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최근 전기차 화재가 잇따라 발생, 공포감이 확산하고 있다. 17일 MBC 보도에 따르면 이번엔 테슬라 차량에 불이나 인근 가게에 있던 손님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화재는 전날 저녁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한 도로에서 발생했다. 이날 공개된 CCTV 영상에는 가게 앞 주차된 검은색 테슬라 차량에서 갑자기 흰 연기가 나는 모습이 담겼다. 불길은 차량 앞바퀴 부근에서 솟구쳤고, 운전자가 황급히 소화기를 가져다 뿌려보지만 소용없었다. 점점 거세지는 불길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불길을 잡는데만 3시간 10분, 완전히 끄는데는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전기차 특성상 한 번 불이 붙으면 끄기가 쉽지 않아 질식소화덮개와 이동식 수조를 이용해 꺼야 했기 때문이다. 불이 난 차종은 테슬라 모델 X로 일본 파나소닉 배터리가 사용됐다는 게 테슬라 측 설명이다. 운전자는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마냥 그런 소리가 났었는데 운전석 앞바퀴 쪽에서 하얀 연기가 올라오더라"며 (차량) 문제는 전혀 없었다. 잘 타고 다녔었고 전조 증상이 있었으면 대비라도 했을 텐데…"라고 허탈해했다. 경찰은 국과수에 해당 차량에 대한 감정을 의뢰, 화재 원인과 함께 차량 결함이 있었는지 등을 살필 계획이다. gaa1003@fnnews.com 안가을 기자
2024-08-18 10:38:38[파이낸셜뉴스] 미국 및 유럽 18개 도시에서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900여 대가 타이어의 바람이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극렬 환경운동가들이 벌인 기행으로, SUV가 환경을 해치는 주요 원인으로 판단해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지난 29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지는 '타이어 바람을 빼는 사람들(Tyre Extinguishers)' 단체가 성명을 통해 "전날 8개국 시민들이 환경을 해치는 SUV 약 900대의 타이어 바람을 뺐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단체행동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엔스헤데, 프랑스 파리와 리용, 독일 베를린과 본, 영국 런던과 브리스톨, 리즈, 던디, 미국 뉴욕 등의 주요 도시에서 포착됐다. 단체는 "이번 행동은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차량을 겨냥한 지구촌 행동 중 최대 규모다.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질 것이다"며 "우리는 세계 도시에서 거대한 오염물질을 소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어 "SUV는 부유층이 과시하는 불필요한 '명품 배기가스'다. 이로 인해 대기를 오염시켜 기후 재앙을 일으키고 도로를 더 위험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들 모두 타이어를 파손하지는 않고, 자신들만의 특수한 방법으로 바람을 뺀 것으로 알려졌다. 또 행동에 나선 일원들은 집에서 프린터로 전단지를 출력해 차량 옆에 놔두고는 왜 자신들이 차량을 노렸는지 설명했다고 한다. 단체의 대변인 매리언 워커는 "우리는 거대한 자동차가 세계 여러 도시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누구든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필요한 것은 전단지 한 장과 렌즈콩 한 개뿐이다. 우리의 운동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단체는 올해 3월 출범해 영국에서 첫 행동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helpfire@fnnews.com 임우섭 기자
2022-12-01 07:04:23금호타이어는 스포츠유틸리티차(SUV)용 타이어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10일부터 다음달 20일까지 사은품 증정 이벤트를 실시한다. 지난달 선보인 SUV용 신제품 '크루젠 HP71' 출시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로, 전국 금호타이어 대리점(일부 매장 제외)에서 참여 가능하다. 신제품 '크루젠 HP71을 비롯해 '크루젠 HP91' 제품 4개를 구매한 고객에게 아웃도어 몽벨의 신제품 바람막이 자켓을 증정하며, 2개를 구매하면 휴대폰 보조배터리를 증정한다. '크루젠 프리미엄' 제품 4개를 구매한 고객에게도 휴대폰 보조배터리를 증정한다. 크루젠 HP71은 기존 제품 대비 마모 성능과 스노우 성능을 20% 이상 향상시킨 것이 특징이다. 16~20인치, 총 28개 규격이 출시되며 개당 가격은 20만~30만원 선이다. 크루젠 HP91은 지난해 출시된 제품으로, 고출력·고성능 도심형 SUV에 최적화된 타이어다. 크루젠 프리미엄은 고급 세단의 정숙성과 편안한 승차감을 SUV에서도 느낄 수 있게 한 제품이다. nvcess@fnnews.com 이정은 기자
2017-04-10 09:45:49\r 한국, 헝가리 등 3곳.. 넥센, 체코에 신공장.. 금호, 美 공장에 중점 \r \r \r \r \r \r \r \r \r \r \r \r \r \r 한국타이어, 넥센타이어, 금호타이어 등 토종 타이어 업체 3사가 내년 해외 공장 증설을 통해 글로벌 공략에 나선다. 특히 한국타이어는 자동차 종합부품 회사로의 도약을 선언했으며 금호타이어는 연말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내년부터는 독자경영 체제에 돌입할 예정이다. 25일 타이어업계에 따르면 한국타이어는 최근 한라비스테온공조 공동 인수자로 나서는 등 공격적인 외형 확대 전략을 내놓고 있다. 한국타이어측은 한라비스테온공조가 그동안 축적해온 영업망과 인맥을 활용하면서 글로벌 자동차 업체와의 관계도 한층 돈독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최근 론칭한 중저가 브랜드 '라우펜'을 내년부터 북미, 중남미,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본격 판매하며 세계 시장 점유율을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이와 맞물려 3군데서 진행중인 공장 증설 작업도 내년께 마무리된다. 우선 2263억원을 투자한 헝가리 공장은 현재 3단계 증설중이며 상반기중 연산 1800만개 규모 공장으로 재탄생한다. 또 하반기에는 중국 충칭과 인도네시아 공장 증설이 완료돼 각각 180만개, 1200만개를 더 생산할 수 있다. 이와함께 2016년에는 8558억원을 투입한 미국 테네시 신공장도 완공된다. 테네시 공장이 연간 550만개로 양산을 본격화하면 한국타이어의 글로벌 생산량은 1억2000만개를 돌파할 전망이다. 넥센타이어 역시 체코 자테츠지역에 약 65만㎡(20만평) 규모로 연산 1200만개 규모의 신공장을 짓고 있다. 1조2000억원을 투자한 체코 공장은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생산 기지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와함께 중국 칭다오 공장 증설도 검토중이다. 넥센타이어 관계자는 "현재 국내외 생산 규모가 연간 3500만개 수준인데 이를 2018년까지 6000만대로 늘릴 것"이라면서 "올해 글로벌 10위권 진입이라는 목표를 세웠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 전사적으로 힘을 모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호타이어는 6년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하며 독자 경영 체제에 돌입한다. 금호타이어는 요코하마 타이어와 협력 관계를 적극 활용해 해외 시장에서 입지를 굳힌 뒤 2016년 완공되는 미국 조지아 공장 완공을 기점으로 급성장을 실현하겠다는 전략이다. 금호타이어 관계자는 "조지아 공장이 완공되면 연간 400만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데다 북미 지역의 중국산 타이어 제재 등 호재도 존재한다"면서 "북미를 기반으로 한 완성차 업체 공급을 늘리면 수익성 역시 좋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국내 타이어업계는 내년 초 미국 정부가 중국산 타이어에 반덤핑관세를 부가할 경우 반사 이익을 누리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은 캐나다와 함께 전세계 타이어 시장의 20%를 소화하는 거대 시장인데 그동안 중국 업체들이 싼값을 내세워 점유율을 늘려왔다. 이에 현지 업체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미국 상무부와 국제무역위원회는 덤핑 관련 혐의를 조사중이었으며 덤핑 판정과 관세 부가는 내년 3~4월께 확정된다. wild@fnnews.com 박하나 기자 \r
