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5년 5월 9일 한 가족의 행복은 무너져 내렸다. 이후 애통하고, 애끓는 세월을 보내왔다. 무려 44년간이다. 충북 청주에 사는 한태순씨(72)의 딸 경하(당시 5세)는 집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한씨는 경하와 함께 시장에 가려고 했으나 친구들과 어울리겠다고 해 어린 동생들만 데리고 갔다. 하지만 두시간 후 돌아와보니, 경하는 없었다. 한씨와 남편은 경찰서로 달려가 실종신고를 접수했다. 다른 두 자녀를 데리고 거의 매일 경찰서로 출근했다. '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경찰은 "기다려 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씨 부부는 딸의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전국의 고아원, 정신병원 등을 비롯해 심지어 섬까지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딸을 행방을 아는 이들은 없었다. 한씨가 딸을 못 찾은 이유는 뒤늦게 밝혀졌다. 실종된 지 2개월 만에 입양기관으로 인계돼 해외입양이 추진됐고, 그로부터 7개월 만에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한씨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해외입양 가족을 찾아주는 단체인 '325KAMRA(캄라)'에 DNA를 등록하고, 성인이 된 딸의 몽타주도 제작했다. 그렇게 딸을 찾아 헤맨 지 44년 되던 2019년 10월 4일 한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캄라였다. 한씨와 유전자가 90% 일치하는 해외입양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10여일 뒤 꿈에도 그리던 딸의 모습을 확인한 한씨는 기쁨과 슬픔, 미안함, 지난 세월의 안타까움이 섞인 눈물을 쏟아냈다. 한씨는 딸이 해외입양됐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을 당시 경하는 미아로 발견돼 지역 경찰서에 있었다. 경찰에서 노력만 했다면 사실상 얼마든지 가족을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한씨와 가족들이 국가와 당시 아이를 보호하던 영아원, 입양기관을 상대로 총 6억원의 배상을 청구한 이유다. 실종 아동이 부모를 찾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된 사례에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은 처음이다. 소송 대리를 맡은 아동권리연대는 "부모들은 수십년간 딸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지내야 했고, 실종됐던 딸은 부모와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은 채 고통과 상처 속에서 살아야 했다"며 "아동이 실종된 이후 원고 부모는 매일같이 경찰서를 찾아가며 아동을 찾았지만, 당시 지자체와 경찰은 법령에서 부과하고 있는 보호자 확인 의무, 보호자에 대한 통지 및 인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 아동을 입양기관에서 인계하도록 두어 결과적으로 미아인 아동에 대해 부모를 찾아 주기보다 해외입양 수요 충족을 위해 부당한 입양이 진행되도록 일조했다"고 지적했다. 한씨에겐 고통으로 잃어버린 시간이 한으로 남았다. 딸을 찾아 만난 기쁨도 잠시, 지금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너무 고통스럽다고 한씨는 토로했다. 한씨는 "실종 가족들은 아이를 찾다 병들고 재산을 탕진하고 비극적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실종 부모들 앞에 백배사죄하라"고 울분을 토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4-10-28 18:10:33[파이낸셜뉴스] 지난 1975년 5월 9일 한 가족의 행복은 무너져 내렸다. 이후 애통하고, 애끓는 세월을 보내왔다. 무려 44년간이다. 충북 청주에 사는 한태순씨(72)의 딸 경하(당시 5세)는 집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한씨는 경하와 함께 시장에 가려고 했으나 친구들과 어울리겠다고 해 어린 동생들만 데리고 갔다. 하지만 두 시간 후 돌아와보니, 경하는 없었다. 한씨와 남편은 경찰서로 달려가 실종신고를 접수했다. 다른 두 자녀를 데리고 거의 매일 경찰서로 출근했다. '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경찰은 "기다려 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씨 부부는 딸의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들고 전국의 고아원, 정신병원 등을 비롯해 심지어 섬까지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딸을 행방을 아는 이들은 없었다. 한씨가 딸을 못 찾은 이유는 뒤늦게 밝혀졌다. 실종된 지 2개월 만에 입양기관으로 인계돼 해외입양이 추진됐고, 그로부터 7개월 만에 미국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한씨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해외입양 가족을 찾아주는 단체인 '325KAMRA(캄라)'에 DNA를 등록하고, 성인이 된 딸의 몽타주도 제작했다. 그렇게 딸을 찾아 헤맨 지 44년 되던 2019년 10월 4일 한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캄라였다. 한씨와 유전자가 90% 일치하는 해외입양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10여일 뒤 꿈에도 그리던 딸의 모습을 확인한 한씨는 기쁨과 슬픔, 미안함, 지난 세월의 안타까움이 섞인 눈물을 쏟아냈다. 한씨는 딸이 해외입양됐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을 당시 경하는 미아로 발견돼 지역 경찰서에 있었다. 경찰에서 노력만 했다면 사실상 얼마든지 가족을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한씨와 가족들이 국가와 당시 아이를 보호하던 영아원, 입양기관을 상대로 총 6억원의 배상을 청구한 이유다. 