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지난해 9월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에서 흉기를 휘둘러 등교 중이던 일본인학교 초등생을 숨지게 한 중국인 남성이 사형됐다. 22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중국 외무성은 하루 전 주중 일본대사관에 이같은 내용을 통보했다. 사형이 집행된 범인 A씨는 지난해 9월 18일 선전에 있는 일본인학교에 등교하던 10세 초등학생을 학교 입구에서 200여m 떨어진 곳에서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올해 1월 1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A씨는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았다. 당시 사건 발생일이 1931년 일제가 만주 침략 전쟁을 개시한 만주사변(9·18사변) 93주년인 점에 주목해 증오 범죄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일본 정부가 현지 일본인 안전 확보를 위한 대책을 요구하는 등 양국 간 외교 현안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y27k@fnnews.com 서윤경 기자
2025-04-22 14:15:44[파이낸셜뉴스]중국 법원이 지난해 9월 광둥성 선전에서 등교하던 일본인학교 초등생을 살해한 범인이 사형을 선고했다. 24일 일본 NHK는 선전시 중급인민법원은 이날 44세 중국 남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9월18일 광둥성 선전시에서 등교하던 10세 일본 아동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그날은 1931년 일제가 만주 침략 전쟁을 개시한 만주사변(9·18사변) 93주년 기념일로 이번 사건이 증오 범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일본 정부는 현지 일본인 안전 확보를 위한 대책을 요구했고, 이 사건은 양국 간 외교 현안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지난 23일 쑤저우 중급인민법원은 일본인학교 스쿨버스를 공격한 범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6월 쑤저우시에서 50대 중국 남성은 일본인 학교 스쿨버스 정류소에서 흉기를 휘둘어 중국인 등하교 도우미 1명이 숨지고 일본인 모자가 부상을 입었다. june@fnnews.com 이석우 기자
2025-01-25 07:33:43[파이낸셜뉴스] 언론사와 서울 일본인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내용의 일본발 테러 협박이 재차 들어와 경찰이 수사 중이다. 6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이날 오전 3시17분께 이같은 내용의 팩스가 외교부에 들어왔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팩스에는 8일 오후 3시30분부터 9일 오후 8시10분까지 여러 언론사와 일본인 학교에 드론으로 폭탄을 떨어뜨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팩스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쓰여 있었으며 발신인은 자신이 일본인 변호사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8월부터 일본에서 검찰과 경찰, 관공서 등을 상대로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 메일이 수차례 발송됐으며, 지난해 말에는 협박 팩스를 받았다는 신고가 이어졌다. 경찰은 지난해 8월 발송된 메일부터 최근의 협박 팩스까지 일본인 변호사임을 주장하는 점 등이 유사하다고 보고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 중이다. yesyj@fnnews.com 노유정 기자
2024-01-06 10:31:52학교 연혁 소개에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교장의 사진이 그대로 소개되는 등 일제 잔재가 남아있는 학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지부(이하 경기 전교조)는 "3·1항쟁 100주년을 맞아 도내 초·중·고교에 일본 제국주의 시대 잔재가 남아있는지 조사해 본 결과 아직도 일본인 교장을 소개하는 학교들이 발견됐다"라고 28일 전했다. 경기 전교조가 일제 강점기 기간 개교한 학교를 대상으로 표집 조사한 결과, 파주 A고교와 안성 B초등학교의 경우 복도 등에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교장 사인이 걸려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가평의 C초등학교는 학교 홈페이지 연혁란에 초대 교장으로 일본인 교장의 이름을 기재해 놓기도 했다. 경기 전교조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에 일본 제국주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라며 "도교육청이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공동조사단을 꾸려 학교에 남아있는 친일 잔재를 전수조사하고 청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인교장 #일제잔재 #학교 banaffle@fnnews.com 윤홍집 기자
2019-02-28 16:05:00서울시립대는 세무대학원을 졸업한 일본인이 학교의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1000만원을 기부했다고 26일 밝혔다. 화제의 주인공은 하라야마 미치타카 씨(45·법무법인 율촌 일본기획팀장). 지난 2012년 2월 졸업한 하라야마 씨는 재학 중 받은 장학금을 학교에 돌려주기 위해 목표 금액을 정하고 1년 만기 정기적금에 가입한 후 매월 100만원씩을 불입하였고, 22일 만기일이 된 적금을 해약해 이 대학에 기부했다. 하라야마씨는 2011년까지 17년간 일본 국세청에서 근무한 공무원이다. 2007년 한국의 세법과 세제 등을 연구하기 위해 서울에 온 하라야마 씨는 당시 전자세금계산서, 현금영수증제도 등 일본보다 앞선 한국의 조세 전산화에 대해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대에 수학 중인 친구가 서울대 경영학과를 권했고, 학업계획서를 들고 찾아갔던 경영학과 교수는 세무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하라야마 씨에게 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을 추천했다. 2010년 동 대학원에 입학한 하라야마 씨는 한국어를 곧잘 했지만 전문적 지식과 토론을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한 학기를 보낸 하라야마 씨는 대학원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휴직계를 냈다. 