2014-12-25 16:30:32‘뼈대의 과학’으로 불리는 타이어 휠이 디자인과 성능면에서 세대교체를 이루고 있다. 차 외관과 엔진 기능을 주로 따지던 소비자들이 최근 들어 휠의 디자인과 기능 및 크기에 대해 부쩍 관심을 보이는 데 따른 변화다. 일반적으로 자동차의 ‘다리’로 비유되는 휠은 인체 다리의 아름다운 각선미와 강인한 건각을 연상시킨다. 이에 ‘알로이 휠’이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스틸 휠을 밀어내고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또한 제작방식 면에서 뛰어난 성능과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한 단조 방식의 제품이 주조식 제품을 맹추격하고 있다. ■알로이 휠·단조 방식 주목 휠의 기본적인 역할은 타이어 형태와 기능을 유지시키고 차량의 운동에너지를 타이어에 전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동차가 철을 재료로 삼은 휠 대신 알루미늄 합금 소재로 만든 ‘알로이 휠’을 채택하고 있다. 이 제품은 일반 스틸 휠보다 충격흡수력이 두 배 정도 뛰어나 승차감을 향상시켜 준다. 무게도 가벼워 연비와 가속능력을 배가시킨다는 것도 장점이다. 제작 방식에 따라 액체상태의 알루미늄 합금을 형틀에 넣어 만드는 ‘주조’ 방식과 합금 소재를 가열해 프레스로 누르거나 두드려 만드는 ‘단조’방식으로 나뉜다. 단조 방식은 훨씬 견고하고 화려한 디자인 구현이 가능하지만 가격이 주조 방식보다 3배 정도 비싸다는 것이 흠이다. ‘단조 휠’은 고가임에도 튜닝문화 발전에 따라 전체 타이어 휠 시장의 약 10%를 점유하고 있다. 이처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탓에 단조 휠을 제작하는 업체는 세계적으로 독일의 BBS, 일본의 �w즈(Weds), 이탈리아의 OZ가 유명하며 국내에서는 한국타이어의 계열사인 에이에스에이(ASA)가 유일하다. 디자인 방식에 따라 5개 종류로 나뉜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스포크(휠 중심에서 밖으로 뻗은 바퀴의 살) 타입, 10개 이상의 스포크로 구성된 핀 타입, 그물 형태의 메쉬 타입, 디스크 부분이 접시 모양인 디시 타입, 바람개비 모양의 에어로 타입 등이 있다. 스포크 타입은 무게가 가벼워 중소형 자동차나 경주용 자동차에 많이 사용된다. 또한 아반떼 처럼 스포티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차종에도 주로 장착된다. 메쉬나 핀 타입은 힘의 분산과 밸런스가 좋아 대형 세단에 많이 적용된다.디시 타입은 중형 차량 이상에 많이 쓰이며 튜닝 시장에서는 디시타입과 핀 타입, 에어로타입이 선호 대상이다. 국내 휠 제조사인 ASA 관계자는 “차의 외관을 주로 고려하던 소비자들이 타이어 휠의 기능과 디자인에 부쩍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고급 이미지·대형 사이즈 선호 기아차 로체는 강도가 높고 가벼운 알루미늄휠이 적용돼 연비와 주행성능은 향상되고 소음과 진동은 대폭 줄었다. 특히 기존 옵티마리갈에는 4볼트 체결방식을 적용했으나 로체에는 대형차에 적용되는 5볼트 체결방식을 적용해 세련된 이미지를 한층 강화했다. 또한 알루미늄휠의 테두리를 없애고 휠 내부에 무게 균형을 시도해 외관미를 크게 향상시켰다. 아울러 절제되고 고급스러운 로체의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휠을 간결하고 강한 남성적 느낌으로 디자인했다. GM대우는 올해 자사의 기대작인 토스카의 역동적이며 고급스러운 측면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해 알로이 휠을 채택했다. 차급에 따라 15,16, 17인치 등 다양한 휠을 적용하고 있다. GM대우도 16,17인치 휠의 경우 테두리를 없앤모델을 적용해 휠의 무게와 공기 저항을 대폭 줄였다. 아울러 스포크 디자인도 한층 더 세련되게 개발해 스포티한 외관을 강조했다. 쌍용자동차의 대표 차종인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도 디자인,크기, 기능 등 다양한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 쌍용차는 SUV 차량에 맞도록 크기를 늘려 뉴렉스턴에 16인치 휠을 적용한 데 이어 카이런과 액티언 등은 국내 최초로 18인치 휠을 장착했다. 휠 크기가 커지는 것은 외관상 강렬하고 화려한 디자인을 극대화하고 운행 안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19인치, 20인치로 휠의 크기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또한 쌍용자동차의 뉴체어맨과 로디우스에는 타이어의 내부 공기가 적정한 지 여부를 체크하는 타이어공기압자동감시시스템(TPMS)을 실현하기 위해 휠에 센서가 부착돼 있다. 뉴렉스턴 노블레스 모델과 뉴체어맨 휠에는 알로이 휠 재질에 크롬을 도금해 고급차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jjack3@fnnews.com 조창원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06-02-16 14:21:12<26>국경을 넘어 카자흐스탄으로 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한달여간의 우즈벡 여행을 마치고 오늘은 국경을 넘는다. 타슈켄트에서부터 앞으로의 경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우리가 원한 최선의 경로는 우즈벡 남서쪽의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이란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투르크메니스탄 가는 방법이 쉽지 않았다. 코로나 전에는 3~5일짜리 경유(Transit)비자가 있었다는데 발급이 중단된 듯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타슈켄트에 있을때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을 찾아가 한시간을 기다려 겨우 직원을 만나 물어보았는데 초청장이 있으면 몰라도 외국인 입국이 금지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한 이란도 까르네(무관세 통행증)가 필요하며 대행사 등을 통해 미리 행정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꽤 많은 돈이 드는 것 같았고 운이 나쁘면 돈을 내도 입국이 안될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쪽 경로는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북쪽으로 카스피해를 돌아 가야했는데 국경지나는 것을 최소화하기위해 일단 카자흐스탄에 재입국해서 카스피해 연안의 악타우에서 배에 차를 실어 아제르바이잔으로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구글 맵에 누쿠스에서 악타우까지는 약 1000km거리에 14시간이 걸린다고 나온다. 하지만 경험상 +3~4시간이다. 압둑의 아버지께서 이 구간의 길이 매우 안좋고 국경 전엔 주유소나 마을이 하나도 없다고 알려주셨다. 까브리가 캠핑카이니 숙소나 마을이 없어도 아무데서나 쉬고 밥을 해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제 시내에서 주유소 두 곳을 찾아갔었는데 디젤이 없었다. 가는 길에 살 수 있겠지 했는데 허름한 주유소를 하나 찾아내어 들러봤지만 역시 디젤은 없었다. 더 가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나올까봐 다시 누쿠스로 돌아가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사막 한가운데 있는 식당겸 트럭 휴게소를 발견했다. 현지분들께 번역앱을 동원해 경유를 파는 가까운 주유소를 물어본다. 러시아어를 쓰는지 페르시아어를 쓰는지 우즈벡어를 쓰는지 모르니 번역앱도 무용인 경우가 많다.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황당하게도 여기에서 디젤을 판다고 한다. 품질이고 가격이고 따질 상황이 아니다. 디젤이 있다는게 반가와 당장 30리터를 달라고 했다. 직원 두분이 말통에 담은 디젤을 가져와 까브리 연료통에 넣어주었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이정도면 국경 지나 베뉴까지도 문제 없다. 누쿠스에서 멀어지니 사방이 평평하고 누런 사막이 시작되고 도로 상태가 안좋아진다. 와아...단언컨대 지금껏 경험한 최악의 도로다. 아스팔트를 몇십년간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게 되었다. 구겨진 옷의 주름이 잡히듯 쪼글쪼글한 아스팔트에 바퀴가 반이상 빠질듯한 크고 깊은 구멍이 계속 이어진다. 길이 얼마나 안좋은지 도로 옆에는 차들이 아스팔트 길을 피해 맨땅으로 다녀서 만들어진 흙길도 보인다. 