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이집트 '룩소르' 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을 출발하여 한시간 거리의 룩소르에 도착했다. 룩소르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굉장한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도시이지만 길거리 풍경은 따스하고 정겹다. 우리는 카우치서핑을 통해 우릴 초대해준 무함맛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직장이라는 병원을 찾아갔다. 번화가에 있는 큰 종합병원인듯한 곳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큰 키의 무함맛이 손을 흔들며 나왔다. 서로 인사를 하고 그는 곧 다시 병원에 들어가봐야 한다며 우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당연히 그의 집에 묵으며 교제를 나눌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희안하게도 데려다준 곳은 그의 친구네 집이라고 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2층 주택이었는데 1층을 우리가 사용해도 좋다고 한다. 무척 이례적인 카우치 제공이었지만 자세한 것을 물어볼 새도 없이 우리만 남겨두고 가버렸다. 친구라고하는 사람도 첫날 잠깐 인사를 한 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넓은 거실에 부엌도 있고 침실도 잘만하고 씻을 수 있는 화장실도 있음에 감사히 머물렀다. 다음날 무함맛에게 우리는 이스트뱅크의 유적들에 갈 예정이라고 문자를 남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나일강을 기준으로 해가 뜨는 동쪽-이스트뱅크는 산자의 땅, 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서쪽은 웨스트뱅크라고 부르는데 해가 지는쪽이라해서 죽은 자의 땅이라 생각되며 무덤이나 신전들이 주로 위치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숙소를 출발해서 다리를 건너 서쪽 웨스트뱅크로 넘어왔다. 날씨가 매우 좋다. 나일강을 지나 좀 더 들어가자 누런 모래사막이 나온다. 하늘에는 벌룬이 떠있다. "와, 여기 열기구를 타고 웨스트 뱅크를 관광할 수도 있나 봐." 표를 사서 나오니 놀이공원에 흔히 있는 전기카트들이 기다리고 있다. 매표소에서 장제전까지 거리가 조금 있는데 더운 날이나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은 타고가면 좋을 것 같았다. 탄이는 공짜면 타고가지 뭐 하며 혹시나 하며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10파운드(200원)란다. 해는 내리쬐었지만 아직 더울 때가 아니어서 우리는 그냥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느리게 걸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유적의 모습을 충분히 감상하고 싶었다. 핫셉수트 장제전은 천혜의 위치와 풍경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누런 사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래 포근하게 감싸여진 핫셉수트 장제전은 풍경부터 장관이었다. 3층의 테라스식 신전으로 수많은 열주식 기둥마다 파라오석상이 늘어서있는 모습이 고대 이집트 건출의 최고 걸작으로 불릴만큼 장엄하고 멋있었다. 개장시간에 맞춰 일찍 왔는데 우리처럼 부지런한 사람들이 꽤 많다. 거의가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 관광객들이다. 중앙도로 양 옆으로 스핑크스 조각상들이 도열해 있는데 개중 이목구비가 잘 남아 있는 것들도 있었다. 중앙계단을 다 오르자 기둥마다 서있는 석상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핫셉수트는 여왕이지만 자신의 석상에 턱수염을 만들었다. 남자 파라오 못지않게 위엄 있게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파라오인 남편이 죽은 후 아들을 섭정하다가 스스로 파라오가 되었다고 한다.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로 힘있게 이집트를 다스린 여장부인 것 같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확실히 다른 종류의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예전에는 거의 다 무너졌던 벽들을 잘 복원해놓아 벽화들을 볼 수 있었는데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 이집트 아저씨가 신전입구부터 우리에게 말을 걸더니 코리안이냐고 하며 계속 따라다닌다. 이곳저곳 다니는 곳마다 부탁하지 않은 안내를 하는데 같은 관광객 같지는 않고 팁을 바라는 비공식 가이드인 듯. 다행히 우리가 별로 흥미있어 하지 않자 귀찮게 하지는 않고 금새 떨어져 다른 사람을 찾아 갔다. 신전 내부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통로에 아크릴로 보호판을 만든 것이 너무 반갑다.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덴데라신전에도 이런것을 설치해두어야 할텐데. 아크릴 너머의 호루스와 파라오 그림이 매우 아름다왔다. 신전의 가장 안쪽 방은 바위산인 절벽을 파낸 동굴이라고 한다. 위층 신전을 나와 우리가 걸어온 넓은 길을 내려다보자 멕시코에서 본 테오티우아칸(피라미드)이 떠올랐다. 먼 옛날 고대 파라오들이 이곳에서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위엄을 떨쳤겠지. 아래로 내려와 둘러본다. 확실히 위층보다는 벽화가 많이 남아있다. 천장에는 남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노란색으로 팔이 5개 달린 불가사리같은 모양으로 별을 형상화 해놓았다. 홍천에 있는 워터파크에 가면 슬라이드 타는 곳의 천장을 바로 이것과 똑같이 재현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기원전 1500년, 그러니까 3500년도 더된 채색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니.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당시에 사용하던 여러가지 모양의 토기며 식물들을 참 구체적으로 자세하게도 그려놓았다. 이집트 벽화가 비슷비슷한것 같지만 만들어진 시대별로 또 장소의 중요성이나 특성별로 조금씩 다르다. 어제 보았던 덴데라 신전의 화려함과 섬세함의 극치였다면 핫셉수트 장제전은 천혜의 위치와 풍경이 말문을 막히게하는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신전을 바라보고 왼쪽끝에는 하토르 여신을 위한 장소가 있다. 덴데라신전에서 본것과 비슷한 커다란 여자머리가 있는 기둥들과 하토르 여신의 상징인 소가 많이 새겨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람세스 3세의 신전 '메디넷 하부(Medinet Habu)' 실컷 여유있게 구경을 하고 공원입구로 걸어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7분 거리의 메디넷 하부. 메디넷 하부에 도착해서 왼편의 주차장에 차를 잘 세워두고 신전으로 걸어갔다. 단체관광객들 사이에 함께 줄을서서 들어가려다 티켓을 사오라며 쫓겨났다. 매표소가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머쓱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매표소 같은 곳이 없다. 지키는 경찰 같은 분에게 물어보니 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알려준다. '매표소가 그렇게 멀리 따로 있다고?', 이해가 안되서 진짜인가 의아했지만 일단 알려준 방향으로 걸어갔다. 입구가 몇개 되나? 그러면 말이 될 수도 있는 것 같고. 암튼 알려준 대로 가는 수 밖에. 사람들이 별로 안다닐 것 같은 흙길을 한 5~6분 걷다보니 현지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가봤자 매표소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느낌인데 이게 맞나 싶어 머뭇대다가 탄이 마을사람에게 매표소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가라고 한다. 많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다들 저쪽으로 가라고 하니 더 가보자. 그렇게 허허벌판 500미터를 더 걸어가서야 매표소가 진짜 있는 것을 보고 어이없어하며 표를 구입했다. 빠른 걸음으로 왕복 20분거리. 단체여행객들은 아마 가이드가 미리 표를 구해와서 매표소에 들릴 필요가 없으니 바로 입장하는 것 같다. 우리처럼 개인적으로 오는 경우는 이렇게 멀리 떨어진 매표소를 먼저 들러 표를 구입해오거나 이집트정부에서 판매하는 "룩소르 패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룩소르 패스는 5일간 룩소르의 주요 관광지를 제한없이 입장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 같은 것이다. 가격은 100달러이고 적용이 안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3일간 룩소르에서 낸 입장료는 인당 4만원 정도였어서 룩소르 패스는 패스했다. 어렵게 표를 사서 다시 왔던길로 돌아와 겨우겨우 메디넷 하부 신전에 입장할 수 있었다. 메디넷 하부는 상부, 하부가 아니고 Medinet Habu라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매우 무안했다. 이곳은 람세스3세의 장제전으로 알려져있는데 람세스 3세는 카이로 문명박물관 지하 미이라실에서 본적이 있던 분으로 고대 이집트가 더 이상 세계 제일의 국가가 아닌 시대에 왕이 되어 마지막 불꽃을 태운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로 불리는 왕이다. 장제전의 크기와 규모를 보면 과연 그러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벽에는 람세스 3세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내용의 벽화가 많았는데 당시 북쪽바다와 중동민족, 남쪽의 누비아, 사막민족등 사방에서 외세의 침략이 매우 잦아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었다고 한다. 