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은 우리나라에서 자연 지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규모가 큰 하천이다. 한반도 남북의 경계대를 이루고 있음이 큰 영향이다. 즉 한강과 만나는 하류 부분은 그대로 하천 DMZ를 이루고 있고, 중하류는 남한에 속하고 있으면서 군사보호지역을 이루는 분단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중류 이상부터는 북한에 들어 있다. 북한의 임진강 상류 댐에서의 무단 방류를 막을 목적으로 군남댐이 건설되고, 상수도 취수원, 전망대가 만들어져 방문객을 맞이한다. 임진강은 자연하천의 원형을 잘 볼 수 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차단됐던 접근로들이 풀리면서 새로운 도로와 관광시설들이 들어서고 있다. 임진강은 한반도의 중앙 지역으로 선사시대부터 마을을 이루었다. 1세기 전후해 제철 유적도 발굴됐다. 임진강 군남댐 건설예정지에서 삼국시대 주거지 20기, 철을 정련하는 단야로(鍛冶爐), 송풍관(送風管) 등 철기 생산 관련 유물과 철 찌꺼기도 발견됐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임진강은 지형적으로 늘 한반도의 남북을 경계해왔다. 삼국시대의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대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세상을 뜨면서 과거 살던 경주로 가고자 했으나, 고려 태조가 이를 막아 결국 건너지 못하고 임진강 북안에 묻혔다. 조선은 임진강을 건너 한양에 도읍을 옮겼다. 고려 왕건의 후손들이 고려의 왕들을 모신 숭의전도 임진강을 넘지 못하고 북안에 있다. 임진왜란에서 선조는 몽진길에 한양을 벗어나 임진강을 넘으면서 조금 안심을 했다. 현재도 임진강의 중하류는 남북을 가르고 있다. 임진강은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통해 접경지를 이루면서 강의 북안과 남안에 많은 다양한 모습의 성채들을 남겨놓고 있다. 임진강(臨津江)은 ‘나루를 만나다’라는 이름답게 나루터가 많다. 현재 발간되고 있는 국가 지도에서도 나루의 이름들이 표시되고 있다. 하류에서부터 길오목나루(장단면), 낙하나루(낙하리), 사목기나루(반구정), 수내나루(군내면), 임진나루(화석정), 저우니나루, 아포나루(파평면), 고랑포(장남면), 두지나루(현재 황포돛배 운행 관광지) 등이다. 그중에서 고랑포는 가장 큰 나루터로 장터가 들어설 정도였고, 함경도와 강원도의 물산이 육로로 고랑포로 내려와서 임진강을 통해 한양으로 운반됐다. 말하자면 임진강 하구에서 가장 멀리 올라가는 곳이 고랑포 나루다.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무장공비 31명도 고랑포의 얕은 여울목을 건넜다. 신생대 말기 내륙 철원, 평강에서 용솟아 흐른 용암류가 임진강을 타고 남하해 하천변을 따라 주상절리를 이루고 있다. 용암대지와 임진강이 결합돼 만들어진 주상절리는 절경이거니와 군사적으로는 경계를 서기가 좋아 성채가 많이 만들어졌다. 더욱이 갈수기에 군사들이 나룻배나 교량 없이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는 곳에는 군사 이동이 유리하므로 또한 성채가 만들어졌다. 특히 연천의 호로고루성과 당포성은 주상절리를 이용한 성채로 여울 군사이동 입지를 동시에 잘 보여주는 곳이다. 황희 선생의 반구정과 율곡 선생의 화석정, 두 정자가 관람거리다. 반구정(伴鷗亭)은 갈매기와 함께한다는 뜻인데, 임진강 하류 가까이에 있다. 서해의 밀물 때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면서 갈매기도 함께 온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 개펄이 강가에 쌓여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황희 선생이 지은 ‘관풍루시(觀風樓詩)’를 보면 반구정의 풍광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원한 바람과 고목, 시원하게 트인 임진 하류의 모습이다. “마루는 높아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는 넓어 바람이 시원하다/ 고목 그림자 땅 위에 드리웠고/ 먼 봉우리 푸름은 하늘을 쓴 듯…” 화석정(花石亭)에는 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었다는 시(登坡州花石亭詩)가 남아 있는데, 바라보이는 임진강의 모습을 시에 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항복 선생이 모시고 간 선조가 어두운 밤에 임진강을 건너면서 화석정에 불을 질러 밤을 밝혔다고 한다. 이를 예견한 듯, 율곡은 평소에 아래 사람들에게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잘 발라 두라고 일렀다는 말이 전해온다. 화석정은 고려 말기 대학자인 야은 길재 선생이 살던 곳으로 율곡의 증조부가 물려받았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화석정이 있는 율곡마을은 율곡 선생이 해주의 석담과 함께 만년을 보낸 곳이다. 파주는 파평윤씨의 본관으로도 유명하다. 파평면 눌노리다. 고려 때 여진을 평정한 윤관 장군이 파평윤씨이고, 그 후손들인 조선 성종 때 윤호는 우의정, 윤필상은 영의정에 올랐다. 을사사화의 윤 임과 윤원형도 파평윤씨다. 파평용연(坡平龍淵)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라고 하며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의 탄생설화가 깃들어 있다. 이 연못에는 잉어가 있고, 파평윤씨들은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임진강의 주요 지명들을 보면 하류에서 한강과 합류 지점에 오두성(烏豆城·지금의 오두산 통일전망대), 나루터로는 임진강변에 탄포, 문산포, 정자포, 저포, 고랑리, 여의진, 유연진, 시욱진 등이 있다. 대탄(大灘)과 상류에 직탄(直灘)이 있다. 임진강의 하운은 하구에서 상류로 문산포와 고랑포를 지나 약 90㎞까지 올라갔다. 고랑포를 지나 상류로 올라갈 때는 여울이 많아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강의 구조를 잘 살펴서 지나 지류 한탄강변의 전곡까지 배가 다녔다. 현재는 소공원과 역사기념관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고랑포 나루터는 안전상 철문으로 닫혀있다. 고랑포는 대규모의 시장과 마을이 6·25 전까지 번창했다. 서해의 조기, 새우젓, 소금 등이 서해가 만조가 되었을 때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고랑포에까지 왔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명산물인 장단콩, 땔감, 곡물 등과 교역했다. 육지와 하운 교통의 요지로서 주변 지역인 파주, 연천, 장단 등의 곡물들의 집산지였다. 특히 장단콩의 집산지로 음력 9~10월에 시작해 강이 결빙될 때까지 콩 매매가 이뤄졌다. 현재 장단콩이 다시 살아나서 파주와 문산 여러 곳에 장단콩 두부집들이 성업 중이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부근에 장단콩마을이 조성돼 있다. 함경도와 동해의 물산이 추가령 고개를 넘어 고랑포까지 와서 배에 실려 서해로 나가기도 했다. 고랑포에 인접해 경순왕릉과 숭의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다들 역사적 상황으로 임진강을 넘어 남하하지 못했다. 함께 인근의 용암대지와 주상절리도 임진강의 자연 경관의 한 모습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5-03-18 13:18:09전북 익산(益山)은 서울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여산은 그 입구다. 현재 익산은 행정구역으로 익산시이며 과거 오랫동안 익산은 익산군과 이리시로 분리돼 있었다. 1906년 익산군, 1931년 이리읍, 1949년 이리시, 그리고 1995년 통합으로 익산시가 되었다. 익산시의 읍면 행정구역으로 익산시 외 금마면, 여산면, 왕궁면, 황등면, 함열읍, 함라면 등이 있다. 전체 인구는 약 30만명으로 전북에서 전주 다음이며 군산보다 인구가 많다. 전북은 지형적으로 동쪽의 소백산지(무주·진안·장수), 서쪽의 호남평야(전주·이리·군산), 그리고 그 중간에 중산간지(임실·순창·남원)로 이루어진다. 익산은 금강 북쪽의 논산평야와 익산 남쪽의 호남평야와 연결된다. 익산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장항선) 등의 철도가 교차하는 호남 최대의 교통요지가 되었다. 익산의 지리적 위치, 지정학적 장소성의 영향으로 백제와 고려시대의 불교, 근현대의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의 터전으로서 종교도시로서의 익산의 단면을 본다. 익산은 고대사에서 백제 이전의 마한과 청동기, 석기시대 문화유적도 다수 보유한다. 호남의 입구 여산은 특히 현대시조의 거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으로 유명하다. 