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권자들의 정치 냉소주의는 반 세기 넘게 고쳐지지 않는 일본 정치의 고질병이다. 1955년 창당 이후 자민당은 몇 차례 정권교체를 제외하고는 일본 정치의 중심을 차지해 왔다. 이들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배경에는 유권자들이 정치에 대해 느끼는 피로감과 무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정치불신으로 투표율은 계속 낮아졌고, 그 틈을 조직력 강한 자민당이 놓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자민당의 전략이 먹혔다. 정치 냉소주의의 뿌리에는 일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전통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옛날 사무라이 시대부터 이어진 '본인 일만 잘하면 된다' '분수를 알자' 식의 태도는 개인이 국가나 정치 문제에 신경쓰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 사고방식은 세습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어차피 안 바뀌어"라는 냉소로 굳어졌다. 자민당엔 장기집권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유권자의 무관심이 커질수록 투표율은 낮아졌고, 자민당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 자민당의 고정 지지층은 더욱 강력한 힘을 냈다. 조직은 훨씬 잘 작동했다. 당시로선 역대 최저 투표율(59.3%)을 기록한 2012년 중의원(하원) 선거 때가 그랬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전 폭발 대응과 관련 '아마추어 정부'로 낙인 찍힌 옛 민주당은 자민당에 정권을 반납했다. 이후 네 차례 연속 일본 선거에선 자민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했다. 투표율은 모두 50%대였다. 이번 중의원 선거의 투표율도 53.85%로 사상 세번째로 낮았다. 정치비자금 스캔들과 고물가 문제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권자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다. 민심이 정치와 거리를 둔 탓에 자민당은 제1 정당 포지션을 지켰다. 일본 정치의 악순환이 또다시 반복된 것일까. 그런데 올해는 좀 달랐다. 자민당 단독 과반은 물론 공명당과의 연립여당 전선에서도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자민당은 191석, 공명당은 24석을 얻어 합계 215석에 그쳐 중의원 465석의 과반인 233석을 못 넘었다. 일본 정계에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된 십수년 만의 사건이다. 야당은 약진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기존 98석에서 148석으로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제1야당이 전체 의석수의 30%에 해당하는 140석 이상을 확보한 것도 2003년 민주당이 177석을 얻은 이후 21년 만이다. 국민민주당도 7석에서 28석이 됐다. 야당은 유권자에게 "자민당 말고도 대안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이제는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변화의 중심은 젊은 유권자들의 참여다. SNS에 익숙한 '유토리 세대'(1987~2004년 출생)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마치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이전의 '사토리 세대'(1980년대 후반 출생)와 정반대 성향을 보인다. 자민당의 오래된 방식과 정책에 피로감을 느끼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 따르면 이번 총선에서 젊은층의 절반 이상이 자민당에서 소수 야당으로 갈아탄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층의 이탈은 자민당의 콘크리트 조직력에 균열을 내고 여야 협치의 길을 텄다. 경제와 환경 문제에 대한 청년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자민당은 주로 기존 경제정책과 방위정책에 집중했다. 그러나 청년들은 보다 실질적인 경제개혁과 환경보호정책을 요구하며 자민당과 정면 충돌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적 요구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자민당은 더 이상 유권자의 지지를 담보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2024년 중의원 선거는 자민당에 큰 숙제를 남겼다. 고령 지지층에만 의존하는 낡은 정당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정치참여 세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새 세대의 등장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 내각과 자민당을 정조준하고 있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2024-11-05 18:31:13일본말에 '냄새 나는 것에는 뚜껑을 덮는다'(臭いものに蓋をする·쿠사이모노니 후타오스루)라는 말이 있다. 불편한 진실이나 문제가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거나 외면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현재 일본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특히 역사를 직시하지 않고 진실을 모른 척하는 일본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23년 9월 1일, 간토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1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낳았다. 