당장 수입이 없어지자 부인과 두 자녀가 있는 40대 가장에게 3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은 부담이었다. 하라야마 씨는 학교에 혹시나 장학제도가 있는지 물었고, 지도교수인 박 훈 교수(서울시립대 세무대학원)는 나머지 학기 동안 장학금과 함께 생활 보조금도 받게 해 주었다. 하라야마 씨는 졸업 후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꼭 은혜를 갚으리라 생각했다. 2012년 1월 법무법인 율촌에 취직한 하라야마 씨는 졸업과 동시에 그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1년짜리 적금에 가입한 것이다. 하라야마 씨는 "한국이 일본보다 기부문화는 더 활발한 것 같다. 대통령, 기업가, 연예인 등 기부하는 사람도 아주 다양하다"며 한국 기부문화를 칭찬했다. 그는 "기부를 결정적으로 결심한 것도 어느 한국인 세무사 덕분"이라며 "2010년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 분이 졸업한 요코하마국립대에 기부한 기부증서를 보게 됐다. 나도 앞으로 돈을 벌면 기부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 한국인 세무사가 '기부는 돈이 많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나도 할 수 있고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월급 일부를 저축해 기부를 실천한 하라야마 씨는 "아내도 기부에 찬성했지만 그 금액은 정확히 모른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rainman@fnnews.com 김경수 기자
2013-02-26 09:19:18▲ 사진 김현우 기자배우 엄지원이 ‘경성학교’에서 펼친 일본어 연기에 대한 소감을 밟혔다. 9일 오후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영화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감독 이해영) 제작보고회에 이해영 감독을 비롯해 박보영, 엄지원, 박소담이 참석했다. 이날 엄지원은 극 중 일본어 대사에 대해 “잘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말의 한 부분처럼 보이도록 준비했다.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고 일본어 선생님이 계셨다”라며 “감정이 들어간 부분은 감정의 일환이라서 자연스럽게 됐던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어 엄지원은 “첫 신에 굉장한 공을 들였다. 일본어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닌 ‘일본사람인가’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엄지원은 극 중 우수한 학생을 뽑아 도쿄로 보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기숙학교의 총 책임자 교장 역을 맡았다. 한편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은 1983년 경성의 기숙학교에서 사라지는 소녀들을 한 소녀가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으로 오는 18일 개봉한다. /fnstar@fnnews.com fn스타 홍가화 기자
2015-06-09 18:21:22[파이낸셜뉴스] 대한민국 육군장교 통합임관식이 육군참모총장 직무대리 고창준 대장 주관으로 충북 괴산군 육군학생군사학교에서 열렸다. 27일 육군에 따르면 이날 학사사관 70기와 간부사관 46기 등 총 407명의 인원들이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고 직무대리는 이날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웅의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정신을 이어받아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도록 하는 것이 군인인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선배 전우들의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는 길”이라며, 장교로서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신임장교들에게 “국민에게 신뢰받는 육군의 진정한 리더로 성장해주길 기대한다”고 격려했다. 임관식에는 가족, 친지, 총동문회, 교직원 등과 외부인사 등 3200여 명이 참석해 신임장교로 임관한 소위들의 힘찬 출발에 축하와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이날 임관한 장교들은 14~16주(간부사관 14주, 학사사관 16주)의 기간 동안 전술학, 전투기술학, 군사학 등 강도 높은 교육훈련과 임관종합평가를 거쳤다. 영예의 대통령상은 정효훈 소위(경운대, 학사)가, 국무총리상은 황보선호 소위(영남대, 학사), 국방부장관상은 김성환 소위(한서대, 학사)와 전준호 소위(경희사이버대, 간부), 합참의장상은 유욱재 소위(신한대, 학사), 한미연합군사령관상은 전훈민 소위(한양대, 학사), 육군참모총장상은 최어진 소위(건국대, 학사)와 이인환 소위(학점은행제, 간부)가 각각 수상했다. 임관식을 마친 신임장교들은 약 4개월간 각 병과학교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 교육’을 이수 후, 전후방 각지의 부대로 배치될 예정이다. ■항일의병장·6·25전쟁 참전용사 후손 신임장교들의 다양한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오도열 소위(학사)는 항일의병장의 후손이다. 오 소위의 외증조부(故 강판수)는 1908년 전남 나주·화순 일원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부친(오연재)은 학사 25기로 전역한 예비역 소령이다. 오 소위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의 꿈을 키워왔으며, 병사로 전역 후 장교로 임관하면서 2개의 군번을 가지게 되었다. 