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한국조폐공사는 성창훈 사장이 지난 27일 사업 확대와 전략적 협력관계 강화를 위해 우즈베키스탄 조폐공사를 방문, 우즈베키스탄 조폐공사 하미도브 아지즈혼 신임 사장과 업무협의를 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협의에서 성 사장은 공사가 개발한 높은 기술력의 보안잉크를 소개하고 현재 우즈벡에 공급하고 있는 요판잉크의 공급체계를 확고히 하는 한편, 차별화된 신규 보안잉크 제품을 제안하는 등 수출잉크 사업 확대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우즈벡 조폐공사는 보안잉크 뿐만 아니라 다른 보안제품에도 큰 관심을 표하며 사업이 확대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이번 협의를 통해 양사의 사업 확대에 대한 의지와 전략적 협력관계의 중요성을 재차 확인하며, 우호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조폐공사에서 제조되는 요판잉크는 우즈벡에서 표준잉크로 선정돼 우즈벡 은행권에 적용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17년부터 요판잉크를 공급하고 있으며, 올해는 총 30톤에 달하는 물량을 공급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폐공사는 최근 협력기관과 함께 제조한 K-특수보안잉크를 해외 조폐기관에 수출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보안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성 사장은 "보안잉크를 비롯한 공사의 다양한 기술이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며 "우즈벡의 수출 확대를 기반으로 주변 국가에 우리 기술을 알려 공사의 기술과 수출 경쟁력을 강화 하겠다"고 말했다. kwj5797@fnnews.com 김원준 기자
2024-08-29 09:51:57BC카드가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 간 카드 결제망을 직접 연결한다고 26일 밝혔다. 앞서 지난 23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최원석 BC카드 사장, 무킷디노브 막사드(Mukhitdinov Maksadjon) National Interbank Processing Center(이하 'NIPC') 부대표 등 주요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양국 카드 결제망 연결 사업을 위한 본계약 체결식이 진행됐다. NIPC는 우즈베키스탄 중앙은행 산하 국영 결제사업자로서 국내전용 카드 브랜드 'HUMO' 운영 및 현지 32개 은행의 지급결제 중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본격적인 협업 개시에 따라 양사는 우즈베키스탄 국민이 별도 환전·송금 없이 우리나라에 비치된 ATM기기에서 HUMO 브랜드 카드로 현금 인출이 가능하도록 연내 인프라 및 서비스 개발에 착수한다. 이를 통해 한국에 체류 중인 우즈베키스탄 근로자,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금융 거래가 대폭 편리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일례로 우즈베키스탄 근로자는 별도 환전 또는 송금할 필요 없이 HUMO카드로 본국에 있는 계좌의 잔액을 국내 ATM 기기에서 원화로 인출할 수 있다. 우즈벡 근로자의 가족 또한 근로자에게서 별도로 해외송금을 받지 않아도 BC카드로 생활비 등을 우즈베키스탄에 비치된 ATM 기기에서 현지 통화인 '숨'으로 편리하게 인출할 수 있다. 막사드 NIPC 부대표는 "2700만 HUMO카드 고객과 3,600만 BC카드 고객이 양국에서 비용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자국 로컬 카드를 이용할 수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밝혔다. 최원석 BC카드 사장도 "이번 양사 협업은 양국 교류 확대를 촉진시킬 지급결제 인프라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yesji@fnnews.com 김예지 기자
2024-08-26 18:07:00[파이낸셜뉴스] BC카드가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 간 카드 결제망을 직접 연결한다고 26일 밝혔다. 앞서 지난 23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최원석 BC카드 사장, 무킷디노브 막사드(Mukhitdinov Maksadjon) National Interbank Processing Center(이하 ‘NIPC’) 부대표 등 주요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양국 카드 결제망 연결 사업을 위한 본계약 체결식이 진행됐다. NIPC는 우즈베키스탄 중앙은행 산하 국영 결제사업자로서 국내전용 카드 브랜드 ‘HUMO’ 운영 및 현지 32개 은행의 지급결제 중계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본격적인 협업 개시에 따라 양사는 우즈베키스탄 국민이 별도 환전·송금 없이 우리나라에 비치된 ATM기기에서 HUMO 브랜드 카드로 현금 인출이 가능하도록 연내 인프라 및 서비스 개발에 착수한다. 이를 통해 한국에 체류 중인 우즈베키스탄 근로자, 유학생 등을 중심으로 금융 거래가 대폭 편리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일례로 우즈베키스탄 근로자는 별도 환전 또는 송금할 필요 없이 HUMO카드로 본국에 있는 계좌의 잔액을 국내 ATM 기기에서 원화로 인출할 수 있다. 우즈벡 근로자의 가족 또한 근로자에게서 별도로 해외송금을 받지 않아도 BC카드로 생활비 등을 우즈베키스탄에 비치된 ATM 기기에서 현지 통화인 ‘숨’으로 편리하게 인출할 수 있다. 막사드 NIPC 부대표는 “2700만 HUMO카드 고객과 3,600만 BC카드 고객이 양국에서 비용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자국 로컬 카드를 이용할 수 있어 매우 고무적”이라고 밝혔다. 최원석 BC카드 사장도 “이번 양사 협업은 양국 교류 확대를 촉진시킬 지급결제 인프라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yesji@fnnews.com 김예지 기자 yesji@fnnews.com 김예지 기자
2024-08-26 14:09:51<26>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으로 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한달여간의 우즈벡 여행을 마치고 오늘은 국경을 넘는다. 타슈켄트에서부터 앞으로의 경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우리가 원한 최선의 경로는 우즈벡 남서쪽의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이란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투르크메니스탄 가는 방법이 쉽지 않았다. 코로나 전에는 3~5일짜리 경유(Transit)비자가 있었다는데 발급이 중단된 듯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타슈켄트에 있을때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을 찾아가 한시간을 기다려 겨우 직원을 만나 물어보았는데 초청장이 있으면 몰라도 외국인 입국이 금지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한 이란도 까르네(무관세 통행증)가 필요하며 대행사 등을 통해 미리 행정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꽤 많은 돈이 드는 것 같았고 운이 나쁘면 돈을 내도 입국이 안될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쪽 경로는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북쪽으로 카스피해를 돌아 가야했는데 국경지나는 것을 최소화하기위해 일단 카자흐스탄에 재입국해서 카스피해 연안의 악타우에서 배에 차를 실어 아제르바이잔으로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구글 맵에 누쿠스에서 악타우까지는 약 1000km거리에 14시간이 걸린다고 나온다. 하지만 경험상 +3~4시간이다. 압둑의 아버지께서 이 구간의 길이 매우 안좋고 국경 전엔 주유소나 마을이 하나도 없다고 알려주셨다. 까브리가 캠핑카이니 숙소나 마을이 없어도 아무데서나 쉬고 밥을 해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제 시내에서 주유소 두 곳을 찾아갔었는데 디젤이 없었다. 가는 길에 살 수 있겠지 했는데 허름한 주유소를 하나 찾아내어 들러봤지만 역시 디젤은 없었다. 더 가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나올까봐 다시 누쿠스로 돌아가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식당겸 트럭 휴게소를 발견했다. 현지분들께 번역앱을 동원해 경유를 파는 가까운 주유소를 물어본다. 러시아어를 쓰는지 페르시아어를 쓰는지 우즈벡어를 쓰는지 모르니 번역앱도 무용인 경우가 많다.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황당하게도 여기에서 디젤을 판다고 한다. 품질이고 가격이고 따질 상황이 아니다. 디젤이 있다는게 반가와 당장 30리터를 달라고 했다. 직원 두분이 말통에 담은 디젤을 가져와 까브리 연료통에 넣어주었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이정도면 국경 지나 베뉴까지도 문제 없다. 누쿠스에서 멀어지니 사방이 평평하고 누런 사막이 시작되고 도로 상태가 안좋아진다. 와아...단언컨대 지금껏 경험한 최악의 도로다. 아스팔트를 몇십년간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게 되었다. 구겨진 옷의 주름이 잡히듯 쪼글쪼글한 아스팔트에 바퀴가 반이상 빠질듯한 크고 깊은 구멍이 계속 이어진다. 길이 얼마나 안좋은지 도로 옆에는 차들이 아스팔트 길을 피해 맨땅으로 다녀서 만들어진 흙길도 보인다. 차라리 흙길이 나을까 싶어 우리도 한번 가보았는데 울퉁불퉁 차가 미친듯 요동치고 흙먼지가 엄청나게 날려서 딱히 나을 것도 없다. 엉망인 도로탓에 사람도 차도 생고생이다. 10~20km밖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마저 악성 구간을 피하려고 가다서다를 반복해야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12시간을 왔는데 국경은 아직 한참 남았고 날은 어두워져버렸다. 