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날인 1963년 12월 25일자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신진공업 사장 김창원씨는 자기 회사에서 생산한 '신성호'(사진) 세단 1대를 청와대를 찾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증했다. 신성호는 일본에서 만든 새나라 택시에 손색이 없을 만큼 외양과 기관이 충실하다."박정희는 그 8일 전인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막 취임했다. 한국 자동차의 효시는 1955년 8월에 최무성과 그의 두 동생이 폐기된 미군 지프 엔진에 드럼통을 망치로 두드려 붙여 만든 '시발 자동차'다. 이후 1962년 박정희 정부가 자동차 진흥 정책을 발표하면서 자동차업체들이 출범했으니 자동차산업의 실제 역사는 갓 60년을 넘긴 셈이다. 현재 자동차산업을 이끄는 현대차와 기아, 한국GM 등이 태동한 것도 그때다. 자전거를 만들던 기아는 일본 혼다와 제휴해 삼륜자동차를 조립생산했다. 1950년대에 드럼통을 펴서 버스를 만들었던 '버스 왕' 하동환의 회사는 동방자동차에 역병합되어 하동환자동차공업(현 KG모빌리티의 뿌리)으로 재출범했다. 현대자동차가 미국 포드와 손을 잡고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것은 1967년에 이르러서였다.서울에 하동환이 있었다면 부산에는 김제원-김창원 형제가 있었다. 두 형제는 1955년 부산 전포동에 신진공업사를 설립해 미군 폐차 엔진을 되살려 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2년에 나온 신진 H-SJ 25인승 신진 마이크로버스는 일명 '노랑차' 또는 '마이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 신진자동차가 그 이듬해 미군 지프를 재활용해 제작한 신진 최초의 승용차가 신성호다. 기사에는 국산 부품을 70% 사용했다고 나온다. 당시 새나라자동차가 일본 닛산과 협력해 조립생산한 '블루버드'의 외형을 모방했지만 아무래도 품질이 조악했다.그런데 새나라자동차가 특혜 시비에 휘말린 사건이 신진자동차에는 기회가 되었다. 신진이 새나라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1965년 신진은 새나라자동차 인천공장(현 한국GM 인천공장)을 인수하고 도요타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도요타의 기술력이 담긴 '코로나'(1966년)와 '크라운'(1967년)이 대히트를 치면서 신진은 1970년대 초반까지 지금의 현대차그룹과 비견할 만한 종합 자동차그룹으로 성장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3-04-06 18:45:21【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 부평에서 시작된 인천 자동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동차 전시회가 개최된다. 인천시 인천도시역사관은 오는 12일부터 특별전 ‘인천 자동차 40년-마이카로의 여정’을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부평에서 운영된 새나라자동차, 신진자동차,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의 40년의 역사를 조명한다. 인천 자동차의 시작을 알린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 부평에 현대식 컨베이어벨트 공장을 지어 일본 닛산자동차에서 부품을 들여와 자동차를 조립·생산했으나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소형 버스 생산으로 유명했던 신진자동차가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했다. 1963년 정부의 자동차공업 일원화 정책에 따라 자동차를 독점 생산하게 되어 승용차 신성호를 선보였다. 신진자동차는 1966년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고 코로나, 크라운, 퍼블리카를 생산했다. 특히 영어단어 퍼블릭(Public)과 카(Car)를 합친 이름의 소형차인 퍼블리카는 예쁜 모습에 연비가 좋은 데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본격적인 자가용 시대의 출발을 알렸다. 신진자동차는 1972년 일본 토요타 자동차의 부품 수입이 중단되자 그 대안으로 미국 지엠(GM)자동차와 합작해 지엠(GM)코리아가 됐다. 이후 1976년 새한자동차로 사명을 바꾸고 제미니, 로얄디젤, 맵시, 로얄프린스 등을 생산했다. 새한자동차는 지엠(GM) 본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어 고유 모델 개발에 힘을 쏟을 수 없었다. 대우자동차가 1978년 새한자동차의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하면서 독자적인 기술개발의 길이 열렸다. 1982년 12월 지엠(GM)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한 대우는 1983년 새한자동차의 상호를 대우자동차로 변경했다. 2년간의 개발 끝에 1986년 선보인 월드카 르망은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고유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해 에스페로를 출시했고 1996~1997년에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3개 차종을 연이어 선보이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또 1991년 국민경차 티코와 1998년 마티즈를 출시해 국내 경차 문화를 선도했다. 그러나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의 영향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자동차 부문이 매각되고 이제는 한국지엠(GM)이 그 자리를 잇고 있다. ‘인천 자동차 40년’ 전시는 2층 기획전시실에서 내년 2월까지 열린다. 1층 로비에는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크라운, 퍼블리카가 함께 전시돼 관람할 수 있다. 