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저는 하나의 색을 예측하고 물감을 쌓진 않아요. 물감을 얇게 칠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물감들은 서로 반응하고 하나의 색으로 귀결되게 해요. 이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물입니다." 진한 푸른색과 하늘색, 보랏빛이 도는 푸른색, 녹색 기운의 푸른색,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색 등 갖가지 푸른색의 대형 캔버스 작품들이 서울 삼청동 전시실을 '푸른 세상'으로 탈바꿈했다. 장승택 작가의 말대로 여러 겹의 같은 색이 덧칠해 있었으나 결국 하나의 푸른색으로 귀결됐다. 삶이 다층적이지만 결국엔 겹겹의 장막을 통과해야 하나의 윤곽이 나오듯이 그의 작품들도 그런 모양새였다. '겹 회화'의 대가 장승택 작가의 개인전 '겹 회화: 거의 푸르른(Layered Painting: Almost Blue)' 전(展)이 학고재에서 오는 17일까지 개최돼 푸른색을 중심으로 한 회화 작품 20여점을 선보인다. 그는 색채의 물질성과 깊이를 탐구하고, 색면 회화의 개념을 확장하는 작업을 지속해 온 작가다. 특히 그의 '겹 회화' 시리즈는 색의 중첩과 투명성을 활용해 새로운 회화적 가능성을 실험한다. 또한, 색을 감각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 장 작가는 원색의 한계를 넘어 다채로운 색감을 구현하는 개념적 색면 회화를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리고 어둠이 내리면 색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주제를 통해 푸른색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이야기한다. 그의 작업은 색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형 붓을 사용해 아크릴 물감과 특수 미디엄을 혼합한 안료를 얇게 칠하고, 이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화면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색은 단순히 덧입혀지는 것이 아닌, 서로 반응하며 예상치 못한 색채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특정한 색은 화면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미묘한 흔적을 남긴다. 중첩된 색의 층들이 유기적인 흐름을 형성한다. 이는 마치 인간의 삶 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기억, 감정이 켜켜이 쌓이고 흩어지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며 "색의 조합을 넘어서 존재와 기억, 그리고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색을 통해 존재와 인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목적을 둔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색을 감상하는 행위를 넘어, 색이 지닌 깊이를 온전히 체험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시간의 흔적을 느끼고, 내면의 감정과 마주하며, 색이 지닌 본질적인 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Layered Painting 150-29(2024)'나 'Layered Painting 80-20(2023)' 등 검정 계열의 어두운 작품들을 통해서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느끼게 해준다. 소멸에 대한 두려운 감정은 어두운색에 중첩된 밝은색 사이의 중간 색감에서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장 작가는 "제 작품들은 투명한 색과 중첩으로 마치 환영(幻影)처럼 느껴지는데, 삶과 희로애락,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라며 "이제 저도 60대 중반인데 삶의 끄트머리에 와 있다 생각하니, 소멸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그런 감정이 왜 푸른색으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작품들은 마치 죽음 직전 임종의 찰나에 떠오르는 파노라마와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고 자평했다. 한편, 장 작가는 1959년 경기도 고양 출생으로, 홍익대 서양화과와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회화과를 졸업한 뒤 미술계에 뛰어들었다. 그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서울대, 명지대 등 국내 주요 기관에서 소장 중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5-05-08 01:09:16[파이낸셜뉴스] 한국 야구 대표팀이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대만 등 강호들과 함께 C조에 편성돼 험난한 경쟁을 예고했다. 10일 발표된 WBC 조 편성에 따르면 한국은 일본, 호주, 체코, 대만과 함께 C조에 배정됐다. 특히, 지난 WBC 예선에서 까다로운 상대로 평가받는 대만이 같은 조에 편성되면서 한국의 8강 진출 전망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아시아 야구를 대표하는 한국, 일본, 대만과 호주가 한 조에 묶이면서 C조는 '죽음의 조'로 불리고 있다. 각 팀은 8강 진출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C조 조별리그는 2026년 3월 5일부터 6일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며, 상위 2개 팀이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류지현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최근 국제 대회에서의 부진을 씻고 명예 회복을 노리고 있다. 