실종 아동이 부모를 찾지 못하고 해외로 입양된 사례에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은 처음이다. 소송 대리를 맡은 아동권리연대는 "부모들은 수십년간 딸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지내야 했고, 실종됐던 딸은 부모와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은 채 고통과 상처 속에서 살아야 했다"며 "아동이 실종된 이후 원고 부모는 매일같이 경찰서를 찾아가며 아동을 찾았지만, 당시 지자체와 경찰은 법령에서 부과하고 있는 보호자 확인 의무, 보호자에 대한 통지 및 인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채 아동을 입양기관에서 인계하도록 두어 결과적으로 미아인 아동에 대해 부모를 찾아 주기보다 해외입양 수요 충족을 위해 부당한 입양이 진행되도록 일조했다"고 지적했다. 한씨에겐 고통으로 잃어버린 시간이 한으로 남았다. 딸을 찾아 만난 기쁨도 잠시, 지금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너무 고통스럽다고 한씨는 토로했다. 한씨는 "실종 가족들은 아이를 찾다 병들고 재산을 탕진하고 비극적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실종 부모들 앞에 백배사죄하라"고 울분을 토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4-10-28 14:47:59[파이낸셜뉴스] "사람들이 제게 감사하냐고 물으면 저는 무엇에 대한 감사냐고 되묻습니다. 한국에서 팔려 이곳에 왔다는 것에 대해서요? 한국의 뿌리, 가족, 정체성을 잃은 것에 대해서요? 아니면 당신에게 감사할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음 생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입양인이 되는 것만은 절대 고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제가 직접 나라를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한국을 고를 것입니다." (책 본문 중) 1968년생 니아 토프타게르는 뇌성마비를 앓았다. 그녀는 다섯 살 때 벨기에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그 가정에는 이미 자녀가 넷이나 있었지만 장애를 가진 니아가 다른 데서 입양을 거부당하자 그의 양부모가 맡게 됐다. 그들은 니아에게 어떤 애정도 주지 않았다. 니아는 16세 무렵 부모로부터 집을 떠나라는 말을 듣는다. 책 '자기 자신의 목격자들'은 생후 몇 개월 혹은 몇 년 만에 해외로 입양된 이들이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책에는 덴마크 입양인 21명, 노르웨이 입양인 5명, 네덜란드 입양인 4명, 미국 입양인 3명, 벨기에 입양인 2명 등의 이야기가 포함됐다. 이들은 세상에 태어났지만 친부모와 가족, 국가와 사회에 없는 사람이 된 존재를 스스로 입증하며 살아야 했다고 전한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2024-10-23 11:01:21[파이낸셜뉴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매일 생각해요.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다섯살 때 실종돼 가족과 헤어졌던 박동수씨(45)는 지난 40년간 찾아 헤맸던 가족을 최근 화상통화로 만났다. 박씨는 1984년 어머니를 찾겠다며 경남 김해의 친척집을 나섰다가 실종됐다. 박씨가 40년간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머니 이애연씨(83)는 화면 속 아들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봤다. 가족들이 박씨를 찾을 수 없었던 건 1985년 박씨가 미국으로 입양됐기 때문이었다. 박씨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대학생 시절인 지난 2001년부터 여러 차례 한국에 방문했다. 뿌리를 찾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늘 빈속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박씨의 상황은 대구 달서구 소재 계명대 어학당을 다녔던 지난 2012년 경찰서에서 유전자 등록을 하면서 달라졌다. 등록 당시 일치하는 유전자 등록 정보가 없었지만 친형인 박진수씨가 지난 2021년 잃어버린 동생들을 찾겠다며 실종 신고를 하게 되면서 헤어진 동생 박씨와 연이 닫게 됐다. 등록 당시 어머니의 유전자를 채취해 등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해외로 떠난 입양인은 정부의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 덕분에 가족을 찾기에 용기를 내고 성과로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유전자 검사 제도를 통해 잃어버린 가족 찾기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는 한인입양인이 입양정보공개 청구, 재외공관 유전자 채취 등의 과정을 거쳐 채취된 유전자 검체를 외교행낭으로 경찰청에 보내 실종자 가족 유전자 정보와 대조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정부는 관련 제도를 확대 운영할 예정이며 상봉 이후 행정 등 사후관리 지원 사업도 이어간다는 구상이다. 19일 경찰에 따르면 아동권리보장원과 경찰청, 외교부는 지난 2020년부터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제도 시행 이후 박씨의 사례처럼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가족을 찾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4살에 가족과 헤어지고 3년 뒤 입양된 김장미씨(58)의 경우 성인이 되고 나서 30년 동안 가족을 찾았다고 한다. 김씨는 세차례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보가 부족해 가족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김씨는 지난 7일 어머니인 김명임씨(80)와 극적으로 상봉했다. 