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명나라 때 장경악(張景岳)이란 의원이 있었다. 이름은 개빈(介賓)이고 호가 경악(景岳)이어서 주로 장경악이라고 불렸다. 장경악(1563~1640년)은 조선의 허준(1539~1615년)과 동시대의 인물로 중국 최고의 명의 중에 한 명으로 칭송된 인물이다. 장경악은 절강성 회계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영특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책을 읽을 때는 경서(經書)에만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또한 책에 적힌 장구(章句)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비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경악의 당돌한 질문에 주위의 어른들이 당황하기 일쑤였다. 장경악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서 북경으로 갔다. 장경악의 아버지 장수봉(張壽峰)은 아들이 총명한 것을 보고 보다 큰 곳에서 학문을 닦기를 바랐던 것이다. 장경악은 북경에서 경서와 사서에 해박한 명의 김몽석(金夢石)으로부터 의술의 이론과 실기를 전수받았고, <황제내경>을 배우고 익혔다. 이밖에도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경서와 역사에 깊이 통달했으며 천문, 지리, 병법, 역리 또한 탐독했다. 장경악은 30세에 북동부 지역을 유람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때 한반도에는 일본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은 자신들이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는데, 조선이 길을 비켜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조선의 선조 왕은 의주로 파천을 해서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하게 되는데, 이때 장경악은 명나라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장경악은 명나라 군대를 이끌던 총지휘관 송응창(宋應昌)의 젊은 참모로 활약했다. 조선 땅 의주에서는 어의 허준이 선조를 돌보고 있었다. 허준은 당시 54세였고 장경악은 30세였다. 훗날 당대 최고의 명의가 되었던 장경악이 만약 의주에서 허준을 만났다면 무슨 대화를 했을까? 그러나 사실 장경악은 당시에 의학에 매진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허준과 장경악과의 만남은 흥미로운 상상일 뿐이다. 당시라면 허준도 <동의보감>을 집필하기 전이었다. 장경악은 군대에서 7년간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서도 성취욕이나 보람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임진왜란도 끝났고 아버지가 연로하고 가세가 빈곤해져서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게다가 귀국길에 요동 백성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목격하고 명나라 조정의 당파싸움을 보고서는 그때까지 품었던 공명심(公明心)이 모두 허황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장경악은 이때부터 의학에 매진했다. 그때 나이 37세였다. 어려서부터 이미 의서를 읽기 시작했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경>과 함께 동원(東垣), 단계(丹溪)의 의서를 읽으면서 그 세밀한 뜻을 탐구하고 신묘함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동원(李東垣)은 금나라 때 명의로 비위의 기능이 건강을 좌우한다는 보토파(補土派)의 창시자로 <비위론(脾胃論)>을 저술했고, 주단계(朱丹溪)는 원나라 때 명의로 자음파(滋陰派)의 대가로 <단계심법(丹溪心法)>을 저술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이론이라면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 장경악은 어느 한 의서를 읽으면서 손을 입에 대고 키득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의원이 물었다. “의원님은 무슨 즐거운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러자 장경악은 “내가 동원이나 단계가 <내경>의 군화(君火)와 상화(相火)를 해석한 이론과 주장을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비웃게 되었소. 그들의 불찰이 매우 심하구려.”라고 답하는 것이다. 그 의원은 장경악이 동원이나 단계의 주장을 읽고서 비웃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해 여름, 깊게 사귀었던 한 의원이 “‘양(陽)은 항상 남아돌고 음(陰)은 항상 부족하다’는 것은 단계로부터 나온 확고한 이론인데, 자네는 반대로 ‘양(陽)은 항상 부족하고 음(陰)은 항상 남아돈다’는 말을 하니 어떻게 이렇게 상반되는 것인가? 이를 통해 자기가 옳다고 억지를 부려 스스로를 뽐내려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단계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은데, 단계가 살아 돌아온다면 자네와 같은 후학의 경망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하고 핀잔을 주었다. 장경악은 속으로 ‘슬프구나. 이 친구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쉽게 현혹이 되어 감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쁘구나. 다행히도 이러한 논박이 있어 내가 다시 의혹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요즘 보면 단계의 이론 때문에 의원들이 너도나도 남아도는 양(陽)을 치료한다고 해서 습관적으로 고한(苦寒)한 약을 남발하고 있으니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매한 병자들이 용렬한 의원들에게 차디찬 황련(黃連)을 처방받고서도 하소연을 못하는 것이 400년이 되었네. 아무리 단계의 이론이라도 비판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친구 의원은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경악은 의학에 있어서 확고한 관(觀)이 생겼다. 의술에 있어서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자만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동쪽 변방을 유람을 하던 중에 그곳에서 어떤 기인을 만났는데, 기인이 “당신도 의도(醫道)를 공부하는가? 