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를 구성하는 인류문화의 두 생태 축은 안데스산맥과 아마존강이다. 두 축으로 엮어진 인간사가 라틴아메리카 이해의 근간이다. 종축으로 남행하는 안데스산맥은 볼리비아의 고원으로 연장되면서, '알티플라노'(고원이란 뜻)라고 불리는 해발 4000m 내외의 독특한 산악문화를 형성한다. 사용되는 주류 언어는 두 가지다. 종축에서 사용되는 케추아(Quechua)와 볼리비아로 연장된 횡축에서 사용되는 아이마라(Aymara), 두 언어의 접촉지대가 위치한 곳이 티티카카 호수다. '티티카카'는 아이마라어로 '퓨마의 바위'란 뜻이다. 이 호수는 잉카의 신 비라코차(Viracocha)가 탄생한 곳이자 태양이 탄생한 곳이란다. 그래서 잉카의 태양숭배 종교를 지탱한다. 해발 3800m인 이 호수의 바닥에서 최근 신전 유구들이 발견됐다. 1998년 람사르협약 등록지가 된 곳이 티티카카 호수다. 박사과정에서 라틴아메리카를 전공하면서 수강한 과목의 내용에 '우로스=물에 뜬 섬마을'(Uros=a floating island village)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담당교수에게 질문을 했더니, 자신도 모르니 날더러 가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는 채로 학생들에게 우로스의 이야기를 했고, 10년 동안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1986년 12월에 찾아갔다. 가장 가까운 공항은 페루의 훌리아카이며, 두 줄 철조망으로 둘러친 운동장뿐이었으며, 곳곳에 검은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 안중에 들어왔다. 화물도 모두 내 손으로 꺼내고 들고 나와야 하는 그야말로 시골 공항이었다. 나는 훌리아카로부터 푸노(Puno)까지 완행버스를 탔다. 훌리아카의 시장을 보고 골짝의 집으로 돌아가는 주민들이 염소와 닭과 함께 타고 가는 버스다. 훌리아카부터 푸노까지는 양 옆으로 야마(라마가 아님)들이 풀을 뜯는 내리막길이고, 서서히 짙푸른 티타카카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푸노항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들어가는 곳이며,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섬은 모두 물에 뜬 상태다. 무수한 세월 동안에 얽히고설킨 채로 자라는 풀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섬! '도토라'(dotora)라고 불리는 갈대 비슷한 풀의 원뿌리는 호수의 바닥으로부터 올라온 것이고, 매년 여름(12월부터 2월 사이)이면 불어나는 물에 떠내려온 흙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서 풀뿌리들과 조합된 섬이다. 여름에 호수의 수위가 상승하면 섬이 같이 뜬다. 섬 위에는 집도 있고, 손바닥만 한 채전에 퀴노아콩과 감자꽃도 피었고, 오리집도 있고, 개집도 있다. 밭의 흙은 새까맣다. 집은 바닥과 벽 그리고 지붕이 모두 도토라로 엮은 거적때기를 이용했다고나 할까. 가장 큰 섬에는 학교도 있다. 우로스 공동체인 것이다. 모든 것이 풀로 되어 있다. 우거진 도토라 사이에 조금씩 지붕이 보이는 정도의 낮은 집들이다. 이곳의 가장 강력한 금기는 당연히 불을 다루는 것이며, 가장 이외에는 아무도 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케추아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은 채 손짓발짓으로 섬을 둘러보는데, 나를 따라다니던 카란사 영감님은 한사코 날더러 나가라는 시늉을 한다. 영감님의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야마의 털실로 항상 뜨개질을 한다. 귀밑까지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짠다. 하룻밤이라도 지낼 욕심으로 못 알아들은 것처럼 버텼다. 해가 지면서 배들이 모여든다. 배도 도토라로 만들었다. 도토라는 취사를 위한 연료이기도 하고, 하얀 색의 어린 줄기는 샐러드로 일품이다. 집 옆에는 도토라를 잘라서 말리는 건조장이 있다. 건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나, 도토라로 용마루를 이은 정도이고, 그 아래에 도토라를 차곡차곡 쌓아 두고 있다. 고기 잡으러 나갔던 아들 내외도 돌아오고, 푸노에 나갔던 딸들과 부인도 돌아오고, 방은 금세 삼대가 이룬 가족원으로 가득 찼다. 방 안의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결코 수용될 수 없었다. 그제서야 카란사 영감님이 한사코 나가라는 시늉을 했던 의도를 알았다. 더 이상 다니는 배도 없다. 방 안에 별다른 가구는 없다. 화덕을 가운데로 두고 여성들(할머니부터 아이들까지)은 모두 모자를 쓴 채로 앉아서 잔다. 주변으로 남자들이 누웠는데, 손바닥만 한 빈틈도 없다. 해가 지면서 어두워진 호수 위로 후두둑 후두둑 찬비가 흩뿌린다. 카란사 영감님이 저녁을 먹으라고 접시를 내민다. 작은 동물 다리 한 개와 감자 세 알이 올려졌는데, 다리도 감자도 왜소하다. 손가락으로 집어서 먹고 밖으로 나가서 호수의 물에 손을 씻으면 된다. 감자는 작은 덩어리들이 약간 쫄깃한 듯한 맛이 있다. 수확한 감자를 그대로 보관하면 모두 썩어버리기 때문에, 그것들을 밭 위에 널어둔다. 가끔 주둥이에 멍에를 씌운 야마를 그 위로 걷게 한다. 야마의 발굽이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 효과를 내면서 낮에는 마르고 밤에는 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마련된 감자는 장기간 보관되며, 이것이 '추뇨'라고 불리는 주식이다. 우로스에는 야마가 없다. 가능한 한 무게가 덜 나가는 삶을 사는 곳이기 때문에 가축들이 들어올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좀 떨어진 타켈레 섬에는 야마를 많이 기른다. 나그네는 도토라 건조장을 하룻밤 숙소로 택했다. 도토라는 묶음으로 재여 있었다. 한 묶음을 빼니 공간이 생겼다. 영하까지 내려갈 수 있다는 티티카카 호수의 여름 밤을 앞뒤가 트인 도토라 덤불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카란사 영감님이 야마 털실로 짠 폰초를 갖다 준다. 잠이 올 리는 없고 호수 쪽을 보는데 물속에서 무엇인가가 상하로 왕복운동을 한다. 달빛에 어렴풋하게 비치는 실루엣은 두 마리의 쥐가 장난치는 모습이었다. 저녁으로 얻어먹었던 것! 아침에 일어나니 학교에서 종 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작은 배를 저어서 등교한다. 수년 전에 그곳을 다녀온 아내의 말을 들으니, 이제 그곳에도 호텔이 생겼다고 했다. 푸노국립대학에 근무하는 이영미의 건안을 빌어본다. 푸노의 광산에서 독점하는 물 때문에 티티카카의 일부는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종은 '제 눈에 못 박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나만 잘살기'에 몰입하고 있다. 전경수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
2024-10-07 18:12:5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옛날 어느 한 사내기가 등과 팔다리에 심한 종기를 앓았다. 사내의 종기는 어떤 치료를 해도 좋아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탕약도 먹어 보고, 효과가 좋다는 고약도 붙여봤다. 그러나 별다른 차도가 없이 점차 심해졌다. 당시 종기 치료에 일가견이 있는 어느 의원이 있었다. 그 의원은 종기에 주로 뜸을 떠서 치료했다. 그 사내는 수소문 끝에 그 의원을 찾았다. “의원님 저 좀 고쳐주십시오. 팔다리에서 시작한 종기가 등까지 타고 올라갔습니다. 이제 죽을 것처럼 힘듭니다.”라고 사정을 했다. 의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제자들에게 “이 환자에게 기죽마구법(騎竹馬灸法)을 시행하겠다. 대나무를 가져오도록 하거라.”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린 제자는 ‘무슨 말인가?’하고 어안이 벙벙해 하고 있을 때, 다른 경륜이 있는 제자는 곧바로 대나무를 가져왔다. 대나무는 한쪽 귀퉁이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원래 치료에 사용하던 용도였던 것 같다. 어린 제자가 묻기를 “스승님, 기죽마구법(騎竹馬灸法)이 뭡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대나무말을 태워서 뜸을 뜨는 것이다.”라고 했다. 기(騎) 자는 ‘말을 타다’는 의미니 기죽마(騎竹馬)라고 하면 대나무말을 타는 것이다. 구법(灸法)은 바로 뜸법이다. 그러나 사내가 어이가 없어 하면서 “아니 종기를 치료해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대나무말을 태우겠다니요?”라고 따졌다. 그러자 의원은 “지금 대나무말을 태우는 것은 맞으나 대나무말은 결국 뜸을 뜨기 위한 방편이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살 것이요. 옛날 많은 의원들이 이 방법으로 뜸을 떠서 죽을 사람을 살려낸 숫자가 셀 수가 없이 많았소. 