서 뇌통이 생기지는 않을 터인데...’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의는 다음 날 우연히 들에 나갈 일이 있었다. 들에는 정말 꿩과 자고새가 많아서 인기척을 느끼면 푸드덕하고 여기저기서 날아올랐다. 그런데 꿩과 자고새가 들판에서 무언가를 캐 먹고 있는 것이다. 자세하게 보니 바로 오두(烏頭)와 반하(半夏)의 싹을 뜯어 먹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새들은 뿌리까지 캐 먹었다. 태의는 ‘승상의 뇌통의 원인은 바로 오두와 반하독이구나.’하고 무릎을 쳤다. 오두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한 투구꽃이고, 반하는 천남성과에 속하는 끼무릇으로 모두 독초다. 오두 뿌리에는 아코니틴이라는 독이 있어서 생으로 해서 과량을 섭취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반하 또한 옥살산 칼슘의 바늘 결정의 독성이 있어서 생으로 먹으면 목이 아려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태의는 강두탕(薑豆湯)을 올렸다. 강두탕은 생강(生薑)과 검은콩인 흑두(黑豆)로 만든 해독제였는데, 오두는 검은콩이 해독하고, 반하는 생강이 해독하는 것이다. 승상은 강두탕을 한 두차례 복용하고 나서는 지긋지긋한 뇌통이 사라졌다. 태의는 승상에게 “이제부터 야생에서 꿩과 자고새를 잡아먹는 일을 그만 두셔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많은 의원들이 “뇌통에는 강두탕이로구나!”하고 외웠다. 그래서 뇌통이 있다는 환자들에게 강두탕을 처방했다. 그러나 환자들의 뇌통에 제아무리 강두탕을 처방해도 효과가 없었다. 어떤 한 의원이 “아니 태의께서는 승상의 뇌통에 강두탕 한 두첩만으로 완치가 되더니, 왜 우리는 효과가 없는 것입니까?”하고 그 까닭을 묻자, 태의는 껄껄껄 웃으면서 “강두탕은 뇌통을 치료하는 처방이 아닙니다. 저는 강두탕으로 뇌통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오두독과 반하독을 해독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태의는 이어서 “승상은 평소 꿩과 자고새를 많이 구워 드셨는데, 이들 새들은 오두와 반하를 잘 먹지요. 그래서 해독제로 강두탕을 처방한 것입니다. 검은콩인 흑두는 오두나 초오, 부자독을 해독하는데 최고이고, 반하독에는 생강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오두 독에는 흑두와 감초로 만들어진 감두탕(甘豆湯)이 좋을 것이고, 반하독에는 생강탕(生薑湯)이 좋은 것이요. 생강탕에 흑두와 감초를 추가해도 좋소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태의의 설명을 들은 여러 의사들은 크게 탄복하였다. 실제로 감두탕은 의서에도 백약(百藥)과 백물(百物)의 독을 해독하는 최고의 해독제로 기록되어 있다. 감초와 검은콩은 각각 20그램씩을 한꺼번에 달여서 복용하는 것이다. 지금도 오두(초오, 부자)독을 제거할 때는 감두탕에 넣어 끓여서 사용하고, 반하독을 제거할 때 생반하를 생강즙에 버무려 말려서 사용하고 있다. 시간이 흘렀다. 한 마을에 대감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 그 대감은 목구멍에 옹저(癰疽)가 생겼고 심지어 심한 곳은 터져서 피고름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물과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고 고통스러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이미 많은 의원들에게 치료를 했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감의 가족은 수소문해서 명의로 소문이 난 한 의원을 집으로 불렀다. 그 의원은 이전에 태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의원이었다. 의원이 보기에 목에 생긴 옹저는 언뜻 보기에 음식독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서 묻기를 “평소에 어떤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이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가족 중 아들이 “아버님은 자고새를 많이 구워 먹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의원은 “자고새를 왜 그리 많이 복용하신 거요?”