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하루 종일 내 딸 찾는 현수막을 새로 다는 것이 나의 일과다."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에 붙이며 25년간 딸을 찾았던 송길용씨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다. 28일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에 따르면 송씨는 지난 2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송씨의 딸 혜희양(당시 17세)은 지난 1999년 2월 13일 경기 평택시 도일동에서 밤 10시께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뒤 실종됐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딸이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늦게까지 딸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송씨는 가족들을 모두 깨워 밤새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인적이 드문 시골, 늦은 밤 막차에서 내린 딸을 목격한 사람은 버스를 운전한 기사뿐이었다. 버스 기사는 당시 30대 남성 1명과 혜희양이 같이 내렸다고 진술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찰이 직접 수사에 나섰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결국 송씨는 딸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 곳곳에 설치하고 전국에 있는 아동보호시설도 수소문하며 딸을 애타게 찾았다. 아예 트럭에 딸의 사진을 붙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여러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결국 딸을 찾지 못했다.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축사를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모았던 재산은 사라졌다. 딸을 찾아나서는 동안 심장병과 우울증이 겹친 송씨의 아내는 지난 2007년 딸의 전단지를 품에 안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송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딸을 찾고 싶은 간절함을 이야기한 바도 있다. 인터뷰에서 송씨는 하루 종일 현수막을 새로 다는 것이 일과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니 직접 현수막을 달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송씨의 빈소는 평택 송탄제일장례식장에 차려졌다. 한편 혜희양은 키 163㎝에 둥근 얼굴형, 피부가 검었다. 실종 당시 목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흰 블라우스에 목까지 내려오는 빨간색 조끼를 입고 외투는 허벅지까지 오는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4-08-28 18:28:03[파이낸셜뉴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 할 수도 없다. 하루종일 내 딸 찾는 현수막을 새로 다는것이 나의 일과다."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에 붙이며 25년간 딸을 찾았던 송길용씨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다. 28일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에 따르면 송씨는 지난 2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송 씨의 딸 혜희양(당시 17세)은 지난 1999년 2월 13일 경기 평택시 도일동에서 밤 10시께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뒤 실종됐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딸이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 늦게까지 딸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송씨는 가족들을 모두 깨워 밤새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인적이 드문 시골, 늦은 밤 막차에 내린 딸을 목격한 사람은 버스를 운전한 기사 뿐이었다. 버스 기사는 당시 30대 남성 1명과 혜희양이 같이 내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찰이 직접 수사에 나섰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결국 송씨는 딸을 직접 찾아 나섰다. 그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 곳곳에 설치하고 전국에 있는 아동 보호 시설도 수소문하며 딸을 애타게 찾았다. 아예 트럭에 딸의 사진을 붙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여러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결국 딸을 찾지 못했다.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축사를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모았던 재산은 사라졌다. 딸을 찾아나서는 동안 심장병과 우울증이 겹친 송씨의 아내는 지난 2007년 딸의 전단지를 품에 안고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송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딸을 찾고 싶은 간절함을 이야기한 바도 있다. 인터뷰에서 송씨는 하루 종일 현수막을 새로 다는 것이 일과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니 직접 현수막을 달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송씨의 빈소는 평택 송탄제일장례식장에 차려졌다. 한편 혜희양은 키 163㎝에 둥근 얼굴형, 피부가 검었다. 실종 당시 목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또 흰블라우스에 목까지 내려오는 빨간색 조끼를 입고 외투는 허벅지까지 오는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4-08-28 15:19:22[파이낸셜뉴스] 배우 김우빈이 25년간 딸 송혜희씨를 찾아다니다 별세한 故송길용씨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송길용씨는 1999년 실종된 딸 송혜희씨를 찾기 위해 25년간 전국에 현수막을 붙여왔다. 그러나 지난 26일 교통사고로 사망,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별세한 송씨의 사연에 많은 이들이 추모의 뜻을 전하고 있다. 