신은미 시 인천도시역사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동차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4-11-07 08:33:301972년 1월 1일자 신문에 현대그룹 광고가 실렸다. 시선이 가장 많이 가는 신문 맨 뒷면의 컬러 광고다. '겨레와 함께 자라는 현대구룹(그룹)'이란 제목이 붙은, 최초의 그룹 홍보 광고로 보인다. 광고에는 경부고속도로와 코티나 승용차 사진을 실었다. 계열사 이름들이 적혀 있는데 현대건설, 현대양행(두산중공업의 전신), 현대시멘트, 현대자동차 4개사다. 독일 아우토반을 모델로 삼아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건설이 공사의 40%를 맡았다. 큰 수익을 내지 못했지만,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가 재벌로 도약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시 현대건설 중기관리과장이었다. 미국 포드에서 개발한 코티나 승용차는 현대자동차가 최초로 생산한 차종이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 12월 설립한 뒤 이듬해 2월 포드 유럽법인과 기술·조립·판매 관련 계약을 체결, 11월부터 코티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코티나를 밑거름 삼아 1975년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내놓게 된다. 현대가 제조한 코티나는 2세대인 1969년식 마크 II다. 크고 고급스러운 차량을 선호하던 미국과 달리 유럽형 코티나는 실용성과 내구성을 중시하는 우리에게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제조기술이 없었던 현대는 코티나를 CKD(Complete Knock Down) 방식, 즉 모든 부품을 그대로 들여와 조립하는 방식으로 생산했다. 완전조립은 아니었고 국산화율이 28%였다. 국산화한 부품이라고 해 봐야 타이어와 의자, 재떨이, 손잡이 정도였다. 마이카 붐이 아직 일어나기도 전일 때 시장규모도 작은 나라에서 외국산 부품으로 조립하는 자동차 산업이 과연 적합한 업종인지 회의가 일기도 했다. 당시 국내 자동차업계는 일본 도요타와 제휴한 신진자동차가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후발 주자인 현대자동차의 코티나는 신진 코로나와 경쟁해서 이겨야 했다. 코티나는 한 대 가격이 112만여원으로 코로나보다 25만원이나 비싸 폭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코로나는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다는 점을 내세우며 광고 공세를 퍼부으며 맞섰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1969년 코티나는 5547대가 팔렸다. 당시 국내 승용차 수가 3만3000여대밖에 안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판매량이었다. 그러나 코티나는 곧 약점을 드러냈다. 미국의 평탄한 도로를 기준으로 설계된 차량이라 우리 도로 실정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엔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도 비포장도로가 적잖이 있었다. 시외로 나가면 거의 비포장도로였다. 코티나의 결함이 발생하자 부산 지역 택시기사들이 택시 100여대를 반납하겠다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코티나는 '고치나' '코피나' '골치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판매량은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고 정주영 회장은 비포장도로에 약한 차를 생산하게 한 포드사에 "괘씸하다"고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한다. 현대는 품질이 향상된 새 코티나 모델을 발매하며 신뢰를 되찾았다. 1971년 풀 체인지 모델인 뉴 코티나(코티나 마크 III)가 나왔다. 처음에는 불황과 서정쇄신 바람으로 판매량이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중국 저우언라이가 선언한 4원칙으로 일본 도요타가 한국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신진 코로나가 갑자기 단종된 것이다. 4원칙의 두번째는 "한국, 대만에 투자하고 있는 회사와 거래하지 않는다"였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도요타는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이익이 현대에 돌아왔고 한국 자동차산업을 주도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됐다. 현대는 이후에도 국산화율을 높인 코티나의 새 차종을 내놓는 한편, 포니 개발도 병행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코티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현대 최초의 중형차 고유 모델인 스텔라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글로벌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자동차는 최근 설립 57년 만에 1억대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 출발점이 코티나였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4-10-03 18:43:09[파이낸셜뉴스] 국회의원들이 경제계와 산학연 전문가들과 첨단산업 지원 방안을 모색했다. 20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여야 의원 15명으로 구성된 '한국경제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모임'이 이날 오후 대한상의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총회에는 국민의힘 소속 조배숙 의원, 박준태 의원, 조지연 의원, 최수진 의원, 최은석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소속 유동수 의원, 송기헌 의원, 임광현 의원, 박정 의원, 정일영 의원, 정성호 의원 등이 참석했다. 