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대감의 부인이 “자고새가 버섯독이나 풍토병에 걸려 죽으려고 할 때 털째로 구워서 복용하면 좋다고 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또한 자고새가 오장(五臟)을 보해 주고, 심(心)과 기력을 보익하며, 총명하게 한다고 소문이 나 있잖소. 자고새가 하도 몸에 좋다고 하기에 저절로 죽은 것까지 구워 드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독을 제거하고 몸을 보하기 위해서 먹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구려. 지금 보니 대감마님의 증상은 반하독 때문입니다. 자고새가 반하를 많이 먹기 때문에 자고새를 먹고서도 반하독으로 목에 옹저가 생긴 것입니다. 특히 저절로 죽은 자고새는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안됩니다. 우선 급하게 생강 1근을 드셔야만 약을 투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원은 대감에게 급히 생강을 달여서 먹였다. 대감이 진하게 다린 생강을 처음 먹자 처음에는 단맛과 향이 느껴졌고, 반 근쯤 먹자 조금 숨이 트였으며, 1근을 다 먹자 비로소 생강의 매운맛이 느껴졌다. 대감은 “바늘 만개로 목을 찌르는 것 같아 아프고 부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더니 이제는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소.”라고 다행스러워 했다. 이어서 죽을 쒀서 입속에 넣어 주자 막힘없이 삼킬 수 있었다. 의원은 대감이 죽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이어서 감길탕(甘桔湯)과 선방활명음(仙方活命飮) 등을 처방해서 며칠만에 옹저를 완치했다. 독성이 있는 먹이를 먹는다면 그 독성은 먹이를 먹은 동물에게 어느 정도 남아 있을 수 있다. 과거 지네를 많이 잡아먹은 닭을 먹고 지네독이 올랐다는 말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또한 유황을 먹인 유황오리는 열체질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유황은 대열(大熱)한 독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먹는 소나 돼지, 그리고 닭이나 오리 등에게 어떤 사료를 먹이는지가 중요하다. 사료에 따라서 동물이나 가금류의 건강상태도 달라지고 고기의 맛도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먹는 음식이 무척 중요하다. * 제목의 ○○은 ‘생강’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고금도서집성 의부전록> 按南唐書本傳 : 吳廷紹爲太醫令, 不甚知名. 烈袓喉中癢濇, 進藥無驗, 廷紹進楮實湯, 服之頓愈. 宰相馮延巳嘗病腦痛, 醫工旁午累日不痊. 紹至, 先詰其家人曰 : “相公酷嗜何物?” 對曰 : “每食山鷄, 鷓鴣.” 廷紹進薑豆湯, 一服立差. 羣醫默志其方, 他日以楮實治喉癢, 以薑豆治腦痛, 皆無效. 或問其故, 廷紹曰 : “烈袓常服餌金石, 吾故以木之陽實勝之, 木王則金絕矣. 馮公嗜山鷄, 鷓鴣, 二鳥皆食鳥頭, 半夏, 薑豆乃解其毒爾.” 羣醫大服. 按 : 薑豆湯, 查江南通志, 江寧府志, 上元縣志, 俱作甘豆湯, 未知孰是. (남당서의 본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오정소는 태의령을 지냈으나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열조의 목구멍 속이 가렵고 껄끄러워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다가, 오정소가 저실탕을 올리자 복용하고 금세 나았다. 재상 풍연사는 일찍이 뇌통을 앓았는데, 의사들이 다방면으로 치료해도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았다. 오정소가 와서 먼저 그 집안사람들에게 “재상께서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라고 질문하니, “늘 꿩과 자고를 드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오정소는 강두탕을 올렸는데, 한 번 복용하고 즉시 나았다. 