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국민통합과 중도층 외연 확장에 방점을 찍는 행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공약과 메시지상 '우클릭'에 더해 당 선거대책위원회에 보수진영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는 등 '중도'와 '통합' 메시지를 고리로 중도·보수 표심 끌어안기에 나선 것이다. ■이승만·박정희·박태준 묘역 찾은 李 이 후보는 28일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첫 일정인 서울현충원 방문에서부터 통합 행보에 나섰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에 더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묘역도 찾아 참배해서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에서 독재정권이라며 비판하는 반면, 보수진영에서 건국대통령과 경제대통령이라고 호평하는 인물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서 제철산업을 키우라는 지시를 받고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을 키워냈다. 이 후보가 이들의 묘역에 참배한 건 보수층까지 아우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특히 이·박 전 대통령 묘역 참배의 경우 지난 대선 당시에도 참배했지만, 이 후보의 판단으로 박 명예회장 묘역까지 찾은 건 국민통합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이 후보는 참배 직후 기자들에게 "이번 행보 때문에 의구심을 갖거나 서운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라며 "평가는 평가대로 하고, 공은 공대로 평가하되 당장 급한 건 국민통합이고, 국민들의 에너지를 색깔 차이를 넘어 한데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의 통합 메시지는 이후 최고위원회의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대통령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국민을 크게 통합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이 있다"며 "공동체 자체가 깨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가장 큰 일이다. 국민들이 갈가리 찢어지지 않게 통합하는 게 제일 큰 의무"라고 밝혔다. 이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내놓은 공약도 증세와 복지보다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와 규제완화에 무게를 둬 '우클릭'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공약은 기본적인 목표부터 '성장'으로, 인공지능(AI) 등 신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규제혁파를 약속했고, 소형모듈원전(SMR) 등 원자력발전을 활용하는 에너지믹스와 방위산업 수출 진흥책도 내놨다. ■보수책사 윤여준 영입 30일 출범하는 선대위 구성도 보수진영 인사들을 끌어들이며 통합선대위를 꾸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먼저 이날 '보수책사'로 불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사진) 영입에 성공했고, 앞서 이 후보가 민주당 대표로서 접촉했던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석연 전 법제처장, 이상돈 전 의원 등이 추가로 합류할지 주목된다. 한 민주당 의원은 "이 후보는 보수를 껴안아 민주당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방침이라 선대위에 여러 외부인사들이 들어올 수 있다"며 "윤 전 장관 등 보수인사 영입도 그런 측면에서 논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 지도부 핵심 관계자는 "대선 선대위는 매머드급 규모로 꾸려지기 때문에 윤 전 장관 외에도 더 많은 보수진영 인사들이 함께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선대위를 짜는 과정에서 당내 화합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경선에서 경쟁했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에게 공동선대위원장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져서다. 김 전 지사는 민주당의 한 축인 친문·친노의 적자라고 여겨진다. uknow@fnnews.com 김윤호 기자
2025-04-28 18:12:23[파이낸셜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8일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이승만, 박정희 등 이른바 보수계 전 대통령들의 묘역을 참배하며 "통합의 필요성과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시기"라고 밝혔다. 이 후보는 이날 오전 국립 현충원을 방문해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참배한 후 기자들과 만나 "우리가 한때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놓고 현실적 정쟁에 빠졌던 때가 있었지만, 망인들의 문제 또는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 그리고 시민 사회에 맡겨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후보는 "정치는 현실이며 민생을 개선하는 게 정치의 가장 큰 몫"이라며 "경제, 안보 등 모든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이 참 녹록지가 않은 만큼 보수와 진보의 통합을 통해 다른 걸 인정하면서도 같은 점들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후보는 이날 계획에 없던 고(故) 박태준 전 국무총리 겸 포스코 전 회장 묘역을 참배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기자들에게 "박태준은 'DJP연합', 그야말로 진보·보수 통합 정권의 옥동자이자 아름다운 열매 같은 존재였기에 한 번 둘러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대선이 윤석열 전 대통령의 위헌적 비상 계엄으로 인해 치러지는 만큼 국가 긴급권 남용을 놓고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 후보는 "음지만큼 양지가 있는 것이고 동전은 앞면이 있는 것처럼 뒷면도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 후보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은 양민 학살이나 민주주의 파괴, 장기 독재 등 어두운 면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한편으로 근대화의 공도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 후보는 "저나 민주당 지도부의 행보를 서운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지금 가장 큰 과제는 내란을 극복하고 우리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좌우,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다"며 "공과는 공과대로 평가하되 지금은 색깔과 차이를 넘어 국민을 통합해 희망적인 미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전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6.3 대선 #대통령선거 #이승만 #박정희 #보수 jiwon.song@fnnews.com 송지원 기자
