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미국의 한 간호사들이 짧은 동영상 플랫폼 '틱톡'을 통해 환자들을 조롱하는 영상을 올려 누리꾼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이중 한 간호사는 "친자확인검사를 요청할 때 역겨움을 느꼈다"는 등 강도 높은 발언을 가하기도 했다.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NBC, 폭스뉴스 등 외신들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머리대병원 미드타운에서 간호사 4명이 해당 내용을 담은 1분 길이의 짧은 영상을 틱톡에 올렸다고 보도했다. 간호사들이 촬영한 영상 주제는 ‘익스’(icks·혐오감이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감탄사) 챌린지로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할 때 어떤 상황에서 불만이 생기는가 하는 내용이 담겼다. 논란이 된 발언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한 간호사는 "내가 역겨움을 느낄 때는 환자(친모)가 아기의 무게를 물어보면서 여전히 아기의 손을 잡고 있을 때"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간호사는 "아빠가 (분만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친자확인검사를 요청할 때 역겨움을 느꼈다"고 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산모가 10점 만점에 8점만큼 아프다고 하면서도 약을 거부할 때"라고 전했다. 영상을 접한 누리꾼들 중 일부는 해당 간호사들을 해고해야 한다며 비난을 가했다. 간호사로서 발언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다. 논란이 거세지자 병원 측도 "영상 속 간호사들이 임산부에 대해 무례하고 전문가 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지적했다. 병원 측은 "(간호사들의 행동이) 환자·가족 중심 치료를 약속한 우리 병원의 정책을 대표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해당 상황을 조사하고, 영상 제작에 가담한 직원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다만 해당 간호사들에게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helpfire@fnnews.com 임우섭 기자
2022-12-12 20:20:20SBS 주말극장 ‘원더풀 마마’(극본 박현주 / 연출 윤류해) 속 배종옥의 잃어버린 아들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 안방극장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고 있다. 배종옥(윤복희 역)이 젊은 시절 김청(최은옥 역)에게 빼앗긴 후 죽었다고 믿고 있던 그녀의 아들 민수가 배종옥에게 초로기 치매 진단을 내린 후 정성을 다해 그녀의 치료를 돕던 의사 황동주(홍윤재 역)로 몰리고 있어 궁금증을 더하고 있는 것. 어제(11일) 방송된 ‘원더풀 마마’ 36회에서 복희(배종옥 분)는 오래 전 민수를 입양했다는 홍인기(김호영 분)를 어렵게 찾아가 민수의 생존여부를 물었지만 이미 은옥(김청 분)이 손을 써놓은 터. 인기에게서 민수가 공장 화재로 죽었다는 대답을 듣고 망연자실하는 모습이 그려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 배종옥 / SBS 주말극장 ‘원더풀 마마’ 36회 캡쳐 그러나 우연히 인기와 함께 있는 윤재(황동주 분)를 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복희는 윤재에게 어린 시절 화재와 민수의 백일 사진에 대해 물었고, 자신이 민수임을 부인하던 윤재도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친자확인을 하자는 범서(선우재덕 분)의 요구를 받아들여 눈길을 끈 것. 특히, 복희의 치매 판정 후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그녀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며 마치 친아들처럼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복희를 보살피던 윤재였기에 그가 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또한 복희가 아들을 찾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은옥이 이번엔 또 어떤 방해공작을 펼칠지 호기심을 모으며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이에 시청자들은 ‘배종옥씨가 드디어 아들을 찾는 건가요?, 김청씨 더 이상 방해 없길!’, ‘윤재 다정한 모습이 정말 아들 같았는데~ 윤재였으면 좋겠네요~, ‘정겨운이 아들 아니었나요? 대박 반전!’ 등의 반응을 보였다. 복희-범서의 아들 민수로 추측이 모아지고 있는 윤재의 친자확인 결과는 이번 주 토요일(17일) 밤 8시 50분에 방송되는 ‘원더풀 마마’에서 밝혀진다. /장재연기자
2013-08-16 18:02:05[파이낸셜뉴스] 아이돌 그룹 SS501 출신 김현중이 농부로 변신했다. 김현중은 최근 유튜브를 통해 2007년께 샀다가 땅값이 크게 떨어져 투자에 실패한 이천 땅에 옥수수를 심어 키우는 근황을 전했다. 지난달 29일 김현중은 자신의 유튜브 공식 채널에 ‘농사농사농사농사농사... (답이없땅)’라는 제목으로 밭을 갈고 옥수수를 심은 하루 일과를 담은 영상을 올렸다. 앞서 김현중은 5월 초 인스타그램을 통해 “어쩌다가 시작된 농촌 생활. 옥수수가 다 자라면 구독자분들께 나눠드리겠다”며 농촌에서 옥수수를 짓고 있다는 근황을 전한 바 있다. 그때부터 유튜브를 통해 농사를 준비하고 옥수수 농사를 짓는 과정을 예능 프로그램처럼 올리고 있다. 이번 영상에서 김현중은 작업 초반부터 마을 이장의 트랙터로 운전을 연습하다가 트랙터를 고장 냈다. “수리비가 3000만원 나올 것 같다”는 지인의 말에 “그러면 이 땅을 드려야죠”라고 농담했다. 트랙터를 고쳐 온 이장은 김현중에게 다시 한번 트랙터를 운전할 기회를 줬고 김현중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김현중은 “자제분들이 안 믿나 봐. 김현중이 갑자기 와 갖고 같이 농사짓고 있다고”라며 웃었다. 트랙터를 이용해 순식간에 밭 갈기 작업을 끝냈고, 이장의 도움으로 기구를 이용해 밭에 비닐 깔기 작업도 순식간에 마무리했다. 김현중은 직접 모종을 심고 허수아비까지 세운 뒤 “하루 만에 일군 결과라고 하기엔 업적이 대단하다”며 뿌듯해했다. 지난 4월 김현중은 유튜브 영상을 통해 부동산 투자를 했다가 크게 손해를 본 사연을 전한 바 있다. 그는 2007년께 새만금 간척 사업지 근처에 땅을 구입했으나 간척이 이루어지지 않아 손해를 봤다고 했다. 김현중은 “땅을 엄청 비싸게 샀는데 2016년에 지쳐서 팔았다”며 “팔 때도 사는 사람이 조사해보니까 이름 없는 묘가 세 개 있더라. 내 땅이라 내가 이장을 해야 해서 가족도 못 찾아서 내가 이장을 했다”고 했다. 그는 “이 땅을 4억원의 손해를 보고 팔았다”고 덧붙였다. 김현중은 현재 이천에 남아있는 땅에 대해 “계속 세금을 내고 있는데, 이 땅이 농사를 안 지으면 나라에 내놓거나 농사를 지어야 한다더라”며 “새만금이랑 비슷한 시기에 샀다. 그거는 진짜 살 사람이 없어서 못 팔고 있다”고 했다. 그는 “10년 넘게 가지고 있었는데 점점 땅값이 떨어지고 있다”며 “2억원 넘게 주고 샀는데 현재는 3000만원인가”라고 했다. 그는 제작진과 이 땅에 농사를 짓기로 했다. 2005년 아이돌 SS501로 데뷔한 김현중은 2009년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 등에 출연하며 한류스타가 돼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2014년부터 각종 사생활 논란을 겪었다. 2014년 전 여자친구 A씨를 폭행해 상해를 입힌 혐의로 피소됐으며, 2015년에 A씨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김현중의 아이라며 친자 소송도 제기했다. 김현중은 폭행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A씨의 아이는 친자로 확인됐다. 이밖에도 김현중은 2017년 3월 음주운전이 적발돼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2022년 2월 14살에 처음 만난 동갑내기 일반인과 결혼했고, 같은 해 10월 득남했다. rainbow@fnnews.com 김주리 기자
