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뜀걸음(hopping) 형태의 포유류의 발자국 화석이 세계 최초로 발견됐다. 21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맹식)에 따르면 이번에 발견된 포유류 발자국 화석은 캥거루처럼 뜀걸음하는 형태의 총 9쌍의 뒷발자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중생대 백악기 화석으로는 세계적으로 한 차례도 보고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화석은 지난해 1월 19일, 하동 노량초 교사 최연기씨와 진주교육대학교 김경수 교수 연구팀이 발견했다.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을 중심으로 한국·미국·중국으로 이뤄진 '3개국 국제공동연구팀'이 연구에 나서 세계적인 척추동물 발자국 화석 전문가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등 우리나라 화석산지에 대한 과학적인 국제 비교연구를 실시했다. 이 화석이 발견된 지층은 약 1억1000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진주층으로 새롭게 명명된 화석의 이름은 '코리아살티페스 진주엔시스(Koreasaltipes Jinjuensis)'로 '한국 진주(진주층)에서 발견된 새로운 종류의 뜀걸음형태 발자국'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화석은 중생대 쥐라기 아메기니크누스(Ameghinichnus)와 신생대 무살티페스(Musaltipes) 발자국 화석만이 알려져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코리아살티페스 발자국 화석은 아메기니크누스와 무살티페스 화석과는 발가락 형태와 각도, 보행렬의 특징 등 여러 형태학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며, 가장 명확한 뜀걸음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이번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중생대에 서식했던 척추동물들 가운데 공룡ㆍ익룡ㆍ새ㆍ악어ㆍ도마뱀ㆍ어류 등과 함께 포유류도 서식하였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우리나라가 중생대 백악기 척추동물의 종 다양성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결과는 중생대 백악기 관련 국제 저명학술지(SCI)인 '백악기 연구(Cretaceous Research)'에 '중생대 백악기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화석'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7일 온라인호를 통해 공개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세계적으로 진귀한 이 뜀걸음형 포유류 발자국 화석 진품을 천연기념물센터 전시관을 통해 내년 하반기부터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2017-02-21 10:28:21계룡산(鷄龍山)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한국의 명산이다. 대전시 서쪽에 인접해 있다. 전형적인 중생대(1억6000만~1억년 전) 대보 화강암 산지로 관악산, 월출산 등과 같이 웅장한 산봉을 자랑한다. 높이는 845m에 불과하나 평지에 갑자기 솟아 있는 형상이다. 그러한 신비감과 경외감으로 오랫동안 민속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다. 계룡산은 개인적인 민속신앙과 함께 음택의 풍수지리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나 풍수지리학 연구자에게 좋은 지역 자료가 되어 왔다. 닭(鷄) 벼슬은 출세를 상징하며, 아침을 깨우는 닭울음 소리도 좋은 징조로 본다. 특히 갑사구곡(甲寺九谷)의 금계암은 금계포란(金鷄抱卵·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대표로 여긴다. 계룡산 인근에는 닭이름 지명이 많다. 금계암 외에도 공주 이인면의 계란봉, 청양 청남면의 닭밭골(鷄田谷), 공주 계봉산·금계산, 계룡면 완산천의 닭머리마을, 공주의 달걀봉 등이 있다. 그리고 대전의 계산동(鷄山洞)과 공주의 계탄·계현 등 지명이 다수 보인다. 대전시 동쪽에 있는 계족산(鷄足山)은 닭의 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근래에 맨발걷기 산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룡산은 화강암 산지로 경사가 급하고 토양층 발달이 미약해 식생의 성장에 불리하다. 강우 시에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물이 불어서 급류를 형성하지만 평소에는 유량이 적은 지형적 조건 때문에 계곡 하단부에 많은 저수지를 축조해 농수로 이용해왔다. 기반암 노출로 돌출한 암릉이 많고 수직절리에 의한 탑형의 바위들이 잘 발달하고 있다. 깊은 골짜기를 만드니 산릉과 계곡이 깊은 대조를 이룬다. 풍수적으로 전형적인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다. 오랜 풍화의 편마암 지역에 화강암이 관입한 석산은 가시적, 심리적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계룡산이라는 지명은 산체의 특징이 북쪽으로 천황봉과 쌀개봉을 이은 능선이 닭의 벼슬을 닮았고, 전체적으로는 용이 굼실거리는 모습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혹은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이곳의 풍수가 금계포란형과 비룡승천형을 동시에 갖는다 하여 계(鷄)와 용(龍)을 따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이 보는 닭과 상상의 동물인 용이 함께하는 특이한 이름이다. 아침 닭의 신선함과 낮 동안에 크게 용틀임하는 기상의 결합이라 하겠다.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山水)편을 보면 진잠(鎭岑)의 계룡산을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문화의 구월산과 함께 "수려한 석산으로 물이 맑으며, 강이나 바다가 모이는 터로서 큰 힘을 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역대 도읍지에 위치하거나 가까이에 있다. 이중환은 이들 네 산을 비교하면서 계룡산을 설명하기를 "웅장함은 오관산만 못하고 수려함은 삼각산만 못하다. 안수(명당이나 마을 앞쪽으로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적고 다만 금강 한 줄기가 산을 둘러 돌았을 뿐이다. 계룡산 남쪽 골은 한양과 개성에 견주어서 기세가 떨어진다. 