마땅히 쉴 곳도 없어 밤에도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가는 것이 위험한 것을 넘어 공포스럽기 까지 했다. 그냥도 12시간을 운전하면 어마어마하게 피곤할텐데 길 상태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운전한 탄이 기절할 정도로 힘들어 한다. 공터고 뭐고 아무것도 없지만 도로를 조금 벗어나 흙바닥 위에 차를 세웠다. 사막의 추위에 수많은 별들도 눈에 안들어온다. 무시동 히터를 켜고 전기요를 의지해 잠을 청해보았다. 밤새 추위와 싸우다 살아서 눈을 떠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아침기온 영하 7도. 체감은 -10도가 훨씬 넘는 듯 무섭게 춥다. 오늘은 꼭 국경을 넘자! 하며 기운차게 출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화이팅하며 출발한지 30분도 채 안되어 갑자기 도로위에서 시동이 꺼졌다. 어제 거친 도로에 종일 시달리느라 까브리가 병이 난걸까? 추운 날씨에 오그라든 손으로 겨우 점프용 예비 배터리를 연결해보았다. 여전히 시동이 안 걸린다. 어제 넣은 경유가 문제일까? 영하의 날씨에 얼어버렸나? 궁여지책으로 휴대용 버너를 차 아래에 놓고 연료통을 데워보려 했지만 영하의 세찬 바람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이었으면 전화한통으로 견인 출동 서비스를 불렀을텐데. 막막했다. 도로위에서 차가 멈춰버렸다. 배터리 점프도 해보고 연료통도 데워보지만 소용없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해결될지도 모르겠지만. 바이칼호에서 우리가 견인을 해주었던 생각이 났다. 우리가 견인을 받아야하는 일이 생길줄은 몰랐는데. 이 길을 다니는 차도 별로 없다. 시동이 안 걸리니 히터도 안되서 추위에 덜덜 떨며 마냥 기다린다. 한참만에 대형트럭이 한대, 두 대 서주었는데 언어 소통이 안되어 결국 그냥 가버리고 망연자실 그저 착한 사마리아인같은 분이 나타나시기를 빌고 또 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가 멈춘지 3시간이 지났을때 드디어 생명의 은인이 나타나셨다. 크고 힘세보이는 대형트럭도 여러대 그냥 지나갔는데 정작 우리를 도와준 것은 딱 봐도 수십년은 된 듯한 낡은 밴 뒤에 달구지까지 매단 차. 길이 너무 험해서 섣불리 견인해주겠다 나서지 못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분은 우리차를 보자마자 견인줄을 준비해서 달구지와 까브리에 묶는다. 이제 살았다 싶고 너무너무 감사하다. 드디어 밴이 끄는 대로 까브리가 움직인다. 서너시간 만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밴 기사님이 운전을 매우 잘하시는 분이었다. 길이 워낙 험해서 그냥 가기도 위험한 길을 우리 1톤 트럭을 매달고 잘도 가신다. 하지만 험로에 앞차가 언제 급제동을 할 지 알 수 없기에 탄이는 초긴장모드로 오른팔에 심한 근육통이 생길 정도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수없이 잡아당겨야 했다. 30분쯤 지나 탄이 약간 여유가 생겼는지 "개인적으로는 대형트럭보다 밴 사이즈의 차가 견인해주어서 따라가기가 훨씬 나아"라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견인줄이 툭 끊겼다. 헉. 탄이 크락션을 울려 신호를 한다. 밴 기사님은 차를 세우고 다시 견인줄을 까브리에 묶는다. 길이 험해 견인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니 견인줄이 끊어지는 것 쯤은 당연하다 싶다. 끈이 무지 오래된 듯 낡기도 했다. 앞차는 길이 조금이라도 좋다 싶으면 막 달린다. 그러면 오래된 아스팔트에서 자갈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마구 날라온다. 이미 금간 앞유리가 완전히 깨져버리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게 중요하다. 천천히 가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 끈에 묶인 채 앞차에 매달려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참 가다가 길에 서있는 승용차 앞에서 밴이 차를 멈추었다. 어리둥절 내려보니 역시나 고장차량이다. 이미 한대를 구조해 견인중이면서도 또 다른 어려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신가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다. 이 차량은 앞 타이어 하나가 완전히 빠져 길에 놓여있는데 타이어를 연결하는 쇠부속이 부서진듯 했다. 밴 기사님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무슨 조치를 한 후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두어시간이 지나 국경 근처의 한 식당에 도착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지만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탄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밴기사님께 식사대접이라도 하겠다며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 후 차 고칠 곳을 물어보니 근처에는 정비소가 없다고 한다. 이대로 견인된 채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밴기사님과 식당주인분이 나와 까브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신다. 퓨즈 박스도 열어보고 엔진룸도 열어보고 그러더니 견인 중 시동을 걸어보잔다. 탄이 안해본 게 아니어서 별 기대는 안되었지만 두분이 봐주는 것 만으로도 너무 고마와 밴의 달구지는 빼고 우리차를 직접 묶어 견인하며 식당사장님이 우리차를 운전하였다. 식당 주차장을 한바퀴 돌기도 전에 "부릉~"하며 시동이 걸렸다. 나는 옆좌석에 앉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야~!"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탄이가 다가온다. 이럴수가! 까브리가 다시 살아났다!! 눈물이 날 정도로 까브리 엔진소리가 반가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엔진을 끄고 다시 시동을 걸어보니 안 걸린다. 다시 밴으로 견인해서 시동을 걸었더니 다행히 또 걸렸다. 두분 모두 이대로 운전하고 가되 정비가 가능한 곳까지 가기 전에는 절대로 시동을 끄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말은 안통해도 무슨 이야긴지 너무 잘 알것 같았다. 2시간 이상을 무시무시한 험로를 견인해주신 밴기사님을 탄이는 꼭 안아드리고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국 과자등 선물과 사례로 100달러를 드렸다. 더 달라면 더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탄이는 왜 자기가 했을때는 안됐을까 매우 의아해했지만 어쨌든 시동이 걸린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6시간만에 시동이 걸려 까브리가 다시 스스로 움직여서 다니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울 뿐이었다. 식당에서 약 30분정도 더 가니 국경사무소가 나왔다. 우즈벡에서는 여행자가 어디에 묵었는지 거주지 증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는 곳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서류를 준비해왔는데 국경에서는 아무도 보자고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좀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준비해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국경에 서있는 차들 맨 뒤에 줄을 서니 앞에 낯익은 밴이 보인다. 먼저와서 줄서고 계시는 우리 은인. 카자흐스탄 국경수비대 분들이 웃으며 반겨주셨다. 국경에서 나 혼자 또 내려서 걸어가야 할 것을 각오하고 핫팩과 옷등 추위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는데 차에 그냥 타고 있으라며 친절히 배려해주셨다. 국경에서 이런 환대는 처음이다. 탄이 차에서 내려 서류작업을 하고 돌아와서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며 보여준다. 와, 꽤 멋진 남자향수다. 수비대의 젊은 친구 한사람이 계속 정말 잘 도와주었고 마지막엔 이 것까지 선물해줬다고 한다. 그 친구 말고도 한국 자동차 등록증이 생소하다보니까 하나 둘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어 차근차근 물어보고 굉장히 호의적으로 수속 밟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무사히 기분좋게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경통과는 항상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이었는데 오늘은 여러모로 감동이었다. '일희일비'라고 나쁜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것 같다. 어제부터의 고생을 조금 위로받는 듯 했다.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오니 길이 갑자기 너무 좋아졌다. 어제 종일, 그리고 아침에도 그 악몽같은 험한 길을 비틀대며 지나와야했는데 비단결같은 아스팔트가 진심 감동스럽다. 다음 목적지인 베뉴에 가서 차도 고치고 숙소도 잡아야겠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QMehVDxsPGQ?si=zf30tAbmRBYQu1wt>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8-14 10:51:49<24> 우즈벡-부하라(Bukhara) 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사마르칸트를 떠나 부하라(Bukhara)로 간다. 날씨가 흐리다. 5시간 넘는 장거리를 가야하니 주유하는 것이 신경 쓰이는데 주유소 서너곳을 번번히 허탕치고 나왔다. 경유값이 비싼것도 힘든데 우즈벡에서는 경유 있는 곳 찾기까지 쉽지않다. 녹색 표지판에 DIZEL이라는 글을 보고 기대반 걱정반 들어가본 곳에서 드디어 경유가 있다고 한다. 