전국에서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평택 송탄제일장례식장에 차려진 송씨의 빈소에 배우 김우빈의 조화가 놓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뉴스1에 따르면 김우빈의 소속사 AM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김우빈 씨가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면서 딸을 찾는 현수막을 계속 봤다고 한다"라며 "그 현수막들을 보면서 안타깝고 마음이 안 좋았었는데, 부고 기사를 보고 꼭 좋은 곳에 가시면 좋겠다는 마음에 조화를 보냈다고 한다"라고 얘기했다. 김우빈은 소속사와 매니저도 모르게 개인적으로 조화를 보냈다고 한다. 이 관계자 역시 뒤늦게 문의를 받고 해당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송혜희씨는 송탄여자고등학교 3학년이던 지난 1999년 2월 13일 오후 10시쯤 경기도 평택시 자택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후 실종됐다. 송씨는 딸이 행방불명된 후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 곳곳에 붙이며 딸을 찾아 헤맸다. 트럭에 딸 사진을 걸고 전국을 돌았지만 딸을 결국 찾지 못했다. 송씨의 아내는 우울증을 앓다가 먼저 유명을 달리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2024-08-30 06:22:33[파이낸셜뉴스] 25년간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전국 곳곳에 설치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송길용씨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 28일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모임' 관계자는 "송씨가 지난 월요일(2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송씨의 딸 송혜희(당시 17세)씨는 지난 1999년 2월13일 경기 평택의 자택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뒤 행방불명됐다. 딸의 실종 사실을 알게된 송씨는 전국 곳곳에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설치했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트럭에 딸의 사진을 붙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전국에 있는 아동 보호 시설도 수소문하기도 했다. 송씨는 여러 방송에도 출연하며 딸을 애타게 찾았지만 결국 딸을 찾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됐다. 송씨의 빈소는 평택 송탄제일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앞서 그의 아내는 우울증을 앓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졌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4-08-28 13:18:21송길용씨(67)에게 전화를 걸자 "현수막을 달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송씨의 딸은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의 주인공으로, 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송혜희양(38·실종 당시 17세)이다.2월이 오면 송씨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딸이 버스에서 내려 황망히 사라진 달이기 때문이다. 21년이 지났지만 송씨는 여전히 전단지를 뿌리고, 현수막을 수선하며 딸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10일 경찰청과 실종아동전문기관 등에 따르면 혜희양은 1999년 2월 13일 경기 평택시 도일동에서 밤 10시께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뒤 실종됐다.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딸이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 늦게까지 딸이 돌아오지 않자 송씨는 가족들을 모두 깨워 밤새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인적이 드문 시골, 늦은 밤 막차에 내린 딸을 목격한 사람은 버스를 운전한 기사 뿐이었다. 버스 기사는 당시 30대 남성 1명과 혜희양이 같이 내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찰이 직접 수사에 나섰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결국 딸을 직접 찾아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축사를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았던 재산은 사라졌다. 딸을 찾아나서는 동안 심장병과 우울증이 겹친 송씨의 아내는 2007년 딸의 전단지를 품에 안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지만, 송씨는 여전히 서울과 평택 등지에서 변색된 현수막을 갈아주면서 딸을 찾고 있다. 수사에는 진전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날도 하루 종일 현수막을 새로 달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니 직접 현수막을 달고 있다"며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혜희양은 키 163㎝에 둥근 얼굴형, 피부가 검었으며 실종 당시 흰색 블라우스와 빨간색 조끼,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bhoon@fnnews.com 이병훈 기자