김명임씨가 지난 2017년 유전자를 등록한 덕에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들은 광주 남구 충현원에서 54년만에 마주했다고 한다. 아동권리보장원은 경찰청과 함께 '실종아동 등 사후관리 지원 사업'을 통해 가족들의 상봉 이후 행정절차, 비용 및 심리상담 등을 지원할 방침이다. 또 입양인 뿌리 찾기를 위한 전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동권리보장원 관계자는 "입양인의 뿌리 찾기를 위해 과거 입양 정보에 대한 전산화 작업을 지속하는 등 관리 체계 구축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찰에 따르면 전후 60여년간 해외 14개국으로 입양된 아동은 약 17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유기 등으로 친부모 정보가 남아있지 않은 '무연고 아동'은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4-08-19 13:14:01해외입양 과정에서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사건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올해 하반기에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국가책임 여부를 발표할 예정이다. 27일 진실화해위는 서울 중구 남산스퀘어빌딩에서 '조사개시 3주년 기자간담회'를 개최하며 이런 사실을 밝혔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해외 입양 인권침해에 대해 3차에 걸쳐 진상규명 조사 개시 결정이 이뤄졌고, 모두 367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 해외입양 인권침해 사건은 친부모가 있는 영유아, 아동이 유괴되거나 부모의 동의 없이 해외로 입양된 사건이다. 해외입양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시작돼 고아입양특례법(1961), 입양특례법(1976) 등에 따라 보건사회부 장관이 허가·감독한 입양알선기관이 실시해 왔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친생부모가 있음에도 고아 혹은 제3자의 신원으로 조작돼 입양된 사실 등이 확인됐다. 네덜란드 등 입양 수령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과거 해외입양 과정에 국가 등의 불법행위와 아동·친생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중대 인권침해가 있었던 점도 밝혀졌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1월부터 1970~1990년대 해외입양을 담당했던 4개 입양기관(홀트아동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 동방아동복지회(현 동방사회복지회))의 입양 관련 서류를 확보하기 시작해 조사 신청자 진술과 비교하는 등 조사를 벌이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확보한 입양기관 서류에서 불법입양으로 보이는 조작 사례를 일부 확인했다. 생모의 출산기록과 아이의 입양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도 고아로 서류를 꾸민 사례 등이다. 또 진실화해위는 해외입양 과정에서 관련법의 위헌 여부와 위법성 여부를 다투고 있다. 피입양인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권리침해 여부도 판단하고 있다. 특히 해외입양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책임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1차 조사 결과 발표를 올 하반기에 발표할 예정이다. 해당 발표는 해외입양과 관련된 첫 발표로, 국가책임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향후 관련 국가배상소송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법원은 신송혁씨(48·아담크랩서)가 정부와 홀트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홀트의 배상 책임은 인정했으나 정부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지난 1979년 세살이었던 신씨는 미국에 입양돼 양부모의 학대 끝에 파양됐다. 이어 두번째 양부모 밑에서도 학대가 이어지며 재차 파양을 겪었다. 결국 신씨는 성인이 될 때까지 시민권을 얻지 못하다가 영주권 재발급 과정에서 청소년 시절 경범죄 전과를 이유로 2016년 한국으로 추방됐다. 신씨 측은 홀트가 입양 당시 신씨의 친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아로 호적을 꾸며 해외로 보냈다고 주장하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신씨는 우리나라 정부에 대해서도 홀트 등 입양기관이 모든 국제입양 절차를 대리할 수 있게끔 하는 '대리입양 제도'를 허용하는 등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4-05-27 18:17:24"'친엄마를 한 번만이라고 볼 수 없을까' 하고 미국에서 30년 만에 고향인 부산을 어렵게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던 그 애틋한 눈빛과 간절함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 한곳이 저미는 것 같습니다." 국내 4대 회계법인 EY한영의 부산오피스 책임자로 있는 박기현 파트너는 7년 전 '해외입양인이 헤어진 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전단지를 갖고 친모를 찾기 위해 태어난 부산을 찾은 해외입양인 A씨를 도운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박 파트너는 전 세계 20만 한인 국외입양인 네트워크 운영과 권익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사단법인 해외입양인연대(GOAL) 이사 중 유일하게 부산에서 활동한다. 