의도는 어려우니 신중하게나.”라고 했다. 장경악은 “의(醫)는 비록 소도(小道)라도 성명(性命)이 관계되는데, 저라고 어찌 신중함을 모르겠습니까?”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기인이 장경악을 꾸짖으면서 “내가 보니 자네는 의(醫)를 알지 못하네. 성명이 관계된다고 해 놓고 의를 어떻게 소도(小道) 운운하는가? 먼저 참된 사람이 있는 후에야 참된 지혜가 있고 참된 지혜가 있는 후에야 참된 의사가 있는 법인데, 어찌 의도(醫道)를 이처럼 어떻게 쉽게 말하겠는가? 의도(醫道)는 어렵고도 크니 어찌 자신의 편협한 경험만으로 소도(小道)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큰 의도를 얻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 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장경악은 기인의 가르침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몇 개월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 장경악은 61세(1624년)에 <내경(內經)>을 재편집해서 <유경(類經)>과 <유경도익(類經圖翼>을 지었다. 주위의 의원들은 장경악이 저술한 책들을 필사해서 금궤옥함(金匱玉涵)으로 여겨서 소중히 간직했다. 이 후 장경악은 1636년 73세에 이르러 그동안 연구한 의술을 한데 모아서 책으로 엮어 완성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경악전서(景岳全書)>다. 누군가 “장경악은 평소에 병서에 능통했는데 어려서 배워 나이가 들어 사용하고자 했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 이론을 의학으로 옮겨서 오화팔문(五花八門)의 기이함을 털어놓고 있구나.”하고 감탄했다. 오화팔문(五花八門)은 본래 고대 병법의 명칭으로 변화무쌍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말한다. <경악전서>의 전충록(傳忠錄) 편에 보면 ‘옛날에 병법의 팔문(八門)이 있다면, 내게는 의가(醫家)의 팔진(八陣)이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장경악은 의서를 쓰는 것을 마치 병서를 쓰는 것처럼 했다. 그러나 당시는 명나라 말기로 어지러운 정세와 재정 문제가 겹쳐 있어서 장경악은 책의 집필을 끝내고 나서도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서 출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정리본을 결혼한 딸에게 물려주고서는 1940년 78세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장경악의 딸도 출판할 만한 여력이 없어서 딸은 아들 임일위에게 물려주었다. 임일위는 1700년에 외할아버지의 <경악전서> 정리본을 들고 광동성 광주지역으로 가지고 가서 그 지역의 포정사(布政使) 직책을 맡고 있던 노초(魯超)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노공이 “이 책은 세상을 구하는 자비로운 배와 같다. 천하의 보물은 당연히 천하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녹봉을 기부해서 책으로 출판하자고 했다. 드디어 장경악이 <경악전서>를 완성한 후 60여년 만에 초간본이 간행되었다. 그래서 이 초간본을 요즘 노본(魯本)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경악전서>는 불세출의 명작으로 칭송받으며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허준은 <동의보감>을 지으면서 당대까지 쓰인 많은 의서를 참고했다. 그런데 참고문헌에 <경악전서>는 없다. 허준의 <동의보감>이 1610년에 완성이 되었고, 장경악의 <경악전서>는 1636년에 완성이 되었지만 1700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출판이 되었기 때문에 <동의보감>에는 <경악전서>를 참고문헌으로 찾아볼 수 없는 당연했다. 허준은 죽을 때까지 장경악과 <경악전서>의 존재를 모르고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장경악은 <동의보감>의 존재를 앓고 있었을까? 이들이 서로의 의서를 읽었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해진다. * 제목의 ○○은 ‘군인’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경악전서> 全書紀略. 先外祖張景岳公, 名介賓, 字會卿. 先世居四川綿竹縣, 明初以軍功世授紹興衛指揮, 卜室郡城會稽之東. 生穎異, 讀書不屑章句, 韜ㆍ鈐, 軒岐之學尤所淹貫. 壯歲遊燕冀間, 從戎幕府, 出楡關履碣石經鳳城渡鴨綠, 居數年無所就, 親益老ㆍ家益貧, 翻然而歸. 功名壯志, 消磨殆盡, 盡棄所學而肆力於軒岐, 探隱硏神, 醫日進名日彰, 時人比之仲景ㆍ東垣云. 苦志編輯《內經》, 窮年縷析하여, 彙成《類經》若干卷問世, 世奉爲金匱玉函者久矣. 중략. 是書也, 繼往開來, 功豈小補哉? 以兵法部署方略者, 古人用藥如用兵也. 或云: "公, 生平善韜鈐, 不得遂其幼學壯行之志, 而寓意於醫, 以發洩其五花八門之奇", 余曰: 此蓋有天焉. 特老其才救世, 而接醫統之精, 傳造物之意, 夫豈其微歟? 是編成於晩年, 力不能梓, 授先君, 先君復授日蔚, 余何人斯而能繼先人之遺志哉? 歲庚辰, 携走粤東, 告方伯魯公, 公曰: "此濟世慈航也. 天下之寶, 當與天下共之", 捐俸付剞劂, 閱數月工竣. 不肖得藉慰先人, 以慰先外祖於九原, 先外祖可不朽矣. 外孫, 林日蔚, 跋. (돌아가신 외조부인 장경악의 이름은 개빈, 자는 회경이다. 선대부터 선조들이 사천성 면죽현에 살다가 명초에 전쟁에서 세운 공이 있어 전공으로 소흥 위지휘의 지휘사란 벼슬을 제수받고 회계 동쪽 군성으로 집을 정해 거처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책을 읽을 때에 경서에만 얽매이지 않고 선현의 장구를 중시하지 않았고, 특히 병서인 <육도>, <옥검>과 의서인 헌기의 학문에도 박통하였다. 30세 장년에 하북성 북부, 요녕성의 남부, 하북성 지역을 유람하였는데 돌아다니다가 서쪽 융 지역의 막부에서 출발하여 군대에 지원하여 유관을 나와 갈석을 거쳐 봉성을 지나 압록강을 건넜는데, 수년간 머물렀는데도 성취한 바가 없이 아버지가 더욱 연로하고 가세가 빈곤해져 갑자기 돌아왔다. 이즈음 젊은 시절에 공명심은 없어져 그간 공명을 위해 배웠던 학문을 모두 버리고 헌기의 학문에 진력하여 은미한 뜻을 탐구하고 신묘함을 연구하였는데 날로 의술이 발전하고 명성을 떨쳐 사람들은 중경, 동원과 비교하곤 하였다. <내경>의 편집에 고심하여 한평생 자세히 분석하여 몇 권의 <유경>으로 출간하니 세상 사람들이 금궤옥함으로 여긴지 오래되었다. 중략. 이 책은 과거를 이어받아 미래를 열었으니, 그 공이 어떻게 작겠는가? 병법에서는 각각 역할을 분담시켜 방법과 전략을 세우는 바, 고인은 용약을 병법을 운용하듯이 하였다. 