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좌절로 인한 충격이 중풍을 불러 이승만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막막해진 순간에 마우나라니(천국의 산이라는 뜻) 요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이라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한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 박사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의 간병이 도움이 되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줘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 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이승만의 정신이 아직 온전했을 때 했던 마지막 기도문이 전해진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더 이상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대못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사랑'이었듯, 이승만을 마지막까지 견디게 한 것도 권력욕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사랑'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씌워진 종의 멍에를 벗기고 자유케 하려던 그 위대한 사랑이었다. 1965년 6월 20일. 이 박사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노화된 장기에서 내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의식은 거의 없는 상태로 야윈 팔에는 검푸른 주삿바늘 자국만이 무수했다. 7월 4일. 한국에서 양아들 이인수씨가 급히 들어왔다. 병원에서는 다시 한번 내출혈이 심해지더라도 응급실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7월 18일. 심한 내출혈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인수씨가 이 박사 옆에 누워 수혈을 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가자 주치의 토마스 문 박사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자정을 넘어 7월 19일 0시35분. 갑자기 호스를 입에 문 이 박사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윌버트 최씨가 관계했던 누와누 장의사가 장례식을 거행했다. 고인이 건립했던 한인기독교회에 고인이 안치됐다. 고인의 상반신이 보일 수 있게 관을 열어두었다. 7월 21일 오후 8시30분,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장할 무렵엔 조화가 교회 전체를 메웠고 수많은 현지인과 교민들이 애도를 표하러 모여들었다. 이 박사의 50년 지기인 하와이 사업가 보스윅이 뒤늦게 연락을 받고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달려왔다. 그는 교회 입구부터 사람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이 박사의 관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걷어내더니 이 박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잘 가게! 내 소중한 친구여…." 이인수씨가 기억하고 있는 한 편의 시 같은 보스윅의 애절한 절규는 고인이 된 이승만의 영혼을 진정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이날 밤 10시30분, 6명의 육해공군 의장대가 조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히컴 공군기지에서 이륙 대기 중인 군 수송기 C-118에 유해가 실렸다. 태극기조차 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이승만을 존경하던 교민과 미 장군들의 배려뿐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한국까지 함께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16명을 태운 채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 정각.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섬으로 온 지 5년2개월 만이었다.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밤하늘의 별들 속으로 사라진 날로부터 60년이 지난 2025년은 그의 탄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가 해양 문명권으로 진입시켜 건국한 대한민국은 오늘날 10대 선진국으로 성장했지만, 북녘 동포를 위한 자유통일을 염원하는 지도층과 국민은 거의 없다. 개인의 근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짜뉴스와 가짜역사에 맞서 싸우려는 언론인과 정치인도 찾기 어려워졌다. 이승만의 가난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세웠지만 오늘날의 부유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도 버거워한다. 단군 이래 물질은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지만, 정신은 탐욕과 빈곤을 헤매는 중이다. 우리가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나라를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잊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창조적 지성을 겸비한 지도자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자유케 한 '이승만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3-18 17:52:00이승만 부부가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그를 존경하는 미군의 화이트 대장, 램니처 장군, 맥나마라, 맥아더, 밴플리트 등 많은 장군들이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방문해 위로하고 갔다. 특히 화이트 대장은 이 박사가 하와이에서 병원 혜택을 받는 데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트리풀러 병원에서의 정기 검사와 치료는 물론이고, 훗날 임종 직전까지 많은 의료 혜택을 주선해 주었다.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이 박사는 귀국이 좌절됨에 따른 분노로 몸져 눕기도 했다. 트리풀러 병원의 주치의는 진찰 끝에 이 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이 하와이 총영사를 지낸 오중정씨를 비롯한 하와이 교민사회를 다시 한번 움직이게 했다.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국으로 모셔야겠다는 결의가 다져졌다. 국내의 반대 여론을 의식해 오중정, 최백렬씨 등이 머리를 맞대고 사과성명을 급조해 이 박사 명의로 발표했다. 이로써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정치적 고려나 조율 따위는 없었다. 최백렬씨는 한국의 날씨를 고려해서 오버코트와 모자를 마련했고, 윌버트 최는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을 다시 매물로 내놓았으며, 이 박사 가족들의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했다. 곤궁했던 말년의 생활비 일체를 지원해준 윌버트 최에게 이 박사는 자신의 거주지인 이화장(梨花莊)의 토지와 시설 소유권 일체를 양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윌버트 최는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1970년 8월 사망했으며, 그 자제들도 이 박사 부부에 대한 후원이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음을 강조했다). 