오 소위는 “외증조부님과 아버지가 지킨 우리나라를 이제는 제가 지켜나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6·25전쟁 참전유공자 후손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용현 소위(학사)의 조부(故 이의천)는 6·25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충무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부친(이태영)은 해군 원사로 전역했다. 최규찬 소위(학사)의 외조부(故 안승준)는 6·25전쟁 당시 금화지구전투(현 강원도 김화)에 참전했다. 더불어, 최 소위는 병·부사관에 이어 장교로서 3번째 군번을 보유하게 된 인원으로, 외할아버지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가고자 장교로 임관하였다. 강민 소위(학사)의 조부(故 강용희)는 6·25전쟁 당시 압록강 초산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사촌 형 3명도 모두 장교 출신으로 강 소위는 할아버지와 사촌 형들을 보며 장교의 꿈을 키웠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김선민 소위(학사)의 조부(故 김정덕)는 6·25전쟁 때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해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김 소위는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대한민국을 이제는 내가 지켜나가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3대(代)를 이은 국가에 헌신, 학사장교 출신 군인가족 3대를 이어 국가에 헌신하는 신임장교도 있다. 우지현 소위(학사)의 조부(우수성)는 육군 갑종장교 중령으로 전역했으며, 부친(우석제)은 육사 52기로 현재 51사단장(육군 소장)으로 임무 수행 중이다. 또한, 남동생(우지호)도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가족이다. 우 소위는 “가장 존경하는 분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본받아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학사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전했다. 안준혁 소위(학사)의 조부(故 안득순)는 베트남전에 참전 후 육군 중사로 전역했다. 부친(안동호)은 항공준사관으로 육군 준위로 전역했으며 2명의 삼촌들도 모두 장교 출신인 가족이다. 또한, 안 소위는 태권도 겨루기 선수 출신이기도 하다. 태권도 지도자로 생활하던 그는 대를 이어 국가에 헌신하고자 장교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부친이 학사장교인 신임장교들도 화제다. 백서하 소위(학사)의 부친(백승만)은 학사 21기 예비역 소령이다. 외숙부(조계훈) 역시 공군 학사 출신인 가족이다. 김재현 소위(학사)의 부친(김병천)은 학사 22기, 김가은 소위(학사)의 부친(김형욱)은 학사 29기, 이호준 소위(학사)의 부친(이문규)은 학사 35기 출신 예비역이다. 박소원 소위(학사)의 부친(박영준)은 학사 35기로 현재 경기북부시설단에서 중령으로 복무 중이다. 박 소위는 “장교로서 높은 자부심을 가지신 아버지를 보고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학사장교를 꿈꿨다”고 전했다. ■복수국적 포기 재입대, 다자녀·부부군인·군번 3개와 4개 보유자 복수국적을 포기하고 재입대한 사례도 있다. 어머니가 일본인인 장대현 소위(학사)는 태어나면서부터 복수국적자였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병사로 의무복무를 마쳤다. 군 생활 간 큰 보람을 느낀 그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장교가 되고자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임관하였다. 장 소위의 부친(장동기)은 학사 25기 출신 예비역 소령이다. ‘다자녀·부부군인·3개 군번’이라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인원도 있다. 이다은 소위(간부)는 3남매(5세, 3세, 1세)의 엄마다. 남편(김용수 상사)도 현재 50사단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부부군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소위는 해병 부사관, 육군 부사관으로 복무한 바 있어 이번 임관으로 3개의 군번을 가진 주인공이 되었다. 임관과 동시에 군번이 4개가 된 신임소위도 있다. 황건우 소위(간부)는 6사단에서 병사로 복무 후 동일 부대에서 임기제부사관으로 임관했다. 이후 해군 부사관으로 재입대한 그는 이번에 육군 장교로 임관함으로써 4개의 군번을 소유한 인원이 되었다. 황 소위는 “리더십을 가진 장교가 되어 부대원을 이끌고자 간부사관에 도전하게 됐다”고 전했다. ■쌍둥이 동시 임관, 태권도·사격 선수 출신 이란성 쌍둥이인 강지원 소위(학사)와 강지윤 소위(학사)도 나란히 임관했다. 언니인 강지원 소위가 먼저 장교에 지원하였으며, 동생인 강지윤 소위는 쌍둥이 언니의 권유로 언니와 같은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강지원 소위는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서로가 힘이 되어 주며 힘든 훈련을 잘 이겨내고 성장했다”며, “부임지에 가서도 서로 버팀목이 되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쌍둥이 자매가 되겠다”고 전했다. 오재민 소위(학사)는 7년 동안 사격 선수 생활을 한 체육특기자다. 선수로서 거둔 우수한 성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으나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에 장교로 임관했다. 김영우 소위(학사)는 태권도 선수로서 지난해 일본 오사카컵 1등, 2021~2024년 대학연맹태권도대회 4년 연속 1등의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원이다. 김 소위 역시 국가와 국민을 수호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장교에 지원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5-06-27 15:44:44[파이낸셜뉴스] 2025년 6월의 독립운동으로 1926년 순종의 장례를 기점으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인 '6·10만세 운동'이 선정됐다. 30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6·10만세 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 서거 후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민족적 움직임에서 시작됐다. 