2025-04-28 11:57:04[파이낸셜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오는 28일 현충원을 찾아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다. 보수진영에서 공을 부각하는 두 전직 대통령 묘역을 찾음으로써 중도와 보수 표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관계자는 27일 “이 후보는 28일 현충원을 방문해 이승만·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모두 참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에선 독재 장기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민간인들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은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민간인을 학살한 바 있고, 정부 수립 논쟁 탓에 논란의 중심에 서왔던 인물이다. 반면 보수진영에선 이 전 대통령은 초대 대통령으로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는 점에서 건국대통령이라고 부르고,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대대적인 인프라 개발로 고도성장을 이끌었다는 공적을 높이 평가한다. 이 때문에 진보진영 인사들의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참배는 통상 국민통합 메시지를 발신하는 데 활용돼왔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 당시에도 두 전직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공과를 고르게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낸 바 있다. 이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이 중도와 보수까지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한다면서 보수 색채가 묻어나는 공약과 메시지를 내 외연확장을 시도한 바 있다. 그 연장선에서 대선후보 선출 후 첫 행보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찾는 것으로 읽힌다. 이 후보는 이날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트럼프 2기가 불러온 약육강식 무한대결 세계질서, AI 중심 초과학기술 신문명 시대 앞에서 이념이나 감정은 사소하고도 구차한 일”이라며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되살리는 게 내란이 파괴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uknow@fnnews.com 김윤호 기자
2025-04-27 22:49:30[파이낸셜뉴스] 제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 소재 다큐멘터리가 잇달아 개봉해 눈길을 끈다. 지난 16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다큐멘터리 ‘하보우만의 약속’이 개봉한 가운데 뉴스타파필름이 제작한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이 23일 극장 개봉을 앞두고 18일부터 보름간의 전국 시사회에 돌입한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다큐 ‘하보우만의 약속’ ‘하보우만의 약속’은 1980년대 한국영화계의 스타 감독 이장호가 연출했다. 이 감독이 데뷔 50년 만에 선보이는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어린 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기회주의자로,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로만 알고 살아왔던 부끄러운 과거를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영화사를 통해 전했다. 또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열린 영화 '하보우만의 약속'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분열과 대립이 심하던 해방 정국의 역사가 지금 시대에도 이어지는 것 같다”며 “이 혼란도 잘 정리돼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이뤄질 거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보우만의 약속'은 17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개봉 당일에 1007명을 모아 누적관객수 3429명을 기록했다. 뉴스타파와 윤석열의 7년 전쟁?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은 탐사보도 온라인 매체 뉴스타파가 기획하고 제작한 르포영화다. 자칭 ‘뉴스타파와 윤석열 대통령의 7년 전쟁’을 그렸다. 17일 제작사 뉴스타파필름에 따르면 김용진 감독은 15일 서울 성동구 CGV왕십리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겠다고 기획한 것은 아니다"며 "기자로서 늘 해오던, 중요한 일을 기록해왔다”고 영화의 시작을 떠올렸다. “검찰과 정권에 당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 조사받고 재판 받는 것도 취재를 겸하면서 빠짐없이 기록했다"며 "12월3일 밤 계엄 상황을 겪고 나서, 2년 전 뉴스타파가 압수수색을 당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했다”고 제작 계기를 설명했다. 김 감독은 또 “어떤 특별한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도록 의도했다”며 “관객들이 재미있게, 흥미롭게 영화를 보면서 이런 검찰, 시스템을 두고 우리 사회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 어렵겠다고 자연스럽게 체득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작품 의도를 전했다. 이 영화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3500여명의 후원자가 참여해 목표액의 280%인 1억4000여만의 후원금을 달성했다. 