이병기 선생은 학교 교육의 중요성도 잘 인식하면서 전북의 여러 초중등 학교와 전국의 유수의 학교들 교가를 작사했다. 경남중, 경기중, 경복중, 경북중 등 당시 전국 명문들도 포함된다. 가람문학관에는 가람선생이 작사한 모든 교가를 다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문학관의 한국 학교 교육에 대한 큰 기여를 보여준다. 전북 익산시는 1995년 행정개편으로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돼 이루어졌다. 고조선시대에는 건마국(乾馬國)이었고, 위만(衛滿)에 쫓긴 기자(箕子)의 준왕(準王)이 익산으로 내려오면서 마한국(馬韓國)이 됐다. 현재의 금마를 중심으로 백제시대에는 금마저(金馬渚)라 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금마군으로 바뀌었다. 1344년 고려시대 원나라 순제의 왕후 기황후 친정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높여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익산으로 변경됐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는 지리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의 수도 사비와 버금가는 특별수도로 여겼음을 뜻한다. 왕궁 터와 미륵사지 터, 많은 산성들이 그 의미를 더한다. 백제 무왕의 새로운 통치 이념을 위한 철저한 계획 왕도(王都)로 개발했다고 본다. 백제가 더 존속했다면 아마도 수도를 익산 금마로 이전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도 왕도로 손색없는 많은 시설과 유물이 나오고 있어 백제와 마한의 역사를 살펴준다. 역사적으로 마한과 백제, 부여로 연결되며 고려의 역사유적도 더러 살필 수 있다. 마한은 진한(경북), 변한(경남)과 함께 삼한으로 불린다. 마한은 기원전에서 대략 기원후 400년까지 경기, 충청, 전라도에 존속한 정치체제였다. 익산은 역대 왕조에서 수도가 된 일이 없는 곳임에도 한국의 4대 고도(古都)로 공식 인정되었다. 4대 고도는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익산이다. 고도는 과거의 왕궁, 왕성, 왕릉, 왕사(王寺)가 있는 도읍이다. 익산은 백제 무왕과 관련된 미륵사와 왕궁 유적, 쌍릉 등이 있다. 4대 고도의 보존과 육성을 위해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2017년 입법예고되고 2020년 5월 정식으로 시행됐다. 이에 힘입어 익산에도 ‘국립익산박물관’이 설립됐다. 지형 및 지질에 있어 익산은 화강암 지대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강암으로 1억5000만년전 중생대 쥬라기, 백악기 정도의 질이 좋고 아름다운 화강암이다. 현재 채석되고 있는 한국의 화강암 생산에서 가장 높은 품질을 보여준다. 황등면에 국내 최대 화강암 채석장이 있고 암석의 질도 매우 높다. 익산의 발전은 자연 및 인문지리의 연관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산지의 지역 특성에 대한 영향, 호남평야의 개간과 수리시설, 저수지 시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근대적 개발과 현재의 상황 등으로 지역의 문화와 경제가 잘 나타난다. 고대와 중세의 도로, 하천, 해안 교통과 근현대의 철도와 신작로 건설 등이 익산의 역사지리와 현재의 익산 지리에 반영되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익산, 여산, 함열, 용안 등이 통합돼 현재의 익산이 됐다. 일제강점기 솜리 마을에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잇는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익산의 중심은 금마에서 솜리로 옮겨졌다. 솜리(혹은 솝리)는 ‘깊은 속 마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데 그대로 한자어 이리(裡里)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이(裡)는 한자 표리(表裏)에서 속을 뜻하는 이(裏)와 같은 뜻이다. 이리라는 지명은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서와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솜리가 철도 요지가 되고, 이를 배경으로 금마에 있던 익산 행정 중심을 솜리로 옮기면서 1931년 전격적으로 익산을 한자 지명 이리로 바꾼 것이다. 이리시가 다시 익산시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이다. 그럼에도 익산에는 이리초, 이리중, 이리고, 이리공고 등 이리 명칭 학교들이 많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분리됐다가 현재는 익산시로 변경됐다. 여전히 익산의 경제와 행정중심지는 과거 이리에 있다. 주요 문화유적은 청동기 문화와 초기 철기 문화 유적과 함께 마한과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가 모두 함께한다. 그중에서도 마한과 백제 유적이 대표적이다. 익산은 북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의 지맥이 경계가 되고 서쪽으로는 호남평야 군산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부여군과 논산시, 동쪽으로는 완주군, 남쪽으로는 김제시와 전주시, 서쪽으로는 군산시와 행정 경계를 이룬다. 호남평야 상으로 보면 평야의 북동부에 해당하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경제개발에 따른 대규모 평야 개척은 익산에서는 만경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사라진 황등제는 당시 익산 농업의 큰 힘이었다. 익산역은 철도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의 교차역으로서 지역의 다양한 농업 물산의 집산지 역할을 해왔다. 사실 평야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논산평야, 익산평야, 호남평야, 나주평야가 연결돼 있다. 익산은 지형, 물산, 장소와 위치, 역사와 문화 등에서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2-03 16:29:20황토(黃土)는 우리나라 거의 전역의 표토를 이루는 오랜 풍화의 산물인 토양이다. 황토는 우리에게 친밀한 토양이지만 학술적으로는 '적색토'로 부른다. 엷은 노랑에서 아주 붉은색까지 다양하다. 남쪽과 서쪽으로 갈수록 잘 발달하고 있다. 그리하여 황토는 거의 한국, 한민족의 상징물 중 하나가 되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붉은 산-어떤 의사의 수기'는 고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소설이다. 만주 조선족 마을에서 불한당에 망나니로 살던 정익호(별명 삵)가 마지막 의로운 행동을 하고 죽어가면서 "저기 붉은 산이…그리고 흰 옷이…"라는 장면이 나온다. 붉은 산은 민둥산이 되어 황토가 드러난 식민지 조국을 상징했다. 그러나 황토밭에 핀 봄의 청보리는 또렷한 색채의 대비로 인하여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 일부를 들여다본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가는 길…" '문둥이 시인'으로 불행한 삶을 시로 승화시킨 한하운의 시는 아름답고, 그냥 슬프다. 무슨 시의 해석이 필요할까. 북에서 멀리 남으로 소록도로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길을 걸으며 눈에는 끝없이 펼쳐진 산과 들의 황토가 들어온다. 우리나라는 황토의 나라다. 김동리 단편소설 '황토기' 바로 첫머리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다. 제목에도 황토가 들어간다. 왜 황토인가를 전설과 신화로 풀어 쓰면서 소설을 시작한다. "솔개재에서 금오산 쪽으로 뻗쳐 내리는 두 산맥이다. 거기 황토골이란 조그만 골짝 하나를 낳은 것뿐으로, 상룡(傷龍), 또는 쌍룡(雙龍)의 전설을 이룬 그 지리적 결구(地理的 結句)는 여기서 끝을 맺는 것이다. 상룡설(다친 용에 대한 전설), 여의주를 잃은 한 쌍의 용이 슬픔에 못 이겨 서로 물어뜯어 피를 흘리니, 이 피에서 황토골이 생기니라. 절맥설도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어느 장사가 동국의 장사가 난다면 감히 중원을 범할 것이라 하여 이에 혈을 지르니, 이 산골에 석 달 열흘 동안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이 일대가 황토 지대로 변하니라." 김동리의 소설은 우리의 토속적 신앙으로 풍수지리설을 들어서 황토골을 해석하고 있으며, 그 의미가 주인공들의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다. 