판국 안에 평지가 적고 동남쪽이 널따랗게 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맥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서북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또 크다"고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도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삼산오악(三山五嶽)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백제시대에는 불교의 성지로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설, 도참설(圖讖說) 등은 계룡산의 오랜 산악신앙의 역사와 더불어 지리산, 태백산, 마니산, 구월산 등 국내 어느 유명 산지보다 더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곳의 갑사, 동학사, 신원사는 계룡산 불교 신앙의 3대 축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계룡은 서악 명산에 들어 제사를 지내고 조선시대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계룡은 중악단으로 지정되어 제사를 지냈다. 중악단은 계룡산의 역사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외 영규대사 묘, 신원사 5층석탑, 동학사 남매탑(오뉘탑) 등이 있다. 계룡산은 풍수적으로 길지로 인식되고 '정감록(鄭鑑錄)'에는 800년 도읍지(新都安)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왕조 초기 무학대사가 주장하여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신도(新都) 공사를 시작했다가 그만둔 사실이 있다. 그 후로도 많은 도참서들의 설명이 가미되어 신비의 산, 영험이 많은 산으로 최근까지도 개인적인 신앙의 장소, 신흥종교의 메카로 일컬어져 왔다. 동부의 신도안은 1975년 종교정화사업과 1983년 3군 본부 이전사업 등으로 신흥종교는 모두 철수되고 군 본부 계룡대가 들어오면서 계룡시가 들어섰다. 국가 주요 기능의 일부가 신도안에 들어온 셈이다. 또한 계룡산에 인접하여 동향으로 국립현충원이 있고, 정부 제3청사도 있다. 신도안은 대한민국 군사 중심 도시가 되었다. 도안(都安)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계룡산은 금강 남쪽에 자리 잡은 하나의 산체로서 최고봉 천황봉(845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쌀개봉(828m), 관음봉(816m), 삼불봉(775m), 수정봉(662m), 신선봉(642m), 장군봉(500m)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천왕봉(605m), 황적봉(664m), 관암봉(526m)으로, 남쪽으로는 향적산(574m), 국사봉(436m)으로 이어진다. 계룡산의 산줄기들은 그 형태가 다섯 손가락을 펼친 형국이고, 이들 손가락 같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지류들이 용수천, 두계천, 노성천 등의 큰 지류들로 모여서 금강으로 유입된다. 다섯 손가락 모양의 산릉선에 그 손가락 사이로 여러 물줄기들이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산태극수태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계룡산 형상은 당연히 종교와 무속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신도안에는 여러 종교계들이 모여 종교촌이 형성되었다. 무속의 대상으로서 굿을 벌이는 가장 영험한 곳으로는 삼불봉과 금룡암 계곡이 꼽힌다. 계룡산의 숫용추와 암용추는 특히 영험이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 신도안은 군사시설 설치와 국립공원 정화사업으로 무속과 종교 행위가 근절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계룡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앙과 영험의 명산으로 남아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5-04-21 18:12:37계룡산(鷄龍山)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한국의 명산이다. 대전시 서쪽에 인접해 있다. 전형적인 중생대(1억6000~1억년) 대보 화강암 산지로 관악산, 월출산 등과 같이 웅장한 산봉을 자랑한다. 높이는 845m에 불과하나 평지에 갑자기 솟아 있는 형상이다. 그러한 신비감과 경외감으로 오랫동안 민속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해오고 있다. 계룡산은 개인적인 민속 신앙과 함께 음택의 풍수지리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나 풍수지리학 연구자에게 좋은 지역 자료가 되어왔다. 닭(鷄) 벼슬은 출세를 상징하며, 아침을 깨우는 닭울음 소리도 좋은 징조로 본다. 특히 갑사구곡(甲寺九谷)의 금계암은 금계포란(金鷄抱卵,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대표로 여긴다. 계룡산 인근에는 닭이름 지명이 많다. 금계암 외에도 공주 이인면의 계란봉, 청양 청남면의 닭밭골(鷄田谷), 공주 계봉산·금계산, 계룡면 완산천의 닭머리마을, 공주의 달걀봉 등이 있다. 그리고 대전의 계산동(鷄山洞)과 공주의 계탄·계현 등 지명이 다수 보인다. 대전시 동쪽에 있는 계족산(鷄足山)은 닭의 발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근래에 맨발걷기 산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룡산은 화강암 산지로 경사가 급하고 토양층의 발달이 미약해 식생의 성장에 불리하다. 강우 시에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물이 불어서 급류를 형성하지만 평소에는 유량이 적은 지형적 조건 때문에 계곡 하단부에 많은 저수지를 축조해 농수로 이용해왔다. 기반암 노출로 돌출한 암릉이 많고 수직절리에 의한 탑형의 바위들이 잘 발달하고 있다. 깊은 골짜기를 만드니 산릉과 계곡이 깊은 대조를 이룬다. 풍수적으로 전형적인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다. 오랜 풍화의 편마암 지역에 화강암이 관입한 석산은 가시적, 심리적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계룡산이라는 지명은 전체 산체의 특징이 북쪽으로 천황봉과 쌀개봉을 이은 능선이 닭의 벼슬을 닮았고, 전체적인 모습은 용이 굼실거리는 모습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혹은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이곳의 풍수가 금계포란형과 비룡승천형을 동시에 갖는다 하여 계(鷄)와 용(龍)을 따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은 보는 닭과 상상의 동물인 용이 함께하는 특이한 이름이다. 아침 닭의 신선함과 낮 동안에 크게 용트림하는 기상의 결합이라 하겠다.