앞서 검찰은 이 영화의 상영을 막아달라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1일 서울중앙지법에 ‘재판 계속 중인 이 사건 관련 피고인 김용진, 한상진의 영화 제작 발표에 대한 우려 사항 등’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17일 기준 개봉일인 23일 이 영화의 상영이 확정된 곳은 서울, 대구, 안동의 독립 및 예술영화전용관 3곳이다. CJ CGV 등 멀티플렉스에서는 아직 예매가 오픈되지 않은 상태지만,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5-04-17 15:21:29[파이낸셜뉴스] "불굴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창업가인 이승만 대통령을 바르게 기념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뿌리를 되찾고 국가 정체성을 굳건히 확립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김황식 이승만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 탄생 150주년 맞아 모든 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그를 기억하고 대한민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논하는 '소통의 장'이 마련됐다.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은 25일 서울 중구 장충단로 '크레스트72 글라스홀'에서 이 전 대통령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 '우남 이승만, 세기를 넘어 세대를 잇다'를 개최했다. 이 전 대통령 탄생일(3월 26일) 하루 전에 이번 행사를 마련한 기념재단은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10대 청소년부터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교훈이 공유되길 바라는 8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행사 취지를 밝혔다. 이번 행사는 △김황식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 환영사 △강석호 자유총연맹 총재의 축사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의 격려사를 시작으로 △150주년 기념 엠블럼 제막식 △학술회의 △청년세대 원탁회의 △미래세대 원탁회의 순으로 진행됐다. 김 이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올해는 이 전 대통령 탄생 15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라며 "우남(雩南·이승만 호)이 탄생한 지 무려 한 세기 반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대한의 온 세대가 함께 모여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더욱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우남은 젊은 날을 바쳐 안으로는 구국 운동에 힘썼으며, 밖으로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청년 이승만의 나라를 위한 치열한 분투는 훗날 대한민국을 세우고 이끌어가는 탁월한 지도력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는 이 전 대통령이 확립한 자유, 민주, 공화의 빛나는 가치를 보유했고, 단언컨대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며 "대한민국을 이룩한 우리 민족의 저력과 자긍심을 바탕으로 기념관 건립을 향해 힘차게 정진하는 '도약과 희망의 해'가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강석호 총재도 축사에서 "우리는 그의 업적을 역사 속에서 바르게 평가하고 자유와 번영을 위한 그의 헌신을 미래 세대에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며 "반국가 세력들이 미래 세대의 가치관을 훼손시키는 시도를 막아 대한민국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내야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서 저와 한국자유총연맹 320만 회원은 하나가 돼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가 안보를 굳건히 지켜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은 '조선의 쇠퇴와 청년 이승만'에 대한 강연을 펼쳤으며,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청일전쟁과 청년 이승만'에 관해 발표했다. 특히 김 교수는 "청일 전쟁을 겪으며 탈중화 독립정신을 키웠던 청년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청일 전쟁을 연구하며 독립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면서도 "하지만 청일 전쟁의 결과로 '주어진 독립'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청일 전쟁 이후 조선·대한제국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빠져 들었던 '친일의 덫'을 회피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밖에 최근 이 전 대통령의 대표 저서인 '독립정신'을 일본어로 번역, 출간한 김영림 일본 츄오대학교 박사, 주대환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부회장, 복거일 소설가가 토론을 맡기도 했다. 청년 원탁회의에는 조평세 1776연구소 대표, 손영광 바른청년연합대표, 김민아 빌드업코리아 대표, 유튜버 책읽는 사자가 참여해 21세기에 다시 만난 19세기 청년 이승만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5-03-25 14:36:40귀국 좌절로 인한 충격이 중풍을 불러 이승만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막막해진 순간에 마우나라니(천국의 산이라는 뜻) 요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이라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한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 박사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의 간병이 도움이 되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줘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 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이승만의 정신이 아직 온전했을 때 했던 마지막 기도문이 전해진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더 이상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대못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사랑'이었듯, 이승만을 마지막까지 견디게 한 것도 권력욕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사랑'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씌워진 종의 멍에를 벗기고 자유케 하려던 그 위대한 사랑이었다. 