차라리 흙길이 나을까 싶어 우리도 한번 가보았는데 울퉁불퉁 차가 미친듯 요동치고 흙먼지가 엄청나게 날려서 딱히 나을 것도 없다. 엉망인 도로탓에 사람도 차도 생고생이다. 10~20km밖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마저 악성 구간을 피하려고 가다서다를 반복해야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12시간을 왔는데 국경은 아직 한참 남았고 날은 어두워져버렸다. 마땅히 쉴 곳도 없어 밤에도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가는 것이 위험한 것을 넘어 공포스럽기 까지 했다. 그냥도 12시간을 운전하면 어마어마하게 피곤할텐데 길 상태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운전한 탄이 기절할 정도로 힘들어 한다. 공터고 뭐고 아무것도 없지만 도로를 조금 벗어나 흙바닥 위에 차를 세웠다. 사막의 추위에 수많은 별들도 눈에 안들어온다. 무시동 히터를 켜고 전기요를 의지해 잠을 청해보았다. 밤새 추위와 싸우다 살아서 눈을 떠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아침기온 영하 7도. 체감은 -10도가 훨씬 넘는 듯 무섭게 춥다. 오늘은 꼭 국경을 넘자! 하며 기운차게 출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화이팅하며 출발한지 30분도 채 안되어 갑자기 도로위에서 시동이 꺼졌다. 어제 거친 도로에 종일 시달리느라 까브리가 병이 난걸까? 추운 날씨에 오그라든 손으로 겨우 점프용 예비 배터리를 연결해보았다. 여전히 시동이 안 걸린다. 어제 넣은 경유가 문제일까? 영하의 날씨에 얼어버렸나? 궁여지책으로 휴대용 버너를 차 아래에 놓고 연료통을 데워보려 했지만 영하의 세찬 바람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이었으면 전화한통으로 견인 출동 서비스를 불렀을텐데. 막막했다. 도로위에서 차가 멈춰버렸다. 배터리 점프도 해보고 연료통도 데워보지만 소용없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해결될지도 모르겠지만. 바이칼호에서 우리가 견인을 해주었던 생각이 났다. 우리가 견인을 받아야하는 일이 생길줄은 몰랐는데. 이 길을 다니는 차도 별로 없다. 시동이 안 걸리니 히터도 안되서 추위에 덜덜 떨며 마냥 기다린다. 한참만에 대형트럭이 한대, 두 대 서주었는데 언어 소통이 안되어 결국 그냥 가버리고 망연자실 그저 착한 사마리아인같은 분이 나타나시기를 빌고 또 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차가 멈춘지 3시간이 지났을때 드디어 생명의 은인이 나타나셨다. 크고 힘세보이는 대형트럭도 여러대 그냥 지나갔는데 정작 우리를 도와준 것은 딱 봐도 수십년은 된 듯한 낡은 밴 뒤에 달구지까지 매단 차. 길이 너무 험해서 섣불리 견인해주겠다 나서지 못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분은 우리차를 보자마자 견인줄을 준비해서 달구지와 까브리에 묶는다. 이제 살았다 싶고 너무너무 감사하다. 드디어 밴이 끄는 대로 까브리가 움직인다. 서너시간 만이다. 정말 다행인 것은 밴 기사님이 운전을 매우 잘하시는 분이었다. 길이 워낙 험해서 그냥 가기도 위험한 길을 우리 1톤 트럭을 매달고 잘도 가신다. 하지만 험로에 앞차가 언제 급제동을 할 지 알 수 없기에 탄이는 초긴장모드로 오른팔에 심한 근육통이 생길 정도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수없이 잡아당겨야 했다. 30분쯤 지나 탄이 약간 여유가 생겼는지 "개인적으로는 대형트럭보다 밴 사이즈의 차가 견인해주어서 따라가기가 훨씬 나아"라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견인줄이 툭 끊겼다. 헉. 탄이 크락션을 울려 신호를 한다. 밴 기사님은 차를 세우고 다시 견인줄을 까브리에 묶는다. 길이 험해 견인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니 견인줄이 끊어지는 것 쯤은 당연하다 싶다. 끈이 무지 오래된 듯 낡기도 했다. 앞차는 길이 조금이라도 좋다 싶으면 막 달린다. 그러면 오래된 아스팔트에서 자갈들이 탁탁 소리를 내며 마구 날라온다. 이미 금간 앞유리가 완전히 깨져버리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게 중요하다. 천천히 가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 끈에 묶인 채 앞차에 매달려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참 가다가 길에 서있는 승용차 앞에서 밴이 차를 멈추었다. 어리둥절 내려보니 역시나 고장차량이다. 이미 한대를 구조해 견인중이면서도 또 다른 어려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신가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다. 이 차량은 앞 타이어 하나가 완전히 빠져 길에 놓여있는데 타이어를 연결하는 쇠부속이 부서진듯 했다. 밴 기사님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무슨 조치를 한 후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두어시간이 지나 국경 근처의 한 식당에 도착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지만 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탄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밴기사님께 식사대접이라도 하겠다며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 후 차 고칠 곳을 물어보니 근처에는 정비소가 없다고 한다. 이대로 견인된 채 국경을 넘을 수 있을까? 밴기사님과 식당주인분이 나와 까브리를 이리저리 살펴보신다. 퓨즈 박스도 열어보고 엔진룸도 열어보고 그러더니 견인 중 시동을 걸어보잔다. 탄이 안해본 게 아니어서 별 기대는 안되었지만 두분이 봐주는 것 만으로도 너무 고마와 밴의 달구지는 빼고 우리차를 직접 묶어 견인하며 식당사장님이 우리차를 운전하였다. 식당 주차장을 한바퀴 돌기도 전에 "부릉~"하며 시동이 걸렸다. 나는 옆좌석에 앉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야~!"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탄이가 다가온다. 이럴수가! 까브리가 다시 살아났다!! 눈물이 날 정도로 까브리 엔진소리가 반가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엔진을 끄고 다시 시동을 걸어보니 안 걸린다. 다시 밴으로 견인해서 시동을 걸었더니 다행히 또 걸렸다. 두분 모두 이대로 운전하고 가되 정비가 가능한 곳까지 가기 전에는 절대로 시동을 끄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말은 안통해도 무슨 이야긴지 너무 잘 알것 같았다. 2시간 이상을 무시무시한 험로를 견인해주신 밴기사님을 탄이는 꼭 안아드리고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한국 과자등 선물과 사례로 100달러를 드렸다. 더 달라면 더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탄이는 왜 자기가 했을때는 안됐을까 매우 의아해했지만 어쨌든 시동이 걸린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6시간만에 시동이 걸려 까브리가 다시 스스로 움직여서 다니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울 뿐이었다. 식당에서 약 30분정도 더 가니 국경사무소가 나왔다. 우즈벡에서는 여행자가 어디에 묵었는지 거주지 증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는 곳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서류를 준비해왔는데 국경에서는 아무도 보자고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좀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래도 준비해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국경에 서있는 차들 맨 뒤에 줄을 서니 앞에 낯익은 밴이 보인다. 먼저와서 줄서고 계시는 우리 은인. 카자흐스탄 국경수비대 분들이 웃으며 반겨주셨다. 국경에서 나 혼자 또 내려서 걸어가야 할 것을 각오하고 핫팩과 옷등 추위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는데 차에 그냥 타고 있으라며 친절히 배려해주셨다. 국경에서 이런 환대는 처음이다. 탄이 차에서 내려 서류작업을 하고 돌아와서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며 보여준다. 와, 꽤 멋진 남자향수다. 수비대의 젊은 친구 한사람이 계속 정말 잘 도와주었고 마지막엔 이 것까지 선물해줬다고 한다. 