2020-02-10 19:01:33[파이낸셜뉴스] 송길용씨(67)에게 전화를 걸자 "현수막을 달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송씨의 딸은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의 주인공으로, 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송혜희양(38·실종 당시 17세)이다. 2월이 오면 송씨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딸이 버스에서 내려 황망히 사라진 달이기 때문이다. 21년이 지났지만 송씨는 여전히 전단지를 뿌리고, 현수막을 수선하며 딸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0일 경찰청과 실종아동전문기관 등에 따르면 혜희양은 1999년 2월 13일 경기 평택시 도일동에서 밤 10시께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뒤 실종됐다.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딸이 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 늦게까지 딸이 돌아오지 않자 송씨는 가족들을 모두 깨워 밤새 찾아나섰지만 허사였다. 인적이 드문 시골, 늦은 밤 막차에 내린 딸을 목격한 사람은 버스를 운전한 기사 뿐이었다. 버스 기사는 당시 30대 남성 1명과 혜희양이 같이 내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경찰이 직접 수사에 나섰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결국 딸을 직접 찾아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딸을 찾아 헤매는 동안 축사를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았던 재산은 사라졌다. 딸을 찾아나서는 동안 심장병과 우울증이 겹친 송씨의 아내는 2007년 딸의 전단지를 품에 안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송씨도 몇 번이고 포기하려 했으나 그 때마다 딸과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을 다잡았다고 전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지만, 송씨는 여전히 서울과 평택 등지에서 변색된 현수막을 갈아주면서 딸을 찾고 있다. 수사에는 진전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날도 하루 종일 현수막을 새로 달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니 직접 현수막을 달고 있다"며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포기를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혜희양은 키 163㎝에 둥근 얼굴형, 피부가 검었으며 실종 당시 흰색 블라우스와 빨간색 조끼, 파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bhoon@fnnews.com 이병훈 기자
2020-02-10 13:55:13제95회 어린이날을 맞아 실종 아동을 찾는 캠페인이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캠페인에 참가한 실종가족찾기 단체 회원과 학생들은 실종 아동들이 무사히 가정으로 돌아오길 기원했다. '전국 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은 5일 서울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아동학대 예방 및 실종아동 찾기 캠페인을 벌였다. 이날 캠페인에는 단체회원들과 중.고교생 400여명이 참석해 뙤약볕 아래서 실종아동 찾기에 구슬땀을 흘렸다. 이들은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가는 대신 사진으로만 아이를 기억해야 하는 엄마.아빠들이 여기 있습니다. 실종아동을 찾는 눈이 돼달라"고 호소했다. 행사에는 실종아동의 부모들도 참가했다. 18년 전 딸 혜희양이 실종됐다는 송길용씨는 "여러분들은 지금 중.고등학생이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다 어린이들"이라며 "나는 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차기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망 편지를 작성해 대형 우체통에 넣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또 실종아동이 가정으로 돌아오고 아동학대가 사라지길 기원하는 소망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하늘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학생들은 행사를 마친 후 청량리역 주위를 오가는 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며 실종아동 찾기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pio@fnnews.com 박인옥 기자
2017-05-05 17:01:31제95회 어린이날을 맞아 실종 아동을 찾는 캠페인이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캠페인에 참가한 실종가족찾기 단체 회원과 학생들은 실종 아동들이 무사히 가정으로 돌아오길 기원했다. '전국 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은 5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아동학대 예방 및 실종 아동 찾기 캠페인을 벌였다. 이날 캠페인에는 단체 회원들과 중·고교생 400여명이 참석했으며 이들은 뙤약볕 아래 실종 아동 찾기에 구슬땀을 흘렸다. 이들은 "어린이날 놀이공원에 가는 대신 사진으로만 아이를 기억해야 하는 엄마·아빠들이 여기 있습니다. 실종 아동을 찾는 눈이 돼달라"고 호소했다. 행사에는 실종 아동의 부모들도 참가했다. 18년 전 딸 송혜희 양이 실종됐다는 송길용씨는 "여러분들은 지금 중·고등학생이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다 어린이들"이라며 "나는 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차기 대통령에게 보내는 소망 편지를 작성해 대형 우체통에 넣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또 실종 아동이 가정으로 돌아오고 아동학대가 사라지길 기원하는 소망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하늘로 날려 보내기도 했다. 학생들은 행사를 마친 후 청량리역 주위를 오가는 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며 실종 아동 찾기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pio@fnnews.com 박인옥 기자
