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경 학교법인 청강학원 초대 이사장이 5일 오전, 향년 92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타계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는 초대 정희경 이사장을 기리기 위해 지난 7일 오전 9시 30분 교내 청현광장에서 영결식을 진행했다. 현재(玄哉) 정희경 선생은 1932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캔자스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오하이오 노던대학교에서 교육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으며, 이후 이화여자고등학교와 현대고등학교, 계원예술고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며 교육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72년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 재직 중에는 남북적십자회담에 유일한 여성 대표로 참여해 평양을 방문,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 리더십의 상징, 모델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시 카운슬러협회 회장과 해외동포 모국방문후원회 이사로 역임하고, 1984년에는 한국여성의전화 초대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교육개혁을 위한 정책에 힘쓰는 등 한국 정치사의 초기 여성 정치가로 활약했다. 같은 해 배우자인 청강(靑江) 이연호 선생이 설립한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국내 최초의 문화산업 특성화 대학을 이끌었다. 현재(玄哉) 정희경 선생은 YWCA 이사장과 일가재단 이사장 등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실천해왔다. 역동적인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다한 선구자적 교육자이자 사회의 지도자였다. 선생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선봉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행동했으며, 검소함과 나눔을 실천하고 여성 특유의 따뜻한 리더십으로 교육 공동체의 화합을 이끌었던 한국 여성 리더십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024-10-08 16:12:57강원식 초대 국기원장이 3일 오전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85세. 이날 국기원은 "강원식 전 원장을 기리기 위해 5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국기원 중앙수련장에서 국기원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강원식 전 원장은 태권도 현대사의 증인으로 1978년 태권도 관(館) 통합에 일조했고, 1992년 태권도한마당(현 세계태권도한마당) 창설을 주도하는 등 태권도 발전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했다. 1987년엔 태권도학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대한태권도협회 전무이사, 아시아태권도연맹 실행위원, 태권도 지도자 연수원 부원장, 세계태권도연맹 기술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10년 5월엔 특수법인으로 전환된 국기원의 초대 원장을 맡아 재도약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국기원은 강원식 전 원장을 기리기 위해 추서 10단을 수여할 예정이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은 전갑길 국기원 이사장,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양진방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김중헌 태권도진흥재단 이사장이 공동으로 맡았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2024-10-03 19:14:54[파이낸셜뉴스] 프랑스 영화계의 대표 배우이자 한국에서도 ‘세기의 미남’으로 유명했던 배우 알랭 들롱( 사진)이 향년 88세로 자택에서 타계했다. AFP통신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들롱의 가족들은 18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들롱이 “프랑스 두시의 자택에서 세 자녀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그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요양중이라고 알려졌다. 그의 아들 앙토니는 2022년 프랑스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들롱의 건강이 더 나빠질 경우 안락사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들롱은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에서 신분 상승의 욕구에 사로잡힌 가난한 청년 역할로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배우다. 1957년 영화계에 발을 들인 후 약 50년 동안 평단과 대중의 환호 속에 약 9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이 중 약 80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는 세기의 미남이란 별명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태양은 가득히 외 대표작으로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년)’, ‘태양은 외로워(1962년)’, ‘볼사리노(1970년)’, ‘조로(1975년)’ 등이 있다. 들롱은 1990년대 들어 영화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으나 연예인 칼럼 등으로 존재를 알렸고, 요양을 시작한 이후에는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4-08-18 16:03:43[파이낸셜뉴스] 냉전 당시 세계 질서를 재편하면서 미국 외교가의 전설로 불린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향년 100세로 타계했다. CNN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키신저가 창립한 미 정치 컨설팅업체 키신저 어소시어츠는 11월 29일(이하 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존경받은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 키신저가 11월 29일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인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 출생, 미국 이주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1938년에 나치 독일을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키신저는 194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미군에 입대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미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키신저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친 뒤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정부 업무에도 협력했다. 그는 1969년에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키신저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외교관을 내세웠다. 그는 같은 공산 진영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점차 벌어지자 이를 이용, 공산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손잡아 소련을 고립시키려 했다. 1971년 7월 극비리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났고 이듬해 닉슨의 중국 방문을 이끌어냈다. 