그 친구 말고도 한국 자동차 등록증이 생소하다보니까 하나 둘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어 차근차근 물어보고 굉장히 호의적으로 수속 밟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무사히 기분좋게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경통과는 항상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이었는데 오늘은 여러모로 감동이었다. '일희일비'라고 나쁜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것 같다. 어제부터의 고생을 조금 위로받는 듯 했다. 카자흐스탄으로 넘어오니 길이 갑자기 너무 좋아졌다. 어제 종일, 그리고 아침에도 그 악몽같은 험한 길을 비틀대며 지나와야했는데 비단결같은 아스팔트가 진심 감동스럽다. 다음 목적지인 베뉴에 가서 차도 고치고 숙소도 잡아야겠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QMehVDxsPGQ?si=zf30tAbmRBYQu1wt>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8-14 10:51:49영등포(永登浦)는 조선시대 이후 두 곳에 있었다. 서울 영등포와 거제도 영등포이다. 둘을 비교하면 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거제 영등포의 역사가 더 길다. 영등 지명은 대동여지도 괴산에 영등산(永登山) 정도가 있다. 경남 거제 영등포를 먼저 살펴본다. 거제 영등포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언급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자주 기록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나온다. 이를 보면 거제 영등포는 조선시대 최소 400년간 거제도의 주요 읍치와 군사 진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행정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거제 영등포는 역사적으로 장목 영등포와 견내량 영등포 두 곳이다. 영등포에 군사 진영으로 진(鎭)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장목에 영등포진을 두었고, 임란 이후 거제 견내량 덕포로 진을 옮기면서 영등포 이름도 같이 옮겨졌다. 그러면서 장목 영등포는 사라졌다. 거제 영등포는 거의 조선 말기까지 존속됐다.가장 오래된 영등포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산(鎭山) 당산(國師堂山) 북쪽으로 영등포(永登浦)에 이르기 45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위치는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舊永里)이다. 거제도의 가장 북쪽 해변이다. 장목 영등포는 난중일기에서 25차례 언급되고 있다. 거제도 전체가 임란에서 중요했지만 영등포는 위치적으로 특히 중요한 군사적 요지였다. 영등포에서 바로 건너 내륙 해안에는 군사중심지인 진해(현재 창원 진동면)와 웅천(현재 창원 진해구)이 있고, 동쪽으로는 가덕도와 부산진, 서쪽으로는 고성과 사천이 있다. 왜란 당시 거점 지영이었다. 거제의 북단 장목면 영등포가 임진왜란 이후 거제의 서단에 있는 견내량의 덕포리로 옮긴다. 견내량에 대한 군사적·행정적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견내량 영등포는 서쪽 통영 중심지 세병관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하여 장목 영등포는 공식적으로 옛 영등포를 의미하는 구영등(舊永登)으로 지명이 바뀐다. 이것이 더 줄어서 구영(舊永)이 되고 현재 행정명으로 구영리, 구영마을로 불린다. 그리고 포구로 구영항(舊永港)이 있다. 인근 대봉산에 구영등성(舊永登城)으로 불리는 옛 성터가 있다. 구영리 해변은 구영해변, 구영해수욕장으로 되어 있다. 거제 학산리 영등포도 임란 이후 군사활동이 줄어들면서 영등포 자체가 사라져 잊혀지고 행정지명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서울과 거제 영등포의 지명 어원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영등제(靈登祭)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지역과 백성의 안전을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면서 등을 달고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영등을 올리는 곳으로 해안이나 강가에서 올리는 곳을 영등포라 했다. 영등(靈登)에서 복잡한 한자 영(靈)을 쓰기 쉬운 영(永)으로 단순히 바꾼 것이다. 물가이므로 바람의 영향이 커 바람신에 안전을 빈다는 것이다. 거제 영등포의 시작이었다. 난중일기 영등포는 최초의 영등포인 거제 장목이다. 난중일기에는 영등포의 행정과 군사 책임자로 만호 우치적(禹致績)과 후임 조계종(趙繼宗)이 자주 등장하며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 상의하고 명령에 따라 최전선 방어에 임한다. 우치적은 견내량 승리 후에 순천부사로 영전한다. 장목 영등포에는 왜적이 들어와 해안에 정박하기도 했다. 거제에는 왜성 흔적이 4곳이 있다. 당시 옥포해전과 영등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크게 승전했다. 이순신 장군이 요지로 여기며 이곳을 매우 중시했던 결과였다. 그리하여 한산대전과 노량대전 승리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본다. 현재 장목면 구영리는 해안 절경을 바라보는 관광지로 빌라와 호텔, 요양마을 등이 발달하고 있다. 영등포 시절 주요 군사 요지였다. 서울 영등포는 대동여지도 한양도성 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英登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 영등포의 연원도 최소 300년은 될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영등포 지역은 큰 마을이 아니라 습지와 나대지가 많았던 시골 마을로, 건너편 여의도와 연결되는 샛강의 작은 나루터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아마도 영등제를 지내는 포구로 한양 도성에 가까우니 그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개방이 시작돼 인천항의 기능이 중요해지면서 영등포는 한양과 연결되는 교통로의 주요 역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인가도와 함께 경인선,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영등포는 일약 한강 이남 서울의 최대 도시로 발전한다. 1960년대 한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으로 전국에 공업지대가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중에서도 경인공업지대가 가장 규모가 컸다. 인천항에서 서울 영등포에 이르는 구역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인구가 집중하고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니 국민들은 경인공업지대와 영등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1960년대 영등포 지도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영등포동을 중심으로 문래동, 당산동, 양평동, 도림동 등이 중심이 되어 있다. 제조공장들이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대규모 공장으로 경성방직, 동아염직, 동신화학, 대선제분, 판본방직, 한국타이어, 영등포공작창, 삼공공작소, 크라운맥주, 오비맥주 등이 보인다. 당시 영등포는 서울 중심지인 종로, 명동과 경쟁관계를 이루는 듯했다. 서울이 발전해 규모가 커지고 한강 이남에 대한 개발계획들이 만들어지면서 한강 이남 지역을 영동(永東)지구라 했다. '영등포 동쪽'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등으로 발전하면서 영동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초기 서울시의 영동지구토지구획 사업 시에 즈음하여 영동교회, 영동고교 등에서 영동 용어가 일부 남아 있다.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고 3차산업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영등포 공업단지 공장들이 더 남쪽인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주거지와 상업·서비스지역으로 변모했다. 