창립 뒤 첫 번째 활동으로 대한상의와 공동으로 '첨단산업 국가전략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박일준 대한상의 상근부회장과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상근부회장, 이호준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상근부회장과 더불어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 이형희 SK커뮤니케이션위원장, 김동욱 현대자동차 부사장, 박준성 LG 부사장, 김경한 포스코홀딩스 부사장 등이 참석했다. 박일준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주요국들이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고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국가전략 관점에서 좀 더 막중하게 첨단산업을 다루고 지원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를 이뤄내기 위해 이번 세미나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주제발표를 통해 '첨단산업 국가전략에 따른 초당적 여야 협력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김 명예교수는 "경제성장이 정점을 찍고 하락하는 '피크코리아' 현상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이라며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책의 결정이 중요한 만큼, 국민 행복과 국익 차원에서 (여야가) 정책 집행은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첨단산업은 선승독식 경향이 큰 만큼, 국가전략 관점에서 더 과감하고 실효성 있는 정책 패키지들을 신속하게 집행해야 시장을 뺏기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산학연 전문가들 역시 첨단산업 지원에 대한 적극적이고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성엽 고려대 교수는 "반도체는 생산시설인 팹 1기당 20조원 이상이 필요한 만큼, 주요 국가처럼 정부가 기업에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현행 세제지원 체계에서는 첨단산업 기업들이 손실이나 낮은 이익이 발생했을 때 투자 세액공제를 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며 "이차전지와 같은 첨단산업이 영업이익이나 손실에 관계없이 공제받지 못한 세액을 직접 현금으로 환급받을 수 있는 환급형 세액공제(다이렉트 페이)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반도체 클러스터 운영에 필요한 전력 공급을 위한 LNG발전소 추가 건설, 우수 인재 확보 경쟁에서 앞서기 위한 신진연구자 육성 지원 시스템 구축 등이 제안됐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앞으로 22대 국회 여러 의원 연구단체들과 첨단산업뿐 아니라, 다양한 경제산업 어젠다를 공유하고 입법 관련 논의를 이어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기자
2024-08-20 10:22:33[파이낸셜뉴스] 발리 7일차 일정은 그 어느날보다 타이트했다. 이날 하룻동안만 유튜버 '빠니보틀'도 방문한 '타나 롯', 발리 북부에 위치한 '가루다 위시누 켄카나 공원', '울루와뚜 사원' 등 총 3곳을 방문했다. 각각의 이동에만 2시간, 1시간 정도 걸리는 조금은 무리한 일정이었다. 발리 중부에서 시작해 남부, 최남단을 거쳐 다시 중부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해상사원, 타나 롯 8시쯤 일어나 호텔 리셉션의 도움을 받아 오토바이 1대를 빌렸다. 비용은 보통 하루에 8000원 수준으로 장기렌트할 경우 더 낮아지기도 한다. 오토바이를 몰고 아침을 먹기 위해 '씨 유 카페'를 찾았다. 꾸따 비치 인근 주로 서핑을 즐기는 외국인이 많이 찾는 카페처럼 보였다. 아사이볼과 에그베네딕트를 먹었다. 로컬 식당과 비교해 가격대는 좀 나갔지만 분위기도 맛도 괜찮았다. 오토바이로 한참을 달려 타나 롯에 도착했다. 타나 롯은 16세기 자바에서 온 니라타가 건립했다고 한다. 니라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바위덩어리로 된 섬의 경관을 보고 "여기야말로 신들이 강림하기에 어울리는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바다에 있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 위에 사원이 위치한다. 오전, 오후 언제 오느냐에 따라 암석 대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볼수도 있고, 물이 빠지면 바다였던 곳의 땅을 밟고 사원에 오를 수도 있다. 부산에서 가 본 '해동용궁사'의 발리 버전이랄까. 사원을 둘러싼 해안가의 경관도 볼겸 크게 한바퀴를 둘러봤다. 상점가가 있는 곳을 지나는데 '루왁 커피'를 파는 한 카페에서는 2마리의 사향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다. 날이 더워 늘어져 있는 두 마리의 사향 고양이는 캣타워 같은 곳에서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가끔 잠에서 깨고는 자세를 바꾸기는 했는데 활발해 보이지는 않았다. 