출발 날짜가 확정되자 이 박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교민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 하와이 유력 일간지 애드버타이저지(紙)는 이승만의 귀국을 축하하는 특별 사설을 게재했다. 1962년 3월 17일 아침, 이 박사는 일찍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소파에서 출발 시간만을 기다렸다. 오전 9시30분. 검은 세단 한 대가 언덕길을 올라오더니 이 박사의 집 앞에 섰다. 뒷자리에서 5·16 군사정권이 임명한 김세원 총영사가 최백렬씨와 함께 굳은 표정으로 내렸다. 잠시 후 방 안에서는 이 박사의 왼쪽에 양자 이인수씨, 오른쪽에 최백렬씨가 앉았고 윌버트 최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인수씨 맞은편에 앉았다. 김 총영사는 윌버트 최 옆에 앉게 되어 이 박사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최백렬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박사님, 우리나라를 위해 일 많이 하시고, 늘 우리나라 잘되게 하시고 계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총영사가 말씀드리는 것을 바다와 같이 넓으신 마음으로 알아들으시고 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이 박사는 '무슨 얘길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김 총영사가 "아직은 본국 실정이 가실 만한 때가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를 전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이 박사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갔다. 이인수씨는 양아버지의 싸늘해진 손을 계속해서 주무르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김 총영사의 말이 다 끝나자 이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아주 조그맣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가는 것이…나라를 위하여 나쁘다면, 내가 가고 싶어 못 견디는 이 마음을 참아야지…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잘하기 바라오…." 그러고는 가냘프게 "나라…나라…" 하며 조국을 찾는 듯 뒷말을 잊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곧이어 이 박사는 휠체어로 옮겨 앉은 채 부인과 함께 침실로 사라졌다. 이날 이후 이 박사는 두 번 다시는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이인수씨는 자신이 국내로 들어와 이 문제를 직접 풀어보기로 결심하고 그날로 하와이를 떠났다. 귀국이 좌절된 채 아들도 떠난 집에서 87세의 이승만은 뇌출혈을 겪었다. 급히 트리풀러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회복했지만 후유증인 중풍으로 수족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프란체스카 여사야말로 가장 막막한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의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으로 환산하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우리 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승만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 여사의 간병이 절실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주어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그녀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친정에서도 매월 200달러씩 보내주고 있었다. 한번은 친정에서 종이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 주었는데,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종이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이 '종이 옷장'은 지금도 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건국한 지 77년째가 되는 오늘날, 대통령과 영부인의 기상천외한 일탈로 나라 전체가 어지럽다. 우리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처럼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3-04 18:12:03양자로 하와이에 도착한 이인수씨는 마키키가 1층의 창고 같은 방을 침실로 썼다. 그는 하와이에서 양아버지 이승만을 세 번 모신다. 첫 방문이었던 1961년 12월 13일부터 1962년 3월 17일까지, 두 번째는 1964년 1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그리고 임종을 지키기 위한 1965년 7월 4일부터 19일까지가 전부였다. 그가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밤. 여독을 풀기 위해 2층에서 일찍 내려와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다. 들릴락 말락 하는 노크 소리에 놀라 일어난 이인수씨가 문을 열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프란체스카의 부축을 받고 선 이 박사가 있었다. 프란체스카가 영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버님이 지금 한국말로 뭐라고 말씀을 계속하시면서 나를 끌고 이리로 오자고 해. 그런데 무슨 말인지 통 못 알아듣겠으니 통역 좀 해줘." 이인수씨가 급히 방 안으로 모셨다. 작은 의자에 앉은 이 박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얘야, 우리나라 가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이인수씨는 시간을 의미하는 질문 같지 않아서 "경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물으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수씨가 프란체스카에게 통역을 해드리자, "또 그 걱정이 일어나셨구나. 윌버트 최씨가 한국에 돌아가는 모든 비용을 대준다고 우리에게 약속했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게" 하며 그 과정을 낱낱이 설명했다. 이인수씨가 이 박사에게 우리말로 설명을 해드렸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 언제 내가 우리 땅에 가게 돼?" "한 서너 달 지나면 한국 날씨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는 가시게 될 겁니다." 즉흥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그 말을 좀처럼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떨리는 손을 펴 보이더니 "자, 이것 좀 봐…내가 전에 가려고 할 때, 석 달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자, 지난번에도 하나 둘 셋…지금도 하나 둘 셋이니 왜 세월은 안 간다나?" 하며 세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했다. 이번만은 속지 않겠으니 정확한 날짜를 대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야?" 이승만의 상기된 두 볼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평양 열대섬의 밤하늘 아래서 세 사람은 한동안 속절없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양어머니 프란체스카와 양자 이인수씨가 종종 겪게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이 박사가 컨디션이 좋을 때면 아들 이인수가 부축해 집 주변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 박사는 나라 걱정을 하면서 반복해서 남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것이 이승만의 유언이 되었다. 필자가 받아 기록한 것을 옮긴다.