당시 서울 강북에 있던 대규모 공장들도 마찬가지로 지역 이전을 했다. 공업중심지로 인구밀집을 겪은 영등포구는 도심 내에 공원과 같은 열린 공간이 거의 없다. 다만 한강변 양화한강공원과 안양천변의 양평누리공원, 샛강생태공원 등이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영등포역은 지금도 이 지역의 중심으로 백화점과 다수의 상가,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영등포를 주제로 많은 가요와 영화가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화려했다. 조선 중·후기 영등포의 역사적 기록이 없어 아쉽게 여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2024-07-15 18:02:19영등포(永登浦)는 조선시대 이후 두 곳에 있었다. 서울 영등포와 거제도 영등포이다. 둘을 비교하면 지금은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거제 영등포의 역사가 더 길다. 영등 지명은 대동여지도 괴산에 영등산(永登山) 정도가 있다. 경남 거제 영등포를 먼저 살펴본다. 거제 영등포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언급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자주 기록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나온다. 이를 보면 거제 영등포는 조선시대 최소 400년간 거제도의 주요 읍치와 군사 진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행정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거제 영등포는 역사적으로 장목 영등포와 견내량 영등포 두 곳이다. 영등포에 군사 진영으로 진(鎭)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장목에 영등포진을 두었고 임란 이후 거제 견내량 덕포로 진을 옮기면서 영등포 이름도 같이 옮겨졌다. 그러면서 장목 영등포는 사라졌다. 거제 영등포는 거의 조선 말기까지 존속됐다. 가장 오래된 영등포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진산(鎭山) 당산(國師堂山) 북쪽으로 영등포(永登浦)에 이르기 45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위치는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舊永里)이다. 거제도의 가장 북쪽 해변이다. 장목 영등포는 난중일기에서 25차례 언급되고 있다. 거제도 전체가 임란에서 중요했지만 영등포는 위치적으로 특히 중요한 군사적 요지였다. 영등포에서 바로 건너 내륙 해안에는 군사중심지인 진해(현재 창원 진동면)와 웅천(현재 창원 진해구)이 있고, 동쪽으로는 가덕도와 부산진, 서쪽으로는 고성과 사천이 있다. 왜란 당시 거점 지영이었다. 거제의 북단 장목면 영등포가 임진왜란 이후 거제의 서단에 있는 견내량의 덕포리로 옮긴다. 견내량에 대한 군사적, 행정적 중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견내량 영등포는 서쪽 통영 중심지 세병관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하여 장목 영등포는 공식적으로 옛 영등포를 의미하는 구영등(舊永登)으로 지명이 바뀐다. 이것이 더 줄어서 구영(舊永)이 되고 현재 행정명으로 구영리, 구영마을로 불린다. 그리고 포구로 구영항(舊永港)이 있다. 인근 대봉산에 구영등성(舊永登城)으로 불리는 옛 성터가 있다. 구영리 해변은 구영해변, 구영해수욕장으로 이름되어 있다. 거제 학산리 영등포도 임란 이후 군사활동이 줄어들면서 영등포 자체가 사라져 잊혀지고 행정 지명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서울과 거제 영등포의 지명 어원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영등제(靈登祭)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지역과 백성의 안전을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면서 등을 달고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영등을 올리는 곳으로 해안이나 강가에서 올리는 곳을 영등포라 했다. 영등(靈登)에서 복잡한 한자 영(靈)을 쓰기 쉬운 영(永)으로 단순히 바꾼 것이다. 물가이므로 바람의 영향이 커 바람신에 안전을 빈다는 것이다. 거제 영등포의 시작이었다. 난중일기 영등포는 최초의 영등포인 거제 장목이다. 난중일기에는 영등포의 행정과 군사 책임자로 만호 우치적(禹致績)과 후임 조계종(趙繼宗)이 자주 등장하며 이들은 이순신 장군과 상의하고 명령에 따라 최전선 방어에 임한다. 우치적은 견내량 승리 후에 순천부사로 영전한다. 장목 영등포에는 왜적이 들어와 해안에 정박하기도 했다. 거제에는 왜성 흔적이 4곳이 있다. 당시 옥포해전과 영등포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크게 승전했다. 이순신 장군이 중요 요지로 여기며 이곳을 매우 중시했던 결과였다. 그리하여 한산대전과 노량대전 승리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본다. 현재 장목면 구영리는 해안 절경을 바라보는 관광지로 빌라와 호텔, 요양마을 등이 발달하고 있다. 영등포 시절 주요 군사 요지였다. 서울 영등포는 대동여지도 한양도성 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에 '英登浦'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 영등포의 연원도 최소 300년은 될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영등포 지역은 큰 마을이 아니라 습지와 나대지가 많았던 시골 마을로, 건너편 여의도와 연결되는 샛강의 작은 나루터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아마도 영등제를 지내는 포구로 한양 도성에 가까우니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개방이 시작돼 인천항의 기능이 중요해지면서 영등포는 한양과 연결되는 교통로의 주요 역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인가도와 함께 경인선,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영등포는 일약 한강 이남 서울의 최대 도시로 발전한다. 1960년대 한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으로 전국에 공업지대가 많이 만들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경인공업지대가 규모가 가장 컸다. 인천항에서 서울 영등포에 이르는 구역이다. 전국에서 서울로 인구가 집중하고 한국 경제가 급성장하니 국민들은 경인공업지대와 영등포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1960년대 영등포 지도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영등포동을 중심으로 문래동, 당산동, 양평동, 도림동 등이 중심이 되어 있다. 제조공장들이 면적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대규모 공장으로 경성방직, 동아염직, 동신화학, 대선제분, 판본방직, 한국타이어, 영등포공작창, 삼공공작소, 크라운맥주, 오비맥주 등이 보인다. 당시 영등포는 서울 중심지인 종로, 명동과 경쟁을 이루는 듯했다. 서울이 발전해 규모가 커지고 한강 이남에 대한 개발 계획들이 만들어지면서 한강 이남 지역을 영동(永東)지구라 했다. '영등포 동쪽'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관악구,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등으로 발전하면서 영동이라는 용어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초기 서울시의 영동지구토지구획 사업시에 즈음하여 영동교회, 영동고교 등에서 영동 용어가 일부 남아있다.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고 3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영등포 공업단지의 공장들이 보다 남쪽인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옮겨가면서 현재는 주거지와 상업·서비스지역으로 변모했다. 당시 서울 강북에 있던 대규모 공장들도 마찬가지로 지역 이전을 했다. 공업중심지로 인구 밀집을 겪은 영등포구는 도심 내에는 공원과 같은 열린 공간이 거의 없다. 다만 한강변 양화한강공원과 안양천변의 양평누리공원, 샛강생태공원 등이 그 기능을 대신한다. 영등포역은 지금도 이 지역의 중심으로 백화점과 다수의 상가와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영등포를 주제로 많은 가요와 영화가 나왔다. 