천재지변보다 더 참혹했던 것은 그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열도를 흔들어 대지진이 났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다. 일본 민간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6000여명에 이르는 재일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는 단순한 폭도들에 의한 범죄가 아니었다. 일본 경찰과 군대가 학살을 방관하거나 조장했다는 증거(간토계엄사령부 상보·도쿄 백년사)들이 사실로 존재한다. 국가적 차원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매해 9월 1일이면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 조선인 추모비에선 추도식이 열린다. 2006~2016년 실행위가 도쿄도에 추도문을 요청하면 해마다 빠지지 않고 도쿄도지사가 추도문을 보내 왔었다. 하지만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 취임 이후 올해까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2016년까지는 도지사가 매년 추도문을 발표했지만 이후로는 뚝 끊겼다. 고이케 지사는 간토대지진 희생자 추도문을 보냈기 때문에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해 따로 추도문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의해 학살된 것인데 어떻게 지진 희생자가 될 수 있을까. 말이 안 된다. 일본 정부도 이 끔찍한 사건을 외면했다. 101년이 지나도록 진정한 사과와 반성은커녕 사건 자체를 망각하려고 애썼다. 일본 정부와 고이케 도쿄도지사는 조선인 학살에 대해선 '뚜껑을 덮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명확한 사과와 반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한일 관계의 발전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그에 편승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일 것이다. 일본 정부와 고이케 도지사의 이러한 무시는 일본 내에서 일부 지지층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국제사회와 한국과의 관계에선 깊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한일 양국은 오랜 역사적 갈등을 안고 있으나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사 정리에 나서지 않으면 양국 간의 근본적 신뢰회복은 요원하다. 조선인 학살이나 강제징용 등 민감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의 책임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반면 올해 간토대지진 기념식에 참석한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의 행보는 긍정적인 한 걸음이다. 이 기념식에 거물인 일본 전 총리가 참석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가 보여준 태도는 지금 양국에 필요한 리더십이라고 할 만하다. 일본 내부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학살 실태를 밝혀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은 지난달 30일자 사설에서 8년째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고이케 도지사와 일본 정부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신문은 "부(허물)의 역사를 왜 외면하는가, 사실을 직시하고 교훈으로 삼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이케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 피해자를 모든 지진 희생자와 묶는 데에 대해서도 "학살은 천재와는 다르다. 고이케 도지사의 태도는 인정하기 싫은 과거를 묵살하는 학살 부정론과 통한다. 사실을 마주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계속 맹세하는 것의 그 중요함은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다. 이제 일본 정치인들이 '뚜껑'을 열어야 한다. 뚜껑 속에 한일 관계의 미래가 있다. km@fnnews.com
2024-09-03 19:52:54매년 여름 일본의 거리는 불볕더위로 불타오른다. 에어컨은 최대 출력으로 돌아가고, 거리의 사람들은 지친 얼굴로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걷는다. 하지만 이런 폭염은 단순한 날씨 이야기가 아니다. 전력소비의 폭증, 농업 생산의 감소, 관광산업 침체, 건강 문제까지. 폭염의 이면에는 또 다른 경제학이 숨어 있다. 여름철 폭염은 에어컨 사용의 급증을 초래한다. 이는 전력소비량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져 전력망의 안정성을 위협한다. 지난해 여름 일본의 전력소비량은 전년 대비 약 5% 증가했다. 전력회사들은 약 6800억원에 달하는 추가적인 비용을 부담했고, 곧바로 소비자 전력요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해마다 전력비용이 증가하자 일본의 많은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스마트그리드와 에너지저장시스템(ESS)을 잇따라 도입했다. 스마트그리드는 전력 사용패턴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효율적인 전력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도쿄전력은 스마트그리드 기술을 활용해 여름철 전력 피크타임 동안 전력소비를 약 10%(약 4100억원) 줄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파나소닉은 '제로 에너지 빌딩'을 목표로 건물의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단순히 기업의 운영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폭염은 또 농작물의 생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고온과 가뭄은 쌀과 같은 주요 작물의 생산량을 감소시켜 식량 가격을 상승시키는 원인이 된다. 2022년 일본의 쌀 생산량은 약 3% 감소했고 여름 채소 가격도 평균 12% 상승, 농민들의 수익 감소와 소비자 부담 증가로 이어졌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스마트 농업 기술과 드론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다. 