혹자는 “경악은 평소 병서인 <육도>, <옥검>에 능통했는데 어려서 배워 나이가 들어 사용하고자 했던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의학으로 슬쩍 뜻을 돌려 오화팔문의 기이함을 털어놓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말하노니, 이는 하늘의 뜻이리라. 하늘이 그 재능을 높이 사서 세상을 구제하고 의통의 정수를 이어 조물의 뜻을 전하도록 했으니, 어떻게 그 뜻이 미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공이 만년에 완성했지만, 출판할만한 힘이 없어 아버지에게 내려왔고, 내 아버지가 다시 내게 내려주었는데,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선인의 유지를 이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경진년에 광동으로 책을 가지고 가서 관찰사 노공에게 알렸더니 “이 책은 세상을 구하는 자비로운 배와 같다. 천하의 보물은 당연히 천하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하면서 녹봉을 기부하여 책으로 출판하도록 하여 몇 달 동안 글을 교정하고 검열하여 작업을 마쳤다. 불초한 사람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리고 구천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위로하니,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외손주 임일위가 발한다.) ○ 君火相火論. 余向釋《內經》, 於'君火以明, 相火以位'之義, 說固詳矣, 而似猶有未盡者. 及見東垣云"相火者, 下焦包絡之火, 元氣之賊也", 丹溪亦述而證之. 予聞此說, 嘗掩口而笑, 而覺其不察之甚也. 由此興感, 因再繹之. (내가 전에 <내경>을 해석할 때, ‘君火以明, 相火以位’의 뜻을 자세히 말했지만, 그래도 미진한 점이 있는 듯하다. 동원은 “상화는 하초포락의 화로, 원기의 적이다.”고 하였고, 단계 역시 이를 글로써 입증하였다. 내가 이 설을 듣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는데, 그들의 불찰이 심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내가 느낀 바를 다시 풀어서 말한다.) ○ 予出中年, 嘗遊東藩之野, 遇異人焉. 偶相問曰: “子亦學醫道耶? 醫道難矣, 子其愼之”, 予曰: “醫雖小道, 而性命是關, 敢不知愼, 敬當聞命”, 異人怒而叱曰: “子非知醫者也. 旣稱 ‘性命是關’, 醫豈 ‘小道’云哉? 중략. 醫道難矣, 醫道大矣. 중략.” 予聞是敎, 慚悚應諾, 退而皇皇者數月, 恐失其訓, 因筆記焉. (내가 40세가 넘어 동쪽 변방을 유람할 때, 어떤 기인을 만났다. 우연치 않게 “당신도 의도를 공부하는가? 의도는 어려우니 신중하라.”고 하여, 나는 “의가 비록 소도라도 성명이 관계되는데, 어찌 신중함을 모르겠습니까? 삼가 가르침을 듣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성내며 꾸짖기를 “당신은 의를 알지 못한다. ‘성명이 관계된다’고 해 놓고 의를 어떻게 ‘소도’ 운운하는가? 중략. 의도는 어려운 것이고 큰 것이다. 중략.”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 가르침을 듣고 부끄러워 응낙하고 물러나 몇 개월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는데, 그 교훈을 잃을까 우려되어 여기에 글로 적는다.) ○ 陽不足再辨. 予自初年, 嘗讀朱丹溪'陽有餘陰不足'論, 未嘗不服其高見, 自吾漸立以來, 則疑信相半矣, 又自不惑以來, 則始知其大謬矣. 故, 予於《類經ㆍ求正錄》中, 附有〈大寶論〉一篇, 正所以救其謬也. 중략. 玆於丙子之夏, 始得神交一友, 傳訓數言, 詢其姓氏, 知爲三吳之李氏也. 誦其指南則曰: "陽常有餘, 陰常不足, 此自丹溪之確論, 而玆張子, 乃反謂'陽常不足, 陰常有餘', 何至相反若此? 중략. 以是知先賢之金石本非謬, 而後學之輕妄何容易也?". 予聞此說, 益增悲嘆, 悲之者, 悲此言之易動人聽, 而無不擊節稱善也. 紫可亂朱, 莫此爲甚, 使不辨明, 將令人長夢不醒, 而性命所係非渺小, 是可悲也. 悲已而喜, 喜之者, 喜至道之精微, 不經駁正, 終不昭明, 幸因其說, 得啓此端而得解此惑, 是可喜也. 今卽李子之言以辨之. (양부족론에 대해 다시 한번 변론하다. 내가 젊어서 단계의 ‘양유여음부족론’을 읽었을 때는 그 고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점차 30세가 되면서부터는 의심과 믿음이 절반씩이었고, 다시 40세가 되면서부터 큰 오류를 알게 되었다. 이에 내가 <유경:구정록> 중에 〈대보론〉을 부기하여 그 오류를 바로 잡았다. 중략. 병자년 여름에 어떤 친구를 깊게 사귀어 몇 마디의 가르침을 전했는데, 그 성을 물어 삼오의 이씨임을 알았다. 그 요점을 외워주자 이씨는 “‘양상유여 음상부족’은 단계로부터의 확론인데, 당신은 반대로 ‘양상부족 음상유여’를 말하니 어떻게 이렇게 상반되는가? 이를 통해 자기가 옳다고 억지를 부려 스스로를 뽐내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근본의 이유가 있는가? 중략. 이로써 단계의 금과옥조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후학의 경망을 어떻게 용납하겠는가?”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자 슬펐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쉽게 현혹되어 옳다고 감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도가 정도를 어지럽힘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명확히 변별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오랜 꿈속에서 헤매게 만들어 성명과의 관련이 작지 않을 테니, 이것이 슬펐다. 그러면서도 기뻤는데, 지도의 정미를 논박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 분명히 밝힐 수 없었을 텐데, 다행히 이 말 때문에 단서를 밝혀 이런 의혹을 풀 수 있을 테니, 이것이 기뻤다. 이제 이자의 말로 이를 설명하겠다.) <논문> Building the Database with Herbal Formulas Based on the Korean Medical Classics. Herbal Formula Science. 2015. Dec, 23(2): 209-224 : 본서는 대략 1636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나, 장개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거하고 명말의 어지러운 정세와 재정 문제로 인하여 간행되지 못하였다. 