1965년 6월 20일. 이 박사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노화된 장기에서 내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의식은 거의 없는 상태로 야윈 팔에는 검푸른 주삿바늘 자국만이 무수했다. 7월 4일. 한국에서 양아들 이인수씨가 급히 들어왔다. 병원에서는 다시 한번 내출혈이 심해지더라도 응급실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7월 18일. 심한 내출혈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인수씨가 이 박사 옆에 누워 수혈을 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가자 주치의 토마스 문 박사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자정을 넘어 7월 19일 0시35분. 갑자기 호스를 입에 문 이 박사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윌버트 최씨가 관계했던 누와누 장의사가 장례식을 거행했다. 고인이 건립했던 한인기독교회에 고인이 안치됐다. 고인의 상반신이 보일 수 있게 관을 열어두었다. 7월 21일 오후 8시30분,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장할 무렵엔 조화가 교회 전체를 메웠고 수많은 현지인과 교민들이 애도를 표하러 모여들었다. 이 박사의 50년 지기인 하와이 사업가 보스윅이 뒤늦게 연락을 받고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달려왔다. 그는 교회 입구부터 사람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이 박사의 관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걷어내더니 이 박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잘 가게! 내 소중한 친구여…." 이인수씨가 기억하고 있는 한 편의 시 같은 보스윅의 애절한 절규는 고인이 된 이승만의 영혼을 진정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이날 밤 10시30분, 6명의 육해공군 의장대가 조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히컴 공군기지에서 이륙 대기 중인 군 수송기 C-118에 유해가 실렸다. 태극기조차 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이승만을 존경하던 교민과 미 장군들의 배려뿐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한국까지 함께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16명을 태운 채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 정각.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섬으로 온 지 5년2개월 만이었다.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밤하늘의 별들 속으로 사라진 날로부터 60년이 지난 2025년은 그의 탄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가 해양 문명권으로 진입시켜 건국한 대한민국은 오늘날 10대 선진국으로 성장했지만, 북녘 동포를 위한 자유통일을 염원하는 지도층과 국민은 거의 없다. 개인의 근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짜뉴스와 가짜역사에 맞서 싸우려는 언론인과 정치인도 찾기 어려워졌다. 이승만의 가난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세웠지만 오늘날의 부유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도 버거워한다. 단군 이래 물질은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지만, 정신은 탐욕과 빈곤을 헤매는 중이다. 우리가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나라를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잊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창조적 지성을 겸비한 지도자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자유케 한 '이승만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3-18 17:52:00이승만 부부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그를 존경하는 미군의 화이트 대장, 램니처 장군, 맥나마라, 맥아더, 밴플리트 등 많은 장군들이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방문해 위로하고 갔다. 특히 화이트 대장은 이 박사가 하와이에서 병원 혜택을 받는 데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트리풀러 병원에서의 정기 검사와 치료는 물론이고, 훗날 임종 직전까지 많은 의료 혜택을 주선해 주었다.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이 박사는 귀국이 좌절됨에 따른 분노로 몸져 눕기도 했다. 트리풀러 병원의 주치의는 진찰 끝에 이 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이 하와이 총영사를 지낸 오중정씨를 비롯한 하와이 교민사회를 다시 한번 움직이게 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야겠다는 결의가 다져졌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오중정, 최백렬씨 등이 머리를 맞대고 사과성명을 급조해 이 박사 명의로 발표했다. 이로써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적 고려나 조율 따위는 없었다. 최백렬씨는 한국의 날씨를 고려해서 오버코트와 모자를 마련했고, 윌버트 최는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다시 매물로 내놓았으며, 이 박사 가족들의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했다. 곤궁했던 말년의 생활비 일체를 지원해준 윌버트 최에게 이 박사는 자신의 거주지인 이화장(梨花莊)의 토지와 시설 소유권 일체를 양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윌버트 최는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1970년 8월 사망했으며, 그 자제들도 이 박사 부부에 대한 후원이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음을 강조했다). 