드론을 이용해 작물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필요한 경우 정확한 위치에 물과 영양분을 공급해 작물의 생장환경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도입은 약 2700억원의 농업 손실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름철 폭염은 관광산업에도 큰 타격을 준다. 지난해 여름 일본의 주요 관광지 방문자 수는 전년 대비 약 10%(약 2500억원 규모) 감소했다. 도쿄와 교토 같은 대도시는 실내 관광 명소와 에어컨이 완비된 쇼핑몰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야외 관광지의 수익이 급감했다. 홋카이도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여름 기후를 활용, '쿨 재팬'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반면 폭염으로 성장하는 관광산업은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분야다. 실제 교토의 역사적인 사원들을 AR 기술을 통해 집에서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다. 도쿄타워는 VR 기술을 활용, 방문객들이 타워의 역사와 구조를 가상으로 탐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열사병 문제도 만만찮다. 일본에서는 2022년 열사병 환자가 20% 증가한 3만명 이상 발생했다. 열사병은 1400억원의 의료비용 증가와 노동력 손실 등 경제적 비용을 초래했다. 일본 정부는 국민에게 폭염 대비 행동요령을 교육하고, 공공장소와 학교에서 열사병 예방 캠페인을 실시하는 등 시민의 인식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도 국민 세금 700억원 정도가 들었다. 이처럼 폭염은 단순한 기후 문제가 아니라 경제 전반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기후적 도전에 대비해 에너지 효율성 향상, 식량안보 강화, 관광산업 다변화 그리고 건강 안전망 구축 등의 종합적인 대응책 마련은 필수다. 이런 대응은 이미 경제적 손실에 대한 방어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도 폭염에 대한 대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날씨를 탓할 것이 아니라 경제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km@fnnews.com
2024-08-06 18:20:54일본의 새로운 지폐가 3일부터 발행된다. 엔화 지폐 디자인이 리뉴얼되는 것은 20년 만이다. 1만엔권, 5000엔권, 1000엔권 등 3가지 신권이 발행된다. 1만엔권의 얼굴에는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가 낙점됐다. 기존에는 일본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이 들어가는데 40년 만에 교체되는 것이다. 기업인이 지폐의 인물이 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또 5000엔권에는 일본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쓰다 우메코(1864~1929)가 새롭게 등장한다. 1000엔권은 일본 근대 의학의 기초를 놓은 기타자토 시바사부로(1853~1931)가 선정됐다. 이 중 한국과 연관이 큰 인물은 1만엔권의 주인공인 시부사와다. 시부사와는 일본 500여개의 기업과 기관을 설립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대표적인 기업으로 도쿄가스, 제일국립은행, 도쿄증권거래소 등이 있다. 이 기업들은 일본 경제의 근간을 이루어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시부사와가 다른 경제인들과 차별화되는 것은 그가 경제활동에 있어 윤리적 가치를 중시해서다. 그는 '논어와 주판'(論語と算盤)이라는 저서에서 "한 손에는 주판을 들고 돈을 많이 벌되 또 다른 손에는 논어를 들고 항상 윤리를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당시 다수와 조직의 이익에만 가치관이 매몰된 일본 사회에 경종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경제철학은 요즘 기업 경영의 화두가 되는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이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과 맞닿아 귀감이 되고 있다. 신권 발행은 다시 일본 사회에 시부사와 바람을 불게 했다. 연일 신문에서는 그를 재조명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회장, 오카후지 마사히로 이토추 회장, 구리야마 히데키 전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 등이 인터뷰 기사를 통해 자신의 성공 뒤에 시부사와의 철학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시부사와는 일본 근대 경제의 아버지로서 대단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한국 입장에서 볼 땐 뚜렷한 명암이 공존한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관련해 금융시스템 도입과 기업 경영의 현대화 등 그의 조언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일 양국 간의 경제적 협력의 기초가 됐다. 한국 입장에서는 시부사와의 경제개혁이 일본의 경제모델을 연구하고 벤치마킹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역시 시부사와는 한반도 침략의 선봉자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기여한 한일 간 경제적 교류 촉진은 일본의 식민지 활성화를 위한 수단일 뿐, 과정은 불순했다. 