사향 고양이는 커피콩만 먹으면 영양실조에 걸리고 실제로는 다양한 먹이를 먹는다고 가게의 오너가 설명해 줬다. 사향 고양이 외에도 커다란 박쥐 한 마리가 나무에 매달려 다른 외국인 손님이 주는 당근(혹은 파파야) 같은 걸 받아 먹었다. 루왁 커피는 앞서 커피 농장에서도 먹어봤기 때문에 특별하진 않았다. 다만 발리 현지에서는 5000원~6000원이면 루왁 커피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기회 될때마다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었다. 타나 롯을 나와 도로를 타고 한 5분 정도를 달리다 인근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으로 메인으로 오리 고기와 밥, 면을 함께 파는 식당이었다. 맛은 평범했다. 거대 동상, 영화 세트장 같은 가루다 공원 울루와뚜 웅가산 지역에 있는 '가루다 위시누 켄카나 공원'으로 다시 오토바이로 한참을 달렸다. 덥고 습한 날씨, 장기간 라이딩에 허리와 엉덩이까지 아팠다. 울루와뚜 웅가산 지역에 있는 공원으로 공원 입장료를 구입하면 무료 음료 쿠폰을 한장 준다. 공원안에 있는 식당에서 밥까지 먹을 수 있는 프리미엄 티켓이 있긴 한데 딱히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무료 음료를 마시면서 해당 식당에 들어가 야경을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충분했다. 발리 최대의 테마파크로 발리 문화와 힌두문화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공원이다. 공원의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힌두교 신들 중 하나인 '비슈누'는 질서유지의 신이라고 한다. 힌두교 신들 중 가장 선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신이라고 한다. 비슈누 앞에서 발리 전통 의상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는 공원이 시간 단위로 열리는 듯했다. 비슈누는 다음에 보게 될 반인반조 독수리인 '가루다'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실제로 가루다 동상을 보고 공원을 한 바퀴 돌다 보면 말미에 가루다를 타고 있는 브슈누가 거대하게 얹혀진 건물도 보게 된다. 해당 건물에서는 발리 신진 작가들이 출품한 각종 신과 도깨비 등의 조소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공원을 둘러보는데는 최소 1시간, 넉넉하게 2시간 이상 소요되고 걸음도 꽤 걸어야 한다. 공원에 도착하고 바로 '미쉐'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목을 축였다. 공원을 다 둘러볼 즈음에는 갈증도 나고 꽤나 피로했다. 출구쪽에 접한 식당에서 들어올 때 받았던 입장권으로 무료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별도의 제작 음료를 주는 것은 아니고 호텔 뷔페에 있는 레몬티, 홍차 등 다양한 음료를 내려 마실 수 있는 구조였다. 갈증이 나 한 컵을 원샷하고 다음 잔을 채운 뒤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석양이 지기 시작했는데 밖으로 보이는 풍광도 나쁘지 않았다. 공원을 나와 다시 다음 목적지인 울루와뜨 사원으로 향했다. 석양 진 뒤 울루와뚜 사원, 케착 댄스는 다음 기회에 울루와뚜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져 어둑어둑했다. 오토바이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새우는데 원숭이 두서 마리가 다른 오토바이 위에서 작은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표를 사고 절벽 위에 있는 울루와뚜 사원을 둘러봤다. 절벽 꼭대기에서 밤 바다를 내려다 봤다. 일주일 동안 발리의 여러 관광지를 돌아다녔지만 이날의 울루와뚜에 관광객이 가장 많았다. 출퇴근길 서울의 지하철을 연상케 할 정도로 사람이 가득해 사람 사이를 지나쳐 가야 했다. 사원에서 매 시간 단위로 진행하는 발리의 민속 댄스 공연인 케착 댄스도 보고 싶었는데 이틀전부터 이미 예약이 가득차 있었다. 울루와뜨 사원의 외곽을 따라 걸으며 벽이 낮은 특정 장소에서 한동안 관객의 함성과, 무대 뒤 일부 배우들을 벽 너머로 볼 수 있었지만 공연 전체를 보지 못한 것은 굉장히 아쉬웠다. 처음 발리에 묵었던 우붓 왕궁을 비롯해 다양한 장소에서 케착 댄스 공연이 열렸지만 울루와뚜 공연이 원조라는 얘기를 들어 미뤘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쉽지만 케착 댄스는 다음번 발리를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스미냑 비치, 저 바다에 누워 빈땅 맥주 한 잔 더 라이트를 켜고 발리의 밤 거리를 달렸다. 일부 도로는 한산했지만 도심지에 접근하자 수십대의 오토바이가 도로는 물론 인도를 넘나들며 자동차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다녔다. 방콕 스쿰빗 로드, 베트남 호치민과 견줘도 발리의 오토바이 교통 체증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스미냑 비치에 당도해 주요 상점가를 지나쳐 바닷가에 있는 비치 펍에 가기로 했다. 말 그대로 백사장에 푹신하게 몸을 파 묻을 수 있는 베개형 쇼파가 가득했다. 쇼파와 파라솔이 백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장관이었다. 일행과 나는 블루 나인 비치(B9B)라는 펍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의 비치 펍이 라이브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비치 펍마다 가수의 스타일이 모두 달랐다. 