지난 1998년 설립된 이 단체는 해외입양인 모국방문 행사와 한국국적 회복, 위기에 처한 해외입양인 무료법률 지원 등에 발벗고 나서면서 2022년 해외입양인 지원 공로로 기관 대통령표창과 지난해 사무총장 국무총리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가 부산오피스 책임자로 있는 EY한영은 2023년 기준 현대자동차, 한전, SK텔레콤, 네이버, 삼성물산, 한화, BNK금융지주 등 굴지의 국내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직전 연도에 8000억원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EY한영은 무엇보다 지역의 기업을 돕고 인재도 키운다는 이념으로 '빅4' 회계법인 중 유일하게 부산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박 파트너는 아직도 7년 전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A씨를 도왔던 하루가 매우 긴박하고 길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 한국을 찾은 A씨는 부산역 인근 EY한영 부산오피스에서 그녀를 돕겠다고 자원한 다른 두 명의 여성 자원봉사자를 만나 박 파트너와 함께 친엄마 찾기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30년 전 입양을 도왔던 사회복지단체부터 방문해 보기로 하고 당시 행적을 되밟는 절차를 진행했다. 부산시청과 조숙아로 치료받았던 종합병원, 태어났던 조산원 등을 차례로 동행하면서 동분서주했던 일들이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박 파트너가 적은 'A씨와 함께 한 하루'라는 일기에는 그날 일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2017년 8월 29일 오전 10시, 부산역으로 그녀가 왔다. 음력으론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 칠석날에. 올림픽이 있던,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이라던 1988년 겨울 부산에서 태어난 그녀는 해를 넘기자마자 미국 시애틀 중산층 가정에 입양돼 30년을 보냈고, 수소문 끝에 ㈔해외입양인연대라는 단체의 '퍼스트 트립 홈'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방문했다. 친모를 찾기 위해 30년 만에 부산에 왔고,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그녀를 내가 도와야 한다. 사회복지센터, 부산시청, 종합병원, 조산원을 돌며 그녀의 바람을 얘기했다. 사정을 들은 모든 분들이 적극 도우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마치 친딸을 대하듯 했고, 공무원들은 시청 게시판에 친모를 찾겠다는 그녀의 사연을 직접 게시해 주었다. 우리 모두의 소망과 달리 친모의 행적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가족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불안감이 들 때쯤 그녀가 조금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엄마를 비난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고. 미국에서 대학도 나오고, 직업도 있고, 차도 있고, 집도 있고, 나 이만큼 잘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온 거라고. 만약 그녀가 한국 온 걸 안다면 엄마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담담히 내뱉는 그녀와 달리 나도 모르는 격한 감정이 차올라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저녁 7시 남은 일정을 갈무리하고 전남 완도로 향했다. 친모의 고향이 완도라고 한다. 그녀는 그곳에 가보길 원했다. 잠시라도 친모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나 보다. 부산을 떠나 완도로 향하는 4시간 동안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늦은 밤 가로등만 희미한 시골길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창밖보다 더 어두운가 보다. 숙소에 도착해 그녀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될까? 내가 겪은 그 어떤 아픔도 오늘 그녀의 절망에 비할 수 없는데. 다시 혼자서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겨우 운전을 이어가고 집 근처 다다르니 어김없이 새벽 4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에겐 태어나 가장 슬픈 어떤 날이, 나에겐 그저 지치고 졸린 하루가 되어 이렇게 지나간다.' 박 파트너는 A씨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감사하다'는 엽서와 간단한 시애틀 기념품을 보내왔는데 그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올 들어 지난 1월 7년 만에 한국 방문 당시 박파트너의 배려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돼 그 후 학업에 매진, 간호사가 됐다는 멋진 소식을 알려왔다고 기뻐했다. 지난달 A씨가 보내온 이메일이다. 안녕하세요 박 선생님: 저는 2017년 해외입양인연대 프로그램에 참가자로 그때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간호사이고, 3월 말에 한국을 재방문할 예정입니다. 저를 부산과 완도로 데려다주신 것에 감사드리기 위해 직접 뵙거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친엄마를 찾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친절은 제 삶을 바꾸었고 그 후 간호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부족한 저를 위해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얼마나 멋진 분이었는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박 파트너는 21일 "이번 A씨 일을 경험하면서 유년기의 행복한 추억이 평생을 살아가는 행복발전소인데, 전쟁·사건·사고 등으로 부모와의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며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겠다"고 전했다. 