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임진왜란(1592~1598년)이 발발하자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로 피난했다. 당시 태의(太醫)였던 허준은 피난길에 함께 올라 왕을 보살폈다. 다행히 선조는 다시 건강한 상태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는 허준을 지극히 신임했다. 선조는 애민정신이 강해서 항상 백성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래서 새로운 의서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는 중국의 의서도 들어와 있었고 조선에서 출간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가 있었지만, 이 의서들만으로 조선 백성들의 병을 쉽게 치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허준을 불러 하교를 하였다.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현존하는 잡다한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도록 하라. 또한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한글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인 정작, 태의인 양예수와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함께 관청을 설치해서 의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양예수는 허준보다 선배 어의였고, 정작은 민간 의사로 어의는 아니었지만 도교적 양생술과 함께 의학에 도통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이명원은 침술에 뛰어났으며, 김응탁과 정예남은 신참 어의였다. 허준은 가장 먼저 목차를 잡았다. 맨 앞에는 오장육부와 함께 각 기관이 그려진 신형장부도(身形藏府圖)라는 해부도를 넣고자 했다. 그 이유는 질병뿐만이 아니라 몸을 치료하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는 의안(醫案)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나서 정(精), 기(氣), 신(神), 혈(血)을 중심으로 해서 내과에 해당하는 내경편(內景篇), 근골격계와 외과에 해당하는 외형편(外形篇), 다양한 병증들을 다룬 잡병편(雜病篇), 본초를 분류하고 설명한 탕액편(湯液篇), 침구와 경락을 설명한 침구편(針灸篇) 순으로 편집하고자 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막바지에 일본군들이 다시 쳐들어왔다. 바로 정유재란(1597~1598년)이다. 의서 편찬에 참여한 어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허준은 어쩔 수 없이 의서의 편찬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고작 목차만 정해졌을 뿐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혼자서라도 의서를 편찬하도록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리고선 궁에 소장하고 있는 의서 500권은 내주고 새로운 의서를 편찬하는데 참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의서 편찬 작업이 절반 정도 이루어졌을 때 선조는 승하하고 말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허준은 선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주로 유배가 되었다. 선조가 죽자 어의였던 허준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허준은 광해군이 어렸을 때 천연두를 치료해 준 것 때문에 광해군 또한 허준을 신임했다. 그래서 허준은 유배 중에도 의서를 집필할 수 있었고 다행스럽게 바로 다음 해 유배에서 풀려났다. 허준은 선왕의 유지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서 의서를 집필했다. 1610년(광해군 3년), 허준은 드디어 새로운 의서를 완성했다. 집필을 시작해서 1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총 25권, 25책으로 방대한 양이었다. 허준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이름을 지어서 광해군에게 진상했다. 광해군은 동의보감을 읽어보고는 “선왕께서 편찬을 명한 책이 어리석은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 허준에게 태복마(太僕馬) 한 필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위로하노라. 그리고 서둘러 간행하여 온 나라에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라고 하교하였다. 그러자 내의원 제조가 아뢰기를 “동의보감은 이미 한 부를 필사해서 완성해 놓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책 수가 25권, 25책으로 많고 다른 의서와 달리 작은 두 줄로 소주(小註)가 달려 글자를 새기기 무척 어려워서 지방 인쇄소에 맡기는 것이 탐탁지 않습니다. 따라서 궁에 별로도 국을 설치해서 활자로 인쇄하고 의관들이 감수하고 교열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게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궁에 보관 중이던 금속활자를 왜놈들에게 모두 도난당했습니다. 송구하게도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를 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를 윤허했다. 감수와 교정의 책임을 맡은 감교관(監校官)으로는 통훈대부 내의원 직장(直長)인 이희헌과 통훈대부 내의원 부봉사(副奉事)인 윤지미가 맡았다. 