2024-06-04 07:54:45[파이낸셜뉴스] 검찰이 '계곡살인' 피의자 이은해씨(31)가 피해자인 남편 윤모씨(사망 당시 39세) 앞으로 자신의 친딸을 입양시킨 것과 관련해 '파양' 소송을 제기했다. 인천지검은 지난 3일 인천가정법원에 입양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검찰은 앞서 윤씨 양자로 입양된 이씨 딸에 대한 가족관계등록 사항 정리해 달라는 윤씨 유가족의 요청을 받았다. 이씨는 2011년 딸을 출산했고 2017년 3월 윤씨와 결혼했으며 1년 3개월 뒤인 2018년 6월 입양 허가 판결을 받았다. 윤씨는 이로부터 1년 뒤인 2019년 6월30일 숨졌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결과 2년 3개월의 결혼 기간 동안, 윤씨와 이은해 딸의 접점은 사실상 전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입양 신청과 허가를 위해 법원에서 만났을 뿐 평소에는 교류하지 않았다. 법조계는 이씨가 보험금·상속 등을 노리고 자신의 딸을 윤씨 양자로 입양시킨 것으로 분석한다. 윤씨가 숨지면 그의 사망보험금은 물론이고 윤씨의 유가족 재산도 이씨의 자녀가 상속받는다. 검찰이 유가족 대신 소송을 요청한 것은 법리상 유가족이 파양 소송을 청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강효원 변호사는 지난달 YTN 라디오 '양소영 변호사의 상담소'에 출연해 "양친자 관계를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해당해 입양취소는 할 수 있다"면서도 "파양청구권자가 유족이 될 수 없어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향후 필요한 입증 활동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이씨와 공범 조현수씨(30)에게 '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다. 이씨가 8년간 이른바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을 통해 윤씨를 숨지게 했다고 본 것이다. 이씨와 조씨는 2019년 6월30일 오후 8시 24분께 경기 가평군 용소계곡에서 윤씨에게 다이빙을 강요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살인·보험사기 미수 등의 혐의도 받는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2022-05-05 10:00:27[파이낸셜뉴스 홍성=김원준 기자] 충남 천수만에 새조개가 돌아왔다. 16일 충남도에 따르면 충남지역 새조개 생산량은 2003년 1156톤으로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거듭, 2010년 7톤, 2011년 1톤을 보인 뒤, 2012년부터 8년 연속 공식 통계에서 생산량이 없었다. 새조개는 생산량이 많지 않을 경우 수협을 통해 판매되지 않기 때문에 통계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 2020년 25톤이 생산되며 9년 만에 생산량 '0'을 벗어난 이후 지난해 17톤이 생산됐으며, 올해는 75톤 가량 생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새조개 생산이 다시 시작된 것은 모패 방류사업의 성과라는 게 충남도의 분석이다. 충남도는 지난 2017년 2월 새조개 모패 1만 4590패를, 2018년 6월에는 중성패 97만 패를 각각 천수만에 방류했다. 충남도 수산자원연구소는 자체 개발한 새조개 대량 인공부화 기술을 활용, 2019년 7월 1㎝.1g 안팎의 치패 30만 패를, 지난해 7월에는 50만 패를 생산해 각각 방류했다. 현재 새조개가 주로 생산되고 있는 곳은 방류 해역과 일치한다. 방류 해역에서 채취한 새조개와 충남도 수산자원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새조개 모패의 유전자 패턴도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충남도 수산자원연구소는 지난해 10월 치패 방류 해역 조사 등을 위해 잠수인력을 투입, 현장에 서식 중인 5㎝.50g 안팎의 새조개 3개체를 포획했다. 이어 포획 새조개와 도 수산자원연구소 보유 새조개 모패 간 유전자를 비교, 포획 새조개가 연구소 모패의 친자인 점을 확인했다. 충남도 수산자원연구소 관계자는 “방류 치패와 연구소 보유 모패 간 유전자 패턴이 일치하는 점으로 볼 때 치패 방류가 생산량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다”며 “어민들도 앞으로 새조개 방류 해역과 양을 늘려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충남도 수산자원연구소는 최근 천수만 5개 지점에서 생산된 새조개를 구입, 1개 지점 당 50패 씩, 총 250패를 추려 유전자 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방류 새조개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살피는 등 효과를 분석할 계획이다. 한편 전국 새조개 생산량은 △2010년 949톤 △2012년 426톤 △2014년 1910톤 △2016년 293톤 △2018년 194톤 △2020년 439톤 등으로 증감을 반복하며, 전반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새조개 1㎏ 당 소비자가는 2017년 5만 원 선, 2020년 7만 5000원 안팎, 지난해와 올해는 6만∼7만 원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충남도 수산자원연구소는 2016년 도내 새조개 모패를 활용한 인공부화 기술 개발에 착수, 같은 해 새조개 인공 산란 기술을 확보하고, 2017년 인공 성 성숙 유도 기술을 개발했으며, 2019년에는 대량 인공 산란 유도를 통해 어린 새조개 생산을 성공했다. kwj5797@fnnews.com 김원준 기자