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山水)편을 보면 진잠(鎭岑)의 계룡산을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 문화의 구월산과 함께 “수려한 석산으로 물이 맑으며, 강이나 바다가 모이는 터로서 큰 힘을 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역대 도읍지에 위치하거나 가까이에 있다. 이중환은 이들 네 산을 비교하면서 계룡산을 설명하기를 “웅장함은 오관산만 못하고 수려함은 삼각산만 못하다. 안수(명당이나 마을 앞쪽으로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적고 다만 금강 한 줄기가 산을 둘러 돌았을 뿐이다. 계룡산 남쪽 골은 한양과 개성에 견주어서 기세가 떨어진다. 판국 안에 평지가 적고 동남쪽이 널따랗게 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맥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였다. 서북쪽에 있는 용연은 매우 깊고 또 크다”고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도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삼산오악(三山五嶽) 중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백제시대에는 불교의 성지로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설, 도참설(圖讖說) 등은 계룡산의 오랜 산악신앙의 역사와 더불어 지리산, 태백산, 마니산, 구월산 등 국내 어느 유명 산지보다 더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곳의 갑사, 동학사, 신원사는 계룡산 불교 신앙의 3대 축을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계룡은 서악 명산에 들어 제사를 지내고, 조선시대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계룡은 중악단으로 지정되어 제사를 지냈다. 중악단은 계룡산의 역사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외 영규대사 묘, 신원사 5층석탑, 동학사 남매탑(오늬탑) 등이 있다. 계룡산은 풍수적으로 길지로 인식되고 '정감록(鄭鑑錄)'에는 800년 도읍지(新都安)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왕조 초기 무학대사가 주장하여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신도(新都) 공사를 시작했다가 그만둔 사실이 있다. 그 후로도 많은 도참서들의 설명이 가미되어, 신비의 산, 영험이 많은 산으로 최근까지도 개인적인 신앙의 장소, 신흥 종교의 메카로 일컬어져 왔다. 동부의 신도안은 1975년 종교정화사업과 1983년 3군 본부 이전 사업 등으로 신흥 종교는 모두 철수되고 군 본부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계룡시가 들어섰다. 국가 주요 기능의 일부가 신도안에 들어온 셈이다. 또한 계룡산에 인접하여 동향으로 국립현충원이 들어서 있다. 정부 제3청사도 들어와 있다. 신도안은 대한민국 군사 중심 도시가 되었다. 도안(都安)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계룡산은 금강 남쪽에 자리 잡은 하나의 산체로서 최고봉 천황봉(845m)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쌀개봉(828m), 관음봉(816m), 삼불봉(775m), 수정봉(662m), 신선봉(642m), 장군봉(500m)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천왕봉(605m), 황적봉(664m), 관암봉(526m)으로, 남쪽으로는 향적산(574m), 국사봉(436m)으로 이어진다. 계룡산의 산줄기들은 그 형태가 다섯 손가락을 펼친 형국이고, 이들 손가락 같은 산줄기 사이로 여러 지류들이 모여서 용수천, 두계천, 노성천 등의 큰 지류들이 금강으로 유입된다. 다섯 손가락 모양의 산릉선에 그 손가락 사이로 여러 물줄기들이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산태극수태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계룡산 형상은 당연히 종교와 무속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신도안에는 여러 종교계들이 모여 종교촌이 형성되었다. 무속의 대상으로서 굿을 벌이는 가장 영험한 곳으로는 삼불봉과 금룡암 계곡이 꼽힌다. 계룡산의 숫용추와 암용추는 특히 영험이 많은 곳으로 알려졌다. 신도안 군사시설 설치와 국립공원 정화 사업으로 무속과 종교 행위가 근절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계룡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앙과 영험의 명산으로 남아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5-04-15 17:16:25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모래 해안보다 몽돌 해안(둥근 자갈 해안)이 많다. 아름다운 해안이다. 남녘의 맑은 해안에서 자갈과 파도가 얽히는 소리가 끝없이 반복한다. 구조라해수욕장은 남해안에서 경남 남해의 상주해수욕장과 함께 유명하다. 원래는 구조라는 섬이었는데, 구조라섬은 와현 해수욕장의 사빈으로 엮여서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부산의 동백섬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기를 보면 빙하기가 물러가고 난 다음 현재와 비슷한 해수면을 가졌던, 대략 6000년 전 이후부터 육지와 연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조라해수욕장과 와현해수욕장처럼 모래해수욕장은 화강암 지대이기 때문이다. 모래 생산은 강이나 바다나 화강암이 단연 으뜸이다. 학동 몽돌해수욕장은 상대적으로 풍화와 침식에 강한 중생대 퇴적암지대다. 해금강의 단애들도 단단한 퇴적암이 풍화와 침식에 살아남아 있는 것들이다. 거제(巨濟) 지명의 어원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섬'이라는 뜻의 거(巨)와 '구제한다'의 제(濟)가 합쳐진 것으로 본다. 삼한시대 변한의 독로국을 거쳐서 가야시대의 소가야국에서 금관가야국에 속한다. '독로'는 이두어로 '두르다'의 뜻으로 사위를 바다가 두르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한다(정약용·'아방강역고').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거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또는 큰 섬으로 그리고 많은 작은 섬을 거느린다는 뜻으로도 본다. 과장이 심하지만 '거제계룡산하 구백만'(巨濟鷄龍山下 求百萬·거제의 계룡산 아래의 땅에서 백만을 먹여 살린다)이 구전으로 내려온다. 