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하며, 경제에서나 국방에서나 두 발로 굳건히 서서,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이 이승만의 독립정신이요, 건국정신의 반석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1898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자기 백성을 노비로 삼았던 조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의 국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지 50년 만인 1948년에야 비로소 자유민주 국가인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었다. 국가 의식에 각성된 23세 때부터 이승만은 단 한 번도 사적인 이득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수많은 보수·우파 지도층들은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유튜브 수익과 책 판매 수입은 늘었겠지만, 후학을 배양하는 자기 희생은 얼마나 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지도층 인사들이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정말 알고나 있는 것일까. 1961년 12월 21일에는 이인수씨가 아버님을 모시고 하와이에서 장의사로 유명한 윌리엄 보스윅의 집을 방문했다. 이승만과 보스윅의 우정은 40년을 넘고 있었다. 1918년 1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의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그의 제자였던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는 중국의 김규식, 본국의 장덕수와 김성수, 일본의 김철과 서병호 등에게 밀서를 보내고 소련에는 여운형을 보내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궐기를 해냈다. 그 여세를 몰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설치되고(4월 11일), 그해 9월 임정 요인들이 모여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일본의 현상수배를 받고 있었던 이승만은 현지 부임을 고민하다 1920년 여름 장의사 보스윅을 찾아가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졌다. 당시 보스윅은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죽어간 수많은 중국인을 수습해 상하이로 운송하는 해상 장의업으로 큰돈을 벌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런 보스윅을 설득해 중국인 시체와 함께 관 속에 몸을 숨겨 상하이까지 밀항하는 데 성공한다. 상하이 임정의 이승만 대통령 도착은 이런 식으로 1920년 12월에 이뤄졌다. 보스윅은 미국인도 감히 해낼 수 없는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가진 동양인 이승만이 안락한 길을 마다한 채 독립운동을 위해 시체와 함께 관 속에 숨어 밀항을 시도하는 헌신적인 태도에 감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평생을 존경하는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이인수씨가 양부모님을 모시고 만나본 보스윅은 이 박사보다 크다고 할 수 없는 키에 넉넉한 풍채를 가진 90세의 노인이었지만 정정하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일행이 돌아갈 준비를 하자 보스윅이 잠시 내실로 들어갔다 오더니 프란체스카의 핸드백 속에 봉투를 넣어 주었다. 프란체스카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밖에까지 따라나온 보스윅은 돌연 이인수의 어깨를 감싸안고 현관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귓속말로 "아가, 잘 돌봐드려라. 그는 굉장한(Great) 사람이야. 40년 친구인 내가 모를 리 있겠나?" 하고는 등을 밀치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이인수는 물론 보스윅의 눈시울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2-18 18:28:38"마키키 집에 가끔 인사 드리러 가면 프란체스카 여사가 과일가루를 물에 탄 주스와 오레오 쿠키 몇 개를 내주셨어요. 모두 싸구려 과자들이었지요. 그 정도로 두 분의 살림살이가 참 곤궁했어요."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 숭모회' 김창원 회장이 필자에게 회고한 이야기다. 노인성 치매를 앓기 시작했던 이 박사는 마당의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거나 거실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도 이 박사는 반드시 귀국하리라는 집념이 있었다. 그 목표를 위한 노인의 눈물겨운 모습은 하와이의 유배생활 곳곳에 배어 있다. 5달러 하는 이발비를 아껴 여비를 모으기도 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이 박사의 머리는 보기 싫을 정도로 길어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손수 이발을 해주어야 했다. 한적한 주택가를 산책할 때면 이 박사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쇠붙이가 여비에 도움이 될 것이며, 튼튼한 노끈도 모아두면 돈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교민들이 가져다준 가구의 빈 서랍 속에는 이런 폐품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적지 않은 방문객이 전해준 카드 봉투 속의 달러들은 프란체스카에 의해 1달러조차 기부자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며 생활비로 충당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저녁에 이분들에게 감사편지를 쓰는 게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은 프란체스카가 한 주일분의 식품을 사들이는 장보는 날. 하지만 이 박사는 아내에게 한사코 시장엘 가지 말라며 옷자락을 놓아주질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굶어서야 살 수가 없잖아요"하고 설명하면 "그러면, 조금만 사 와…돈 써버리면 서울 못 가…"라며 겨우 놓아주었다. 그런 날이면 프란체스카는 장을 보고 와서 아주 작은 봉투 하나만 들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작은 봉투로 이 박사를 안심시킨 다음, 뒷문으로 나머지 물건들을 들여놓곤 했다. 해가 바뀌어 1961년 봄이 왔을 때, 이 박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자신의 후사를 책임질 양자가 없다는 문제였다. 유일한 친아들 봉수를 열 살 때 병으로 잃은 이후 양자의 인연은 한동안 없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였지만 1960년 4월 28일, 이강석은 친아버지(이기붕), 친어머니(박마리아) 그리고 동생들을 살해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가라앉는 것처럼 이승만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의 뒷일을 맡아줄 양자가 절실했다. 