당일 서울의 창덕궁 돈화문에서부터 시작된 장례 행렬이 지정된 경로를 따라 진행되는 동안, 도심 곳곳에서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앞장서서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뿌렸다. 이날의 만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학생만 200명이 넘었으며, 경찰의 진압과 체포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을 당했다. 이와 함께, 지방의 수많은 학교에서도 순종 서거 이후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고, 이를 가로막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에게 동맹휴학으로 맞서는 등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됐다. 이후 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조직적 참여가 전국으로 확산, 이는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이 전국적, 전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6·10만세운동은 침체한 민족 운동에 새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신간회 결성 및 3·1운동 정신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잇는 가교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5-05-30 11:08:24"문제는 정치야, 바보야!"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정치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에서 알 수 있듯 저자들은 경제(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라는 대니 로드닉 하버드대 교수의 독후감처럼 핵심은 '정치'임을 설파하고 있다. 저자들은 포용적 경제제도를 가진 나라는 번영의 길로, 착취적 경제제도를 가진 나라는 빈곤의 길로 나아간 역사를 정리해 놓고 있다. 지리·문화 등이 아닌 사람이 만든 '제도'가 국가 발전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씁쓸하지만 저자들의 분석대상으로 남북한이 곳곳에 등장한다. 단일민족으로서 동질적이었던 한반도는 2차 대전 후 두 동강이 났다. 북쪽은 사유재산권과 시장을 철폐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했고, 남한은 시장경제체제를 세웠다. 남한은 '경제 기적'을, 북한은 '경제 재앙'을 초래했다. 남북한의 운명을 가른 것은 1945년 두 사회가 수립된 경위가 달라서이지 문화 때문이 아니다. 북쪽은 소련의 입김에 휘둘리더니 나중에는 중국의 영향권에 휩쓸린 결과로, 남한은 미국과 연합국의 통제를 받은 결과로 서로 다른 경제체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경제체제를 수립한 정치적 선택이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밤과 칠흑 같은 북한의 어둠'처럼 남북한 주민들의 운명을 엇갈리게 만든 것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북한의 경제제도는 1940년대 정권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이 시민에게 강요한 것이다. 남한이 북한과 완연히 다른 경제제도를 갖게 된 것은 사회구조를 결정한 이들의 이해관계와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한은 정치가 달랐다." 한반도에서 '이해갈등 조정의 정치'가 태동하기 전 있었던 '체제 선택의 정치'에서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가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김일영, '건국과 부국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그런 면에서 바로 "문제는 정치야"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건국과 시장경제 체제 선택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라 피 흘려 싸워 얻은 것이라는 경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도 공짜로 주어진 게 아니다. 선친이 가끔 하시던 말씀이 있다. 1945년 광복 당시 선친은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일본인이 물러가고 엄혹한 일제의 감시가 없어지자 대한민국은 좌익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전체 학생 가운데 좌익이 아닌 학생은 선친을 포함, 단 2명이었다고 한다. 공공연한 폭력과 테러로 등하교 길은 물론 학교에서까지 호위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면서 한국인,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1946년 9월 실시된 미군정 여론조사에 의하면 선호하는 정부 형태는 응답자 85%가 민주주의 대의제도를 원했지만 경제 형태는 자본주의 13%, 사회주의 70%, 공산주의 10%로 사회주의(공산주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1945년 8월 미군보다 먼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을 앞세워 1946년 2월 '북조선림(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한다. 위원회였지만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제정 등을 보면 사실상 북한정부인 셈이었다.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이 때 나온 것이다.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이라는 말로 '분단의 원흉'이라는 좌익 선전의 근거가 된 발언이다. 