신난 탄이 "우와!"하며 지갑을 찾는다. "40리터 주세요." 기름통을 가득 채우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웃으며 농담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오늘 갈 부하라는 고대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도시이며 사마르칸트, 히바와 함께 우즈벡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도시라고 한다. 사마르칸트 못지않게 볼것이 많다고 하니 관광도 해야겠다 싶다. 부하라에서 우리는 카우치 호스트인 오토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은 부하라에서 약간 외곽의 카간(kagan)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오후 늦게 도착하니 그는 집에 없고 그의 동생이 나와서 우리를 집까지 안내해주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아파트의 꼭대기층. 소련시절에 지은 듯한 모습이었다. 곧 오토가 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저녁으로 우리가 라볶이를 만들어 함께 먹기로 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무지무지 귀한 오뎅은 구할 수 없어 못 넣었지만 대신 양배추를 잔뜩 넣어 맛있는 라볶이를 만들었다. 완성된 음식을 보자 오토는 "이거 라면같이 생겼는데?"라고 한다. 라면을 아는게 신기하다. "어 맞아 라면이야 라면이랑 비슷한데 맵고 달아" 매운것을 먹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한입 먹어보더니 다행히도 좋다고 한다. 오토도 여행을 좋아해서 5달간 아제르바이잔-조지아-이란-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을 여행했다고 한다. 탄이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자 오토는 이란이라고 했다. 그가 사는 부하라와 종교, 언어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좋았다고 한다. 나는 우즈벡도 주로 러시아어를 쓰는 줄 알았는데 지역마다 다르고 특히 부하라나 사마르칸트에서는 타직어와 페르시아어를 같이 쓴다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왔다. 한가지의 언어와 글자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란 한국인으로서는 한 나라, 한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글이 다양하다는 것이 너무 힘들것 같고 상상이 안되었다. 오토에 의하면 부하라가 아주 옛날에는 이란제국에 속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내에 구도시에는 페르시아풍의 건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7km정도 떨어진 지라보드라는 마을에는 페르시아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오토나 사마르칸트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약간 아랍계 느낌이 나는 것 같다. 그 외에도 오토는 우리에게 부하라의 유명한 의학자인 아비세나(Avicenna)와 부하라의 역사, 문화, 주요 관광지등을 열심히 알려주었다. 자신이 사는 도시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사랑하는 청년이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타슈켄트에 있다는 여동생 마블루다와 영상통화를 하게되었다. 마블루다는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데 가벼운 대화가 가능할 정도여서 무척 반가웠다. 한국에 가고싶다는 마블루다에게 한국에 오게되면 우리집에 초대할테니 꼭 연락하라고 하니 매우 좋아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바다 아랄해가 말라버렸다 오토는 부하라 북쪽, 누쿠스 근처의 아랄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학교다닐때 들어본 적 있는 지명이어서 아는척 했더니 바다가 현재 사막이 되었다고 한다. 잘못들었나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아랄해는 중앙아시아에서 두번째로 큰 바다였는데 구소련이 면화사업에 아랄해의 물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말라버렸다고 했다. 인간의 욕심이 바다를 사막으로 만들다니. 그곳에 가면 모래위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배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은 꼭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떠나기전 오토에게 우리 까브리를 소개시켜주었다. 오토는 캠핑카를 구경한 후 우리가 하루만에 떠나는 것이 많이 아쉬웠는지 계속해서 더 있다가라고 권해주었다. 바쁜일이 지나면 부하라 안내도 해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편하게 머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터라 계획대로 부하라에는 하루만 머물고 지나가기로 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운은 길다. 언젠가 오토와 마블루다를 또 만날 날이 왔으면 좋겠다. 오토가 알려준 카간의 대표명소 에미르(Emir)궁전에 왔다. 카간 기차역이 바로 근처에 있어 주차도 편하고 찾기 쉬웠다. 이른 아침인데도 페르시아풍 정문이 활짝 열려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단단히 무장하고 들어갔다. 공원 한켠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기구들도 좀 보이고 정원 조성을 잘해놓았다. 가족나들이 하기 좋을 것 같다. 길 끝에 인터넷에서 봤던 에미르 궁전이 나타났다. 입장료같은 것이 없어 출근하는 사람들이 공원을 통과해서 다니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색 건물이었는데 페르시아풍 아름다운 기하학적조각으로 장식되있었다. 인터넷에서 무척 화려한 내부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시간이 일러서인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도시 곳곳이 관광지라고 하니 궁전내부에 꼭 안들어가도 뭐 별 상관 없겠지. 밖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이동했다. 이동 중 메탄 주유소에 끝없이 줄선 차들이 보인다. 오토도 매일아침 가스를 넣기위해 출근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와야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200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긴 줄 끝의 차는 대체 얼마나 걸려야 충전을 할 수 있을까? 부하라의 '방주요새'에 왔다. 광장에 세워진 초대형 트리를 보니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이슬람 국가에 '성탄절 트리'라니 왠지 좀 어색하다. 거대한 성벽이 솟아있는데 감탄이 절로 나온다.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구워 쌓은 성이다. 외관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 보통 성벽이라고 하면 수직으로 올리기 마련인데 어떻게 저렇게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좁아지는 부드러운 곡선형태의 성벽을 만들었을까? 지진에도 끄떡없게 생겼다. 아침 햇살과 그림자가 곡면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약 4500원정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매표소에 계신분이 유쾌하게 맞아주신다.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보니 화려하게 조각된 나무기둥으로 받쳐진 건물이 나타난다. 이런 기둥은 보통 대리석같은 석조로 만들기 마련인데 나무로 된 조각기둥이 희안하다. 노점에서 기념품 파는 아저씨에 이끌려 물건들을 구경했는데 러시아루블을 세트로 모아놓은 것도 있고 도장같은 것도 있었는데 꼭 사고싶은 것은 없어서 패스. 안쪽에 왕좌 같은 것이 있는 공간에 오자 기념품상 아저씨가 따라오셔서 5만숨에 전통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사진찍게 해준다며 흥정을 하신다. 다른 손님이 없으니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 같다. 페르시아풍 카펫으로 벽장식을 한 멋진 의자였지만 우린 그냥 그대로 사진찍기를 더 원해서 사양하고 슬금슬금 아저씨를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곳 건물의 기둥들은 다 주춧돌 위에 밑동이 둥근 나무기둥을 세워놓은 형태로 매우 특이해 보였는데 300년 이상 된 것이라고 한다. 여러 옛 물건들이 전시되어있는 박물관같은 곳도 있었는데 입구 앞 광장에 사람들이 열심히 청소 중이다. 우즈벡에서는 사람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매우 부지런하고 깨끗한 사람들인 것 같다. 박물관에는 옛날사람들이 입던 쇠사슬 갑옷을 비롯해 페르시아풍 쟁반과 주전자, 옛날 복식 등 매우 이국적인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좀 걷다보니 작은 광장이 나왔다. 설명을 읽어보니 성에서 말을 키우는 장소였나보다. 광장에서 성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도 멋있었다. 추운 날씨와 조금 지친 마음에 관광에 더 흥미가 생기지를 않아 우리는 정오쯤 누쿠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먼길 떠나기 전 도시에서 점심거리를 사려던 중 길가에 "베스트 버거" 라는 노점이 눈에 띄어 차를 세웠다. 가게 이름은 "베스트 버거"인데 햄버거가 없단다. 뭐가 있냐고 물어보고 되는 것 중 후라이드치킨을 주문했다. 주문 후 튀겨주는 시스템. 한참을 기다려 치킨이 나왔다. 사실 별기대 없이 주문했는데 막 튀겨나온 치킨이 너무너무 맛있다. 