물론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만큼 대부분 미국의 팝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날의 가수는 한 여성분이었는데 노래를 엄청 잘 부른다는 느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날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피자와 첫날 맛있게 먹었던 그리스식 꼬치 요리를 주문했다. 그리고 발리의 마지막 밤인 만큼 빈땅 맥주도 두 세병 마셨다. 일행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가수와 동료들이 무대를 마치고 짐을 싸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자리를 정리했다. 계산을 하고 왔던 백사장을 따라 걸어가는데 우리가 있었던 펍이 그날 밤 문을 제일 늦게 닫은 거라는 걸 알았다. 다른 펍들은 이미 철수를 한 뒤였다. 어쩌면 그날 스미냑 비치에서 마지막까지 빈땅 맥주를 마신 최후의 손님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음날은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아침으로 근처 카페에서 마지막 아사이볼을 먹었다. 이어 호텔 근처에 있던 '코코랩'이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간단하게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먹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생에 첫 발리였지만 어쩐지 발리는 앞으로 적어도 한 번은 더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OBJECT0#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2024-07-18 18:56:20차량의 종류는 용도와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용도에 따라서는 일반적인 형태의 승용차 외에 대체로 여가와 레저 활동에 쓰는 RV(Recreational Vehicle), RV에 드라이빙 기능을 강화한 SUV(Sport Utility Vehicle), 여러 형태의 장점을 살린 퓨전형의 CUV(Crossover Utility Vehicle), 도시의 일상과 레저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는 멀티 기능의 MPV(Multi-Purpose Vehicle)로 나뉜다. 지금은 팔리는 차 10대 중 7대가 SUV라고 할 정도로 SUV가 대세인 시대다. 트럭과 승용차의 장점을 합쳐놓은 형태다. 모하비나 팰리세이드 같은 차량이다. CUV에는 쏘울이나 레이, 베뉴 따위가 있다. 기반이 승용차 차체여서 SUV보다는 크기가 작다. MPV는 카니발과 스타리아가 해당된다고 한다. RV는 레저용 차량을 일컫지만 레저가 포함된 다양한 용도의 차량들을 넓은 의미에서 RV로 묶기도 한다. 사실 차량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장점을 합쳐 만든 자동차들이 나오면서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승용차의 일반적 형태는 세단(sedan)이라고 한다. 자동차가 나오기 전까지 이동수단은 마차나 가마였다. 세단은 프랑스의 스당(sedan) 지역에서 중세 귀족들이 타던 가마에서 따온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가마가 밖에서 보이지 않는 상자 형태였는데 세단이 그런 모양이다. 6·25전쟁 후에 한국인들 눈에 익숙한 차량의 형태는 미군이 군용으로 쓰다 남기고 간 지프였다. 최초의 5인승 국산 승용차인 '시발'은 미군 지프 엔진으로 만든 차였다. 세단 형태로 나온 국내 첫 승용차는 일본 부품으로 들여와 조립한 '새나라'였다. 한국의 자동차 제조기술도 점차 발전했다. 1955년 김제원·김창원 형제가 부산 전포동에서 출범시킨 한국GM의 전신 신진자동차도 초창기 자동차 산업의 기초를 다진 기업이다.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여건에서 맨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진은 1962년 25인승 마이크로버스를 내놓으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의 선두주자로 나섰고, 1965년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고 이듬해 일본 도요타와 제휴해 '코로나' 승용차를 생산했다. 지프와 세단밖에 없었던 자동차의 형태도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이나 미국의 기술에 의존했다. RV나 SUV가 나오기 전 왜건 형태의 자동차가 있었다. 신진자동차는 코로나에 이어 도요타의 '퍼블리카'를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생산했다. 왜건형 퍼블리카도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왜건이었다(조선일보 1968년 8월 6일자·사진). 왜건은 짐을 실을 수 있는 마차를 뜻한다. 왜건 승용차는 트렁크가 있는 뒷부분을 확대해 짐을 많이 싣도록 만든 차량이다. 기반이 세단이어서 차고가 높은 SUV와는 모습이 다르지만 레저용이나 화물 운반용으로 쓸 수 있다. 퍼블리카 왜건을 최초의 왜건으로 이름 붙이는 데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지프가 아닌 길쭉한 9인승 왜건 형태의 '뉴 시발'이 1957년 출시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왜건 형태의 승용차가 여러 번 나왔는데 어쩐 일인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포니, 스텔라, 프라이드, 누비라가 세단과 함께 왜건도 내놓았고 아반떼 투어링도 왜건에 속한다. 최근 나온 현대의 i30과 i40도 왜건형이다. 왜건 차량들은 줄줄이 실패를 맛보았기에 한국 시장은 '왜건의 무덤'으로 통한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수십년 전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한 캠핑이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왜건은 길이가 길어 아무래도 세단보다 값이 비싸고 연비가 낮다. 