여러의사들이 그 처방을 외워 두었다가 나중에 저실탕으로 후양을 치료하고 강두탕으로 뇌통을 치료했으나 모두 효과가 없었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오정소는 이렇게 말했다. “열조께서는 늘 금석으로 복이하셨기 때문에 저는 나무 가운데 양실로써 그것을 제압하였으니, 목이 왕성하면 금이 제어됩니다. 풍공은 꿩과 자고를 즐겨 드셨는데 두 새는 모두 오두와 반하를 먹으니, 강두탕으로 그 독을 해독했을 뿐입니다.” 여러 의사들은 크게 탄복하였다. 살펴보니, 강두탕은 강남통지, 강녕부지, 상원현지를 보면 모두 감두탕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본초강목> 時珍曰︰按南唐書云, 丞相馮延已, 苦腦痛不已. 太醫吳廷詔曰, 公多食山雞ㆍ鷓鴣, 其毒發也. 投以甘草湯而愈. 此物多食烏頭, 半夏苗, 故以此解其毒爾. 又類說云, 楊玄之通判廣州, 歸楚州. 因多食鷓鴣, 遂病咽喉間生癰, 潰而膿血不止, 寢食俱廢. 醫者束手. 適楊吉老赴郡, 邀診之, 曰, 但先啖生薑一斤, 乃可投藥. 初食覺甘香, 至半斤覺稍寬, 盡一斤覺辛辣, 粥食入口, 了無滯礙. 此鳥好啖半夏, 毒發耳, 故以薑制之也. 觀此二說, 則鷓鴣多食, 亦有微毒矣 ; 而其功用又能解毒解蠱, 功過不相掩也. 凡鳥獸自死者, 皆有毒, 不可食, 爲其受厲氣也, 何獨鷓鴣卽神取饗帝乎? 鄙哉其言也! (이시진은 “남당서에서는 ‘승상 풍연사는 머릿속이 아픈 증상이 멎지 않아 고통스러워하였다. 태의 오정소가 공께서 산닭과 자고를 많이 먹어서 그 독이 발생한 것이라고 하고는, 감두탕을 투여하자 나았다. 이 새는 오두와 반하의 싹을 많이 먹으므로 이것으로 독을 풀어 주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또 유설에서는 ‘양입지가 통판으로 광주에 있다가 초주로 돌아왔다. 자고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마침내 목구멍에 옹저가 생겼고, 옹저가 터지자 피고름이 끊이지 않고 나왔으므로 침수와 식음 모두 전폐하였다. 의원을 불러도 속수무책이었다. 마침 양길로가 그 고을을 지나가므로 진찰하도록 초청하였다. 양길로가 말하기를 우선 생강 1근을 드셔야만 약을 투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처음 먹을 때는 단맛과 향이 느껴졌는데, 반 근쯤 먹자 조금 숨이 트였으며, 1근을 다 먹자 비로소 매운맛이 느껴졌고, 죽이 입속으로 들어가도 마침내 막히는 것이 없었다. 이 새는 반하를 잘 먹으므로 오래되면 독이 발생할 따름이므로 생강으로 제어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설을 살펴보면 자고를 많이 먹었는데, 또한 약간의 독이 있으나 그 효능과 쓰임 또한 독과 고독을 풀어 줄 수 있으니, 공과 허물이 서로 가리지를 않는다. 저절로 죽은 날짐승과 들짐승은 모두 독이 있어서 먹을 수 없는데, 전염병을 얻기 때문이니, 어찌 자고만 신령스러워서 상제게 바치겠는가. 그 말이 참 미련하구나!”라고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5-14 18:01:39[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의 영조 왕은 건강에 특별한 관심이 많아서 인삼이나 녹용 등이 들어간 보약을 많이 복용했다. 처방들이 하도 많아서 심지어 먹지도 못하고 버린 것들도 있었다. 어느 날 영조가 신하에게 물었다. “요즘 내가 먹은 인삼의 양이 얼마나 되느냐?” 그러자 의관이 답하기를 “최근 임신년부터 병술년까지 14년 동안 합쳐 보면 거의 100여근이 넘습니다.”라고 했다. 거의 매일 인삼이 들어간 처방을 복용한 셈이다. 내의원에서는 인삼을 수급해서 항상 준비해 놓는 일이 문제였다. 인삼과 같은 고가의 약재는 수급도 문제였고 품질도 고르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지방의 관리들을 다그쳐서 제 때에 품질이 좋은 인삼만을 올리도록 다그쳤다. 그러니 지방에서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함경남도 북단의 압록강 쪽에는 삼수(三水)라는 군이 있었다. 삼수 땅에는 11개 지역으로 고을이 나누어 있는데,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통해서 인삼을 캐서 징수하도록 했다. 병영에서는 병사들을 5일에 한 번씩 수를 헤아려서 병사명부를 작성했다. 그런데 병사명부에 들지 않는 병사들에게는 인삼을 캐서 올려야 했다. 병사들은 인삼을 캐지 못하면 대신 돈으로 내야 했다. 그래서 삼수지역에서 캘 인삼이 없으면 북쪽 국경을 넘어서 인삼을 캐는 폐단이 생기기도 했다. 문제는 병사로 징병되지 않으면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대신 인삼을 캐러 다녀야 했기 때문에 농사일도 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아니 무슨 인삼을 매번 이렇게나 많이 캐 오라는 것이요? 