따끈하고 바삭하고 육즙도 흐르고 간도 딱 맞는다. 8천원 정도를 냈는데 둘이 배터지게 먹고도 남을 정도로 양도 많다. 부하라에서 인생치킨집을 만났다. 부하라에서 누쿠스까지는 8시간거리, 히바까지는 6시간이라고 한다.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자 하고 길을 떠났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oK6mljO3zuU?si=1619a4maR7clZH8d>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8-01 15:27:55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사마르칸트는 타슈켄트에서 남서쪽으로 5시간가량을 가야한다. 우즈벡에 목화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가는 길 양옆에 끝도 없이 펼쳐진 목화밭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창 목화가 피어있으면 장관이었을텐데 철이 지나서 갈색 줄기들만 있는 것이 좀 아쉽다. 우즈벡 길가의 가로수 중에는 처음 보는 나무들이 있다. 밑둥은 굵고 짧은데 잔가지들이 공작새 깃털처럼 사방으로 뻗어있는 모양이 특이하다. 넓은 강과 마을도 자주 보이고 확실히 카자흐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보다 땅이 비옥하고 살기 좋아보인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데 길가 과일가판대에는 수박같은 것을 잔뜩 쌓아놓고 팔고 있다. 설마 수박일까 궁금해서 사먹어보고도 싶었는데 괜히 돈만 버리는거 아닌가싶어 호박일꺼야 하며 그냥 지나갔다. 안개가 뿌옇게 내려 시야가 안좋은 구간도 지나고 안개가 서리가 되어 길가 식물들에 앉았는지 눈꽃이 핀 풍경도 지나간다. 사마르칸트에 가까워 오자 여러가지 색색의 깃발들이 우릴 반겨준다. 도시 곳곳에 빨강, 초록, 파랑, 노랑 등 원색 깃발들이 계속 눈에 띄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환영받는 느낌이라 좋다. 도시 외곽에 낮은 토담같은 것이 이어져있다. 군데군데 동굴처럼 판 곳도 있다. 서울의 몽촌토성 같다고 하자 탄이가 "몽쉘통통이라고?"하며 익살을 떤다. 아.. 먹고싶어졌다. 사마르칸트는 사막의 모래색이 온통 도시를 덮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이곳에 사는 몰리라는 20대 청년에게 카우치 요청을 보냈었다. 우리는 시내의 한 커다란 카페에서 만났는데 몰리 덕분에 예상 못한 다른 서퍼들을 한가득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온 마리나, 이란에서 사업차 온 메디, 자전거로 여행중인 중국의 이치까지 완전히 다국적인 모임이다. 국적과 나이와 모든 것이 다르고 처음 만난 사이지만 여행자라는 공통점이 만난지 몇분만에 즐겁게 이야기 나누게 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의기투합한 모두 다 함께 몰리네 집에 갔다. 계획에도 없었을텐데 이렇게 갑자기 다 같이 가도 되나 싶었는데 몰리는 방도 많고 음식도 많아 괜찮단다. 몰리는 부모님과 두 동생과 함께 시 외곽의 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여럿이 우르르 몰려왔는데도 부모님은 함박웃음으로 반갑게 환영해주셨다. 손님 접대에 열심인 이슬람가정답게 여러가지 음식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고 산더미같은 플롭(볶음밥)이 나오는데 고기와 레몬과 메추리알로 장식된 것이 무지무지 먹음직스럽다. 플롭은 손님 환대에 가장 중요한 음식이라고 한다. 기름진 볶음밥을 별로 안좋아하던 우리도 이곳에서는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식사 중 갑자기 정전이 되었지만 흔히 있는 일인 듯 당황하지 않고 양초를 켜고 계속해서 먹는다. 다행히 곧 불이 다시 들어왔다. 몰리가 우리들을 아버지께 소개하는데 아버님이 러시아어를 하신다고 해서 마리나가 신이났다. 영어, 우즈벡어, 러시아어 등등 여러나라 말이 마구 섞여서 헷갈리고 난리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가 없어 통역에 난항이 있었지만 다들 유쾌하게 웃으며 어찌어찌 서로를 소개했다. 메디가 "이치는 made in China(중국산)"이라고 소개하자 다들 웃음이 터진다. 몰리의 남동생의 이름을 차홍길이라고 들어서 "어? 한국사람같은 이름이네?"했더니 다시 잘 들어보자 "차흐니르"와 비슷한 발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차홍길이라고 불렀고 그 친구도 좋아했다. 한국말을 배우고 있으며 한국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우즈벡에서는 한국말을 꽤 잘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남자, 여자 나뉘어 큰 방에 자리를 잡고 부모님이 제공해주신 이부자리를 덮고 푹 잘 잤다. 다음날 몰리네 가족앨범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외국사람의 옛날 앨범을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흥미진진했다. 사진 한장한장이 역사의 증거이며 가족이야기가 들어있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정성스레 주시고 편히 묵게 해주신 가족분들께 몇가지 선물을 했다. 아버님은 특히 핫팩을 신기해 했는데 사용법을 알려드리자 일할 때 사용하면 좋겠다고 마음에 들어하셨다. 약과와 마스크팩 등 별거는 아니지만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정성으로 드렸다. 몰리네 집 마당은 매우 넓은데 한쪽에는 새로 짓고 있는 2층 건물도 있다. 지금 있는 집도 방도 많고 꽤 큰데 취미삼아 천천히 돈생기고 시간날 때마다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층고도 높고 만듦새가 매우 좋다. 혹 다음에 오게되면 이 곳에서 머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몰리네 가족이 모였을때 가족사진을 몇장 찍어드렸다. 산에 가보고 싶다는 마리나의 이야기에 다들 동조하며 갑자기 여행계획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까브리에 탄이, 시로, 마리나, 몰리, 몰리 남동생, 메디, 이치까지 총 7명이 타고 30분거리의 산으로 향했다. 나도 타봐서 아는데 주행중 캐빈에 있는 것이 승차감도 안좋고 이리저리 흔들려 결코 편하지 않을텐데 다들 젊어서 그런지 다행히 끄떡 없다. 장거리가 아니니 괜찮겠지 싶었다. 매일 둘만 타던 차가 바글바글 시끌벅적 완전 새롭다. 산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등산로를 따라 가볍게 산행을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산을 별로 안좋아한다. 그저 이 친구들과 함께 하고싶은 마음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걷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걸으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얼마 안가 20대들의 체력을 못따라가고 기온이 뚝뚝 떨어져 너무 추워서 잘 다녀오라고 하고 차로 돌아가서 기다렸다. 이치와 차홍길은 정상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산에 다녀와서 우리는 메디가 살고있는 집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는데 다들 머리도 헝클어지고 몰골이 초췌해 보여 걱정이되어 괜찮냐고 물어보니 좋은 경험이었다고 웃는다. 메디는 사업차 사마르칸트에 와있다고 하는데 경제적 여유가 있는지 집하나를 통채로 렌트해서 살고있었다. 중정 마당이 있고 방이 여러개 있는 좋은 집이었는데 이미 이치는 방하나를 차지해 손님으로 있었다. 첫날 만났을 때부터 메디는 자기 집으로 오라고 계속해서 졸라댔다. 원하는 만큼 있으라고 인심이 좋다. 메디의 집에 묵은 첫날 마당에 소복이 눈이 쌓였다. 까브리를 안에 주차할 수 있을만큼 마당이 넓다. 그런데 메디의 손님 유치 욕구에 비해 방이며 시설이 따라주질 않았다. 방문의 유리창은 유리 없이 뚫려있고 라디에어터가 고장나 물이 샌 것 같았는데 돈이 있어도 사람이 부족한지 고치는데 여러날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추울까봐 메디는 새 전기히터를 사서 방에 넣어주었는데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며 손님을 데리고 있고싶나 의아했지만 그의 친절을 감사히 받았다. 또 길쪽으로 난 창문은 커튼이 없어 사생활보호가 전혀 안되어 우리차에 있던 흰 천을 가져와 가려야했다. 세탁기는 고장나 있어 쓸 수가 없었고 그래도 부엌에서 가스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것은 좋았다. 접이식 작은 자전거 하나로 세계여행한다니.. 존중감이 절로 생겼다 접이식 작은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하다니 게으른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평소 중국사람에 대해 썩 좋은 인상이 없었지만 이치와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에 대해 깊은 존중감이 생겼다. 10여년간 호주에서 일을 해서 영어도 꽤 잘하고 자기 삶에 분명한 방향을 갖고 있는듯 했다. 이치는 우리에게 중국식 토마토계란볶음과 가지요리를 해주었는데 매우 맛있었다. 우리도 소고기뭇국과 밥을 해서 함께 즐거운 식사를 했다. 정전이 되어 차에서 전기를 끌어다 조명을 켰다. 아랍풍의 노래를 틀어놓고 탄이와 메디가 이상한 춤을 춘다. 술을 잘 못마시는 탄과 종교때문에 안마시는 메디. 술도 안 마시고 저러고 노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히터를 사온 날 전기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였을까 정전이 되었고 밤늦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추위에 떨 것을 각오하고 둘이 꼭 안고 자면 죽지는 않을거야 라며 잘 준비를 하고있을때 메디가 간단히 짐을 싸서 나오라고 한다. 전기가 들어오는 호텔을 찾아 우리를 재워주는 것이었다. 이치도 다른 호텔을 잡아주었다고 한다. 아니 돈내고 묵는 손님도 아닌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하다니. 참 이슬람의 손님접대는 대단한 것 같다. 아니 메디만 대단한 것일까. 