당시 경제교류는 일방적인 착취로 이어졌고, 한국 경제는 일본의 하위 구조로 전락했다. 광복 이후에도 수십년간 한국 경제의 자립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부사와의 경제정책은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옹호한다. 그의 시스템을 모방한 한국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취해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선 중소기업이 크기 힘든 불균형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는 1900년대 초 자신이 은행장이었던 제일국립은행이 대한제국에서 허가 없이 1~10엔 화폐를 발행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해당 화폐에 본인의 얼굴을 넣어 한국에 치욕을 안겼다. 그는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하고 일제강점기 경성전기(한국전력의 전신) 사장을 맡아 경제침탈에 앞장섰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만엔권의 시부사와는 2019년 아베 정권에서 결정한 것"이라며 "이를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발행하는 기시다 정권도 문제가 크다. 역사를 수정하려는 전형적인 꼼수"라고 비판했다. 그의 공과를 균형 있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달 70만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본을 여행한다. 1만엔짜리에 새로 새겨질 시부사와는 우리에겐 그런 사람이다. km@fnnews.com
2024-07-02 18:59:17일본 제조업의 신뢰가 무너졌다. 도요타, 혼다, 마쓰다, 야마하, 스즈키 등 완성차 업체 5곳이 품질인증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사건이 적발됐다. 부정으로 생산된 모델은 5개사 총 38개종에 이른다. 충격적인 소식에 현지 언론들은 '품질 사기'라는 제목을 달며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통감하고 있다. 국토교통성은 안전성 등이 기준에 적합한지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부정 행위와 관련된 생산 차종의 출하 정지를 지시했다. 이날 도요타를 시작으로 나머지 4개 업체에 대한 현장검사가 실시됐다. 국교성은 "부정 행위는 이용자의 신뢰를 해치고 자동차 인증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로 극히 유감스럽다"며 "위법행위 사실을 확인하고 관련 법에 따라 엄정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정행위가 매우 악의적이라고 판단될 경우 자동차 생산 허가가 취소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생산 및 출하를 재개하기까지 최소 2개월 이상 공장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 이번 부정행위는 현재 발견된 것만 2014년부터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에는 닛산과 스바루가 무자격자에 의한 출하 전 차량검사 등 부정이 판명됐다. 일본 제조업을 대표하는 완성차 업체들의 민낯이 잇따라 확인되면서 세계가 존경하던 일본의 장인정신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연비와 배출가스 데이터를 조작하고, 검사절차를 무시하는 등의 행위는 단순한 규제위반이 아니다. 이는 일본 자동차 산업 전체의 도덕적 해이와 일본 정부의 느슨한 규제, 감독 수준을 반영하는 심각한 문제다. 일본 자동차 산업의 출하액은 전체 제조업의 20%를 차지한다. 취업인구는 550만명이 넘는다. 자동차 산업은 광범위한 기반산업인 만큼 생산과 출하가 장기간 중단되면 회복세를 이어가고 있는 일본 경제에 찬물이다. 일본 자동차 산업은 단기적으로는 경제적 손실을, 장기적으로는 신뢰 회복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폭스바겐과 아우디의 경우처럼 전 세계의 많은 소비자들이 일본 자동차의 품질을 의심하고, 이는 브랜드 가치의 하락을 초래할 것이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제품의 품질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고유의 정신을 의미했다. 그러나 일련의 인증 부정 사건들은 이러한 장인정신이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 혹은 처음부터 허구였는지를 의심케 한다. 많은 일본 기업들은 성과를 높이기 위해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비윤리적 행위를 용인하는 경향이 짙다. 내부감시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부정행위를 미리 방지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한다. 이번 사태는 한국 제조업에도 적잖은 교훈을 준다. 한국 기업들도 높은 윤리적 기준을 유지하고, 내부 통제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신뢰와 품질을 우선시하는 경영철학이 결국 기업에 더 큰 이익을 준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번 일은 한국 자동차 업계에는 기회일 수도 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의 신뢰가 무너진 지금, 품질을 앞세운 한국 자동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이미 뛰어난 품질과 혁신적인 기술로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제는 더 높은 윤리적 기준과 투명한 경영을 통해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잃어버린 신뢰를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 일본 자동차 산업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기업들은 윤리적 경영과 내부통제 강화를 통해 다시 한번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를 잃는 것은 순간이지만, 이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장인정신의 본질을 되찾고, 윤리적 경영을 실천하기까지는 이전에 쌓았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km@fnnews.com