혹시 조선산업으로 발전할 것을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대우조선(현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이 들어설 것이라고 오래전 누가 기대했을까 싶다. 2005년에 발간된 '한국지리지 경상편'을 보면 거제권(거제, 통영, 고성)은 자동차 및 트레일러를 제외한, 말하자면 조선업이 그 중심으로 경상도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수가 29.38로서 그다음 울산권의 16.09, 창원권의 4.55와 비교할 때 월등히 높다. 어업의 입지계수도 거제권이 14.87로서 2위인 포항권(포항, 울릉, 영덕)의 3.40과 3위 진주권(진주, 사천, 남해, 하동)의 2.61과는 비교가 안 된다. 2008년 대학에서 일하면서 답사수업으로 학생들과 함께 거제로 갔다. 몽돌해안, 해금강, 구조라해안, 외도, 포로수용소, 대우조선 등을 답사했다. 거제를 대표하는 볼만한 공간과 장소들이다. 해금강을 유람선으로 돌 때 선장의 구수하고 청산유수 같은, 전설 따라 삼천리를 곁들인 거제를 소개하던 설명을 잊을 수 없다. 옥포만에 위치한 대우조선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유명한 책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가 탄생한 곳이다. 옥포해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을 상기하듯 김 회장은 늦은 밤에 고요하기 그지없는 옥포조선소의 숙소에서 달빛 어린 바다를 보면서 이 글을 적노라고 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것은 틀림이 없다. 김 회장이 옥포만을 택한 것을 보면 지리적인 조건을 감안했을 것이다. 옥포해안은 북으로 바다가 열려 있다. 남쪽 바다에서 오는 태풍 때의 거대한 파도를 피할 수 있다. 태풍 진로와 정확히 일치하게 나 있다. 그리고 만안에 바로 인접한 남쪽의 옥녀봉은 555m, 서쪽의 국사봉도 462m에 달한다. 바다에서 바로 솟아 있으므로 보이는 높이는 더 높다. 그리고 리아스식 해안이라 항만이 깊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매우 작다. 부산과 가까움도 유리하다. 배후지에 비교적 넓은 해안 평야가 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작가 김훈은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옥포만에서 바다는 자루처럼 오목하게 섬의 안쪽을 파고들어 갔다. 외해로 드나드는 만의 어귀는 좁았다. 생사의 멱통과도 같았다. 그 멱통에서 삶과 죽음은 포개져 있었다." 바다 뱃길에 중요한 지점으로 거제의 북단에 영등포가 있었다. 바닷바람이 해가 없도록 영제를 올리는 곳으로 지금은 구영등포의 약자로 구영리, 구영항 등으로 나온다. 자리를 옮긴 영등포는 고지도 '동여(東與)'에는 서쪽 끝자락에 표시되어 있다. 영등포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매우 자주 나오는 전략적 요지였다. 오늘날 그 멱통 부분은 팔랑포 방파제와 느티 방파제로 더욱 조이고 있다. 먼 바다의 파랑이 만내로 들어오기가 더욱 힘들다. 장군이 왜군의 배들을 수장시킨 곳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거제가 유배지로 많이 이용된 것은 남해, 제주와 함께 수도권(개경, 한양 등)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떨어지고 험한 섬으로 고려의 최고 문인인 이규보는 거제를 '독한 안개와 회오리바람과 벌보다 큰 모기'로 무서운 곳으로 그리고 있다. 유배지를 위한 외떨어지고 험한 섬으로 적합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18대 임금 의종이 유배를 왔고, 고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왕씨들이 들어와서 왕(王)에 점 하나 찍어서 옥(玉)씨로 바꾸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왕조가 어디 그것을 몰랐을까? 그냥 둔 것은 거제가 워낙 멀어서 구 왕족들이 소란 없이 조용히 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옥포도 옥씨가 많이 살아서 이름이 붙여졌고 옥개라고도 했다. 거제가 포로수용소가 된 것도 거제의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1950년 11월 27일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 의하여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지역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는 거제에 자리를 잡았다. 유엔군의 최고 후방 교두보인 부산도 가깝고 일본의 미국 극동사령부에서도 가까운 섬이 거제다. 그리고 신현의 깊고 긴 계곡으로 북한과 중국의 포로 13만명과 감시하는 유엔군을 수용하기 충분하다고 보았다. 현재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보존되어 당시의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섬으로 육지와 분리되어 있지만 제주처럼 부산과 너무 멀지 않았다. 거제에서 2명의 대통령이 나왔는데 모두 부산에서의 학창 생활이 있었다. 거제는 거제현, 거제군, 현재 거제시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와 지리의 산물로 현재가 만들어졌다. 거제섬은 부산, 통영과 교량으로 연결돼 이제는 육지나 다름없다. 거제는 창원, 부산, 울산과 연결돼 반도의 동남해안의 거대한 도시권과 산업권을 이루고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5-01-06 19:22:20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으로 모래 해안보다 몽돌 해안(둥근 자갈 해안)이 많다. 아름다운 해안이다. 남녘의 맑은 해안에서 자갈과 파도가 얽히는 소리가 끝없는 반복한다. 구조라해수욕장은 남해안에서 남해의 상주해수욕장과 함께 유명하다. 원래는 구조라는 섬이었는데, 구조라섬은 와현 해수욕장의 사빈으로 엮여져서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부산의 동백섬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기를 보면 빙하기가 물러가고 난 다음 현재와 비슷한 해수면을 가졌던 대략 6000년 전 이후부터 육지와 연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조라 해수욕장과 와현 해수욕장처럼 모래해수욕장은 화강암 지대이기 때문이다. 모래 생산은 강이나 바다나 화강암이 단연 으뜸이다. 학동 몽돌해수욕장은 상대적으로 풍화와 침식에 강한 중생대 퇴적암지대다. 해금강의 단애들도 단단한 퇴적암이 풍화와 침식에 살아남아 있는 것들이다. 거제(巨濟) 지명의 어원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섬'이라는 뜻의 거(巨)와 '구제한다'의 제(濟)가 합쳐진 것으로 본다. 