나도 일찍이 사용해 봤는데, 뛰어난 효험이 있었소이다.”라고 하면서 설득했다. 사내는 옛날부터 있었던 뜸치료 방법이고, 의원도 익히 경험을 해서 효과를 봤다고 하니 한번 해보기로 했다. 의원은 먼저 책상 앞에 서서 사내에게 팔꿈치를 책상 위에 붙이고 팔뚝과 팔목을 수직으로 똑바로 세우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얇은 대나무 껍질로 좌측 팔 오금이 부위의 횡문으로부터 전완부위 팔뚝 안쪽 살에 붙여서 가운데 손가락이 끝나는 부분까지 길이를 쟀다. 그러고 나서 그 길이만큼 대나무껍질을 잘랐다. 손톱길이는 재지 않았다. 팔오금이 횡문 부위는 척택혈(尺澤穴) 부위를 기준으로 삼았다. 의원은 굵고 적당하게 긴 대나무를 양쪽 평상에 걸치고 나서 사내에게 위아래 옷을 모두 벗게 해서 대나무말을 타도록 했다. 발은 땅에서 약간 떨어지게 해서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했다. 사내의 체중 때문에 대나무가 낭창거렸고 대나무는 사내의 회음부위와 항문부위를 압박해서 위로 끝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사내는 “아래가 불편하고 아픕니다.”라고 하자, 의원은 “조금만 참도록 하시오. 곧 끝날 것이외다.”라고 했다. 제자 두 명에게 사내를 양쪽에서 붙들어서 넘어지지 않게 했다. 의원은 앞서 팔뚝에서 재어 놓았던 대나무껍질을 이용해서 대나무에 걸터앉아 있는 사내의 엉덩이 꼬리뼈 부위에서부터 똑바로 올려재서 등 척추 중간에 먹으로 점을 찍어 표시를 했다. 사내가 “그곳에 뜸을 뜨려는 것이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이곳은 뜸을 뜨려고 표시한 자리가 아니요. 잠시만 기다리시구려.”라고 했다. 의원은 다시 얇은 대나무껍질을 자로 삼아서 사내의 왼쪽 가운데 손가락 중간마디를 재어서 1촌으로 삼았다. 그러고 나서 앞서 점을 찍어서 표시해 놓았던 곳의 양쪽으로 각각 그 길이만큼 떨어진 곳에 먹으로 점을 찍으면서 “각 1촌! 이곳이 바로 뜸을 뜨는 자리요.”라고 했다. 그렇게 해놓으니 등의 척추 중간을 중심으로 옆으로 총 3개의 점이 찍혔다. 그때 사내를 부축하고 있던 한 어린 제자가 “아니 왜 1촌 길이를 굳이 손가락 중간 마디 길이를 재는 것입니까? 처음 표시한 곳에서 양쪽으로 일정 길이를 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의원은 “사람마다 1촌의 길이가 다르다. 키가 큰 사람은 손가락도 길쭉할 것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손가락 길이도 짧을 것 아니냐. 그러니 모든 사람을 동일한 길이로 1촌을 잡지 않고 그 사람의 키와 뼈의 길이에 따라서 1촌을 달리 잡는 것이다. 이것을 골도분촌법(골度分寸法)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의원은 사내를 대나무말에서 내려오게 한 후 옷을 입게 했다. 그리고 약방으로 들어가서 엎드리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표시했던 양쪽 두 곳에 5장씩 뜸을 떴다. 어린 제자가 묻기를 “기죽마구법으로 뜸을 뜨는 것은 종기가 난 자리에 뜸을 뜨는 것과 효과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기죽마구법은 옹저나 종기가 어느 곳에 생겼는지를 불문하고 모두 이 방법으로 뜸을 뜨면 낫지 않는 것이 없다. 보통 종기가 왼쪽에 있으면 오른쪽에 뜸을 뜨고, 오른쪽에 있으면 왼쪽에 뜸을 뜬다. 여기저기 심하면 양쪽 모두에 뜸을 뜨면 된다.”라고 했다. 그러자 어린 제자는 다시 “아니, 이렇게 대나무껍질로 길이를 재서 잡은 혈자리가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런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의원은 “대개 이 두 혈은 심장의 맥이 지나가는 곳이다. 옹저나 종기는 모두 심화(心火)가 머물러 뭉쳐서 생긴 것이니 여기에 뜸을 뜨면 심화가 잘 흘러서 통하게 되니 즉시 편안해 지면서 낫게 되는 것이다. 이 혈은 기사회생의 효과가 있으니 여러 번 시험하여 여러 번 효과를 보았다.”라고 했다. 경험이 많은 제자가 “소문에 이르기를 모든 통증과 가려움증과 종기는 다 심장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스승님은 이 조문을 실천하시는 것이군요.”하고 하자, 의원은 “맞다. 심장은 혈을 운행시키니 심장이 막히면 혈이 돌지 못하기 때문에 기혈(氣血)이 막혀서 옹종이나 종기가 생기는 것이다. 심장에는 바로 뜸을 뜰 수 없고, 심경(心經) 또한 화경(火經)이니 함부로 뜸을 뜰 수가 없다. 그러나 이 혈에 뜸을 뜨면 심화가 고르게 되어 잘 통하게 되고 죽을 지경에 이른 옹저 또한 즉시 낫게 되므로 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라고 했다. 사내는 이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뜸자리를 잡아서 뜸을 뜨자 온 몸의 종기가 서서히 아물면서 사라졌다. 일명 ‘대나무말 뜸법’이었다. ** 제목의 ○○○은 ‘대나무’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향약집성방> 癰疽瘡瘍門. 鍼灸法. 又騎竹馬灸法, 治風疽, 發背, 發腦, 發鬢, 發鬚, 發頤, 發肋, 發腰, 發腿, 或發於四肢, 或婦人嬭癰, 不問男女, 一見有此疾者, 皆可卽便用此法灸之, 無不安愈. 如葉承相, 洪內翰, 陳日華, 郭知縣方皆云, 自得此, 救人不可勝計. 僕亦嘗用, 果有神効. 其法, 先令病人以肘凭几, 竪臂腕要直, 用篾一條, 自臂腕中曲處橫紋, 男左女右, 貼肉量起, 直至中指尖盡處, 截斷爲則, 不量指甲, 却用竹扛一條, 令病人脫去上下衣騎定, 令脚不着地, 離地五寸, 又令二人扶定, 勿令僵仆, 却將前所量臂腕篾, 從竹扛坐處, 尾骶骨盡處, 直向上, 貼脊背量, 至篾盡處爲則, 用墨點定, 此只是取中, 非灸穴也. 却用薄篾作則子, 量病人中指節, 相去兩橫紋爲則, 男左女右, 截爲一則, 就前所點記處兩邊 各量一則, 卽兩傍各一寸盡處, 卽是灸穴. 兩穴各灸五壯, 或七壯止, 不可多灸. 不問癰生何處, 竝用此法灸之, 無不愈者. 一云, 可視發疽, 發於左則灸右, 發於右則灸左, 甚則左右皆灸, 蓋此二穴, 心脈所過處, 凡癰癤皆心火留滯而生, 灸此則心火流通, 卽見安愈, 可以起死救危, 有非常之効, 屢試屢驗矣. 素問云, 諸痛庠瘡, 皆屬於心. 又云, 榮氣不和, 逆於肉理, 乃生癰腫. 榮者, 血也. 心能行血, 心滯則血爲之不行, 故逆於肉理, 而生癰腫. 灸此穴, 使心火調暢, 血脈流通, 愈於服藥多矣. (옹저창양문. 침구법. 또 기죽마구법이 있다. 풍저, 발배, 발뇌, 발빈, 발수, 발이, 발륵, 발요, 발퇴와 혹은 사지에서 생긴 것 혹은 부인의 내옹을 치료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만일 이러한 질환이 있는 자는 모두 이 방법을 써서 뜸을 뜨니 편안히 낫지 아니한 경우가 없다. 섭승상, 홍내한, 진일화, 현의 책임자를 지낸 곽방이 모두 이르기를 “자신들이 이 방법을 터득하여 사람을 치료한 것이 이루다 셀 수 없다.”고 하였다. 나도 또한 일찍이 사용해 보았는데 과연 뛰어난 효험이 있었다. 그 방법은 먼저 환자로 하여금 팔꿈치를 책상 위에 붙이고 팔뚝과 팔목을 수직으로 똑바로 세운다. 하나의 대나무 껍질을 가지고 굽힌 팔이 끝난 횡문으로부터 남자는 좌측, 여자는 우측을 재는데 대껍질을 살에 붙여 곧장 가운데 손가락이 끝난 곳에 이르러 대껍질을 끊어서 기준을 삼는다. 이 때 손톱은 재지 않는다. 다시 대나무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환자의 위, 아래 옷을 모두 벗게 하고 그 위에 타게 하여 발은 땅에서 5촌을 떨어지게 하여 땅에 닿지 않게 한다.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환자를 부축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고 앞에서 팔 길이를 재어놓았던 대껍질을 대나무 막대기를 타고 앉은 곳의 미저골 끝으로부터 똑바로 위로 올려 등에 붙여서 대껍질이 끝나는 곳을 기준하여 먹으로 점을 찍어 놓는데 이곳은 단지 중심을 정한 것이고 뜸뜨는 혈은 아니다. 다시 얇은 대껍질을 자로 삼아 환자의 가운데 손가락 가운데마디를 재어 기준을 정하는데 남자는 왼손가락, 여자는 오른손가락을 잰다. 그 길이를 끊어서 한 변을 삼는다. 앞에 점찍어서 표시해 놓았던 곳의 양쪽으로 각각 한 변을 가져다가 재는데 양쪽으로 각각 1촌이 끝나는 곳이 바로 뜸을 뜨는 혈이다. 양쪽 혈에 각각 5장 혹은 7장의 뜸을 뜨는데 많이 떠서는 안 된다. 옹이 어느 곳에 생겼는지를 불문하고 모두 이 방법으로 뜸을 뜨면 낫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저가 생긴 것을 보아 왼쪽에서 생겼으면 오른쪽을 뜨고 오른쪽에 생겼으면 왼쪽을 뜨며 심하면 양쪽을 다 뜬다.”고 하였다. 대게 이 두 혈은 심장의 맥이 지나가는 곳이다. 옹과 절은 모두 심화가 머물러 뭉쳐서 생긴 것이니 여기에 뜸을 뜨면 심화가 잘 흘러서 통하게 되니 즉시 편안해 지면서 낫게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위태로운 것을 구원하여 대단히 뛰어난 효과가 있으니 여러 번 시험하여 여러 번 효과를 보았다. 소문에 이르기를 “모든 통증과 가려움증과 종기는 다 심장에 속한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기가 조화되지 않아 기육에서 거꾸로 흐르면 옹종이 생긴다.”고 하였다. 영은 혈이고 심장은 피를 운행시키니 심장이 막히면 피가 운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육에서 막혀서 옹종이 생기는 것이다. 