이후 강희 39년인 1700년에 초간본이 간행 되었는데, 이는 당시 광동성 광주 지방의 포정사 직책을 맡고 있던 노초가 장개빈의 외손인 임일위가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간행한 것으로 노본이라 불린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6-27 09:54:39【파이낸셜뉴스 전주=강인 기자】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할 인재를 뽑기 위해 치러졌던 과거시험인 ‘전주별시(別試)’가 전북 전주한옥마을에서 재현된다. 21일 전주시에 따르면 오는 11월11일 청연루와 경기전 등 전주한옥마을 일대에서 ‘1593 전주별시’ 재현 행사가 열린다. 전주별시는 지난 1593년(선조26) 광해군이 임진왜란 중 전주에 머물며 국난에서 나라를 구할 인재를 뽑기 위해 실시한 과거시험이다. 재현 행사는 △과거시험(국궁, 한글 글짓기, 한시) △국악 공연 △방방례(시상식) △급제자 유가행렬(遊街行列) △사은숙배(謝恩肅拜)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모든 과거시험이 종료된 후에는 과거급제자에 대한 시상식인 방방례(放榜禮)가 진행되며, 급제자에게는 전주시장상과 어사화가 수여된다. 시상식 뒤에는 과거급제자가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채점관과 선배, 친족을 방문하는 전통인 유가행렬(遊街行列)이 전주전통문화연수원에서 시작해 은행로, 태조로, 경기전으로 이어진다. 행렬에는 전북대 국악과 전공 학생들로 구성된 취타대와 (사)전통문화마을 기수대, 한옥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풍물패 등이 함께한다. 전주시 관계자는 “올해 별시는 급제자에게 시상금 지급과 더불어 각 과목 장원급제자 가족을 초청해 1박2일 한옥마을에 머무는 힐링캠프를 제공될 예정”이라며 “우리 문화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kang1231@fnnews.com 강인 기자
2023-10-20 15:08:07[파이낸셜뉴스]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을 총괄 지휘했던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의 '용사잡록'(龍蛇雜錄)이 군사편찬연구소의 군사문헌집 번역사업의 일환으로 국문으로 번역 발간됐다. 1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용사잡록은 전쟁기록 및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8년 '보물 제494-6호'로 지정된 저서다. 저자 정탁은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일찍이 경학을 비롯한 학문뿐만 아니라 천문·지리·병법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을 보좌해 분조(分朝·임시로 세운 조정)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이번 용사잡록의 국문 번역은 중국사를 전공한 임상훈 순천향대 교수와 안광호 경인교대 기전문화연구소 연구원이 담당했다. 또 김경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전문해제가 수록됐다. '용사잡록'은 정탁이 당시 정승으로서 전쟁 상황에 대해 종합적 지휘를 하는 과정에서 업무상 접한 각종 문서를 모아 정리한 책자다. 여기엔 임진왜란 시기 조선 내부 및 조선과 명(明)나라 사이, 명과 일본 사이에 주고 받은 각종 공문과 편지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국문으로 번역서엔 △전쟁 종식 강화협상을 둘러싼 조선·명·일본의 치열한 군사외교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의 보고서·장계(狀啓)를 비롯해 △정탁의 공로를 인정하려는 국왕의 교지와 이를 사양하는 내용의 상소(上疏) △전쟁 피해를 극복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전쟁공훈자 관련 선양사업과 그 명단을 담은 지방관 보고서 등을 정탁이 필사해 담았다. 또 조선의 지방관·장수가 국왕에게 보고했거나 국왕으로부터 지시 받은 사항이 적힌 문서와 함께 명나라 군 지휘관(제독) 유정(劉綎)의 공문서와 일본군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편지 등 당시 전투상황뿐만 아니라 군사외교·국정안정·전황보고 등에 관한 다양한 문서가 수록돼 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3-08-01 14:22:41[파이낸셜뉴스] "북은 남한 지도를 걸어 놓고 타격 지점까지 예정한 듯 매일같이 미사일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데, 국회는 이를 외면하고 진영논리에 빠져 밤낮없이 정쟁만 계속한다. 한심하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권을 겨냥해 이같이 말하며 "한심한 국회를 보니 6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앞두고 동인·서인의 당쟁을 보는 느낌"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홍 시장은 "지금은 한·미·일 자유 동맹의 강화로 북·중·러 사회주의 동맹에 대항할 때"라며 "세력 균형이 깨어지는 순간 한반도는 참화에 휩싸이게 된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이어 "한·일 관계, 한·미 관계는 그런 측면에서 대처하는 게 지금은 옳지 않은가"라며 안보 동맹 강화를 주문했다. 한편 이날 북한은 중거리급 이상 탄도미사일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한이 군통신선 등 남측과의 연락채널을 끊더니 고강도 도발을 재개한 것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본격적으로 고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군은 이날 오전 7시23분께 평양 인근에서 동해상으로 발사한 중거리급 이상 탄도미사일 1발을 포착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지난달 27일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이후 17일 만으로 올해 들어 9번째다. 군은 이번 미사일의 기종과 제원 등을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3-04-13 10:04:24[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때는 조선 임진년(1592년), 왜놈들이 남해에서 소란을 피우다 못해 육지까지 침략을 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몇 년 전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이는 바로 유성룡이었다. 나이가 3세 많은 유성룡은 이순신과 고향은 서로 달랐지만 어릴 적 한양 인근 한 마을에서 자란 적이 있기에 각별했다. 문제는 이순신에게 고질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복통'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생긴 복통은 왜놈들이 쳐들어 올 당시에는 상당히 심해진 상태였다. 