메디넷 하부는 람세스 3세의 장례신전 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쳐 증축이 되어 다양한 기능의 여러 건축물들로 구성된 복합신전이라고 한다. 높이 쌓은 탑같은 문을 지나니 안뜰이 나왔다. 건물들이 웅장하고 규모가 굵직한 것이 지금까지 본 여자 파라오들이 만든 두개의 신전과 확연히 비교가 된다. 덴데라와 핫셉수트신전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압도하는 장엄함이 느껴진다. 커다란 두번째 문을 지나 두번째 안뜰에 들어서자 양옆에 높은 기둥들과 그 앞에 선 석상들이 보인다. 핫셉수트 장제전의 석상에 다섯배는 되보이는 커다란 석상들이 열을 지어 서있다. 석상들 옆에는 종아리까지 오는 작은 여자석상들도 있는데 아내인지 딸인지 아니면 하녀인건지 궁금했다. 이곳의 상형문자는 웬만해서는 지워지지 않도록 매우 깊게 조각되어있는 것이 특이했다. 후대의 파라오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많아 고치지 못하도록 깊이 새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번째 문까지 들어가자 아직 복원이 덜된것인지 기둥들도 밑둥만 남아있고 천장도 훤히 뚫려있었다. 미로처럼 여러개의 방이 있어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VR로라도 옛날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구현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9CWNcgV0IFg?si=zgvtiY47CN33zlX8>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10-24 19:12:55[파이낸셜뉴스] 야구는 3시간을 이겨도 단 10분을 지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물며 이날 경기는 1~2위 싸움이었다. 이미 반환점을 돌아 페넌트레이스 막바지에 도달하고 있는 상황. 1경기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KIA 타이거즈가 1위 팀의 저력을 과시하며 선두자리를 굳건히 했다. KIA는 16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4 신한 SOL뱅크 KBO리그 LG 트윈스와의 잠실 경기에서 3-2로 역전승했다. 4게임 차 선두였던 KIA는 66승 46패 2무를 쌓아 2위 LG(60승 50패 2무)를 5게임 차로 따돌렸다. 이날 경기 KIA 팬들의 야구는 딱 9회부터 시작이었다. 8회까지 0-2로 무기력하게 끌려가던 KIA 타선은 9회에 제대로 된 위용을 발휘했다. LG 마무리 유영찬을 상대로 선두타자 최원준이 볼넷을 골라냈고, 김도영이 좌중간 적시 2루타를 때렸다. 유영찬은 소크라테스 브리토를 상대로 폭투를 던져 1사 3루를 자초했다. 그리고 나성범이 해결사 역할을 했다. 나성범은 1볼-1스트라이크에서 유영찬의 시속 149.7㎞ 직구를 퍼 올려 우측 담장을 큼지막하게 넘어가는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나성범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을 언제 봤었나 싶을 정도로 크나큰 포효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경기 초반은 전체적으로 LG에게 운이 따랐다. 최원태와 김도현의 선발 맞대결에서 0의 행진이 이어지던 5회말, LG가 먼저 기회를 잡았다. 선두타자 허도환이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고, KIA 김도현은 아웃카운트를 하나 채우고 불펜 김기훈에게 공을 넘겼다. 2사 12루 상황에서 문보경이 김기훈의 초구를 공략해 우전 적시타를 생산했다. LG는 6회 운이 따랐다. 김현수의 유격수 땅볼이 불규칙 바운드가 튀며 2루타로 바뀌었다. 이어진 2사 3루에서는 허도환이 우익수 왼쪽으로 적시타를 날렸다. 허도환의 느린 발과 KIA 최원준의 빠른 송구로 '우익수 땅볼'이 될 뻔했으나 비디오 판독에서 세이프 원심이 유지됐다. KIA는 지난 잠실에서의 LG와의 3연전을 스윕으로 이끈 바 있다. 특히, 김도영의 안타와 최형우의 적시타로 2-1에서 2-2를 만들고 연장전에서 역전승을 했던 그 경기는 스윕을 만들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도 투수는 마무리 유영찬이었다. 그런데 LG는 홈에서 또 다시 다 이겼던 경기를 놓치며 뼈아픈 패배를 곱씹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두 팀의 상대 전적은 KIA의 10승 3패 압도적 우위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2024-08-16 22:11:19#OBJECT0# [파이낸셜뉴스] 국내 증시와 미국증시를 바라보는 개인 투자자들의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코스피지수가 하락할 경우 수익이 나는 인버스형 상장지수펀드(ETF)에 제일 많은 투자금이 유입된 반면, 미국증시는 상승 베팅에 매수세가 집중됐다. 14일 코스콤 ETF체크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가 최근 한 달 간 가장 많이 사들인 ETF는 'KODEX 200선물인버스2X'(6199억원)다. 코스피200 선물지수를 역으로 두 배 추종하는 상품으로, 코스피200 지수가 하락할 때 두 배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 투자자들의 기대와 달리, 코스피지수가 상승세를 보이며 손실도 불어났다. 지난달 12일 371.70이던 코스피200 선물지수는 외국인이 5조2676억원어치를 사들이면서 이달 12일 394.15까지 올랐다. 이에 'KODEX 200선물인버스2X'의 하락률은 14.5%를 넘었다. 반대로 미국증시에 대해서는 상승에 무게를 싣고 있다. 개인은 한 달 간 'TIGER 미국S&P500'을 2239억원 순매수했다. 개인 순매수 2위다. 개인의 미국증시에 대한 믿음은 '초장기 순매수'와 '편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TIGER 미국S&P500'에는 지난 5월 14일 이루 단 하루를 제외한 모든 거래일에 순매수가 유입됐다. 연초 이후로 범위를 넓히면 개인 순매수 1위(8680억원)에 해당한다. 같은 기간 개인이 많이 담은 ETF 3~8위 역시 미국증시 관련 상품이다. 대다수가 미국 초우량 기술주에 투자하거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및 나스닥100 지수를 추종한다. 수익률은 최소 5%, 최대 13% 수준이다. 'TIGER 미국나스닥100+15%프리미엄초단기'는 상장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개인 순매수 3위(1633억원)에 올랐다. 순매수 9~10위를 차지한 국내 증시 관련 ETF는 파킹형과 지수 인버스형 상품인 'KODEX CD금리액티브(합성)'(827억원)와 'KODEX 인버스(823억원)'다. 국내 기업을 묶은 ETF에는 개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시장 과열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4분기 실적발표 시즌 이후 2024~2025년 연간 예상 주당순이익(EPS)이 크게 증가하지 않은 점을 들며 기업들의 실적 성장 속도가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DB금융투자 강대승 연구원은 "개별 기업의 12개월 선행 EPS 조정을 통해 실적 성장에 대한 시장의 자신감을 살펴볼 수 있는 이익조정비율(ERR)이 하락세"라며 "증시 상승을 이끌었던 인공지능(AI)기업들의 실적 기저 효과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nodelay@fnnews.com 박지연 기자
2024-07-14 14:36:13"전 세계에서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이제는 주는 국가가 된 한국 외에도 수원국이었다가 공여국이 된 국가들이 속속 생기고 있다. 우리가 그들이 신흥 공여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롤모델이 돼야 한다." 지난해 12월로 취임 1주년을 맞은 손혁상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은 4일 경기 성남 판교 소재 KOICA 본사 집무실에서 가진 파이낸셜뉴스와의 신년인터뷰에서 새해 가장 역점을 둘 분야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밝혔다. 이어 "이들 이머징 도너(Emerging donor·신흥 원조 공여국)들을 잘 엮어내면서 모범적 역할을 보여 원조경험 성숙도 역량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면 새로운 모델, 새로운 성장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이머징 도너들을 담을 만한 협의체를 만들어 한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부연했다.■ 손혁상 이사장 약력 △한국국제협력단 정책자문위원 △경희대학교 국제개발협력연구센터 센터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국제개발협력학회(KAIDEC) 학회장 △ 국무조정실 국제개발협력위원회 민간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손혁상 이사장은 특히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공적개발원조(ODA) 규범 형성과 방향성 선정 과정에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적으로 수원국에서 공여국이 된 국가들끼리 힘을 모아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키우며 공공외교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제개발협력 파트너십 저변의 '선도적' 확장을 구상하고 있는 손 이사장을 만나 취임 1주년 소회와 한국 ODA가 나아갈 방향 등을 들어봤다. 다음은 손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취임 1주년이 지났다. 