출발 날짜가 확정되자 이 박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교민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 하와이 유력 일간지 애드버타이저지(紙)는 이승만의 귀국을 축하하는 특별 사설을 게재했다. 1962년 3월 17일 아침, 이 박사는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소파에서 출발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 검은 세단 한 대가 언덕길을 올라오더니 이 박사의 집 앞에 섰다. 뒷자리에서 5·16 군사정권이 임명한 김세원 총영사가 최백렬씨와 함께 굳은 표정으로 내렸다. 잠시 후 방 안에서는 이 박사의 왼쪽에 양자 이인수씨, 오른쪽에 최백렬씨가 앉았고 윌버트 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인수씨 맞은편에 앉았다. 김 총영사는 윌버트 최 옆에 앉게 되어 이 박사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백렬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박사님, 우리나라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되게 하시고 계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이 박사는 '무슨 얘길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김 총영사가 "아직은 본국 실정이 가실 만한 때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 박사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이인수씨는 양아버지의 싸늘해진 손을 계속해서 주무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김 총영사의 말이 다 끝나자 이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아주 조그맣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가는 것이…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하기 바라오…." 그러고는 가냘프게 "나라…나라…" 하며 조국을 찾는 듯 뒷말을 잊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이어 이 박사는 휠체어로 옮겨 앉은 채 부인과 함께 침실로 사라졌다. 이날 이후 이 박사는 두 번 다시는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이인수씨는 자신이 국내로 들어와 이 문제를 직접 풀어보기로 결심하고 그날로 하와이를 떠났다. 귀국이 좌절된 채 아들도 떠난 집에서 87세의 이승만은 뇌출혈을 겪었다. 급히 트리풀러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회복했지만 후유증인 중풍으로 수족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프란체스카 여사야말로 가장 막막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의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우리 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승만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 여사의 간병이 절실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주어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그녀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친정에서도 매월 200달러씩 보내주고 있었다. 한번은 친정에서 종이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 주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종이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이 '종이 옷장'은 지금도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건국한 지 77년째가 되는 오늘날, 대통령과 영부인의 기상천외한 일탈로 나라 전체가 어지럽다. 우리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처럼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3-04 18:12:03양자로 하와이에 도착한 이인수씨는 마키키가 1층의 창고 같은 방을 침실로 썼다. 그는 하와이에서 양아버지 이승만을 세 번 모신다. 첫 방문이었던 1961년 12월 13일부터 1962년 3월 17일까지, 두 번째는 1964년 1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그리고 임종을 지키기 위한 1965년 7월 4일부터 19일까지가 전부였다. 그가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밤. 여독을 풀기 위해 2층에서 일찍 내려와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들릴락 말락 하는 노크 소리에 놀라 일어난 이인수씨가 문을 열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프란체스카의 부축을 받고 선 이 박사가 있었다. 프란체스카가 영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버님이 지금 한국말로 뭐라고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나를 끌고 이리로 오자고 해. 그런데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으니 통역 좀 해줘." 이인수씨가 급히 방 안으로 모셨다. 작은 의자에 앉은 이 박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얘야, 우리나라 가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이인수씨는 시간을 의미하는 질문 같지 않아서 "경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수씨가 프란체스카에게 통역을 해드리자, "또 그 걱정이 일어나셨구나. 윌버트 최씨가 한국에 돌아가는 모든 비용을 대준다고 우리에게 약속했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게" 하며 그 과정을 낱낱이 설명했다. 이인수씨가 이 박사에게 우리말로 설명을 해드렸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 언제 내가 우리 땅에 가게 돼?" "한 서너 달 지나면 한국 날씨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는 가시게 될 겁니다." 즉흥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그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떨리는 손을 펴 보이더니 "자, 이것 좀 봐…내가 전에 가려고 할 때, 석 달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자, 지난번에도 하나 둘 셋…지금도 하나 둘 셋이니 왜 세월은 안 간다나?" 