짐차라는 이미지가 강해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굳이 왜건을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SUV가 레저용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어 여기에도 파고들 틈이 없어 보인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4-06-20 18:23:41[파이낸셜뉴스] 국립부경대학교는 조계용 교수(공업화학전공) 연구팀이 전기차 등에 사용되는 리튬 이온 이차전지의 '열 폭주'를 억제하는 분리막을 개발했다고 31일 밝혔다. 조계용 교수, 박재원 석사과정 연구원, 권영제 박사과정생, 인천대 윤정식 교수(에너지화학공학과)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열적 안정성을 향상하고 자기 소화능력 도입을 통해 화염을 억제하는 분리막을 개발했다. 연구팀은 기능화된 불소계 고분자를 상용 폴리프로필렌 분리막에 코팅하고 가교반응(사슬 모양 구조의 천연·합성 고분자에 새 화학 결합을 만들어 삼차원 그물 구조를 가지게 하는 반응)을 이용해 이 분리막을 개발했다. 최근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수소 전지나 리튬 이온 배터리 기반 이동 수단 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리튬 이온 배터리 기반 전기자동차의 치명적인 단점으로 유기 전해질의 발화에 다른 열 폭주 현상 등 안전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조계용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리튬 이온 이차전지용 분리막은 열적 안정성을 향상한 것은 물론 자기 소화 능력을 갖춰 이 같은 열 폭주 현상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불소계 고분자 코팅층이 고분자의 가교반응을 통해 고온에서 분리막의 열 수축을 억제해 분리막의 고온 안전 특성을 향상시켰고, 연소때 분리막의 전해질과 코팅층이 함께 분해된다. 부촉매 소화 효과를 통해 배터리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지속적인 발화 현상을 억제하며 자기 소화능력을 보였다. 논문 제1 저자인 박재원 연구원은 "이번 연구로 리튬 이온 배터리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는 것은 물론 친환경적인 미래를 위해 리튬 이온 배터리가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사업(RIS), 산업통상자원부와 연구재단의 우수신진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 'Fluorine-rich modification of self-extinguishable lithium-ion battery separators using cross-linking networks of chemically functionalized PVDF terpolymers for highly enhanced electrolyte affinity and thermal-mechanical stability'는 국제학술지 <Journal of Materials Chemistry A>(IF 11.9 / JCR 상위 8.8%)에 1월 28일 게재됐고 표지논문으로도 선정됐다.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2024-01-31 15:55:59"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로 시작되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1945년 광복 직후 발표된 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요다.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담긴 노래다. '새 나라'라는 이름은 17년 뒤 국민의 시선을 끌었다. 1962년 8월 27일 오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천 청천동에서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이 열린 것이다.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현철 내각수반 등 국가 수뇌부가 험한 길을 달려와 총출동한 국가적 행사였다. 박정희는 준공식에서 "우수한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외화를 절약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한국의 자동차산업계에는 시발자동차와 하동환자동차가 있었지만, 미군 지프 엔진을 활용해 차량을 제작하는 원시적 수준이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 승용차 수는 9000여대에 불과했다. 자가용은 꿈도 꾸지 못할 때라 수요가 많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인구에 비해 자동차는 너무 적었다. 박정희는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을 세워 자동차를 국가 기간산업으로 키우려 했다. 그해 2월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협약을 체결했다. 수교 전이었지만 일본의 기술과 제품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화장품 등 소비재도 많았다. 자동차도 현대적 제조기술이 없어 일단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부터 시작하고자 만든 회사가 새나라자동차였다. 인천 부평구는 한국 자동차산업이 태동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국산자동차회사'라는 일본 이스즈의 자회사가 군용 차량을 제조할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새나라자동차가 그 땅을 이어받았다. 