2022-02-16 08:22:37[파이낸셜뉴스] "...(중략)...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中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을 때 중심 세력은 지방 호족(豪族)이었다. 이 호족 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벌귀족'(門閥貴族)으로 변모해갔는데, 이들은 왕실과의 혼인, 토지 독점, 관직 세습 등을 기반으로 고려 사회의 절대적인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막강한 권세를 소유한 부작용 때문이었을까.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증폭되면서 고려는 연이어 큰 '사달'을 겪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의 인주(현재 인천) 이씨 가문은 수십년 간 왕실과 가장 가까운 '외척'(外戚) 세력으로 존재했고, 급기야 이자겸 때에 이르러서는 왕권을 능가하고 위협하는 권세를 부리게 된다. 이른바 '고려판 국정 농단' 사건이었고, 자칫 왕조의 교체마저 불러올 수도 있었던 '대(大)정변'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이후 고려 정국의 향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를 계기로 귀족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화되면서,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더 나아가 고려 귀족 사회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촉발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고려 귀족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고려 중기 이후의 역사를 규정지었던 '이자겸의 난' 전말을 되돌아봤다. ■문벌귀족 사회와 인주이씨 권세 11세기 이후가 되면서 고려는 '문벌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문벌귀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고 왕실의 외척이 된 자들을 말하는 것인데, 고려 성종(成宗, 제6대 왕) 때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했다. 주로 지방 호족이나 개국공신의 후손들이 이에 속했다. 문벌귀족을 지탱한 것은 경제력과 권력 세습이었다. 우선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경제력을 확대했는데, 대표적으로 '과전'(科田)과 '공음전'(功蔭田)이 있었다. 과전은 관직·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눠 차등있게 분급한 것이었고, 공음전은 5품 이상 고위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로서 자손에게 세습이 가능한 영업전(永業田)이었다. 또한 음서(蔭敍)와 과거(科擧)를 통해 권력도 세습했다. 특히, 음서는 신라 시대의 사례를 따라 문벌귀족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후손을 관리로 선발했던 제도다. 음서로 처음 임용되는 관직은 이속에서부터 정8품까지 이르렀고, 형식상 승진 제한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통한 등용자처럼 5품 이상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초기에는 직계 1촌인 친자에게만 특권을 부여했지만, 인종 대에 와서는 양자, 친손자, 외손자, 조카까지 특권이 확대됐다. 더 나아가 이들은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외척 세력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신라의 성골, 진골처럼 각종 권력을 장악하며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 대표적인 문벌귀족으로는 인주 이씨(이자겸), 안산 김씨(김은부), 경주 김씨(김부식), 해주 최씨(최충), 청주 이씨(이가도), 광양 김씨(김양감), 수주 최씨(최사위), 이천 서씨(서희), 남평 문씨(문공원), 파평 윤씨(윤관), 평산 박씨(박인량), 경주 최씨(최승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려 초기 이래 가장 세력이 강했던 문벌귀족은 인주 이씨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문종(文宗, 제11대 왕)부터 인종(仁宗, 제17대 왕)까지 무려 80여 년 간을 외척 세력으로 있으면서 강력한 권세를 떨쳤는데, 우선 이자겸의 증조할아버지인 이허겸이 그의 두 딸을 현종(顯宗, 제8대 왕)의 왕비로 만들면서 인주 이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물꼬를 텄다. 이후 손자인 이자연 때에 이르러 인주 이씨 가문은 일약 '권문세가'(權門勢家)로 부상했다. 이자연은 왕실 외척에 더해 22세에 과거 장원급제라는 개인적 역량까지 더해진 화려한 인물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의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여보냈는데, 세 딸 중 하나인 인예왕후의 혈통은 문종 이후 선종, 헌종, 인종 등까지 이어지게 된다. 다만, 인주 이씨 가문이 위기를 맞을 때도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병약했던 헌종 때에 이자겸의 사촌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인 원신궁주와 선종 사이에서 낳은 한산후 왕균을 옹립하려다 왕의 숙부인 계림공(숙종)에 의해 진압된 것이다. 이후 계림공은 헌종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숙종으로 즉위했고, 원신궁주 및 한산후 등을 유배보내거나 외척 세력들을 멀리 하면서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하지만, 이 같은 모습은 오래가지 못했다. 숙종 이후 왕위에 오른 예종은 한편으로는 신진관료들을 등용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등 부분적으로 왕권 강화 노력은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금 인주 이씨 가문과 결연(結緣)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예종의 왕비(문경황후)로 만드는데 성공하며 예전과 같은 권세를 회복했다. 그런데 예종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차기 대권을 놓고 이자겸 세력과 예종이 등용한 한안인 등 신진관료들 간의 대립이 크게 발생했다. 신진관료들은 외척 세력의 '발호'(跋扈)를 없애야 한다며 나이가 어린 태자 대신 예종의 동생 대방공(帶方公) 왕보에게 양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자겸은 외손인 태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예종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이자겸의 주장이 받아 들여져 태자 왕해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인종으로 즉위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이자겸은 그 공을 인정받아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이라는 호를 받았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守太師中書令邵城侯)라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자겸의 국정농단 1122년 인종의 즉위 직후 신진관료들의 우려대로 어린 왕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이자겸 세력이 실권을 잡고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우선 이자겸 등은 신진관료 등 반대파 숙청에 나섰다. 그는 예종의 동생이자 인종의 작은 아버지인 대방공과 대원공이 문하시랑 한안인 등 신진관료들과 모의해 왕위를 '찬탈'(簒奪)하려 했다고 허위 주장을 펼쳤다. 이자겸 세력은 이참에 예종 때부터 문벌귀족에 대응해 떠오르는 세력인 신진관료들의 씨를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방공 및 한안인 등 많은 신진관료들이 숙청을 당했다. 