황토가 우리 국토를 의미하면서 일제강점기 민족의 암울함을 황토의 운명으로 그리고 있다. 위에서 보는 소설과 시와 역사에서 황토는 색채적으로, 그리고 숲 옷을 벗어버린 암울한 국토로 그려지고 있다. 황토현(황토재)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승리한 곳으로 민중항거의 역사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붉은색을 띠는 적색토는 호남 지방 낮은 구릉지의 풍화층에서 잘 나타나지만 사실 우리나라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물론 서쪽으로 갈수록, 그리고 남쪽으로 갈수록 더 많이 분포한다. 황토는 대략 1~1.5m 두께의 토양층으로 짙은 노랑 혹은 붉은색을 띠는, 기반암의 풍화 토양이다. 남한에서는 해발 150m 이하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를 덮고 있는 표층의 토양층이다. 그 아래에서도 기반암은 일반적으로 두꺼운 풍화층을 형성하고 있다. 암석의 구성 입자가 미립질인 편마암이 풍화하여 점토질 성분이 많다. 그리하여 비가 오면 매우 질어지는(걸쭉해지는) 특성을 가진다. 우리나라 지명에서 진골은 이러한 질게 된 지역에서 그 어원이 나오고 있다. 참고로 중국 서부의 황토는 바람에 날려와 쌓인 토양층을 말한다. 붉은색이 강한 경우에는 풍화와 침식에서 남은 산화된 금속성분(철, 알루미늄, 망간 등)의 색깔을 반영한 것이다. 적색토는 지금과 다른 환경, 말하자면 지금보다 기온이 높고 습도도 높은, 말하자면 아열대기후의 영향하에 있을 때 형성된 고토양(古土壤·paleosol), 즉 지금의 환경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화석화된 과거의 토양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신생대 3기, 즉 몇백만년(대략 200만년 전후 혹은 그 이전)까지 거슬러 가는 고토양으로 보는 이도 있다. 아무래도 기반암(bedrock)이 화강암이면 모래질이 많고, 편마암이면 점토질이 많이 생산된다. 붉은 토양은 화강암과 편마암 외에 석회암에서도 나타나는데 기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철원, 창녕과 같은 습지대 부근의 점토층은 회색, 청회색, 백색을 띤다. 그것은 습지에서 물에 잠기므로 대기의 산소가 차단되어 산화를 못하고 환원 환경에 놓이므로 붉은색보다는 창백한 색을 띠게 된다. 철원에서는 표면을 덮고 있는 청회색의 점토층을 '청갈매'라고 부르고, 쌀농사에 좋은 토양으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이들도 개발에 의해 대기 중에 드러나면 산소와 결합하여 빨리 붉은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우리의 황토는 중요한 국토자원이다. 농업, 임업, 지하수 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일부 황토가 가진 다양한 광물질(미네랄)들의 다양한 기능으로 황톳길, 황토방, 황토찜질, 황토옷, 황토집, 황토팩, 황토매트 등 다양한 용도로 상업화돼 왔다. 국내에서 유명한 대전 계족산 황톳길 바닥 황토는 매년 전북 황토층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황토도 유한한 자원이며 표층을 형성하므로 황토를 훼손하면 표토 유실과 산사태 등을 유발한다. 황토층 위에서 농경과 취락에 의해 중금속과 유기물의 오염 등이 문제가 되었다. 높은 인구밀도와 엄청난 토지 이용의 결과다. 상업적으로 오염이 안 된 황토를 찾기 위해 더 깊게 토양층을 파면서 훼손도 심해진다. 황토는 삼림과 식생을 지탱하고 농업을 유지하고 지하수를 함양하면서 걸러주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자원이며, 자산이다. 우리 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황토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1-25 18:04:37한국 감자의 원조는 당연히 강원도다. 감자를 한자말로 북저(北藷), 토감저(土甘藷), 양저(洋藷), 지저(地藷)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북쪽에서 왔다. 남미 안데스 산록이 원산지인데, 16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식민지배를 하던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 근대사에서 아일랜드 기근을 막는 데 기여하고, 독일의 식량 문제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885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기근을 막은 감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시 유럽 인구 증가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감자는 아시아에는 아마도 독일을 통해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본다. 원산지 안데스 산록의 감자는 냉동과 건조를 몇 년간 반복한 추뇨(chuno)라고 하며 지금도 주민들의 주식이 되고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1824년에 관북으로 들어왔다고 적고 있다. 한국인들은 흉년에 감자로 자주 기근을 넘겼다. 감자는 산지 지형과 기후의 특성을 가진 강원도의 많은 지역들에서 주식이었고, 남쪽 경상도에서도 가뭄에 구황작물 역할을 했다. 필자가 어릴 때 살던 경남 함안에서도 쌀농사가 시원치 않았을 때 감자 수확철에 밥에 감자를 섞어 넣어 쌀을 절약했다. 쌀과 보리 외에 끼니를 잇는 데 고구마, 옥수수와 함께 감자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감자를 주로 심는 강원도 산간 농민들을 '감자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박하고 부지런하다는 느낌과 함께 힘들게 농사짓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1960년대 화전민의 대표 작물과 식량도 옥수수와 함께 감자였다. 감자는 농사짓기에 손이 덜 가는 것으로 소중했다. 조선농회보(朝鮮農會報) 1912년 7월호에 의하면 1879년 선교사가 감자를 들여왔고, 1883년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1920년경에는 강원도 난곡농장(蘭谷農場)에서 독일산 신품종 감자를 도입, 난곡 1·2·3호라는 신품종을 한국에서 개발했다. 강원도 난곡농장은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에 있었던 일본인 농장이다. 정확하게는 1920년 설립된 난곡기계농장이다. 이 농장에서 독일 품종의 감자와 독일산 기계를 들여와 해발 650m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기계농에 의해 감자를 재배했다. 조선시대 강원도 북부 회양은 한양에서 출발해 철원, 평강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가는 길목의 교통 요충지였다. 회양에서 북쪽으로 그 유명한 고개인 철령을 넘으면 안변과 원산을 거쳐서 함흥으로 그리고 백두산에 이른다. 또 동남쪽으로 가면 금강산에 이른다. 당시 철령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철원에서 원산으로 직선으로 연결되는 추가령을 통해 지름길 도로와 철도가 놓이면서 더 이상 철령이 이용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으로는 여전했다. 난곡농장은 회양군 난곡면 산지 고원에 2만정보의 방대한 면적에 자리 잡았다. 주체는 일본 아이치산업주식회사이고, 독일인 5명도 참가했다. 이들이 참가하게 된 역사적 경위가 매우 이색적이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중국의 독일 조차지였던 청도(靑島)에 있던 독일인 5000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은 이때 뒤늦게 잠시 연합군에 참전했다고 한다. 청도는 지금까지도 청도맥주로 유명하듯이 일찍이 독일의 맥주 제조와 기계공업이 들어왔다. 이들 중 나고야 수용소에 있던 일부 독일인이 한국의 회양군 난곡면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인들은 포로이지만 독일인답게 기계에 능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강한 체력을 가졌다고 한다. 난곡기계농장의 특징은 대규모이고, 기계농업이고, 유축밭 농업(有蓄田作)이었다. 즉 곡물과 축산을 연계해 생산·가공·판매까지 일관된 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물론 토지개량, 품종개량 등 연구에도 투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영이 여의치 않아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오랜 화전농으로 지력이 쇠하였고, 기계농이라 하지만 자갈이 워낙 많아 돌을 골라내는 작업에 애를 먹었다. 