한국 야구는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지난해 WSBC 프리미어12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2023년 WBC에서도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4위에 그쳐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한국은 WBC에서 1회 대회 3위, 2회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하지만 2013년, 2017년, 2023년 대회에서는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일본은 1, 2회 대회와 직전 대회인 2023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3년에는 도미니카공화국, 2017년에는 미국이 정상에 올랐다. 한국과 같은 조에 속한 대만은 지난해 프리미어12 챔피언이다. 호주는 2023년 WBC 조별리그에서 한국을 8-7로 꺾고 조별리그를 통과한 바 있다. 당시 한국은 일본, 호주, 체코, 중국과 한 조에 속했으나, 호주에 패하며 2승 2패로 조 3위에 머물러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2025-04-10 12:22:04[파이낸셜뉴스] 경찰이 고(故)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에 대한 성폭력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하려 하자, 피해자 측과 여성단체가 수사 결과 공개를 촉구하고 나섰다. 피해자 측은 장 전 의원의 사망이 범죄 판단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과받지 못한 채 얼룩진 피해자의 삶, 위로 기회조차 사라져" 9일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민원실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A씨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단체들의 대독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A씨는 "가해자의 죽음으로 이 사건이 끝나서는 안 된다"며 "지금까지 이뤄진 수사를 바탕으로 성폭력 혐의에 대한 (수사) 결과가 발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가해자로부터)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삶이 얼룩졌고 위로의 기회조차 사라졌다"며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끝날 때까지 온전히 가해자의 손에 의해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참담하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사건이 이렇게 종결된다면 다른 피해자들도 목소리를 낼 수 없을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자가 2022년 2월 24일 처음 법률 상담을 요청한 이후 3차례에 걸친 진술조사와 참고인 조사, 증거 감정 등 수사 절차가 상당히 진행됐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A씨가 제출한 증거들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전문가 의견 조회 등을 마쳤으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전문가 의견도 확보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의 속옷과 특정 신체 부위에서 채취된 남성 DNA가 확인됐고, 장 전 의원의 DNA와의 일치 여부를 조사하기 직전에 그가 사망했다"며 "사망은 기소 여부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범죄 판단에는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경찰이 범죄사실을 공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 '공소권 없음' 종결하려 하자, 여성단체 수사결과 공개 촉구 여성단체들은 사건 수사 결과를 공식 보고서에 기록하고 공개하라는 요구와 함께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개인 11290명과 단체 336곳이 서명에 참여했으며 이날 경찰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장 전 의원은 2015년 부산 소재 한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당시 비서를 상대로 성폭력을 가했다는 혐의로 고소됐다. 그는 혐의를 부인해왔으며 지난달 31일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 측은 사건 당시의 영상과 사진 등의 증거를 공개한 직후였다. 서울경찰청은 7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피의자 사망에 따라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5-04-10 08:41:08[파이낸셜뉴스] 하태경 보험연수원 원장이 장제원 전 국민의힘 의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달라는 뜻을 전했다. 하 원장은 1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아침에 일어나 충격이었다. 본회의장 제 옆 짝지였던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고 적은 뒤 장 전 의원과 함께 찍힌 사진을 게재했다. 이어 “만우절 가짜뉴스이길 바랐는데 아니었다. 몇 시간을 내내 생각했다. 공개적으로 조의를 표하는 게 옳은지 말이다”라며 “그가 비난받고 있는 사건 뉴스도 보았기에 더 고민이 됐다”라고 말했다. 장 전 의원은 부산의 한 대학교 부총장이던 2015년 11월 비서 A씨를 상대로 성폭력을 한 혐의(준강간치상)를 받고 있다. 하 원장은 “그는 이미 죽음으로 업보를 감당했기에 누군가는 정치인 장제원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추모를 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며 ”내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장제원은 재능 있고 의리 있는 정치인이다. 몇번의 정치적 위기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결단력 있는 정치인“이라고 적었다. 또한 “고인과 저는 같은 부산 정치인으로 10여년을 동고동락했다. 