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인도에서 하층민 어린이의 얼굴에 오줌을 싼 남성이 경찰에 체포됐다. 인도에서는 차별과 학대가 법으로 금지돼 있으나 이 남성은 하층민 어린이 얼굴에 소변을 본 것이다, 5일(현지시간)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주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 주에서 프라베시 슈클라가 길거리에 앉아있던 어린이의 바로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그의 얼굴에 오줌을 쌌다. 당시 슈클라의 행동을 본 사람이 해당 장면을 촬영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고, 이 사건은 순식간에 인도 전체에 퍼져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해당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도 보도됐으며, 인도인들은 슈클라를 체포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전 총리 칼마 나스는 트위터를 통해 "이 사건은 마디아 프라데시 전체를 부끄럽게 만들었다"고 지적하며 "가장 엄격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마디아 프라데시의 하층민에 대한 잔학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브라지 싱 초한 현 총리도 "행정부가 엄격한 법 집행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조사 결과 마디아 프라데시 주에 있는 슈클라의 집이 불법 건축물인 것으로 밝혀져 철거됐으며, 현지 경찰은 슈클라를 하층민에 대한 학대 방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해 기소했다. 현지 경찰은 "슈클라는 벌금과 징역 1년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한편 슈클라에게 오줌 테러를 당한 하층민 어린이는 아디바시스라는 토착 부족 일원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인도 내 1억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힌두교 카스트 계급의 하위 계층 사람들과 함께 수 세기 동안 폭력과 편견, 차별의 대상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인도는 이들에 대한 학대와 폭력이 만연하자 하층민 학대 방지법을 제정했으며, 범죄가 입증될 경우 중벌을 받게 된다. newssu@fnnews.com 김수연 기자
2023-07-06 08:40:36[파이낸셜뉴스] 우리나라 고립·은둔 청년이 54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후반~30대 초반이 가장 많았고, 여성 비율이 남성의 약 2.6배에 달했다. 고립·은둔을 시작한 나이는 20대 비중이 가장 높았는데, 취업에 대한 어려움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고립·은둔 청년 10명 중 8명은 본인의 경제 수준을 '하'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3.7점으로 전체 청년 평균(6.7점)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고립·은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살 생각과 시도 비율이 점차 늘었다. 10명 중 8명은 '하'층…삶 만족도 3.7점 13일 보건복지부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2023년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고립·은둔 청년만을 타켓으로 한 전국단위 첫 조사다. 2만1360명을 대상으로 1차 조사를 완료한 뒤 위험군을 식별, 1만2105명을 대상으로 심층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우선 고립·은둔 청년은 지역별로 인구규모에 비례해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했다. 여성 비율이 72.3%로 남성(27.7%)보다 약 2.6배 가량 많았다. 연령은 20대 후반~30대 초반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학력은 대학교 졸업(75.4%), 고등학교 졸업(18.2%), 대학원 이상(5.6%), 중학교 졸업 이하(0.8%) 순으로 응답이 많았다. 응답자들 가운데 본인을 '하'층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75.7%에 달했다. 가족 전체를 '하'층으로 인식하는 비율도 54.3%로 조사됐다. 다만, 가족은 중상층이나 본인은 하층으로 인식하는 비율도 24.2%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90%는 미혼이었다. 가족, 지인 등과 함께 생활하는 경우가 69.9%, 혼자 생활하는 경우 30.1% 등으로 나타났다. 삶에 대한 만족도는 3.7점으로 전체 청년 평균(6.7점)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을 보였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주로 온라인 매체에 의존했다. 외부정보 인지 경로에 대해 73.2%는 온라인 매체 주로 의존한다고 답했다. 주로 하는 활동으로는 OTT 등 동영상 시청(23.2%), 온라인 활동(15.6%) 등의 비율이 높았다. 10~20대 고립시작…10년씩 이어지기도고립·은둔을 시작한 연령은 60.5%가 20대, 23.8%가 10대라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가장 큰 고립·은둔 이유는 직업 관련 어려움(24.1%)이었고, 대인관계(23.5%), 가족관계(12.4%), 건강(12.4%) 순으로 나타났다. 10대에 고립은둔 시작한 응답자는 대인관계(27.1%), 가족관계(18.4%), 폭력이나 괴롭힘 경험(15.4%) 순으로 응답했다. 고립·은둔 기간은 1년 이상 3년 미만 비율(26.3%)이 가장 높았다. 10년 이상 비율도 6.1%에 달했다. 사회생활 복귀를 시도했지만 2명 중 1명은 재고립 경험이 있었다. 재고립·은둔 이유로는 돈·시간이 부족해서(27.2%), 힘들고 지쳐서(25.0%),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22.9%) 등으로 나타났다. 자살 위험도 높았다. 응답자의 75.4%가 자살을 생각했고(8436명 중 약 6360명), 이 중 26.7%(약 1698명)가 자살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는 전체 청년 평균 자살생각(2.3%) 대비 매우 높은 수준이다. 고립·은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살 생각과 시도 비율이 점차 증가했다. 10명 중 8명은 현재 상태를 벗어나길 원하고 있었다. 67.2%는 실제 탈 고립·은둔을 시도했다. 이들은 탈고립을 위해 일이나 공부 시작(45.4%), 취미활동(35.6%),병원진단 및 치료(16.3%), 심리상담 시도(15.5%) 등을 했다. 우리 사회의 필요한 도움(중복응답)으로는 경제적 지원(88.7%), 취업 및 일경험 지원(82.2%), 혼자 하는 활동 지원(81.7%), 일상생활 회복지원(80.7%) 등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imne@fnnews.com 홍예지 기자
2023-12-13 13:46:06[파이낸셜뉴스] 대한민국 국민의 약 절반이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였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히 30대의 경우, 높은 수준의 울분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당하고, 모욕적이야" 스트레스 경험 조사했더니.. 27일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은 '한국인의 울분과 사회·심리적 웰빙 관리 방안을 위한 조사'(95% 신뢰수준, 표본오차 ±3.1%P)의 주요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는 올해 6월 12∼14일간 만 18세 이상 전국 남녀 1024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에서 울분 수준은 1.6점 미만(이상 없음), 1.6점 이상∼2.5점 미만(중간 수준), 2.5점 이상(심각 수준) 등 3개 구간으로 나눴고, 1.6점 이상은 중간 수준 이상의 울분 속에 있거나 그런 감정이 계속되는 '장기적 울분 상태'로 규정했다. 연구진은 여러 문헌을 토대로 울분을 부당하고, 모욕적이고, 신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스트레스 경험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설명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49.2%가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여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가운데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는 응답자도 9.3%나 됐다. 다만 연구진이 수행한 이전의 전국 성인 대상 울분 조사와 비교했을 때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는다는 비율은 이번이 제일 낮았다. 