2024-06-04 19:46:47도쿄에 살면서 전기, 가스, 수도 등 모든 공공요금을 라인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내고 있다. 일본인들은 아직도 아날로그가 익숙하다. 대다수는 지로를 우편으로 받아 가까운 편의점에서 공공요금을 현금 납부한다. 비교적 젊은 층 일부가 한국처럼 자동 계좌이체 서비스를 이용한다. 기자는 부임 당시 30년 만에 물가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일본 경제를 체감하기 위해 자동이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라인 플랫폼을 써보기로 했다. 집으로 도착하는 요금통지서의 바코드를 촬영하면 연계된 계좌로 요금을 납부할 수 있는 간편한 시스템이다. 얼마나 돈이 빠져나가고 있는지 체크하기가 쉬웠다. 그러면서도 그때는 1억2000만 일본인의 국민 메신저를 넘어 공적 인프라가 된 라인 그리고 이걸 개발한 네이버가 '진짜 대단하다'라고만 쉽게 생각했다. 물론 현재 라인을 운영하는 곳은 네이버와 소프트뱅크가 50%씩 투자해 설립한 라인야후(A홀딩스)라는 한일 합작회사다. 하지만 아직도 '라인=네이버'라는 인식이 깊다. 이 때문에 '한국 회사'를 통해 일본 공공요금을 납부한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던 것이다. '외국 회사가 이런 공공영역의 일도 가능하구나' '일본은 지금껏 토종 플랫폼 하나 안 만들고 뭐했을까'라면서. 그 대단함이 결국 도를 넘은 것일까. 최근 갑자기 일본 정부가 나서 '라인을 내놓으라'며 네이버를 압박하고 있다. 갑자기라기보단 일본의 정보를 과점한 라인을 손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차에 칼을 빼든 것으로 보는 게 맞겠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1월 말 라인야후의 자사 서버가 제3자의 공격을 받아 약 52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을 빌미 삼았다. 일본 정부는 라인야후가 대주주인 네이버와 시스템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총무성은 3월 시스템 분리를 요구하는 행정지도를 내렸다. 회사도 2026년 12월까지 완료하겠다는 재발방지대책 관련 보고서를 제출했다. 회사는 보고서에서 네이버클라우드 데이터센터와 라인 데이터센터 간 네트워크 연결을 수정, 불필요한 통신을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라인 시스템에 대한 무단접근이 원인인 만큼 접근 설정을 변경하고 두 시스템 사이 방화벽을 설치해 불필요한 통신은 모두 차단한다고도 했다. 회사 측은 "올해 6월까지 위탁 및 통신 차단에 대한 검토 계획을 수립해 단계적으로 시스템을 분리하고, 또 네이버와 인증 시스템·인증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도 개선하겠다"고 전했다. 회사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신속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측은 '불충분하다'는 말로 뭉개면서 소프트뱅크에 '자본관계를 재검토하라'는 행정지도를 내렸다. 사실상 소프트뱅크가 라인야후 지분을 더 사들여 네이버를 배제하고 단독경영하라는 주문이다. 주요국의 정부가 민간기업에 행정지도로 지분정리를 참견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본 매체조차도 "공공 인프라가 된 라인이 네이버 의존 상태에 계속 노출되는 것을 당국으로서는 용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의 행정지도를 네이버가 따라야 할 법적 의무는 없다. 다만 라인의 전 세계 이용자는 약 2억명인데, 그 본진이 절반인 9600만명의 이용자가 있는 일본이다. 그런 나라의 정부가 장애물이 되는 것 자체가 네이버엔 대형 악재다. 이 시점에서 안 좋은 기억이 스친다. 2019년 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를 단행한 바 있다. 이때 50% 안팎이던 아베 신조 내각의 지지율은 60%대까지 치솟았다. 역대 가장 인기가 없다는 현 기시다 후미오 내각도 20%대 지지부진한 지지율로 퇴진 위기에 몰렸다가 전날 약 30%(민영 JNN)까지 반등했다. 두 그림이 겹치는 것은 단지 우연이고, 기우였으면 한다. km@fnnews.com
2024-05-07 18:24:35"일본 전체에 큰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6일 TSMC 규슈 구마모토 1공장을 방문,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올리며 "현지 경제성장이나 임금인상, 고용 확대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며 "두 공장에서 고도의 기술전문직 3500명 이상을 채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지독한 저성장의 늪에 허덕였던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을 청산하고 새로운 경제 변곡점에 서 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정책이었던 '아베노믹스'의 후광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일본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을 끊어내고, 경제에 다시 온기가 찾아온 건 기시다 정권에서다. 지금에야 '반도체 코리아'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반도체라는 제품이 세상에 처음 나올 때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호령하던 맹주였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여전히 현대 반도체의 원천기술 핵심은 대부분 일본이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코리아' 역사의 서막도 일본에서 비롯됐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74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산 직전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기술자들을 데리고 거의 매주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사정하다시피 기술을 조금씩 배워 왔다. 