제조가 목판인쇄가 아니라 목활자로 인쇄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목판인쇄는 책의 한 장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을 판 하나에 새겨서 인쇄하는 방식으로 손상되거나 오자가 생기면 판을 통째로 한꺼번에 모두 바꿔야 했지만, 목활자는 한 개의 한자를 양각으로 도장처럼 새겨서 한 글자씩 끼워 넣어서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누락된 한자나 손상된 한자만을 새로 만들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용이했다. 사실 전란을 겪으면서 목판인쇄로 사용할 만한 나무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결국 내의원자(內醫院字) 목활자로 인쇄하기로 했다. 내의원자라고 불리는 활자는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의 서체를 사용한 목활자본이다. 을해자란 1455년(세조 1년, 을해년)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당대의 명필가로 알려진 강희안(姜希顏)의 글씨를 본떠서 만든 구리활자를 말한다. 내의원자는 을해자를 바탕으로 목각(木刻)한 것으로 선조가 승하한 해부터 광해군 7년까지 내의원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목활자로 주로 의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훈련도감에서 출판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훈련도감에도 목활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동의보감은 내의원에서 직접 만든 내의원자 목활자를 이용해서 편찬, 인행, 교정까지 시행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음력 11월 어느 날, 동의보감 초판본이 세상에 나왔다. 동의보감이 완성된 지 3년 만이었다. 허준은 지대한 업적을 남긴 후 2년 만에 향년 77세에 별세했다. 이후 동의보감은 전남관찰영, 호남관찰영, 영남관찰영 등의 지방 인쇄소에서 추가로 인쇄되어 전국에 퍼져나갔다. 명성은 이웃나라에도 퍼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쇄되었다. 인쇄소마다 새롭게 목판을 만들거나 제각기 만든 활자로 인쇄를 했기 때문에 현존하는 동의보감은 판본마다 한자의 모양도 다르고 오탈자 등이 서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통 동의보감을 허준이 지었기 때문에 동의보감의 글씨체를 허준이 직접 쓴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동의보감 초판본의 글씨체는 허준의 글씨가 아니라, 명필가 강희안(姜希顏)의 서체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존하는 허준의 필체는 없다. * 제목의 ○○○은 ‘강희안(姜希顏)’입니다. 항간에 동의보감 초판본이 개주갑인자(改鑄甲寅字)나 훈련도감 목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설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동의보감 서문> 東醫寶鑑序. ○ 我宣宗大王, 以理身之法, 推濟衆之仁, 留心醫學, 軫念民瘼. 嘗於丙申年間, 召太醫臣許浚敎曰, 近見中朝方書, 皆是抄集庸, 不足觀爾, 宜裒聚諸方, 輯成一書. 且人之疾病, 皆生於不善調攝, 修養爲先, 藥石次之. 諸方浩繁, 務擇其要. 窮村僻巷無醫藥, 而夭折者多. 我國鄕藥多産, 而人不能知爾. 宜分類並書鄕名, 使民易知. 浚退與儒醫鄭碏, 太醫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等, 設局撰集, 略成肯綮. 値丁酉之亂, 諸醫星散, 事遂寢. 厥後, 先王又敎許浚, 獨爲撰成, 仍出內藏方書五百卷以資考據. 撰未半而龍馭賓天. 至聖上卽位之三年庚戌, 浚始卒業而投進, 目之曰東醫寶鑑, 書凡二十五卷. (동의보감 서문. ○ 우리 선종대왕은 몸을 다스리는 법도를 대중을 구제하는 어진 마음으로 확장시켜 의학에 마음을 두시고 백성의 병을 걱정하셨습니다. 병신년에 태의 허준을 불러 하교하시기를, “근래에 중국의 의서를 보니 모두 조잡한 것을 초록하고 모은 것이어서 별로 볼만한 것이 없으니 여러 의서들을 모아 책을 편찬해야겠다. 사람의 질병은 모두 섭생을 잘 조절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것이니 수양이 최선이고 약물은 그 다음이다. 여러 의서들은 번다하니 요점을 가리는데 힘쓰라.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병기하여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허준이 물러나와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관청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여 대략 중요한 골격을 이루었는데, 정유재란을 만나 여러 의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선종대왕이 다시 허준에게 하교하여 홀로 책을 편찬하게 하시고 대궐에서 소장하고 있는 의서 오백권을 내어주어 고증하게 하셨는데 편찬 작업이 반도 끝나기 전에 선종대왕이 승하하셨습니다. 성상이 즉위한 지 삼년이 된 경술년에 허준이 비로소 작업을 마치고 진상하면서 동의보감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모두 25권입니다.) ○ 上覽而嘉之, 下敎曰, 陽平君許浚, 曾在先祖, 特承撰集醫方之命, 積年覃思, 至於竄謫流離之中, 不廢其功, 今乃編帙以進. 仍念先王命撰之書, 告成於寡昧嗣服之後, 予不勝悲感. 其賜浚太僕馬一匹, 以酬其勞, 速令內醫院設廳鋟梓, 廣布中外. 且命提調臣廷龜撰序文 弁之卷首. (성상께서 읽어보시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시기를,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종대왕 때에 의서를 지으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어 여러 해를 고심하여 귀양을 가서 떠돌아다닐 때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고, 이제 책을 편찬하여 진상하였다. 