소회는. ▲제가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2021년은 KOICA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던 해로, 지난 활동을 평가하고 향후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던 것이 저로서는 행운이자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선진공여국의 모임인 'OECD 개발협력위원회(DAC)'에서 다른 국가의 ODA 모범사례를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을 다뤘는데, 그중에서도 KOICA가 진행 중인 '수원국 만족도 조사'를 집중 조명했다. 그간 '선진 원조사례'를 따라 배우기 바빴던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나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지난 1년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효율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내부 직원들과 모두 대화의 시간을 갖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4명씩 총 240회에 걸쳐서 560명을 만났다. 직원 중에서 제가 제일 많이 만난 기록이라고 하더라. 한 신입 직원이 국제협력전문가 일을 했을 때의 외부 시선과 KOICA에 들어와서 수장으로서 컨트롤할 때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밖에서 볼 때는 우리나라에서 대표 개발협력기관이라고 이야기하듯 KOICA의 역량, 자원, 활동의 모든 부분에서 단연 톱이다. KOICA 직원들은 상당히 역량 있고 다이내믹하며 자신감이 넘친다. 예산 약 1조원(2022년 예산 기준)을 다루는 조직이다. 안에 들어와서 보니 고민이 많았다. 공여를 받는 국가에서 주는 국가가 되면서 전문적이고 선도적인 개발협력기관으로 한 단계 뛰어넘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궁극적인 KOICA 사명은 무엇이라 보나. ▲사업영역 외에 경영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조직문화를 일신하는 것이다. 우리 조직의 사명이 무엇인지, 이를 되새기고 다소 느슨해진 대목이 있다면 이를 챙기려 한다. KOICA에는 여러 사명이 있지만 무엇보다 '개도국 주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한다'는 말 속에 '우리 모두' '함께' '상생·연대'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 조직문화의 핵심은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은 월급, 낮은 인지도,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KOICA라는 직장에 다니는 것이 보람이 있는 이유는 글로벌 빈곤퇴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직원들에게 자긍심, 자존감을 심어주고 싶다. 올해 강조하려는 것은 '위기의 일상화''상시화된 위기'라는 점이다. 코로나19라는 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변이 바이러스는 계속 출현할 것이고, 또 다른 감염병이 등장할 가능성도 높다고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기후변화, 분쟁, 난민 등 위기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상존하고 있다. 글로벌 규모의 위기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에 대응하려면 위기에 강한 조직, 유능한 조직원이 되는 것은 기본이고 부서 간, 나아가 KOICA 여러 파트너와의 협업이 강화되어야 한다. 비정부기구(NGO), 학교, 민간기업, 타 공여기관 등과의 협업을 계속 강화해가겠다. ― 코로나19 사태로 ODA 활동에 제약은 없나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44개 해외사무소를 그대로 운영 중이고, 2022년에는 3개의 신규 사무소(인도,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를 신설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또 2020년 2월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전원 일시귀국했던 해외봉사단의 파견을 2021년 12월부터 재개했다. 해외에서의 활동이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은 구성원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에도 예산 집행률이 90%대 중반 수준일 정도로 끊임없이 노력했다. 현장 사무소 직원들은 온라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었다. 국내 전문가들도 현장 사이트 조사나 인터뷰, 평가 등을 이제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과거 전략회의 때는 현지 사무소들이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제 연간 경영회의, 전략회의 둘 다 온라인으로 하기 때문에 현장 직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돼 문제를 해소하게 됐다. 또 2020년 일시귀국한 봉사단원 1468명을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안전하게 귀국을 시켰다. 28개국의 234명이 온라인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봉사활동 수혜자는 11만7504명에 달한다. 코로나19라고 해서 불가능하다는 구조를 없애려고 했다. 특히 메타버스(가상세계)상에서 서포터스를 뽑다 보니 글로벌 서포터스가 가능했다. 인도네시아, 남미 등 18개국에 있는 친구들이 KOICA 서포터스를 지원하여 2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다. 한류 덕을 본 면도 있다. ―방역관련 첨병 역할에 대한 평가는. ▲코로나19 방역 지원으로는 테스터기, 워크스루 등을 개도국에서 많이 요구했다. 국제 방역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대응방안 'ABC'를 만들었다. 보건과 사회개발 그 두 개를 동시에 해야 한다는 전략이다. ABC 프로그램의 총액수는 1억8300만달러, ABC 프로그램 수혜자는 총 4350만명에 달한다. 오미크론 때문에 최근 테스터기, 주사기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틈틈이 팀들이 국내에서 생산된 방역 부품들을 선적해서 보내고 있다. 받는 국가에서 고마움은 이루 말을 할 수 없다. ―ODA 활동이 정부의 외교적 경쟁력을 높일 수 있나. ▲KOICA는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정부 대외전략과의 정합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첫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신북방 정책이 중요하다. 미국, 일본, 중국 등이 잇달아 '인도·태평양' '일대일로' 전략을 구사하고, 유럽연합(EU)·유럽 국가까지 아시아 진출을 서두르는 상황을 고려할 때, 만약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펼친 신남방정책이 없었다면 한국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위축되었을 것이다. KOICA가 신남방 ODA에서 진행 중인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의 메콩 평화마을 조성 프로그램, 베트남 중부지역 스마트시티 밸리 프로그램, 인도네시아 고등교육 프로그램 등이 있다. 신북방외교에 있어서는 대상지역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한국과의 네트워크가 두텁지 않았고, 지리적 연결성이 약했으며, 일부 국가는 국제제재라는 장애요소도 있었다. 우리 정부는 올해 ODA 중점협력국 5개를 신규 지정하면서 그중 3곳을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 국가로 선정해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KOICA의 '신북방 ODA 4대 프로그램'은 키르기스스탄-디지털 접근성 강화, 중앙아-고등교육 역량강화 프로그램, 우즈베크-한국의 질병청을 벤치마킹한 '방역통합기구' 신설 등이다. 이와 함께 정부가 '그린뉴딜 ODA 추진전략'을 수립함에 따라 그린뉴딜 ODA 비중을 확대할 계획이다. ―한국 ODA가 나아갈 길은. ▲ODA는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바로 얻는 사업이 아니다. 기반을 마련해줘서 오너십을 넘기고, 기대효과로 기업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공여하는 나라가 이익을 가져온다면 그건 ODA가 아니다. OECD 개발협력위원회 ODA 규모는 평균 국민총소득(GNI)의 0.3% 정도인데 우리는 아직 0.14%에 그치고 있다. 우리나라 국력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국제개발협력 파트너십의 저변을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최근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등이 ODA 개발청을 만들었다. 이들 국가 모두 우리처럼 받는 국가에서 주는 국가로 지위가 변했다. 이 외에도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브라질, 터키 등이 신흥공여국이다. 이들 모두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공여국은 됐는데 OECD 전통 국가들이 만든 규범을 따르면 되는 것인지, 우리가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OECD 기준대로 따르기는 역부족이다. 한국처럼 수원국이었다가 공여국이 된 국가는 막연히 서구 모델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머징 도너들을 담을 만한 협의체나 규범이 없는데 우리의 발전경험에 기반해 다른 개도국을 도울 수 있는 모델을 전수해야 한다. 우리의 원조경험, 성숙도, 역량을 통해 KOICA가 리드해 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수원국이었다가 공여국 지위로 변모하려는 신흥공여국과의 협력 패러다임을 만들면 엄청난 성과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이들 국가와 인적교류도 많아지고 실제 스핀오버 되기 시작하면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이다. true@fnnews.com 김아름 기자