하지만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정권 수립으로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해진 상황을 목격한 이승만의 결단이었다. #농지개혁 등 사회주의적 정책 가미 제헌헌법은 미흡하나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를 채택하였지만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여 농지의 (강제)분배 등 사회주의적 성격의 제도를 가미하였다.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제헌헌법 제86조, 근로자의 '기업이익균점권'을 규정한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 "광물 등 지하자원의 국유화 및 전기·통신 등 공공산업의 국·공영화 원칙"을 정한 제헌헌법 85, 87조 등이 그것이다. '헌법의 순간'(박혁)에는 노동자의 경영참여권과 이익균점권 등을 둘러싼 오랜 토론과정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대한민국 체제는 공짜가 아니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다수 국민이 원하던 사회주의를 배제한 것은 미국(군정)의 횡포였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국민정서, 남한에 비해 압도적인 북한의 경제력, 소련의 후원에 따라 일찌감치 정부조직을 갖춘 북한, 김구 등 남북합작 운동 세력. 이들을 감안했을 때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수립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1948년 2월 유엔소총회가 한반도의 '가능한 지역만의 선거'를 권고했을 때 좌익세력은 선거 거부, 관공서 습격, 방화, 테러, 철도 파괴 등 선거 방해 행위를 자행했다. 1948년 제주도 4.3사건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이었다.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된 것은 안타깝지만 본질은 그런 것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체제 선택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승만 등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혜안과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회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를 채택한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최초의 선택이었다. 조선과 식민지 시대 전혀 알지 못하던 제도를 선택한 것은 선조들의 혜안이었다. 냉전이 시작되는 국제정세에 해박한 선각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다양한 세력의 참여와 공존, 설득과 토론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위대한 대한민국은 어렵게 뿌려진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인보길,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등 참조) #포용적 정치제도로 이행 애쓰모글루 등은 이승만·박정희 시대가 상당 정도 '착취적 정치제도'였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경제체제만은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근본으로 하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정 부분 독재적 성격이 있는 정치제도가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지만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포용적 정치제도로 이행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과거 소련체제하의 경제발전이 지속되지 못한 것이나 북한체제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착취적 정치제도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은 다행히 1980년대 이후 민주화를 통해 경제제도에 이어 정치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바꾼 것이 지속 가능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포용적 경제제도와 포용적 정치제도가 만들어져야 상호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견해이다. 2차 대전 후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등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북한과의 비교도 큰 의미가 없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5달러에서 2024년 3만6624달러로 세계 6위 국가가 되었으며 일본을 앞질렀다. '포브스'지는 경제적 영향력, 정치적 힘, 군사력, 국제적 동맹, 지도력 등 5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선정하는 2025년 세계 국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를 6위로 선정했다. 193개 유엔회원국 중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독일만이 우리 앞에 있을 뿐이다. 프랑스, 일본, 사우디, 이스라엘이 우리 뒤를 따르고 있다.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2023년 본보 주최 '대한민국 문화콘텐츠포럼' 기조연설자였던 샘 리처드 교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성공요인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함께 (일)하는 정신(spirit of working together)'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모두가 함께 하는 정신으로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경청할만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평소 나의 지론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이면에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낸 구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와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다"는 슬로건이 그것이다. 