이어 무인 출신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지추밀원사 최홍재 등을 제거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을 제수받았으며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팔천호 식실봉이천호'(亮節翼命功臣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라는 매우 긴 이름의 관직에 책봉됐다. 이 가운데 '판이병부사'가 핵심이었는데, 이는 문신 관료 및 무신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나아가 이자겸은 주변 자제들과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예종에 이어 인종에게도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왕비로 들이게 했다. 막대한 경제적 부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왕으로부터 일정한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고, 많은 저택과 토지 등을 점유했다.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넘쳐나 무수한 뇌물이 이자겸의 집에 쌓였다. 이쯤 되자 이자겸은 높아진 권세만큼 교만도 하늘을 찔렀다. 자신의 집 이름에 왕실에서나 쓸 수 있는 '궁'(宮)이라는 칭호를 붙였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며 기념일로 정했다. 교만의 절정은 이자겸이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는 이자겸이 신하를 송나라로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칠 때 사용한 용어인데, 자신이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스스로를 '왕'이라고 여긴 것이다. 심지어 인종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정식으로 지군국사에 책봉해 줄 것을 요청했고, 책봉식 시간까지 마음대로 정했다. ■제거 시도, 실패 인종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일찍이 이자겸 국정농단의 심각성과 그의 교만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권세에 눌려 상황을 관망하다가 지군국사 책봉 요구에서 결국 참았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1126년, 18세가 된 인종은 은밀히 측근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인종은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제거를 바라는 본인의 의중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이에 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은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과 모의해 이자겸 제거와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인종에게 보고했다. 신중한 인종은 김찬을 평장사 이수와 전평장사 김인존에게 보내 해당 계획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게 했다. 그런데 이수와 김인존은 "그(이자겸)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해 경솔히 움직일 수 없으니, 시기를 기다리도록 해야 한다"라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인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측근들에게 이자겸 제거 계획을 실행하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인종의 측근들은 우선 초저녁에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해 이자겸의 최측근이었던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인 내시 척순 등을 척살(刺殺)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신속하게 전달됐다. 이자겸은 척준경 및 백관 등을 급히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 때 척준경이 상황이 긴급하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 세번째 문인 신봉문(神鳳門) 쪽으로 쳐들어갔다. 척준경은 우리나라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타공인 맹장 중의 맹장이었다. 예상보다 재빠른 척준경의 반격에 놀란 인종의 측근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궁궐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척준경은 전투에 쓰이는 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기고(軍器庫)도 습격한 후 궁궐 남쪽 벽의 성문인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인종은 직접 신봉문으로 와서 척준경 등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혈족들이 살해당한 것을 확인한 척준경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왕의 코앞까지 화살을 쏘게 했다. 그리고 이자겸은 합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녹사 소억 등을 인종에게 보내 "난을 일으킨 자를 내주지 않으면 궁궐이 위험해 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 사건의 배후에 인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종은 측근들을 내놓으라는 이자겸의 요구를 묵살했고, 이에 이자겸은 척준경 등에게 궁궐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공격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척준경의 군사들에 의해 궁궐 동화문(東華門)에 큰 불이 났고, 짧은 시간에 번져 궁궐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인종은 소수의 신하들만을 대동한 채 급히 다른 곳으로 피했다. 궁궐을 완전히 장악한 이자겸과 척준경은 거사를 주도한 상장군 최탁, 오탁 등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울러 김찬과 지녹연 등은 멀리 유배를 보냈다. 거사 실패 직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자겸을 제거하고 왕권을 드높이려 했던 인종은 되레 굴욕적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고려 왕조의 멸망마저 불러올 위기에 처했다. 인종은 조서를 내려 이자겸에게 양위할 것을 청했고, 이자겸도 처음에는 이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재종형제인 이수가 "주상께서 비록 조서를 내리더라도 이공(이자겸)이 어찌 감히 그 같은 일을 하겠나"라고 고함을 쳤다. 