하와이의 이 박사 동지들과 제자들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중정 총영사를 포함한 인사들이 몇 차례 회의를 가지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로 4·19 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이순용 전 체신부 장관(1897~1988)을 찾았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이던 1942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특수첩보부대원이 되어 인도와 중국에서 맹활약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청의 방첩대(CIC)에서 백의사와 미군 간 연락업무를 도맡았고, 국군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체신부 장관, 대한해운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건국의 기둥이 되었다가 4·19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이순용씨가 이 박사의 양자를 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입국했을 때는 박정희 소장에 의한 5·16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던 5월 중순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핵심 각료였던 인물이 쿠데타 진영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온 셈이어서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여러 공작을 체험했던 이순용씨는 불안해하는 군부를 설득해 가며 전주 이씨 종친회를 찾아가 이 박사의 양자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그가 찾아낸 양자는 경기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이승용씨의 자제 이인수씨였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경희대 정치학 석사로 유학 준비를 하던 만 30세의 이인수씨는 이 박사와 같은 양녕대군파에다가 항렬도 이승만 바로 아래의 수(秀)자 항렬이었으며, 영어에도 능통해 프란체스카와의 의사소통에도 지장이 없었다. 불과 2년 전 4·19 당시 고려대 후배들의 데모에 박수를 보낸 이인수씨로서는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여러 이유를 대며 처음엔 고사를 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텐데…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는 말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생부 이승용은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겠지만 열심히 모셔라"며 격려했다. 1961년 12월 13일 낮 12시, 이 박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양아들 이인수씨가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최백렬씨와 오중정씨 등 교포 10여명이 이인수씨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일행이 차를 타고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마키키가 언덕길의 하얀 목조주택.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이 박사와 양장 차림의 프란체스카는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을 들어서는 이인수씨를 바라보던 노인 이승만은 기쁨에 겨워 손을 흔들었다. 나무 층계를 올라선 이인수씨는 한국식 큰절을 올렸다. 이승만으로서는 분명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양아들 손을 잡아끌 듯 거실의 소파로 가 앉은 이승만이 처음 물어 본 질문은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지?"였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 갈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이인수씨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런가? 나라가 잘 되어 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너는 남이 잘 된다, 잘 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말거라. 내가…내가…이렇게 절단이 난걸…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라는 건국 대통령의 이 한마디는 그의 뒤를 이었던 12명의 대통령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언일 것이다.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2-04 18:24:07과거의 훌륭한 지도자에 관해 무지할수록 미래의 좋은 지도자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듯, 영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오스트리아인으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부인이 되어 살다 간 프란체스카 도너 리(1900~1992)에 관해서도 무심할 정도로 모르고 산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훌륭한 영부인과의 인연도 희박한 것은 아닐까.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교외인 서스덜프에서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경영하던 실업가 루돌프 도너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것이 유복한 양조장집 딸로 잘못 알려진 배경이다. 프란체스카의 아버지는 그녀가 수학과 외국어에 재능을 보여 가업을 물려줄 생각으로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잘라주기도 했으며 상업학교로 진학시켰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졸업 후 농산물중앙근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영어 통역관 국제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로써 그녀는 독일어와 불어에 능통했으며, 속기와 타자 특기도 보유한 재원(才媛)이 되었다. 20세 때 프란체스카는 카레이서 헬무트 뵈링과 결혼했지만 4년 뒤 이혼했다. 아이는 없었다. 1933년 2월 21일,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스위스로 여행 중 제네바의 드 루시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조우하게 된다. 당시 58세의 이승만은 국제연맹이 만주사변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 조선의 독립을 호소함으로써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회의는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승만은 그해 1월 5일 제네바에 도착해 7월까지 머무르면서 인터뷰와 저술 등으로 분주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프란체스카와의 만남은 이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드 루시 호텔 식당에 들어선 프란체스카 모녀는 어렵게 4인석에 자리했으나 워낙 큰 국제회의가 열리는 중이어서 호텔 식당마다 만석이었다. 그때 지배인이 다가와 "동양에서 오신 귀빈이 자리가 없으신데 합석하셔도 되겠습니까"라고 양해를 구했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가 이승만을 한번 훑어본 뒤 안심하고 승낙했음은 물론이다. 프란체스카는 맞은편에 앉은 이승만의 가난했지만 품위 있는 태도에 매우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그녀와 이승만 박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또 한 편의 신비한 드라마일 것이다. 프란체스카가 식사하는 노 신사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을 때 신사는 "코리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프란체스카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여행 직전에 읽은 책이 '코리아'였기 때문이다. 주저 않고 그녀가 말했다. "코리아에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지요." 바로 그 자리가 두 사람의 정신과 영혼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 시작한 곳이었다. 망국의 독립운동가가 국제회의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각국 외교관들을 감복시킬 문장력이 필수였다. 문장력이 있다면 그다음엔 이를 적시에 인쇄본으로 만들어 배포하며 외교가에 여론을 형성할 실행력이 있어야 했다. 