또 같은 학번과 나이대였기에 본회의장에서 짝지처럼 서로 옆에 앉았다”라며 “지난 선거(22대 총선)에선 공교롭게도 저와 함께 부산 불출마를 선언해 연락도 자주 하는 사이”였다고 장 전 의원과 인연을 강조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하 원장은 "아쉽게도 큰 논란 속에 그는 갔지만 그와의 정치적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아 조의문을 올린다"라며 “동료 정치인 장제원, 제 짝지였던 장제원의 명복을 기원한다”라고 맺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2025-04-01 10:42:03[파이낸셜뉴스] 2000년 1월 1일 0시 정각에 태어나 '밀레니엄 베이비'로 불렸던 중국의 첸첸(千千)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급성 심장사(SCD)로 알려졌다. 25일(현지시각) 중국 매체 홍성신문 등은 첸첸의 어머니 웨모 씨의 말을 인용해 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첸첸은 지난 9일 새벽 5시쯤 급성 심장사로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급성심장사는 급성 심정지와 중증 부정맥 같은 심장 관련 문제에 따른 자연사를 말하는데, 중국에서는 매년 관련 사망자가 50만명을 넘는다. 대개 증상 발생 후 1시간 이내에 사망하며, 멀쩡한 사람도 예고 없이 숨질 수 있어 ‘죽음의 시한폭탄’이라 불리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첸첸은 톈진의 한 호텔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중 이달 초 감기 증세를 보였으나 병원을 찾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였다. 이후 장거리 버스를 타고 산시성 장즈시의 고향 집으로 이동했고 귀가 당시 체온은 40도를 넘었다. 다음 날 새벽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첸첸은 1999년 12월 31일 오후 3시쯤 어머니가 분만실에 입실한 뒤 수시간의 진통 끝에 2000년 1월 1일 0시 정각에 3.5㎏ 체중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는 '중국의 첫 21세기 신생아'로 보도되며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이름도 1000이라는 숫자를 의미하는 첸(千)을 이용해 지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날 분만실에 들어간 산모 9명이 모두 0시 0분에 밀레니엄 베이비를 낳길 바랐지만, 그건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 않느냐”며 “제 딸은 딱 2000년 0시 0분에 자연분만으로 태어났다. 마치 하늘이 우리 아이를 선택해준 것 같았다”고 했다. 첸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중국판 SNS인 웨이보에서 인기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많은 누리꾼들이 "기억에 남는 아이였는데 너무 안타깝다"며 그의 생을 추모했다. 전조 증상 나타난 후 1시간 이내 사망 급성 심장사는 증상 발현 후 1시간 이내에 심장 원인으로 사망하는 자연사를 일컫는다. 흉통(가슴 부위의 통증)이나 심계항진(가슴 두근거림) 등이 전조 증상으로 나타나며 이후 1시간 이내에 사망한다. 급성 심근경색증, 협심증 등과 같은 관상동맥질환, 확장성 심근병증 또는 비후성 심근병증과 같은 심근질환, 대동맥 박리증과 같은 대동맥질환, 대동맥 판막 협착증과 같은 판막질환 등 심장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질환들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관상동맥질환이 가장 흔하며, 관상동맥 질환자 사망의 약 50%가 돌연 심장사고, 급성 심근경색증 환자의 약 20%에서 돌연 심장사가 발생한다. 또한 심근병증도 돌연 심장사의 흔한 원인이다. 관상동맥질환과 심근병증이 전체 돌연 심장사 환자의 약 95%를 차지한다. 심폐소생술로 생존했어도 원인 심장질환에 따라 예후가 다양하며, 심장 마비가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 심정지 기간이 얼마나 길었느냐에 따라 뇌-신경 손상에 따른 후유증도 남을 수 있다. 운동 등 통해 심장 질환 관리 철저히 해야 예방법으로는 원인이 되는 심장질환의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걷기, 등산, 조깅, 수영, 줄넘기, 자전거타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을 일주일에 3회 이상 하는 것이 좋다. 운동 시작 전에 준비 운동을 5~10분 정도 하고, 실제 운동 시간은 30~60분 정도가 적당하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엎드리기 등 심장에 무리를 줄 수 있는 운동은 삼간하는 것이 좋다. 급성심장사는 심장마비와 다르다. 심장마비는 심장의 관상동맥이 막히면서 산소를 함유한 피가 심장근육에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 일어나며, 심한 가슴통증을 호소한다. 급성심정지는 심장박동을 유도하는 전기체계 이상으로 심장박동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불규칙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심실세동이 약해지며 뇌까지 피공급이 잘 안돼 바로 의식을 잃게 된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5-03-26 20:34:56귀국 좌절로 인한 충격이 중풍을 불러 이승만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막막해진 순간에 마우나라니(천국의 산이라는 뜻) 요양원 원장 존슨 여사의 편지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동아줄처럼 프란체스카에게 전해졌다. "우리 모두 존경하는 이 박사님을 저희 양로원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29일부터 1965년 7월 19일 임종할 때까지 마지막 3년4개월을 마우나라니 요양원 202호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창밖으로 고국을 그리며 보냈다. 요즘이라면 3년간 약 100만달러의 비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을 부끄럽지만 한국민이 아닌 하와이 현지인들이 제공했다. 이 박사의 기력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그럴수록 프란체스카의 간병이 도움이 되었다. 병원은 그녀의 숙식을 위해 고용인 숙소에 방 하나를 마련해 주고 간호보조원으로도 인정해줘 이 박사 곁에 항상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중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열녀가 없었지요. 