한편 울분과 자살 생각을 비교해 본 결과, 2.5점 이상의 심각한 울분을 겪는 이들의 60.0%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성과 연령, 교육·소득수준 등 인구 사회적 변수에 따른 울분 점수의 차이를 분석한 결과, 연령에 따라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다. 30대가 가장 높고.. 하층민 인식 60%가 '장기적 울분' 특히 주목할 것은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는 비율은 30대에서 13.9%로 가장 높았는데, 30대는 1.6점 미만의 정상 상태 비율(45.7%)도 가장 낮았다는 점이다. 반면 2.5점 이상의 심각한 울분을 겪는 비율은 만 60세 이상(3.1%)에서 가장 낮았다. 사회·경제적 여건에서 자신의 위치를 묻고 상중하 3개 구간으로 나눈 뒤 울분 점수를 비교했을 때 자신을 하층으로 인식하는 이들의 60%가 장기적 울분 상태에 해당한 것과 달리, 자신을 상층으로 인식하는 이들은 61.5%가 이상 없다고 답했다. 부당한 정치·언론때문에 스트레스.. 대형 참사도 추가 최근 1년 부정적 사건을 하나라도 경험한 경우는 전체의 77.5%를 차지했다. '전반적인 세상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 점수는 만 60세 이상(3.42점)에서 가장 높았고, 20대와 30대는 모두 3.13점으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점수가 가장 낮았다.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사회정치 사안에 대해 얼마나 울분을 느끼는가'를 4점(매우 울분) 척도로 물었더니 전체 평균 점수는 3.53점으로 나타났다. 같은 문항을 적용한 이전 조사까지 포함했을 때 울분을 일으키는 사회정치 사안 상위 5위 안에는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 ▲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 ▲언론의 침묵·왜곡·편파 보도 등이 공통적으로 포함돼 있었다. 올해 조사에서는 상위 5위 안에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참사 ▲납세의무 위반이 새로 포함됐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2024-08-27 14:29:32선거 후 여당의 자중지란은 더욱 심란하다. 패배의 근원은 오만과 독선인데 애써 비켜간다. 네 탓이라는 책임회피와 내 말대로 하지 않았다는 자기 부각에만 골몰한다. 겸양과 참회를 모르고선 다음에도 국민의 마음을 얻긴 글렀다. 유권자는 강고하면서도 연약한 집단이다. 일편단심과 조변석개가 뒤섞인 존재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기도 하고, 민들레 홑씨처럼 미풍에도 흩어진다. 바닥심리도 모르고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이 오판이었다. 야당은 경험이 풍부하고 노회하다. 막말과 실책이 있어도 뒤처리가 능숙하다. 여당은 판단 미스에다 기술 부족으로 졌다. 유권자 심리 연구는 학술적이고 참고용이다. 개인이 속한 계급이나 경제적 상황 등의 사회경제적 배경(콜롬비아 학파)이나 정당일체감, 이념 등과 같은 사회심리학적 요인(미시간 학파) 등이다. 어느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고 복합적이다. 게다가 유권자는 정의롭지 않다. 이번 선거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정의는 선택 기준에서 서너번째에 불과했다. 역으로 공정과 정의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기준이 없는 뒤죽박죽의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불행히도 이미 정의 상실의 시대가 됐다. 바른 말도 싫으면 귀를 막고, 틀린 말도 좋으면 박수를 친다. 좌와 우, 동과 서 그리고 부와 빈. 포인트는 분리다. 나와 너로 쪼개는 분리전술. 야당, 좌파의 책략이다. '나'가 하나라도 많으면 '너'를 다스리는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맹점. 기를 쓰고 쪼개어 내 편을 불리는 데 목숨을 건다. 여당, 우파는 어리석게도 전술과 책략에 걸려들었다. 내가 정의로운데 뭐가 문제냐며 분노를 거리낌 없이 유발한다. 보기 좋게 미끼를 덥썩 문다. 물론 정의롭지도 않다. 바로 그 오만과 독선으로 막 내 편이 된 자들을 걷어차 몰아냈다. 그렇다면 요체는 분노유발적 행위의 중단, 오만과 독선에 대한 경계령이다. 그다음의 전략은 야당과는 다른 역공이다. 분리가 아닌 나와 너를 우리로 만들겠다는 통합. 여당이 주목해서 볼 부분이 있다. 중산층의 하류층 이탈이다. 야당의 분리전략 앞에서 빈자의 수적인 우세는 전략수정을 여당에 요구한다. 우리 통계청의 중산층 기준은 중위소득 50~150%다. 이 비중이 지난 10년간 늘어났다고 통계상으로 나타난다. 지난해 4인 가족 중위소득은 540만964원이므로 270만482~810만1446원을 버는 가구가 중산층이라는 말이다. 270만~400만원을 버는 가구가 중산층이라고 스스로 인식할 리 없다. 일종의 통계오류에 정부나 국민이 속고 있다. 선진국 중산층 기준은 중위소득 70~200%다. 민간 통계는 중산층이 축소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류층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빈부격차가 확대되는 '아령구조' 사회는 선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층민 증가는 좌파 지지자 증가로 이어질 개연성이 농후하다. 부자와 빈자 갈라치기에 좌파가 몰두하는 이유가 납득된다. 소득 외에 빈부를 가르는 요소는 부동산이다. 부동산 값을 결과적으로 앙등시킨 정권이 좌파였음을 상기하면 이유는 자명해진다. 그보다 좋은 호재가 없는 것이다. 속으론 희희낙락했을 것이다. 여당으로서는 큰 악재다. 차이가 더 벌어지면 다음도 필패다. 대응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갈라치기와 반대로 합치기로 나가면 된다. 결론은 '낮은 데로 임하소서'다. 빈자를 도외시하지도 않았으나 더 끌어안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줘야 한다. 급속한 고령화도 보수에겐 설상가상의 난관이다. 노인이 되면 빈곤해지고 상당수가 등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보수'라는 말이 한때 잘 먹혔다. 좋은 말이다. 계속 쓰는 게 좋다. 지금 보수 정파는 왠지 차갑게 느껴진다.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강한 포옹이라야 다음엔 승리할 수 있다. 시늉이 아니라 정책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이겨야 뜻대로 정치를 펼 수 있지 않겠는가. tonio66@fnnews.com
2024-04-24 19:37:14일반적으로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캣츠' '미스 사이공'을 세계 4대 뮤지컬이라고 일컫는다. 이 작품들은 1980년대에 영국에서 제작돼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다채로운 음악과 화려한 무대의 대규모 프로덕션으로 제작돼 '메가 뮤지컬'이라고 부른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시작은 프랑스의 위대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바탕으로 작사가 알랭 부블리와 작곡가 클로드 미셸 숀버그가 프랑스에서 발표한 콘셉트 앨범이었다. 이를 영국의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가 로열셰익스피어극단과 함께 뮤지컬로 제작해, 1985년 10월 8일 런던 바비칸극장에서 트레버 넌의 연출과 존 내피어의 무대디자인으로 첫 공연의 막을 올렸다. 그리고 런던의 최장수 뮤지컬이자 뮤지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품 중을 하나로 웨스트엔드에서 지금도 공연이 올라가고 있다. '레미제라블'의 매력은 이야기하듯이 펼쳐내는 음악, 주제를 절묘하게 담아낸 무대, 선명하게 빌드업되는 캐릭터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방대한 원작 소설의 서사를 뮤지컬의 형식으로 단단하게 담아낸 구성이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원작은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가 1845년부터 1861년까지 총 16년간 약 63만 단어로 씌여졌으며, 번역본 기준으로 25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다. 60여년간의 프랑스의 혁명 기간 중 1832년 6월 봉기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하층민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를 뮤지컬에서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장발장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압축해 3시간의 공연으로 담아내고 있다. 1막의 시작은 장발장의 가석방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발장은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 동안 죄수로 갇혀 있었다. 