메디와 꽤 친해진 것 같아 평소 이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너희는 아내를 여러명 가질 수 있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봤는데 메디의 대답은 의외로 심각하고 진지했다. 그는 코란을 여러번 읽고 많은 고민과 깊은 생각을 해왔다고 한다. 코란에 의하면 오직 두가지 이유만으로 아내를 두명 이상 둘 수 있는데 하나는 과부가 생존을 위해 재혼하는 경우, 또 하나는 두명 이상의 여자에게 완전히 똑같이 대할 때라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두번째 조항은 하지말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대답이 의외였고 참 놀라웠다. 메디는 우리가 만난 첫 이란친구인데 앞으로 다른 이란인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와 같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호텔에서 자고 온 다음날도 계속해서 정전과 누수가 발생하자 우리는 미안해하는 메디의 집을 떠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우리때문에 괜한 돈을 자꾸 쓰는 것이 부담되었다. 메디는 집이 부실한 것을 속상해하며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떠나보내주었다. 메디네 집에서 나와 우리는 시내의 Aishia라는 작은 호텔에서 몇일 더 묵었는데 폭설에 강추위가 와서 실내기온이 16도도 안되었고 이곳도 정전이 되기 일수였지만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맘편히 있을 수 있었다. 한국말을 조금 하시는 친절한 사장님이 계시고 맛있는 조식도 포함되어 있어서 꽤 만족하며 머물 수 있었다. 하루는 관광가이드를 꿈꾸는 몰리의 안내로 유명한 "레기스탄"에 갔다. 레기는 모래, 스탄은 장소라고 한다. 즉 모래땅이라는 의미이다. 이슬람 특유의 정교한 타일로 장식된 탑과 건물들이 무척 이국적이고 멋있었다. 광장 한구석에 무덤이 있는데 이곳을 지을때 큰 역할을 한 일꾼의 무덤이라고 한다. 왕이 그의 공로를 치하해 소원을 묻자 여기 묻어달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는데 살아서 부와 명예를 마다하고 광장에 묻히기를 선택한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생각이 많아졌다. 몰리는 좌우의 비슷하게 생긴 건물중 어느쪽이 더 오래되었을까 퀴즈를 냈다. 열심히 관찰하고는 찍었는데 틀렸다. 잘 보면 양식이 다르다고 한다. 몰리 덕분에 좋은 관광을 할 수 있어 감사했다. 아침에 차를 몰고 나와보니 이럴수가! 앞유리에 금이 가있다. 최근 큰 충격을 받거나 위험한 곳에 둔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일까. 전에 키르기스에서 하도 금간유리로 다니는 차가 많아 유리를 갈지 않고 때우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어서 분명 이곳에서도 해주는 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기로 했다. 사마르칸트의 현대자동차매장을 우선 찾아갔다. 영업소 대표님이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시더니 이곳저곳에 전화하며 알아봐주셨다. 돈내는 손님도 아닌데 이렇게 친절하시다니 참 감사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동안 밥먹으러 오라고도 하셨다. 소개받은 곳을 찾아가니 말은 안통해도 손짓과 깨진 유리창을 보고 의사소통이 된다. 젊은 청년이 유리창 크랙 진행방향 앞쪽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고 주사기로 무언가를 넣어 메우는 것 같다. 완전히 굳을때까지 한동안 히터를 쓰지 말것을 당부했다. 앞유리 금이 점점 커지는 것이 불안했는데 이제 안심이다. 사마르칸트에서 만난 여러나라의 친구들과의 좋은 기억을 뒤로하고 부하라로 출발했다.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 https://youtu.be/G85qdMHDuHM?si=iKCbW47_29vK5aVG>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7-25 13:04:10"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이다. 고등학교 시절 그냥 외우기만 했던 것인데, 그것도 잘못된 구석이 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밥이 나오나. 친구가 오나. 일자리가 생기나. 그래서 "나는 교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Muto, ergo sum)"라는 말을 만들었다. 저 라틴어도 내가 만든 것이다. 친구의 딸이 혼인을 하니 부조금을 보내고, 우리집에 초상이 났으니 그 친구가 조의금을 들고 온다. 조상과 자손 간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고, 부모 자식 간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으며, 남녀 간에도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아이도 생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는 마음이라도 주고받는다.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주고-받고-되갚는 사이클이 지속되면서 인간관계가 지속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도 만들어진다. 북조선의 장마당 소식이 그곳의 사람 사는 질서를 말해주는 기준이 된다. 베트남의 '도이머이(개혁개방)'도 장마당으로부터 시작했다. 민중으로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을 정권이 막을 수 없었다. 장마당이 탄압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교환을 막는 것은 존재부정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래서 '원수에게는 오물을' 보내는 모양이다. 불평등 관계 속에서는 선물이 비틀려서 뇌물로 변질된다. 사람은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교환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교환을 위한 평화적 단골관계가 생기게 마련이다. 서태평양 뉴기니 남쪽의 트로브리안드에서 장기거주했던 브로니슬라브 말리노브스키가 발견한 '쿨라(kula)'가 불후의 사례다. 규모가 적은 섬들은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없다. 개별적인 섬들은 각자 전문으로 제작하는 물품이 있고, 그것들을 교환하기 위하여 작심하고 원양 항해를 하였다. 규모가 있고 폼 나는 배의 제작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 개입하는 사회조직이 있게 마련이었다. 물물교환을 위한 항해 과정에 수반되어 혼인도 성사되었다. 단골들 사이에는 대를 물려서 교환하는 물건들이 있었고, 특별한 조개들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팔찌들이 해당되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회적 교환이 있었다. '쿨라'에 북서태평양의 '포틀래취(potlach)'를 더해서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이란 책을 만들었다. 이론가인 모스는 실천가인 말리노브스키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차대전 도중 포로 신분으로 영국군의 거주제한 속에서 만들었던 말리노브스키의 민속지(ethnography)는 인류학이란 학문의 표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전쟁 중에 발견한 쿨라의 상징은 평화 만들기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교환이 전쟁 차단의 수단으로 작동하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무토 에르고 숨"을 제창한다. 1990년 여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갔다. 소련의 붕괴 직전이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걱정되어서 '김병화 꼴호즈'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일행은 우즈벡 가정에 초대되었고, 마당에 마련된 가마솥에서 양 한 마리가 삶아지고 있었다. 거창한 밥상이 차려졌고, 주인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는 커다란 접시에 '오쉬(osh)'라는 밥이 담겼다. 러시아말로는 '쁠로브'이고, 고려인들은 그것을 '기름밥'이라고 이름하였다. 일단 쌀(인디카종)을 물에 삶았다가 건져낸 다음에 다시 양기름을 넣어서 본격적으로 밥을 하였다. 이 양기름은 특별한 부위다. 엉덩이에 약간 덜렁거리는 기름 주머니가 있다. 그것을 우즈벡 말로 '둠바'라고 한다. 쌀밥은 색깔이 노랗고 기름에 담갔다가 건진 것 같았다. 채로 썰어진 당근이 눈에 뜨이고, 군데군데 양고기 덩어리가 놓였다. 숟가락이 없으니 손으로 먹는 것임을 알았다. 주인이 솔선수범으로 먹는 준비를 하는데, 손바닥에 가득하게 밥을 올린다. 공기밥 하나 정도의 양은 넘는다. 나에게 입을 벌리라는 시늉을 한다. 다 받아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주인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손에 붙은 밥알과 기름을 모조리 깨끗하게 먹어 주어야 한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핥고 빨아야 하는 과정이었다. 순서를 바꾸어서 다음은 내 차례였다. 손바닥에 고봉으로 쌓아 올려서 주인의 입으로 가져갔다. 주인은 내 손바닥을 그야말로 깨끗하게 처리하였다. 이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에 좌석의 일동들은 응원을 하며 깔깔거린다. 돌아가면서 파트너를 지목하여 반복되는 행위였다.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이라는 선물을 '주고-받고-되갚는' 행위의 반복이었다. 친밀감을 넘어선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우즈벡 사람들과 이렇게 기름밥을 주고받았고, 지금도 그 감촉이 남아서, 때때로 그 사람들 생각이 진하게 난다. 