쇼핑이나 외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이 박사 옆에서 항상 성경을 읽어드리거나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시들 것 같은데 워낙 신앙이 강해서 그런지 두 분 다 강한 분이셨어요. 국부와 국모의 자격을 갖춘 분이었지요." 이승만의 정신이 아직 온전했을 때 했던 마지막 기도문이 전해진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더 이상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대못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사랑'이었듯, 이승만을 마지막까지 견디게 한 것도 권력욕이 아니라 '민족을 위한 사랑'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씌워진 종의 멍에를 벗기고 자유케 하려던 그 위대한 사랑이었다. 1965년 6월 20일. 이 박사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노화된 장기에서 내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의식은 거의 없는 상태로 야윈 팔에는 검푸른 주삿바늘 자국만이 무수했다. 7월 4일. 한국에서 양아들 이인수씨가 급히 들어왔다. 병원에서는 다시 한번 내출혈이 심해지더라도 응급실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7월 18일. 심한 내출혈로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인수씨가 이 박사 옆에 누워 수혈을 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가자 주치의 토마스 문 박사가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다. 자정을 넘어 7월 19일 0시35분. 갑자기 호스를 입에 문 이 박사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90세였다. 윌버트 최씨가 관계했던 누와누 장의사가 장례식을 거행했다. 고인이 건립했던 한인기독교회에 고인이 안치됐다. 고인의 상반신이 보일 수 있게 관을 열어두었다. 7월 21일 오후 8시30분,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장할 무렵엔 조화가 교회 전체를 메웠고 수많은 현지인과 교민들이 애도를 표하러 모여들었다. 이 박사의 50년 지기인 하와이 사업가 보스윅이 뒤늦게 연락을 받고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달려왔다. 그는 교회 입구부터 사람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이 박사의 관 앞에 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어 고인의 얼굴을 덮은 베일을 걷어내더니 이 박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울부짖었다. "내가 자네를 안다네! 내가 자네를 알아!(I know you! I know you!)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자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잘 안다네! 잘 가게! 내 소중한 친구여…." 이인수씨가 기억하고 있는 한 편의 시 같은 보스윅의 애절한 절규는 고인이 된 이승만의 영혼을 진정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이날 밤 10시30분, 6명의 육해공군 의장대가 조포를 발사하는 가운데 히컴 공군기지에서 이륙 대기 중인 군 수송기 C-118에 유해가 실렸다. 태극기조차 구할 수 없었다. 오로지 이승만을 존경하던 교민과 미 장군들의 배려뿐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한국까지 함께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 16명을 태운 채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1965년 7월 21일 밤 11시 정각.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 섬으로 온 지 5년2개월 만이었다.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밤하늘의 별들 속으로 사라진 날로부터 60년이 지난 2025년은 그의 탄신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가 해양 문명권으로 진입시켜 건국한 대한민국은 오늘날 10대 선진국으로 성장했지만, 북녘 동포를 위한 자유통일을 염원하는 지도층과 국민은 거의 없다. 개인의 근본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짜뉴스와 가짜역사에 맞서 싸우려는 언론인과 정치인도 찾기 어려워졌다. 이승만의 가난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세웠지만 오늘날의 부유한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도 버거워한다. 단군 이래 물질은 최고의 풍요를 구가하지만, 정신은 탐욕과 빈곤을 헤매는 중이다. 우리가 다시 종의 멍에를 메려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나라를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잊은 것은 아닌지. 우리가 창조적 지성을 겸비한 지도자를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자유케 한 '이승만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이동욱 전 KBS 이사