이어 "회계법인 파트너로서의 기쁨은 고객기업이 발전하도록 이끄는 것이지만 누군가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큰 행복 중 하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2024-02-21 18:37:15[파이낸셜뉴스] "'친엄마를 한번만이라고 볼 수 없을까' 하고 미국에서 30년만에 고향인 부산을 어렵게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던 그 애틋한 눈빛과 간절함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 한곳이 저미는 것 같습니다." 국내 4대 회계법인 'EY한영' 부산오피스 책임자로 있는 박기현 파트너는 7년 전 '해외입양인이 헤어진 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전단지를 갖고 친모를 찾기 위해 태어난 부산을 찾은 해외입양인 A씨를 도운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박 파트너는 전세계 20만 한인 국외 입양인 네트워크 운영과 권익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사단법인 해외입양인연대(GOAL) 이사 중 유일하게 부산에서 활동 중이다. 지난 1998년 설립된 이 단체는 해외입양인 모국방문행사와 한국 국적 회복, 위기 처한 해외입양인 무료법률 지원 등에 발벗고 나서면서 2022년 해외입양인 지원 공로로 기관 대통령표창과 지난해 사무총장 국무총리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가 부산오피스 책임자로 있는 EY한영은 2023년 기준 현대자동차, 한전, SK텔레콤, 네이버, 삼성물산, 한화, BNK금융지주 등 굴지의 국내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직전 연도에 8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EY한영은 무엇보다 지역의 기업을 돕고 인재도 키운다는 이념으로 빅4 회계법인 중 유일하게 부산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박 파트너는 아직도 7년 전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A씨를 도왔던 하루가 매우 긴박하고 길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 한국을 찾은 A씨는 부산역 인근 EY한영 부산오피스에서 그녀를 돕겠다고 자원한 다른 두명의 여성자원봉사자와 만나 박 파트너와 함께 친엄마 찾기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30년전 입양을 도왔던 사회복지단체부터 방문해 보기로 하고 당시 행적을 되밟는 절차를 진행했다. 부산시청과 조숙아로 치료받았던 종합병원, 태어났던 조산원 등을 차례로 동행하면서 동분서주했던 일들이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박 파트너가 적은 'A씨와 함께 한 하루'라는 일기에는 그날 일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2017년 8월 29일 오전 10시, 부산역으로 그녀가 왔다. 음력으론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 칠석날에. 올림픽이 있던,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이라던 1988년 겨울 부산에서 태어난 그녀는 해를 넘기자마자 미국 시애틀 중산층 가정에 입양돼 30년을 보냈고, 수소문 끝에 (사)해외입양인연대라는 단체의 '퍼스트 트립 홈(First Trip Home)'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을 방문했다. 친모를 찾기 위해 30년만에 부산에 왔고,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그녀를 내가 도와야 한다. 사회복지센터, 부산시청, 종합병원, 조산원을 돌며 그녀의 바램을 애기했다. 사정을 들은 모든 분들이 적극 도우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마치 친딸을 대하듯 했고, 공무원들은 시청 게시판에 친모를 찾겠다는 그녀의 사연을 직접 게시해 주었다. 우리 모두의 소망과는 달리 친모의 행적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가족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불안감이 들 때쯤 그녀가 조금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엄마를 비난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고. 미국에서 대학도 나오고, 직업도 있고, 차도 있고, 집도 있고, 나 이만큼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온 거라고. 만약 그녀가 한국 온 걸 안다면 엄마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담담히 내뱉는 그녀와 달리 나도 모르는 격한 감정이 차올라 그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저녁 7시 남은 일정을 갈무리하고 전남 완도로 향했다. 친모의 고향이 완도라고 한다. 그녀는 그곳에 가보 길 원했다. 잠시라도 친모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싶었나 보다. 부산을 떠나 완도로 향하는 4시간 동안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늦은 밤 가로등만 희미한 시골길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창밖보다 더 어두운가 보다. 숙소에 도착해 그녀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될까? 내가 겪은 그 어떤 아픔도 오늘 그녀의 절망에 비할 수 없는데. 다시 혼자서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겨우 운전을 이어가고 집 근처 다다르니 어김없이 새벽 4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에겐 태어나 가장 슬픈 어떤 날이, 나에겐 그저 지치고 졸린 하루가 되어 이렇게 지나간다.' 