장발장은 자기 이름은 죄수번호 24601이 아니라 장발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자베르 경감은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다시 잡혀올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첫 장면에서 제시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를 질문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연결돼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성당에서 은식기를 훔치다가 잡힌 장발장에게 촛대까지 내어준 신부님과의 만남 이후, 장발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공장의 사장이자 시장의 자리까지 오른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판틴의 죽음 그리고 자기 대신에 처형을 받게 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판틴의 딸인 코제트를 평생 동안 지키며 살아간다. 이야기는 죄수였던 장발장이 평생의 고난과 역경을 통해 어떻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변화해가는지를 일관성 있게 보여준다. 이 방대한 서사의 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 뮤지컬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구성이 놀랍다. 각 인물들이 고유의 넘버들을 통해 캐릭터를 선명하게 구축한다. 판틴은 ‘I Dreamed a Dream’, 장발장은 ‘Who am I’, 테나르디어 부부는 ‘Master of the House’ 등의 아이엠송을 통해 캐릭터를 드러낸다. 너무도 유명한 혁명의 노래인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은 혁명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에포닌의 ‘On my own’은 다시 변주돼 안타까운 사랑을 노래한다. 가장 백미는 너무나도 유명한 ‘One day more’인데 혁명의 전날 각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들을 한 넘버 안에 절묘하게 압축해 놓았다. 원작의 방대한 서사는 음악을 통해 상징을 만들면서 압축되고, 변주를 통해 의미를 증폭시킨다. 마치 뮤지컬의 교과서처럼 다양한 기법을 통해 방대한 서사를 한 편의 공연으로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뮤지컬의 묘미이며, 이 과정에서 주제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완성됐다는 점에서 진정한 명작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평생 장발장을 쫓았던 자베르가 결국 장발장을 놓아주고 스스로의 혼돈에 빠져 자살하는 장면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장발장의 이야기를 프랑스의 혁명의 이야기와 결합하여 감동과 메시지를 증폭시켜주고 있다. 역시 명작은 명작인 이유가 있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4-02-26 12:05:13얼마 전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와인 라벨에 강렬한 메두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와인을 꺼내들었습니다. 비뇨블 벨라스((Vignobles Vellas)가 프랑스 랑그독 루시옹(Languedoc-Roussillon) 지방에서 비오니에 100%로 만드는 '메두사 비오니에(Medusa Viognier)' 와인입니다. 동석자들은 비오니에 품종이 주는 우아한 향과 고급스런 맛보다는 라벨 속 메두사 그림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비뇨블 벨라스 오너인 니콜라스 벨라스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메두사 비오니에 와인 맛은 굉장히 좋지만 그림 실력은 별로인 듯 합니다. #1. 누구나 다 아는 그림 속 주인공인 메두사는 그리스 신 고르고네스의 막내딸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다 아테네 여신의 분노를 삽니다. 아테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온통 뱀으로 변하게 만들고, 메두사는 나중에 프로세우스에게 머리가 잘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 못지않게 유명한, 혹은 더 유명할 수도 있는 메두사는 카라바조가 그린 '메두사(1597년, 60x55, 유채, 우피치미술관)'입니다.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순간을 마치 옆에서 사진 찍듯 잡아낸 그림으로 튀어나올 듯 한 눈동자와 비스듬한 시선, 비명을 지르며 벌어진 입이 압권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두사의 부릅뜬 두 눈은 목이 잘린 고통보다는 자신의 지금 상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과 분노가 그대로 읽혀집니다. 비명을 지르는 일그러진 입과 잘려진 목에서 쏟아지는 붉은 피는 사건이 방금 일어난 것 같이 생생함을 더 합니다. 특히 메두사의 얼굴이 신화 속 아름다운 여성이 아닌 남성의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입니다. 카라바조로 더 잘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20대 중반에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러나 불같은 성격이 문제였습니다. 늘 음주와 도박에 빠져 지내고 툭하면 폭행에 연루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어 시라큐사, 시칠리아, 몰타 등을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주고 연명하다 1610년 30대 후반 나이에 쓸쓸히 객사합니다. 이처럼 온갖 기행을 저질렀지만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테네브리즘(명암법)'의 창시자이자,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바로크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습니다. 테네브리즘은 그림의 배경을 암흑에 가깝게 처리한 후 주인공과 그 주변의 등장 인물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듯한 느낌을 줘 몰입도를 극대화 시키는 기법입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성냥불을 그어대는 순간, 밝아지며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마치 카메라 셔터처럼 잡아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카라바조는 여기에 더해 그림 속 등장인물의 얼굴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자나 노숙자, 창녀 등 하층민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종교화를 그릴 때도, 성인의 모습을 표현할 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림 속 상황에 맞는 극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등장인물의 내면적 심리까지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진짜 극도의 몰입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늘 신성모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은 나중에 루벤스를 거쳐 렘브란트를 '위대한 빛의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바로 카라바조였습니다. #2. "하하하. 그렇게 작은 활로 뭘 할 수 있다고.."거대한 뱀을 쏘아 죽인 궁술의 왕 아폴론이 작은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 에로스를 얕잡아보며 약을 올렸다. 화가 난 에로스가 납화살을 꺼내 근처를 지나던 요정 다프네를 향해 쐈다. 그러고는 금화살을 꺼내들더니 아폴론을 향해 활시위를 놨다. 그러자 아폴론을 본 다프네는 황급히 도망가고 아폴론은 그 뒤를 쫒기 시작했다. 에로스가 쏜 납화살은 처음 본 이성을 죽을 때까지 증오하고, 금화살은 처음 본 이성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게 되는 화살이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다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에 닿기 직전 다프네가 다급하게 아버지인 강의 신에게 기도했다. "아버지, 땅을 열어 나를 숨겨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위험을 불러온 저의 몸을 변하게 하소서." 순간 다프네의 머리카락이 월계수 잎으로 변하고, 아름답던 팔과 다리가 쩍쩍 갈라지며 나무껍질로 바뀌기 시작했다. 로마를 대표하는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이 장면을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찰나의 순간으로 잡아냈습니다. '아폴론과 다프네(1622~1625년, 243, 대리석, 보르게세미술관)'입니다.