이 순간 이자겸은 마음을 돌리고 "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니 깊이 양찰(諒察)하소서"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자겸 입장에서는 주변에 보는 눈들이 많으니 선뜻 왕위를 받기보단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인종은 한동안 이자겸에게 완전히 짓눌려 살게 됐다.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 자신의 집 서원에 연금했고, 국정을 전혀 살피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이자겸이 모든 국정을 통할(統轄)했다. 심지어 이자겸은 이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두 차례에 걸쳐 왕을 독살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자겸의 딸인 왕비가 기지(機智)를 발휘해 인종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뜻밖의 간극 인종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강단(剛斷)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자겸을 제거하고 왕정(王政)을 복고(復古)할 의지를 쉽사리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인종은 다시금 최측근이었던 내의군기소감 최사전 등을 은밀히 불러 관련 계획을 논의했다. 논의 결과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의 틈을 노려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초 이자겸과 척준경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자겸이 척준경을 도외시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자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척준경에게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에 따라 이자겸을 향한 척준경의 불만은 날로 높아져 갔다. 척준경의 입장에서는 이자겸을 돕다가 자신의 동생과 아들까지 잃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은 최사전을 시켜 은밀히 척준경에게 교서(敎書)를 전달했다. 교서에는 "모두가 과인의 죄이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보필해 후환이 없도록 하라"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다시 말해 인종은 척준경에게 동생과 아들을 잃게 만들었던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이자겸을 제거하는 큰 공을 세울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척준경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지점에서 척준경의 마음이 확실하게 돌이키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의 종과 척준경의 종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지언의 종이 "너의 주인(척준경)이 저위(군주가 조회하는 곳)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극언을 했다. 자신의 종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척준경은 대노했고, 결국 이자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자겸은 오랜 시간 자신을 든든하게 보필해 준 맹장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졌고, 즉각 동생을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것을 직감한 인종은 김부식의 형인 지추밀원사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보내 이자겸 제거를 독촉했다. 이 즈음 이자겸의 야심은 노골화되고 있었다. 인종이 연금에서 벗어나 복구된 궁궐로 돌아가자 이자겸은 다방면으로 인종을 감시했고, 자신의 사병인 숭덕부군(崇德府軍)을 무장시켜 여차하면 궁궐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더욱이 앞서 언급한 대로 '십팔자도참설'을 맹신한 나머지 인종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자겸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왕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던 척준경은 이 같은 이자겸의 반역적인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마침내 척준경은 왕의 뜻에 따를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1126년 5월 20일에 이자겸의 숭덕부군이 궁궐을 침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인종은 손수 "짐이 해를 당해 왕조가 다른 성씨로 바뀐다면 짐의 죄만이 아니라 보필하는 대신도 수치스러운 일이니 대책을 잘 강구하라"라는 밀지를 써서 척준경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 본 척준경은 상황의 급박함을 인지하고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소수의 장교 및 관노 등을 이끌고 궁궐로 진격했다. 순검도령 정유황도 일단의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척준경 등의 군대가 궁궐로 진입하자 환관 조의가 이들을 안내했고, 궁궐 전각인 천복전(天福殿) 문에서 척준경을 기다리고 있던 인종을 호위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자겸의 군사들이 인종에게 활을 쏘려고 했는데, 이때 척준경이 크게 호통을 치면서 무위(無爲)에 그치고 말았다. 역사상 최고의 맹장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척준경의 기개(氣槪)는 실로 거칠 것이 없었다. 인종을 무사히 호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척준경은 승선 강후현에게 이자겸과 그의 처자식들을 체포하고 이자겸 추종세력을 척살하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이자겸 일가는 팔관보(八關寶)에 갇혔고, 이자겸을 따르던 장군 강호와 고진수 등은 죽임을 당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던 이자겸의 난이 마침내 진압되자 인종은 광화문(廣化門)으로 나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화가 궁궐 안에서 일어났으나 충신·의사의 의거로 그 해를 제거했다"고 선언했다. ■왕정 복고, 모순 심화 정변 다음날 이자겸과 그의 처자식들, 심복 및 노비들이 모두 유배를 갔다. 그리고 인종의 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은 폐비가 됐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간 후 1126년 12월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치고는 매우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 이자겸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척준경, 최사전, 이수 등은 공신호와 높은 관작을 제수받았다. 