하며 세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했다. 이번만은 속지 않겠으니 정확한 날짜를 대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야?" 이승만의 상기된 두 볼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평양 열대섬의 밤하늘 아래서 세 사람은 한동안 속절없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양어머니 프란체스카와 양자 이인수씨가 종종 겪게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이 박사가 컨디션이 좋을 때면 아들 이인수가 부축해 집 주변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 박사는 나라 걱정을 하면서 반복해서 남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것이 이승만의 유언이 되었다. 필자가 받아 기록한 것을 옮긴다.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하며, 경제에서나 국방에서나 두 발로 굳건히 서서,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이 이승만의 독립정신이요, 건국정신의 반석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1898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자기 백성을 노비로 삼았던 조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의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지 50년 만인 1948년에야 비로소 자유민주 국가인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다. 국가 의식에 각성된 23세 때부터 이승만은 단 한 번도 사적인 이득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수많은 보수·우파 지도층들은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유튜브 수익과 책 판매 수입은 늘었겠지만, 후학을 배양하는 자기 희생은 얼마나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지도층 인사들이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정말 알고나 있는 것일까. 1961년 12월 21일에는 이인수씨가 아버님을 모시고 하와이에서 장의사로 유명한 윌리엄 보스윅의 집을 방문했다. 이승만과 보스윅의 우정은 40년을 넘고 있었다. 1918년 1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의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그의 제자였던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는 중국의 김규식, 본국의 장덕수와 김성수, 일본의 김철과 서병호 등에게 밀서를 보내고 소련에는 여운형을 보내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궐기를 해냈다. 그 여세를 몰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치되고(4월 11일), 그해 9월 임정 요인들이 모여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일본의 현상수배를 받고 있었던 이승만은 현지 부임을 고민하다 1920년 여름 장의사 보스윅을 찾아가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졌다. 당시 보스윅은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죽어간 수많은 중국인을 수습해 상하이로 운송하는 해상 장의업으로 큰돈을 벌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런 보스윅을 설득해 중국인 시체와 함께 관 속에 몸을 숨겨 상하이까지 밀항하는 데 성공한다. 상하이 임정의 이승만 대통령 도착은 이런 식으로 1920년 12월에 이뤄졌다. 보스윅은 미국인도 감히 해낼 수 없는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가진 동양인 이승만이 안락한 길을 마다한 채 독립운동을 위해 시체와 함께 관 속에 숨어 밀항을 시도하는 헌신적인 태도에 감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평생을 존경하는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이인수씨가 양부모님을 모시고 만나본 보스윅은 이 박사보다 크다고 할 수 없는 키에 넉넉한 풍채를 가진 90세의 노인이었지만 정정하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일행이 돌아갈 준비를 하자 보스윅이 잠시 내실로 들어갔다 오더니 프란체스카의 핸드백 속에 봉투를 넣어 주었다. 프란체스카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밖에까지 따라나온 보스윅은 돌연 이인수의 어깨를 감싸안고 현관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귓속말로 "아가, 잘 돌봐드려라. 그는 굉장한(Great) 사람이야. 40년 친구인 내가 모를 리 있겠나?" 하고는 등을 밀치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이인수는 물론 보스윅의 눈시울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2-18 18:28:38"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 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쿠키 몇 개를 내주셨어요. 모두 싸구려 과자들이었지요. 그 정도로 두 분의 살림살이가 참 곤궁했어요."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 회장이 필자에게 회고한 이야기다. 노인성 치매를 앓기 시작했던 이 박사는 마당의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거실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도 이 박사는 반드시 귀국하리라는 집념이 있었다. 그 목표를 위한 노인의 눈물겨운 모습은 하와이의 유배생활 곳곳에 배어 있다. 5달러 하는 이발비를 아껴 여비를 모으기도 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 박사의 머리는 보기 싫을 정도로 길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이발을 해주어야 했다. 