이 행위를 우즈벡 말로 '오쉬티쉬'라고 했다. 물론 이 자리에는 남자들만 모였고,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따로 오쉬티쉬를 한다. 무슬림 사회에서 결코 남녀가 섞일 수 없는 행위다. 찾아온 손님에 대한 우즈벡 사람들의 접대방식이다. 과거 오스만터키 제국의 강역에서 전해지는 풍습이라고 하였다. 자리가 파하고 돌아오는데, '구르트'를 한 보따리 준다. 소금을 많이 가미한 건조된 하얀색의 동그란 치즈다.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필수품으로 지참하는 것들 중 하나가 구르트라고 하였다. 우즈벡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네의 살림살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교환함으로써 존재가 확인된다. 교환은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다른 요소들과도 교환한다. 그것이 자연질서다. 먹이사슬을 피라미드 형태로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관점으로서, 제국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세계관의 표현이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 자리에 위치시켜 놓고, 자연을 지배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인식의 표현이다. 그것은 세상을 거꾸로 돌리는 세계관이다. 죽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서 동물과 곤충과 미생물의 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한 관계를 잘못 설정하게 되면,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간다. 자연에 대해서 해롭게 한 결과로 기후변화라는 된서리를 맞고 있다. 힘자랑을 하는 순간에 인간관계는 지리멸렬이 되고 만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평등하게 주고-받고-되갚는 교환관계가 순리다. 그래야 살림살이가 편하고, 살림살이가 편해야 아이들이 나온다. 잔머리만 굴리지 말고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교환해야 한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07-22 18:08:55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때는 가을이라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구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와셔액으로 에탄올 제품 대신 물을 넣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슈켄트 가는 길에 고산지역에서 퍼붓는 눈발을 만났다. 와이퍼로 닦아지지가 않아 와셔액이라도 뿌려야 하는데 얼어버렸는지 전혀 나오지 않아 낭패였다. 차를 멈추고 히터로 얼어버린 앞유리를 한참 녹인 후에야 겨우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휴우~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겠다. 우즈벡의 산지에서 또 터널을 만났다. 와 이번엔 조명도 밝고 편도2차로인 꽤 그럴듯한 터널이다. 서울에서 집인 춘천을 오갈 때 지나던 수많은 터널들이 생각났다. 우즈벡 도로를 달리다 보면 종종 톨게이트도 아니고 검문소도 아닌 길 위에 지붕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된다. 'stop' 사인이 있고 차들은 그 앞에서 속도를 줄이고 가다가 잠시 멈춘 후 통과한다. 처음 볼 때엔 전쟁 대비로 무너뜨려 길을 막는 시설인가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지역간 이동이 자유롭지 않을 때 만든 검문소라고 한다. 우즈벡이 나라 안에서도 왕래가 자유롭지 않은 공산국가였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세계를 마구 돌아다니는 우리로서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우즈벡에서는 디젤이 있는 주유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유소인가 싶어 반가워 가보면 커다랗게 METAN이라고 쓰여있기 일수였는데 아마도 가스를 넣는 차들을 충전하는 곳인 것 같았다. 우즈벡에는 가스차가 휘발유나 디젤차보다 많은 것 같다. 이 나라에 가스매장량이 많아 가스값이 싸서 그런가보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찾아 큰 어려움은 없이 디젤을 주유하고 다닐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길가에 과일 파는 가판상점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키르기스와는 달리 진열도 예쁘게 해놓고 크게 글도 써놓고 뭔가 열심히 팔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키르기스에서는 대충 쌓아놓은 느낌으로 '살려면 사던지'의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석류를 즉석에서 짜주는 쥬스 파는 곳도 많았는데 위생이 걱정되어 그냥 지나쳤다. 과일 말고도 이곳의 주식인 "난"이라는 둥근 빵을 파는 상점이 여럿 모여있는 곳도 있었고 길거리에 이것저것 파는 것이 많았다. 가는 길에 ATM을 찾아서 걱정반 기대반으로 출금을 시도했다. 촤라락 하고 돈 나오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작은 가게에 들러 식료품을 조금 샀다. 계란을 낱개로 사는게 어색했지만 조심조심 깨지지않게 비닐봉지에 담아 받아들고 돈을 냈더니 거스름돈과 작은 포장의 젤리를 한개 준다. 외국인에게 주는 뜻밖의 선물인가 기뻐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에서는 잔돈 대신 성냥이나 젤리를 준다고 한다. 괜히 좋아했다. 종일 운전해서 오후 7시가 다되어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왕복 8차로, 10차로의 넓은 길에 차와 사람도 많고 완전 큰 대도시이다. 타슈켄트에서 박사라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오는길에 유심을 살 수가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난감했다. 이럴 땐 도움을 구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차를 길에 세우고 지나가는 분중 친절해보이는 분을 찾아 일단 영어하냐고부터 물어보기 시작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가는 사람들 뒤에 한분이 유창하지는 않지만 영어로 겨우 소통을 하며 도와주신다. 사라선생님 전화번호를 보여주며 전화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연결이 되었다. 겨우 연락이 닿아 목소리를 듣자 너무 반갑고 기뻤다. 선생님과 한국음식점과 상점이 모여있는 가스삐딸리 시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할 수 있었다. 박사라 선생님은 키르기스에서 알게된 분의 소개로 찾아가게 되었는데 타슈켄트에서 1시간반정도 떨어진 스르다리오라는 작은 마을에서 한국어학원을 운영하신다. 첫만남이지만 전혀 어렵지 않았고 만나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이야기도 잘 통했다. 앞으로 몇주정도 선생님댁에 머물면서 함께 지내기로 하였다. 몇일 후 박선생님과 함께 타슈켄트의 명물 철수시장에 왔다. 실제 이름은 Chorsu 초르수라고 하는데 페르시아어로 "교차로"라는 의미라고 한다.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푸른 돔이 매우 인상적이다. 시장주변은 차가 매우 많아서 주차할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조금 걸어야하는 곳이지만 꽤 좋은 장소를 발견하고 잘 주차할 수 있었다. 돔 밖에도 넓게 시장이 형성되어 식료품, 의류, 신발, 잡화 등 여러가지를 팔고 있었다. 시장구경은 언제나 즐겁다. 다니다가 편해보이는 도톰한 추리닝바지가 눈에띄여 가격을 물어보니 6000원 정도해서 얼른 구입했다. 재봉질이 군데군데 어설퍼보였지만 편하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싸니까 용서가 된다. 꽤 넓은 곳에서 화덕에서 직접 구운 난을 판다. 여러개의 화덕에 계속해서 난을 넣고 빼는 모습이 신기하다. 화덕의 열기로 안이 매우 따뜻하고 빵냄새도 무척 좋아서 그곳을 떠나기 싫었다. 얼굴보다도 훨씬 큰 빵이 몇백원 밖에 안한다 이곳의 전통음식들과 먹음직스런 과일들을 파는 곳에서 과일과 호두 등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좀 더 걸어가자 푸른 돔이 아름다운 철수시장이 나타났다. 1층에는 치즈나 육류등이 많이 보였고 2층에는 견과류나 말린과일등을 팔고 있었다. 2층에서 보니 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딱히 사고싶은 것을 발견하지 못해 그냥 구경으로 만족했다. 무지 크고 넓고 곳곳에 볼거리, 먹거리가 많은 재미난 곳이었다. 타슈켄트에서 가장 맛있었던 식당은 조지아 레스토랑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먹었던 그 하차푸리와 닭요리 등을 시켰는데 정말 너무너무 맛있어서 조지아는 반드시 가서 오리지날을 먹어보리라 다짐했다. 이케아같은 커다란 쇼핑몰도 구경했는데 확실히 키르기스보다 물건도 많고 훨씬 잘산다는 느낌이 든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와서 그런지 트리와 장식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금 이상해서 물어보니 타슈켄트에는 외국인도 많고 이슬람이라도 아주 종교적인 사람들 외에는 홀리데이를 즐긴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저렴한 냄비를 발견하고 매우 만족스럽게 구입했다. 다음날 박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스르다리오의 어학센터를 방문했다. 스르다리오에는 마을을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있는데 차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건널목도 육교도 없어 사람들이 길을 건너야 할때는 정말 목숨을 걸고 건너는 듯 아슬아슬하다. 