2025-03-18 17:52:00자본주의 병폐와 계층 문제를 꾸준히 풍자해온 봉준호 감독이 이번에는 '흙수저' 청년과 함께 돌아왔다. 워너브라더스가 투자·배급한 '미키 17(사진)'은 봉 감독의 8번째 장편영화이자 '기생충'(2019) 이후 6년만의 신작이다. 봉 감독은 19~20일 한국 언론과 만나 신작 제목에 빗대 "'기생충'이 봉7이라면 '미키 17'은 봉8"이라며 "주인공 미키는 마치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을 것 같은 캐릭터로 주변에서 흔히 볼법한 착하고 측은한 친구다. SF장르지만 인간 드라마라서 우리끼리 발냄새 나는 SF영화라 불렀다"고 말했다. ■흙수저 청춘 현실 대변하는 미키 오는 28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2054년 우주 행성 개척에 투입된 한 복제인간 이야기다. 죽으면 다시 생체 프린팅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옥자' '미나리' 등을 제작한 플랜B의 러브콜을 받은 봉 감독은 "14쪽짜리 요약본을 읽고 완전히 매혹됐다"며 "사람이 죽었다가 프린터 같은 기계에서 다시 재생된다는 콘셉트가 특히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원작의 역사학자를 마카롱 가게를 창업했다 망한 청년으로 바꿨다. 그는 "미키는 빈곤이라는 상황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노동자 계층을 대변한다"며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청년이나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고 당한 청년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초반부 미키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그의 고통에 무심한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사회 현실과 겹쳐진다. 특히 계속 살아나는 미키는 늘 대기 중인 대체 인력과 다르지 않다. 앞서 '빅쇼트'의 애덤 매케이 감독은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자본주의 지옥도 무대를 완벽하게 그린 우화"라고 호평했다. ■미키의 연인·젊은 지도자 상징하는 나샤 '미키 17'은 미키가 기존의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고, 좀 더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전작 '기생충'과 달리 따뜻하고 희망적이다. 봉 감독 특유의 개성과 유머 감각이 살아있으며, 처음으로 남녀간 사랑을 다룬 게 특징이다. 봉 감독은 "원작에서 나샤가 미키를 지켜주는 대목을 읽고 '아, 이게 핵심이구나' 싶더라"며 "읽다가 눈물지은 대목"이라고 회상했다. 미키의 정체성 혼란을 깊게 다룬 원작과 달리 영화는 이보다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 그 중심에 나샤가 있다. 나샤는 원정대를 이끄는 정치인 출신 독재자 먀셜 부부와 대척점에 있는 상징적 캐릭터다. 이기적인 그들과 달리 사회 밑바닥 계층을 포용하고, 이 영화의 스펙터클을 책임지는 외계생명체를 존중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갖췄다. 그는 마셜을 향해 "누구한테 외계인이래, 우리가 외계인인데"라는 대사로 인간 혹은 기득권 중심의 사고방식에 경종도 울린다. 봉 감독에 따르면 영국에선 이 장면에서 박수가 터졌다. 우스꽝스러운 독재자 마셜은 국내에선 '헐크'로 유명한 마크 러팔로가 연기했다. 그의 첫 악역 연기다. 봉 감독은 "나라별로 각자 역사 속 정치적 악몽을 이 캐릭터에 투사했다"며 "누구는 이탈리아 무솔리니를, 누구는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부를 언급했다"고 말했다. 뭐든 아내 일파(토니 콜렛)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마셜 캐릭터에 대한 국내 관객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봉 감독은 "독재자가 커플로 나올 때 더 무섭고 블랙코미디가 강해질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또 극중 마셜이 저격당하는 장면을 두고 지난해 7월 발생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서 착안, 재촬영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거듭 밝혔다. ■세대교체, 젊은 세대를 향한 응원가 '세대 교체, 젊은 세대에 대한 응원이 느껴진다'는 질문에는 "원정대 세대를 의도적으로 젊게 구성했다"며 "극중 스티브 박과 외계 생명체인 마마 크리퍼만 좋은 부모 세대다. 마셜 부부는 최악이다. 폭탄 터지는 상황까지 만들지 말고 곱게 늙고, 곱게 퇴장해야 한다"고 답했다. '미키 17'은 순수 제작비 1700억원으로 봉 감독 역대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됐다. 간혹 뛰어난 작가주의 감독이 할리우드 시스템에 들어가 자신만의 영화적 개성을 잃은 경우가 있는데 '미키 17'은 그렇지 않다. 봉 감독의 인장이 생생히 살아있다. 최종 편집 권한을 중시하는 봉 감독은 "계약서에서 '디렉터스 파이널컷'만 확인한다"고 말했다. "사회학이나 인문학적 통찰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데, 내 영화는 거대담론이 아닌,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다양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감정을 나눠보자는 것이다. 지인들이 영화를 보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고 해서 기뻤다.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인 미키가 이런저런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게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5-02-24 18:06:32우리나라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중 35.5%입니다.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는 1인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데요. [혼자인家]는 새로운 유형의 소비부터, 라이프스타일, 맞춤형 정책, 청년 주거, 고독사 등 1인 가구에 대해 다룹니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최근 대한민국이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동안 좋은 환경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초점이 맞춰줬다면, 더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웰다잉(well-dying)'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초고령사회 진입한 일본... '종활(終活)' 유행 우리나라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종활(終活)'이 주목받고 있다. '종활'은 인생을 마무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2010년쯤 유행해 최근엔 1인 가구 맞춤 서비스가 등장했다. 