보릿고개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는 정확히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는 구호였다. 5천년 가난을 숙명으로 알고 체념하던 국민의 마음에 불을 지른 외침은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를 상징한다. 1987년 민주화 대열에 모두가 동참할 수 있었던 데는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싶다'는 간명한 구호가 가슴을 건드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모두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정치캠페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반영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가슴을 뛰게 하는 역동성을 발휘한 것이다. #21세기 강대국의 비전(?) 대한민국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는 사람이 많다. 선진국이 되었는데 세계 최저의 저출생과 세계 최고의 (노인)자살률 등 국가소멸을 걱정할 정도에 이르렀다. 날이 갈수록 이념·지역·계층·노사·세대 갈등은 심각해지기만 한다. 선거가 있어도 무언가를 해주겠다는 정당과 후보들만 있을 뿐 국가 통합의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는 찾아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고민스러운 부분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어떤 비전을 제시해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서울대 이근 교수의 '2030 대한민국 강대국 시나리오'는 하나의 활로가 될 만한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강대국 대한민국은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단언한다. "국가 비전의 최종단계는 국내적 비전인 선진국, 국제적 비전인 강대국 두 개 뿐이다. 이미 선진국을 이룬 이제는 강대국 차례"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강대국이라는 비전은 솔직히 부담스러운(?)게 사실이다. 이 교수의 담대한 비전 제시와 성취방법론이 설득력 있는 건 사실이지만 조금 더 숙고해 보고 싶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건국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잇는 국가목표를 잃어버리고 잊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호가 극한 갈등에 휘말려 갈 바를 모르고 헤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민통합의 계기만 마련하면 우리 국민들은 '제2의 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한민국 강대국 시나리오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지금 대선을 앞두고 경쟁하는 정당과 후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운운하는 '체제 선택의 정치'를 넘어 정치의 본령인 '이해 갈등 조정의 정치'로 이행해야 한다고.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국민의 가슴을 뛰게 하고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어떤 정권이든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선조들의 혜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래서 결론도 똑같다. "문제는 정치야." dinoh7869@fnnews.com 노동일 주필
2025-05-18 18:59:43[파이낸셜뉴스] 이종 격투기 선수 추성훈이 미국의 인종 차별이 걱정돼 딸 사랑의 뉴욕 명문 학교 진학에 반대했다고 토로했다. 16일 방송가에 따르면 추성훈은 전날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한 ‘(테슬라) 사이버 트럭 타고 1400만원짜리 총 쏘는 진성 마초맨’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여행하는 모습을 담은 이 동영상에서 그는 ‘(미국) 현지에서 인종 차별을 당해본 적 있냐’는 제작진의 물음에 “제가 미국에 살 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와이에 있을 때는 아시아 사람이 많았다. 일본인도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추성훈은 사랑을 뉴욕에 있는 학교에 보낼까 고민했다면서 “(아내인) 시호랑 같이 알아봤다. 너무 좋은 곳에 가서 면접도 봤다. 근데 (학비가) 너무 비쌌다. 게다가 현지 사람이랑 얘기해보니 (뉴욕이) 사실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라고 하더라. (현지 사람이) ‘차별이 심한데 애가 무서운 데 가서 뭐하겠냐’라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이에 사랑 양의 뉴욕 학교 진학에 반대했다면서 “그래서 하와이로 가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현재 추사랑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사립 학교인 세인트 앤드루스 스쿨(St. Andrew’s Schools)에 재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와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 학교로 150년 전통을 자랑한다. 관련해 추성훈은 ’아이 교육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라는 제작진에게 “(사랑이) 공부도, 운동도 안 해도 된다. 시호도 그렇다. 어떤 것을 무조건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뭔가를) 하면 좋겠다 정도만 있다”라고 강조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5-05-16 22: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