사실 전시에 군사들이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당시로써 의원들도 모두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을 뿐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전장에서 의원들에게 그 흔한 침치료, 뜸치료 한번 받지 못해 병을 키워갈 수밖에 없었다. 임진년 사월 어느 날, 이순신은 낮부터 불편하던 배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자 복통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더니, 복통은 점점 심해졌고 밤새도록 신음소리를 낼 정도였다. “장군! 무슨 일이십니까? 신음소리를 내시는 것 같은데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하고 막사를 지키는 초병이 물었다. 이순신은 “별일 아니다. 내가 아프다는 말을 다른 군사들에게 말하면 안 될 것이다. 나는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라고 안심을 시켰다. 왜구들의 소란은 그치지 않아 전쟁은 해를 넘겼다. 이듬해 어느 날도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다녀가서 마음이 흡족하였으나, 그들이 돌아간 이후 밤이 되자 몸은 다시 불편해지면서 베개를 안고 신음을 했다. 배를 만져보면 덩어리가 만져지는 듯하다가도 풀렸고, 쓰린듯하면서도 쥐어짜는 증상이 고통스러웠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 와중에 자신의 몸 일신(一身)을 걱정하고 있자니 한심스러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배가 아파서 고생을 하다가 밤이 되어도 그치질 않고, 심지어 닭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눈을 붙이지 못했고 아침이 되어서야 통증이 그치기도 했다. 몸이 불편해서 낮에 공무를 보지 못하고 누워있는 경우도 많았다. 복통은 3~4일 동안 지속된 날도 있었다. 이순신은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종일 속이 쓰리고 아파서 식사도 못한 경우도 많았다. 어느 날은 속이 불편해서 구토를 하면 편해졌다. 아마도 위장기능도 약해지고 궤양 또한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위궤양은 신경을 많이 쓰면 생기기도 하는데, 간화(肝火)나 심화(心火)에 의한 분노나 근심걱정 등에 의해서 쉽게 악화된다. 속쓰림과 식욕부진, 소화불량은 늘상 동반된다. 전쟁이 시간을 끌며 길어지면서 왜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이 끊이지를 않았다. 이순신은 통분(痛忿)하고 통분했다. 남해의 바닷바람 또한 거세니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역시나 그럴 때면 복통은 심해졌다. 바다의 냉풍(冷風)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견뎌내야 했다. 어느 날 잠자리에 들어 배를 만져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날도 밤새도록 신음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도 복통이 잦아들지 않자 보관해 두었던 환약을 꺼냈다. 바로 온백원(溫白元)이었다. 이 환약은 유성룡에게 전해 받은 것이다. 유성룡은 온백원을 허준에게 처방받아서 전해 준 것이다. 허준은 당시 선조 임금의 어의였다. 허준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선조가 피난 길에 올랐을 때도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유성룡 또한 선조의 곁을 지킨 충신이었다. 유성룡은 자신도 고뿔에 걸리면 허준에게 처방을 받고는 했다. 그는 허준에게 이순신의 병고(病告)를 말하고서는 처방을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허준에게 처방을 받았다는 안도감보다는 그 환약이 온백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걱정이 더 컸다. 온백원은 일반적인 위장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소화불량이나 조잡증(嘈雜症) 같으면 평위산(平胃散)을 처방이었을 것이고, 잦은 장염이나 복통, 설사였다면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이고, 체기나 복부창만을 겸한 복통이었다면 소체환(消滯丸)을 처방했을 것인데, 온백온이라니, 이순신도 이로써 자신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서에 보면 온백원(溫白元)은 적취(積聚), 징벽(癥癖) 등 장내에 종양이 있거나 비색(痞塞), 심통(心痛) 등 기운이 막혀서 명치와 가슴에 통증이 심하고, 전광(癲狂) 사수(邪祟) 등 정신이 미칠 듯이 오락가락할 때 및 일체의 뱃속에 생긴 모든 질환을 다스리는 처방으로 나온다. 적취와 징벽은 뱃속에 생긴 모든 덩어리를 말한다. 온백원은 천초, 오수유, 건강, 천초, 파두상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약성이 매우 뜨겁고 강한 처방으로 한꺼번에 많은 양을 복용할 수도 없는 독한 처방이다. 이순신은 온백원 4알을 따뜻한 생강차로 삼켰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더니 복통이 좀 잦아들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통증이 나타날 때만 온백원을 복용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며칠 후면 몸의 불편함은 여전했다. 사실 남아 있는 온백원도 넉넉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밤마다 식은땀도 많이 흘렸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불이며 위아래 두 겹의 모든 옷들이 흠뻑 젖기도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땀 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심각했다. 밤사이 식은땀은 음허증(陰虛症)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보통 밤사이에 땀이 도둑처럼 왔다가 간다고 해서 도한(盜汗)이라고 하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신경을 많이 쓰면서 혈허(血虛)에서 음허(陰虛)로 증상이 악화된 것이다. 며칠 동안 밤마다 옷이 젖을 정도의 땀을 흘린다는 것은 음양(陰陽)의 부조화와 함께 기혈(氣血)의 쇠약함이 극심했음이 분명하다. 