영등포의 밤은 화려했다. 조선 중·후기의 영등포의 역사적 기록이 없어 아쉽게 여긴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07-15 09:46:01시로와 탄은 동갑내기 부부다. 시로는 주로 꿈을 꾸는 Dreamer이고 탄은 함께 꿈을 꾸고 꿈을 이루어주는 Executor로 참 좋은 팀이다. 일반적으로 배우자에게 "세계여행 가자!" 이런 소리를 한다면 "미쳤어?" 이런 반응이겠지만 탄은 "오! 그거 좋겠는데?"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그들은 캠핑카를 만들어 '두번째 세계여행'을 부릉 떠났다. 비슈케크에서 계획한 일들이 거의 끝나가자 슬슬 이곳을 떠나 다음 나라로 갈 준비를 했다. 서너달가량 아무 문제없이 잘 달려준 까브리지만 한국분들이 많은 비슈케크에서 한번 체크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코리아모터스란 정비소를 소개받아 찾아갔다. 친절하신 사장님은 까브리 안쪽 타이어까지 꼼꼼하게 공기압체크를 해주시고 차를 잘 돌봐주셔서 매우 든든했다. 비슈케크를 떠나기 전 들린 곳은 '카페 비스킷'이다. 이곳에 도착한 첫주에 현지분들과 처음 만나 식사를 한 곳인데 정말 맛있고 저렴해서 앞으로 이런 식당을 또 만나랴 싶어 탄이와 둘이서 비슈케크 마지막 식사를 하러왔다. 작은 마시멜로가 듬뿍 올라간 코코아로 당을 채우고 행복해하는 탄이. 내가 좋아하는 브런치요리가 예쁘게 담겨 나왔다. 샐러드, 수란, 핫케잌, 베이컨 등등 맛있게 냠냠. 다음 목적지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이다. 목적지까지 3일이상이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 될것이다. 카자흐스탄을 경유하는 코스도 있지만 국경을 2번이나 넘는 것이 부담이 돼서 키르기스스탄 남서쪽의 오시(Osh)를 통해 우즈벡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비슈케크를 출발하는 아침, 새벽에 눈이 떠졌다. 두달간 머무르며 좋은 분들과 의미있는 경험을 하는 시간도 좋았지만 다시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흥분과 설레임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여태껏 비슈케크에서 카라콜, 이식쿨호수, 나른 등등 주변을 다닐때는 항상 동쪽으로 갔었는데 처음으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떠난다. 가을이 된 비슈케크는 여름내 한방울도 안온 비가 많이도 내린다. 출발하는 날에는 약간 흐렸지만 비는 안와서 짐 싣기 좋았다. 비슈케크에서 왔다갔다 할 때와는 다른 느낌의 드라이브. 이제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실감이 몹시도 든다. 하늘에 아름다운 뭉게구름과 저멀리 병풍처럼 이어진 키르기스의 설산과 황금빛 들판이 엽서속 풍경인양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참을 달려 산 근처까지 다다르자 웬 화물차들이 끝이 없는 줄을 지으며 길 양옆에 서있다. 이 차들은 뭘까? 설마 우리도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가보자 황당하게도 톨게이트가 나왔다. 한국 떠난 후 처음 보는 톨게이트다. 827솜을 내고 QR코드가 있는 영수증같은 것을 받았는데 징수원이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표를 절대 버리면 안된다고 하는 듯 하다. 나중에 확인하는 곳이 있으니 잘 간수해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보자고 한 사람은 없었다. 해발 3000m를 향한 본격적인 자동차 산행이 시작 되었다. 구불구불 오르막 산길을 계속 가다보니 눈이 쌓인 산들이 옆으로 지나간다.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온다. 스마트폰의 고도계 앱으로 계속 현재 고도를 확인했는데 2000, 2500, 드디어 3000m가 넘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고 눈보라가 겨울왕국인듯 신비한 장면을 만들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눈알갱이인지 연기같은 하얀 가루들이 바람에 물결무늬를 만드는 모습이 신기하다. 하지만 내리는 눈과 안개에 시야가 점점 안좋아져서 도로의 상태가 걱정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다행히도 탄의 레이더에 들어온 노련한 운전자의 차 한대. 든든한 선행차 친구가 있으니 초행길도 문제 없다. 룰루랄라 따라가다보니 터널이 나왔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 처음 보는것이 톨게이트뿐이 아니었다. 그 넓은 시베리아와 세나라를 다니는 동안 단 한개의 터널도 없었던거다. 큰 트럭들이 터널앞에 줄서있는데 우리 친구차는 옆을 지나쳐 들어가는 것이 대충 분위기가 터널이 좁아서 큰 트럭은 신호등의 신호를 받고 가야하고 작은 차들은 그냥 가도 되는 것 같았다. 터널앞 신호등은 빨간불이었지만 우리도 얼른 친구차를 따라 들어갔다. 터널 폭은 좁고 노면은 울퉁불퉁해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생각보다 꽤 긴 터널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이곳은 눈이 펑펑내리는 완전히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이다. 길가옆에 부랴부랴 스노우체인을 장착하는 승용차들이 여럿 보였다. 다행히 까브리는 겨울용 타이어가 장착되어 있다.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좀 위안이 된다. 앞차의 흔들림이 심상지 않은 것을 보니 바짝 긴장이 된다. 눈과 얼음으로 길에 심한 요철구간을 지난다. 쿵덕쿵덕 천장에 머리를 찧을 정도로 흔들리며 우리도 조심조심 지나갔다. 도로의 난이도가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 같다. 그래도 노련한 선행차가 있어 다행이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 탄이는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경치 보랴 어려운 구간 운전하랴 바쁘다. 터널을 지나니 곧 내리막길이 되어 산을 어느정도 내려오자 도로상태가 매끈하니 좋아졌다. 산을 내려오자 좀전에 눈보라에 온세상이 하얗던 겨울왕국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봄이 찾아왔다. 계속 달려 한두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뙤약볕이 내리쬐고 민둥산에 갈색들판의 사막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대체 하루에 몇가지 계절을 보는건지 참 버라이어티하다. 점심 즈음에 커다란 호수를 만났다. 호수 가까이 차를 대고 잠시 쉬며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구름 사이로 햇빛 줄기가 퍼지고 영롱한 푸른빛의 호숫물이 반짝이고 주변의 높은 언덕은 맨 흙의 속살을 드러내며 태초에 지어진 구불구불한 모습으로 호수를 두르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오늘 하루동안 정말 다양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열심히 일하며 보낸 두달을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달리고 달려 해가 지기 시작할때가 되어 차박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길에서 조금 들어간 평지에 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정박지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풍경이 예술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어떨까 기대된다. 그런데 우리가 차를 세운 언덕 바로 아래쪽에 살림집이 있어 탄이가 이곳에 차를 대고 자도 괜찮겠냐고 물어봐야겠다며 갔다. 처음엔 돈을 내라고 해서 그럼 그냥 가겠다고 하자 그냥 자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집 아이들과도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차를 잘 대고 잠을 청하는데 개짖는 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개떼가 차를 둘러싸고 짖는 듯이 위협적이고 너무 시끄러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개떼가 밤에 노는 곳을 우리가 뺏은건가 싶을 정도였다. 버티다버티다 안되겠어서 일어나 깜깜한 밤 조용히 다른 잘곳을 찾아 차를 몰았다. 길옆 작은 마을로 들어가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나머지 잠을 잤다. 