그러나 결국 난곡 1·2·3호라는 감자 품종이 개발되면서 당시 금강산과 농장 인근에 있던 이왕조목마장, 난곡농장이 3대 명승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는 일본인 학자가 당시 기록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들이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성과 등에 대해 기록을 많이 남겼다. '조선의 풍수' '조선의 취락' '조선의 임수' 등 자연환경과 함께 산업개발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소위 한반도 수탈정책은 '미곡증산(米穀增産)' '남면북양(南綿北羊)'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 등의 명칭을 남긴다. 이를 위해 신작로, 철도, 저수지, 광산 등이 대규모로 건설되고 개간된다. 흥남비료, 무산철광 등이 대표적이다. 농업개간에는 동양척식이 대표적인 회사였다. 회양에서는 감자 재배와 축산업이 성행했고, 낙농업과 식품공업까지 진출했다. 인근의 북쪽 안변에는 양을 키우는 목양장인 세포목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도 설립됐다. 안변은 원산에서도 가깝지만, 서울까지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경원선이 거의 직선으로 나 있었다. 현재 강원도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는 감자 품종은 1930년대 일본 북해도에서 전래된 남작(男爵)을 비롯해 돼지감자, 수미감자, 도원감자, 러셋감자 등이다. 러셋감자는 현재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재배하는 품종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1980년대 강원도 농가의 소득증대에 기여한 것은 씨감자 덕분이라 한다. 감자씨를 심어 최종 감자 수확까지는 5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씨감자는 1년이라는 빠른 생산과 높은 생산성과 함께 병충해에도 강하다. 당시 씨감자는 원예조합이 사들여 전국의 감자 재배농가에 공급했다. 1994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세워진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시험장은 2004년 고령지농업연구소로 개편되었고 2008년 고령지농업연구센터, 2015년 다시 고령지농업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연구소에서는 개발 육종 감자와 유망 품종을 선발, 전국 여러 지역에서 시험재배한 뒤 우수 품종을 전국에 보급하는 업무를 했다. 감자 외에도 고랭지에서 요구되는 배추, 무, 채소 등 작물들도 연구한다. 1824년 시도된 한반도 감자 재배의 역사는 올해로 200주년을 맞았다. 강원도 씨감자는 K감자로 수출까지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감자는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서면서 다양한 맛과 식품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0-28 18:05:11한국 감자의 원조는 당연히 강원도다. 감자를 한자말로 북저(北藷), 토감저(土甘藷), 양저(洋藷), 지저(地藷)라고 하는 것을 보면 북쪽에서 왔다. 남미 안데스 산록이 원산지인데, 16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식민 지배를 하던 유럽으로 들어가서, 유럽 근대사에서 아일랜드 기근을 막는데 기여하고, 독일의 식량에도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885년 반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기근을 막은 감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시 유럽 인구 증가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감자는 아시아에는 아마도 독일을 통해 중국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본다. 원산지 안데스 산록의 감자는 냉동과 건조를 몇 년간 반복한 츄뇨(chuno)라 하며 지금도 주민들의 주식이 되고 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1824년에 관북으로 들어왔다고 적고 있다. 한국인들은 흉년에 감자로 자주 기근을 넘겼다. 감자는 산지 지형과 기후의 특성을 가진 강원도의 많은 지역들에서 주식이었고, 남쪽 경상도에서도 가뭄에 구황 작물 역할을 했다. 필자가 어릴 때 살던 경남 함안에서도 쌀농사가 시원치 않았을 때, 감자 수확철에 밥에 감자를 섞어 넣어 쌀을 절약했다. 쌀과 보리 외에 끼니를 이어준 것이 고구마, 옥수수와 함께 감자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감자를 주로 심는 강원도 산간 농민들을 ‘감자 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박하고 부지런하다는 느낌과 함께 힘들게 농사짓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1960년대 화전민들의 대표 작물과 식량도 옥수수와 함께 감자였다. 감자는 농사짓기에 손이 덜 가는 것으로 소중했다. 조선농회보(朝鮮農會報) 1912년 7월호에 의하면, 1879년 선교사가 감자를 들여왔고 1883년에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다. 1920년경에는 강원도 난곡농장(蘭谷農場)에서 독일산 신품종 감자를 도입해 난곡1·2·3호라는 신품종을 한국에서 개발했다. 강원도 난곡농장’은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에 있었던 일본인 농장이었다. 정확하게는 1920년 설립된 ‘난곡기계농장’이다. 이 농장에서 독일 품종의 감자와 독일산 기계를 들여와 해발 650m의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기계농에 의해 감자를 재배했다. 조선시대 강원도 북부 회양은 한양에서 출발해 철원, 평강을 거쳐서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가는 길목의 교통 요충지였다. 회양에서 북쪽으로 그 유명한 고개인 철령을 넘으면 안변과 원산을 거쳐서 함흥으로 그리고 백두산에 이른다. 또 동남쪽으로 가면 금강산에 이른다. 당시 철령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철원에서 원산으로 직선으로 연결되는 추가령을 통해 지름길 도로와 철도가 놓이면서 더 이상 철령이 이용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그러나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으로는 여전했다. 난곡농장은 회양군 난곡면 산지 고원에 2만 정보의 방대한 면적에 자리 잡았다. 주체는 일본 아이치산업주식회사이고 독일인 5명도 참가했다. 이들이 참가하게 된 역사적 경위가 매우 이색적이다.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를 하면서, 중국의 독일 조차지였던 청도(靑島)에 있던 독일인 5000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은 이때 뒤늦게 잠시 연합군에 참전했다고 한다. 청도는 지금까지도 청도맥주로 유명하듯이 일찍이 독일의 맥주 제조와 기계 공업이 들어왔다. 이들 중 나고야 수용소에 있던 일부 독일인들이 한국의 회양군 난곡면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당시 독일인들은 포로이지만 독일인답게 기계에 능숙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강한 체력으로 가졌다고 한다. ‘난곡기계농장’의 특징은 대규모이고, 기계농업이고, 유축밭 농업(有蓄田作)이었다. 즉 곡물과 축산을 연계해 생산, 가공, 판매까지 일관된 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물론 토지개량, 품종개량 등 연구에도 투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영이 여의치 않아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오랜 화전농으로 지력이 쇠하였고, 기계농이라 하지만 자갈이 워낙 많아 돌을 골라내는 작업에서 애를 먹었다. 그러나 결국 난곡 1·2·3호라는 감자 품종이 개발되면서 당시 금강산과 농장 인근에 있던 이왕조목마장, 난곡농장이 3대 명승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는 일본인 학자가 당시 기록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들이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성과 등에 대해 기록을 많이 남겼다. ‘조선의 풍수’, ‘조선의 취락’, '조선의 임수' 등 자연환경과 함께 산업개발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소위 한반도 수탈 정책은 ‘미곡증산(米穀增産)’, ‘남면북양(南綿北羊)’, ‘남농북공(南農北工)’ 정책 등의 명칭을 남긴다. 