지난해 7월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도쿄와 간사이 지역에서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대형 장례회사 '공익사(Public Interest Company)는 1인 가구를 위한 '조문객 없는 장례식' 상품을 출시했다. 해당 상품에는 공익사가 제공하는 장례 서비스와 사후 서류처리, 특수관계자와의 연락 등이 포함돼 있다. 가격은 옵션별로 70만~175만엔(한화 약 623만~1560만원) 정도다. 일본 정부도 1인 가구 임종 지원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가나가와현의 항구도시인 요코스카시에서는 친척이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는 독거노인들이 저렴하게 생전에 장례식장을 예약할 수 있도록 '엔딩 플랜'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시즈오카현 고베시와 이타미시 등에서는 1인 가구가 장례지도사와 사전 계약을 맺도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쿄도에서는 상담창구인 '노인 임종 안심 센터'를 개설했다. "삶의 마지막,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게..." 고령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자체가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관련 사업을 전개 중이다. 서울 영등포구는 저소득 1인 가구 사망자의 존엄한 마무리를 지원하고 사후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 '사전 장례주관 의향 관리' 사업을 확대 운영한다. 사전 장례주관 의향 관리 사업은 1인 가구 사망 전에 장례 주관자·부고 범위·장례 방식 등을 지정한 '사전 장례주관 의향서'를 받아 사회보장 정보시스템(행복e음)에 미리 등록해 놓는 사업이다. 1인 가구가 급사하는 경우 연고자 등을 찾지 못해 발생하는 혼란을 줄이는 취지다. 구는 지난해 상반기 관내 4개 동을 대상으로 사전 장례주관 의향 사업을 시범 운영했다. 1인 가구인 65세 이상의 기초생활수급자 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사전 장례주관 의향서를 받아 위급상황 발생 시 연락할 가족 및 지인 등을 미리 파악했다. 장례 방식도 직접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시범 운영 결과 총 169명이 장례주관 의향 신청서를 제출했다. 169명 중 70~80대가 69%(116명)로 비중이 가장 높았다. 신청자 대부분은 장례 주관자로 직계 가족을 적었다. 친구·요양보호사·아파트 경비원 등 친분 있는 제3자를 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사업을 관내 18개 동 전체로 확대, 향후 삶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웰다잉' 교육과 장수 사진 촬영 사업 등도 연계 운영할 계획이다. 부산 동구도 ‘해피엔딩 장례 지원사업’을 실시한다. 이는 1인 가구나 무연고자 대상으로 장례 주관자를 지정하고 부고 알림, 유언 집행자 통보 서비스로 사회적 가족과 연결하는 사업이다. 관내 1인 가구·무연고자가 사전 장례 의사 관리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주변 사회적 가족을 장례 주관자로 지정할 수 있고 사후 장례 방식과 일수, 안치 방법 등을 선택할 수 있다. gaa1003@fnnews.com 안가을 기자
2025-02-18 10:34:11[파이낸셜뉴스] “우리 시댁 얘긴 줄. 끝나고 남편과 의도치 않게 심도 깊은 이야기 나누게 된 작품” “보는 내내 아빠 생각에 눈물” “윌리와 비프. 내 아버지의 삶, 내 남편의 삶, 나의 아들들과 나의 삶이 교차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릴 적 멋모르고 봤던 명작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때는 이해를 못 했지만 나도 아버지가 되고 보니, 또 아버지를 보내고 나니 공연을 보는 동안 마음이 요동쳤다. 극 안에 나도 있고 우리가 있어서 더 눈물이 흐른다.”(이상 온라인 관객 반응) 지난 1월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개막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77년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현대 희곡의 거장 아서 밀러(1915~2005) 대표작인 이 작품은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공연되고 사랑받는 미국의 대표적인 희곡 중 하나다. 원작은 1930년대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실직 위기에 놓인 30년차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 두 아들과 갈등을 겪는 한편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의 삶을 반추, 결국은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다. 제작사 쇼앤텔플레이와 T2N미디어가 지난 2023년 이어 재연한 이번 무대는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로 동아연극상·대한민국연극대상을 수상한 김재엽 연출이 메가폰을 잡았다. 원작에 충실한 버전으로 완성해 러닝타임이 장장 3시간에 달한다. 그런데도 뜨거운 입소문에 힘입어 오는 3월 3일까지 이어지는 공연의 주요 좌석이 이미 동난 상태다. 연기 경력 5060년차 박근형, 손숙, 손병호, 예수정 등 주역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주역. 우리 부모세대와 닮은 소시민 부부를 연기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 흔히 고전은 영원하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보편성과 동시대성을 장착한 수작이다. 러닝타임 3시간 ‘순삭’..“원작에 충실, 번역에 공들여” 김재엽 연출은 그동안 자신이 직접 쓴 사실적이거나 실험적인 작품을 연출하다 이번에 처음으로 현대 고전에 도전했다. 그는 “미국 대공황이라는 원작의 경제적 상황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아도 현대적 보편성을 갖춘 작품이라 끌렸다”며 “존재감이 큰 배우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극장 안에서 적합하게 구성할지를 중점적으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론 원작에 충실했다. “러닝 타임에 대한 부담을 고려해 대본을 함부로 줄이지 않았다”며 “작가가 쓴 인물의 과거나 내적 정보가 다 드러나도록 했다”고 부연했다. 