산에 가면 인삼이 널려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요. 게다가 인삼을 못 캐면 돈으로 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요?”라고 따졌다. 그러자 지방 관리는 “조정에서 시키니 낸들 어떻게 하라는 건가? 내가 듣기도 지금 영조 왕이 인삼을 그렇게나 많이 먹어서 내의원에 인삼이 없어서 비상이 걸렸다고 하네.”라고 했다. 당시에는 인삼(人蔘)이라고 하면 바로 산삼(山蔘)이었다. 사실 의서에는 산삼이란 단어가 없고, 인삼만 있다. 의서에 적힌 인삼의 효능은 바로 산삼의 효능인 것이다. 인삼(人蔘)은 사람이 기른 삼이란 의미가 아니라 사람을 닮은 삼이란 의미다. 그래서 병사들은 산에서 산삼을 캐서 진상해야 했던 것으로 매번 산삼을 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은 자신들이 징수 받은 인삼을 모두 조정으로 진상하지 않고 빼돌리기도 했다. 또한 인삼을 캐야 할 병사들을 뇌물을 받고 빼주기도 했다. 그러니 인삼이 제대로 수급이 될 리 만무했다. 녹용은 더 문제였다. 삼수지역의 병영에서는 녹용도 진상해야 했다. 녹용(鹿茸)은 자라고 있는 도중의 사슴뿔을 말하고, 다 자라서 각질화가 된 것은 녹각(鹿角)이라고 한다. 산속을 헤매가 보면 간혹 사슴들이 뿔갈이를 하면서 우람한 나뭇가지처럼 큰 녹각이 떨어져 있는 것들을 주을 수 있지만 녹각은 진상받지 않았다. 녹용은 허로(虛勞)와 정력이 약할 때, 성장이 더딜 때, 팔다리에 힘이 없는 등의 증상을 치료하는 보약으로 많이 사용하고, 녹각은 상처 회복과 뼈와 관절을 튼튼하게 하는데 사용한다. 녹용 중에서도 5월에 뿔이 갓 돋아난 연한 가지 두가닥이 나왔을 때가 가장 효과가 좋다. 그래서 병사들은 주로 봄에 사슴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사슴은 쉽게 발견되지 않아서 녹용 역시 구하지 못하면 대신 돈으로 내야 했다. 이 돈 역시 구하지 못하면 각 병영에서는 빚을 내서 대전(代錢)하도록 했다. 만약 올해 내지 못한 대전이 50냥이면 내년에는 100냥으로 늘어났다. 이 돈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눠서 징수했기 때문에 결국 백성들의 원성이 대단했다. 병사들이 속한 마을은 직업이라고 해봤자 베를 짜거나 농사일을 하는 일에 불과했으니 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런데 1년에 50냥이 넘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 되지 않았다. 고생해서 짠 베와 농사지은 곡식은 자신들의 옷을 지어 입고 하루하루 연명하는데도 부족할 판이어서 이것들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다. 심지어 돈을 내지 못하는 병사들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도 했다. 한 병사가 가족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부족한 녹용값을 내라고 하니 어떡합니까?”하고 울먹였다. 그러자 병사의 아버지는 “안되겠다. 삼수지역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다. 녹용을 징수하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겠다.”라고 했다.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삼수를 떠났다. 게다가 조정에서는 삼수지역의 각 고을에 포수를 2명씩 두어서 봄, 가을로 녹용과 짐승을 사냥해서 바치게 했다. 녹용은 왕실의 보약재로 쓰였고, 사냥한 사슴이나 노루는 종료제례의 제사에 사용되었다. 사슴고기로는 사슴젓갈인 녹해(鹿醢)를 만들었고, 사슴이 없으면 노루고기로 장해(獐醢, 노루고기 젓갈)를 만들어 올렸다. 사실 조정에서도 사슴은 노루와 달리 쉽게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슴이 없으면 녹용도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녹용은 삼수지역의 진상품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삼수지역의 포수들은 그 해에 녹용을 진상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 전년 것까지 합쳐서 진상해야 했고, 다음 해에도 못하면 그 후년에 한꺼번에 진상해야 했다. 