삼한시대의 변한의 독로국을 거쳐서 가야시대의 소가야국에서 금관가야국에 속한다. '독로'는 이두어로 '두르다'의 뜻으로 사위를 바다가 두르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한다(정약용, 아방강역고).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거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또는 큰섬으로 그리고 많은 작은 섬을 거느린다는 뜻으로도 본다. 과장이 심하지만 '거제계룡산하 구백만'(巨濟鷄龍山下 求百萬, 거제의 계룡산 아래의 땅에서 백만을 먹여 살린다)이 구전으로 내려온다. 혹시 조선산업으로 발전할 것을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대우조선(현재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이 들어설 것이라고 오래전 누가 기대했을까 싶다. 2005년에 발간된 '한국지리지 경상편'을 보면 거제권(거제, 통영, 고성)은 자동차 및 트레일러를 제외한, 말하자면 조선업이 그 중심으로 경상도 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수가 29.38로서 그 다음의 울산권의 16.09, 창원권의 4.55과 비교할 때 월등히 높다. 어업의 입지계수도 거제권이 14.87로서 2위인 포항권(포항, 울릉, 영덕)의 3.40과 3위 진주권(진주, 사천, 남해, 하동)의 2.61과는 비교가 안 된다. 2008년 대학에서 일하면서 답사수업으로 학생들과 함께 거제로 갔다. 몽돌해안, 해금강, 구조라 해안, 외도, 포로수용소, 대우조선 등을 답사했다. 거제를 대표하는 볼만한 공간과 장소들이다. 해금강을 유람선으로 돌 때의 선장의 구수하고 청산유수 같은, 전설따라 삼천리를 곁들인 거제를 소개하는 설명을 잊을 수 없다. 옥포만에 위치한 대우조선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유명한 책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가 탄생한 곳이다. 옥포해전을 치른 이순신 장군을 상기하듯 김 회장은 늦은 밤에 고요하기 그지없는 옥포조선소의 숙소에서 달빛 어린 바다를 보면서 이 글을 적노라고 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것은 틀림이 없다. 김우중 회장이 옥포만을 택한 것을 보면 지리적인 조건을 감안했을 것이다. 옥포해안은 북으로 바다가 열려 있다. 남쪽 바다에서 오는 태풍 때의 거대한 파도를 피할 수 있다. 태풍 진로와 정확히 일치하게 나있다. 그리고 만안에 바로 인접한 남쪽의 옥녀봉은 555m, 서쪽의 국사봉도 462m에 달한다. 바다에서 바로 솟아있으므로 보이는 높이는 더 크다. 그리고 리아스식 해안이라 항만이 깊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매우 적다. 부산과 가까움도 유리하다. 배후지에 비교적 넓은 해안 평야가 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작가 김훈은 이순신 장군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옥포만에서 바다는 자루처럼 오목하게 섬의 안쪽을 파고들어 갔다. 외해로 드나드는 만의 어귀는 좁았다. 생사의 멱통과도 같았다. 그 멱통에서 삶과 죽음은 포개져 있었다.” 바다 뱃길에 중요한 지점으로 거제의 북단에 영등포가 있었다. 바닷바람이 해가 없도록 영제를 올리는 곳으로 지금은 구영등포의 약자로 구영리, 구영항 등으로 나온다. 자리를 옮긴 영등포는 고지도 ‘동여(東與)’에는 서쪽 끝자락에 표시되어 있다. 영등포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매우 자주 나오는 전략적 요지였다. 오늘날 그 멱통 부분은 팔랑포 방파제와 느티 방파제로 더욱 조이고 있다. 먼 바다의 파랑이 만내로 들어오기가 더욱 힘들다. 장군이 왜군의 배들을 수장시킨 곳에서 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거제가 유배지로 많이 이용된 것은 남해와 제주와 함께 수도권(개경, 한양 등)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떨어지고 험한 섬으로 고려의 최고 문인인 이규보는 거제를 '독한 안개와 회오리바람과 벌보다 큰 모기'로 무서운 곳으로 그리고 있다. 유배지를 위한 외떨어지고 험한 섬으로 적합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18대 임금 의종이 유배를 왔고, 고려가 멸망하면서 많은 왕씨들이 들어와서 왕(王)에 점 하나 찍어서 옥(玉)씨로 바꾸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 왕조가 어디 그것을 몰랐을까? 그냥 둔 것은 거제가 워낙 멀어서 구 왕족들이 소란 없이 조용히 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옥포도 옥씨가 많이 살아서 이름이 붙여졌고 옥개라고도 했다. 거제가 포로수용소가 된 것도 거제의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1950년 11월 27일 포로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 의하여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지역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는 거제에 자리를 잡았다. 유엔군의 최고 후방 교두보인 부산도 가깝고 일본의 미국 극동사령부로부터도 가까운 섬이 거제다. 그리고 신현의 깊고 긴 계곡으로 북한과 중국의 포로 13만명과 감시하는 유엔군을 수용하기 충분하다고 보았다. 현재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보존되어 당시의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섬으로 육지와 분리되어 있지만 제주처럼 부산과 너무 멀지 않았다. 거제에서 2명의 대통령이 나왔는데 모두 부산에서의 학창 생활이 있었다. 거제는 거제현, 거제군, 현재 거제시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와 지리의 산물로 현재가 만들어졌다. 거제섬은 부산과 통영을 교량으로 연결돼 이제는 육지나 다름없다. 거제는 창원, 부산, 울산과 연결돼 반도의 동남해안의 거대한 도시권과 산업권을 이루고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2-31 13:24:59전북 익산(益山)은 서울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여산은 그 입구다. 현재 익산은 행정구역으로 익산시이며 과거 오랫동안 익산은 익산군과 이리시로 분리돼 있었다. 1906년 익산군, 1931년 이리읍, 1949년 이리시, 그리고 1995년 통합으로 익산시가 되었다. 익산시의 읍면 행정구역으로 익산시 외 금마면, 여산면, 왕궁면, 황등면, 함열읍, 함라면 등이 있다. 전체 인구는 약 30만명으로, 전북에서 전주 다음이며 군산보다 인구가 많다. 전북은 지형적으로 동쪽의 소백산지(무주·진안·장수), 서쪽의 호남평야(전주·이리·군산), 그리고 그 중간에 중산간지(임실·순창·남원)로 이루어진다. 익산은 금강 북쪽의 논산평야, 익산 남쪽의 호남평야와 연결된다. 익산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장항선) 등의 철도가 교차하는 호남 최대 교통요지가 되었다. 