그렇게 10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이 64K D램이다. 삼성은 수많은 반도체 중 하나인 메모리에 집중했다. 그 선택은 한국 경제의 코어가 됐다. 일본의 몰락은 1995년부터다.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 다자간무역협상을 근거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면서 미국 기업들이 국제분업을 본격화한 것이다. 이때 미국은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인 팹리스(반도체 설계)에 집중했다. 공장 근로자들이 많이 필요한 반도체 제조는 동맹이면서 임금이 저렴한 한국과 대만에 맡기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애플, 엔비디아, AMD 등 미국 팹리스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같은 한국·대만 반도체 제조 분업화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일본은 왜 빠졌을까. 당시 일본은 반도체 왕국이라는 자존심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초호황을 누릴 때는 세계 50대 기업의 대부분이 일본 기업이었다. 1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을 위협할 정도였다. 현지에선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의 땅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나올 만큼 일본인들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일본은 반도체 분야에서 두 발, 세 발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분업화가 아닌 모든 공정을 사내에서 처리하는 수직적 모델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매년 막대한 투자금을 쏟아부어야 유지된다. 호황은 버블경제의 둔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년을 버티지 못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투자 부담에 짓눌려 자멸했다. 일본 경제는 30년 만에 호황 사이클에 올라탔다. 주식과 땅값은 사상 최고를 찍었다. 물가상승은 임금인상으로 이어지고, 또 물가에 반영되는 선순환이 확인됐다. 조심스럽던 일본은행이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면서 디플레 탈출 선언도 시간문제가 됐다.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TSMC는 일본 1공장 개소에 이어 2공장도 구마모토에 짓는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3공장 건설까지 거론되고 있다. 1공장만 봐도 구마모토 지역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의 경제효과는 2021년부터 10년간 약 9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TSMC의 일본 공장 건설은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 부활과 패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한 화룡점정이다. 기시다 총리가 TSMC 일본 공장에 10조7789억원(1공장 4760억엔·2공장 7320억엔)을 지원해도 아까워하지 않는 이유다. km@fnnews.com
2024-04-09 18:10:18전공의들이 의대정원 확대에 반발해 집단으로 병원을 떠난 지 3주째가 넘어가고 있다. 전공의에 더해 서울대 의대 교수들까지 전원 사직을 예고했다. '강대강' 국면은 계속되고 도통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올해 의대정원을 지난해보다 19명 늘어난 9403명으로 결정했다. 현재 3058명인 한국의 3배를 웃도는 규모다. 일본만 그럴까. 의대정원이 8000~9000명가량인 독일과 영국은 2030년까지 우리나라의 5배에 달하는 1만5000여명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일본은 1960년대 의대정원이 한국과 비슷한 3000명 수준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꾸준히 정원을 늘려 1981년에는 최대 8280명까지 신입생을 뽑았다. 이후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 늪에 빠지고, 의사가 공급과잉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의대정원을 2007년 7625명까지 줄이기도 했다. 이때 일본 의료계에 터닝포인트가 되는 사건이 터졌다. 만삭의 임신부가 구급차에 실려 이송됐지만 여러 병원에서 거부당했고, '응급실 뺑뺑이' 끝에 결국 사망한 것이다. 전국적인 분노가 들불처럼 번졌고, 의사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의대 증원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일본은 2008년 168명 증원을 재개하며 최근 17년간 의대 정원을 1778명(23.3%) 늘렸다. 지역의사 확대정책도 동시에 진행해 지난 10년 동안 의사가 4만5000명 증가했다. 그럼에도 지방의 의사인력 부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지자체들은 의대 증원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원이 줄면 지방으로 오는 의사 수가 더 적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정부 역시 여전히 의대정원 조정이 필요하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의료붕괴를 막으려면 의사 증원이 필요하다며 오히려 의사와 의대생이 서명하는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우리 정부는 2035년 의사 수가 1만5000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의사인력 1만명 확충안(의대 증원 2000명×5년)을 발표했다. 