그러니 녹용이 빚처럼 쌓여갔다. 만약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사냥하지 못하면 그 대신 속(贖)으로 소 한 마리를 바치도록 했다. 속(贖)이란 죄를 지었을 때 재물이나 노동으로 그 죗값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한 포수는 최근 몸이 아파 거의 사냥을 할 수 없었다. 고을의 관리가 그 포수에게 “자네는 녹용도 진상이 안 되고, 몇 년 동안 사냥한 짐승도 없으니 대신 소 한 마리를 가져오게나.”라고 했다. 포수는 “내가 아무리 사냥꾼이지만 왕을 위한 사냥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대신 농사일에 꼭 필요한 소를 바치라니요. 우리 가족은 굶어 죽으란 말이요?”라고 따졌다. 그러나 관리는 “이것은 조정에서 내린 법령이니 나도 어쩔 수 없네.”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포수는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을 떠나 도망을 쳤다. 포수는 가족들에게 “만약 관청에 묻거든 내가 사냥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시오. 그렇게 말하면 별 수 없을 것이요. 내가 삼수에 있으면 집안이 망할 것 같소.”라고 했다. 가족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삼수지역에 감찰을 나온 장령(掌令, 감찰단)이 이러한 폐단을 접하고서는 상소문을 올렸다. “요즘 북쪽 변방의 삼수지역의 각 고을에서는 인삼과 녹용 그리고 사냥한 짐승을 진상해서 올리는데, 폐단이 많고 불만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변방 지역의 병영의 군사들에게 오로지 인삼만을 캐서 올리고 녹용을 바치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리가 뇌물까지 받고 있으니 그 원성이 대단합니다. 특히 포수들에게는 녹용과 사냥한 짐승을 받치지 못하면 대신 소 한 마리를 징속하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 침탈이옵니다. 굽어살펴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이었다. 상소문을 접한 영조는 “인삼을 캐지 못하고 녹용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을 대전(代錢)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각 지방의 사정에 따라서 진상품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라. 또한 각 고을의 수령들이 포수들에게 잡히지도 않은 짐승을 강제로 진상하게 하거나 대신 소를 바치게 하는 것은 수령이 소를 훔치는 것이 된다. 앞으로 이런 폐단을 없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영조는 인삼과 녹용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진상품이란 사실 그 지역의 특산품을 올리는 것인데도, 구해지지도 않는 인삼과 녹용을 억지로 진상하라고 하면 어찌하란 것인가. 특히 녹용을 진상하지 못하면 소로 대신해서 진상하라고 한다면 왕의 건강을 위해서 농사를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삼수지역의 관리들의 부조리도 문제였지만 영조가 인삼과 녹용을 즐겨 먹는 바람에 결국 백성들만 애를 먹었다. * 제목의 ○은 ‘소’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조선왕조실록> ○ 영조 39년 계미(1763) 9월 16일. 上覽咸鏡監司李昌誼鹿茸封進狀啓, 敎曰: “祭用鹿醢, 代以獐醢, 至載於太常誌, 甚非正名之義. 今因鹿茸封進, 乃覺豈無鹿而獨有茸乎. 不可不釐正太常誌中代獐一節抹去. 貢價參酌加下, 於祭享無名不正之歎, 於貢人無稱冤之弊.” 後領議政洪鳳漢奏曰: “鹿異於獐, 不可多得. 皇壇及宗社文廟外, 請依前代捧.” 上從之. (임금이 함경 감사 이창의가 녹용을 봉진하면서 올린 장계를 열람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제사에 녹해를 쓰던 것을 장해로 대신하도록 할 것을 태상지에까지 기재하였는데, 이는 매우 명분을 바르게 하는 뜻이 아니다. 