오늘은 국경을 넘는 날이다. 지도를 보니 오시까지 안가더라도 근처 1시간거리에 국경이 있는 듯 했다. 꼭 오시에 갈일이 있는게 아니니 '더 빠른 국경이 있으면 좋지' 하며 찾아갔다. 마을에 도착하자 국경 근처부터 차와 사람들이 엄청 많다. 차는 많은데 길이 막혀있다. 내려서 물어보고 말이 안통해 고생하다 겨우 알아낸 것은 차량 통과는 안되고 사람만 왕래가 가능한 국경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괜히 오시 이야기를 한게 아니었다. 뭐 이것으로 사람만 통과 가능한 국경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치고 다시 오시로 향했다. 오시에 다다르자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다시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다. 러시아번호판을 단 차량이 종종 보인다. 징집을 피해 주변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그런 사람들인가 싶었다. 키르기스스탄 제2도시 오시, 도시의 분주함이 느껴진다 드디어 국경검문소에 도착했다. 커다란 화물트럭들이 줄지어 서있다. 검문소 앞에 도착하니 바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알고보니 길 좌우에 세워진 승용차들이 다 입국을 기다리고 있는 차들이었다. 말도 안통하는데 삐끼인듯한 사람이 자꾸 와서 말을 건다. 대충 눈치가 돈을 내면 빨리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시간 정도 기다리자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기다림이 길어져서 삐끼도움이라도 받아야하나 좀 고민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다리니 순서대로 해준다. 다행이다. 군인의 지시대로 안쪽으로 들어왔다. 국경을 넘는 다른 차들은 대개 짐이 없다. 불필요한 의심을 안받고 검문과정을 쉽게 넘기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맥시멀리스트로 4계절 살림을 다 싣고 다니니 입국심사가 오래걸릴 수 밖에 없다. 키르기스출국심사를 통과하고 우즈벡 입국심사를 받을때엔 벌써 해가 졌다. 입국심사 때에는 동승자는 하차해서 도보로 통과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여권과 간단한 배낭 하나를 들고 내렸다.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걸어가다가 검문대 앞에 줄을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희잡 쓴 아주머니들이 농산물 등 짐을 잔뜩 들고 간다. 여기도 국경간 농산물 통과가 자유롭나보다. X레이 검사대 같은 것이 있긴했는데 그냥 옆으로 지나서 십여분 만에 국경을 통과했다. 키르기스 국경보다는 훨씬 큰 상점과 음식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탄이를 기다렸다. 낮엔 더웠는데 밤이 되자 기온이 점점 내려간다. 얇은 긴팔 하나만 입고 나왔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몸을 움직이면 좀 덜 추울까 하고 손으로 팔을 비비며 깡총깡총 뛰고 있는데 뒤쪽에서 누가 오더니 말을 건다. 음식점 주인이 나의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는 실내에서 기다리라며 고마운 제안을 해주셨다. 마침 손님이 하나 없어 편하게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가게에서도 내가 떨고 있는 걸 보더니 입고 있던 얇은 패딩 윗옷을 벗어 덮어주기까지 했다. 염치없었지만 너무 추워서 냉큼 받았다. 민망하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3시간정도 기다린 후에 드디어 탄이 까브리와 함께 나왔다. 나그네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고 온정을 베풀어주신 고마운 음식점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까브리에 탔다. 나는 도움 받은 일을 탄이에게 신나게 이야기하고 탄이는 국경 넘은 과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입국을 자축하며 잘 곳을 찾아 가까운 작은 도시에 들어갔다. 한적한 어떤 주차장에서 차박을 하기로 했다. 큰길에서 약간 들어간 곳이라 조용하고 한산했는데 자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 긴장하기도 했지만 별일 없이 잘 잤다. 무사히 하룻밤을 또 보내고 이제 드디어 타슈켄트에 도착하는 날이다. 새로운 나라에 왔으니 환전과 유심구입을 해야한다. 키르기스 돈은 솜인데 우즈벡 돈은 숨이다. 오 다르고 우 다르다. 안디잔과 나망간을 경유해서 400km 6시간 거리이니 오후에는 도착하겠다 싶었다. 우즈벡의 도로는 키르기스스탄보다 넓고 포장 상태도 좋다. 여정이 편안하다. 가는 길에 보이는 차들이 거의가 하얀색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하얀색 다마스가 엄청 많이 눈에 띄어 한번에 5~6대의 하얀색 다마스를 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마치 하얀양떼가 우르르 함께 돌아다니는 것 같은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우에서 우즈벡에 공장을 세워 여기서 생산된 다마스가 매우 저렴하게 판매되어 인기가 많다고 한다. 우즈벡의 도로는 정비 잘된 고속도로의 느낌이어서 어제 지나온 길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우리 마음속에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글=시로(siro)/ 사진=김태원(tan) / 정리=문영진 기자 ※ [시로와 탄의 '내차타고 세계여행' 365일]는 유튜브 채널 '까브리랑'에 업로드된 영상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내 차 타고 세계여행'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https://youtu.be/SKa6Pdx5afI?si=SOqgaoMsnZ3dwvzN>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4-07-11 14:58:04남편 톰과 나는 아이다호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는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몇 주째 계획 중이었다. 그런데 왜 미뤄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을까? 우리는 이미 여행을 한 차례 미뤘다. 좋은 타이어를 갖춘 새 차도 있었다.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어? 느낌을 무시하면서 2250㎞ 떨어진 아이다호를 향해 출발했다. 이틀 후 몬태나의 간이식당에 발이 묶였다. 눈은 조금 내리는 정도였지만, 새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견인차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톰은 우리 요크셔테리어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나는 오래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당시 나는 열세 살이었으며, 긴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채 주방 조리대에 서 있었다. 일주일 내내 3단 초콜릿 케이크를 간절히 원했고, 이제 토요일이니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필요한 모든 걸 늘어놓았다. 계량컵, 스푼, 그릇에 버터, 달걀, 베이킹 초콜릿을 포함한 재료들. 그리고 재료를 잘 섞은 반죽으로 뒤섞어 줄 전기믹서가 있었다. 엄마가 커피 한 잔을 들고 가볍게 다가왔다. 엄마는 내가 주방을 독차지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베이킹 할 때는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서 묶어야 해, 테레즈. 머리가 방해가 될 거야." "아뇨, 안 그럴 거예요. 난 괜찮아요." 엄마를 내보내며 말했다. 나는 지시가 필요한 아이가 아니었다. 10대였고, 내가 뭘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모든 것을 계량했고, 믹싱볼에 마른 재료를 넣고 섞었다. 버터와 정사각형 모양의 초콜릿은 전자레인지에서 녹였다. 오른손으로 믹서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끈적끈적한 초콜릿과 버터를 마른 재료에 부었다. 버터가 묻은 작은 그릇은 미끄러웠다. 