번역에도 공들였다. 영어로 된 원작 희곡에 1976년 국내 초판 된 번역본, 민음사에서 나온 ‘세일즈맨의 죽음’까지 세 권을 비교하면서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어에 가깝게 번역했다”며 “지명이나 역사적 사건은 그대로 쓰는 가운데, 구어체와 배우들이 사용하는 일상어에 가깝게 번역해 번역극처럼 느껴지지 않게 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로먼의 대사 중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있는 인생이 됐어’라고 하자 친구가 ‘어떤 인생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있는 인생은 없어, 내 말 듣고 있어?’라고 응수하는데 배우에 따라 이 대사를 ‘개똥밭에 굴려도 이승이 났다’로 처리했다. 이는 배우들의 언어적 개성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연극은 2박 3일간 벌어진 일을 다루나 한 남자의 일생을 돌아보게 한다. 김 연출은 “큰아들 비프가 부모 집을 방문하고, 다음날 그가 아버지의 기대 속에 과거 알던 지인께 사업 제안에 나섰다가 실패한 그날 밤 벌어진 일”이라며 “다음날 장례식까지 2박 3일”이라고 짚었다. “현란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원작엔 한 남자의 한평생 시간이 다 녹아있다. 우리는 공간이 제한된 연극 무대라 이런 시간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할지가 고민이었다"고 부연했다. 공연장이 기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로 바뀌면서 무대 디자인도 변경했다. 그는 “최대한 객석 가깝게 했다”며 “화단에 실제로 흙을 가져다가 꽃을 심었다. 집 외에 회사나 술집 등은 간판을 무대 아래로 내려서 어떤 공간인지 직관적으로 알게 했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이번 작품엔 암전이 전혀 없다. 오로지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 신을 통해 지금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또 윌리가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지를 직관적으로 알수 있게 연출했다. 눈치 채지 못했는데, 배우들끼리 한 규칙이 있단다. 그는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반드시 현관문을 통해 들고났다면, 과거 회상 신 등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그렇지 않고 바로 등퇴장했다”고 비교했다. 세일즈맨은 왜 비극에 이르렀나? 위대한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전통 비극에선 늘 악역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 고전인 이 작품에는 악역이 없다. 김 연출은 “윌리는 자기 안에 있는 자신과 싸운다”며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가부장의 역할을 스스로에게 강요한 게 비극적 결말로 이끌었다”고 봤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년에게 성공을 요구한다. 돈을 많이 벌고 결혼도 해야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특히 미국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각국에서 온 이민자의 나라다.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게 가부장제 남성의 존재 이유인 셈이다. 그는 “당시 미국 현대 작가들이 이민 1.5세나 2세대의 아메리칸드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썼다”며 “로먼이 폴란드 지역에 있는 도시 이름이라는 점에서 그 역시 이민자로 추정된다”고 짚었다. 실제로 작가 아서 밀러는 미국 뉴욕에서 나고 자란 폴란드계 유대인이었으며, 그의 삼촌이 대공황 때 사업 실패로 자살한 가족사가 있다. 김 연출은 “우리나라 IMF 때처럼 대공황 땐 그런 일이 많았다. 당시로선 ‘세일즈맨의 죽음’은 르포문학이라고 할까. 사실성이 강조된 문학 작품이었다”고 부연했다. 윌리의 죽음은 여러 의미로 다가온다. 무엇이든 다 사고 팔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속성과 남성의 존재이유가 된 효용성 그리고 눈물겨운 부성애가 혼재돼 있다. 김 연출은 “마지막 자신의 죽음마저도 남은 자에게 효용이 있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안쓰럽다”며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에 대한 로먼의 집착이 불행을 자초했다”고 분석했다. “로먼은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을 필요 이상으로 높게 평가한다. 마치 금광을 캔 사람처럼 아메리칸드림을 창조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효용성으로만 따지면, 친구가 자기 회사에 오면 주급을 더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는 거절한다. 남성성에 갇혀 있다”고 꼬집었다. 아들을 자신 분신처럼 여기는 아버지...또다른 비극 이 작품의 또다른 관람 포인트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두 아들과의 갈등이다. 특히 비프가 핏대를 올리며 아버지께 자신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원하는지 설명해도 로먼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프는 자연을 동경하며 노마드적인 삶을 추구한다. 어떻게 보면 로먼 역시 이러한 삶의 방식이 적성에 맞는 남자였다.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가 된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순응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선 도시를 떠나면 ‘루저’ 취급받는데 말이다. 비프는 허허실실하는 동생 해피와 달리 이러한 가치관에 저항한다. 김 연출은 “젊은 관객들이 그 장면을 두고 답답해하며 ‘저게 리얼리티’라는 반응을 보이더라”며 “한국사회도 코리안 드림을 완성시키려는 마음이 강하다. 