이제 녹용의 봉진으로 인하여 사슴이 없는데도 녹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따라서 태상지 가운데 노루로 대신하게 한 한 구절은 말거하도록 이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가를 참작하여 더 내림으로써 제향(祭享)에는 명분이 바르지 않은 탄식이 없게 하고 공인에게는 억울함을 일컫는 폐단이 없게 하라.”하였다. 뒤에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사슴은 노루와 달라서 많이 잡을 수가 없습니다. 황단과 종사, 문묘 이외에는 청컨대 전대로 대봉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영조 42년 병술(1766) 10월 11일. 內局入侍. 上曰: “予所服蔘, 今至幾斤乎?” 醫官李以楷對曰: “自壬申至今過百餘斤矣.”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인삼을 복용한 것이 지금까지 몇 근에 이르는가?”하니, 의관 이이해가 대답하기를, “임신년부터 이제까지 백여 근이 넘습니다.”라고 하였다.) ◯ 영조 48년 임진(1772) 7월 7일. 掌令李師曾上疏, 論三水府邑弊民瘼 “중략. 其六, 邊堡砲手徵贖之弊也. 三水地十一堡, 各置砲手二名, 使之獵得鹿茸麝香, 以爲進上者, 乃是朝家令甲. 而每當春秋釋菜, 自本府推捉十一堡砲手, 使之獵獸, 以補享祀之需, 砲手不能獵捉, 則輒徵闕獵之贖, 乃以一牛納之. 各堡砲手, 畏其闕獵之贖, 種種逃走, 今年逃走, 則明年代定, 明年逃走, 則又明年代定. 大抵聖廟享祀之節, 事體至重, 自有八路各邑辦備通行之規 則本府推捉砲手, 責以獵捉, 已涉苟簡, 設令獵捉, 而本府砲手之在於近境者, 不爲不多, 則何必推捉邊堡砲手之應役於進上者乎? 況且一牛徵贖, 尤是非理之侵漁” 答曰: “爲一釋菜, 勒徵於十一堡二十二人砲手, 此爲守令之盜牛也. 所論皆涉切實, 倂令備局, 一切嚴禁. 至於捧牛事, 復若有此弊, 當該府使, 施以禁錮終身之律. (영조 48년 임진년 1772년 7월 7일. 장령 이사증이 상소하여 삼수부의 고을이 피폐함과 백성들의 폐단을 논했다. “중략. 여섯째, 변보의 포수에게서 징속하는 폐단입니다. 삼수 땅 11개 보에 각기 포수 2명씩을 두어 그로 하여금 사냥을 해서 녹용과 사향을 얻어 진상하는 것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조정의 법령입니다. 그런데 매양 봄, 가을의 석채를 당하면 스스로 본부에서는 11개 보 포수를 재촉해서 그로 하여금 짐승을 사냥하게 하여 이로써 제수에 보태며, 포수가 사냥해 잡지 못하면 번번이 사냥에 빠진 속을 받는데, 바로 소 한 마리를 바칩니다. 각보의 포수가 사냥에 빠진 속을 두려워하여 이따금 도주하기도 하는데, 금년에 도망하면 명년에 대정하고, 명년에 도주하면 또 그 다음 해에 대정하고 있습니다. 대저 성묘에 향사하는 의절은 사체가 지극히 중하여 본래 팔도 각 고을에서 통행의 규정을 마련하여 준비하고 있으니, 본부에서 포수를 추착하여 사냥해 잡도록 하는 것이 이미 구차스러움에 관계되며, 설령 사냥해서 잡더라도 본부의 포수로 가까운 경내에 있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하필이면 변보의 포수로 진상하는 역에 응하는 자를 추착해야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소 한 마리의 징속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 침탈입니다.”라고 하자, 왕이 답하기를 “한 번의 석채를 위해서 11개 보의 22명의 포수에게서 늑징하니, 이는 수령이 소를 훔치는 것이 된다. 논한 바가 모두 절실하니, 아울러 비국으로 하여금 일체 엄금하게 하겠다. 소를 받아들이는 일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런 폐단이 있게 되면 해당 부사에게 종신토록 금고하는 율을 시행하겠다.”라고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4-23 16:38:02'톺아보다'는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다'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내책 톺아보기'는 신간 도서의 역·저자가 자신의 책을 직접 소개하는 코너다. 세계 각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도 그렇지만,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한반도에까지 커다란 파장을 끼치고 있다. 남북의 무기가 그 전장에서 대결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끊이지 않는다. 무기 개발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주요 무기 탄생의 순간마다 대장장이가 있었다. 