2022-01-04 17:56:33【베이징·도쿄·서울=정지우, 조은효 특파원, 김성호 기자】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해온 글로벌 K푸드 생태계가 뿌리째 뽑힐 지경이다. 전 세계적인 한류붐에 힘입어 K푸드 전도사 역할을 해온 해외 한식당들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악소리를 내고 있다. 인건비와 관리 운영비를 감내하며 버티기에 나섰지만 줄파산이라는 극한상황에 몰렸다. 문제는 코로나19 이후다. 애써 확장해온 해외 한식당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경우 코로나19 이후 K푸드 재기 작업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한달 영업일 0'…해외 한식당 줄파산 직전 일본의 골든위크 마지막 날인 6일 일본의 '한류 메카'인 도쿄 신오쿠보는 인적이 크게 끊기면서 적막감까지 감돌았다. 한·일 관계 악화에도 발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 찼던 이곳의 상당수 음식점들이 임시 휴업을 내건 상태. 육안으로는 3분의 2 정도가 셔터를 내렸다. 치즈 닭갈비 등으로 퓨전 한식으로 히트를 쳤던 가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대략 이곳 자영업의 3분 2는 영업을 하지 않았다. 현재 신주쿠구 내 이른바 코리아타운이라 불리는 지역(오쿠보, 가부키초, 쇼칸도리 등)의 한인 점포는 약 640~650개 정도이며 이 중의 절반이 음식점이다. 일본인들로 붐비던 이곳이 현재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아르바이트 직원 등 종업원들을 내보낸 곳도 여러 곳. 신주쿠에서 한국 음식점 두 곳을 운영하는 강모 사장은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파산하는 곳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토로했다. 당장 종업원 월급에 임대료 지불일까지 다가오고 있어, 급한 마음에 일본 정부에서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저리 융자를 신청했지만 언제 나올지 초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는 "6월부터 정상적으로 영업을 한다 손 치더라도 몇 달 더 여파가 가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도쿄의 한 인사는 "생계형 가게들은 버티다 못해 그대로 문을 닫고 있으며, 그나마 자본력이 있는 곳들은 종업원들을 자르고, 중국에서 마스크를 수입해다 팔아 버티고 있는 지경"이라고 전했다. 중국은 코로나19의 충격이 가장 먼저 닥쳐왔던 곳인 만큼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도 앞서고 있다. 그러나 이미 코로나19 충격으로 경영출혈이 심각한데다 중국의 소비회복도 더뎌 예년의 매출을 회복한다는 건 언감생심이라는 게 한식당 업주들의 하소연이다. 베이징의 한인 밀집지역 차오양구 왕징의 한 맥주전문점은 매출이 97%까지 곤두박질쳤다. 한국인이 주로 찾는 호텔은 하루 평균 180여명의 손님이 투숙하면서 120명이 같은 건물에서 식사를 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투숙객은 4명으로 줄었다. 온대성 재중한국외식협회 회장은 "지금 상황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한인식당 사장은 "코로나19 확산 때도 어려웠으나 차오양구를 고위험지역으로 지정한 다음부터 중국 현지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전했다. 두바이에서 한국식 고깃집을 운영하는 A씨는 지난달부터 무기한 가게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예방차원의 강제 영업정지조치였다. 월세만 5000만원(200㎡ 기준)에 달하는 호텔 내 매장이라서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호텔이 아니면 술 판매가 안 되는 현지 사정상 중급 호텔에 자리한 대부분의 한식당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당국으로부터 지원도 한 푼 없는 상황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마음고생하는 점주들이 한둘이 아니다. 체코 프라하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B씨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영업일수는 '0'이었다. 코로나19로 정부가 번화가 식당 영업을 금지한 탓이다. 개별 자영업자에겐 지원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현지에서 법인을 내고 사업하는 B씨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대안 부재…K푸드 뿌리째 흔들 사정은 어렵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기 어렵다. 한식당들이 현지에서 세금을 내고 재외국민이기 때문에 재정지원 등을 하려고 해도 근거가 될 수 있는 법이 없다.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급들이 해외 교민들과 간담회 후 지원방안 마련을 약속하지만 결국 국회에서 법이 제정되진 않았다. 현지 정부의 소상공인 지원책 역시 한식당에 지원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중국은 지방정부나 국가기관과 관련된 건물 세입자 위주로 임대료 감면 혜택이 크다. 그러나 한식당은 개인 건물에 주로 세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신주쿠 상인회 측도 주한일본대사관 및 총영사관 등과 코로나 대책과 관련해 머리를 맞댔으나, 한식 및 한류 문화 지원 등은 사실상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식업계 한 관계자는 "세금을 한국에 내는 것도 아니니 정부에서 다 지원하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며 "다만 어렵게 늘린 한식당이 하나둘 문을 닫게될까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jjw@fnnews.com 정지우 조은효 김성호 기자 jjw@fnnews.com 정지우 조은효 김성호 기자
2020-05-06 15:29:11[파이낸셜뉴스] 영화산업 구조개선을 골자로 하는 일명 ‘포스트 봉준호 법’에 1,325명의 영화인이 서명했다. “97% 독과점의 장벽에 갇힌 한국영화산업에서 과연 제2의 봉준호가 나올 것인가”라며 ‘97% 독과점의 장벽’을 넘어 모두에게 유익한 영화생태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산업 구조개선 법제화 준비모임’(이하 준비모임)은 26일 감독 임권택·이창동, 배우 안성기·정우성·문소리 등이 △대기업의 영화 배급업과 상영업 겸업 제한 △ 특정 영화의 스크린 독과점 금지 △ 독립·예술영화 및 전용관 지원 제도화 등 세 가지 요구사항을 담은 영화인 선언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준비모임은 코로나19 여파로 이날 예정한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보도자료를 배포, “‘97% 독과점의 장벽’을 넘어 모두에게 유익한 영화생태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영화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먼저 배급업과 상영업을 겸하고 있는 대기업 3사가 한국 극장 입장료 매출의 97%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겸업 제한’을 주장했다. “극장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부율을 조정하고, 무료초대권 남발하여 영화의 매출을 갉아먹고, 상영관 내 상품광고수익을 독식하고,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광고홍보비를 배급사에 떠넘기는 등 그들의 불공정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미국은 이미 1948년 배급·상영업 겸업을 금지(파라마운트 판례)했고, 당시 판례는 지금도 유효하다”며 “우리 헌법도 제119조 제2항(경제민주화)에서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방지’를 규정하고 있으니, 겸업 제한을 통해 ‘97% 독과점의 장벽’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프랑스 사례를 언급하며 ‘특정 영화의 스크린 독과점 금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극장들은 단기간에 관객이 몰리는 영화를 선호하기 마련이지만, 대한민국의 스크린 독과점행태는 도를 지나쳤다”며 “지난해 한 인기 영화의 경우, 무려 81%의 상영점유율을 기록했다”고 꼬집었다. 프랑스는 ‘영화영상법’과 ‘편성협약’을 통해 8개 이상 스크린을 보유한 극장에서는 영화 한 편이 일일 상영 횟수의 30%를 초과할 수 없고, 15~27개의 스크린을 보유한 대형 멀티플렉스에서는 한 영화에 1일 최다 4개 스크린만 배정할 수 있다. 