익산의 지리적 위치, 지정학적 장소성의 영향으로 백제와 고려시대의 불교, 근현대의 천주교·기독교·원불교의 터전으로서 종교도시로서 익산의 단면을 본다. 익산은 고대사에서 백제 이전의 마한과 청동기·석기 시대의 문화유적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호남의 입구 여산은 특히 현대시조의 거두인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와 문학관으로 유명하다. 이병기 선생은 학교 교육의 중요성도 잘 인식하면서 전북의 여러 초중등 학교와 전국 유수 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경남중, 경기중, 경복중, 경북중 등 당시 전국 명문들도 포함된다. 가람문학관에는 이병기 선생이 작사한 모든 교가를 다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문학관의 한국 학교 교육에 대한 큰 기여를 보여준다. 전북 익산시는 1995년 행정개편으로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돼 이루어졌다. 고조선시대에는 건마국(乾馬國)이었고, 위만(衛滿)에 쫓긴 기자(箕子)의 준왕(準王)이 익산으로 내려오면서 마한국(馬韓國)이 됐다. 현재의 금마를 중심으로 백제시대에는 금마저(金馬渚)라 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금마군으로 바뀌었다. 1344년 고려시대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황후 친정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높여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익산으로 변경됐다. 고산자 김정호는 지리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의 수도 사비에 버금가는 특별수도로 여겼음을 뜻한다. 왕궁 터와 미륵사지, 많은 산성들이 그 의미를 더한다. 백제 무왕의 새로운 통치이념을 위한 철저한 계획 왕도(王都)로 개발했다고 본다. 백제가 더 존속했다면 아마도 수도를 익산 금마로 이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도 왕도로 손색없는 많은 시설과 유물이 나오고 있어 백제와 마한의 역사를 살펴준다. 역사적으로 마한과 백제, 부여로 연결되며 고려의 역사유적도 더러 살필 수 있다. 마한은 진한(경북), 변한(경남)과 함께 삼한으로 불린다. 마한은 기원전에서 대략 기원후 400년까지 경기, 충청, 전라도에 존속한 정치체제였다. 익산은 역대 왕조에서 수도가 된 일이 없는 곳임에도 한국의 4대 고도(古都)로 공식 인정되었다. 4대 고도는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익산이다. 고도는 과거의 왕궁, 왕성, 왕릉, 왕사(王寺)가 있는 도읍이다. 익산에는 백제 무왕과 관련된 미륵사와 왕궁 유적, 쌍릉 등이 있다. 4대 고도의 보존과 육성을 위해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2017년 입법예고되고 2020년 5월 정식으로 시행됐다. 이에 힘입어 익산에도 '국립익산박물관'이 설립됐다. 지형 및 지질에 있어 익산은 화강암 지대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강암으로 1억5000만년 전 중생대 쥐라기, 백악기 정도의 질이 좋고 아름다운 화강암이다. 현재 채석되고 있는 한국의 화강암 생산에서 가장 높은 품질을 보여준다. 황등면에 국내 최대 화강암 채석장이 있고, 암석의 질도 매우 높다. 익산의 발전은 자연 및 인문지리의 연관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산지의 지역 특성에 대한 영향, 호남평야의 개간과 수리시설, 저수지시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근대적 개발과 현재의 상황 등으로 지역의 문화와 경제가 잘 나타난다. 고대와 중세의 도로, 하천, 해안 교통과 근현대의 철도와 신작로 건설 등이 익산의 역사지리와 현재의 익산 지리에 반영되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익산, 여산, 함열, 용안 등이 통합돼 현재의 익산이 됐다. 일제강점기 솜리 마을에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잇는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익산의 중심은 금마에서 솜리로 옮겨졌다. 솜리(혹은 솝리)는 '깊은 속 마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데 그대로 한자어 이리(裡里)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이(裡)는 한자 표리(表裏)에서 속을 뜻하는 이(裏)와 같은 뜻이다. 이리라는 지명은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서와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솜리가 철도 요지가 되고, 이를 배경으로 금마에 있던 익산 행정 중심을 솜리로 옮기면서 1931년 전격적으로 익산을 한자 지명 이리로 바꾼 것이다. 이리시가 다시 익산시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이다. 그럼에도 익산에는 이리초, 이리중, 이리고, 이리공고 등 이리 명칭 학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해방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분리됐다가 현재는 익산시로 변경됐다. 여전히 익산의 경제와 행정중심지는 과거 이리에 있다. 주요 문화유적은 청동기 문화, 초기 철기 문화 유적과 함께 마한과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가 모두 함께한다. 그중에서도 마한과 백제 유적이 대표적이다. 익산은 북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의 지맥이 경계가 되고 서쪽으로는 호남평야 군산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부여군과 논산시, 동쪽으로는 완주군, 남쪽으로는 김제시와 전주시, 서쪽으로는 군산시와 행정 경계를 이룬다. 호남평야상으로 보면 평야의 북동부에 해당하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경제개발에 따른 대규모 평야 개척은 익산에서는 만경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말과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사라진 황등제는 당시 익산 농업의 큰 힘이었다. 익산역은 철도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의 교차역으로서 지역의 다양한 농업 물산의 집산지 역할을 해왔다. 사실 평야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논산평야, 익산평야, 호남평야, 나주평야가 연결돼 있다. 