이 혈에 뜸을 뜨면 심화가 고르게 되어 잘 통하게 되고 혈맥이 잘 유통하여 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8-13 15:14:21【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울산 울주군이 지역 대표 전통시장인 남창 옹기종기 시장의 시설 개선과 확대를 추진한다. 울주군은 20일 군청 이화홀에서 이순걸 군수를 비롯해 시·군의원, 시장상인회 등 1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창 옹기종기 시장 시설 개선 및 시장 확대 공사 설계용역 착수 보고회를 가졌다. 앞서 울주군은 입찰을 거쳐 설계 용역 업체를 선정했다. 총사업비 40억원을 들여 오는 7월 착공해 12월 완공할 예정이다. 이날 보고회는 남창 옹기종기 시장 설계안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참석자의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됐다. 시설 개선 공사로는 시장 서측 장옥 8개동을 철거 및 증축하고, 아케이드 1개소를 신설하게 된다. 또 기존 공중화장실을 리모델링하고 LED 전광판도 설치할 예정이다. 시장 확대 공사는 기존 광장과 시유지 주차장을 정비해 시장 구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일부 점포 이전 증축과 광장 이전 설치 등도 진행된다. 울주군은 설계 용역 기간에 시장 관계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공사를 추진할 방침이다. 이순걸 울주군수는 “이번 시설 개선과 시장 확대 공사를 통해 남창 옹기종기 시장이 한층 높은 경쟁력을 갖춰 많은 분에게 더욱 사랑받는 전통시장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라며 “백년의 역사를 가진 남창 옹기종기 시장이 전국 으뜸 시장으로 부상할 수 있도록 용역에 만전을 기해 달라”라고 말했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2024-03-20 14:17:03마이신(항생제)이 널리 쓰이면서 전통 종기치료제 고약(膏藥)은 거의 잊힌 존재가 됐다. 종기는 모낭에서 발생한 염증을 말한다. 위생 관념이 적었던 시절에 종기는 흔한 질병이었다. 심하면 고름이 빠진 자리에 심지를 넣고 고약을 붙였다. 고약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가정마다 비치해 뒀던 상비약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했던 두 고약은 '이명래 고약'과 '조고약'이다. 이명래 고약은 1905년에 첫선을 보인 우리나라 '전통의약 1호'다. 1897년에 나온 '활명수'는 국내 최초의 양약(洋藥)으로 분류된다. 이명래 고약을 창안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충남 아산에서 활동하던 드비즈라는 프랑스 신부였다. 이를 천주교 신도였던 이명래(1890~1952)가 전수받았다. 1906년 이명래는 아산에서 개업했다가 1920년 서울로 올라와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서 한약방을 열었다. 이명래는 6·25 전란 중에 뇌일혈로 사망했고 막내딸 이용재 여사(현민 유진오 선생의 부인)가 명래제약을 설립해 현대식 기계로 이명래 고약을 대량생산한 것은 1955년 무렵이었다. 신문에 광고도 냈다(사진·경향신문 1956년 5월 10일자). 그러나 종기 환자가 줄고 양약에 밀려 판매량은 차츰 줄었다. 2002년 명래제약은 부도가 났고 생산도 중단되고 말았다. 천우신약이라는 작은 제약사가 2006년 명래제약을 인수, 현재 이명래 고약 등 다양한 한방약품을 제조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천우신약은 홈페이지에서 천일제약을 모태로 1999년 설립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천일제약에서 이명래 고약을 제조했다고 덧붙였는데 틀린 말이다. 천일제약(천일약방)은 조고약을 제조하고 판매한 제약사다. 이명래 고약은 명래제약과 이명래의 사위가 차린 서울 충정로 한의원에서 제조했다. 1913년 문을 연 천일약방은 한의사로서 의생(醫生) 면허를 받고 외상 환자를 다루는 종의(腫醫)로 활동한 조근창이 설립했다. 조고약 본포(본점)는 서울 예지동에 있었는데 광장시장 바로 옆이다. 조근창의 아들 조인섭은 조고약과 영신환 등의 약품을 만주와 대만으로 수출하는 등 사업을 크게 키웠다. 천일제약은 종전 후에도 서울 종로 4가에 4층 건물을 지을 만큼 건재했다. 이 건물은 나중에 천일백화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명래 고약과 마찬가지로 조고약의 판매량도 점점 감소했다. 천일제약은 1966년 한상근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됐는데 아마도 조인섭 사후 후손들이 가업을 잇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인섭의 아들 조권중은 1957년 해외 원정경기에 최초로 한국 대표로 출전한 아마 골퍼 강자였다고 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2023-06-15 18:19:05[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때는 조선 1800년(정조 24년) 음력 6월 10일. 정조의 머리와 등에 종기가 생겼다. 정조는 7년 전에도 종기가 났었는데, 그때도 내의원 어의들이 고치지 못했던 것을 피재길이라는 지방 의원이 고약을 올려 고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잠잠하던 종기가 다시 재발한 것이다. 정조의 종기에는 열감도 심했다. 두통과 함께 등쪽에서 열감이 오르는 것을 정조는 스스로 가슴 속의 화기(火氣) 때문이라고 여겼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대체로 나에게 생긴 열은 전적으로 가슴 속 화기가 오래 머물러 있어서 생긴 지병인데, 요즘 더 심해진 것은 과거의 억울함을 풀어 버리지 못한 것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가미소요산(加減逍遙散)을 복용하기를 청했다. 가미소요산은 간화(肝火)로 인한 분노를 잠재우는 처방이다. 정조는 일찍이 있었던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은 일 때문에 화가 쌓인 것이다. 사실 발열은 종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평소에 화기가 치받쳐 오르는 증상이 있었기에 열감은 더욱더 심하게 나타났다. 음력 6월 21일, 발병 11일째. 정조의 증상은 날로 악화되었다. 정조는 정신까지 오락가락했다. 종기가 난 곳이 당기고 통증은 고통스러웠으며 오한발열이 있었고, 무엇보다 정신이 흐릿해져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6월 23일, 발병 13일째. 정조의 종기는 터진 곳에서 고름이 흘러나왔고 척추와 등에서부터 후두부 머리카락 난 부위까지 여러 개의 종기가 부어올랐다. 큰 것은 연적(硯滴)만 했다. 이것을 보면 종기가 상당히 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조의 열은 더욱 심해졌다. 종기에 있어 발열 증상은 세균감염에 의한 증상이 분명했다. 내의원에서는 기력이 쇠하기 때문에 경옥고(瓊玉膏)를 처방하고자 했지만, 정조는 경옥고에 들어간 인삼을 걱정했다. 일전에도 인삼이 들어간 처방을 복용하고 열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력 6월 24일, 발병 14일째. 정조는 밤에 열이 너무 심하게 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양력으로 치면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니 날이 습하고 더워서도 힘들었겠지만 열까지 나니 설상가상이었다. 정조는 일어나 앉아 신하들을 소접(召接)할 수도 없어 계속 누워만 있었다. 정조의 열은 수면 중에 특히 심했다. 정조는 열은 났다가 다시 낮아졌다가 하면서 다시 발열이 반복되는 이완열과 간헐열의 특징을 보였다. 종기에 의해서 흔하게 감염되는 흔한 균은 황색포도상구균인데, 이러한 열형은 세균에 의한 혈액감염인 패혈증을 의심할 수 있는 열형이다. 정조는 증세가 악화되자 연훈방(煙熏方)과 성전고(聖傳膏)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연훈방은 심환지가 추천한 자신의 친척인 심인에 의해서 고안된 처방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연훈방 처방은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사용하고 성전고는 파두(巴豆) 등의 독약을 사용하므로 섣불리 시도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렸다. 그러나 정조는 내의원들의 실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래서 연훈방조차도 어의들의 여러 약이 효과가 없자 마침내 써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훈방을 사용하고 나서 종기에서 흘러 내린 피고름이 몇 되가 되었다. 