2017-05-05 13:21:07한 해에 국내에서 발생하는 실종아동은 2만명이 넘는다. 2005년 실종아동법이 제정되고 경찰 수사기법도 발달하면서 신고된 실종아동의 99%는 하루나 이틀 내 가정으로 복귀하지만 장기실종아동은 수십년 동안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범죄에 노출되고 부모들은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삶은 피폐해진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구성된 파이낸셜뉴스 스포트라이트팀은 장기실종아동에 초점을 맞춰 가족들의 애타는 사연과 경찰, 보건복지부, 실종아동전문기관 등 유관기관의 실종자 찾기 노력 등을 심층취재, 보도하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장기실종아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기대한다. "이제는 이 아빠의 몸도 마음도 점점 쇠약해져 옛날 같지가 않구나. 앞으로 얼마나 찾아다녀야 널 만날 수 있을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일이지만 몸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련다."경기 평택 송길용씨(65)의 집에서 잃어버린 딸을 향한 애타는 부정이 담긴 편지가 눈에 띄었다. 따뜻한 4월의 봄날 찾아간 송씨의 집은 18년 전 시간에 멈춘 듯했다. 작은 원룸 벽에는 온통 둘째딸 혜희씨(당시 17세)의 빛바랜 사진들로 가득했다. 사진 속 혜희씨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딸을 찾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도, 18년간 뿌린 각종 전단도 혜희씨 사진과 함께 벽면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도 송씨가 직접 쓴 '그리운 나의 딸 혜희에게' '그리운 나의 아내에게' 글에서 18년 전 행복했던 당시로 돌아가고싶은 송씨의 마음이 전해졌다.■연이은 비극…막내딸 실종 이후 아내 자살까지1999년 2월 13일. 당시 고교 2년생인 혜희씨는 여느 때처럼 야간수업을 마치고 귀가 버스를 탔다. 평택 도일동 하리마을에서 축사를 운영하던 송씨의 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버스에서 내려서도 외진 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그날 밤 10시10분께 버스에서 내린 혜희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라졌다. 전교 1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 했던 막내딸은 그렇게 아버지의 가슴에 멍으로 남았다.밤 11시가 넘어 딸이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안 송씨는 밤새 딸을 찾아 헤맸으나 흔적도, 목격자도 없었다. 다음날 새벽 딸이 탔던 버스 기사를 만나 '30대 초반 남성이 혜희씨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는 말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송씨는 혜희씨 사진을 가리키며 "딱 이 모습이다. 당시 구정을 3일 남기고 실종됐다"며 "경찰이 와서 일대를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결국 송씨는 아내와 함께 직접 딸을 찾아 나섰다. 집도, 축사도 정리하고 화물차를 구입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면 전단을 돌리고 거리에는 현수막을 걸었다.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어 라면과 소주로만 버티며 3~4년을 보냈다. 송씨는 "모든 걸 정리한 뒤 화물차에 혜희 얼굴을 붙이고 애 엄마와 돌아다녔다. 둘이 울기도 많이 울고 참…"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송씨의 비극은 딸을 잃은 데서 그치지 않았다. 심장병과 알코올중독을 앓던 아내가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2007년 딸의 얼굴이 새겨진 전단을 품에 안은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 송씨도 몇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번 마음을 먹었다. 낭떠러지에서도 굴러 떨어지고 다리에서도 떨어졌는데 죽지도 않았다"며 울컥했다.■몸도 마음도 쇠약…희망 놓지 않고 매일 거리로송씨는 떠난 아내와 남겨진 큰딸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서울에서 부산, 도서지역까지 전국을 다니며 단순노동으로 돈을 벌었고 번 돈은 고스란히 전단과 현수막을 만드는 데 썼다. 전국 휴게소에 혜희씨 현수막이 걸렸고 지난 18년간 전단만 300만장을 뿌렸다. 송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도움도 이어졌다. 어린이재단 실종아동전문기관은 활동비 일부를 보조해주고 있으며 5년 전에는 평택시의 지원으로 현재 집을 임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송씨의 몸과 마음은 점차 쇠약해졌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허리는 구부리지도 못할 지경이고 무릎관절은 조금만 걸어도 통증이 심하다. 고통으로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잘 정도다. 돈이 없어 수술도 하지 못하고 약에 의존한 채 살고 있다. 그는 "한번은 포기하려고 보름간 술만 먹었더니 뇌경색이 와서 죽다가 살아났다"며 "술, 담배를 끊고 다시 애를 찾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고 전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만만찮다. 그는 "애 얼굴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흑백이 아닌 컬러로 전단과 현수막을 만들어야 하는데 유류비까지 더하면 지원을 받아도 턱도 없다"고 하소연했다.송씨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도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전단을 돌리러 거리에 나선다. 그는 "애한테 죄짓는 것 같아 18년 동안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다"며 "내가 먹고사는 건 두 번째 문제고 한 번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송씨의 마지막 바람은 다른 것 없다.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된 혜희씨를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만나는 것. 그는 "살아 있으면 한 번 보고 죽을 것인데, 그래도 애는 찾고서 죽어야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혜희야. 부디 살아서 만날 날이 오기만을 두 손 모아 빌고 또 빈단다. 만일 영원히 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너만은 예전처럼 밝고 명랑하게 그리고 슬기롭고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아빠가."스포트라이트팀 박인옥 팀장 박준형 예병정 김문희 구자윤 김규태 기자