특히 척준경은 일등 공신으로서 한동안 실권을 거머쥐었는데, 한 때 종1품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다가 스스로 그것보다 다소 낮은 정2품 문하시랑(門下侍郞)직을 받았다. 그러나 척준경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척준경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교만해졌고, 지나치게 발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1127년 3월 좌정언 정지상 등이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라면서 척준경을 탄핵했고, 인종은 그를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보냈다. 척준경은 그 이듬해에 고향인 곡주(谷州)로 옮겨졌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등창으로 숨졌다. 직후에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세력 및 그 자손들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해 담당 관청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렇게 이자겸과 척준경 등이 몰락하면서 고려는 형식적으로 나마 왕정을 복고했다. 다만, 왕권이 강화되거나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일소(一掃)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인주 이씨를 대체하는 다양한 문벌귀족 및 신흥 세력이 등장했고, 그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됐다. 대표적인 문벌귀족 세력으로는 경주 김씨(김부식), 경원 이씨(이수), 정안 임씨(임원애) 등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척준경 탄핵을 주도한 정지상, 그리고 승려 묘청, 점성가 백수한 등을 중심으로 한 서경 출신 신진관료들이 급부상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김부식 등의 개경 귀족과 정지상 등의 서경 귀족 간에 서경천도 및 금(金)나라 정벌 등을 놓고 정면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귀족들 사이에서의 연이은 갈등과 분열로 인해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기강이 문란해지며 크게 흔들렸다. 민심 이반도 보다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울러 이 와중에도 귀족들의 특권 독점과 '문치'(文治)주의가 성행했는데, 이는 추후 문신 귀족들에 대항한 무신들의 거사인 '무신정변'으로 이어져 고려 문벌귀족 사회는 끝내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8-13 15:20:22[파이낸셜뉴스] 5살 의붓아들을 동생들이 보는 앞에서 목검으로 상습 폭행해 숨지게 한 아버지 이모씨(28)가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선고한 징역 22년은 너무 가벼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3년을 가중했다. 5살 아들을 상습폭행해 숨지게 한 이 사건이 학대치사가 아닌 살인죄로 기소돼 중형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서울남부지검이 아동학대치사죄로 기소한 16개월 여아 사망에서도 살인죄 추가기소를 검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5살 의붓아들 상습폭행 사망··· '미필적고의 인정' 19일 법원에 따르면 18일 서울고법 형사7부(성수제 부장판사)가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씨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200시간의 아동학대치료 프로그램 수강과 10년간 아동 관련 기관 취업 제한도 함께 명령했다. 재판부는 “이씨의 행위로 피해자는 신체 모든 부위에 문제가 생겨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복부의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며 “피해자는 사망 당시 겨우 5살로서 신체 방어 능력이 떨어지고 자기 의사 표현이 부족한 아동이기에 성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도, 자신을 돌봐야 할 이씨의 행위로 극심한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겪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씨는 지난해 9월 24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25일 오후 10시까지 인천시 미추홀구 자택에서 사망 당시 5살이던 의붓아들을 목검으로 폭행하고 손발을 활처럼 뒤로 휘게 묶은 채로 23시간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이씨 친모 A씨(25)는 폭행을 말리지 않고 목검을 넘겨주고 2살과 3살인 동생들에게 폭행장면을 보도록 했다. 이 동생들 역시 A씨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었다. 사건을 수사한 인천지방경찰청 여청수사계와 인천지검은 이씨에게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은 물론 상습특수상해, 아동학대 중상해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1심 법원과 항소심은 이씨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해 살인죄를 유죄로 판단했다. ■16개월 입양아 정인양 "살인 아냐" 이 사건은 최근 재판에 넘겨진 고 정인양(입양 후 안율하·사망 당시 16개월) 사건과 맞물려 시사하는 점이 크다. 서울남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이정우 부장검사)가 지난 8일 양모인 장모씨를 아동학대치사죄로 기소하고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은 것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본지 12월 9일. ‘학대 사망 '16개월 입양아' 양부모 기소··· "췌장 끊길만큼 맞았다" (종합)’ 참조> 기소 당시 공개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정인양 사인은 췌장 절단으로 인한 복강막 출혈이었다. 국과수는 췌장 절단 외에도 복수의 장기 손상과 광범위한 출혈이 있었다는 결과를 내놨다. 발생 시기가 다른 골절상 7곳과 다수 피하출혈 흔적도 함께 발견됐다. 갓 돌이 지난 어린 아이에게 지속적인 상해를 입혀왔음을 인정하기 충분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검찰은 살인죄 추가기소가 없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시민들은 최근까지 검찰청 앞 릴레이 1인시위를 진행하고 근조화환을 보내는 등 검찰 처분에 항의하고 있다. 양부모 신상공개와 살인죄 적용을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18일 20만명의 동의를 받아 답변을 기다리는 상태다. 