신하들은 피고름을 많이 쏟은 것은 종기의 근(根)이 녹은 것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른 증상들은 여전했다. 음력 6월 25일, 발병 15일째. 정조는 이상하게 배가 부풀어 오르는 창만감을 느끼면서 갑자기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피고름도 많이 쏟고 기력이 쇠해있는데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함을 의아하게 생각해서 내의원 신하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봐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정조의 급격한 식욕부진은 아마도 연훈방에 의한 수은중독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수은중독은 식욕부진, 두통, 전신권태, 떨림, 불안 등의 정신이상 등이 나타난다. 수은이 중추신경계, 특히 시상하부의 식욕중추의 활성을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도 연훈방을 의심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전날 연훈방을 시술하는 동안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연훈방을 시술한 다음 날 정조는 “지금 이렇게 방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으니 도리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하기도 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서 연훈방을 시술했기에 호흡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은이 흡입되었을 것이다. 열은 더더욱 심해졌다. “열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다. 지금은 열을 다스릴 약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약을 의논하는 의관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어의 이시수가 몇 명을 언급하자, “탕제(湯劑)를 의논하여 정할 때 약성(藥性)을 잘 아는 의관이 전혀 없으니, 나라의 체모로 볼 때 또한 어찌 말이 되겠는가?”라고 하면서 어찌 자신의 열을 잡을 수 있는 의관이 없음을 탄식했다. 정조는 여전히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갈증조차 느끼지 못해서 찻물 또한 마시지 않게 되는 증상을 괴이하게 생각했다. 열이 나면 탈수에 빠지면서 갈증을 느껴야 하는데, 발열증상이 있으면서도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갈증중추의 기능에도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한의학에서는 열사(熱邪)가 기분(氣分)을 침범했을 때는 갈증을 느끼지만 영분(營分)을 침범하면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영분을 침범했다는 의미는 사기가 몸속 깊이 들어와 심해졌다는 의미다. 음력 6월 26일, 발병 16일째. 심환지와 심인 등이 다시 진찰에 나섰다. 이들은 증상이 좋아졌다고 하면서 다시 연훈방을 사용하고자 했다. 이시수와 같은 어의들도 연훈방을 사용하면서 종기가 현저하게 효과를 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연훈방을 처방했다. 음력 6월 27일, 발병 17일째. 정조는 고통스럽게 하룻밤을 넘겼고 간간이 인사불성 상태가 되었다. 신하들이 보기에 자는 것 같기도 하고 깨어 있는 것 같기도 했으면 정신이 흐릿해 보였다. 진맥을 해 보면 맥은 너무 약했고 정신과 기운이 모두 미약해져 있었다. 정조는 간간이 신하들과 대화를 하는 사이에도 몽롱하게 잠이 들려고 했다. 이시수는 정조의 정신이 흐릿한 것이 혹시 연훈방 때문이 아닐까 우려했다.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져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심인 등은 연훈방은 우선 중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의들은 정조가 기력이 너무 쇠약해져서 결국 인삼을 적극적으로 처방하기로 했다. 그래서 인삼 5돈을 넣은 속미음(粟米飮)과 1냥을 넣은 속미음을 두차례나 올렸다. 인삼을 극히 꺼렸던 정조에게 과량의 인삼을 처방한 것은 의아하지만 그것을 허락한 정조의 판단력 또한 정신이 흐릿해진 결과일 것으로 추측된다. 음력 6월 28일, 발병 18일째. 신하들은 궁궐 밖에서 의원들이 진찰을 청하자 가까스로 진료 마치고, 다시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신하들은 자리에 누워 있는 정조의 앞에 엎드렸다. 신하들이 “신들이 대령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수정전(壽靜殿)......”이라고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뒤에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있는 곳이다. 정조는 왕대비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자 했을까. 신하들은 다시 “신들이 대령하였습니다.”라고 했지만, 정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의들이 풍병(風病)을 의심해서 성향정기산을 숟가락으로 해서 입에 집어 넣었지만 토해했다. 인삼차와 청심원을 갈아서 넣었으나 삼키지 못하고 입안에만 머물고 있었다. 강명길이 진맥을 마치고 “맥의 상태로 보아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모든 신하들이 곡(哭)을 했다. 이날 유시(酉時, 17~19시), 정조는 종기를 앓은 지 18일 만에 승하했다. 정조가 승하한 후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다. 바로 수은과 인삼이다. 특히 연훈방의 수은으로 독살했다는 주장을 보면 연훈방으로 치료하자고 했던 이들이 이시수의 중간에 연훈방 치료를 잠시 중지하자고 한 의견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수은 독살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령 단시간에 수은에 중독되거나 다량의 인삼을 복용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왕이 어의들의 치료를 받다가 죽었으니 책임을 져야 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나 독살설은 정치적인 주장일 뿐으로 정조는 의학적으로 병사한 것이 맞다. 정조는 종기에 의한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제목의 ○○○은 패혈증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승정원일기> 正祖 24年 庚申 6月 14日 乙丑/上, 自是月旬前, 有癤候, 連進傅貼之劑, 久未奏效, 召見內醫院提調徐龍輔于便殿. 龍輔問候, 上曰: “夜來寢睡, 全未穩着, 而日前傅藥處, 今旣膿潰矣.” 6月 23日. 召見藥院諸臣. 時秀曰: “午後則熱候之升降, 果若何?” 上曰: “今亦方有熱候矣.” 6月 24日. 命進沈鏔所製烟熏方聖傳膏. 其方用鏡面朱砂, 聖傳膏, 用巴豆等藥, 諸臣言不可輕試, 至是, 諸藥罔效, 上, 欲一試烟熏, 遂至進用. 6月 25日. 上曰: “今曉以後, 尙未進食, 而神氣則惺惺, 口味則終不開者何也?” 鏔曰: “神氣旣勝, 則口味自當漸開矣.” 上曰: “烟熏方, 今日亦當試用乎?” 鏔曰: “今日則姑爲停止, 更觀夜來動靜而試之似好矣.” 6月 27日. 時秀曰: “烟熏方, 雖是癤候當劑, 而聖候昏沈之時, 烟氣若或發散於房闥之內, 則恐或有妨神氣矣.” 柳光翼, 沈鏔等 奏曰: “烟熏方, 姑爲時時間斷, 徐觀動靜試用, 亦無妨矣.” 進人蔘五錢重粟米飮。召見藥院諸臣. 命煎入人蔘一兩重粟米飮. 6月 28日. 時秀又令命吉診候, 命吉診候訖, 退伏曰: “脈度已無可望矣.” 諸臣竝遑遑罔措, 環坐號泣. 是日酉時, 上, 昇遐于昌慶宮之迎春軒, 是日日光相盪, 三角山鳴. (정조 24년 경신(1800) 음력 6월 14일.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용보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터졌다.”라고 하였다. 6울 23일. 내의원의 신하들을 불러서 보았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오후 들어 열이 오르내리는 증세가 어떠합니까?”하니 주상이 말하기를 “지금도 열이 나고 있다.”라고 하였다. 6월 24일. 심연이 조제한 연훈방과 성전고를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처방은 경면 주사를 사용하였고 성전고는 파두 등 약을 사용하였으므로 신하들이 섣불리 시험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이때에 와서는 모든 약이 효과가 없어 상이 연훈법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하므로 마침내 가져다가 써보기에 이른 것이다. 6월 25일. 