새나라자동차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의 뿌리가 된다. 현재 한국지엠 부평공장 부지가 바로 새나라자동차 공장 터였다. 인천이 현재 자동차기업뿐만 아니라 부품 업체와 중고차 시장이 몰려 있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가 된 데는 이런 역사적 연유가 있다. 서울과 가까운 항구도시라는 이점이 작용했다. 새나라자동차가 조립생산한 승용차는 배기량 1200㏄급 닛산의 1세대 '블루버드'였다(경향신문 1962년 7월 4일자·사진). 반제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SKD(Semi Knock Down) 방식으로 제조했다. 현재 닛산은 프랑스의 르노, 일본의 미쓰비시와 지분을 공유하며 협업 관계를 유지하며 판매량 기준으로 도요타, 폭스바겐, 현대차에 이어 세계 4위권 자동차기업에 올라 있다. 닛산의 한국 자동차기업과의 관계는 로노삼성(현 르노 코리아)이 닛산의 '맥시마'를 'SM5'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생산·판매함으로써 30여년 만에 복원됐다. 새나라자동차는 비록 조립이었으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한국 최초의 현대적 자동차기업이었다. 그러나 새나라의 운명은 일찍 종말을 고했다. 자동차 산업 육성이라는 목표는 뒤로한 채 정부는 비리를 자초했다. 박노정이라는 재일동포에게 사업권을 준 것부터 잘못이었다. 박노정은 공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블루버드 완제품을 400대나 관광용 명목으로 들여왔는데, 정부는 이를 택시로 전환해 주어 반발을 샀다. 관세 등 세금을 면제받았고 폭리를 취해 특혜 시비와 탈세 의혹이 불거졌다. 벌어들인 자금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져 파문은 더욱 커졌다. 외환사정까지 나빠지면서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출범 1년도 안 된 1963년 7월에 문을 닫았고, 2년 후 신진공업으로 넘어갔다. 세련된 일제 승용차를 시발자동차가 이길 수 없었다. 비록 망치로 드럼통을 두드려 차체를 만드는 기술 수준이었어도 자생력을 키워 가던 토종 자동차기업까지 새나라 파동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4-01-04 18:47:01[파이낸셜뉴스] 삼성전자가 7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삼성 AI 포럼 2023'을 개최했다. '삼성 AI 포럼'은 인공지능(AI)·컴퓨터 공학(CE) 분야 세계적인 석학과 전문가들이 모여 최신 연구 동향을 공유하고 미래 혁신 전략을 모색하는 기술 교류의 장으로 올해로 7회째다. '반도체 전설' 짐 켈러 기조연설 이날 AI·CE 분야 세계적인 석학과 전문가, 학생 등 총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올해 '삼성 AI 포럼'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초거대 AI(Large-scale AI for a Better Tomorrow)'를 주제로 차세대 반도체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한 AI·CE 기술 연구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을 논의했다. 삼성전자 경계현 반도체(DS)부문장(사장)은 영상 개회사를 통해 "생성형 AI 기술이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수단으로 급부상하며, 기술의 안전과 신뢰, 지속가능성에 대한 더 심도 깊은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며 "학계와 산업계 최고 전문가들이 모인 이번 포럼이, AI와 반도체 기술을 통해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방법을 논의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AI 분야 세계적 석학 중 한 명인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교 요슈아 벤지오 교수는 '안전한 AI 연구자 시스템을 향해(Towards a safe AI scientist system)'를 주제로 온라인 기조 강연을 진행했다. 그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발전하는 AI 기술의 결과가 연구자들의 개발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한 AI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소개했다. 이어 캐나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텐스토렌트의 최고경영자(CEO)인 짐 켈러는 '자신만의 실리콘을 소유하라(Own Your Silicon)'를 주제로 오프라인 기조 강연을 진행했다. 짐 켈러는 삼성은 물론 현대차, LG전자, TSMC 등 글로벌 기업이 주목하는 인물로 '반도체의 전설'로 불린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삼성 파운드리 공장에서 텐스토렌트의 4나노 AI 칩렛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이며, 현대자동차그룹은 텐스토렌트에 5000만달러(약 642억원)를 투자했다. LG전자는 텐스토렌트와 협업을 통해 AI 및 칩렛 기반 반도체를 만들어 향후 스마트TV에 적용할 계획이다. 차세대 반도체 설계 혁신을 통한 AI 기술 한계 극복 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개방형 하드웨어 설계자산(RISC-V, 리스크 파이브) 기반 하드웨어 구조 설계 혁신을 통한 차세대 AI의 새로운 가능성을 강조했다. 