2017-04-17 17:38:05한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실종아동은 2만명이 넘는다. 2005년 실종아동법이 제정되고 경찰 수사기법도 발달하면서 신고된 실종아동의 99%는 하루나 이틀 내 가정으로 복귀하지만 장기 실종아동은 수십년 동안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로 인해 아이들은 범죄에 노출되고 부모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삶은 피폐해진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구성된 파이낸셜뉴스 스포트라이트팀은 장기실종아동에 초점을 맞춰 가족들의 애타는 사연과 경찰, 보건복지부, 실종아동전문기관 등 유관기관의 실종자 찾기노력 등을 심층취재, 보도하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장기 실종아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기대한다. “이제는 이 아빠의 몸도 마음도 점점 쇠약해져 옛날 같지가 않구나. 앞으로 얼마나 찾아다녀야 널 만날 수 있을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일이지만 몸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련다” 경기 평택시 송길용씨(65)의 집에서 잃어버린 딸을 향한 애타는 부정이 담긴 편지가 눈에 띄었다. 따뜻한 4월의 봄날 찾아간 송씨의 집은 18년 전 시간에 멈춘 듯 했다. 작은 원룸 벽에는 온통 둘째딸 혜희씨(당시 17세)의 빛바랜 사진들로 가득했다. 사진 속 혜희씨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꿈 많은 여고생이었다. 딸을 찾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도, 18년간 뿌린 각종 전단도 혜희씨 사진과 함께 벽면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도 송씨가 직접 쓴 ‘그리운 나의 딸 혜희에게’ ‘그리운 나의 아내에게’ 글에서 18년 전 행복했던 당시로 돌아가고싶은 송씨의 마음이 전해졌다. ■연이은 비극…막내딸 실종 이후 아내 자살까지 1999년 2월 13일. 당시 고교 2학년생이던 혜희씨는 여느 때처럼 야간수업을 마치고 귀가 버스를 탔다. 평택 도일동 하리마을에서 축사를 운영하던 송씨의 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어 버스에서 내려서도 외진 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그날 밤 10시10분께 버스에서 내린 혜희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라졌다. 전교 1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 했던 막내딸은 그렇게 아버지의 가슴에 멍으로 남았다. 밤 11시가 넘어 딸이 들어오지 않은 사실을 안 송씨는 밤새 딸을 찾아 헤맸으나 흔적도, 목격자도 없었다. 다음날 새벽 딸이 탔던 버스 기사를 만나 ‘30대 초반 남성이 혜희씨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는 말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송씨는 혜희씨 사진을 가리키며 “딱 이 모습이다. 당시 구정을 3일 남기고 실종됐다”며 “경찰이 와서 일대를 수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결국 송씨는 아내와 함께 직접 딸을 찾아 나섰다. 집도, 축사도 정리하고 화물차를 구입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면 전단을 돌리고 거리에는 현수막을 걸었다. 맨 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어 라면과 소주로만 버티며 3~4년을 보냈다. 송씨는 “모든 걸 정리한 뒤 화물차에 혜희 얼굴을 붙이고 애 엄마와 돌아다녔다. 둘이 울기도 많이 울고 참…”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송씨의 비극은 딸을 잃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심장병과 알코올중독을 앓던 아내가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2007년 딸의 얼굴이 새겨진 전단을 품에 안은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 송씨도 몇 번 자살을 시도했으나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수십 번 마음을 먹었다. 낭떠러지에서도 굴러 떨어지고 다리에서도 떨어졌는데 죽지도 않았다”며 울컥했다. ■몸도 마음도 쇠약…희망 놓지 않고 매일 거리로 송씨는 떠난 아내와 남겨진 큰딸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서울에서 부산, 도서지역까지 전국을 다니며 단순노동으로 돈을 벌었고 번 돈은 고스란히 전단과 현수막을 만드는데 썼다. 전국 휴게소에 혜희씨 현수막이 걸렸고 지난 18년간 전단만 300만장을 뿌렸다. 송씨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도움도 이어졌다. 어린이재단 실종아동전문기관은 활동비 일부를 보조해주고 있으며 5년 전에는 평택시의 지원으로 현재 집을 임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송씨의 몸과 마음은 점차 쇠약해졌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허리는 구부리지도 못할 지경이고 무릎 관절은 조금만 걸어도 통증이 심하다. 고통으로 수면제 없이는 잠을 못잘 정도다. 돈이 없어 수술도 하지 못하고 약에 의존한 채 살고 있다. 그는 “한번은 포기하려고 보름간 술만 먹었더니 뇌경색이 와서 죽다가 살아났다”며 “술, 담배를 끊고 다시 애를 찾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고 전했다. 경제적 어려움도 만만찮다. 그는 “애 얼굴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흑백이 아닌 컬러로 전단과 현수막을 만들어야 하는데 유류비까지 더하면 지원을 받아도 턱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송씨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도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전단을 돌리러 거리에 나선다. 그는 “애한테 죄짓는 것 같아 18년 동안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며 “내가 먹고 사는 건 두 번째 문제고 한 번은 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송씨의 마지막 바람은 다른 것 없다. 올해 35살이 된 혜희씨를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만나는 것. 그는 “살아있으면 한 번 보고 죽을 것인데, 그래도 애는 찾고서 죽어야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혜희야. 부디 살아서 만날 날이 오기만을 두 손 모아 빌고 또 빈단다. 만일 영원히 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너만은 예전처럼 밝고 명랑하게 그리고 슬기롭고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아빠가” 스포트라이트팀 팀장=박인옥 차장, 박준형 예병정 김문희 구자윤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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