한적한 주택가를 산책할 때면 이 박사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쇠붙이가 여비에 도움이 될 것이며, 튼튼한 노끈도 모아두면 돈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교민들이 가져다준 가구의 빈 서랍 속에는 이런 폐품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적지 않은 방문객이 전해준 카드 봉투 속의 달러들은 프란체스카에 의해 1달러조차 기부자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며 생활비로 충당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저녁에 이분들에게 감사편지를 쓰는 게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은 프란체스카가 한 주일분의 식품을 사들이는 장보는 날. 하지만 이 박사는 아내에게 한사코 시장엘 가지 말라며 옷자락을 놓아주질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굶어서야 살 수가 없잖아요"하고 설명하면 "그러면, 조금만 사 와…돈 써버리면 서울 못 가…"라며 겨우 놓아주었다. 그런 날이면 프란체스카는 장을 보고 와서 아주 작은 봉투 하나만 들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작은 봉투로 이 박사를 안심시킨 다음, 뒷문으로 나머지 물건들을 들여놓곤 했다. 해가 바뀌어 1961년 봄이 왔을 때, 이 박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자신의 후사를 책임질 양자가 없다는 문제였다. 유일한 친아들 봉수를 열 살 때 병으로 잃은 이후 양자의 인연은 한동안 없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지만 1960년 4월 28일, 이강석은 친아버지(이기붕), 친어머니(박마리아) 그리고 동생들을 살해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가라앉는 것처럼 이승만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의 뒷일을 맡아줄 양자가 절실했다. 하와이의 이 박사 동지들과 제자들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중정 총영사를 포함한 인사들이 몇 차례 회의를 가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 4·19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이순용 전 체신부 장관(1897~1988)을 찾았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이던 1942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특수첩보부대원이 되어 인도와 중국에서 맹활약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청의 방첩대(CIC)에서 백의사와 미군 간 연락업무를 도맡았고, 국군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체신부 장관, 대한해운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둥이 되었다가 4·19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이순용씨가 이 박사의 양자를 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입국했을 때는 박정희 소장에 의한 5·16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던 5월 중순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핵심 각료였던 인물이 쿠데타 진영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온 셈이어서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여러 공작을 체험했던 이순용씨는 불안해하는 군부를 설득해 가며 전주 이씨 종친회를 찾아가 이 박사의 양자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그가 찾아낸 양자는 경기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이승용씨의 자제 이인수씨였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경희대 정치학 석사로 유학 준비를 하던 만 30세의 이인수씨는 이 박사와 같은 양녕대군파에다가 항렬도 이승만 바로 아래의 수(秀)자 항렬이었으며, 영어에도 능통해 프란체스카와의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없었다. 불과 2년 전 4·19 당시 고려대 후배들의 데모에 박수를 보낸 이인수씨로서는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이유를 대며 처음엔 고사를 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는 말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생부 이승용은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겠지만 열심히 모셔라"며 격려했다. 1961년 12월 13일 낮 12시, 이 박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양아들 이인수씨가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최백렬씨와 오중정씨 등 교포 10여명이 이인수씨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일행이 차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마키키가 언덕길의 하얀 목조주택.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이 박사와 양장 차림의 프란체스카는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을 들어서는 이인수씨를 바라보던 노인 이승만은 기쁨에 겨워 손을 흔들었다. 나무 층계를 올라선 이인수씨는 한국식 큰절을 올렸다. 이승만으로서는 분명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양아들 손을 잡아끌 듯 거실의 소파로 가 앉은 이승만이 처음 물어 본 질문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지?"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 갈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인수씨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런가? 나라가 잘 되어 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말거라. 내가…내가…이렇게 절단이 난걸…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라는 건국 대통령의 이 한마디는 그의 뒤를 이었던 12명의 대통령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언일 것이다.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2-04 18:24:07과거의 훌륭한 지도자에 관해 무지할수록 미래의 좋은 지도자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듯, 영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오스트리아인으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부인이 되어 살다 간 프란체스카 도너 리(1900~1992)에 관해서도 무심할 정도로 모르고 산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훌륭한 영부인과의 인연도 희박한 것은 아닐까.