성공한 부모일수록 자기 세계관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있다. 실패한 부모는 내가 이런 걸 안했더니 아쉽더라며 (자식 성공에) 집착하며 조언한다. 그런데 가족의 평화를 위해선 부모세대의 감각과 자식세대의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자기 분신처럼 만들고자 하니 부자간 소통이 안된다. 아들은 자기 가치관에 맞게 살게 놔둬야 한다. 부모 자식간의 이상적 관계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정신적, 물리적으로 독립하고 서로 가끔 만나는 사이가 좋다고 본다.” “젠더 감수성은 올드 한 작품”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극중 로먼의 아내 린다가 두 아들에게 하는 호소다. 린다는 자신의 노쇠한 남편을 위하지만, 정작 로먼은 그런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다. 늘 그의 말을 끊기 일쑤다. '아내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 속에 산 기성세대 부모의 모습과 닮아있다. 김 연출은 “젊은 여성 관객들이 린다를 대하는 로먼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하더라”며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올드한 작품”이라고 공감했다. 그러면서 로먼의 행동 이면의 심리를 짚었다. “로먼의 과거 회상 신을 보면 린다는 늘 자신에게 얼마나 벌었는지 묻고 얼마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죽은 형이 자신에게 알래스카에 가자고 했을 때 못 가게 말린 사람도 아내다.” 누구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으니, 윌리에게 아내는 자신의 앞길을 막은, 부양 책임을 상기시켜주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세일즈맨은 또 거절을 많이 당하는 직업이다. 집에선 그런 경험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 그런 심리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은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마지막 거대한 죽음 앞에 모종의 깨달음을 얻은 두 아들은 각자 새 삶을 다짐한다. 각자의 선택은 다르다. 김 연출은 비프의 선택에 주목하며 비프가 한 ‘나는 나를 알아’를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꼽았다. “나를 아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다. 나를 잘 몰라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 나를 모르면, 세상의 욕망에 맞춰 자기가 아닌 모습으로 살게 된다.” 그는 남편의 장례식에서 "오늘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다"는 린다의 대사도 꼽았다. "오늘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다르게 살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죽음에 대해 이해하면, 덜 욕망하고, 덜 미워하고, 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로먼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판다. 그 순간 살짝 환희에 찬 음악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음악은 곧 장례식과 함께 레퀴엠으로 바뀐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평범한 삶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평범한 삶을 성실히 수행한 로먼의 잘못된 선택이나 여러 인간적 실수가 안타까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최선을 다해 그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방금 왕이 걸어 나가시는 걸 본 거요. 고난을 겪는 훌륭한 왕이죠.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왕이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멋지고 믿음직한 아버지였어요. 항상 자식들만 생각하고."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5-02-11 18:17:22[파이낸셜뉴스]세계에서 가장 큰 빙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 펭귄 등 야생동물들이 떼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빙산이 펭귄 등의 서식지인 남대서양의 사우스조지아섬을 강타할 수 있기 때문이다. 7일 워싱턴포스트(WP) 등에 따르면, 남극해 소용돌이에 8개월 동안 갇혀있던 빙산 A-23A가 시속 약 1㎞로 다시 움직이고 있다. 무게는 약 1조 t 규모의 이 빙산은 1986년 필히너-론빙붕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크다. A-23A는 약 2주 뒤 해류를 통해 사우스조지아섬의 대륙붕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빙산의 움직임에 따라 야생동물이나 선박의 이동 경로가 막히고 서식지 등을 강타할 우려가 있다. 해양학자 앤드류 메이저스는 사우스조지아섬에 빙산이 부딪힐 경우 펭귄이나 바다표범 등의 먹이 사냥이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사우스조지아섬은 해양 동물들의 먹이가 풍부해 현재 많은 야생동물이 서식 중이다. A-23A가 섬에 부딪히기 전 따뜻한 해류에 작게 부서져 녹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영국 남극 연구소(BAS)는 이 경우 야생동물의 피해는 줄지만 수천 개의 빙산 조각으로 어선들의 항해가 어려워 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현재 A-23A 빙산은 높이 약 6m의 파도, 풍속 시속 약 70㎞의 폭풍 속에 있어 붕괴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 june@fnnews.com 이석우 기자
2025-02-08 05:1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