준비모임은 “‘스크린 상한제’를 통해 소형영화에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 관객의 영화향유권 또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독립·예술영화 및 전용관 지원 제도화를 언급했다. “개봉된 독립·예술영화는 전체 개봉 편수의 9.5%에 달하지만, 관객점유율은 0.5%에 불과하다”며 “오늘과 같은 환경이었다면 2000년에 개봉했던 봉준호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제작의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봉준호는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이에 “영화법 개정을 통해, 멀티플렉스에 독립·예술영화상영관을 지정해 해당 상영관에서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인정한 독립·예술영화를 연간 영화 상영일수의 60/100 이상 상영하고, 국가는 해당 상영관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우리 모두가 향유해야 할 건강한 영화생태계를 위해 작은 영화들이 함께 자라 나갈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준비모임은 지난 17일부터 25일까지 영화인들의 서명을 받았으며, 21대 국회에서 세 가지 요구사항이 법제화될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0-02-27 10:15:17[파이낸셜뉴스] 한국은행은 10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인하를 단행하는 것과 동시에 추가 금리인하 의지도 드러냈다. 다만 서두르지 않고 주요 거시경제지표나 경제 상황, 대외여건 등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한은이 주목하는 지표는 근원물가의 움직임일 것으로 보인다. 근원물가는 수요 측면에서 기조적인 추세를 보여주는 지표로 경기, 소비심리 등도 그대로 녹아 있다. 아울러 한은 통화정책의 여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통화정책 움직임도 중요하다. 금리인하의 부작용 측면에서는 부동산 시장의 흐름도 주목되고 있다. 2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9월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상승률은 0.6%였다. 지난 1999년 12월 0.5%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연초 근원물가 상승률이 1% 초반대였던 것을 고려하면 반토막이 났다. 올해 1~9월 누적근원물가 상승률은 1.0%다. 연간 기준과 비교해보면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결국 한은이 지난 7월과 이달 금리를 인하한 것은 물가부진이 결정적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향후 통화정책의 방향은 근원물가의 움직임이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연말까지 근원물가 상승률이 반등하지 못하면 한은은 추가 금리인하 카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근원물가의 하락이 지속되면 장기적으로는 기대 인플레이션 하락으로 이어지고 경제주체의 심리를 위축시켜 소비나 투자 부진을 부르기 때문이다. 근원물가 하락으로 금리인하가 필요하더라도 한은 입장에서는 미 연준의 통화정책 움직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 연준과의 금리 차이에 의해 국내에 투자된 외국인 자금이 큰 폭으로 움직일 수 있어서다. 현재 한은 기준금리 수준은 미 연준이 비해 0.75%포인트가 낮다. 외국인 자금 이탈 측면에서는 이 격차를 현 수준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미 연준의 금리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연준이 이미 올 들어 2차례 금리를 인하한 만큼 효과를 지켜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가 하면 10월과 12월에 추가로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연준이 인하에 나선다면 한은도 금리인하의 여력을 갖게 될 전망이다. 국내적으로 금리인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금리인하의 가장 큰 부작용은 가계부채 형태로 시중에 풀린 유동자금이 부동산 시장에 몰리는 것이다. 지속될 경우 한은 설립목적 중에 하나인 금융안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정책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 한국감정원 전국주택가격동향 조사에 따르면 10월 둘째주(14일 기준)까지 서울 아파트 가격은 16주 연속 상승 중이다. 시점으로 봐도 한은이 금리를 인하한 7월 첫주부터 상승 반전된 것이다. 서울이 오르면서 전국 부동산 가격도 마이너스 행진을 멈췄다. 다만 한은은 아직 부동산 시장이나 가계부채가 위험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도 10월 금리 인하 이루 간담회에서 "7월에 금리를 인하했지만 그 이후 가계부채 증가세는 둔화되는 등 금융안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제한적"이라고 언급했다. 이미선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금리인하의 부작용은 부동산과 대출 증가인데, 규제강화로 대출 증가율은 억제되고 있다"며 "7월 이후 통화정책에 대한 정부와 한은의 무게중심은 금융안정에서 경기부양으로 어느 정도 이동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coddy@fnnews.com 예병정 기자
2019-10-18 16:58:35#1. A씨(65)는 사기죄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심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1심에서 법정구속된 A씨는 항소심 무죄판결까지 190일간 감옥생활을 했다. 무죄판결 후 그는 형사보상제도에 따른 형사보상금을 예상보다 적게 받았다. 그것도 보상 신청 7개월여만으로, 그를 더욱 고달프게 했다는 전언이다.#2. 오모씨(74) 등 23명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구속 기간 입은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법원에서 형사보상금 인용 결정을 받은 뒤 국가에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정부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최대 1년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수사기관의 잘못으로 구금됐다 불기소처분이나 무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에게 지급하는 형사보상금 지급 지연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억울한 옥살이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청구인들은 법원을 상대로 보상금액 책정 다툼을 벌여야 하고 지급 요청을 한 뒤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참담한 상황에 놓인다. 구금되지 않았던 피의자나 피고인은 이런 보상에서도 제외돼 사실상 사각지대라는 지적도 나온다.■보상 결정 기한 없어… 지연 이자 소송까지 정부가 예산 등을 이유로 형사보상금을 바로 지급하지 않는 것은 형사보상법상 보상결정 기한을 정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30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형사보상제도의 운영현황과 개선방안'에 따르면 법원에서 보상청구부터 보상결정까지 최장 400일, 최단 40일이 소요됐다. 보상결정에만 6개월 이상 소요된 사례가 5건에 이르는 등 법원의 보상결정이 지체되고 있다는 불만이다.더구나 형사보상 지급청구 사례 24건 가운데 검찰에서 보상지급 청구부터 지급까지는 최장 146일, 최단 22일이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형사보상법상 보상결정 기한과 마찬가지로 지급 기한이나 지급이 지연되는 경우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보상금 지급까지 4개월 이상 지난 사례가 6건, 3개월 이상 3건, 2개월 이상 7건, 1개월 이상 5건, 1개월 미만 3건이었다. 이처럼 보상금이 지연되면서 지연에 따른 이자를 청구하는 소송도 제기됐다. 오씨 등 23명은 보상금 지연에 따른 이자도 달라며 소송을 냈고 법무부는 "형사보상법은 일반 민사소송법과 달라 이자에 대한 규정이 없고 지연 손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형사보상 신청이 급증해 국가예산으로 감당하기 힘들다고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법무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형사보상도 일반 민사소송과 동일하게 지연 손해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형사보상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보상 청구가 제기된 날로부터 3개월 내 보상을 결정토록 하고 검찰은 3개월 내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또 기한 내 지급하지 않으면 은행법상 연체금리 등에 따라 지연이자를 지급하도록 했다. 