선왕께서 편찬을 명한 책이 어리석은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허준에게 태복마 한 필을 하사하여 그 공로를 위로하고, 서둘러 내의원으로 하여금 관청을 설치하고 간행하여 온 나라에 널리 반포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제조 신 이정구에게 명하여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싣게 하셨습니다.) ○ 萬曆三十九年辛亥孟夏, 崇祿大夫, 行吏曹判書,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筳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臣李延龜奉敎謹序. (만력 39년 신해년 1611년 초여름에 숭록대부 행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이정구가 하교를 받들어 삼가 서문을 짓습니다.) ○ 萬曆四十一年十一月日, 內醫院奉敎刊行. 監校官 通訓大夫, 行內醫院直長臣李希憲. 通訓大夫, 行內醫院副奉事臣尹知微. (만력 41년 1613년 11월 어느 날, 내의원이 하교를 받들어 간행하다. 감교관 통훈대부 행내의원직장 이희헌, 통훈대부 행내의원부봉사 윤지미) <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1610년 11월 21일. 內醫院官員以提調意, 啓曰: “以東醫寶鑑分送下三道, 使之刊刻事, 曾已啓下, 移文各道, 日月已久. 而卷秩甚多, 功役不貲, 故各處頉報及狀啓, 前後非一, 然猶申飭各道, 整備材料, 歲後卽爲分刊矣. 因念此書, 與他冊有異, 小註分行, 字數細密, 刊刻甚難. 藥名病方, 小有差誤, 則關係性命, 旣無本冊, 只以寫出一件飜刻, 更無憑准之路. 今若付之外方, 則非但玩愒稽遲, 完畢無期, 抑恐舛錯訛謬, 終爲無用一本. 臣等爲是之慮, 更爲商量, 則自本院, 別爲設局, 以活字印出, 醫官監校, 如頃日醫書印出時例, 則事必易就, 而又無訛誤之慮矣. 후략.” 傳曰: “依啓.” (내의원에서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을 하삼도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 책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이 감수하고 교열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후략.”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논문> ○ 하정용. 내의원자본(內醫院字本) 연구의 제문제(諸問題) - 동의보감(東醫寶鑑) 연구를 위한 선행과제. 의사학(醫史學) 제17권 제1호(통권 제32호) 17ː2336 June 2008 : 서지학계에서 소위 내의원자본이라고 불리는 활자는 조선전기의 금속활자인 을해자의 서체를 사용한 목활자본이다. 여기서 을해자란 1455(세조 1, 을해)에 강희안(姜希顔, 1424-1483)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를 말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4-05-07 17:15:06[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는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었다. 고질적인 편두통으로 간혹 내의원의 침의(鍼醫)들에게 침을 맞곤 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선조는 편두통이 발작할까 봐서 항상 불안했다. 어느 날, 선조는 침의(鍼醫)인 허임(許任)을 찾았다. 10여년 전에 선조는 지방 순행을 할 때 허임이 동행하면서 3일 간격으로 침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효과가 좋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임은 당시 고향인 나주에 내려가 있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허임은 침을 잘 놓아 일세(一世)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침의인데, 자기 마음대로 고향에 물러가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신들은 그를 궁으로 불러 모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만약 짐에게 뜻밖에 침을 쓸 일이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하니 내의와 제조(提調) 등은 그 직책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내의원 신하들을 문책했다. 선조는 불시에 침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침의 허임을 곁에 두고자 한 것이다. 평소 편두통 발작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서 실력있는 침의를 곁에 두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1604년(선조 37년) 9월 23일 가을밤. 초경말(初更末) 경에 선조는 평소 앓고 있던 편두통이 갑자기 발작했다. 초경말이면 밤 9시가 거의 다 된 시간으로 어의들은 이미 퇴청을 한 이후다. 선조는 “속히 의관을 들라 하라.”하고 명했다. 내시는 당직 중인 의관에게 전교하여 속히 침치료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사실 편두통이라는 것이 머리가 깨질 것처럼 그 통증을 견디기 힘들고, 심한 경우 눈도 뜨기 어렵고 구토까지 하면서 한번 발작하면 실신까지 하기도 해서 실로 가벼운 증세가 아니었다. 내의원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직 중인 승지는 걱정스러운 나머지 “의관들만 입시(入侍)하는 것보다는 당직 중인 승지와 사관(史官)이 함께 입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는 “지금까지 침은 많이 맞아 보지 않았던가. 짐은 지금 침을 맞으려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갑자기 발작을 했는지 궁금하여 증세를 상의하려고 하니 승지 등은 입시할 필요가 없다.”라고 다시 전교를 내렸다. 