수십년간 업계와 대화하고 천천히 의대정원을 늘려온 일본과 비하면 너무 급한 감이 있다. 일본은 의료개혁은 백년을 내다보는 대업으로 보고 해마다 지역수요에 맞춰 100명 안팎의 인원을 천천히 증원해 왔다. 일본과 우리의 상황이 다르지만 일본이 정원을 늘리는 과정에서 왜 일본 의사회가 적극 찬성했는지 우리 정부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뜻하지 않게 현장을 떠나 모처럼 여유가 생긴 우리 의사들도 졸업장 속에 적힌 '제네바 선언'을 다시 읽어봤으면 한다. 의사로서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환자의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는 그 다짐과 사명감이 아직도 유효한지 각자 확인해볼 때다. "현재 우리나라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해외 사례처럼 단순히 임금을 올려달라는 게 아니라 의사 부족으로 인한 환자의 피해를 전제로 돈을 더 벌겠다는 것"이라는 듣기도 민망한 말들이 왜 나오게 됐는가도 생각해야 한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은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군 병원을 개방하면서 '환자 진료가 의료진의 당연한 책무인 만큼 관련 사안을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군대전병원 관계자는 언론에 "군의 존재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비단 환자를 치료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 군의 책무여서만일까. 군인 이전에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테다. 고된 현장에 있다 보면 의사들도 처음 의사가 될 때의 마음가짐이 흐려질 수 있다. 직업인으로서 내 밥그릇부터 챙겨야 환자 생명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단순한 직업인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km@fnnews.com
2024-03-12 18:40:18미국 대선이 9개월도 채 남지 않은 가운데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결구도가 굳어지는 양상이다. 초반부터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다. 지난 1일 시장조사기관 'SSRS'의 미국 전역 여론조사에서 바이든(45%)이 트럼프(49%)에 밀린다는 가상대결 결과가 나오자 과거 '트럼프 피해국'들의 불안은 더 깊어지고 있다.21세기 초까지 유지된 '지구방위대'라는 미국의 역할을 버리고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한 트럼프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현지 언론들은 '트럼프 2.0'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할 때라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와 '그나마' 잘 지낸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2016년 11월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트럼프에게 전화로 축하메시지를 보내고 곧바로 정상회담 일정을 결정지었다. 전 세계 수뇌부가 부러워한 미·일 관계의 초석이 이때 구축됐다. '미국은 동맹국에 퍼주기만 한다'고 인식한 트럼프의 청구서에 대비해 일본은 대미 투자실적을 주도면밀하게 설명하며 탈압박에 성공했다. 내어준 것도 많지만, 트럼프 집권 4년 동안 일본은 트럼프의 미국을 어떻게 파고들 것인가, 점점 과격해지는 발언과 약속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할 것인가를 공부하면서 그 나름대로 선방한 손익계산서 외교를 했다. 하지만 그때 일본에는 구심점 아베가 있었다. 만약 '트럼프 2.0' 시대가 온다면 이미 퇴진 위기인 20%대 지지율로 리더십을 상실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로 미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많다.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기시다의 재선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는 가운데 차기 총리 후보라는 잠룡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는 현재 진행 중인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막겠다고 공언하며 벌써부터 대립각을 세워놨다. 반대 이유는 미국의 철강산업 기반 약화와 국가안보 등 역시 미국 우선주의다. 일본은 미국 대선이 있는 11월 전인 9월까지 인수합병(M&A)을 매듭짓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일이 잘 마무리된다고 해도 이후 트럼프의 보복이 무섭다. 불안한 일본은 '팀 아베'의 부활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마리 아키라 전 자민당 사무총장은 11일 후지TV에 출연, 트럼프가 11월 재선된다면 "아베 시절 협상 경험을 살려 당시 직원들을 총리실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아베 진영의 참모진은 경험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는 협상가다. 그의 성격과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베는 미국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동맹국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논리를 개발하는 등 천재적 행보를 보였다"고 말했다. 