익산은 지형, 물산, 장소와 위치, 역사와 문화 등에서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2-09 18:49:18전북 익산(益山)은 서울에서 호남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고 여산은 그 입구다. 현재 익산은 행정구역으로 익산시이며 과거 오랫동안 익산은 익산군과 이리시로 분리돼 있었다. 1906년 익산군, 1931년 이리읍, 1949년 이리시, 그리고 1995년 통합으로 익산시가 되었다. 익산시의 읍면 행정구역으로 익산시 외 금마면, 여산면, 왕궁면, 황등면, 함열읍, 함라면 등이 있다. 전체 인구는 약 30만명으로 전북에서 전주 다음이며 군산보다 인구가 많다. 전북은 지형적으로 동쪽의 소백산지(무주·진안·장수), 서쪽의 호남평야(전주·이리·군산), 그리고 그 중간에 중산간지(임실·순창·남원)로 이루어진다. 익산은 금강 북쪽의 논산평야와 익산 남쪽의 호남평야와 연결된다. 익산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장항선) 등의 철도가 교차하는 호남 최대의 교통요지가 되었다. 익산의 지리적 위치, 지정학적 장소성의 영향으로 백제와 고려시대의 불교, 근현대의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의 터전으로서 종교도시로서의 익산의 단면을 본다. 익산은 고대사에서 백제 이전의 마한과 청동기, 석기시대 문화유적도 다수 보유한다. 호남의 입구 여산은 특히 현대시조의 거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으로 유명하다. 이병기 선생은 학교 교육의 중요성도 잘 인식하면서 전북의 여러 초중등 학교와 전국의 유수의 학교들 교가를 작사했다. 경남중, 경기중, 경복중, 경북중 등 당시 전국 명문들도 포함된다. 가람문학관에는 가람선생이 작사한 모든 교가를 다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어, 문학관의 한국 학교 교육에 대한 큰 기여를 보여준다. 전북 익산시는 1995년 행정개편으로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돼 이루어졌다. 고조선시대에는 건마국(乾馬國)이었고, 위만(衛滿)에 쫓긴 기자(箕子)의 준왕(準王)이 익산으로 내려오면서 마한국(馬韓國)이 됐다. 현재의 금마를 중심으로 백제시대에는 금마저(金馬渚)라 했고, 통일신라가 되면서 금마군으로 바뀌었다. 1344년 고려시대 원나라 순제의 왕후 기황후 친정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높여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 다시 익산으로 변경됐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는 지리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의 수도 사비와 버금가는 특별수도로 여겼음을 뜻한다. 왕궁 터와 미륵사지 터, 많은 산성들이 그 의미를 더한다. 백제 무왕의 새로운 통치 이념을 위한 철저한 계획 왕도(王都)로 개발했다고 본다. 백제가 더 존속했다면 아마도 수도를 익산 금마로 이전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도 왕도로 손색없는 많은 시설과 유물이 나오고 있어 백제와 마한의 역사를 살펴준다. 역사적으로 마한과 백제, 부여로 연결되며 고려의 역사유적도 더러 살필 수 있다. 마한은 진한(경북), 변한(경남)과 함께 삼한으로 불린다. 마한은 기원전에서 대략 기원후 400년까지 경기, 충청, 전라도에 존속한 정치체제였다. 익산은 역대 왕조에서 수도가 된 일이 없는 곳임에도 한국의 4대 고도(古都)로 공식 인정되었다. 4대 고도는 경주, 부여, 공주와 함께 익산이다. 고도는 과거의 왕궁, 왕성, 왕릉, 왕사(王寺)가 있는 도읍이다. 익산은 백제 무왕과 관련된 미륵사와 왕궁 유적, 쌍릉 등이 있다. 4대 고도의 보존과 육성을 위해 ‘고도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2017년 입법예고되고 2020년 5월 정식으로 시행됐다. 이에 힘입어 익산에도 ‘국립익산박물관’이 설립됐다. 지형 및 지질에 있어 익산은 화강암 지대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강암으로 1억5000만년전 중생대 쥬라기, 백악기 정도의 질이 좋고 아름다운 화강암이다. 현재 채석되고 있는 한국의 화강암 생산에서 가장 높은 품질을 보여준다. 황등면에 국내 최대 화강암 채석장이 있고 암석의 질도 매우 높다. 익산의 발전은 자연 및 인문지리의 연관성에서도 살필 수 있다. 산지의 지역 특성에 대한 영향, 호남평야의 개간과 수리시설, 저수지 시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이후의 근대적 개발과 현재의 상황 등으로 지역의 문화와 경제가 잘 나타난다. 고대와 중세의 도로, 하천, 해안 교통과 근현대의 철도와 신작로 건설 등이 익산의 역사지리와 현재의 익산 지리에 반영되고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익산, 여산, 함열, 용안 등이 통합돼 현재의 익산이 됐다. 일제강점기 솜리 마을에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을 잇는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익산의 중심은 금마에서 솜리로 옮겨졌다. 솜리(혹은 솝리)는 ‘깊은 속 마을’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데 그대로 한자어 이리(裡里)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이(裡)는 한자 표리(表裏)에서 속을 뜻하는 이(裏)와 같은 뜻이다. 이리라는 지명은 대동여지도,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서와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솜리가 철도 요지가 되고, 이를 배경으로 금마에 있던 익산 행정 중심을 솜리로 옮기면서 1931년 전격적으로 익산을 한자 지명 이리로 바꾼 것이다. 이리시가 다시 익산시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사고 때문이다. 그럼에도 익산에는 이리초, 이리중, 이리고, 이리공고 등 이리 명칭 학교들이 많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으로 분리됐다가 현재는 익산시로 변경됐다. 여전히 익산의 경제와 행정중심지는 과거 이리에 있다. 주요 문화유적은 청동기 문화와 초기 철기 문화 유적과 함께 마한과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가 모두 함께한다. 그중에서도 마한과 백제 유적이 대표적이다. 익산은 북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의 지맥이 경계가 되고 서쪽으로는 호남평야 군산과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부여군과 논산시, 동쪽으로는 완주군, 남쪽으로는 김제시와 전주시, 서쪽으로는 군산시와 행정 경계를 이룬다. 호남평야 상으로 보면 평야의 북동부에 해당하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경제개발에 따른 대규모 평야 개척은 익산에서는 만경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저수지였지만 지금은 사라진 황등제는 당시 익산 농업의 큰 힘이었다. 