재빨리 움직여서(카운터에서 숟가락을 떨어뜨릴 만큼 빨랐다) 그릇이 손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간신히 붙잡았다. 믹서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도는 동안 나는 숟가락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다. 믹서기의 회전 날이 반죽을 꽉 잡을 때까지 머리카락이 반죽 위에 늘어져 있다는 걸 몰랐다. 몇 초 만에 긴 머리카락 몇 움큼이 두피 바로 위까지 감겨서 꼬였다. 나는 외쳤다. "엄마!" 엄마는 부엌으로 달려와서 조리대에 몸을 수그리고 있는 나, 믹싱볼에 바짝 댄 내 얼굴, 맹렬하게 윙윙 돌아가는 믹서기, 너무 엉켜 버린 내 머리카락, 계속해서 돌고 있는 반죽을 보았다. 나는 끄는 버튼조차 누를 수 없었다. 엄마는 믹서를 껐다. "내가 말했잖아"라고 말하거나 왜 엄마 말을 듣지 않았는지 물을 수도 있었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믹서 날에서 내 머리카락을 풀어내려고 애썼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허리까지 오던 머리는 구해내지 못했다. 부엌에 앉은 채로 엄마가 내 머리를 매우 짧게 자르게 두면서, 하나님께서도 엄마처럼 지시를 많이 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상냥하게, 판단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또한 엄마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따르기로 결정하든지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그런 실수로 배운다는 걸 아시니까. 거울에서 짧은 머리를 볼 때마다 엄마의 충고와 내가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때 엄마가 보여주던 긍휼한 마음을 기억했다. "믿을 수 없을 거예요. 자동차 대리점까지 차를 견인하러 올 사람을 구했는데, 날씨가 나빠져서 산길이 폐쇄되었어요. 우린 못 가요. 빌링스에서 밤을 보내고 차를 돌려서 집에 가야 해요!" 톰이 요크셔테리어를 데리고 들어오며 말했다. 내가 그 소식을 편히 받아들이자 톰은 놀랐다. 내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아마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끈기 있게 계속 애쓰실 거고, 나는 계속 배울 거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지시에 바로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The Cake Mixer MishapTom and I had been planning a road trip to visit family in Idaho for weeks. So why did I feel as if we should postpone? We'd already put off the trip once. We had a new car with good tires. What could go wrong? I ignored the feeling, and we started off for Idaho, some 1,400 miles away. Two days later, we were stranded in a diner in Montana. It was only snowing lightly, but our new car had broken down. Now we were waiting for the tow truck. As Tom took our Yorkie outside for a walk, I found myself thinking about a day years before. I was 13 back then, standing at the kitchen counter, my long hair hanging almost to my waist. I'd been craving a triple-layer chocolate layer cake all week. Now that it was Saturday, I was determined to make it. I laid out everything I would need. Measuring cups, spoons, bowls. Ingredients including butter, eggs and baking chocolate. And the electric mixer that would combine them into a smooth batter. My mom breezed through, grabbing a cup of coffee-she knew I wanted the kitchen to myself. "You ought to pull your hair back in a ponytail while you're baking, Therese," she said. "It'll get in your way." "No, it won't," I said, waving her off. "I'll be fine." I wasn't some child who needed direction. I was a teenager. I knew exactly what I was doing. I measured everything out. Combined the dry ingredients in a mixing bowl. Melted the butter and chocolate squares in the microwave. Steadying the mixer with my right hand, I poured the gooey chocolate and butter into the dry ingredients with my left. The little buttery bowl was slippery. Acting quickly-quick enough to knock a spoon off the counter-I managed to catch it before it slipped out of my hand. With the mixer whirring, I leaned over to pick up the spoon. I didn't realize I'd draped my hair into the batter until the beaters got hold of it. In seconds, my long locks were twisted right up to my scalp. "Mom!" I cried. She ran into the kitchen to find me hunched over the counter, my face pressed to the mixing bowl, the mixer buzzing angrily, too tangled up with my hair and the batter to keep spinning. I couldn't even reach the button to turn it off. Mom shut off the mixer. She could have said, "I told you so," or asked me why I didn't listen. But she didn't. She just tried her best to unwind my hair from the beaters. There wasn't much she could do. My waist-length hair couldn't be saved. As I sat in the kitchen, letting Mom give me a pixie cut, I wondered if God didn't offer direction a lot like Mom. Gently, without judgment. Then, like Mom, God left it to us to decide whether to follow it, knowing we'd learn from our mistakes. Every time I saw my short hair in a mirror, I remembered Mom's advice and the compassion she showed when I didn't heed it. "You won't believe this," Tom said, returning with our Yorkie. "We've got someone coming to tow the car to the dealership, but the weather's gotten worse and the mountain pass is closed. We can't get through. We'll have to spend the night in Billings and then turn around and go home!" Tom was surprised at how well I took the news. This wasn't the first time I'd failed to follow God's direction, and it probably wouldn't be the last. But God is patient. He'll keep trying, and I'll keep learning. One day, I'll start listening right away.글·그림=가이드포스트
2024-02-27 18:0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