박 파트너는 A씨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감사하다'는 엽서와 간단한 시애틀 기념품을 보내왔는데 그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올들어 지난 1월 7년만에 한국 방문 당시 박파트너의 배려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돼 그 후 학업에 매진, 간호사가 됐다는 멋진 소식을 알려왔다고 기뻐했다. 지난달 A씨가 보내온 이메일이다. 'Hello Mr. Park:(안녕하세요 박선생님) I was an old GOA'L participant from 2017 and you were very kind to me. I am a nurse now, and am planning on returning to Korea at the end of March. I would like to thank you in person or with a package from Seattle, WA (where I am from) for taking me down to Pusan and Wando. I did not find my birth mother, but your kindness changed my life and helped me study hard to become a nurse. Thank you for all you did for me, I did not deserve it. I will never forget how wonderful you were to me. I hope this is still a good contact! Thank you. (저는 2017년 해외입양인연대 프로그램에 참가자로 그때 선생님은 매우 친절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간호사이고, 3월 말에 한국으로 재방문할 예정입니다. 저를 부산과 완도로 데려다주신 것에 감사드리기 위해 직접 뵙거나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친엄마를 찾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친절은 제 삶을 바꾸었고 그 후 간호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부족한 저를 위해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얼마나 멋진 분이었는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박 파트너는 21일 "이번 A씨 일을 경험하면서 유년기의 행복한 추억이 평생을 살아가는 행복발전소인데, 전쟁·사건·사고 등으로 부모와의 추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며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겠다"고 전했다. 이어 "회계법인 파트너로서의 기쁨은 고객 기업이 발전하도록 이끄는 것이지만 누군가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큰 행복 중 하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2024-02-21 12:18:17[파이낸셜뉴스] 동물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며 버려진 유기견의 구조 및 입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프리미엄 반려동물 전문 브랜드 하이포닉은 동물구호단체 ‘코리안케이나인레스큐’(KK9레스큐)와 함께 국내에서 입양이 어려워 해외로 입양 가는 구조견을 대상으로 한 입양 키트를 지원한다고 24일 밝혔다. 하이포닉은 유기견 및 구조견도 위생에서 배제되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새로운 보호자를 찾을 수 있도록 브랜드 창립부터 동물 구조단체에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이번 협약에 따라 동물 구호단체인 KK9레스큐 구조견이 해외로 입양될 때마다 하이포닉 입양 키트 선물을 증정하기로 결정했다. 하이포닉 관계자는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은 무엇보다 새로운 가족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는 구조견의 첫 시작을 하이포닉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며 “앞으로도 구조견 돌봄에 대한 인식 개선과 입양문화 활성화를 위해 동물보호단체와의 협업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동물 구호단체인 사단법인 KK9레스큐는 지난 9월 1400여 마리의 피학대견이 발견된 화성 허가 번식장 구조에 참여한 동물구호단체로 자체 입양시설에서 구조견을 보호하며 치료, 재활, 훈련, 입양까지 지원하고 있는 전문기관이다. camila@fnnews.com 강규민 기자
2023-11-24 07:38:58[파이낸셜뉴스]"가족과 재회하게 된 것은 큰 축복입니다. 마침내 나의 과거와 뿌리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쁩니다." 42년 전 실종돼 독일로 입양된 정명준씨(46세, 실종 당시 4세, 독일 거주)는 친모와 지난 3월 16일 극적으로 만나며 이같이 밝혔다. 정씨는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를 통해 가족를 다시 만났다. 정씨는 "아동권리보장원 입양인지원센터는 유전자 검사 결과서를 대사관에 전달해주고, 중간에서 한국 경찰 및 친가족과 소통하는 등 많은 역할을 해줬다"며 "해외 한인 입양인 유전자 분석 제도가 있었기에 친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연고 없이 해외로 떠난 입양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 있다. 정부의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를 통해 친가족을 찾고 있는 것이다.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를 통해 친가족을 찾고 있다. 정부는 과거 입양정보에 대한 전산화 작업을 통해 제도를 확대 운영할 방침이다. 유전자로 가족 찾아 15일 경찰에 따르면 아동권리보장원과 경찰청, 외교부는 지난 2020년부터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해당 제도는 한인입양인이 입양정보공개 청구, 재외공관 유전자 채취 등의 과정을 거쳐 채취된 유전자 검체를 외교행낭으로 경찰청에 송부해 실종자 가족 유전자 정보와 대조해주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날 기준으로 보면 현재까지 입양인이 재외공관을 통해 유전자 등록을 한 건수는 251건이며, 상봉까지 이어진 사례는 정씨를 포함해 총 세 번째다. 