이를 위해 신작로, 철도, 저수지, 광산 등이 대규모로 건설되고 개간된다. 흥남비료, 무산철광 등이 대표적이다. 농업개간에는 동양척식이 대표적인 회사였다. 회양에는 감자 재배와 축산업이 성행했고, 낙농업과 식품공업까지 진출했다. 인근의 북쪽 안변에는 양을 키우는 목양장인 세포목장과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도 설립됐다. 안변은 원산에도 가깝지만, 서울까지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경원선이 거의 직선으로 나있었다. 현재 강원도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는 감자 품종은 1930년대 일본 북해도에서 전래된 남작(男爵)을 비롯해 돼지감자, 수미감자, 도원감자, 러셋 감자 등이다. 러셋 감자는 현재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재배하는 품종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1980년대 강원도 농가의 소득 증강에 기여한 것은 씨감자 덕분이라 한다. 감자씨를 심어 최종 감자 수확까지는 5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씨감자는 1년이라는 빠른 생산과 높은 생산성과 함께 병충에도 강하다. 당시 씨감자는 원예조합이 사들여 전국의 감자 재배 농가에 공급했다. 1994년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세워진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시험장은 2004년 고령지농업연구소로 개편되었고, 2008년 고령지농업연구센터, 2015년 다시 고령지농업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연구소에서는 개발 육종 감자와 유망품종을 선발해 전국 여러 지역에서 시험재배한 뒤 우수 품종을 전국에 보급하는 업무를 한다. 감자 외에도 고랭지에서 요구되는 배추, 무, 채소 등 작물들도 연구한다. 1824년에 시도된 한반도 감자 재배의 역사는 올해로 200주년을 맞았다. 강원도 씨감자는 K감자로 수출까지 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 감자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서면서 다양한 맛과 식품으로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0-25 11:18:25한반도에서 고래는 울산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남부 연안에서 많이 나타난다. 울산 장생포를 중심으로 근현대 포경업이 발달한 이유다. 전 세계 고래류는 100종에 이르고 우리나라 연안에는 약 40종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가끔 통발어선의 그물에 걸리기도 하는데 최근 사례는 지난 5월 23일 6.1m에 달하는 밍크고래가 혼획됐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고래 자료는 약 7000년 전 선사시대 울산 대곡천의 반구대 고래 암각화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다음으로 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에서 연오랑이 미역을 따다가 해안에 접근한 바위 등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바위는 고래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1814년)에도 고래가 나온다. 고래는 남해는 물론 서해에서도 나타난다. 자산어보에 의하면 ‘빛깔은 칠흑색이고 비늘이 없다. 길이는 100여자, 200~300자에도 이른다. 일본인들이 화살로 잡다 놓치면, 표류하여 서남해안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1912년 미국의 세계적인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로이 앤드루스는 울산 앞바다에 나타난 귀신고래를 보면서 한국 고래(Korea Grey Whale)로 불렀다. 이 명칭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공식 통용되고 있다. 귀신고래는 태평양 북극해에서 북미연안으로 가는 종이 있는데 아시아 연안에 나가는 고래를 대표해 한국 고래로 명명한 것이다. 한반도 인근, 특히 최고 깊이가 거의 4000m에 이르는 동해는 고래의 회유지로 유명하다. 동해에 많이 출현하는 고래류는 가장 대표적인 귀신고래를 비롯해 참고래, 참돌고래, 밍크고래, 범고래 등이다. 자라면 크기가 15m까지 이르고 수명도 50년에 이른다. 온순하면서도 매우 빠른 동작을 보이고, 가족애가 가장 높은 종이라고 한다. 북극해에 가장 가까이 사는 종으로 캄차카를 거쳐서 동해로 내려온다. 이동 거리는 최대 2만㎞에 이른다. 귀신고래는 다른 고래에 비해 비교적 연안 가까이에 접근한다. 관찰에 따르면 새끼를 낳으면 미역류를 먹는다고도 한다. 한국 산모를 많이 닮고 있다. 현해는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는 바닷길로 고래의 길이기도 하다. 현해는 공식적으로 대한해협으로 명명된다. 이곳에서 자세히 살피면 이동하는 고래를 볼 수 있다. 고래는 태평양에서 상대적으로 좁은 대한해협을 지나서 동해로 들어간다. 동해 바다는 고래들의 좋은 먹이처이고 은신처이고 회유처다. 조선시대 동해를 경해(鯨海), 즉 고래바다로 부르기도 했다. 고래는 매우 지혜로운 포유류 동물로 넓은 바다에 적응해 지구상 최고의 큰 몸체로, 가장 먼 바다를 이동하면서 진화하고 생존해왔다. 시베리아와 북미 대륙에서 매머드가 사라진 것과는 대조가 된다. 고래는 몸체에서 버릴 것 없는 그 모든 것으로 인간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어왔다. 우리나라는 이제 법으로 고래를 잡을 수 없다. 예외적으로 우연히 거물에 걸리거나 좌초, 표류해 생명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만 허용이 된다. 북태평양의 북위 20도까지의 저위도에서는 늘 일정하게 북적도해류가 서쪽으로 흐른다. 난류다. 이 해류가 동아시아 대륙을 접하면서 급격히 동북으로 방향을 틀면서 일본 열도 아래로 흐르는 것이 쿠로시오 해류다. 이 쿠로시오 해류의 일단이 분리돼 대한해협으로 들어오는 것이 동한해류 혹은 동한난류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류라 한다. 적도의 영향으로 역시 난류다. 동한난류는 동해로 들어오면서 동해안 방향과 독도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동해의 표면을 덥힌다. 동해안에서는 거의 두만강까지 올라간다. 동시에 동해의 북쪽에서는 차가운 북한해류가 남으로 내려온다. 거의 울산과 부산까지 내려온다. 당연히 동해에서 난류와 한류가 만난다. 서로 다른 성질의 해류가 만나는 해역을 조경(潮境)수역이라고 한다. 만나는 경계대에서 차가운 물은 대체로 해저 아래로, 더운 물은 해저 위로 오르면서 층서를 이룬다. 이러한 조경 수역은 조류와 어류가 해류를 따라 계절에 맞게 다양하고도 풍부한 해양 생태계를 만들어준다. 해류가 부산 쪽에 와서 먼저 닿는 가덕도는 고기잡이의 보고다. 겨울철 방어, 봄철 숭어, 가을 전어 등이 가덕도 해역에서 잡힌다. 가덕도는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육지에서 공급되는 영양분을 듬뿍 받는다. 이 영양분들은 동한해류를 타고 동해로 유입된다. 남해안의 동쪽 끝과 동해안의 남쪽 끝이 만나는 부산을 중심으로 거제도, 가덕도, 영도, 기장, 울산, 그리고 경북 포항, 영덕 등으로 이어진다. 생물계에는 먹이사슬이 존재해 각 지역과 장소에 적응하는 생태계를 형성한다. 동해 남부의 바다와 연안은 해양생태에서 영양분-조류(미역, 다시마)-소어류(멸치)- 대어류(고등어, 방어)-고래 등으로 이어진다. 부산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남해안의 특산물로 말하면 기장 미역, 대변 멸치, 방어진 방어, 장생포 고래 등이 유명하다. 다들 한국 최고의 특산물이다. 이들이 모여서 사다리꼴 먹이사슬을 이루며 고래가 맨 위에 있다. 장생포는 고래마을로 지역특화하고 있다. 지구 표면의 71%가 바다이고 그 넓은 바다에 적응한 가장 큰 몸체의 생물이 포유류 고래다. 고래가 다니는 바다 면적은 엄청나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세를 가지고 넓은 바다를 이해하고 살아간다. 울산 출신 작가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1956년)은 이러한 동해안의 먹이사슬 구조를 잘 보여준다. 소설에는 기장, 일광 인근의 동해안 남부에서 미역 따기, 멸치떼 잡이, 고등어 원양 출어 등이 함께 나온다. 소설에 보면 멸치 계절이 오면 해안에서 거의 건지다시피한다. 원양 출어는 그 예로 울릉도와 대마도를 말하고 있다. 