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 허리에 막 닿는 순간 기겁하는 다프네의 표정과 몸짓이 압권입니다. 너무 놀라 비명마저 지르지 못하는 듯 벌어진 입과 아폴론으로 향해 돌아간 눈에선 원망이 가득하고, 그의 손에서 떨어지려 휘어진 몸과 허우적대는 손가락 끝에서는 공포와 절규가 뚝뚝 묻어납니다.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까지 두 교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베르니니는 20년 뒤 또 하나의 충격적인 작품을 내놓습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1647-1652, 대리석, 산타마리아 비토리아 성당)'로 예술사에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오른손에 황금화살을 들고 있는 천사가 성녀 테레사의 가슴쪽 옷깃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히고 심장에 화살을 꽂아넣으려는 모습의 작품입니다. 천사는 성녀의 가슴에 수차례 화살을 넣었다뺐다를 반복하고, 성녀는 누 눈을 반쯤 감은 채 입을 벌리고 축 늘어져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묘한 미소를 띤 천사의 모습과 옷 속에서 벌어진 성녀의 두 다리와 맨발은 야릇한 상상력마저 불러옵니다. "작은 천사가 내려오는 게 보였어요. 천사는 황금 창을 들고 있는데 창 끝에서는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그 창을 들어 내 심장을 여러 차례 찔렀고 그 순간 내 몸이 관통되는 듯 했어요. 그 고통은 너무나 강렬해서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고통만큼 내 몸은 신에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맹렬히 타올랐고 그 격렬한 고통으로 얻은 희열은 잊고 싶지 않을 만큼 벅찼어요." 이 작품은 에스파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2~1582년)가 자서전에서 천사가 신성한 사랑의 창으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환상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찰나의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3. 1506년 1월14일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포도밭을 갈던 한 농부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졌다. 땅을 파던 중 고통스런 얼굴을 한 남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는데 죽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티투스 황제 궁전에 있다가 1500년 동안 사라졌던 '라오콘 군상(BC 175~150, 205 x 158 x 105, 대리석, 바티칸미술관)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2세가 미켈란젤로를 발굴 현장에 보냈는데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품을 본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조각 중앙에서 온 몸을 뒤틀고 있는 남자는 트로이 신관 라오콘이고 양쪽 두 아이는 그의 아들입니다. 왼쪽 아이는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고, 오른쪽 아이는 뱀에 휘감겨 꼼짝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때 바다뱀 한 마리가 라오콘의 옆구리를 덥석 물어버립니다. 순간 라오콘의 몸이 고통에 뒤틀리고 얼굴은 하늘을 향해 몸부림칩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입과 일그러진 얼굴에서 고통보다는 탄식과 허무함이 더 느껴집니다.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은 어쩌다 이같은 고통에 처해졌을까요. 트로이 전쟁에서 성문을 열지 못한 그리스연합군은 커다란 목마를 남기고 그리스로 철수합니다. 당시 사제이던 라오콘은 그리스 군의 음모를 간파하고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다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아들들을 물어죽이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그리스 시대 로도스 섬의 예술가 아게산드로스, 플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 세 명이 공동작업으로 탄생시킨 걸작입니다. 그런데 라오콘 군상이 발견됐을 때 라오콘의 오른쪽 팔이 없었습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당대 예술가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1500년 동안 본 적이 없어 사라진 팔이 어떤 모습일지 주장이 다 달랐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몸의 형태와 근육을 볼 때 팔이 굽어져 있을 것이라 했지만 다른 예술가들은 쭉 뻗어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결국 쭉 뻗은 상태의 팔로 복원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1905년 본체가 발견됐던 근처에서 부러진 팔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됩니다. 라오콘 군상에 맞춰보니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 팔은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지금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모습입니다. #4. 다시 돌아와 비뇨블 벨라 메두사 비오니에 와인을 엽니다. 비오니에는 프랑스 론 지역 화이트 품종입니다. 흰꽃과 약간의 장미꽃이 섞인 정말 화려한 향을 뿜어내며 살구, 복숭아 등 핵과류 과일향도 이 품종의 특징입니다. 산도는 미디엄이나 그 이하로 묵직하지만 우아한 맛과 향으로 향수같은 와인으로 표현됩니다. 잔을 가까이 하면 역시 절제된 유질감 있는 꽃향이 먼저 반깁니다. 중간중간 산뜻하고 관능적인 장미향도 들어옵니다. 과실향은 많지 않습니다. 입에 흘려보면 그제서야 알맞게 익은 복숭아, 살구 등의 아로마가 얹혀집니다. 산도는 굉장이 절제돼 있어 와인이 전체적으로 무겁습니다. 과실 아로마도 열대과일 등은 없습니다. 비오니에는 본고장인 론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언제나 한결같은 고급스런 향수의 모습을 보입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2024-02-22 18:16:50【도쿄=김경민 특파원】 "야쿠자의 지하 세계를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전직 야쿠자 A씨의 아사히신문 인터뷰 중) 2022년 일본 경찰이 수사에 칙수한 야쿠자 범죄 조직의 구성원 및 준회원 수는 전년 대비 1832명 감소한 9903명으로 집계됐는데요. 이는 1991년 조직범죄방지법(폭력단대책법)을 제정한 이후 처음으로 1만명 아래로 떨어진 숫자라고 합니다. 또 2022년 말 기준 야쿠자 단체와 연계된 총 인원은 약 2만2400명으로 1년 전보다 역시 약 1700명 감소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지하 세계의 생활을 그만두는 야쿠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요. 세계 3대 갱단으로 악명을 떨쳤던 야쿠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야쿠자? 고쿠도? 보료쿠단? '야쿠자'(やくざ)는 일본에서 조직을 형성해 폭력을 휘두르며 직업적으로 범죄 활동에 종사해 수입을 얻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해외에서는 '재팬니즈 마피아'(Japanese Mafi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야쿠자는 속어로서 특정 단체, 조직의 명칭이 아니라고 합니다. 야쿠자들은 스스로를 임협(닌쿄) 또는 극도(고쿠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협객이라는 자칭도 많이 사용했고, 지금도 야쿠자를 높여 부르려면 이 단어를 쓴다고 합니다. 협객은 조선의 주먹 김두한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에서도 자주 등장한 표현이네요. 경찰 등 정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폭력단(보료쿠단)입니다. 전국시대 사무라이에서 갱단으로 일본 야쿠자의 역사, 이른바 국가가 승인하지 않은 사설 폭력 집단의 역사는 센고쿠 시대가 끝난 이후 에도 막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7세기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대부분의 전란이 종료,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150여년의 세월 동안 무력 계급에 위치해 있던 수많은 사무라이들은 일자리를 잃었다고 해요. 