그는 동시에 소련과 데탕트(긴장완화)를 추진했으며 1969년부터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 협상을 주도하여 1972년 협정을 맺었다. 소련과 데탕트 추진·베트남전 종전 협상 주도 키신저는 1973년 국무장관에 올랐고 다음해 출범한 제너럴 포드 정부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그는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미국을 끌어내기 위해 북베트남과 종전 협상을 주도했으며 1973년에 베트남 정치가 레 둑 토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키신저는 같은 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도쿄 납치 사건 당시 그의 석방을 중재하기도 했다. 그는 1975년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4자 회담을 개최를 제안했고 이후 꾸준히 한국을 방문해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들과 만났다. 키신저는 1977년 지미 카터 정부 출범 이후 국무장관에서 물러났지만 1982년 키신저 어소시어츠를 설립하고 왕성한 저술 및 연구, 강연활동을 벌였다. 그는 2016년 대선 후보였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 외교 정책을 조언했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는 트럼프 정부의 정책을 칭찬했다. 키신저는 2018년에 이어 올해 7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키신저는 지난 5월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해 3차 대전이 5~10년 안에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양국 갈등이야말로 "1차 대전 직전과 비슷하다"라며 양국이 특히 대만 문제에서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미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애도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타계가 알려지면서 애도가 줄을 잇고 있다. 생전에 고인과 가까웠던 정치인들은 물론 이른바 '핑퐁 외교'를 통해 '죽의 장막'을 열었던 당사자기에 중국에서도 그를 기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외교 문제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 하나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그는 "나나치 치하에서 탈출해 미군에서 나치와 싸웠던 한 사람(키신저)을 오랫동안 존경해 왔다"면서 "난민 출신의 그가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것은 미국의 위대함 못지않게 그의 위대함을 말해준다"고 강조했다. 중국 관영 CCTV는 "키신저 전 장관은 중미관계 발전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1971년 당시 닉슨 대통령의 특사 겸 국가 안보 보좌관 자격으로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키신저는 중미 관계의 정상화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인들의 라오펑요우(老朋友·오랜친구)'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었다"고 전했다. 셰펑 주미 중국 대사는 X에 "키신저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충격과 슬픔을 느꼈다"고 썼다. 이어 "역사는 그가 어떻게 미중관계에 기여했는지 기억할 것이며 그는 가장 소중한 오랜 친구로 중국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미중 수교 정상화를 포함해 아시아 지역 평화와 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3-11-30 12:34:32[파이낸셜뉴스] 과거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에 데탕트(긴장완화)를 이끌었던 미국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미 코네티컷주 자택에서 향년 100세로 타계했다. 키신저는 미 외교계의 거목으로 평가 받은 인물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세계 최강 미국의 외교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간 정상회담을 추진해 이끄는 등 미·중 수교의 토대를 닦았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3-11-30 11:22:39【파이낸셜뉴스 대구=김장욱 기자】 한평생 지역사회 봉사와 유아교육계 발전을 위해 힘써온 박병희(여·85) 박사가 7월 30일 타계했다. 박 박사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만난 신일희 계명대 총장과 결혼해 슬하에 1녀 2남을 두고, 신 총장과 함께 지역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며 지역의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 대구에서 태어난 박병희 박사는 신명여고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64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 석사 학위, 1986년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유아교육학 석사 학위를 수득했다. 1993년 메사추세츠대에서 유아교육학 박사 학위를 수득한 후 1972년 이화여자대에서 강의를 시작해 1974년부터 2004년 정년퇴임까지 계명문화대 유아교육과에 봉직하며 후학 양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들의 유아교육 연수, 유아들의 창의성 개발 교육방법 전파, 대구·경북 유아교육 분야 교수, 교사들의 학술 활동과 교육 연수 지원 등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또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많은 봉사활동을 펼쳐 대한적십자사로부터 금장, 은장, 명예장 등을 수훈 받았으며, 신명총동창회 장학회를 창립해 이사장으로 봉직하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특히 영남 지역 첫 여성 장로로서 남다른 섬김의 자세를 보이며 유아교육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박 박사의 빈소는 계명대 동산병원 백합관 1호에 마련돼 8월 2일 오전 8시 발인예배 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복리 선영에 안치될 예정이다. 한편 계명문화대는 2020년 유아교육관을 박 박사의 호를 따 희전관(喜田館)으로 명명했다. 지난해 개교 60주년을 맞아 희전관 4층에 희전실을 마련하고, 그동안의 활동 사진과 교육 자료 등을 전시해 학생들이 팀 활동 및 개별 학습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gimju@fnnews.com 김장욱 기자
2023-07-31 15:12:45[파이낸셜뉴스] '영원한 건설인' 이지송 한국토지주택공사(LH) 초대 사장이 지난 13일 타계했다. 이 전 사장은 지난 1940년 7월 충남 보령군 주포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전중, 경동고를 거쳐 한양대에서 토목공학 학사, 석사, 박사를 마쳤다. 현대건설 부사장, 대한토목학회 부회장,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경복대학 총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09년 10월 초대 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에 취임해 '사명만 빼고 다 바꾸자'는 신념으로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간 통합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13년 5월 퇴임 후에는 모교인 한양대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와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17일이다.