주상이 말하기를 “오늘 새벽 이후로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정신은 말짱한데 입맛은 끝내 돌지 않으니 어째서 그런 것인가?”라고 하자 심인이 아뢰기를 “정신이 좋아지셨으니 입맛도 저절로 점점 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오늘도 연훈방(煙熏方)을 써 볼 것인가?”하니 심인이 아뢰기를 “오늘은 우선 정지하고, 밤에 병세가 어떠한지 다시 살펴보고 나서 써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6월 27일. 이시수는 아뢰기를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지기라도 하면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유광익과 심인 등은 아뢰기를 “연훈방은 우선 수시로 중단했다가 천천히 경과를 살펴 가며 써도 무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인삼 5돈쭝을 넣은 속미음을 들였다. 상은 내의원의 신하들을 불러서 보았다. 인삼 1냥쭝을 넣은 속미음을 끓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이날 유시에 상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6-02 17:25:40【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울산시 울주군의 제15회 남창옹기종기시장 한마음대축제가 오는 7일~8일 이틀간 온양읍 남창리 일원에서 열린다. 남창옹기종기시장 상인회 주관으로 개최되는 이번 축제는 시장 상인과 고객, 지역민의 화합의 장을 마련해 전통시장 이용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마련됐다. 축제는 7일 남창옹기종기시장 원형 광장에서 체험 행사와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8일 기념식과 공연, 노래자랑, 경품추첨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돼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노래자랑은 시장 상인을 비롯해 울산시에 주소를 둔 고객이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다. 참가 희망자는 4일 오후 12시까지 남창옹기종기시장 상인회를 방문하거나 전화로 신청하면 된다. 한편, 남창옹기종기시장은 1916년 울주군 온양읍에 남창시장으로 설립돼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대표음식인 국밥을 비롯한 여러 먹거리와 3일과 8일 열리는 5일장, 토요직거래장터, 한마음축제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2023-05-02 11:14:22[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옛날에 대궐 집의 노령의 정원사가 발배(發背)를 앓았다. 발배란 등에 난 종기로 보통 등창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작은 종기같은 것들이 여러 개가 생기더니 붉어지면서 부어오르고 고름이 잡히면서 통증이 심했다. 크기는 좁쌀만한 것도 있고 점차 커져 손바닥만 한 것들도 있었다. 보통 종기는 열독(熱毒)에 의해서 생기는데, 체질이나 음식과도 관련이 많다. 이 정원사는 열이 많은 체질인데도 뜨겁고 매운 탕을 즐겼고, 대감이 즐겨 먹던 기름진 고기도 먹을 기회가 많았기에 몸의 기혈순환에 문제가 생겨 열독이 쌓인 것이다. 정원사는 자신의 종기가 낫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인근의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아 봤지만 모두들 “급히 청열해독(淸熱解毒)해야 합니다~!”라면서 다양한 처방을 해 주는데, 배가 아프고 설사만 할 뿐 종기는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심지어 배농(排膿)을 시킨다고 여물지도 않는 종기를 짜내는 통에 너무 아파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정원사는 등창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쫓겨나지 않으려고 자신이 아픈 것을 숨긴 채 일을 했다. 그래서 대궐의 나무들을 손질하다가 힘이 들어 간혹 틈나는 대로 엎드려 쉬기를 일삼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한곳에서 한숨 자고 나면 증상이 좀 가벼워짐을 느꼈다. 보통 등이 아파서 눕지를 못하는데, 그 장소에서만은 등을 바닥에 대고 눕는 것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정원사는 자신이 누웠던 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노란색과 흰색의 꽃들이 깔려 있었다. 바로 인동초(忍冬草)의 꽃인 금은화(金銀花)였다. 정원사는 자신이 항상 가꾸는 식물들이라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부터 대궐의 후원 한쪽 구석에는 인동초(忍冬草)가 많았다. 인동초는 인동, 혹은 인동덩굴이라고도 한다. 인동초는 겨울을 이겨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인동초의 꽃을 금은화(金銀花)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흰색(은색)으로 폈다가 시들 무렵에 노란색(금색)으로 변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간혹 어느 순간에는 흰색과 노란색 꽃이 함께 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원사는 ‘이 금은화들이 내 등에 난 종기를 삭히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금은화를 끓여서 차로 마셔 보았다. 그랬더니 통증도 줄고 붓기도 좀 가라앉고 농이 차 오른 것은 배농(排膿)도 빨리 되는 듯했다. 정원사는 평소 술을 좋아했는데, 일이 끝난 밤에 술을 한잔 하려다 금은화 한두 주먹을 뜨거운 술 사발에 넣어 충분하게 우린 다음 그것을 짜서 그 즙을 마셔 보았다. 그리고 그 찌꺼기는 모아서 등에 난 종기를 덮어서 찜질을 했다. 그랬더니 4~5번 만에 그렇게 심했던 종기가 모두 아물었다. 정원사는 놀랐다. 정원사는 후원에 떨어져 있는 금은화를 모두 주워서 말렸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발배, 등창, 옹저, 종기, 궤양 등 비슷한 병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시험해 봤다. 신기하게 모두 효과를 봤다. 환자들은 “당신은 정원사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신통한 치료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하면서 감사함을 전하면서도 의아해했다. 확신에 찬 정원사는 정원사 일을 그만 두고 모처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돈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혜민서에서라도 일하려면 의과시험을 통과해서 의관이 되어야 했고, 시골의 약방이라도 하려면 몇 년 동안 감초와 같은 약초만 썰면서 스승에게 사사(師事)라도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정원사는 무허가 약방을 열어 돌팔이 의원행세를 한 것이다. 어쨌든지 정원사가 종기를 잘 치료한다는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그런데 환자가 몰려오다 보니 준비해 두었던 금은화가 모두 바닥이 난 것이다. 정원사의 머리에 갑자기 번뜻하고 한 생각이 떠올랐다. ‘금은화가 도움이 되었다면 분명 꽃을 피우는 그 줄기도 비슷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사실 정원사는 누구보다도 식물이 생태를 잘 아는 사람으로 뿌리가 튼튼하면 줄기와 잎이 튼실하고 꽃도 화사하게 피는 것을 알기에 모든 식물은 뿌리부터 줄기, 잎, 꽃, 씨앗까지 그 기운이 상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원사는 몰려드는 환자들에게 산에서 발견한 인동줄기를 잘라다가 금은화처럼 다려서 먹게 하고, 술은 담가 먹게 했다. 예상대로 비슷한 효과가 나타났다. 정원사를 찾아왔던 어떤 남성은 뒷목 부위에 큰 옹저(癰疽·종기)를 앓아 있었는데, 군데군데 터져서 고름이 나고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있었다. 이 환자는 “이미 다른 의원들에게서 종기에 좋다는 약을 써 봤지만 효과가 없어서 어르신의 명성을 듣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정원사는 이 환자에게 금은화 대신 인동줄기를 술에 담가 우려서 복용하게 했다. 환자는 시키는 대로 인동주(忍冬酒)를 복용하고서 바로 취해 깊이 잠들었는데, 일어나자 6~7할은 병세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일정기간 동안 반복해서 복용했더니 뒷목의 옹저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정원사는 이렇게 해서 큰 돈을 벌어 큰 집도 장만할 정도였다. 