이들 중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가 전쟁에서 배운 각종 살인 기술들을 바탕으로 폭력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뢰배로 전락한 낭인들은 묻지마 식의 폭력과 공포를 바탕으로 여러 지역에서 분탕질을 쳤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현대의 야쿠자들은 서민들을 보호한 용감한 하층민 조직을 표방하지만, 이는 후대에 야쿠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까지 전파된 야쿠자 문화로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의 개념이 있는데요.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폭력 조직들은 두목과 부하 간의 관계를 부모 자식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조직원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요했습니다. 야쿠자 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오야붕의 죄를 대신 떠맡아 감옥에 가는 꼬붕의 역할이나 잔을 나누는 의례 등도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버지라 불러라' '형이라 해' '우리가 남이냐' 같은 말도 야쿠자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하네요. 시대마다 '탈바꿈', 우익단으로 변신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야쿠자들은 혼란한 일본 사회의 '칼'로 득세하게 됩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일본 보수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대놓고 이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2만명 가량의 공무원 및 교원을 해직하고, 언론사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 좌익교수들에 대한 해직권고를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이미 야쿠자식 조직으로 재편되거나 극우화된 야쿠자 조직들은 수많은 노조와 좌익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의 일선에 자리잡았습니다. 이 당시 우익 갱단의 수는 750여개가 넘을 정도로 급속도로 증가했고 이들 중 일부는 아예 정당을 창설하고, 노동운동조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0~1980년대는 야쿠자 조직들이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항쟁과 대립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좌파계열 노조와 학생운동권이 일본 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자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들은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야쿠자들을 적극적으로 '정치 깡패'로 활용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야쿠자의 몰락 하지만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고, 야쿠자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1991년 폭력단대책법이 시행되면서 야쿠자들의 생활은 훨씬 어려워집니다. 폭력단대책법은 일본 내 대규모 야쿠자 조직들을 지정폭력단이라는 형태로 규정해 집중 감시하고, 기존 조직들이 파문 등의 절차를 통해 꼬리자르기로 범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사회에선 '반 야쿠자' 정서가 점차 대중 사이에 퍼져 나갔습니다. 날개가 꺾인 야쿠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더 음지로 몸을 낮추게 됩니다. 이 때부터는 호텔과 골프 리조트, 목욕탕에서도 야쿠자의 출입을 전면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에는 전국 지자체들이 폭력단에 대한 배제 조례를 도입했습니다. 한번 야쿠자로 찍히면 원천적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고, 자신의 이름으로 임대 계약서나 대출 계약서에 서명할 수도 없게 되고요. 본인의 명의로 휴대전화 개설조차 불가능하게 됩니다. 야쿠자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킨 것인데요. 사실상 일본 내에서 야쿠자로 활동했다가는 이제는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죠. 2022년은 반 야쿠자법 제정 3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일본의 폭력단원 수는 17년 연속 감소세를 나타내는 대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이 법이 발효되기 전에는 전국에 9만명 이상의 야쿠자들이 있었지만 약 2만명까지 급감하게 됐습니다. 다만 일각에선 이 법으로 인해 야쿠자들의 자식들마저 부모가 야쿠자인 게 들통나 차별받는 연좌제 문제가 생겼고, 조직원이 일반적인 기업에 취직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인 차별과 냉대가 악순환이 돼서 야쿠자 조직을 못 빠져 나온다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법도 비웃는 '한구레'라는 아이들 이 틈을 타고 일본에서는 새로운 범죄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한구레'로 불리는 범죄 집단입니다. 한구레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반 건달' 정도의 뜻이 됩니다. 야쿠자는 폭력단대책법과 폭력단 배제조례의 적용을 받아 관리 대상으로 제재를 받지만, 한구레는 법적으로 야쿠자로 등재돼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이들은 야쿠자처럼 간판을 내걸고 결속된 집단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의 점조직으로 활동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관련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야쿠자보다도 훨씬 활동이 자유로워서 급속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상당히 젊은 MZ 집단인 것도 특징입니다. 2020년대 기준으로 간부급들은 40대에 불과하고 야쿠자 특유의 절대복종을 강제하는 상하관계나 합숙, 강압적인 규율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합니다. 한구레에는 촉법소년들도 상당수라 이를 이용한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 일본에서는 큰 사회 문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문화가 있습니다. 혼네는 진짜 속마음이고, 다테마에는 밖으로 보여주는 겉마음입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은 좀처럼 혼네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일본은 다테마에의 파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2024-02-20 23:09:45[파이낸셜뉴스] 얼마 전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와인 라벨에 강렬한 메두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와인을 꺼내들었습니다. 비뇨블 벨라스((Vignobles Vellas)가 프랑스 랑그독 루시옹(Languedoc-Roussillon) 지방에서 비오니에 100%로 만드는 ‘메두사 비오니에(Medusa Viognier)’ 와인입니다. 동석자들은 비오니에 품종이 주는 우아한 향과 고급스런 맛보다는 라벨 속 메두사 그림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비뇨블 벨라스 오너인 니콜라스 벨라스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메두사 비오니에 와인 맛은 굉장히 좋지만 그림 실력은 별로인 듯 합니다. #1.누구나 다 아는 그림 속 주인공인 메두사는 그리스 신 고르고네스의 막내딸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다 아테네 여신의 분노를 삽니다. 아테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온통 뱀으로 변하게 만들고, 메두사는 나중에 프로세우스에게 머리가 잘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 못지않게 유명한, 혹은 더 유명할 수도 있는 메두사는 카라바조가 그린 ‘메두사(1597년, 60x55, 유채, 우피치미술관)’입니다.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순간을 마치 옆에서 사진 찍듯 잡아낸 그림으로 튀어나올 듯 한 눈동자와 비스듬한 시선, 비명을 지르며 벌어진 입이 압권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두사의 부릅뜬 두 눈은 목이 잘린 고통보다는 자신의 지금 상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과 분노가 그대로 읽혀집니다. 