경찰에 따르면 전후 60여 년간 해외 14개국으로 입양된 아동은 약 17만명이며, 이 중 유기 등에 의한 무연고 아동(친부모 정보가 남아있지 않은 경우)은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관계부처 협업 전에는 해외로 입양된 무연고 실종아동이 자신의 유전자를 등록하려면, 국내 입국 후 경찰서에 방문해 등록해야만 하는 절차의 불편함이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입양인이 한국에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현지에서 간편하게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다"며 "해외 입양 가능성이 있는 ‘장기실종아동’을 해외에서도 찾을 수 있도록 방법을 확대했다"고 밝혔다. 입양 기록 전산화 확대 정씨의 경우 대표적으로 유전자 분석이 친모를 찾는 게 한 몫했다. 정씨는 지난 1981년 1월 수원버스터미널에서 실종된 이후 독일로 입양됐다. 이후 성인이 돼 지난 2009년 국내 입국해 '가족을 찾고 싶다'며 수원서부경찰서에 방문해 유전자를 채취했으나, 당시에는 일치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친모가 지난해 6월 여주경찰서에서 '헤어진 아들을 찾고 싶다'며 유전자를 채취했고, 이를 계기로 지난해 7월 두 사람의 유전자 간에 친자관계 가능성이 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이 나왔다. 정확한 친자관계 확인을 위해 두 사람의 유전자를 재채취해 정밀한 2차 유전자 분석 작업이 필요했다. 문제는 정씨가 독일에 거주하고 있어 국내에 입국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경찰은 정씨에게 재외공관에서 유전자를 재채취할 수 있음을 안내했고 정씨는 지난해 11월 주독일 대한민국대사관에 방문해 유전자를 재채취했다. 국립과학수사원 감정 결과, 정씨가 친모의 친자임이 올해 1월 최종 확인됐다. 앞서 정부는 지난 2020년 미국인 A씨의 모녀와 지난 2021년 캐나다인 B씨의 남매의 상봉을 도왔다. 아동권리보장원 관계자는 "경찰청, 외교부 등 관계부처와 협력해 더 많은 해외 한인 입양인분들이 이 제도를 이용하여 가족을 찾으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를 위해 입양기관이나 아동복지시설 등에서 보유하고 있는 과거 입양정보에 대한 전산화 작업을 지속하는 등 관리체계 구축도 차질없이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3-05-15 13:03:56[파이낸셜뉴스] 곧 다가올 가정의 달. 5월 달력을 들춰보면 11일 아래에 '입양의 날'이라 적힌 작은 글씨가 보일 것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많은 아이들을 바다 건너 저 멀리 입양보내고 있는 2020년의 대한민국이 입양문제를 대하는 방식은 우리들이 입양의 날을 바라보는 방식과 상당히 닮아있다. 알지 못하고 알더라도 관심이 없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일 어린이 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과 가정의날, 부부의날까지 달력 곳곳에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일들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집의 경우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과 여동생의 생일까지 있다. 그야말로 시끌벅적한 가정의 달이다. 다른 가정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더라도 주변 공원과 유원지에 부모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어린 아이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가정의 달이라고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다. 어딘가는 불행한 이들이 존재한다. 수십 년 전 벨기에 가정으로 입양된 한국 출신 소년 융도 그런 아이 중 하나다. 여러 아이들을 입양해 기르는 벨기에 국적의 부모에게 처음으로 입양된 동양인 입양아. 전정식이란 이름을 가진 한국의 고아 소년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벨기에로 날아가 생면부지의 부모에게 입양되고, 다시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삶을 살아가기까지,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 기법을 번갈아 사용해 담아낸 <피부색깔=꿀색>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동양인 입양아로 살아갔던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다. 특히 영화는 소년이 겪어야만 했던 방황과 도피의 순간을 파고든다. 안으로는 가족으로부터 안정감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는 자신의 '다름'으로부터 끝없이 상처받은 한 소년의 고통이 곧 영화의 8할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벨기에의 어느 도시에서 완전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누구로부터도 위안을 얻지 못했던 소년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기껏해야 현실부정과 반항, 그리고 자기학대뿐이다. 잡지에서 일본문화를 접하고는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여기며 가족들과의 대화를 거부하다 집을 나오는 것부터, 매일 같이 쌀밥에 타바스코 소스를 뿌려먹고 건강을 망치는 등 온통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뿐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그런 융이 자존감을 되찾는 계기는 '그림'이다.