박 의원은 "소송 과정에서 겪는 피고인의 경제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며 "무죄판결을 받은 피고인에 대해 법으로 정해진 형사보상금을 신속하게 지급하는 것은 무너진 명예와 고통스러운 상처에 대한 최소한의 회복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미구금자 보상은 전무… 명예회복 대책 필요 지적 현행 형사보상제도는 구금이나 형의 집행에 대해서만 보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상에서 제외된 미구금 피의자나 피고인도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만큼 형사보상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헌법정신에 부합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독일의 경우 구금되지 않은 피의자나 피고인도 국가 공권력 행사로 인해 발생한 재산적 손해를 실질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형사보상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국회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최병국 전 의원은 2007년부터 피의자가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형사피고인으로서 무죄판결을 받은 경우 구속, 구금여부에 관계 없이 형사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형사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또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도 2010년 이 같은 내용의 개정안을 내놨으나 통과되지는 못했다. 당시 법무부는 "무죄판결이 꼭 죄가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입증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전부 보상을 해줄 경우 정의관념에 반하게 된다"며 "영미법 국가의 무죄판결 비율이 30~40%를 육박하는 데 비해 우리는 0.48%에 불과하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보상대상 폭을 확대하면 국가 재정에 과도한 부담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윤지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구금 피의자.피고인도 형사보상 대상에 포함시킬 필요는 있지만 형사사법기관의 귀책사유가 있으면 활용될 수 있는 국가배상제도가 있는 상황에서 형사보상 청구가 남용될 경우 자칫 수사.기소.재판 등 일련의 국가사법권 행사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그는 "다만 불구속 피의자.피고인에 대해 형사보상은 불가능하더라도 명예회복 조치는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스포트라이트팀 박인옥 팀장 박준형 예병정 구자윤 김문희 김규태 기자
2017-05-30 17:28:51제주도에서 체계적인 경주마 씨수마 관리를 통해 명마 탄생의 꿈을 일궈가고 있는 소춘송, 소무근 부자 . 제주도에서 체계적인 경주마 씨수마 관리를 통해 명마 탄생의 일구어 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16일 렛츠런파크 부산경남본부에 따르면 최근 총 상금 24억원이 걸린 올해 삼관경주 레이스 첫 번째 대회로 열린 '제11회 KRA컵 대상 경주'에서 1, 2위를 기록한 '라팔'(3세, 수말, 김재섭 조교사)와 '돌아온현표'(3세, 수말, 권승주 조교사)를 배출한 민간 씨수말 '컬러즈플라잉'(9세, 태영목장)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렛츠런파크 부산경남본부 제5경주(국산 3세·별정·1600m)로 펼쳐진 이번 경주는 전반적으로 두터운 선두권이 형성된 가운데 결승주로에 들어서며 더욱 치열한 혈전이 이어졌다. 결승선을 500m 앞둔 지점부터 내측의 '라팔'과 외곽의 '돌아온현표'가 한 수 위의 경기력으로 막판 뒷심을 발휘하며 치열한 경쟁을 펼친 끝에 결국 '라팔'이 1분 39초 7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돌아온현표'가 0.1초 차이로 준우승을 차지했고 특급 씨수마 '메니피'의 자마로 몸값 2억2000만원을 기록한 '영천에이스'가 3위를 기록했다. '라팔'과 '돌아온현표'의 부마인 '컬러즈플라잉'이 '메니피'에 통쾌한 한판승을 거두면서 향후 씨수말 혈통전쟁을 예고했다. '라팔'과 '돌아온현표' 이복형제의 활약으로 제주도에서 씨수말로 활약 중인 부마 '컬러즈플라잉'의 몸값도 치솟고 있다. 지난해 1회 교배료가 200만원을 기록한 '컬러즈플라잉'의 올해 교배료는 400만원으로 100% 폭등했다. 뛰어난 씨암말을 보유한 대형 목장을 중심으로 '컬러즈플라잉'과의 교배에 관심을 보이면서 올해에만 교배 수익으로 4억을 예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라팔'과 '돌아온현표'의 활약 여부에 따라 10년간 50억원의 추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평이다. '라팔'과 '돌아온현표'의 삼관경주 특수의 최대 수혜자는 단연 30대 경주마 생산자 소무근씨(36)다. 소무근 태영영농조합법인 대표는 건설사를 운영하다 경주마 목장을 차린 소춘송 대표(63)의 대를 이어 2대째 경주마 생산에 전념하고 있다. 경주마산업의 발전가능성을 알아본 아버지의 뜻을 따라 뉴욕대에서 호스 매니지먼트를 전공한 소무근 목장장은 2009년 켄터키 경주마 목장에서 6개월간 인턴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해 10월 한국으로 돌아와 태영목장을 열기 위해 함께 들여온 씨수말이 '컬러즈플라잉'이다. 씨수말 '컬러즈플라잉'는 1회 교배료가 15만 달러에 달했던 전설적인 씨수마 '에이피인디'(A.P.Indy)'에서 탄생했다. 2011년 씨수마 생활을 은퇴한 '에이피인디'(A.P.Indy)는 미국 삼관마인 '시애틀 슬루'(Seattle Slew)의 자마로 태어난 '에이피인디'는 현역시절 '벨몬트 스테익스', '브리더스컵 클래식' 등에서 우승을 하며 올해의 경주마에 선정됐다. 은퇴 후에는 약 20년간 씨수말로 활동하며 총 135두의 그레이드(Grade)급 경주 우승마를 배출하며 두 번이나 미국 리딩사이어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컬러즈플라잉'의 자마들은 지난해부터 데뷔했기 때문에 주로 단거리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혈통 특성상 장거리에서도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며 "메니피의 자마들이 2000m 이상의 장거리 경주에 유독 약한 면을 보여 한국경마를 대표하는 혈맥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소 대표는 선진국에서 말 관리를 체계적으로 배운 게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외국에서 쌓은 인맥도 무시할 수 없다. 2010년 그 인맥을 통해 '컬러즈플라잉'을 뉴욕대 은사를 통해 1억 원에 못 미치는 싼 가격에 들여왔다. 소 대표는 "보통 씨수말들은 1년에 100두 정도 교배가 가능하다. 그렇게 난 자손의 성적을 평가하기까지는 또 3년여가 걸리고요. 다행히 자손이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그 가치는 더 높아진다. 우리는 컬러즈플라잉에게 기대가 크지만 문제는 관리다. 명마를 낳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철저한 건강관리가 필수"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경마산업은 시행체(한국마사회)와 마주, 말 생산 농가, 조교사, 기수, 관리사 등이 톱니바퀴처럼 얽혀 있다"면서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 이뤄질 때 톱니바퀴가 잘 굴러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 대표는 "이렇게 했을 때 우승마가 탄생하게 되고 그때의 쾌감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면서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마주가 되고 종마목장을 해서는 좋은 결과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최소 자본력은 20억 원 내외다. 돈만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말에 대한 사랑과 장기적인 비전이 없다면 경마산업에서 성공하기란 녹록하지가 않다. 하지만 소 대표 부자처럼 끊임없는 투자로 노하우가 쌓이면 경마산업이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2015-04-16 16:16:10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저니맨’을 검색해보자. 연관 검색어에 어김없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 석 자가 있다. 최익성. 그는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저니맨이었다. 총 6번이나 팀을 옮겨 이 부문 역대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후 미국과 멕시코까지 거쳐서야 야구계의 저니맨 생활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닌 듯하다. 그가 들려준 ‘제 2의 인생’ 역시 저니맨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 한 때 남들로부터 야구계의 대표적 저니맨이라는 수군거림을 받기도 했던 최익성이 이제는 세상의 수많은 저니맨들을 스스로 대표하기를 자처, 이들에게 손길을 내밀게 된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봤다. ▲ 새로운 도전, 다양한 유니폼만큼이나 다양한 꿈 2005년 SK를 끝으로 국내 무대에 더 이상 설 수 없었던 최익성은 이후 미국과 멕시코 등에서 남아있던 야구에 대한 모든 미련을 열정으로 승화시킨 뒤 손에 쥔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여기까지가 선수로서 기억되는 최익성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근황은 종종 들려왔다. 청바지 사업, 소주방 사장으로의 변신, 강연 활동 등을 비롯해 연예계로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특히 지난 2011년에는 SBS ‘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야구 팬들에게 다시금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야구계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뒤 세상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배우는 과정에 있습니다. 