또한 해녀들의 활동과 함께 해양생태계에 의존하는 마을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언급된 바다 생태계가 잘 유지가 되면 그 최상의 높이에서 고래도 잘 서식한다. 울산 장생포는 고래잡이의 중심기지로 고래문화재단과 고래박물관이 있고, 인근 마을은 고래문화마을로 지정되고 ‘고래로’라는 도로명도 만들어졌다. 매년 9월말이면 울산고래축제가 열린다. 고래를 보호하고 관찰하는 가장 좋은 위치다. 울산 태화강을 거슬러 가면 지류 대곡천 반구대에 경이로운 고래 암각화가 있다. 구석기시대의 작품으로 다양한 고래 모습들을 정교하게 그리고 있다. 세계적인 선사시대 문화유적이다. 동해안 영덕 병곡면 사빈해안의 이름은 ‘고래불’이다. 경북에서 가장 긴 사빈으로 멀리서 고래가 많이 나타난다고 붙인 이름이다. 거제와 통영 사이에도 고래섬이 있다. 울주군 언양읍 다개리는 내륙인데도 고래섬 지명이 있다. 고래 식용과 연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고래는 귀한 존재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09-26 16:03:46교동의 첫 모습은 넓은 평야와 저수지, 그리고 북해안의 길게 늘어선 철책선, 화개산에서 바라 보이는 서해안 여러 섬들, 개펄과 같은 자연경관, 북녘의 연백평야다. 남과 북이 바다를 두고 직접 맞닿는다. 바닷물은 토사와 섞여 흐린 모습이다. 썰물 때는 넓은 갯벌이 깔린다. 밀물 땐 한강으로 물이 올라가고 교동도 남안의 남산포항에서는 파도가 많이 인다. 북녘 바다가 철책이고 휴전선이다. 남북한 모두 인위적인 어떤 통행도 없다. 예성강, 임진강, 한강과 물길로 연결되고 강화도와 석모도가 인접한 비교적 넓게 보이는 섬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6·25를 맞이하면서 멀리 떨어진 섬이 되었다. 이제는 돌아볼 섬이다. 교동도에는 해방과 6·25를 전후해 황해도 연백평야 출신들이 많이 건너와서 연백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대룡시장이 그 현장이다. 교동도는 과거 경기, 충청, 평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이다. 즉, 한양과 강화를 지키는 곳이다. 한양에서 바다로 가장 서쪽으로 나가 있는 섬이다. 그리하여 연산군을 비롯한 조선의 많은 왕과 왕족들이 유배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한양에 인접하고 고립된 곳이니 유배지로 적합했다. 해방과 분단, 6·25의 흔적들이 갈등의 기억과 함께 섬에 산재해 인구와 지역사회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는 남북관계상 어업은 거의 없고 농경이 주업인 도시다. 지리적 위치 관계로 농업, 특히 쌀농사 외 산업이 거의 없다. 지금은 생산이 덜하지만 조선시대부터 화문석 왕골 품질로 교동산이 유명했다. 안동 예안, 황해 연백에 이어 강화 교동산을 다음으로 쳤다. 둘러볼 곳들이 많다. 고구리 고읍성터, 교동읍성, 고구저수지, 연산군 유배지, 화개산 전망대, 교동향교, 남산포항, 사신당, 대룡시장, 망향대 등이다. 모두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난정 저수지, 피난시설, 철망시설, 도로망과 도로시설, 여러 농경시설, 철새 조망들이다. 역사지리 및 지정학 연관 경관들, 농업과 관련된 쌀 중심 농경지가 뚜렷하다. 광대한 논,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저수지, 잘 정비된 농로, 크고 작은 정미소와 창고들, 그리고 농기구와 농기계 수리 시설 등이 있다. 축산업 시설과 일반 산업 시설이 없는 특이한 경관도 함께 살펴볼 만하다. 교동도는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하며 동경 126도, 북위 37도다. 면적은 47.14㎢(대략 서울 송파구 1.4배)로 현재 행정구역은 인천 강화군 교동면이다. 교동도는 전국에서 13번째로 큰 섬이다. 교동면은 강화군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면이다. 마을로는 봉소리, 상룡리, 고구리, 읍내리, 대룡리, 양갑리, 삼선리, 인사리, 지석리, 무학리, 난정리, 동산리, 서한리 등 13개 리가 있다. 지난 2002년 촬영된 위성지도는 교동도 일대 경기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붉은색으로 표기된 산지를 보면 상대적으로 북한 황해도 지역에서 숲이 많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교동도는 산지 중심의 과거 3개의 큰 섬들이 확인되고 농업에 중요한 동쪽의 고구저수지와 서쪽의 난정저수지가 보인다. 교동도는 평균 고도가 낮다. 섬의 3분의 2가 간척된 평야지대로 이들은 해발 10m 이하에 해당한다. 원래의 간석지는 뻘지대와 갯골로 이뤄지는 자연 해안 지형들이다. 경기만은 조차가 8~9m에 달해 간조시에 매우 넓은 간석지가 드러난다. 제방과 매립에 의한 간척이 매우 유리한 지역이다. 현재는 섬의 중앙 지역 모두가 간척에 의한 농경지로 비교적 넓은 교동평야를 이루고 있다. 섬에서 고도가 높은 곳은 동부의 화개산(260m), 동북부 봉황산(75m), 봉재산(76.1m), 삼성산(65m), 북동부의 율두산(89m), 서남부의 수정산(75m) 등으로 이들은 간석지가 아닌 독립된 구릉의 섬지역으로 간척이 되면서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섬, 교동도가 되었다. 간척사업은 고려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이뤄져 왔다. 교동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통하여 육지와 연결된다. 과거 개성과 한양을 지키는 길목이었다. 이들 하천을 통해 육지로부터 많은 퇴적물들이 경기만에 쌓이면서 외해로 나가더라도 가까운 곳은 깊이 40m 이하의 해저퇴적층이 넓게 발달한다. 과거 6000~8000년 전 해빙기 이후 현재의 해수면 높이로 정착되면서 많은 퇴적층이 만들어졌다. 경기만을 비롯한 서해의 전반적인 경향은 마찬가지이지만 만을 이루는 있는 해안지형과 거대한 하천들의 퇴적물 등으로 퇴적층의 발달은 경기만이 가장 뛰어나다. 과거 역사적으로 교동도는 어업과 염업이 발달했다. 현재는 남북관계로 인해 모든 해안은 출입이 금지되고 남산포만이 포구와 어선 정박이 허용된다. 경기만의 평균 조차는 572㎝이며 사리 때는 780㎝, 조금 때도 340㎝에 이를 정도로 조차가 심하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으로부터 유입되는 비교적 미세한 토사로 인해 바닷물은 매우 흐리다. 수심은 일반적으로 10m 이하로 낮은 편이다. 말탄포 앞 10m, 교동대교 인근 호두곶은 20m까지 나오지만 대개 5~10m 정도이다. 유속은 매우 빠른 편으로 최대 1.8m/초까지 나온다. 교동도와 석모도 사이의 유속은 썰물 때 1.42m/초, 밀물 때 1.34m/초로 빠른 편이다. 이곳에는 유기물이 많아 다양한 어류와 새우류가 많이 잡힌다. 6월 새우, 5~6월 밴댕이, 겨울 숭어, 봄철 농어 등이 잡힌다. 6월 새우젓을 육젓이라고 하며 최상품이라고 한다. DMZ는 동해안 고성군에서 서해안의 김포, 강화도, 교동도를 거쳐서 강화 서도면 말도리 해역까지다. 155마일, 248㎞에 이른다. 더 서쪽으로는 황해도 남쪽 해역으로 북방한계선(NNL)으로 불리면서 연평도, 백령도까지 이른다. 남북간의 경계선은 지형과 해안 조건에 따라 3가지다. 철책선 DMZ, 철책선 없는 해양과 하천 DMZ, 그리고 NNL 해양 북방한계선이다. 내륙 쪽으로는 군사분계선이 분명하게 남북을 가르고 있지만, 서해안 쪽은 바다 자체가 경계이고, 임진강 하구는 하상이 경계대이므로 군사분계선 장치가 없다. 교동도는 아시다시피 쌀농사의 섬이다. 추수가 지나면 많은 낙곡들이 논바닥을 덮는다. 남북을 오가는 철새들의 먹이 낙원이다. 바다 건너 북녘에는 역사 이래 한국의 곡창지대인 북한 연백평야가 펼쳐져 있다. 철새들은 바다를 질러서 남북을 오간다. 교동도는 평야와 함께 해안의 넓은 갯벌 또한 새들의 낙원이 된다. 교동도를 드나드는 철새로는 청둥오리, 황오리, 큰기러기 등 오리와 기러기 종류들이 많다. 봄, 가을로 도요, 물떼새도 들린다. 여름에는 러시아, 알래스카 등에서 번식을 마친 민물도요, 붉은어깨도요, 큰뒷부리도요, 흰물떼새, 왕눈물떼새 등이 이곳을 찾아온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09-24 11:36:00부산 영도(影島)는 영도다리, 태종대, 봉래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14.13㎢이며 2000년 13.95㎢에서 매립으로 0.18㎢ 늘어났다. 인구는 2024년 현재 10만6108명으로 2013년 13만5816명 이후 꾸준히 줄었다. 부산 구도심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보인다. 10만명은 유지했으면 한다. 영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절영도(絶影島)다. 