돌아온 트럼프는 돈(방위비)을 더 내지 않는 동맹국에 대해 '안보우산'을 거두겠다는 암시까지 하며 악당을 자처하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방위비를 충분히 내지 않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침공하도록 독려하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는 "당신이 체납자라면 보호하지 않겠다. 오히려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독려할 것이다. 청구서에 나온 대금을 납부하라"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재임 당시 '한국이 무임승차하며 미국을 벗겨먹으려 한다'고 수차례 공격했다. 트럼프는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5배 상향을 요구했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추진했다. 바이든 정권교체로 무산됐으나 퇴임 이후에도 트럼프는 두번째 임기에서 주한미군을 반드시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 나토와 러시아를 한국과 북한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우리도 '팀 아베'를 복습할 때다. km@fnnews.com
2024-02-13 18:44:142024년 1월 1일 오후 4시10분쯤.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집을 대청소할 때였다. 평소보다 꼼꼼하게 청소에 열중하고 있던 와중, 갑자기 현기증 같은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청소를 이어가려던 그때, 건물이 휘청휘청 크게 흔들렸다. 집 안의 화분 잎사귀와 주방에 걸린 조리도구, 벽에 걸린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더니 점점 잦아들었다. 일본 도쿄 15층짜리 맨션은 체감상 1분 남짓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가을 새벽에도 규모 5 정도의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냥 '가까운 바다에 지진이 왔나 보다' 하며 일본 야후의 속보를 찾아봤다. 그런데 보통 지진이 아니었다. 진원지도 흔히 있었던 도쿄, 지바 인근 등이 아닌 그 반대편, 우리 동해 쪽이었다. 혼슈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지진'이라고 이름 붙여진 규모 7.6의 강진이었다. 지진 발생 직후 일본 기상청이 노토반도에 최대 5m 대형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NHK방송 화면에는 '쓰나미! 도망쳐!'라는 자막이 큰 글씨로 떴다. 경고 자막은 '쓰나미! 피난!' 'Evacuate!(대피하라)' 등이 계속 번갈아가며 전파됐다. 일본 방송에서, 그것도 공영 NHK에서 '도망쳐'라는 문구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분하게 속보를 전하던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오후 4시13분 쓰나미 경보가 내려진 이후로는 더욱 크고, 다급해졌다.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순간이었다. 아나운서는 "쓰나미 경보입니다! 즉시 도망치세요!" "지금 당장 집을 떠나서 높은 곳으로 가십시오!" "멈추지 말고 바다에서 떨어진 곳으로 대피하십시오!"라고 격앙된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각지의 쓰나미 정보를 서둘러 보도했다. 직설적인 자막과 아나운서의 긴박한 음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바로 알게 했다. 몇 초 뒤 현장 CCTV 중계화면에는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와 피신하는 모습, 건물 몇 채가 풍진에 휩싸인 듯한 모습 등이 그대로 방송됐다. 일본 정부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진 발생 직후인 오후 4시11분 총리관저 위기관리센터에 대책실이 설치됐다. 관방장관과 방재담당상이 4시30분 이전 관저에 들어갔고 신속한 대응에 나섰다. 이튿날에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비상재해대책본부가 열려 본격적인 수습이 진행됐다. 기시다 총리는 지자체의 요청에 앞서 지원하는 '푸시형 지원'을 실시했다. 전국의 자위대와 경찰·소방 인력을 재해지역으로 급파했다. 공무원들에겐 3가지 지시사항을 강조했다. △인명제일로 전력 대응 △피난정보를 국민에게 적확하게 전달 △피해상황의 신속한 파악 등이다. 이번 강진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규모 9.0) 이후 가장 큰 지진이다. 6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 한신대지진(7.3)보다도 강하다. 노토반도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9일 현재 180여명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건 언론과 정부당국의 신속한 대응, 국민의 협조, 튼튼한 내진설계 등 민관의 '네박자'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이번 지진으로 '한반도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라는 말이 또 나온다. 2016년 경주 지진과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사골'이 되다시피 한 표현이다. 8년이 지났음에도 이 문구가 반복되는 건 공염불의 방증일 것이다. 우리는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허둥댔다. 재난방송은 부정확한 정보로 혼란을 부추겼다. 당국의 늑장대응은 시정되지 않았다. 전국 건축물 10개 중 8개가 내진설계가 안 된 것은 고사하고, 있어야 될 철근까지 빼먹는 '순살 아파트' 사건까지 발생했다. 지금 당장 일본과 같은 대형 지진과 쓰나미가 한반도에서 발생한다면 대규모 피해는 불 보듯 뻔하다. 국민들은 어떻게 생명을 지키고, 어디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km@fnnews.com
2024-01-09 17:5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