특히 친자가 아닌 어린 아이에게 장기간 폭력과 학대가 지속됐다는 점이 5살 의붓아들 살해사건과 유사하다. 다른 형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상습적인 학대가 이뤄진 점, 법원이 인정한 것과 같이 신체방어능력과 의사표현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에게 이 같은 범죄행위를 한 점, 피해가 신체 모든 부위에서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다는 점도 같다. 나이는 생후 17개월로 훨씬 더 어렸다.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비판엔 상당한 이유가 있다. ■갓 돌 지난 아이에게 비정한 학대 정인양은 생후 7개월 때인 올 1월 장씨와 안모씨 부부에게 입양됐다. 이들 부부에겐 4살짜리 친딸이 있는 상태였다. 정인양은 지난 10월 13일 서울 양천구 목동 한 병원에 실려왔다. 온 몸에 멍이 들어 있었고 복부와 뇌에 큰 상처가 발견됐다. 장씨는 “아이가 소파에서 매트가 깔려 있는 바닥에 떨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병원은 아동학대를 의심하고 신고를 접수했다. 경찰과 검찰이 수사에 나선 뒤 밝혀진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양모 장씨는 입양하고 겨우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정인양이 숨진 10월까지 지속적인 학대와 폭력을 행사했다. 초기엔 정인양을 장기간 집에 혼자 두고 가족이 외식을 하러 나갈 때 지하주차장에 방치하는 등으로 학대가 시작됐다. 어린이집 관계자는 "사나흘 간격으로 얼굴과 배, 허벅지에서 멍자국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어린이집에선 결국 5월 25일 강서아동보호전문기관에 학대의심신고를 접수했다. 이 과정에서 정인양 쇄골에 실금이 생긴 것이 확인됐다. 돌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쇄골 손상은 아동학대의 대표적 징후로 여겨지지만 경찰은 아동학대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정인양이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3차례 신고에도 소극적 처분만, 사망 뒤까지? 6월 29일 두 번째 의심신고가 접수됐다. 양부모 지인이 정인양 혼자 차 안에 30분 이상 있는 경우가 많다며 신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서울 양천경찰서와 강서아동보호전문기관은 양부모 면담 후 이번에도 아동학대 혐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3번째 신고는 장씨가 성형수술을 받은 뒤 이뤄졌다. 당시 2달여 만에 어린이집에 등원한 정인양을 보고 어린이집 관계자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말라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입양당시 생후 7개월 때 몸무게가 8.9kg이었지만 생후 16개월 때인 9월 23일엔 8.5kg에 불과했다. 8.5kg은 생후 5~6개월 여아 평균 몸무게다. 소아과 원장 신고로 다시 조사에 나선 경찰은 이번에도 아동학대 혐의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경찰은 장씨는 성형수술을 받은 직후라 조사를 하지 않았고 “아이가 밥을 잘 안 먹는다”는 안씨 말만 믿고 아동학대 혐의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인양은 이후 20여일 만에 숨졌다. 한편 장씨는 정인양이 위독한 상황이던 13일 아이를 집에 두고 근처 시장을 방문하고 병원으로 갈 때도 119가 아닌 택시를 불러 이동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일상생활에서 겪은 불합리한 관행이나 잘못된 문화·제도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김성호 기자 e메일로 받고 있습니다. 제보된 내용에 대해서는 실태와 문제점, 해법 등 충실한 취재를 거쳐 보도하겠습니다. 많은 제보와 격려를 바랍니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2020-12-19 15:05:45[파이낸셜뉴스] 아버지가 한국전쟁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큰아버지의 소생으로 출생신고된 딸이 67년만에 재판을 통해 자식으로 인정받아 국가유공자 유족이 됐다. 3일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최근 전주지법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남편과 자신 사이에 태어난 딸에 대해 친생확인을 청구한 소송에 대해 이를 인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보훈의 달’인 6월, 전주시에 사는 이영순 할머니(가명.68)에게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의미가 크다. 전쟁중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식으로 부녀관계를 인정받고, 이에 따라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유족연금까지 받게 됐기 때문이다. 이씨의 아버지는 이씨가 태어나기 한달 전인 1952년 8월 입대, 다음해 경기 연천지구 전투에서 사망했다. 당시 이씨의 부모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여서 이씨는 만 18세가 될 때까지 무적으로 지내다가 큰아버지의 딸로 출생신고를 하게 됐다.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던 모녀는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여러해 동안 노력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2013년 전주시청에서 아버지의 묘적대장 기록을 찾았고, 이를 단서로 전사자 화장보고서도 확인했으나 국방부는 이씨와 아버지 사이에 친자를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근 이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워졌고, 어머니(87세)마저 고령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병원비까지 마련해야 했다. 국가로부터의 지원이 더욱 절실해진 이씨는 법률구조공단을 찾아 법률구조를 요청했다. 공단측은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법원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전주시 교동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씨 아버지의 분묘를 개장해 DNA 검사를 진행했다. 화장된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DNA가 검출되지 않지만, 전쟁통에 화장된 경우에는 고온에 노출되지 않은 유골이 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화장된 유골에서 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결국 공단측은 다른 증거를 제출키로 하고 △육군본부가 부녀관계를 인정해 이씨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한 사실 △어머니와 이씨 사이에 친생관계가 있다는 확정 판결 △어머니가 아버지의 전사 후 미혼으로 살아온 사실 등을 재판부에 적극 소명했다. 