명마들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거의 절영(絶影), 절영도(絶影島)로 나온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장이 있어서 목도(牧島), 목지도(牧之島)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도로 부르면서 그림자 섬이 되었다. 1960년경 부산 해도에 봉래산이 목도산(牧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도가 목도(牧嶋)로도 불린 것이다. 모두 목마장과 연관된다. 영도 목마장 기록은 신라 성덕왕과 김유신 장군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당시 조정과 진골 귀족들이 마장을 운영했다. 명마는 군사와 운송 용도는 물론, 귀족의 자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영도를 제주 말의 임시 거처로 삼고 군사 훈련에 임했다. 영도의 지형은 내륙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봉래산(395m), 남쪽 동삼동의 진후산(150m), 그리고 태종대 해안의 태종산(252m) 등 3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룬다. 해안에서는 해식애, 간석지와 평야, 자갈해안 등이 펼쳐진다. 섬의 북쪽은 완만해 부산 도심과 연계되면서 도시화가 잘 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산지와 식생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영도는 남서-북동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부산항의 천연의 방파제 기능을 한다. 그 징표로 영도의 서부해안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식애와 좁은 자갈 해안들이 발달해 있다. 영도는 중심지에 인접한 주요 주거지가 되었다. 항만 해안가에는 조선업, 선박수리와 장비 관련 산업체가 집중했다. 항만 관련 창고업도 성행했다. 해방되면서 부산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 해방과 6·25전쟁으로 북한 사람들의 남하 영향이 컸다. 급격한 인구와 인구밀도 증가로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다.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 했고 이름에 가마솥(釜)이 있어 그런가 우스개 말들을 했다. 유명한 사건들로 국제시장 화재(1953년 1월), 부산역전앞 화재(1953년 11월), 그리고 용두산, 영주동 피란민촌 화재(1953년 12월) 등이 있다. 영도는 피란민과 화재 재난민들의 입주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경남인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부산은 산업과 학업의 중심지였다. 1960년대 부산은 선박과 해양, 그리고 합판, 신발 산업 등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했다. 한국 조선공업은 부산이 기원이다. 1930년대 조선중공업과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가 이를 주도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북양 명태나 남양 참치잡이 등으로 원양업 종사자도 많았다. 영도는 이를 위한 공단과 주거지를 제공했다. 해양수산 사업이 많은 부산은 안전을 하늘과 신선에 기원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영도의 동이름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봉래동(蓬萊洞), 신선동(神仙洞), 영선동(瀛仙洞), 청학동(靑鶴洞)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대평동(大平洞), 남항동(南港洞), 대교동(大橋洞)은 개항 이후 간척과 매립, 항만건설, 영도대교 설립에서 유래하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동명들이다. 영도는 신선사상과 현대화가 대조적으로 지명에 반영되어 있다. 동삼동(東三洞)은 섬 동쪽에 상리, 중리, 하리 등 세 마을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삼동은 영도 면적의 57%, 인구의 40%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다. 중리 지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도의 인구와 시설이 밀집하면서 도심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자연지형과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동삼동이 도시화된다. 교육시설만 보아도 초등학교 6개, 중학교 3개, 고교 5개, 대학 캠퍼스 3개가 자리잡았다. 동삼동은 교육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봉래산은 영도에서 중심적 지형 요소다. 봉래산의 산신 '고갈 할매'는 영도 주민들의 바닷가 안전과 살림살이 등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복천사를 비롯해 30여개의 사찰이 밀집해 있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부산에 대략 500명의 해녀가 있었고, 그중에서 150명이 영도에 살았다. 영도의 영선동과 동삼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더러는 영도를 작은 제주라고 했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는 영도 해안길을 제2송도, 즉 이송도(二松島)라 불렀다. 여기서 해녀들의 물길질과 해변 노상판매가 이루어졌다. 영도 해녀촌과 해녀문화전시관이 그 역사를 기념한다. 부산 영도에는 해운과 수산에 관련된 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박물관 등이 몰려있다.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연구원,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해양환경교육원, 국립해양박물관, 해녀문화전시관,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선 영조시대 문신 조엄은 1764년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영도에서 최초 재배했다. 고구마 재배가 성공해 전국으로 확대되고 쌀, 보리, 감자와 함께 주작물로 자리잡았다. 영도의 고구마를 조엄과 연관해 조내기고구마라 하고, 조내기마을도 있었다. 근래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부산은 임진왜란의 시작지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가덕도 응봉의 연대봉(煙臺峰)에서 왜군들의 부산포 접근을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했다. 부산 첨사 정발도 13일 오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왜선들을 발견했다. 조공선으로 알고 느긋하다가 왜선의 조총소리에 놀라 대피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에 1592년 4월 15일 왜선 90여척이 절영도 해안에 정박했다고 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는 왜선 350척이 이미 절영도 건너 부산포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4월 16일 원균은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영도의 최고 명승지는 역시 태종대라 하겠다. 남해안과 대마도가 보인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다녀간 곳이다. 해식애 절벽, 해안단구, 그리고 파랑과 남해안 전망이 빛난다. 해식애에는 자살바위로 불리는 곳도 있다. 인근에는 인명을 구한다는 사찰 구명사(求命寺) 가 있다. 태종대 외에도 봉래산, 송남사 등 영도의 많은 곳에서 바다와 해안을 전망할 수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4-07-01 18:22:24【파이낸셜뉴스 인천=한갑수 기자】 인천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인천시민 대상으로 이민의 발자취와 인천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도보 답사프로그램인 인천역사기행을 운영한다고 3일 밝혔다. 한국이민사박물관 도보 답사프로그램 인천역사기행은 이민 관련 역사 인식과 인천 지역사를 인천시민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개발된 시민 교육프로그램이다. 인천역사기행은 올해 120년 전 하와이 이민 여정 ‘포와(하와이)로 가는 길’과 ‘포와 가는 길에 만난 인천의 근현대’ 등 2가지 주제로 진행한다. ‘포와로 가는 길’은 동인천역에서 출발해 내리교회, 성공회 내동교회, 감리서 터, 데쉴러 주택 터, 인천해관 터, 해관잔교 터, 기독교 백주년기념탑, 인천역 코스로 답사할 예정이다. ‘포와 가는 길에 만난 인천의 근현대’는 각국 공원, 제물포 클럽, 인천시민애(愛)집, 홍예문, 인천감리서 터, 인천 미두취인소 터, 일본 제58은행 인천지점,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대불호텔,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공화춘, 인천역을 코스로 하고 있다. 특히 이번 도보 답사에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이 직접 설명을 맡아 전문성과 역사적 장소의 현장감을 보탤 예정으로 시민들이 이민사와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인천역사기행은 주제별로 상·하반기 두 차례씩 진행된다. 오는 25일 진행되는 첫 번째 답사과정 ‘포와로 가는 길’은 오는 7일부터 인천시 통합 예약시스템 누리집에서 선착순으로 접수한다. 참가비는 무료이다. 김상열 시 한국이민사박물관장은 “함께 걸으며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인천의 근현대사 인천역사기행에 많은 인천시민이 참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kapsoo@fnnews.com 한갑수 기자