비명을 지르는 일그러진 입과 잘려진 목에서 쏟아지는 붉은 피는 사건이 방금 일어난 것 같이 생생함을 더 합니다. 특히 메두사의 얼굴이 신화 속 아름다운 여성이 아닌 남성의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입니다. 카라바조로 더 잘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20대 중반에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러나 불같은 성격이 문제였습니다. 늘 음주와 도박에 빠져 지내고 툭하면 폭행에 연루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어 시라큐사, 시칠리아, 몰타 등을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주고 연명하다 1610년 30대 후반 나이에 쓸쓸히 객사합니다. 이처럼 온갖 기행을 저질렀지만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테네브리즘(명암법)’의 창시자이자,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바로크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습니다. 테네브리즘은 그림의 배경을 암흑에 가깝게 처리한 후 주인공과 그 주변의 등장 인물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듯한 느낌을 줘 몰입도를 극대화 시키는 기법입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성냥불을 그어대는 순간, 밝아지며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마치 카메라 셔터처럼 잡아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카라바조는 여기에 더해 그림 속 등장인물의 얼굴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자나 노숙자, 창녀 등 하층민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종교화를 그릴 때도, 성인의 모습을 표현할 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림 속 상황에 맞는 극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등장인물의 내면적 심리까지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진짜 극도의 몰입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늘 신성모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은 나중에 루벤스를 거쳐 렘브란트를 ‘위대한 빛의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바로 카라바조였습니다. #2.“하하하. 그렇게 작은 활로 뭘 할 수 있다고..”거대한 뱀을 쏘아 죽인 궁술의 왕 아폴론이 작은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 에로스를 얕잡아보며 약을 올렸다. 화가 난 에로스가 납화살을 꺼내 근처를 지나던 요정 다프네를 향해 쐈다. 그러고는 금화살을 꺼내들더니 아폴론을 향해 활시위를 놨다. 그러자 아폴론을 본 다프네는 황급히 도망가고 아폴론은 그 뒤를 쫒기 시작했다. 에로스가 쏜 납화살은 처음 본 이성을 죽을 때까지 증오하고, 금화살은 처음 본 이성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게 되는 화살이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다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에 닿기 직전 다프네가 다급하게 아버지인 강의 신에게 기도했다. "아버지, 땅을 열어 나를 숨겨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위험을 불러온 저의 몸을 변하게 하소서.” 순간 다프네의 머리카락이 월계수 잎으로 변하고, 아름답던 팔과 다리가 쩍쩍 갈라지며 나무껍질로 바뀌기 시작했다. 로마를 대표하는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이 장면을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찰나의 순간으로 잡아냈습니다. ‘아폴론과 다프네(1622~1625년, 243, 대리석, 보르게세미술관)’입니다.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 허리에 막 닿는 순간 기겁하는 다프네의 표정과 몸짓이 압권입니다. 너무 놀라 비명마저 지르지 못하는 듯 벌어진 입과 아폴론으로 향해 돌아간 눈에선 원망이 가득하고, 그의 손에서 떨어지려 휘어진 몸과 허우적대는 손가락 끝에서는 공포와 절규가 뚝뚝 묻어납니다.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까지 두 교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베르니니는 20년 뒤 또 하나의 충격적인 작품을 내놓습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1647-1652, 대리석, 산타마리아 비토리아 성당)’로 예술사에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오른손에 황금화살을 들고 있는 천사가 성녀 테레사의 가슴쪽 옷깃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히고 심장에 화살을 꽂아넣으려는 모습의 작품입니다. 천사는 성녀의 가슴에 수차례 화살을 넣었다뺐다를 반복하고, 성녀는 누 눈을 반쯤 감은 채 입을 벌리고 축 늘어져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묘한 미소를 띤 천사의 모습과 옷 속에서 벌어진 성녀의 두 다리와 맨발은 야릇한 상상력마저 불러옵니다. “작은 천사가 내려오는 게 보였어요. 천사는 황금 창을 들고 있는데 창 끝에서는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그 창을 들어 내 심장을 여러 차례 찔렀고 그 순간 내 몸이 관통되는 듯 했어요. 그 고통은 너무나 강렬해서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고통만큼 내 몸은 신에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맹렬히 타올랐고 그 격렬한 고통으로 얻은 희열은 잊고 싶지 않을 만큼 벅찼어요.” 이 작품은 에스파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2~1582년)가 자서전에서 천사가 신성한 사랑의 창으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환상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찰나의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3. 1506년 1월14일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포도밭을 갈던 한 농부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졌다. 땅을 파던 중 고통스런 얼굴을 한 남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는데 죽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티투스 황제 궁전에 있다가 1500년 동안 사라졌던 ‘라오콘 군상(BC 175~150, 205 x 158 x 105, 대리석, 바티칸미술관)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2세가 미켈란젤로를 발굴 현장에 보냈는데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품을 본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조각 중앙에서 온 몸을 뒤틀고 있는 남자는 트로이 신관 라오콘이고 양쪽 두 아이는 그의 아들입니다. 왼쪽 아이는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고, 오른쪽 아이는 뱀에 휘감겨 꼼짝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때 바다뱀 한 마리가 라오콘의 옆구리를 덥석 물어버립니다. 순간 라오콘의 몸이 고통에 뒤틀리고 얼굴은 하늘을 향해 몸부림칩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입과 일그러진 얼굴에서 고통보다는 탄식과 허무함이 더 느껴집니다.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은 어쩌다 이같은 고통에 처해졌을까요. 트로이 전쟁에서 성문을 열지 못한 그리스연합군은 커다란 목마를 남기고 그리스로 철수합니다. 당시 사제이던 라오콘은 그리스 군의 음모를 간파하고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다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아들들을 물어죽이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그리스 시대 로도스 섬의 예술가 아게산드로스, 플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 세 명이 공동작업으로 탄생시킨 걸작입니다. 