소위 말하는 기혈과 음양을 보하는 보약이 필요했음이 분명한 증상들이다. 이순신은 게다가 우울감도 심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날, 배의 봉창 아래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근심과 회포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저녁식사를 마다하고 홀로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닭이 울 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침소에 누워도 편하지 않으니 한숨이라도 눈을 붙였기에 이나마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약해지는 듯해서 슬픔이 밀려왔고 우울감이 떠나질 않았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시국, 이를 어찌할꼬. 이순신은 어느 한 날, 부하들과 함께 수루(戍樓)에 올라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왜놈의 정찰선이 눈에 알짱거린다. 그날따라 복통이 진정되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괴롭다. 해가 기울어 바다가 어둑해지자 모두들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배가 아파서 저녁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 먼저 내려들 가거라. 난 좀 더 있다 내려 갈테니 걱정들 말거라.”하며 일렀다. 그 날따라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 이순신은 붓을 꺼내 시를 한편 적었다.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명월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편첨수)’ 내용을 직역하면 이렇다.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서서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때에 어디선가 오랑캐 왜놈의 피리소리가 들리니 근심이 더해지는구나.’라는 내용이었다. 불현듯이 배가 더 조이는 듯 아파졌다. 저 깊숙한 곳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길게도 나왔다. 왜놈들이 쳐들어온 지 벌써 5~6년이 지났지만, 이순신의 건강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밤마다 통증으로 신음하면서 옷을 적실 정도로 땀을 흘렸다. “해남에 있던 적들이 멀리 달아난 것 같습니다.”라는 전령을 받고서도 안심되기는 커녕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결국 새벽을 맞이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식은 땀으로 온 옷이 흥건했다. 벌써 전쟁은 7년째 이어졌고, 1598년 12월 16일, 겨울의 칼바람이 매섭던 그날도 이순신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주위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참가한 것이다. 바로 노량해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그 날 왜놈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은 이제 더 이상 몸의 고통으로 신음하며 날을 지새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왜놈들과 싸우면서 병마(病魔)와도 싸워야 했다. 온백원(溫白元)이 허준의 처방이면 뭐하랴. 그의 곁에 평범한 의원 한명 없었으니 말이다. 전장에서 밤마다 혼자서 신음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제목의 ○○○은 온백원(溫白元)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난중일기> 壬辰四月. 初二日辛卯. 晴. 食後氣甚不平.漸漸痛重. 終日達夜呻吟. / 癸巳五月. 十七日庚午. 晴. 曉大風. 중략. 賊徒四散焚掠. 痛憤痛憤. ○終日大風. 心事煩亂. / 癸巳五月. 十六日己巳. 晴. 중략. ○氣甚不平. 卧枕呻吟. 중략. 爲國多慮. 事事如是. 尤極興歎而潸淚也. / 癸巳五月. 十八日辛未. 晴. 早朝. 氣甚不平. 呑溫白元四丸. 有頃. 快注. 氣似平安. / 癸巳八月. 十三日甲午. 營來公事題送. 氣甚不平. 獨坐篷下. 懷思萬端也. / 乙未六月初五日丙午. 晴. 중략. 自午雨作. 未能射帿. 余則氣甚不平. 廢夕食. 終日苦痛. / 丙申二月三十日丁卯. 晴. 중략. ○氣甚不平. 達夜虛汗. / 丙申初二日己巳. 晴. ○氣甚不平. 不坐. / 丙申十七日甲申. ○是夜. 虛汗沾背. 兩衣盡濕. 氣不平. / 丙申二十二日己丑. 晴. ○汗出無常. (임진년 1592년 4월 초2일. 맑음. 식사를 하고 나니 몸이 몹시 불편하더니 점점 더 아파 온 종일 밤새도록 신음했다. 계사년 1593년 5월16일. 맑음. 중략.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중략.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동년 5월17일. 맑음.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다. 중략.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동년 5월18일. 맑음.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 4알을 먹었더니, 한식경 후에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동년 본영에서 온 공문에 결재하여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을미년 1595년 6월5일. 맑다. 오정 때부터 비가 내려서 활을 쏘지 못했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저녁식사도 먹지 않고, 종일 속이 쓰리고 앓았다. 병신년 1596년 2월30일. 맑다. 중략.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 병신년 3월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동년 3월17일. 이날 밤에 식은땀이 등에까지 흘러 두 겹 옷이 흠뻑 다 젖었다. 몸이 불편하다. 동년 3월22일. 맑다. 중략. 땀 흐르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閑山島歌.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서서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때에 어디선가 오랑캐 왜놈의 피리소리가 들리니 근심이 더해지는구나.) < 유성룡 비망기입 대통력(柳成龍 備忘記入 大統曆)> 갑오년. 1594년 7월 24일. 