차로 가더라도 유턴해서 들어오는 곳이 무척 멀어서 집에서 학원을 오갈 때마다 한참 먼 유턴지점까지 항상 빙 돌아오곤 해서 안타까다. 학원은 하얀 건물에 파란 간판이 예쁘게 달려있다. 입구가 한국의 보통 상가처럼 유리문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치안이 괜찮냐고 물어보았더니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한다. 안에 좋은 책상과 의자, 빔프로젝터와 책 등 물건도 꽤 있는데 손을 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정작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셨다. 학생들과 함께 한국어 선생님을 모시는 모집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이 하키켓 어학센터는 현재는 청소년을 대상으로하는 한국어교실만 운영중인데 곧 음악교실, 러시아어교실도 오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인 타슈켄트와 달리 지방은 교육기회가 현저히 적다고 한다. 수도에 사는 한국사람은 많아도 지방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여러 편의시설이며 음식점 등도 없고 해서 지방에 내려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교실이며 다른 교육프로그램을 더 확장하고 싶어도 선생님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한다. NGO운영으로 돈이 매우 부족해서 더욱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센터를 위해서 학생들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는 모집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학생들이 진심을 다해 "선생님, 공부하고 싶어요! 빨리 와주세요!"를 외치는 영상을 만들었다. 다들 흔쾌히 즐겁게 참여해주었다. 또 수업시간에 동의를 구하고 방해안되게 주의하면서 수업장면을 촬영하였는데 학생들의 대단한 열의가 느껴졌다. 학생모집을 위한 포스터도 다니는 실제 학생들의 얼굴을 넣어 몇가지를 만들어 드렸다. 일요일에는 박선생님과 함께 고려인들이 모이는 현지교회에 갔다. 가보니 실내가 어두운 곳인데 하필 정전이 되어 다들 난감해하고 있던 상황. 탄이 까브리에 전기를 연결해서 실내를 밝혀드렸더니 모인분들이 무척 신기해하고 고마와하셨다. 무사히 예배를 잘 드릴 수 있게 되어 우리도 매우 흐뭇했다. 예배후에는 아이들이 우리 까브리를 궁금해하길래 차를 오픈했더니 우르르 올라가 이것저것 만져보며 너무너무 즐거워했다. 어디건 아이들은 캠핑카를 참 좋아한다. 내려올 생각을 안한다. 스르다리오에 머무는 동안 선생님댁 옆의 공간에서 밥도 해먹고 잘 지냈는데 식사를 위해 근처 코르진카라는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구입하곤 했다. 식품 물가가 놀랄만큼 저렴해서 고기며 쥬스며 야채, 과일등등 먹고싶은것을 마음껏 먹었다. "식품 물가가 놀랄만큼 저렴하다" 혼자 먼 타국에서 이곳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시는 박선생님께 위로와 격려의 마음으로 한국음식을 종종 해드렸다.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등의 재료로 닭볶음탕도 만들고 비빔국수도 같이 해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즈벡에서 외국인이 머물려면 돈을 내고 무슨 등록증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일주일 단위로 돈을 받는 듯하다. 이것도 무슨 공산주의 잔재로 통행의 자유를 통제하고자하는 그런 것의 일환이 아닐까 싶었다. 암튼 박선생님의 도움으로 잘 등록했고, 또 우즈벡에서 유심사기가 쉽지 않았는데 학원에서 일하는 현지 친구가 함께 가주어서 속지않고 적당한 것을 잘 구입해서 다닐 수 있어 좋은 도움을 받았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G85qdMHDuHM?si=iKCbW47_29vK5aVG>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7-11 14:59:22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비슈케크에서 계획한 일들이 거의 끝나가자 슬슬 이곳을 떠나 다음 나라로 갈 준비를 했다. 서너달가량 아무 문제없이 잘 달려준 까브리지만 한국분들이 많은 비슈케크에서 한번 체크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코리아모터스란 정비소를 소개받아 찾아갔다. 친절하신 사장님은 까브리 안쪽 타이어까지 꼼꼼하게 공기압체크를 해주시고 차를 잘 돌봐주셔서 매우 든든했다. 비슈케크를 떠나기 전 들린 곳은 '카페 비스킷'이다. 이곳에 도착한 첫주에 현지분들과 처음 만나 식사를 한 곳인데 정말 맛있고 저렴해서 앞으로 이런 식당을 또 만나랴 싶어 탄이와 둘이서 비슈케크 마지막 식사를 하러왔다. 작은 마시멜로가 듬뿍 올라간 코코아로 당을 채우고 행복해하는 탄이.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요리가 예쁘게 담겨 나왔다. 샐러드, 수란, 핫케잌, 베이컨 등등 맛있게 냠냠. 다음 목적지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이다. 목적지까지 3일이상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 될것이다. 카자흐스탄을 경유하는 코스도 있지만 국경을 2번이나 넘는 것이 부담이 돼서 키르기스스탄 남서쪽의 오시(Osh)를 통해 우즈벡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비슈케크를 출발하는 아침, 새벽에 눈이 떠졌다. 두달간 머무르며 좋은 분들과 의미있는 경험을 하는 시간도 좋았지만 다시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흥분과 설레임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여태껏 비슈케크에서 카라콜, 이식쿨호수, 나른 등등 주변을 다닐때는 항상 동쪽으로 갔었는데 처음으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떠난다. 가을이 된 비슈케크는 여름내 한방울도 안온 비가 많이도 내린다. 출발하는 날에는 약간 흐렸지만 비는 안와서 짐 싣기 좋았다. 비슈케크에서 왔다갔다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의 드라이브. 이제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실감이 몹시도 든다. 하늘에 아름다운 뭉게구름과 저멀리 병풍처럼 이어진 키르기스의 설산과 황금빛 들판이 엽서속 풍경인양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참을 달려 산 근처까지 다다르자 웬 화물차들이 끝이 없는 줄을 지으며 길 양옆에 서있다. 이 차들은 뭘까? 설마 우리도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가보자 황당하게도 톨게이트가 나왔다. 한국 떠난 후 처음 보는 톨게이트다. 827솜을 내고 QR코드가 있는 영수증같은 것을 받았는데 징수원이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표를 절대 버리면 안된다고 하는 듯 하다. 나중에 확인하는 곳이 있으니 잘 간수해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보자고 한 사람은 없었다. 해발 3000m를 향한 본격적인 자동차 산행이 시작 되었다. 구불구불 오르막 산길을 계속 가다보니 눈이 쌓인 산들이 옆으로 지나간다.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온다. 스마트폰의 고도계 앱으로 계속 현재 고도를 확인했는데 2000, 2500, 드디어 3000m가 넘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고 눈보라가 겨울왕국인듯 신비한 장면을 만들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눈알갱이인지 연기같은 하얀 가루들이 바람에 물결무늬를 만드는 모습이 신기하다. 하지만 내리는 눈과 안개에 시야가 점점 안좋아져서 도로의 상태가 걱정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다행히도 탄의 레이더에 들어온 노련한 운전자의 차 한대. 든든한 선행차 친구가 있으니 초행길도 문제 없다. 룰루랄라 따라가다보니 터널이 나왔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 처음 보는것이 톨게이트뿐이 아니었다. 그 넓은 시베리아와 세나라를 다니는 동안 단 한개의 터널도 없었던거다. 큰 트럭들이 터널앞에 줄서있는데 우리 친구차는 옆을 지나쳐 들어가는 것이 대충 분위기가 터널이 좁아서 큰 트럭은 신호등의 신호를 받고 가야하고 작은 차들은 그냥 가도 되는 것 같았다. 터널앞 신호등은 빨간불이었지만 우리도 얼른 친구차를 따라 들어갔다. 터널 폭은 좁고 노면은 울퉁불퉁해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생각보다 꽤 긴 터널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이곳은 눈이 펑펑내리는 완전히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이다. 길가옆에 부랴부랴 스노우체인을 장착하는 승용차들이 여럿 보였다. 다행히 까브리는 겨울용 타이어가 장착되어 있다.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좀 위안이 된다. 앞차의 흔들림이 심상지 않은 것을 보니 바짝 긴장이 된다. 눈과 얼음으로 길에 심한 요철구간을 지난다. 쿵덕쿵덕 천장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흔들리며 우리도 조심조심 지나갔다. 도로의 난이도가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 같다. 그래도 노련한 선행차가 있어 다행이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 탄이는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경치 보랴 어려운 구간 운전하랴 바쁘다. 터널을 지나니 곧 내리막길이 되어 산을 어느정도 내려오자 도로상태가 매끈하니 좋아졌다. 산을 내려오자 좀전에 눈보라에 온세상이 하얗던 겨울왕국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봄이 찾아왔다. 