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만나며 그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자신을 낳은 부모,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부터 버려지다시피 떠나보내졌지만 그림을 통해 조금씩 자존감을 회복한 융은 마침내 자신이 괴롭혔던 것들로부터도 해방돼 스스로를 인정하고 문제를 직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는 인정 받는 만화가가 된 융. 그런 그조차 자전적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한국 땅을 밟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연이 너무도 안쓰럽게 다가온다. 영화는 한 아이가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마침내 성장하는 성장드라마라기보단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돌아보고 그에 대해 고발하는 고발영화에 가깝다. 한 해에도 수천 명의 고아들을 해외로 '수출'하는 한국의 모습과 그렇게 보내진 아이들이 직면했던 삶에 대해 그려내는 고발성 짙은 영화, 하지만 영화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사실적이고 담담하게 복원하는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고발과 고백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마침내는 그 두 얼굴을 하나로 겹쳐내는 성숙한 영화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가 더욱 감동적이며 가슴아프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감독은 스스로 '이 영화는 스스로에 대한 받아들임과 용서에 대한 것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영화를 통해 한국의 국외입양 문제를 되돌아 보고자 합니다'라며 개인적인 차원의 극복과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제기라는 영화의 두 얼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2020년의 한국은 여전히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지난 60여 년간 해외로 입양된 한국 아이들만 해도 약 15만 명으로 서울 인구의 2%에 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이는 입양을 꺼리는 사회풍토는 물론이고 미혼모의 급격한 증가와 사회안전망의 미구축 등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연관돼 발생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지난 2012년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친모가 출생신고를 한 아이들에 한해서만 입양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오히려 더욱 많은 아이들을 버려지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당신들은 이겨낼 준비가 되었나요? 버려지는 아이들의 수는 많은데 아이를 입양하는 가정은 적다. 그래서 해외입양을 보내는 것 말고는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가정을 찾아줄 방법이 없다. 바로 이것이 해외입양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감독은 해외입양아들이 겪는 문제를 경험적으로 드러낸 이 영화를 통해 더는 과거와 같은 방식의 무차별적 해외입양이 이루어져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나아가 해외입양아뿐 아니라 미혼모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언급하며 이 모두를 고려해 정책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입양특례법과 같은 근시안적 대책들은 당사자들에게 더한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많은 수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으며 그 상당수가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입양문제를 직시하고 해결책을 찾는 대신 당사자들의 고통을 그저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본다. 영화 속 융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도피했을 때 그는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말지 않던가. 그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문제와 직면해 그와 싸웠던 순간 덕분이다. 이를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 해외입양과 관련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만이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병든 부분을 치유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언제고 잊혀지고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감추고 살아온 아이, 낮은 자존감에 무심코 던진 말에도 쉬이 상처입었던 소년, 어엿한 만화작가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표현하는 중년 사내. 융은 여전히 벨기에와 한국 사이의 어드메쯤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6년 전, 한국이 낳고 한국이 떠나 보냈던 그 아이가 제가 만든 영화를 들고 돌아와 우리 사회에 물음을 던졌다. 그 후 한국은 과연 얼마만큼 나아졌나. 되돌아볼 일이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2020-04-29 21:4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