병을 얻어 보중익기탕과 삼소음을 복용했다. 7월 28일. 인삼강활산을 복용하니 땀이 나 열이 내렸다. 경자년 1600년 6월 7일. 許浚介藥品唐扇. (허준이 약품과 당나라 부채를 전해주었다.) < 동의보감> 溫白元. 治積聚癥癖, 黃疸, 鼓脹, 十種水氣, 八種痞塞, 五種淋疾, 九種心痛, 遠年瘧疾, 及療七十二種風, 三十六種尸疰, 癲狂, 邪祟, 一切腹中諸疾. 川烏(炮) 二兩半, 吳茱萸ㆍ桔梗, 柴胡, 菖蒲, 紫菀, 黃連, 乾薑(炮), 肉桂, 川椒(炒), 巴豆霜, 赤茯苓, 皂莢(灸), 厚朴, 人參 各五錢. 右爲末, 煉蜜和丸梧子大. 薑湯下三丸, 或五丸至七丸. (온백원. 적취, 징가, 현벽, 황달, 고창, 10종의 수기, 8종의 비색, 5종의 임질, 9종의 심통, 오래된 학질과 72종의 풍증, 36종의 시주, 전광, 사수, 뱃속의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한다. 천오. 습지에 싸서 굽는다. 2.5냥, 오수유, 길경, 시호, 창포, 자완, 황련, 건강. 습지에 싸서 굽는다. 육계, 천초. 볶는다. 파두상, 적복령, 조협. 굽는다. 후박, 인삼 각 5돈. 이 약들을 가루내고, 졸인 꿀로 반죽하여 오자대로 환을 만든다. 생강 달인 물로 3알 또는 5알 또는 7알까지 먹는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3-28 10:52:34[파이낸셜뉴스] 문화재청은 전라북도와 전북 전주시 전라감영지에서 '임진왜란 웅치 전적' 사적 지정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27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웅치'는 완주군과 진안군 사이 고갯길의 지명이다. 웅치 일대 옛길은 전주와 전라도 동부지방인 진안 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됐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전투지로 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초기 열세를 극복하고 승전한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번 행사는 국악예술단 노리광대의 사물놀이와 북공연을 시작으로 이재운 전주대 교수의 강연, 사적 지정 경과와 보존·활용방안 보고, 국가지정문화재 관리단체 지정서 교부, 유공자 표창 등으로 진행된다. 영화 ‘한산’에서 웅치전투의 의병장 황박 장군 역할을 했던 배우 이준혁이 명예지킴이로 위촉될 예정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3-03-27 13:34:53[파이낸셜뉴스] 임진왜란 초기, 민관이 힘을 모아 호남을 지켜낸 국난 극복의 전적지인 ‘임진왜란 웅치 전적’이 사적으로 지정됐다. 30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전북 완주군.진안군에 위치한 ‘임진왜란 웅치 전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했다. ‘임진왜란 웅치 전적’은 임진왜란 초기(1592년 7월) 전라도를 침략한 왜군에 맞서 관군 및 의병이 민관 합동으로 호남을 지켜낸 ‘웅치 전투’가 발생한 곳이다. 웅치 전적은 호남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군이 결국 승전하게 되는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 평가된다. ‘웅치’는 완주군과 진안군 사이 고갯길의 지명으로 웅치 일대의 옛길은 전주와 전라도 동부지방인 진안 등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됐다. ‘선조실록’등 여러 문헌에 기록된‘웅치’는‘웅현’,‘웅령’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는‘곰티’또는‘곰치’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전투가 일어난 지리적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주 전 만호 황박이 모집한 군사 200명을 모아 웅현에 복병했는데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의 경계였다. 이때에 이광이 나주 판관 이복남, 김제 군수 정담 등으로 복병장을 삼아 웅현을 파수케 하였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지난 7월 개봉한 영화‘한산’을 통해 재조명된 웅치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격해오던 왜군을 진안과 전주의 경계였던 웅치 일대에서 막아서며 전개됐다. 왜군은 결국 웅치를 넘어 전주 부근까지 진출하였으나 전투 과정에서 많은 전력을 상실하여 전면적인 공격을 진행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전주를 공격하여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자 했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켰다는 점에서 승패를 떠나 국난 극복의 전적지로서 의미를 가진다. 웅치 전투를 통한 호남 수호 이후, 관군과 의병이 경기도와 경상도로 진출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호남 지역으로부터 조달하는 등 임진왜란 극복의 계기를 마련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2022-12-30 09:03:54[파이낸셜뉴스] 전쟁기념관은 25일 임진왜란 발발 430주년을 기념해 기획전 '파도는 멈춘 적이 없었다'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기념관에 따르면 기획전은 26일 오후 3시 개막식해 내년 1월 29일까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과 1층 거북선홀에서 진행된다. 기념관은 이번 기획전에 대해 "일반적인 임진왜란 서사에서 벗어나 한·중·일 '국제전'이었던 임진왜란의 실상과 조선의 관료·백성이 현실로 마주했던 임진왜란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기념관은 이번 기획전에서 "유물·영상을 통해 전시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거북선 뒤로 10m 높이의 퍼블릭 미디어아트 '오션'(Ocean)을 연출해 색다른 관람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2022-10-26 13:37:51[파이낸셜뉴스]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왜선 디자인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법원은 영상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영화제작사에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61부(권오석 부장판사)는 영화 '명량' 제작사 빅스톤픽쳐스가 KBS와 '임진왜란 1592' 담당 프로듀서(PD)를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영상물 배포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KBS가 왜선 디자인 저작권을 침해한 부분을 폐기하지 않으면 영상을 배포할 수 없도록 하는 한편, 빅스톤픽쳐스에 1억1000만원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도록 했다. 