그런데 라오콘 군상이 발견됐을 때 라오콘의 오른쪽 팔이 없었습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당대 예술가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1500년 동안 본 적이 없어 사라진 팔이 어떤 모습일지 주장이 다 달랐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몸의 형태와 근육을 볼 때 팔이 굽어져 있을 것이라 했지만 다른 예술가들은 쭉 뻗어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결국 쭉 뻗은 상태의 팔로 복원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1905년 본체가 발견됐던 근처에서 부러진 팔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됩니다. 라오콘 군상에 맞춰보니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 팔은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지금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모습입니다. #4.다시 돌아와 비뇨블 벨라 메두사 비오니에 와인을 엽니다. 비오니에는 프랑스 론 지역 화이트 품종입니다. 흰꽃과 약간의 장미꽃이 섞인 정말 화려한 향을 뿜어내며 살구, 복숭아 등 핵과류 과일향도 이 품종의 특징입니다. 산도는 미디엄이나 그 이하로 묵직하지만 우아한 맛과 향으로 향수같은 와인으로 표현됩니다. 잔을 가까이 하면 역시 절제된 유질감 있는 꽃향이 먼저 반깁니다. 중간중간 산뜻하고 관능적인 장미향도 들어옵니다. 과실향은 많지 않습니다. 입에 흘려보면 그제서야 알맞게 익은 복숭아, 살구 등의 아로마가 얹혀집니다. 산도는 굉장이 절제돼 있어 와인이 전체적으로 무겁습니다. 과실 아로마도 열대과일 등은 없습니다. 비오니에는 본고장인 론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언제나 한결같은 고급스런 향수의 모습을 보입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2024-02-20 15:25:38[파이낸셜뉴스] 무한리필 식당에서 5시간 넘게 머무르다 70대 주방 직원을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한 진상손님의 사연이 전해졌다. 19일 자영업자 커뮤니티 '아프니까 사장이다'에는 '손님이 70세 넘으신 이모님 얼굴을 폭행했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을 쓴 A씨는 무한리필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무한리필이라고 해도 2시간 이용 시간 있다. 하지만 바쁘지 않으면 따로 나가라고는 안 한다"고 운영 지침을 소개했다. 사건 발생 당일은 초등학생 10명, 어른 1명으로 구성된 단체 손님이 방문했다. A씨는 "5시간 반 동안 머무르면서 아이들이 계속 반찬을 가져다 먹길래 정중하게 (이용 시간이 끝났다고) 말씀드리고 돌아섰다"며 "70세 넘으신 주방 이모님이 테이블 정리해준다고 나오셨다가 아이가 갑자기 빽 지르는 소리에 놀라 '아우 귀 따가워' 한마디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한마디에 아이 엄마가 쌍욕을 퍼붓더니 몸으로 밀치고, 다른 직원이 말리는 도중에 이 이모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며 "자기 아이 소중한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이 엄마 나이가 많아야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이렇게 대하다니) 종업원, 자영업자들은 하층민인가 보다"라고 하소연했다. A씨의 사연에 누리꾼들도 함께 분노했다. 한 누리꾼은 "진상이 죄송해야 할 판에 어디 손을 올리냐"고 댓글을 남겼다. 또 다른 누리꾼도 "아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싸우고 폭행하고, 참 좋은 꼴 보여준다"라고 지적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2024-02-19 16:35:16'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샤또 샤스 스플린(Chateau Chasse Spleen)은 '보들레르의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는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현대 시의 출발점이 된 시인입니다. 1800년대 중반 황금기를 맞았던 프랑스 시단이 보들레르의 시를 중심으로 두 시대로 나뉠 정도입니다. 하지만 시집은 단 한권 뿐입니다. 그 유명한 '악의 꽃(Les fleurs du mal)'. 보들레르는 타고난 천재 예술가였지만 그의 삶은 온갖 기행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음굴에 빠져 살더니 성년이 되자마자 술, 도박, 마약으로 상속받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탕진합니다. 가족에 의해 금치산자로 지정받은 그는 죽을때까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을 살던 그에게 순간순간 빛을 보여준 와인이 바로 샤스 스플린입니다. 샤스 스플린은 또 미술사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올랭피아(1863년, 130*190cm, 캔버스에 유화, 오르세 미술관)' 탄생에 간접적이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나아가 현대 미술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데 일조를 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큐비즘(cubism)' 등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샤스 스플린 이 와인이 보들레르, 마네, 피카소와 어떻게 얽혀있을까요. ■ 어둠에 빠진 보들레르에 순간순간 빛이 되어 준 와인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난 보들레르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정말 손꼽히는 자유분방한 기인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때도 천재성과 독특한 기행으로 유별났지만 21살 성년이 된 뒤에는 불과 25개월 만에 그의 친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10만 프랑이 넘는 돈의 절반을 탕진합니다. 술, 매음, 마약, 도박 중독에 빠진 결과였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그의 가족들은 보들레르에 대해 금치산자 지정을 요청하고 남은 돈 모두를 법정후견인에 맡겼습니다. 덕분에 그는 죽을 때까지 경제적 미성년자로 살았습니다. 사실 보들레르는 이미 대학 입학 한참 전부터 유대인 매춘부에 빠져 사창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때 걸린 성병은 그가 죽던 46살 때까지 지독하게 괴롭힙니다. 그는 또 단역 배우 출신 잔느 뒤발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3대가 창녀 집안인 여성이었습니다. 보들레르는 그녀를 '검은 비너스'라 부르며 무려 14년간 치명적인 사랑을 합니다. 1857년 그의 나이 36살에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악의 꽃'이 출간됩니다. 성년 이후 15년 간 살아온 모든 것이 담긴 작품이었지만 시집의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두가 매춘, 성행위, 동성애, 시체, 죽음 등에 대한 묘사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평론가 중 극히 몇몇은 "열정과 예술이 가득 찬 대작"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절대 다수는 "그냥 타락한 쓰레기"라며 조롱했습니다. 결국 보들레르는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기소돼 벌금형과 함께 유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후 보들레르는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우울증과 성병에 마비 증세까지 겹쳐 더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져내리던 시기, 보들레르가 즐겨 마셨던 와인이 샤스 스플린입니다. 어쩌면 우울증으로 자칫 삶을 내려놓을수도 있던 그 때 그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운 와인입니다. 하지만 이 와인은 보들레르가 즐겼던 당시에는 그냥 저렴하고 품질 좋은 이름조차 없는 와인이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이라는 이름은 1700년대 말 영국 시인 바이론이 샤스 스플린 집안에서 와인을 비롯한 환대를 받은 후 "우울증(Spleen)을 쫒는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는 것에 착안해 1800년대 중반 이 와이너리의 오너가 '샤스 스플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샤스 스플린 라벨에는 해마다 싯구절 한 문장이 붙습니다. ■ 보들레르를 스승으로 모시던 마네 '올랭피아'를 그리다 1865년 파리의 한 살롱에 걸린 그림 하나가 프랑스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누런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낸 전라의 여인이 침대에 누워 무표정한 얼굴로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는 이 그림에 프랑스 사회는 마치 치부를 들킨 듯 불쾌감을 넘어 분노까지 표출합니다. 