국제연맹을 결성한 프린스턴대학교의 우드로 윌슨 밑에서 동양인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이승만은 유려한 문체의 영문서를 수시로 작성했지만, 현지에서 그를 도울 타이피스트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곤 했다. 프란체스카는 식당에서의 만남 이후 몇 건의 서류를 타이핑해주었다. 동양 신사의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에 이끌린 그녀와 이승만 박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절제된 사랑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해야 적당할 것 같다. 빈의 숲속을 함께 거닐며 노처녀 프란체스카가 이 박사에게 배운 한국말은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단어였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녀의 어머니가 귀국을 서두르는 바람에 그녀는 어머니 몰래 김치맛 나는 사워크라우트 한 병을 호텔 지배인에게 맡기고 떠나야 했다. 그로부터 1년8개월 뒤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당연히 프란체스카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59세의 이승만 박사는 이 무렵부터 25세 연하의 아내 프란체스카를 '화니(Fanny)'라는 애칭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두 분의 용기에 힘입어 탄생할 수 있었던 국가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노고(勞苦)는 1인 다역이었다. 1940년 하와이에서 국제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을 때, 이들 부부는 워싱턴의 값싼 방 하나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이 열악한 공간에서 두 사람은 미국의 지성을 뒤흔드는 역작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출간했다. 당시 프란체스카는 그 원고를 세 번이나 타이핑해야 하는 바람에 손끝이 터지고 짓물렀다고 한다. 이처럼 남편 이승만의 독립운동에는 동지였으며, 건국과 함께 영부인으로 외교 업무에 큰 힘을 보탰다. 국제전으로 확전됐던 6·25 전쟁 중에는 다양한 비밀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국제사회에 전쟁의 참상을 알려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냈다. 독일어와 불어에도 능통했던 그녀는 통역사를 자임했고,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 그리고 노년의 이승만에게는 더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이 푸른 눈의 부인에게 많은 신세를 진 셈이다. 이제 위대한 황혼이 지고 있던 하와이 마키키가의 목조주택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1-21 18:10:11하와이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 목조 주택은 이 박사의 거처를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전 1년4개월간 기거했던 마지막 주택이었다. 거실 겸 부엌 하나에 방 두 칸으로 비탈길 옆에 지어진 집이어서 위쪽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아래쪽에서 보면 2층이기도 했다. 아래쪽에서 보이는 1층엔 창고 같은 자투리 공간 하나가 있었다. 오중정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마키키의 작은 집. 아주 쬐그만 집. 마당까지 해서 30여평이나 될까? 일층은 지하실까지 해서 창고 같은 방이 하나. 뒤에는 작은 뜰이 있었고, 이층에 사방 3m가 조금 넘을까 하는 침실이 두 개, 그리고 부엌 하나. 그뿐이었어요. 이 박사는 거기서 신문지를 갖다 놓고 붓글씨를 쓰시곤 했지. 지금도 이 집은 있지만 수리를 해서 조금 모양이 변했지요." 마키키의 집으로 이사할 때 동포들이 가져다준 가구 중에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조립식 식탁도 거실에 놓여 있었는데, 현재는 이화장에서 볼 수 있다. 가로 120㎝, 세로 90㎝ 되는 포마이카 식탁은 3등분으로 접을 수 있는데, 건국 대통령 부부가 식사 때마다 성경 구절을 읽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와 나라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던, 두 분의 예배당 겸 식탁이었다. 오늘날까지 이 박사 부부의 청빈한 신앙 생활을 신학적이나마 제대로 연구한 성과물이 없다는 것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불교와 유교를 벗어나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나 가족의 복리를 위한 기복적인 기도를 올려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이타적 기도를 드린 참다운 신앙인이었다. 기도(聖)만이 아니라 그의 삶(俗)이 그러했다. 1913년 미국 감리교단의 요청으로 하와이 한인기숙학교 교장이 되기도 했지만, 이승만의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에 감리교단이 제동을 걸자 이승만은 과감하게 미국 감리교단과 단절했다. 그리고 1918년 한인들끼리 힘을 모아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했다. 무교파(無敎派) 자치교회인 '하와이 한인기독교회(Hawaii Korean Christian Church)'가 그것이다. 1938년 신축한 예배당은 건물 외부를 광화문을 본떠 지었지만 외부에는 십자가 하나 걸지 않았다. 십자가를 외부로 내걸지 않은 이 교회야말로 이승만의 종교철학이 스며든 '민족교회'였다. 교세 확장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나라를 되찾기 위한 교회였다. 그런 이승만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교민들이 신도가 되었고 조직원이 되었으며 이승만의 독립자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 신도들은 이 교회를 '자유 교회' '독립 교회'라고도 불렀다. 이승만이 세운 교회는 자유 독립의 대한민국을 잉태한 산실이었다. 이승만이 가장 좋아했던 성경 갈라디아서 5장1절의 "두 발로 굳건히 서서,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처럼 무교파의 한인기독교회는 독립정신의 칼날을 세운 곳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그를 위한 기념관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지만, 정작 그의 종교적 태도를 본받기 위한 노력은 같은 종교계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정신을 살린 무교파 교회, 자유 교회, 독립 교회를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성(聖)과 속(俗)의 관계 정립을 이승만은 평생에 걸쳐 몸소 실천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그의 삶 속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또다시 구한말과 같은 위기 상황으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되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노년에 이른 이승만의 신앙 생활이 감동적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푸른 눈을 가진 25살 연하의 프란체스카가 함께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립식 포마이카 식탁에서 이 박사는 식사 때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고, 아침마다 서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서편이야. 바로 저쪽이 우리 한인들이 사는 데야" 하고는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아니 식사는 안 드실 생각이세요" 하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주의를 환기하면 매우 못마땅한 듯이 "왜?"