영화 '명량' 제작사인 빅스톤픽쳐스는 2012년 컴퓨터그래픽(CG) 제작사인 A사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전함 특수효과 작업을 맡겼다. 이후 A사는 2015년 드라마 '임진왜란 1592'의 특수효과 작업도 맡게 됐다. 빅스톤픽쳐스는 '임진왜란 1592' 방영 이후 "드라마에 사용된 일본군 전함의 디자인은 영화 '명량'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A사를 상대로는 저작권 침해 소송을, KBS를 상대로는 15억원의 손해배상과 영상물 배포 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KBS와 담당 PD 측은 "드라마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에 기초해 적법하게 제작된 것으로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일본군 전함이 전함 이미지를 토대로 변형·각색한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하는 만큼 저작권법에 따라 저작권이 A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다른 사람의 저작물을 원형 그대로 복제하지 않고 다소의 수정·증감이나 변경이 가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창작성을 더하지 않은 정도면 복제로 봐야 한다"며 "A사가 제작한 CG 3D 모델링 소스는 빅스톤픽쳐스가 제작한 선박 소품과 비교해 창작적인 표현형식이 부가됐다고 보기 어렵고, 선박 소품을 3D 그래픽 형태로 그대로 구현한 것으로 이는 2차적 저작물 아닌 복제물에 불과하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KBS와 담당 PD가 수사기관에서 저작권법 위반 혐의가 불기소 처분을 받은 점 등을 이유로 "피고들(KBS, 담당 PD)에게 고의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면서도 "저작권 침해에 대한 과실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들은 A사가 앞서 담당한 영화 '명량'에 사용된 3D 모델링 소스 등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소스가 무단으로 활용될 높은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며 "피고들로서는 A사로부터 납품된 영상물을 검수하거나, 방영하기에 앞서 최종 단계에서라도 저작권 침해 여부를 확인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만 "일본군 전함이 사용된 장면이 피고 드라마의 전체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배상 책임을 재산상 손해 1억원과 정신적 손해에 따른 위자료 1000만원으로 제한했다. 한편 A사에서 특수효과 작업을 총괄했던 직원과 A 법인은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2020년 5월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clean@fnnews.com 이정화 기자
2022-05-24 14:27:55[파이낸셜뉴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30일부터'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상설전시를 공개한다고 29일 밝혔다.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돼 조선과 명, 일본이 참전한 동아시아 국제전이었다.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명은 국력이 약화돼 명청교체기에 들어서게 됐다. 1636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은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청의 칩입으로 일어났고 오랑캐로 여기던 청에 굴욕적으로 패배했다. 조선은 두 차례의 전쟁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 제도가 크게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전쟁에 사용된 무기, 전쟁 기록과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 '전쟁의 무기'에서는 일본군의 신무기 조총과,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조선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화약무기를 소개한다. 조선의 전통적 무기인 현자총통, 승자총통과 시한폭탄에 비견되는 독창적인 무기 비격진천뢰가 전시된다. '전쟁의 기록'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우의정이었던 류성룡(1542~1607)이 전쟁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여 남긴 '징비록'과 병자호란으로 가족을 잃고 홀로 남았던 홍익한(1586~1637)의 딸 남양 홍씨(1626~1682)의 고되지만 꿋꿋한 삶이 담긴 묘지명을 만나볼 수 있다. '전쟁의 기억'에서는 전쟁 후 조선이 두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자 했는지 살펴본다. 민간에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영웅소설인 '임진록'이 유행해 전쟁의 상처를 위로했고 송시열은 '삼학사전'을 저술해 청에 끌려가 순절한 3인의 척화신을 추모하고 후세에 길이 기억되도록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전후 조선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18세기 영·정조시대 사회문화적 발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두 전쟁으로 인해 위기를 겪었던 조선과 그 상처를 보듬고 극복하고자 했던 조선 사람들의 노력을 뒤돌아보고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확산의 위기와 그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21-04-29 16:1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