계속 달려 한두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뙤약볕이 내리쬐고 민둥산에 갈색들판의 사막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대체 하루에 몇가지 계절을 보는건지 참 버라이어티하다. 점심 즈음에 커다란 호수를 만났다. 호수 가까이 차를 대고 잠시 쉬며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구름 사이로 햇빛 줄기가 퍼지고 영롱한 푸른빛의 호숫물이 반짝이고 주변의 높은 언덕은 맨 흙의 속살을 드러내며 태초에 지어진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호수를 두르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오늘 하루동안 정말 다양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열심히 일하며 보낸 두달을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달리고 달려 해가 지기 시작할때가 되어 차박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길에서 조금 들어간 평지에 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정박지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풍경이 예술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어떨까 기대된다. 그런데 우리가 차를 세운 언덕 바로 아래쪽에 살림집이 있어 탄이가 이곳에 차를 대고 자도 괜찮겠냐고 물어봐야겠다며 갔다. 처음엔 돈을 내라고 해서 그럼 그냥 가겠다고 하자 그냥 자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집 아이들과도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차를 잘 대고 잠을 청하는데 개짖는 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개떼가 차를 둘러싸고 짖는 듯이 위협적이고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개떼가 밤에 노는 곳을 우리가 뺏은건가 싶을 정도였다. 버티다버티다 안되겠어서 일어나 깜깜한 밤 조용히 다른 잘곳을 찾아 차를 몰았다. 길옆 작은 마을로 들어가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나머지 잠을 잤다. 오늘은 국경을 넘는 날이다. 지도를 보니 오시까지 안가더라도 근처 1시간거리에 국경이 있는 듯 했다. 꼭 오시에 갈일이 있는게 아니니 '더 빠른 국경이 있으면 좋지' 하며 찾아갔다. 마을에 도착하자 국경 근처부터 차와 사람들이 엄청 많다. 차는 많은데 길이 막혀있다. 내려서 물어보고 말이 안통해 고생하다 겨우 알아낸 것은 차량 통과는 안되고 사람만 왕래가 가능한 국경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괜히 오시 이야기를 한게 아니었다. 뭐 이것으로 사람만 통과 가능한 국경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치고 다시 오시로 향했다. 오시에 다다르자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다시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다. 러시아번호판을 단 차량이 종종 보인다. 징집을 피해 주변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런 사람들인가 싶었다. 키르기스스탄 제2도시 오시, 도시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드디어 국경검문소에 도착했다. 커다란 화물트럭들이 줄지어 서있다. 검문소 앞에 도착하니 바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알고보니 길 좌우에 세워진 승용차들이 다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차들이었다. 말도 안통하는데 삐끼인듯한 사람이 자꾸 와서 말을 건다. 대충 눈치가 돈을 내면 빨리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시간 정도 기다리자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기다림이 길어져서 삐끼도움이라도 받아야하나 좀 고민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다리니 순서대로 해준다. 다행이다. 군인의 지시대로 안쪽으로 들어왔다. 국경을 넘는 다른 차들은 대개 짐이 없다. 불필요한 의심을 안받고 검문과정을 쉽게 넘기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맥시멀리스트로 4계절 살림을 다 싣고 다니니 입국심사가 오래걸릴 수 밖에 없다. 키르기스출국심사를 통과하고 우즈벡 입국심사를 받을때엔 벌써 해가 졌다. 입국심사 때에는 동승자는 하차해서 도보로 통과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여권과 간단한 배낭 하나를 들고 내렸다.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걸어가다가 검문대 앞에 줄을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희잡 쓴 아주머니들이 농산물 등 짐을 잔뜩 들고 간다. 여기도 국경간 농산물 통과가 자유롭나보다. X레이 검사대 같은 것이 있긴했는데 그냥 옆으로 지나서 십여분 만에 국경을 통과했다. 키르기스 국경보다는 훨씬 큰 상점과 음식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탄이를 기다렸다. 낮엔 더웠는데 밤이 되자 기온이 점점 내려간다. 얇은 긴팔 하나만 입고 나왔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몸을 움직이면 좀 덜 추울까 하고 손으로 팔을 비비며 깡총깡총 뛰고 있는데 뒤쪽에서 누가 오더니 말을 건다. 음식점 주인이 나의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는 실내에서 기다리라며 고마운 제안을 해주셨다. 마침 손님이 하나 없어 편하게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가게에서도 내가 떨고 있는 걸 보더니 입고 있던 얇은 패딩 윗옷을 벗어 덮어주기까지 했다. 염치없었지만 너무 추워서 냉큼 받았다. 민망하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3시간정도 기다린 후에 드디어 탄이 까브리와 함께 나왔다. 나그네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고 온정을 베풀어주신 고마운 음식점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까브리에 탔다. 나는 도움 받은 일을 탄이에게 신나게 이야기하고 탄이는 국경 넘은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입국을 자축하며 잘 곳을 찾아 가까운 작은 도시에 들어갔다. 한적한 어떤 주차장에서 차박을 하기로 했다. 큰길에서 약간 들어간 곳이라 조용하고 한산했는데 자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 긴장하기도 했지만 별일 없이 잘 잤다. 무사히 하룻밤을 또 보내고 이제 드디어 타슈켄트에 도착하는 날이다. 새로운 나라에 왔으니 환전과 유심구입을 해야한다. 키르기스 돈은 솜인데 우즈벡 돈은 숨이다. 오 다르고 우 다르다. 안디잔과 나망간을 경유해서 400km 6시간 거리이니 오후에는 도착하겠다 싶었다. 우즈벡의 도로는 키르기스스탄보다 넓고 포장 상태도 좋다. 여정이 편안하다. 가는 길에 보이는 차들이 거의가 하얀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하얀색 다마스가 엄청 많이 눈에 띄어 한번에 5~6대의 하얀색 다마스를 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마치 하얀양떼가 우르르 함께 돌아다니는 것 같은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우에서 우즈벡에 공장을 세워 여기서 생산된 다마스가 매우 저렴하게 판매되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우즈벡의 도로는 정비 잘된 고속도로의 느낌이어서 어제 지나온 길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우리 마음속에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SKa6Pdx5afI?si=SOqgaoMsnZ3dwvzN>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7-11 14:58:04[파이낸셜뉴스] 한국서부발전이 우즈베키스탄의 온실가스 감축 사업에 참여한다. 서부발전은 지난 1일(현지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페르가나주(州) 정부, 푸르카트시(市)와 ‘우즈벡 농가 바이오 연료 전환 온실가스 감축 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2일 밝혔다. 우리나라와 우즈베키스탄은 파리기후협약에 따른 국제 감축 사업 협약국이다. 우리 기업이 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해 온실가스 감축 활동을 하면 감축 실적을 나눠 가질 수 있다. 한국 연합체는 바이오 연료 생산·공급과 온실가스 감축 이행을, 페르가나주 정부와 푸르카트시는 사업 부지 조성, 인허가를 맡는다. 해당 사업은 우리 환경부가 지원하는 국제온실가스 감축 사업이다. 현지 농가가 사용하는 난방용 석탄을 농산 폐기물인 면화대를 활용한 바이오 연료로 대체하는 내용이 골자다. 사업을 통해 앞으로 10년 동안 약 12만t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27억원가량의 바이오 연료 판매 수익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주마노프 자헝기르 소비탈리예비치 푸르카트 시장은 “버려지는 면화대를 바이오 연료로 전환해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것은 물론 온실가스 배출도 줄일 수 있다”며 “한국 연합체가 추진하는 이번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전했다. 서부발전 관계자는 “이번 사업은 우즈베키스탄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에 기여하고 서부발전의 탄소중립 경영을 실천하는 뜻깊은 시도”라며 “사업 성공을 위해 역량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2024-07-02 14:4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