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회고록에서 "우리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워싱턴에서의 독립운동 시절과 같이 살림을 꾸려 나갔다. 우리를 도와주는 동지들과 제자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우리는 이런 생활이나마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썼다. "단 두 식구가 사는 간단한 살림이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일했다. 나는 집안을 청소할 때마다 창문의 유리를 두 장씩 닦아 나갔다. 그렇게 하면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닦아야 할 집안의 유리 창문은 모두 나의 손을 한 번씩 볼 수가 있어 깨끗한 창문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는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고 나무에 손질을 하며 마음속의 시름을 달랬다. 대통령은 이때에도 무슨 음식이나 잘 들었고 체중이 주는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항상 과식을 삼가도록 배려했다. 체중이 늘면 고혈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특히 노인의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보행을 위해 매일 시간을 정해 옥외로 함께 나가 산책을 했다. 이렇게 1960년 한 해를 하와이에서 넘기게 되자 1961년 설날, 나는 떡국을 끓여 대통령에게 아침 식사를 들게 했고 친지와 교포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세배를 와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25년 연상의 동양 노신사를 만나 12년간의 독립운동, 12년간의 퍼스트 레이디, 그리고 유배지 하와이에서의 5년2개월간 병구완을 해낸 아름다운 여인 프란체스카를 잠시 만나러 가보자. <계속>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1-14 18:45:161960년 5월 29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탄 비행기가 김포를 이륙해 하와이로 날아가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야한 이승만 박사 부부가 새벽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망명해 버렸다'는 언론 보도 때문이었다. 한 달 전인 지난 2024년 12·3 계엄 사태를 맞은 것처럼 경천동지할 충격이었다. 5월 29일 경향신문 석간은 4면 중 3면 전체를 할애해 특종 보도를 했고, 다른 언론사들은 뒤늦게 이를 받아 쓰며 이 박사 부부를 차갑게 대했다. 국회도 마찬가지였다. 한 정치인은 이승만 박사가 수천만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렸다고 주장했고, 31일 김용갑 재무부 차관은 집권 12년간 1990만달러를 유용한 혐의로 이 박사를 기소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권좌에서 추락하면 으레 겪어야 하는 수모의 인간사일 것이다. 현지시간으로 5월 29일 오후 2시30분, 이 박사 부부만을 태운 전세 여객기가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하와이 한인 동지회' 교포들이 마중 나와 있었고, 외신기자 100여명이 몰려들었다. 떠날 때와 정반대였다. 하야한 대통령에 대한 의전 문제가 생기자 총영사 오중정씨가 미국 측에 대통령의 예우를 비공식으로 간청했다. 미국 측은 쉽게 양해해줘 세관 검색 등을 생략했다. 하와이 교민 측이 제기한 북한의 암살공작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 위해 공항 옥상에 기관포를 거치시키기도 했다. 기내에 올라간 오중정 총영사가 본 광경은 텅 빈 기내의 맨 뒷줄 가운데에 노 부부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독립운동을 함께한 제자이기도 했던 오중정 총영사의 인사를 받고 이 박사는 반가워하며 "내가 여기 좀 쉬러 왔어. 한 3주일 쉬고 갈 거야. 오 영사"라고 했다. 트랩에서 내리는 이 박사 부부의 안전한 이동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경호 관계자들이 환영 인파와의 일정한 거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이게 무슨 말이야. 내 동포에게 내가 못 간다니" 하며 군중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하와이 유력 일간지 '에드버타이저' 5월 30일자 신문은 당시 85세 고령의 이 박사가 한국 정부에서 주장하는 공금 유용설과 망명설을 전면 부정하며 "난 단지 쉬러 왔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승만의 제자이자 하와이에서 조경 사업으로 성공한 윌버트 최씨의 별장이 이 박사 부부의 숙소로 제공됐다. 모두가 3주 정도 머물다 귀국할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은 1988년에 출간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에도 있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했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싶었다. 우리는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에 나가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한인기독교회에 참석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그러나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갔다는 것은 세 번에 불과했다. 당시 하와이 주재 조선일보 통신원 차지수씨의 기사를 살펴보면 이 박사가 망명 생활 동안 공적 모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교회에 세 번, 해양대학 훈련생의 하와이 친선 방문 때 한 번, 교포 목사 딸의 백일 잔치 때 한 번이다. 오중정 총영사는 애견 해피를 위한 세 번의 외출이 가장 큰 나들이였을 것이라고 했다.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서 머물던 이 박사 부부의 귀국이 계속 미뤄지자 측근들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한국에 두고 온 애견 해피의 미국행이었다. 뭉툭한 코에 처진 귀와 드문드문 노란 점이 있던 이 개는 슬하에 자식이 없던 이 박사 부부로부터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편정희 여사에게 "한 달만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며 맡겨 놓았다. 편 여사로부터 애견 해피가 하와이에 도착했지만 하와이 주법에 의해 120일간 검역 구역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 시기에 이 박사는 애견 해피를 면회하기 위해 세 번이나 외출을 감행했다. 말년에 이 박사의 공식 외출이 다섯 번에 불과했으니, 그가 해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양복 차림의 이 박사가 가건물 외벽을 등지고 앉아 해피를 안고 찍은 사진은 이 무렵의 것이다. 하야 후 하와이에 도착했던 그해 연말부터 이 박사는 이유 없이 귀국이 늦어지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보행에 불편을 느껴 부축을 받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으로 자주 트리풀러 육군병원을 다녀야 했다. 길어야 한 달일 것으로 믿고 간단한 옷가지만을 챙겨왔던 이 박사 부부로서는 별장에서의 체류 기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며 6개월로 접어들자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바닷가 별장과 시내의 거리가 문제였다. 차로 달려서 병풍처럼 높은 산을 넘어 40분 이상이나 달려야 시내로 갈 수 있었다. 이 박사 부부를 친부모님처럼 모셨던 최백렬씨와 오중정 총영사 그리고 윌버트 최씨 등이 머리를 맞댔다. 마침 윌버트 최씨가 매각하려 내놓은 마키키가 2033번지의 20평이 조금 넘는 목조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교포들은 이 박사 내외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도록 주선했다. 