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교외인 서스덜프에서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경영하던 실업가 루돌프 도너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것이 유복한 양조장집 딸로 잘못 알려진 배경이다. 프란체스카의 아버지는 그녀가 수학과 외국어에 재능을 보여 가업을 물려줄 생각으로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잘라주기도 했으며 상업학교로 진학시켰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졸업 후 농산물중앙근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영어 통역관 국제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로써 그녀는 독일어와 불어에 능통했으며, 속기와 타자 특기도 보유한 재원(才媛)이 되었다. 20세 때 프란체스카는 카레이서 헬무트 뵈링과 결혼했지만 4년 뒤 이혼했다. 아이는 없었다. 1933년 2월 21일,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스위스로 여행 중 제네바의 드 루시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조우하게 된다. 당시 58세의 이승만은 국제연맹이 만주사변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 조선의 독립을 호소함으로써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회의는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승만은 그해 1월 5일 제네바에 도착해 7월까지 머무르면서 인터뷰와 저술 등으로 분주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프란체스카와의 만남은 이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드 루시 호텔 식당에 들어선 프란체스카 모녀는 어렵게 4인석에 자리했으나 워낙 큰 국제회의가 열리는 중이어서 호텔 식당마다 만석이었다. 그때 지배인이 다가와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라고 양해를 구했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가 이승만을 한번 훑어본 뒤 안심하고 승낙했음은 물론이다. 프란체스카는 맞은편에 앉은 이승만의 가난했지만 품위 있는 태도에 매우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그녀와 이승만 박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또 한 편의 신비한 드라마일 것이다. 프란체스카가 식사하는 노 신사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을 때 신사는 "코리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프란체스카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여행 직전에 읽은 책이 '코리아'였기 때문이다. 주저 않고 그녀가 말했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지요." 바로 그 자리가 두 사람의 정신과 영혼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 시작한 곳이었다. 망국의 독립운동가가 국제회의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각국 외교관들을 감복시킬 문장력이 필수였다. 문장력이 있다면 그다음엔 이를 적시에 인쇄본으로 만들어 배포하며 외교가에 여론을 형성할 실행력이 있어야 했다. 국제연맹을 결성한 프린스턴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밑에서 동양인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이승만은 유려한 문체의 영문서를 수시로 작성했지만, 현지에서 그를 도울 타이피스트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곤 했다. 프란체스카는 식당에서의 만남 이후 몇 건의 서류를 타이핑해주었다. 동양 신사의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에 이끌린 그녀와 이승만 박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절제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해야 적당할 것 같다. 빈의 숲속을 함께 거닐며 노처녀 프란체스카가 이 박사에게 배운 한국말은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단어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어머니가 귀국을 서두르는 바람에 그녀는 어머니 몰래 김치맛 나는 사워크라우트 한 병을 호텔 지배인에게 맡기고 떠나야 했다. 그로부터 1년8개월 뒤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당연히 프란체스카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59세의 이승만 박사는 이 무렵부터 25세 연하의 아내 프란체스카를 '화니(Fanny)'라는 애칭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두 분의 용기에 힘입어 탄생할 수 있었던 국가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노고(勞苦)는 1인 다역이었다. 1940년 하와이에서 국제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을 때, 이들 부부는 워싱턴의 값싼 방 하나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이 열악한 공간에서 두 사람은 미국의 지성을 뒤흔드는 역작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출간했다. 당시 프란체스카는 그 원고를 세 번이나 타이핑해야 하는 바람에 손끝이 터지고 짓물렀다고 한다. 이처럼 남편 이승만의 독립운동에는 동지였으며, 건국과 함께 영부인으로 외교 업무에 큰 힘을 보탰다. 국제전으로 확전됐던 6·25 전쟁 중에는 다양한 비밀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국제사회에 전쟁의 참상을 알려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냈다. 독일어와 불어에도 능통했던 그녀는 통역사를 자임했고,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 그리고 노년의 이승만에게는 더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이 푸른 눈의 부인에게 많은 신세를 진 셈이다. 이제 위대한 황혼이 지고 있던 하와이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1-21 18: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