美 프린스턴대 제이슨 리 교수, '삼성 AI 연구자상' 수상 아울러 이날 삼성전자 SAIT(구 종합기술원)는 △LLM과 산업용 AI의 변화 △LLM과 시뮬레이션을 위한 초거대 컴퓨팅을 주제로 AI·CE 분야 세부 세션을 각각 진행했다. 각 세션에서는 세계적 석학과 전문가뿐 아니라, 삼성전자 SAIT AI연구센터와 시스템 연구센터의 연구 리더들도 강연을 진행했다. 한편, 삼성전자 SAIT는 이날 AI 분야 글로벌 우수 신진 연구자를 발굴하는 '삼성 AI 연구자상'과 국내 AI 인력 육성을 위해 진행한 '삼성 AI·CE 챌린지' 수상자도 발표했다. '삼성 AI 연구자상'에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제이슨 리 교수 등 5명이 선정됐다. 제이슨 리 교수는 딥러닝, 강화학습, 최적화 등 AI분야 이론 및 응용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며, 해당 분야에서 우수 논문을 다수 게재해 전세계 AI 연구 발전에 기여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481명 총 410개 팀의 학생들이 참여한 '삼성 AI·CE 챌린지'에서는 총 16개 팀이 수상했다. AI 분야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서울대학교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박건도 학생은 "AI를 실제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며 "대회 기간 동안 많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공부하며 또 한차례 연구에 대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이외에도 삼성전자 SAIT는 이날 행사를 통해 △우수 논문 포스터 발표 △AI·CE 분야 연구 과제 전시 △연구자 간 네트워킹 행사 등 AI 분야 연구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8일 서울R&D캠퍼스에서 삼성리서치 주관으로 '삼성 AI 포럼' 2일차 행사를 진행한다. 삼성전자는 이 자리에서 업계와 학계 AI전문가들과 함께 생성형 AI 기술의 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관련 기술 동향을 공유할 예정이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2023-11-07 10:34:31우리나라 땅에 처음 선보인 자동차는 고종 황제의 의전용 차량으로 1900년대 초 미국에서 들여왔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같은 차량이 전시돼 있다. 1913년에는 순종 황제용으로 1912년식 캐딜락 리무진을 수입한 것으로 돼 있다. 자동차는 조금씩 늘어났다. 1918년 212대에 불과했지만 1932년엔 4800대, 1940년 무렵에는 1만대까지 증가했다. 1920년대까지 일본은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했다. 일본 최초의 자동차 제조회사인 도요타가 독립해 설립된 때는 1937년 8월이었다. 이 무렵 국내에도 '조선국산자동차회사'라는 자동차 제조회사가 세워졌다. 일본의 자동차회사인 동경와사전공계(東京瓦斯電工系)가 설립한 회사다. 현재의 인천 부평구 산곡동 미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20만평(약 66만㎡) 규모의 공장에서 자동차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재정상 문제로 도쿄자동차회사에 1939년에 합병됐고, 규모도 4만평(약 13만㎡)으로 축소됐다고 한다. 부평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자리를 잡은 연유가 거기에 있다. 광복 후 미군들이 남기고 간 지프의 엔진과 차축을 이용하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든 '시발자동차가 등장, 한국 자동차산업의 태동을 알렸다. 같은 해 대우자동차의 전신 신진공업사와 쌍용자동차의 전신 하동환자동차가 설립돼 자동차산업은 점차 영역을 넓혀 갔다. 1962년부터 우리 정부의 자동차산업 진흥정책으로 최초의 근대시설을 갖춘 자동차공장이 만들어졌다. 새나라자동차가 그것이다.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의 1200㏄ 승용차 400대분의 부품을 들여와 조립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이 되어서 새나라자동차는 신진을 합병하고 일본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더 품질 좋은 자동차를 생산했는데 바로 '코로나'다(경향신문 1967년 4월 19일자 광고·사진). 코로나는 당시로서는 드문 히터와 라디오 등 편의장치를 갖춘 현대식 승용차였다. 섬유의 '혼방'과 자동차의 '코로나'는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서 좋은 것의 대명사처럼 쓰였다. 품질 좋은 코로나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고 흔한 승용차였다. 길 위를 달리는 승용차의 십중팔구는 코로나였다고 보면 된다. 그 코로나가 지금 바이러스 이름으로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세계적 자동차가 된 현대가 본격적으로 차량을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이다. 설립 시기는 1946년이다. 현대는 미국 포드와 손잡고 첫 작품인 코로나와 이름이 비슷한 '코티나'를 생산했다. 현대와 같은 그룹이 된 기아는 광복 직후 경성정공으로 출발했다가 자전거 등을 만들며 기술을 축적, 자동차 제조에 뛰어들었다. 후륜구동 승용차 '브리사'가 첫 제품으로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등장했던 그 차다. 1975년 포드와 결별한 현대는 '포니'를 내놓고 세계 16번째의 독자개발 차량으로 이름을 올렸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3-10-12 18: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