교민들은 자신들이 쓰던 가구며 생활에 필요한 집기들을 가져다주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감사를 표시하며 받아들이는 동안 이 박사는 "누구한테 받은 것인지를 잘 써 두었다가 나중에 꼭 돌려주어야 해"라며 잔소리를 했다. 여기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부부의 마키키가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연 건국 대통령 부부를 이렇게 홀대하는 국민들은 결코 좋은 지도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고 후임 대통령들조차 노후가 편치 않게 될 것이었다.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바처럼.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1-07 18:58:28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개발도상국 중 70여년 만에 인구 2000만명 이상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최빈국에서 출발해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큰 경제발전을 이룩한 세계 유일의 국가다. 그런 나라를 건국한 대통령이 쫓기듯 망명해버렸다는 역사를 버젓이 기록하고 있는 나라도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승만이 거주했던 이화장에는 모든 짐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망명객의 텅 빈 집이 아닌 것이다. 그는 망명 간 적이 없었다. 다만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오해는 매우 많지만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망명했다는 주장이다. 장기집권을 해온 자유당은 집권 여당으로서 창당한 채 권력이양 경험도 없었다. 당시 우리 헌법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기 선출함으로써 서로 정당이 다를 수 있었으며, 대통령 유고 시 권력은 부통령에게 이양되도록 해 자칫 대선을 치르지도 않은 채 권력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었다. 특히 1960년 3·15선거에서는 이승만의 경쟁자인 조병옥 대통령 후보가 신병 치료차 도미했다가 의료사고로 사망하게 됐다. 이로써 자유당은 단독후보가 되어 당선이 기정사실화된 이승만의 4대 대통령 선거에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부통령 선거였다.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44.03%)와 민주당의 장면 후보(46.43%)의 경쟁은 이미 1956년에도 있었지만 이기붕 후보의 경쟁력은 약했다. 선거에서 민주당이 부통령 선거를 이길 경우 84세로 이미 고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임기 내에 유고가 발생하면 권력은 자연히 민주당으로 이동하게 된다. 1957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노쇠현상을 보이고 있었고 치매 초기 증상도 겪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자유당은 조직적으로 관권을 동원해 가며 부통령 선거에 개입하게 됐다. 그 결과 부통령 선거의 결과는 이기붕 79.19%, 장면 17.51%였다. 유권자들은 수긍하지 못했다. 개표소에서 유권자보다 많은 기표용지가 발견돼 유권자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특히 마산에서는 1만여명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유혈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무차별로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하는 중에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 실종됐다. 그의 시신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인 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시위는 삽시간에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반공청년단이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4월 19일 오전부터 3만여명의 대학생과 중고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19혁명이었다. 총포 소리가 경무대에까지 들리자 대통령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각하의 당선을 축하하는 축포를 쏘는 겁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극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때는 경무대 발포 이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민 중 가장 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각 총사퇴(4월 21일)가 있고, 허정 외무장관이 과도정부 수반(4월 24일)이 되었다. 그사이 4월 23일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부상 학생을 찾아 손을 어루만지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 "장하다…장하다…젊은이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서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어떻게 백성을 죽일 수가 있어? 내가 그만두면 사람들이 더 안 다치겠지…." 이승만이야말로 전제정치의 불의를 보고 일어나 자유를 향해 평생을 달려온 투사였다. 60여년 뒤 자신이 세운 나라의 청년들이 자신을 향해 불의를 외치며 달려들고 있을 때 이승만은 "장하다"며 격려했다. 이승만은 주변 여러 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퇴성명서를 작성했다. "국민이 원하니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 3·15 선거를 다시 하겠다. 이기붕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하고자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는 것을 명심하라." 4월 26일 이승만은 12년간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이화장까지 승용차로 이동했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4·19혁명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호헌혁명이었다. 이화장 가는 길의 시민들은 그런 이승만과 이미 화해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노후에 편안하시라" "리박사 하야-만수무강"이라는 벽보를 내걸었다. 이화장 담장 너머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승만은 "놀러들 오시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과 반정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머지않아 망명을 떠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승만과 함께 이화장으로 돌아간 프란체스카 여사는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예배를 봤다. 대통령 건강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몇 주일 쉬고 오는 게 좋지 않으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하와이로 가게 된 계기였다. 그녀는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고 자서전 '대통령의 건강'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5월 중순경 프란체스카 여사가 하와이 출국을 위한 비자 문제로 주한 미대사관과 협의가 마무리되자 이승만의 제자이기도 했던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은 하와이의 오중정 총영사에게 외교행낭 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 박사님 부부가 3주가량 요양하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는 요지였다. 