정원사가 의원노릇을 한다는 소문은 인근의 의원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 의원은 정원사가 돌팔이 의원노릇을 한다는 것보다는 옹저나 등창, 종기를 어찌 그렇게 잘 치료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자신에게도 옹저 환자들이 찾아오지만 신통한 치료법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의원은 자존심이고 뭐고 그 노령의 정원사를 찾아 큰절을 올렸다.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감히 그 비방(祕方)이 어떻게 되는지 여쭙습니다.”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노령의 정원사는 의외의 반기는 말을 건넸다. “잘 오셨네. 의원양반. 나도 의원양반을 한번 찾아뵐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이렇게 오신 것을 보니 뭔가 뜻이 서로 통한 것 같네 그려.”라는 것이다. 의원은 비방을 안 알려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차에 정원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원사는 이어서 “내가 이렇게 한 약초를 이용해서 발배나 옹저, 종기를 치료하고 있는데, 사실 그 약초가 왜 효과를 나타내는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하고 있었네.” 의원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 약초가 대체 무엇입니까?” 정원사는 “바로 인동초라네.”라고 답을 했다. 의원의 입이 갑자기 ‘헉~’하고 벌어졌다. 의서에서 인동초가 종기 등의 특효라는 것을 익히 의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인동초만으로 치료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은 종기 등에 좋다는 처방에 단지 금은화(金銀花)나 인동등(忍冬藤·인동줄기)을 소량 넣어서 처방해 왔을 뿐이었다. 의원이 놀라고 있는 사이에 정원사는 “의서에 인동초가 어떤 효능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의원은 “의서에는 모든 종기의 독(毒)에는 이미 터졌거나 아직 터지지 않았거나 상관 말고 처음 종기가 날 때 발열 증상이 있다면 인동초의 꽃인 금은화(金銀花)나 줄기인 인동등(忍冬藤)을 잎 째 따다가 달여서 먹고 남은 찌꺼기는 종기 위에 붙인다고 했습니다. 인동초는 종독(腫毒)을 없애고 속을 보호하며 기를 발산하고 혈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 효과가 독보적이고, 금은화는 창양(瘡瘍)을 치료하는데,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경우는 바로 흩어지고 이미 고름이 잡힌 것은 바로 터진다고 했으니 금은화는 종기로부터 회생(回生)의 효능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정원사는 “아 그래서 금은화가 종기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군. 그렇다면 인동줄기는 어떤가? 내가 금은화가 없어서 인동줄기도 사용해 보니 효과가 좋았다네.”라고 하면서 물었다. 의원은 “훌륭하신 경험입니다. 특히 인동줄기로 담근 인동주(忍冬酒)는 옹저나 발배를 치료하는데, 처음 생겨났을 때에 바로 복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의서에서도 시골 오지의 가난한 집안에서 약방의 의원에게 치료하기 어려운 경우 인동주를 복용하면 효과도 좋고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말도 있었는데, 어르신이 산 증인이십니다.”라고 흥분했다. 의원은 이어서 말하기를 “또한 의서에 보면 인동원(忍冬圓)이라고 있는데, 소갈병(消渴病)이 걸려서 옹저(癰疽)가 생기면 잘 낫지를 않은데, 소갈병 때 옹저의 발병을 예방하는 약으로 나와 있습니다. 인동초의 뿌리, 줄기, 꽃, 잎을 다 쓸 수 있는데, 양이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고 적당량 병 안에 넣고 술을 붓는데, 이때 술은 모든 약재에 술이 스며들고 살짝 잠길 정도의 양만 넣습니다. 이것을 다시 쌀겨를 태운 잿불에 하룻밤 묻어 구워냅니다. 그 다음에 약재들을 건져서 이것을 볕에 말린 뒤에 감초 약간을 넣어 맷돌에 갈아 고운 가루를 냅니다. 그리고 약초를 담갔던 술을 농축해서 쑨 밀가루 풀로 반죽하여 오동씨만하게 환을 만듭니다. 이것을 매번 50~100환씩을 뜨거운 물이나 술에 임의대로 먹으면 소갈로 인한 옹저를 예방할 뿐만 아니라 갈증을 멎게도 한다고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소갈로 인한 옹저라는 것은 요즘의 당뇨발에 해당한다. 당뇨병이 있으면 상처가 잘 아물지도 않아서 쉽게 옹저로 변한다. 사실 항생제가 없었던 과거에는 종기와 같은 질환에 인동초(忍冬草)는 어느 정도 항균작용을 하면서 염증을 해소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고마운 약초였다. 설명을 들은 정원사는 의원에게 “내 보니 소가 뒷걸음 치다 쥐를 많이 잡은 셈이네. 자네처럼 의학에 대한 지식이 많은 의원이 내 경험을 갖는다면 발배나 등창, 종기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네. 나는 벌써 인동초로 새잡도 사고 부를 얻었네. 나는 이제 내 경험을 자네에게 모두 전해주고 돌팔이 의원노릇을 그만둘테니 부디 많은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풀게나. 껄~껄~”하는 것이다. 의원은 감사함을 전하며 반드시 인동초로 인술을 베풀겠다고 했다. 지금도 인동초(忍冬草)의 꽃인 금은화(金銀花)와 줄기인 인동등(忍冬藤)은 한의사들에게 의해서 종기뿐만 아니라 위염, 대장염, 피부염, 관절염 등 다양한 염증성 질환에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 제목의 ○○○은 인동초(忍冬草)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경악전서> ○忍冬酒, 治癰疽, 發背, 初發時, 便當服此, 不問疽發何處, 或婦人乳癰, 皆有奇效. 如或處鄕落貧家, 服此, 亦便且效. ○一園丁, 患發背甚危, 令取金銀藤五六兩搗爛, 入熱酒一鍾, 絞取酒汁溫服, 柤罨患處, 四五服而平. 彼用此藥治瘡, 足以養身成家, 遂棄園業. 諸書云 “金銀花, 治瘡瘍, 未成者卽散, 已成者卽潰, 有回生之功.” ○一男子, 患腦癰, 其頭數多, 痛不可忍. 先服消毒藥, 不應, 更以忍冬酒服之, 卽酣睡覺而勢去六七, 再四劑而消.(○인동주는 옹저, 발배를 치료하는데, 처음 발할 때에 바로 복용해야 하니, 어느 곳에 생긴 저이던 쓸 수 있고, 여성의 유옹에도 효과가 좋다. 시골 오지의 가난한 집안에서 이를 복용하면 편리하면서도 효과가 좋다. ○어떤 정원사가 발배를 앓아 몹시 위험했는데, 금은화 줄기 5~6량을 짓찧어 뜨거운 술 1그릇을 넣고 짜낸 술즙을 온복하고 찌꺼기를 환부에 덮었는데, 4~5번 복용한 후에 나았다. 그는 이 약으로 창을 치료하여 충분한 돈과 명예를 얻어 정원 일을 그만두었다. 많은 책에서는 “금은화는 창양을 치료하는데, 미성한 경우는 바로 흩어뜨리고 이미 성한 경우는 바로 터지니, 회생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 ○어떤 남성이 뇌옹을 앓아 창두가 많고 참을 수 없이 아팠다. 우선 해독약을 썼지만 효과가 없자, 다시 인동주를 복용하고 바로 취해 깊이 잠들었는데, 일어나자 6~7할의 병세가 없어졌고 재차 4제를 복용하여 완전히 나았다.) < 광제비급> 忍冬治驗. 忍冬圓, 治消渴愈後, 預防發癰疽, 先宜服此. 用忍冬草, 根, 莖, 花, 葉, 皆可, 不拘多少, 入甁內, 以無灰好酒浸, 以糠火煨一宿, 取出曬乾, 入甘草少許, 碾爲細末. 以浸藥酒, 打麵糊丸, 梧子大. 每服五十丸, 至百丸, 湯酒任下. 此藥, 不特治癰疽, 大能止渴.(인동초 겨우살이풀로 치료한 경험. 인동원은 소갈병을 치료하여 나은 후에는 옹저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니 우선 이 약을 먹어야 한다. 인동초의 뿌리, 줄기, 꽃, 잎을 다 쓸 수 있다. 양이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고 적당량 병 안에 넣고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술을 써서 담갔다가 썰어 술에 담갔다가 쌀겨를 태운 잿불에 하룻밤 묻어 굽고 볕에 말린 뒤에 감초 약간을 넣어 맷돌에 갈아 고운 가루를 만든다. 인동초를 담갔던 술을 넣어 쑨 밀가루 풀로 반죽하여 오동씨만하게 환을 만든다. 매번 50~100환씩을 뜨거운 물이나 술에 임의대로 먹는다. 이것은 옹저를 예방할 뿐만 아니라 갈증을 멎게도 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1-26 17:39:53【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한국수력원자력㈜ 새울원자력본부 노사는 13일 울산시 울주군 남창 옹기종기 전통시장에서 노사합동 전통시장 장보기 행사와 청렴문화 확산 캠페인을 진행했다. 새울원자력 노사는 이날 남창 옹기종기 전통시장에서 쌀, 미역, 사과 등 350만 원 상당의 생필품을 구입해 서생지역아동센터 등 울주군 관내 지역아동센터 8곳에 전달했다. 