인류는 사람끼리 싸우기 전에 먼저 짐승들과 싸웠을 것이다. 인간은 맨손으로 짐승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손에 들고 싸울 무기를 고안해야 했다. 최초의 무기는 아마도 나무 꼬챙이나 돌멩이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무를 꺾어 창을 만들고, 돌칼이나 돌도끼를 다듬어 좀 더 세련된 공격 무기를 손에 쥐었다. 짐승과의 생존 싸움에서 인간이 우위에 섰을 때, 이제는 인간들끼리 서로 더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전쟁의 승패는 신무기 보유 여부에 달렸다. 금속을 발굴하고 추출하게 된 뒤로는 청동검이나 철검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대량 살상이 가능한 치명적 무기인 총과 대포를 생산하는 데도 성공했다. 나무에서 돌로, 돌에서 청동으로, 청동에서 철로. 첨단 무기 제조를 가능케 하는 기술 습득은 문명 발달을 이끄는 비등점이 되었다. 첨단 무기, 첨단 기술이라고 할 때의 '첨(尖)'이라는 글자는 뾰족하다는 뜻으로도, 날카롭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뾰족하면서 단단한 창, 날카로우면서 무르지 않은 칼을 만드는 부류가 대장장이이다. 그들의 일터인 대장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금속 소재 산업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서 서울 광진구 쪽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그리 높지 않은 아차산이 있다. 이곳에 아주 특별한 고구려 유적지가 자리한다. 도로변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라는 표지판을 커다랗게 세워 놓아 외지인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겨루던 고구려 군대의 전초 기지인 아차산 보루(堡壘)들이 바로 여기 있다.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군사 유적이라서 특별한 것도 있겠지만, 산꼭대기 보루에 딸린 대장간 흔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관심을 끌었다. 보루 부설 대장간은 그 전초에 근무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손보고 무뎌진 창이나 칼날을 벼리던 시설이다. 현대전에서도 탱크나 장갑차 등 첨단 장비가 많은 기계화 부대의 경우 정비부대는 사단 직할대로 삼아 각 단위 부대마다 따로 배속시켜 놓고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빠르게 대응토록 하기 위해서다. 이는 전투 현장에서 고장이 난 장비를 즉시 조치할 수 있도록 하는 최상의 시스템이다. 고구려 아차산의 보루 대장간이 바로 이 현장 조치를 위한 정비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장간 이야기'는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장간을 좀 더 깊고 폭넓게 들여다보자는 차원에서 꾸몄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실으려고 노력했다. 우선은 대장간의 현장을 찾아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으로도 가보았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정진오 인문역사작가
2024-04-18 18:12:01세계 각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도 그렇지만,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한반도에까지 커다란 파장을 끼치고 있다. 남북의 무기가 그 전장에서 대결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끊이지 않는다. 무기 개발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면 주요 무기 탄생의 순간마다 대장장이가 있었다. 인류는 사람끼리 싸우기 전에 먼저 짐승들과 싸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을 잡아 식량으로 삼아야 했고, 짐승 역시 인간을 먹잇감으로 여겼다. 둘 사이의 먹고 먹히는 전쟁은 불가피했다. 