이승만의 제자 윌버트 최, 최백렬, 그리고 오중정 총영사가 모여 초청장을 보내고 조경사업을 하던 윌버트 최의 별장으로 모셔서 임시로 지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5월 28일 저녁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29일자 신문을 발행하면서 "이박사 부처 해외망명설"이란 제하의 기사를 1면에 크게 내걸었다. 가판에서 많이 팔릴 수 있는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경향신문 윤양중 기자는 새벽에 이화장에 가면 큰 기사를 건질 수 있을 거라는 익명의 제보를 받고 달려갔다. 정치 담당 기자가 아니어서 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했다. 망명할 것이란 기사였다. 윤양중 기자가 사진기자와 함께 신문사 지프를 타고 이화장 밖에서 잠복대기하던 중인 오전 7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보름이나 길어야 한 달 정도 다녀올 짐을 챙긴 채 마당으로 나섰다. 대통령의 옷을 담은 트렁크, 여사의 옷가지와 소품을 담은 트렁크, 점심과 약품 상자가 든 가방, 그리고 평소에 사용하던 타이프라이터가 전부였다. 마당엔 경호관들과 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대통령은 "늦어도 한 달 후에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 줘"라고 부탁했다. 대통령을 태운 검은 세단이 경찰의 경호를 받으며 김포공항으로 달려갈 때 경향신문 기자를 태운 지프만이 뒤를 따라갔다. 공항에는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나와 이승만을 배웅했다. 이승만은 허정에게 "나,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소"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두고 한 말이었다. 허정은 "염려 말고 푹 쉬고 오십시오"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당시 비행기는 하와이의 교민들이 비용을 모아서 자유중국 민항기를 전세 낸 것으로, 대통령이 도착했을 때 승무원들은 공항식당에서 식사 중이었다. 출발이 지연되는 사이, 윤양중 기자와 사진기자는 비행기에 올라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경향신문은 호외를 뿌렸다. 저녁의 경향신문 석간은 4면 중 3면 전체를 망명 특집기사로 다뤘다. '이승만 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 '주인 잃은 이화장, 싸늘하고 빈 무덤 같아' '책상 위엔 펼쳐놓은 성경 한 권만' '저 개 좀 봐 저것만 남았군' '온돌방에는 파리채만 뒹굴어'. 이중 기내에서의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당시 일간지 85개, 주간지 376개, 월간지 200개로 언론의 자유가 구가되던 시대였다. 모든 언론들이 일제히 윤양중 기자의 기사를 따라 쓰며 이승만 망명을 보도했다. 1896년 협성회회보를 시작으로 최초의 주간 신문사를 창간했고 1898년 4월 최초의 민간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운영한 언론의 선구자 이승만이었다. 그로부터 60년 뒤 자신의 후배 기자들에 의해 이승만은 필화를 겪게 됐다. 그리고 역사가 돼 버렸다. 이승만은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90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5년2개월간을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고국을 그리다 눈을 감았다. 자신이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사람들이 왜 자신을 망명객이라 부르는지 잘 모른 채로. 이동욱 전 KBS 이사 ■ 이동욱 전 KBS 이사 △1959년생 △부산 △서강대 물리학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석사) △월간조선 기자 △한국갤럽 전문위원 △KBS 이사 △저서 '우리의 건국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 외
2025-01-01 19:12:03[파이낸셜뉴스] 국가보훈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제59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시민 등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강한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신 분”이라며 “정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신명을 바쳐 희생·헌신하신 모든분들이 제대로 예우받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1954년 11월 17일, 외교적 역량을 발휘해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군사적 지원계획을 담은 한미합의의사록 조인과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 교환을 통한 공식 발효로 한미동맹을 제도적으로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의 토지개혁 성공이 꼽힌다. 1875년 황해도 출생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을 발행해 주필로 활동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됐으며,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저술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 후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태평양잡지' '태평양주보'를 발간했으며,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미국 대통령과 국무성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적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한 바 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4-07-18 10:12:00[파이낸셜뉴스] 국가보훈부는 올해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유족에게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패를 수여한다고 26일 밝혔다. 보훈부에 따르면 강정애 보훈부 장관이 이날 오후 4시 이 대통령이 생전에 거주했던 서울 종로구 이화장을 방문해 이 대통령의 손자 이병구씨 며느리 조해자 씨에게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패를 전달한다. 이날 선정패 전달에는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가 함께한다. 선정패 전달 후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초대 내각을 구상했던 조각당 등 이화장을 둘러볼 계획이다.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공적을 널리 알려 국민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보훈부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선정한다. 1992년 선정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총 501명이 선정됐다. 보훈부는 지난해 12월 25일 올해(2024년)의 독립운동가로 이 대통령을 비롯해 여성 독립운동가, 광복군 부부, 아일랜드 선교사 등 38명이 발표했다. 특히 올해부터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매월 발표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유족에게 선정패를 제작해 전달할 예정이라고 보훈부는 전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4-01-26 09:4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