익산역은 철도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의 교차역으로서 지역의 다양한 농업 물산의 집산지 역할을 해왔다. 사실 평야를 지형적으로 보면 북쪽의 논산평야, 익산평야, 호남평야, 나주평야가 연결돼 있다. 익산은 지형, 물산, 장소와 위치, 역사와 문화 등에서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2024-12-03 16:29:20[파이낸셜뉴스 세종=김원준 기자] “가족과 함께 중생대로 시간여행을 떠나자”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은 국립세종수목원 특별전시 ‘쥐라기가든:식물의 탄생과 진화’와 연계한 해설 프로그램을 다음달 15일까지 운영한다고 6일 밝혔다. 이번 해설 프로그램은 △서울대학교 이성진 고생물학자와 함께하는 공룡탐구 △국내 최초 비바리움 마스터와 함께하는 비바리움 시현 콘서트 △국립세종수목원 안병주 대리의 박쥐란 여행과 목부작 만들기 등으로 구성됐다. 어린이 관람객 시선에 맞춘 쥐라기가든 가족체험 해설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국립세종수목원 홈페이지 '교육예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창호 국립세종수목원장은 "쥐라기 가든 교육을 통해 고대 생태계를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며 "향후 관람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다양한 맞춤형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kwj5797@fnnews.com 김원준 기자
2024-11-06 11:38:40【파이낸셜뉴스 울산=최수상 기자】 울산의 화석을 주제로 울산 지질 유산의 중요성을 논의하기 위한 학술토론회가 오는 11월 4일 오후 2시 울산시의회 3층 회의실에서 열린다. 30일 울산시에 따르면 이번 학술토론회는 ‘울산의 화석이 증명하는 울산지질공원 역사와 미래’를 주제로 주제발표, 지정발표, 토론 및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된다. 주제 발표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공달용 교수가 진행하며, 2020년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노바페스 울산엔시스’ 발자국 화석과 2024년 1월에 발표된 새 발자국 화석인 ‘우프스 아길리스’를 소개한다. ‘노바페스 울산엔시스(Novapes ulsanensis)’는 라틴어로 울산에서 새롭게 발견된 발자국이라는 뜻이다. 지난 2018년 반구대암각화 아래 기반암에서 발견된 수생파충류 코리스토데라 발자국 화석이다. 코리스토데라는 약 1억7000만년전 중생대에 출현했다가 약 1600만년 전 신생대에 멸종한 파충류이다. 미국에서 1995년 처음 발견된 2개의 코리스토데라 발자국은 앞발과 뒷발 구분이 모호했다. 반면 울산 반구대암각화 기반암에서 발견된 발자국은 18개에 이르고 앞 발자국 길이 2.94cm, 뒷발자국 9.88cm 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특히 울산의 화석에서는 왼쪽과 오른쪽 발자국 사이에 꼬리를 끈 자국이 관찰됐다. 이는 코리스토데라가 긴 꼬리를 가졌다는 것으로, 반직립한 걸음걸이로 걸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확인한 것이다. 학술토론회에서는 또 울주군 입암리의 4족 보행 조각류 발자국 화석에 대한 추가 연구 결과와 천연기념물 지정 필요성도 논의될 예정이다. 이어 국가유산청 정승호 학예연구사가 첫 번째 지정발표자로 나서 울산의 산, 바다, 강에 산재한 다양한 지질유산을 설명한다. 두 번째 지정발표는 전남대학교 이연규 명예교수가 북구 신현동 패류 화석산지에서 발굴된 신생대 화석들에 대해 발표하며, 이 화석들이 울산 지질 역사의 중요한 교육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발표 이후 부산대학교 윤성효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토론을 진행한다. 토론에는 부산대학교 강희철 박사, 부산시 환경정책과 지질공원 전담 하수진 주무관, 울산지구과학연구회 심미순 회장, 울산시 환경정책과 최정자 과장이 참여한다. 관심 있는 시민은 누구나 당일 현장 등록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한편, 울산시는 울산 국가지질공원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현재 후보지 신청 연구용역을 수행 중이다. 울산국가지질공원은 ‘태화강 물줄기를 따라 백악기로 떠나는 여행’을 주제로 설정했으며, 10곳의 지질명소 후보지를 선정해 놓고 있다. 지질명소 10곳은 △천전리 공룡발자국화석산지 △대곡리 발자국화석산지 △국수천 습곡 △선바위 △주전 포유암 △대왕암해안 △간월재 △작괘천 △정족산 무제치늪 △간절곶 파식대 등이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
2024-10-30 07:49:52국가유산청은 올해 지질유산 625점을 국가에 귀속해 국가관리시스템에 등재한다고 20일 밝혔다. 국가유산청은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된 화석, 암석 등 지질유산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지질유산 표본 목록화 사업'을 연차별로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등 15개 기관과 개인이 보관하던 고생대 삼엽충 화석, 중생대 나무고사리 화석, 곤충 화석, 구상반려암 등 표본 9793점 중 625점을 국가 귀속하기로 최종 확정했다. 매장유산인 지질유산은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데, 그간 관련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부 유산은 훼손, 유실, 은닉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가유산청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난 2020년부터 ‘지질유산 표본 목록화 사업’을 수행해 지금까지 총 2963점을 국가 귀속했다. 2022년에는 1507점, 지난해에는 831점이 귀속됐다 . 국가유산청 측은 "지구 환경 변천사가 기록된 과학적 자료로서 가치가 큰 지질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 조사와 가치평가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며 "관련 학회 및 연구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지질유산 보존과 관리를 강화하고 학술적·교육적 활용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8-20 12:0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