저도 예상치 못했지만 탤런트를 비롯해서 책도 썼고, 출판사도 운영하며 운동선수들이 걷지 않았던 길을 택했습니다” 현재 운영 중인 저니맨 야구사관학교의 경우 본인이 언젠가 야구계로 다시 돌아갔을 때 누군가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겠다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경우에 해당한다. 기존의 야구 클리닉이나 아카데미와는 다르게 선수를 단순히 키워내는 것보다는 사회 어떤 분야에 진출해서도 그 꿈을 이뤄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켜주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다. 출판사로 운영 중인 RJ컴퍼니 역시 이름을 짓는 일부터 많은 고심을 겪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RJ는 리얼 저니맨(Real Journeyman)의 약자입니다. 야구계에서 어쩌다가 저니맨이 됐는데 당시에는 그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왔지만 이를 긍정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죠. 평소 책을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쌓아왔고, 그런 점에서 이제는 젊은이들, 진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세상의 약자들에게도 ‘진짜 저니맨’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사를 덤덤하게 담아낸 자서전 ‘저니맨’ 역시 이러한 의도를 녹여낸 결과물이다. 책 속에는 차와 집까지 모두 팔고 산 속에서 보낸 4개월 동안의 삶은 물론, 무일푼으로 나와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일까지, 야구를 포함한 그 이후 인생사 역시 ‘0’부터 시작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야기가 생생히 담겨있었다. “소제목, 큰제목, 표지, 디자인 등 책이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제가 직접 참여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담아냈죠” 최익성은 연기에 대한 도전도 멈추지 않은 상태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엔터테이너적인 끼를 갖췄음을 인정한 그는 야구계에서도 남들과는 다른 개성을 찾는데 주력해왔다. 이를 온전히 수용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운동선수로서 자제해야 했던 부분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주문한 주황색 손목 아대를 착용하는 등 수많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관중들이 5초 이내에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봤다는 것이 그의 설명. 최익성은 지난달 휴메인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 기존보다 더 큰 꿈에 도전하고 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언제나 여러 길을 놓고서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 그의 당찬 포부였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 연습생 출신, ‘20-20 클럽’의 꿈을 이루다 최익성의 선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시작부터가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이었다. 작은 체격 탓에 모두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어린 시절부터 연습생 신분으로 프로에 입단, 1군 무대 한 타석에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땀방울을 흘렸던 순간들, 1994시즌 그의 꿈대로 단 한 타석에 들어서봤지만 당대 최고의 투수 이강철을 상대로 포수 파울 플라이를 기록한 일 등 아직까지도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데뷔 2년 동안 단 4타석에 들어섰던 최익성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96시즌이었다. “1996년에는 LG의 (이)상훈이형을 상대로 9회 2사 만루 풀카운트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해 안타를 뽑아내기도 했어요. 당시 경기가 훗날 삼성의 1번타자로 설 수 있었던 제 인생을 뒤바꾼 순간이었죠. 이전까지는 모든 타석이 항상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했기 때문에 몸이 말을 안 들으면 바늘로 찔러서라도 이 자리를 사수하고 싶은 절박함이 컸던 게 사실이었어요” 결국 최익성은 1997년 야구 인생 최고의 시즌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22홈런 33도루를 기록하며 ‘20-20클럽’에 가입했다. 시즌 타율의 경우 3할(0.296)을 아쉽게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당시 ‘8개 구단 최하위 리드오프’라는 냉혹한 평가를 보란 듯이 뒤집을 수 있는 활약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한 포털 사이트에 ‘최익성’을 검색했을 때 ‘97최익성’이 연관검색어로 따라올 만큼 그 해의 최익성의 강렬함은 아직까지도 많은 야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개막전부터 한 시즌을 확실히 보장 받고 뛴 것은 그 때(1997년)가 처음이었어요. 항상 살얼음판, 외나무줄에서 목숨을 걸어왔는데 그러한 팀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어서 정말 죽기 살기로 뛰었습니다. 냉정히 판단하면 정말 오랜 세월 준비를 많이 했지만 기회가 주어진 것이 맞아떨어졌다고 봐요. 백인천 감독님과 같이 크신 분을 만났고, 편한 배려 속에 부족함을 채워나간 것이 결과적으로는 대폭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익성은 그 해가 본인의 야구 인생 마지막 풀타임 시즌이 될 지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 형형색색 유니폼, 공통적으로 남긴 얼룩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가 필자 앞에 무지갯빛 색상을 얼추 채웠다고 봐도 될 만큼 수많은 유니폼들을 양손 가득 안고 나타났다. 물론 지금은 웃으며 말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국내에서 본인보다 더 많은 유니폼을 보유하고 있는 프로 야구선수가 있는 지를 묻자 “아직까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곧 10개 구단 체제가 되니까 그때는 모르죠. 어쨌든 현재까지는 제가 독보적인 존재에요”라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당시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최익성은 1998시즌 이후 노장진과의 트레이드를 시작으로 한화-LG-해태(KIA)-현대-삼성-SK 등 총 6번이나 팀을 옮겨 다니는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이색 기록을 세웠다. “상대팀의 사장님이 저를 좋아해주셔서 막무가내로 트레이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 소속팀 감독님께서는 포지션 중복 이유로 이를 만류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영문도 모른 채 미운 오리 새끼가 된 적도 있었죠. 또 선수협 주동으로 트레이드가 되어보기도 했고, 저희가 만든 선수협의 첫 번째 보상선수로서 팀을 옮기는 아이러니한 운명도 겪어봤습니다. 이 밖에 소위 짤리기도 해봤고, 스스로 방출시켜달라는 요구도 해봤네요. 어떤 관점에서는 프로야구계에 역사를 쓴 것 같아요” 한화로 처음 팀을 옮겼을 때에는 삼성을 너무나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만큼 괴로웠다. LG로 떠날 때에는 선수협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던 것도 사실이다. 해태에서 보상 선수로 지명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에는 수술 직후 붕대를 풀기도 전인 시점이었다. 한없이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이후 현대 유니폼을 입을 때에는 이전 성적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었고, 현대 유니폼을 벗을 때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를 예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처음으로 통보받은 방출 소식에 그 해 겨울이 유독 춥고 허전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돌고 돌아 친정팀 삼성으로 두 번째 발길을 옮겼을 때 느꼈던 설렘이나 장밋빛 꿈을 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그는 또다시 자기 발로 팀을 떠나는 선택을 내렸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그저 착잡하고 막막했지만 결국에는 본인이 내린 결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SK와의 이별 역시 아름답지는 못했다. 