2024-05-03 10:49:23진해는 벚꽃 필 무렵에 군항제를 연다. 올해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1일까지 열렸다. 진해시 근현대사는 한반도 남해안의 지정학과 함께한다. 한국 해군의 중심지로 해군기지, 해군사관학교, 해군교육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해군들은 더러 '진해의 해군이 아니라 해군의 진해'라는 자부심도 보여준다. 진해군항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직결되어 있다. 1952년에 진해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건립하고 해마다 추모 행사를 가졌고, 더욱 발전시켜 1963년부터 해마다 군항제 행사를 가지면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서의 중요 역할을 해온 진해(鎭海)는 현재의 위치가 아닌 원래 현재의 창원시 진동면에 있었다. 조선과 러시아, 일제의 지정학적 관계가 간여하면서 진해는 오늘날의 진동에서 동쪽으로 진해만을 건너 현재의 진해시로 이전했다. 조선시대에는 웅천(熊川)과 웅포(熊浦)로 알려진 해안 군현이었다. 유라시아의 내륙국 제정러시아가 태평양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면서 진해에 인접한 마산포에 해군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 일제는 즉각 반발하면서 조선으로부터 먼저 진해를 접수하고 진해의 군영을 진동에서 20㎞ 정도 동쪽인 웅천과 웅포로 행정명과 함께 도시 자체를 이전했다. 이것이 1908년의 일이다. 오늘날 진해의 역사는 2010년 마산, 창원, 진해 3도시 통합까지 개별 도시로 남았으니 이때를 기준으로 따지면 102년, 올해로는 116년이 된다. 1907년 조선왕조의 행정지도에도 현재 진동의 진해와 현재 진해인 웅천이 표기되고 있다. 2010년 이후 진해는 진해시에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진해시로 부른다. 진해 앞바다는 동쪽의 통영, 서쪽의 가덕도, 남쪽의 거제도로 둘러싸인 비교적 큰 바다로 진해만이라 불린다. 진해만의 중심에서 내륙으로 뻗은 곳이 마산만이다. 깊고 편안한 바닷길이다. 진해만은 전반적으로 부산에 인접하면서 일본의 접근이 용이한 남해안 지역이다. 오늘날 진해시의 지리를 살펴보면 뒷배경으로 거의 동서로 뻗어있는 500~700m에 이르는 산맥이 달리고 있다. 백두대간론에서 낙남정맥으로 불리는 산맥이다. 그리하여 진해는 바다를 통하지 않으면 북쪽의 내륙과 연결이 어려웠다. 한국의 경제 발전에 따라 내륙과 진해와의 교통로 필요성에 따라 많은 터널을 만들어 산맥의 어려움을 해결해왔다. 창원, 마산, 부산, 김해 등과 진해를 연결하는 도로들은 귀산, 장복, 마진, 안민, 진해, 굴암, 웅동, 보배, 마천, 용원 등의 터널이 대부분이다. 면적이 작은 소도시에서 이렇게 터널이 많은 곳은 진해가 유일할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일본은 수천년간을 한반도를 침략해왔다. 왜구, 왜란, 왜관의 이름이 역사에 진하게 남아있다. 조선 초기에 이러한 일본과의 상호간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의 공식적인 접근과 거래를 위해 왜관 설치 등을 허용하면서 웅포(현재의 진해), 부산포(부산 초량), 염포(울산) 등 삼포를 개방했다. 강점기를 포함하면 삼포에서의 일본과의 거래는 500년의 역사를 기록한다. 삼포는 일본인의 한국 거주를 허용한 지역들이다. 세종 때의 문신 신숙주는 일본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각 나라의 지리와 지도 등을 만들어 '해동제국기'라는 책을 엮었다. 여기에 삼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지도도 함께 실었다. 외교에 도움 되는 실용서였지만 더욱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웅포 지도를 보면 웅천성과 해자, 해안선이 잘 그려져 있다. 태종 때의 조선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후 국가적인 지도를 담은 책자는 해동제국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남해안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위업이 없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까'하는 아찔한 역사의 순간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를 통해 직접 참전한 해전들을 기록했다. 진해만과 연계된 해전을 살펴보면 1592년 5월 옥포와 합포해전, 6월 안골포해전, 1593년 2월 웅천해전 등이 있었고, 1595년에는 왜군 수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6월 웅천에 기지를 만들어 주둔하면서 농성을 이어갔다. 7월에 들면서 이들은 조선수군에 의해 웅천에서 퇴각된다. 왜군은 왜구 활동에는 능하지만 임란 초기에 군사작전 능력은 부족했으며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왜군의 상황을 최선을 다해 살피고자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잘 알려진 대로 군사력 증강과 철저한 훈련, 군수물자의 조달과 조정의 설득, 휘하 장수들과의 작전회의와 작전 수행에 철저했다. 또한 이를 위해 현장의 실태에 대한 파악에 진력했다. 해안지형과 조류이동을 잘 관찰했고, 이를 위해 지역주민들의 경험도 청취했다. 작전지도 작업도 실행한 것으로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의 많은 지역들이 언급되고 있다. 진해만 지역 기록들을 살펴보면 웅포(熊浦·진해 남문동), 웅천(熊川·진해 웅천동), 송도(松島·진해 안골동), 원포(阮浦·진해 원포동), 사화랑(沙火郞·진해 남양동) 등이 언급되고 있다. 웅천해전과 안골포해전은 치열했고, 왜군은 이순신의 수군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다. 당시 왜군은 웅천과 안골포에 왜성을 쌓아 농성에 돌입하기도 했고,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왜군들의 병선을 진해만 가운데로 끌어내어서 물리치고자 했다. 또한 왜군이 머문 곳에 정탐군을 보내 정보를 얻거나 유격부대를 통해 유격전으로 왜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안골포에 굴강(掘江)을 만들어서 선박의 이동과 수리, 군수물의 선적 등에 활용했다. 안골만의 중심 흐름을 깊이 파서 활용한 것으로 해안 지형을 군사적으로 잘 활용한 사례가 되며 현재도 대략적인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 이제 진해는 창원과 마산과 연결되고 그리고 부산과 거제, 통영과 고성으로 연결되는 남해안의 주요 거점이다. 난중일기에 진해의 지리와 역사가 잘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해군력을 키우고 유지하는 곳, 국가와 국민은 충무공 이순신의 역사가 깃든 진해를 잘 지켜나가고 있다.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이민부 교수 약력 △1954년 경남 양산 출생 △서울대 지리교육과 졸업 △미국 유타대 지리학 박사 △대한지리학회장 △한국지형학회장 △한국교원대 인문사회대학장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현)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4-11 18:1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