인간은 맨손으로 짐승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손에 들고 싸울 무기를 고안해야 했다. 최초의 무기는 아마도 나무 꼬챙이나 돌멩이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나무를 꺾어 창을 만들고, 돌칼이나 돌도끼를 다듬어 좀 더 세련된 공격 무기를 손에 쥐었다. 짐승과의 생존 싸움에서 인간이 우위에 섰을 때, 이제는 인간들끼리 서로 더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전쟁의 승패는 신무기 보유 여부에 달렸다. 금속을 발굴하고 추출하게 된 뒤로는 청동검이나 철검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대량 살상이 가능한 치명적 무기인 총과 대포를 생산하는 데도 성공했다. 나무에서 돌로, 돌에서 청동으로, 청동에서 철로. 첨단 무기 제조를 가능케 하는 기술 습득은 문명 발달을 이끄는 비등점이 되었다. 그 한가운데에 대장장이가 있었다. 첨단 무기, 첨단 기술이라고 할 때의 ‘첨(尖)’이라는 글자는 뾰족하다는 뜻으로도, 날카롭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뾰족하면서 단단한 창, 날카로우면서 무르지 않은 칼을 만드는 부류가 대장장이이다. 그들의 일터인 대장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금속 소재 산업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서 서울 광진구 쪽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편에 그리 높지 않은 아차산이 있다. 이곳에 아주 특별한 고구려 유적지가 자리한다. 도로변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라는 표지판을 커다랗게 세워 놓아 외지인들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겨루던 고구려 군대의 전초 기지인 아차산 보루(堡壘)들이 바로 여기 있다. 남한 땅에 흔치 않은 고구려 군사 유적이라서 특별한 것도 있겠지만, 산꼭대기 보루에 딸린 대장간 흔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관심을 끌었다. 산속 군사기지에 대장간이라니 좀 생경하다. 보루 부설 대장간은 그 전초에 근무하는 병사들의 무기를 손보고 무뎌진 창이나 칼날을 벼리던 시설이다. 현대전에서도 탱크나 장갑차 등 첨단 장비가 많은 기계화 부대의 경우 정비부대는 사단 직할대로 삼아 각 단위 부대마다 따로 배속시켜 놓고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빠르게 대응토록 하기 위해서다. 이는 전투 현장에서 고장이 난 장비를 즉시 조치할 수 있도록 하는 최상의 시스템이다. 고구려 아차산의 보루 대장간이 바로 이 현장 조치를 위한 정비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대장장이가 그랬듯, 현대까지 그들의 혼은 여전히 남아 인류의 역사를 바꿔가고 있다. '대장간 이야기'는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장간을 좀 더 깊고 폭넓게 들여다보자는 차원에서 꾸몄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실으려고 노력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 우선은 대장간의 현장을 찾아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으로도 가보았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펴보았다. 책을 써 내려가며 도시마다 그 지역에 어울리는 대장간 한 두 곳 쯤은 보존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그 고장의 기술 원점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더 나은 기술을 창출해내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성의라고 생각한다. 나름으로는 힘을 들여 쓴 이 책이 우리 첨단 기술의 원점인 대장간을 알아가는 데 아주 작은 쓰임새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정진오 인문역사작가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4-15 09:3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