재판부는 “이씨와 해당 전사자 사이에 친생자관계가 존재함이 명백하다며”며 이씨 측 청구를 모두 인용했다. 소송을 대리한 공단측 박왕규 변호사는 “한국전쟁 당시 불완전한 행정시스템으로 인해 국가를 위해 희생된 전사자의 가족들이 유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다”며 ”친생관계를 증명하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는 만큼 언제든 공단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고 전했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2020-06-03 10:31:38[제주=좌승훈 기자] 전 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고유정(37)은 10일 선고 전 마지막 재판에서 관련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정봉기 부장판사)는 앞선 재판에서 검찰이 고유정에 대해 사형을 구형한 가운데 이날 오후 2시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에서 결심공판을 진행했다. 고유정은 이날 최후진술에서 경찰과 검찰, 재판부를 비롯해 유족과 피해자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전 남편 살해는 우발적이었으며, 의붓아들은 사고사라는 주장을 다시 했다. 고유정은 "정말 믿을 곳은 재판부 밖에 없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거라 믿고 버티고 있다"며 재판부에 현명한 판단을 요청했다. 변호인도 최후변론을 통해 "고씨가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검찰의 공소장은 우연적 요소를 꿰맞춘 상상 속에서나 나오는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고씨의 공소 사실은 고의적 범행이 아니라는 여러 상황이 존재한다“며 ”재판부가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옳은 판 앞서 재판부는 변호인의 최후 변론과 피고인의 최후 진술에 앞서 “몇가지 확인할 게 있다”며 의붓아들 상해 혐의와 관련해 수면제 처방·구입 과정과 유산 후 현 남편과 싸우던 중 뜬금없이 잠버릇이 심하다고 언급한 점, 피고인의 아들이 아닌 현 남편의 아들인 피해자를 청주 집으로 먼저 오도록 설득한 이유, 의붓아들 사망 후 현장을 치운 점 등 범행의도와의 연관성여부를 캐물었다. 고유정은 이에 대해 “기억이 제대로 안난다", "화제 전환을 하려고 했다"거나 ”판사님과 머리와 뇌를 바꿔서 보여주고 싶은데…"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또 “현 남편이 친자만을 예뻐해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해계획을 세우고 피고인 자식은 청주 집에 늦게 올라오도록 한 게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전혀 아니다"고 단호하게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고유정은 숨진 아들이 꿈에 나타나 내 치마에 매달려 '엄마'라고 부른다고도 말했다. 고유정은 “내가 죽였다면 아들이 예쁜 모습으로 내 꿈에 나타나겠느냐”고 반문했다. 고유정은 그동안 11차례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전 남편 살해 혐의는 인정했지만 의붓아들 살해 혐의는 부인해 왔다. 전 남편 살해는 계획된 범죄가 아닌 성폭행을 피하려다 발생한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해 왔다. 고유정은 또 정당방위를 주장함으로써 형량을 낮추려는 의도인 듯 그동안 재판과정에서 단 한 번도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법원에 반성문도 제출하지 않았다. 고유정은 지난해 5월25일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무인펜션에서 전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버린 혐의(살인·사체손괴·은닉)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지난해 3월2일 오전 4~6시 사이 현 남편과 자고 있는 의붓아들의 머리 뒷부분을 강하게 눌러 살해한 혐의로 추가 기소됐다. 이에 대해 검찰은 앞선 재판에서 “극단적인 인명경시 살인”이라며 고유정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아들 앞에서 아빠를, 아빠 앞에서 아들을 참살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두 차례나 저질렀다”며 “사건 범행 동기와 수단, 방법, 범행 잔혹성과 결과 종합했을 때, 두 사건 모두 피고인의 극단적 인명경시 태도에 기인한 계획적 살인임이 명백함에도, 피고인은 반성과 사죄는 없이 오직 거짓 변명과 회피로만 일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고유정의 1심 선고공판은 오는 20일 오후 2시 제주지법 201호 법정에서 열린다. jpen21@fnnews.com 좌승훈 기자
2020-02-10 18:54:23어려운 가정형편에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54년 전 부모와 헤어진 딸이 경찰의 도움으로 부모와 극적 상봉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지난 13일 경찰서에서 A씨(57)가 어머니(78) 등과 상봉했다고 17일 밝혔다.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A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1965년 전남 함평의 할아버지 집으로 내려가게 됐다. 하지만 이후 할아버지가 A씨를 데리고 서울로 가던 중 A씨를 잃어버렸다. 그해 11월 홀로 발견된 A씨는 영아원으로 옮겨져 1967년 10월 미국으로 입양됐다.지난해 9월 서대문경찰서를 방문한 A씨는 "오래전 미국으로 입양됐다"며 "헤어진 친부모를 찾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은 A씨가 최초 입양된 서울 은평구 소재 영아원을 파악하고 수사를 통해 A씨가 1967년 영아원에 입소한 이후 이름이 바뀌어 미국에 입양된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신고자 A씨의 유전자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고, 중앙입양원 실종 아동 전문기관이 보유한 유전자와 대조해달라고 의뢰했다. 다행히 A씨의 친모가 2014년 7월 A씨에 대한 실종 신고를 서울 구로경찰서에 하면서 A씨 친모의 유전자가 데이터베이스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국과수는 대조 결과 A씨와 친모 유전자가 흡사하나 친자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 국과수는 유전자가 99% 이상 일치해야 친자 관계에 해당한다고 회신한다. 경찰은 다시 A씨 친부의 유전자를 새롭게 채취해 A씨 유전자와 대조해달라고 의뢰했고 친부와 A씨의 유전자가 99.99% 일치한다는 회신을 받았다. 미국에 있던 A씨는 통보를 받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감격해했다. onsunn@fnnews.com 오은선 기자
2019-03-17 18:0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