심지어는 갑자기 우산을 들고 그림을 찢으려 달려드는 사내도 있었습니다.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어떤 그림이었길래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해 경찰이 그 앞을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사람들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리기까지 했을까요.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 165*119cm, 캔버스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를 오마주 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림 구도는 물론이고 옷을 벗고 누워있는 여인의 자세, 다른 등장인물까지 모두 똑같습니다. 그런데 누워있는 비너스가 이전의 비너스와 너무 달랐습니다. 마네가 그린 비너스는 신화 속 우아한 비너스가 아니었습니다. 창녀였습니다. 그녀의 목을 장식한 '초커 목걸이'는 매춘부를 상징하는 장신구였습니다. 그림 제목 '올랭피아(Olympia)'도 당시 매춘부들이 주로 사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림 속 흑인 여성이 들고 있는 꽃다발은 스폰서가 그녀에게 보낸 선물입니다. 이 그림은 신화의 한 장면이 아닌 당시 프랑스 도시 곳곳에서 성행하던 매춘의 현장을 사진처럼 담아낸 그림이었습니다. 마네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미술 천재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명 작가로부터 그림을 배운 고전주의를 신봉하는 화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비너스를 창녀로 둔갑시키며 당시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을 그렸을까요. 그건 보들레르 때문이었습니다. 마네는 11살 위인 보들레르를 정신적 스승으로 흠모했습니다. 그런 보들레르는 늘 "각 시대는 자신만의 자세와 시선, 몸짓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그 말은 "신화나 과거 사회의 모습이 아닌 현대사회 지금 그대로의 생활상을 그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마네가 고전적 화풍을 버리고 시대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정말 파격이었습니다. 당시엔 과거의 명작을 오마주할 경우 그림 속 인물은 반드시 신화, 성서 속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화, 성서 속 이야기를 얼마나 잘 해석하고 그에 가깝게 그렸는지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 속 인물들은 1860년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앞서 1600년대 카라바조가 성화 속 이야기에 그가 일상에서 만난 하층민을 그려넣었던 것처럼 파장이 못지 않았습니다. 마네가 이에 앞서 1863년 발표한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년, 208*264㎝,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도 이 때문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와 라파엘로의 원작을 모사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을 일부 재해석 한 작품으로 마네의 그림 속에서 옷벗은 여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누드 모델이었고,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그의 매제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랭피아가 왜 미술사의 걸작으로 꼽힐까요. 사실 이 그림은 덧칠이 거의 없어 그리다 만 것 같은데다 원근법조차 적용되지 않아 밋밋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여인을 그릴 때 살결을 붓질 하나 보이지 않게 하얗게 칠하고, 드레스도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빛나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신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죠. 그러나 올랭피아의 여인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습니다. 더구나 올랭피아는 회화의 절대 진리이던 원근법마저 파괴했습니다. 매춘부와 침대, 배경 등이 입체감 없이 그냥 붙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모든 비평가들은 "마네의 실력이 형편없어졌다"고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이같은 파격적인 그림으로 인해 프랑스 젊은 화가들이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본대로 느낀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 현대미술로 가는 문을 연 것입니다. ■ 현대 미술로 가는 문을 열다…피카소도 여기서 나왔다 마네는 1882년 '폴리베르제르바(1882년, 96*130㎝, 캔버스에 유채)'를 발표하며 또 한 번 미술계에 '거대한 수수께끼'를 던집니다. 파리의 유명 술집이던 폴리베르제르의 여성 바텐더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딘지 그림이 좀 이상합니다. 그림 속 여성 바텐더는 정면을 보고 있는데 뒤의 거울에 이 여성의 뒷모습이 비쳐져 있습니다. 사물의 원리대로라면 이 여성의 모습은 가려져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뒷모습이 그림에 나온 것입니다. 이 작품은 마네가 임질에 걸려 마비 증세로 고생하다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마네가 실수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의 그림에 두 개의 '시점'이 적용된 것입니다. 이 그림은 '복수의 시점'을 적용한 최초의 그림으로 나중에 '큐비즘(cubism)'의 시작점이 됩니다. 큐비즘은 3차원적으로 구성된 사물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마치 여러 각도에서 그린 그림 여러 개를 가위질 해 하나로 붙이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마네가 그린 복수의 시점 그림은 훗날 야수파의 원조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 등을 거쳐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243*233 cm, 캔버스에 유채, 뉴욕현대미술관)'이라는 걸작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샤스 스플린을 마셔보니…가난한 자의 라뚜르 샤스 스플린 와인으로 시작해 보들레르, 마네, 피카소까지 멀리도 왔네요. 이처럼 보들레르의 목숨을 구하고, 현대미술 탄생에 간접적인 역할을 한 샤스 스플린은 보르도 와인 중에 저평가 된 대표적 와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만큼 뛰어난 품질을 가졌음에도 가격이 저렴해 이른바 '가성비 와인'이라는 것이죠. 시중에서 올드 빈티지만 아니라면 7만원 안팎에 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일각에선 '가난한 자의 라뚜르(Chateau Latour)'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샤스 스플린 2017을 열어봅니다. 뽑혀 올라온 코르크에서는 좋은 와인에서 맡을 수 있는 삼나무 향과 블랙 커런트 향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잔에 따라진 와인은 짙은 루비빛입니다. 너무 어린 와인이라 1시간 정도 디캔팅을 진행해 숨을 불어넣습니다. 잔에서 올라오는 향은 블랙 계열의 아로마와 삼나무 향, 젖은 나뭇잎, 젖은 이끼 등 서늘한 향이 지배적입니다. 입에 넣어보면 블랙 커런트 아로마와 매력적인 산도가 일품입니다. 와인이 입속에서 사라질때쯤 모습을 드러내는 타닌은 다소 두껍고 거칩니다. 세월이 녹아들 시간이 필요해 보이지만 입속을 제대로 말려버립니다. 이어 비강으로 들어오는 삼나무, 커피, 초콜릿, 연유, 바닐라 향이 좋습니다. 피니시도 두 숨 이상 이어지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삼나무향입니다.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중략)...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의 앞 부분과 마지막 부분으로 한참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생'에 나왔던 대사이기도 합니다. 오늘 샤스 스플린 한 잔 어떤가요. 보들레르처럼 지치고 힘든 날에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에도 샤스 스플린은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2022-09-04 18:2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