2023-04-14 10:58:30【베이징=정지우 특파원】 11월 30일 타계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개혁·개방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지도자로 평가된다. 자신을 발탁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였다면 그는 충실한 이행을 통해 중국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뒤 상하이교통대학교 시절 공산당에 입당했다. 졸업 후 전기기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선진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그는 이러한 이력 덕분에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와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비서장, 전자공업부 부부장·부장 등 여러 기술연구기관을 이끌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 전 주석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서한에서 “중국의 전자공업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인정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상하이시 시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이 시절 톈안먼 사태가 터졌고 덩샤오핑의 눈에 들면서 1989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1993년 중국 국가주석 자리에 각각 올랐다. 총서기를 맡은 때부터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내놓은 2004년 9월까지 15년 동안 최고 권력을 움켜쥔 셈이다. 그는 중국 현지 국가주석으론 최초인 1995년 11월 처음 방한했다. 또 1997년 재임 중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됐다. 2년 뒤인 1999년엔 마카오도 넘겨받았다. 최대 업적은 이른바 혁명 제3세대를 이끌며 중국을 ‘최대 개발도상국’ 반열에 올렸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론인 ‘3개 대표 이론’을 당헌에 명기한 것은 20년 전인 2002년 11월이다. 반면 톈안먼 사태를 수습하며 최고 권력에 오른 인사답게 종교 단체인 파룬궁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한 강력한 조치로 인권을 무시했다는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장 전 주석은 최고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임자인 후진타오 전 주석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시진핑 국가주석의 등장으로 힘은 소멸되기 시작했다. 시 주석의 집권 5년 만에 장쩌민 계열이자 상하이방 인사 300여명이 ‘반부패 칼날’에 낙마했다. 장 전 주석이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은 2019년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이다. 이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달 20차 당 대회에도 불참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만에 중국 공산당은 장 전 주석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jjw@fnnews.com 정지우 기자
2022-11-30 20:29:09[파이낸셜뉴스] 구자홍 초대 LS그룹 회장이 11일 오전 8시경 향년 77세로 타계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20호실에 마련됐다. 조문은 오는 12일 오전 11시부터 가능하며, 발인은 15일 오전 8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경기도 광주공원묘원이다. 1946년생인 고(故) 구자홍 회장은 LS그룹을 창업한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과 고 최무 여사의 장남으로,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고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의 조카다. 동생으로 구자엽 LS전선 이사회 의장, 고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 구자철 예스코 회장이 있으며, 사촌동생으로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전 LS그룹 회장)과 구자용 E1회장,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 구자은 LS그룹 회장이 있다. 부인 지순혜 씨와의 사이에 장녀 구나윤 지오피 갤러리 대표와 아들 구본웅 마음그룹 대표, 며느리 유현영 씨를 뒀다. 구 회장은 지난 1973년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 수입과로 입사해 반도상사 해외사업본부에서 근무했다. LG전자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하며, 글로벌 성장과 노경화합에 기여했다. 2003년 LS그룹이 LG그룹에서 분리 후, 2004년부터 2012년까지 LS그룹 초대 회장으로 9년 동안 그룹 성장을 주도했다. 적극적인 인수합병, 해외진출, 연구개발 강화를 통해, LS그룹을 재계 13위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이어 사촌동생인 구자열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을 순조롭게 승계하며 '아름다운 사촌경영'의 전통을 세웠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2013년부터 2014년까지 LS미래원 회장을 맡았고, 2015년부터 LS니꼬동제련 회장으로 활동해 왔다.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임직원 화합과 건강한 기업문화 정착에도 노력을 기울였다는게 LS그룹 내의 평가다. 대외활동으로 한국전자산업진흥회 회장과 한국비철금속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금탑산업훈장, 한국CEO대상, 금속재료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기자
2022-02-11 15:16:38[파이낸셜뉴스] 미국의 여야 정치인들이 공화당의 대표적인 원로였던 밥 돌 전 상원의원 타계와 관련해 잇따라 성명을 내고 조의를 표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5일(현지시간) 밥 돌을 기리며 “미국 역사상 몇 없는 정치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밥 돌은 전쟁 영웅인 동시에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개인적으로도 믿을만한 길잡이인 동시에 유머 감각이 있는 친구였다”고 밝혔다. 밥 돌의 숙적이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부인 힐러리 클린턴과 공동 성명을 내고 “나는 그와 전투를 즐겼으며 우리의 협력은 그 이상이었다”고 강조했다. 클린턴은 “밥 돌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국가에 헌신했고 더 이상 헌신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며 “밥 돌의 헌신은 현대와 미래의 공복들에게 영감을 주는 표본이다”고 말했다. 이날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밥 돌이 "미국의 가장 훌륭한 가치를 대표하는 위대한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그를 "미국의 전쟁 영웅이자 진정한 애국자"라고 애도했다. 이날 밥 돌의 가족들은 성명을 내고 그가 5일 오전에 향년 98세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2월에 공개적으로 자신이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고 알렸다. 1923년 미국 캔자스주에서 태어난 밥 돌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5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중상을 입어 오른팔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됐다. 그는 1951년에 캔자스주에서 주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61년부터 4번이나 연방 하원의원을 맡았다. 그는 이후 캔자스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상·하원 의원으로 활동한 시간만 35년에 달했다. 밥 돌은 1976년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부통령 후보로 뛰었지만 실패했고 1980년과 1988년에는 공화당 경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1996년에 공화당 대선후보로 클린턴과 맞붙었으나 패했다. 공화당 원내대표까지 지냈던 밥 돌은 1993년 클린턴 정부 당시 1차 북핵 위기가 터지자 북핵 해체 전까지 북한에 경제 지원을 끊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밥 돌은 1997년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과 2018년 미국 최고 훈장인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고 정치에서 물러난 뒤에는 참전 용사와 전몰장병 추모 사업을 벌였다. 그는 2016년 대선 당시 전직 공화당 대선후보로는 유일하게 트럼프를 지지하기도 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21-12-06 09: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