또 새울원자력 직원들은 국민권익위 공익신고 제도를 홍보하는 안내 팸플릿과 청렴 기념품을 나눠주며 청렴문화 확산 캠페인도 펼쳤다. 이상민 새울원자력본부장과 문지훈 노조위원장은 “코로나로 침체된 지역 상권과 어려운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전통시장 장보기 행사는 새울원자력본부가 지역경제 활성화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정기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사회공헌활동 프로그램이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2022-10-13 16:15:46[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것을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과거 한 사내의 오른 바깥쪽 허벅지에 종기가 났다. 처음에는 작은 붉은 콩만한 결절이 단단하게 잡히더니 점차 커졌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름이 잡히고 터져서 저절로 아물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종기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종기는 사라지지 않고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마을 의원에게 탕약도 써 보고 침도 맞아보고, 도침(刀針)으로 째 보기도 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마치현(馬齒莧)으로 만든 고약도 붙여 봤지만 여전했다. 마치현은 쇠비름으로 훗날 유명해진 이명래 고약의 원재료로 사용되기도 한 약초다. 사내는 종기의 통증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종기를 치료할 방법들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끝에 거머리를 물려서 치료하는 의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내는 전에 논일을 하다가 거머리를 물려본 적이 있지만 징그러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거머리라도 물려보기로 했다. 사내는 거머리요법을 한다는 약방을 찾았다. 의원이 진찰을 해 보더니 “이렇게 큰 종기는 옹절(癰癤)이라고 하는데, 거머리요법이 특별한 효과를 나타낼 걸세. 살아있는 거머리를 물리는 것으로 마치 침처럼 놓는다고 해서 의서에는 기침법(蜞鍼法)이라고 기록되어 있네. 두세 번 정도 시술을 하면 될 걸세.”라고 설명하면서 안심을 시켰다. 그럼에도 사내의 심장은 벌렁거렸다. 침도 무서운데 거머리를 침처럼 놓는다니. 망설임과 두려움이 여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약방 안을 둘러보니 거머리들이 들어있는 단지들이 여러 개 있었다. 논이나 강에서 보이는 거머리들보다 작은 것을 보니 이미 잡아 놓은 지 오래되어 굶주린 듯했다. 거머리 단지의 물은 자주 갈아 주는지 깨끗하고 맑았다. 그리고 단지 옆에는 붓관이 크기별로 여러 개 있었다. 붓관은 붓의 자루로 사용하는 대롱이다. 벌써 저쪽 방안 구석에서는 몇몇이 누워서 거머리를 물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왔다. 의원은 먼저 사내를 옆으로 눕히고 종기가 난 부위를 깨끗한 물로 몇 차례 씻어 냈다. 거머리는 매우 예민해서 냄새나 맛에 민감하기 때문에 땀이나 이물질을 잘 닦아내야 했다. 의원은 가장 큰 종기 위에 물에 적신 한지 종이를 덮어두었다. 그러자 가장 높이 솟은 부위 한 곳 먼저 마르기 시작했다. 종기는 후끈거리는 열감이 있는데, 종기에 젖은 종이를 덮어 가장 열독(熱毒)이 심한 부위를 찾는 나름의 비책이었다. 의원은 거머리를 물릴 부위를 확인한 후에 종이를 제거하고 해당 부위를 정확하게 짚어 큰 붓관을 직각으로 세웠다. 그리고 붓관 안으로 거머리 한 마리를 집어넣고 이어서 붓관 안으로 거머리 단지 안의 물을 채워 넣었다. 사내는 “으~~~~” 소리를 내면서 징그러움에 몸서리쳤다. 붓관 때문에 거머리가 보이지 않았기에 그 두려움은 더욱 컸다. 아마도 거머리는 붓관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결국 붓관이 세워진 종기부위를 물게 될 것이다. “종기 부위가 따끔거리면 말을 하게나.” 의원은 사내에게 거머리가 무는 순간 따끔거릴 것이니 그 순간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붓관에 거머리를 넣은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사내는 “아~ 따끔하면서 뭔가 깨무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얏!~ 아픕니다요.”라고 부잡스럽게 떠들었다. 그러나 의원은 “자네는 논에서 거머리를 물려 본 적이 있지 않나. 그때 일을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머리가 물려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텐데,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아프다고 하니 논일을 할 때는 왜 거머리가 물었을 때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지금 자네는 거머리가 문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긴장이 된 것뿐이네. 사실 거머리는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몰래 빨아먹어야 해서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깨물어 마취를 시킨다네. 그래서 거머리가 무는 순간은 약간 따끔거리지만 바로 감각이 무뎌질 테니 호들갑은 그만 떨게나.” 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말 거머리가 문 곳의 감각이 없어지고 따끔거리는 통증도 사라졌다. 의원은 붓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살짝 보이는 종기 부위에는 거머리가 물려 있었고, 거머리의 반대쪽 끝은 붓관 아래의 안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의원이 붓관을 서서히 들어 올리자 거머리는 마치 실처럼 늘어졌고 그러다 결국 붓관에 붙인 빨판을 스스로 떼어냈다. 종기를 문 부위는 여전히 단단하게 깨물고 있는 듯했다. 거머리가 한번 물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거머리가 배불리 먹으면 저절로 떨어질걸세. 그때까지 약 한 식경(食頃) 정도 걸릴 테니 편안하게 누워있게나. 나는 다른 환자를 진료하고 있을 테니, 만약 거머리가 떨어지면 이 종을 흔들어서 나를 부르게나.” 의원은 이렇게 설명을 하고선 자리를 일어났다. 거머리는 작은 몸통을 꿈틀꿈틀 열심히 피고름을 빨아먹었다. 그런데 마치 거머리가 땀을 흘리듯 거머리 피부가 반짝거렸다. 사실 이것은 거머리가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피를 빨아먹기 위해서 자신의 체액을 피부로 몰아내서 배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말 30분 정도 지나자 거머리는 스스로 떨어져 나왔다. 거머리가 떨어진 부위는 마치 삼릉침으로 찌른듯한 상처가 있었고 그곳에서 피가 뭉클하고 방울처럼 솟아오르더니 주르륵하고 흘러내렸다. 마치 산속의 아주 작은 옹달샘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피고름이 그렇게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사내는 ‘아~ 시원해. 이렇게 낫는구나’라고 다행스러워했다. 의원은 “자네의 옹절이 너무 커서 이렇게 해서 두 번을 더 물리도록 하겠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거머리들이 더 쉽게 피를 빨아먹을 수 있을 테니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걸세.”라고 하면서 다시 동일한 방법으로 거머리를 물렸다. 세 번째 거머리까지 배불리 먹고 마저 떨어지자 의원은 “출혈을 좀 시키는 것이 옹절의 열독을 배출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 이렇게 좀 피를 빼낸 후에 내가 붕대로 감싸주면 그렇게 집으로 귀가하면 되네. 3일 후에 다시 오게나. 그때까지 너무 힘든 일을 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고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삼가게나.”라고 일러 준 후 여러 겹의 베를 겹쳐서 출혈 부위에 대고 다시 붕대로 감아서 지혈을 시켰다. 3일 때 되는 날 사내가 다시 약방에 왔다. 의원은 붕대를 벗겨 보더니 다행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붉고 탱탱했던 종기가 쭈글거리면서 살빛이 창백한 듯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내도 깜짝 놀랐다. “와! 정말 좋아졌습니다. 붕대를 감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종기가 사그라들었네요. 