보류선수 명단 제출 마감일을 단 하루 앞두고 방출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선수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더 큰 무대로 진출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이러한 시련을 극복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처럼 최익성은 팀을 옮길 때마다 혹은 떠날 때마다 사연도 파란만장했고, 그에 대한 감정 역시 매번 조금씩은 달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허탈했다는 점이에요. ‘시원 섭섭’이라는 단어를 그 때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싫어했던 팀도 막상 떠나려고 보따리를 싸니까 마음이 짠했어요. 여러 번 겪어본 일에 마음이 강해지고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짧은 순간의 쓸쓸함이나 공허함의 감각만큼은 쉽게 무뎌지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그의 유니폼들은 형형색색 제 각기 다른 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현역 시절 그가 흘린 땀방울과 때묻은 얼룩들은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공통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바로 그가 지금까지 설명했던 이적 때마다의 서로 다른, 혹은 공통된 감정들이 바로 이 유니폼 위에 함축적으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 최익성이 말하는 성공의 의미 하지만 최익성은 그러한 떠돌이 야구 인생에 결코 후회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특히 여러 팀을 거치면서 매번 새로운 적응을 해야 했던 그는 타격 폼을 놓고 코칭스태프와도 잦은 마찰을 빚으며 눈 밖에 나는 모습을 스스로 자초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익성은 자기 고집을 끝까지 안고 간 것에 대한 선택에 일말의 후회도 없음을 강조했다. “저는 만약 고집이 없었다면 프로야구 선수자체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연습생으로 시작해 프로에 10년 넘게 서있을 때까지도 저는 타협을 하면 나 자체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프로선수였습니다. 지독한 고집과 뚝심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 인정받으며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단지 저를 처음 본 코치가 곧장 폼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하면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남에게 이전까지 걸어왔던 길을 한 순간에 바꾸라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익성은 후회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이 걸어온 ‘저니맨’으로서의 인생 역시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프로 문턱조차 밟지 못한 채 꿈을 접은 선수들이 많습니다. 프로생활을 이만큼이나 했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MVP에 오르고 연봉을 10억씩 받아야 성공일까요? 10년 이상 프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며, 우승을 누려본 사람은, 또 20-20 클럽에 가입해 본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러한 것들을 성공이라 말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성공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그는 여러 차례의 반문과 함께 바로 세상의 비뚤어진 시선이야말로 한 개인의 성공을 무참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존재일 수 있음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저는 성공한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들과 제 시각이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밑에 있는 아이들의 시각도 그렇게 바꿔주고 싶어요. 저는 야구 선수 이후에 탤런트도 해보고, 해설도 해봤고, 회사의 대표도 하고 있습니다. 목표한 것을 이뤄내며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한다면 그 기준에서 저는 완벽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 저니맨에게 묻다 최익성은 기존의 팀을 떠날 때마다 허탈한 감정을 느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새로운 팀에 합류하는 순간 부푼 기대감이 함께 찾아왔던 사실도 애써 숨기지 않았다. 종목과 방식이 다를 수는 있으나 일반 사람들이 직장을 옮기는 것과 결국 원리는 같다는 것이다. 때문에 각 팀마다 행복했던 기억들도 남아있다. 고향과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생활해왔던 삼성은 현재까지도 기억해주는 팬들이 가장 많은 팀이기도 하다. 또한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 한화, 수많은 관중 앞에서 신바람 야구를 선보인 LG, 왕조의 마지막 발걸음과 새로운 시작을 함께했던 해태와 KIA, 본인이 원했던 자율적 야구의 꿈을 이룬 현대, 한국무대 마지막을 함께하면서 근 몇 년 중 홈런을 가장 많이 터뜨렸던 SK 등 모든 팀들마다 남다른 의미가 서려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현역 당시 존재했던 팀 중에서 ‘유이’하게 유니폼을 입어보지 못했던 롯데와 두산 역시 기회가 닿았다면 가보고 싶은 구단이었다며 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최익성에게 가장 많은 애착을 남긴 구단은 과연 어디일까? 1-2년의 짧은 시간을 보냈던 다른 팀들과 달리 총 6년을 함께한 삼성에 다소 무게를 두는 듯했지만 결국 본인이 야구 그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에 모든 팀들이 다 비슷하다며 그가 다시 한 번 묘한 웃음을 지었다. 실제 그는 편파중계를 맡았던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삼성측 해설 외에도 한화, LG 등 여러 구단의 편에 선 적이 있었고, 제안 자체가 들어왔을 때 모든 팀을 다 맡을 수 있다는 ‘저니맨’다운 답변을 내놓았음을 덧붙여 설명했다. 다음으로 ‘저니맨’의 반대 의미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생각을 그에게 물었다.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많은 질문을 받았던 것 중 하나가 ‘삼성에서 쭉 성공했다면?’이었죠. 한 팀에서 FA 대박은 물론 은퇴식과 지도자의 길까지 걷게 된 김한수 코치의 사례에 대한 생각도 많이들 물어보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 평소에 깊은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상황 속에서 축하할 일에 대해서는 기꺼이 축하해주는 정도라고 할까요?” 최익성은 오히려 한 팀에서 꾸준히 뛰었던 선수들 중에서도 본인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을 이어갔다. “항상 남의 길이 더 행복해 보일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들은 보통 한 길 밖에 못 보는데 저는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으니까 이런 점을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먼 훗날에는 저를 가장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네요. 프랜차이즈 스타는 많이 있지만 6개 구단을 가본 대표적 저니맨은 저 혼자니까요. 하하하”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한 때 프로야구를 대표했던 저니맨이 이제는 세상의 수많은 저니맨들의 대표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를 말이다. “저니맨이 제게 준 가르침과 축복이 있습니다.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여러 저니맨들을 발견했어요. 한편으로는 손가락질 받아야 할 자와 박수를 받아야 할 자들이 뒤바뀌어버린 세상에 대한 한탄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제가 ‘대표적 저니맨 선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저니맨들의 대표가 되어보자’, ‘내가 가만히 있으면 세상 누구도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고 대변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어요. 세상이 저에게 저니맨이라는 호칭을 붙여줬기 때문에 이제는 제가 저니맨들을 대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지요. 제가 겪었던 아픔과 이를 극복했던 노하우를 다른 저니맨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요. ‘저니맨이라는 단어는 두렵지 않다’, ‘원하는 바를 해나가는 것에 있어 결국에는 두려움이 없는 자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저는 저니맨도 얼마든지 황금으로 뒤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그것은 단지 한 끗 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2편에서 계속]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yuksamo@starnnews.com박대웅 기자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starnnews.com
2013-08-31 08:4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