거머리를 물리고 나서 통증이 줄어서 효과가 있구나 정도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육안으로 확인을 하니 효과가 더욱 놀랍습니다.”하면서 좋아했다. 의원은 아직 약간의 통증이 있고 종기의 뿌리가 다 빠진 것 같지 않으니 한번 더 거머리요법을 하자고 했다. 사내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어떤 치료법으로도 효과가 없던 종기가 이렇게 거머리요법 한 번만으로 좋아졌으니 말이다. 사내는 지난 번 왔을 때 거머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징그러워했는데, 이제는 의원이 거머리를 물리는 과정을 목이 빠져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제는 거머리가 고마운 존재로 느껴졌다. 사내는 연신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한낱 미물로만 알았던 거머리가 이렇게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다니요. 지난번에는 좀 일찍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좀 오랫동안 제 피를 빨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감탄했다. 그러면서 “제가 거머리요법을 어떻게 하는지 봤으니 앞으로 제가 직접 논에서 거머리를 잡아서 붙여 봐야겠습니다요.”라고 들떠 있었다. 그러자 의원은 깜짝 놀라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게나. 논에서 거머리를 함부로 잡아서 물리면 자칫 진흙 속의 충(蟲)과 사기(邪氣)가 기육과 혈맥을 파고 들어가 물린 자리가 더 곪거나 열이 나면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네. 이 약방에 있는 거머리들은 6개월 이상 깨끗한 물을 날마다 갈아 주면서 깨끗하게 관리해서 시술하고 있네. 약방이 아니고서는 절대 함부로 물려서는 안 될 터인데, 병세가 악화되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사내는 겸연쩍어하더니 조심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사내의 허벅지에 난 큰 종기는 거머리요법으로 완치가 되었다. 이후에도 종기가 나면 악화되기 전에 거머리요법의 도움을 받았기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의원에게는 ‘거머리의원’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거머리요법으로 종기뿐만 아니라 관절염에 의한 부종이나 통증, 탈저(脫疽, 요즘의 버거씨병)에 의한 조직의 괴사, 봉와직염과 같은 잘 낫지 않는 피부의 상처나 궤양, 편두통, 머리에 난 원형탈모 등에 다양한 질환에 시술을 해왔다. 거머리요법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어떤 명방(名方)이나 침법보다 탁월한 효과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치료는 의원이 아닌 거머리의 역할이었다. 거머리는 그 어떤 치료법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치료도구이자 자연의 의사였다. 거머리요법은 묘한 효과가 있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동의보감> ○ 蜞鍼法. 癰癤初發漸大, 以濕紙 一片, 搭瘡上, 其 一點先乾處, 卽是正頂. 先以水洗, 去人皮醎, 取大筆管 一箇, 安於正頂上, 却用大水蛭 一條, 安其中, 頻以冷水灌之, 蛭當吮其正穴膿血, 皮皺肉白, 是毒散無不差. 如毒大蛭小, 須用 三四條方見效. 若吮着正穴, 蛭必死, 用水救活. 累試奇效. 如血不止, 以藕節上泥塗之.(거머리침범. 옹절이 처음 생겨 점점 커질 때 물에 적신 종이 한 장을 그 위에 올려놓는다. 먼저 마르는 곳이 바로 옹절의 꼭지이다. 먼저 물로 피부의 땀과 염분을 씻어 내고 붓의 자루로 쓰는 큰 대롱 하나를 꼭지에 세운다. 큰 거머리 한 마리를 그 속에 집어넣고 자주 찬물을 부으면 거머리가 그 구멍에 대고 피고름을 빨아낸다.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살빛이 희어지면 독이 빠져나간 것이니 낫지 않는 것이 없다. 피고름의 독이 심한 데 거머리가 작을 때에는 3~4마리를 쓰면 효과를 본다. 만약 제대로 된 구멍을 빨아대면 거머리는 반드시 죽게 되는데, 물에 넣으면 살릴 수 있다. 몇 번 시험해 보았는데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만약 피가 멎지 않으면 연뿌리에 있는 진흙을 바른다.) ○ 小兒丹毒, 及赤白遊疹, 用蜞鍼法. 取水蛭, 吮出惡血, 最妙.(소아의 단독 및 붉거나 흰색의 피부발진에는 거머리침법을 쓴다. 거머리를 취해서 나쁜 피를 빨게 하면 가장 묘한 효과가 있다.) < 본초강목> 赤白丹腫. 以水蛭十餘枚, 令咂病處, 取皮皺肉白爲效. 冬月無蛭, 地中掘取, 暖水養之令動. 先淨人皮膚, 以竹筒盛蛭合之, 須臾咬咂, 血滿自脫, 更用飢者.(적백단독으로 붓는 증상에 거머리 십여 마리를 환부에 대고 빨아들이게 하는데, 살갗이 쭈글쭈글해지고 살이 희게 되면 효과가 난 것이다. 겨울철에는 거머리가 없으니 땅을 파서 잡고 따뜻한 물에 길러서 움직이도록 한다. 우선 사람의 피부를 깨끗이 한 다음 거머리를 담아 둔 대나무통을 환부에 대면 잠시 뒤에 빨아들이다가 피가 가득 차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다시 쓸 때는 굶주린 것으로 쓴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2-09-19 11:34:45[파이낸셜뉴스] 종기는 누구나 한번쯤 겪을 수 있지만 가볍게 보고 방치하면 합병증으로 고생하거나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종기로 고생하거나 생명을 잃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목숨을 잃었고 총 27명의 왕 가운데 12명이 종기 치료를 받았다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방송인 홍석천씨도 올해 초 한 프로그램에서 엉덩이 종기로 고생했던 일화를 공개한 바 있다. 그는 초기에 종기를 방치하다가 갑자기 열이 39도까지 올라가고 오한이 들어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응급실에서 치료를 하고 회복했지만 의료진은 그에게 조금만 더 늦었다면 엉덩이 쪽 종기가 계속 곪아 들어가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종기는 우리 몸의 털이 자라나는 모낭 속에 염증이 진행되거나 감염돼 피부가 볼록 솟아오르는 등의 결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낭이 있는 부위에서는 어디든지 종기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얼굴, 목, 겨드랑이, 엉덩이 등에서 많이 발생한다. 땀이 많이 나는 경우, 습진이나 면도 등으로 피부 방어막이 손상된 경우, 잦은 피부 마찰 및 눌려진 경우 등 피부가 불결할 때 많이 발생된다. 종기는 처음에는 만지면 아프고 단단한 붉은 결절로 시작해 점자 커지면서 통증이 심해지고 노란 고름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 손가락으로 살짝 눌리면 물렁물렁하게 변하다가 완전히 곪으면 고름이 터져 배출된다. 배출된 종기는 색소 침착 및 흉터를 남기고 시간이 경과하면 대부분 자연 치유된다. 단순 종기의 경우 치료 없이 종기 부위를 온찜질을 해주면 화농이 돼 고름이 쉽게 배출될 수 있다. 하지만 △발열, 오한 등 전신 증상이 있는 경우 △종기 주위 연조직염 및 기타 피부 질환이 의심되는 경우 △코 주변, 콧속, 귓속에 발생한 경우 △병변이 큰 경우 △잦은 재발 등은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초기의 경우 항생제 등 약물치료로 호전될 수 있다. 심할 경우는 수술로 제거해야 한다. 병변 주변을 마취하고 고름을 짜내거나 직접 종기를 수술로 절제할 수도 있다. 수술까지 이르면 피부에 흉터가 크게 생길 수 있고 치료기간도 길어지기 때문에 종기가 생기면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 대동병원 외과 조호영 과장은 "일반적으로 종기를 여드름 정도로 가볍게 여겨 치료하지 않거나 오염된 손이나 기구를 이용해 제거하는 경우가 있다"며 "잘못된 방법이나 시기 등으로 인해 2차 감염 등이 발생하면 증상이 더 악화되고 최악의 경우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 등의 합병증을 겪거나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의료기관을 통한 적절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소 종기 예방을 위해서는 몸을 청결히 하도록 하며 통기성이 좋은 의류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종기가 자주 발생하는 경우 덥고 습한 환경은 피하도록 하며 속옷을 자주 갈아입는 것이 종기 예방에 도움이 된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기자
2022-06-17 16:0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