그러자 승지는 당황해하면서 “지금 허임(許任)이 이미 내전 밖 합문(閤門)에 와서 대령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선조는 굳어진 얼굴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더니 “허임을 속히 들여 보내도록 하라.”하고 명했다. 선조의 앞에는 이미 허준(許浚)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준은 당시 선조의 어의(御醫)였다. 선조는 허준에게 “지금 내 편두통에 침을 놓는 것에 해서 공의 생각은 어떠한가?”하고 묻자, 허준은 “지금 상의 증상은 긴급한 상태로 탕약을 달여서 복용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또한 증상이 자못 심각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몇 명의 침의에게 여러 차례 침을 맞으셨고 그 효과가 지속되지 않아 송구합니다만 그래도 침의들은 반드시 먼저 침을 놓아 기운이 소통시켜야만 통증이 감소될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선조는 “그럼 공이 한번 침을 놓도록 하시오.”라고 명했다. 그러자 허준은 “소신은 침의가 아닌 약의(藥醫)이기 때문에 침의들의 침으로 응급처치를 한 후에 탕약을 대령해서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금 침의 허임이 대령해 있사오니 침치료는 대신 허임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허임 또한 말하기를 경맥을 소통시키는 침법을 사용한 후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으면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하오니 소신이 보기에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라고 했다. 그때 마침 허임이 도착했다. 선조가 허임에게 물었다. “아시혈(阿是穴)은 어디에 위치한 혈자리인가?” 그러자 허임은 “아시혈은 어느 한 곳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픈 곳을 찾아서 혈자리를 삼는 것입니다. 아시혈은 환자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자리로 하늘이 정해준다고 해서 천응혈(天應穴)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병증에도 좋지만 특히 두통에는 아시혈에 침을 놓으면 아주 효과가 빠릅니다.”라고 고했다. 선조는 허임의 말을 듣고서는 서둘러 어서 병풍을 치도록 명하였다. 선조의 야밤의 편두통 발작으로 왕세자 또한 입시해 있었다. 선조는 왕세자와 함께 침의, 의관은 방안에 머무르게 하고 제조(提調) 이하는 모두 방 밖으로 나가 있도록 했다. 침의인 남영(南嶸)이 허임과 상의해서 혈자리를 정한 후에 허임이 침을 들어 올렸다. 허임은 깊은 숨을 한번 몰아 쉬고서 심지(心志)를 곧게 하고서는 후두부의 풍지혈(風池穴), 측두부의 두유혈(頭維穴), 전두부의 본신혈(本神穴)에 침을 놓았다. 이 혈자리들은 좌우 양쪽에 모두 한 개씩 있는데, 아프다고 하는 쪽의 반대쪽에 침을 놓았다. 일명 우병좌치(右病左治), 좌병우치법(左病右治法)이다. 그리고 환측(患側)에는 통증이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아시혈을 찾아 침을 놓았다. 모두 10번 숨을 내쉴 동안 침을 꽂아 놓았다. 10번 호흡지간(呼吸之間)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선조의 편두통은 서서히 줄었다. 허임은 침을 제거했다. 선조의 깨질듯한 편두통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빠질 것 같은 눈은 편해졌고 구역감도 멎었다. 잠시 후 약방이 문안하니, 선조는 “평안하다.”라고 전교하였다. 이렇게 폭풍우와 같았던 밤이 지났다. 허임의 침을 맞은 선조의 편두통은 이후 다시 재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당시 침을 맞을 때 관여했던 약방 도제조, 제조, 도승지, 내의원 신하들에게 궁의 마구간에서 기르던 말 1필씩을 하사했고, 침의 허임 등에게는 직급을 한단계씩 높이도록 했다. 당시 어의였던 허준도 잘 길들여진 숙마(熟馬) 1필을 받았다. 이에 허임은 6품의 직에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전격적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당상관으로까지 승격이 지나치다고 간쟁(諫爭)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신하들은 “침의 허임은 6품의 관원으로 단지 침을 놓았다는 하찮은 수고로움으로 인하여 갑자기 당상관으로 승진함에 신들이 보기에 직책이 분수에 넘쳐 지나치오니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침이란 것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통을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고마웠던 것이다. 선조는 허임을 무한신뢰했다. 허임은 1570년(선조 3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관노비였으며 그의 모친은 사노비였다. 허임은 어려서 부모님이 병환에 시달렸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함에 한을 품고 의학에 뜻을 두었다. 선조 때에 신하들은 허임이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임을 얻은 것에 시기, 질투한 것이다. 그러나 허임의 침치료 실력은 당대 최고였으며 신묘하다고 칭송되었다. 허임은 평생 환자의 병환으로부터 고통을 없앤 것을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죽을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았다. 의관에서 시작했지만 선조의 침의로 인정을 받으면서 광해군 때 이르러서도 지방의 관직을 여러 곳 거쳤다. 1609년(광해군 2년) 허임은 한때 고향인 나주에 내려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광해군은 내의원으로 들도록 재촉하는 전교를 여러 번 내렸지만 모두 거절했다. 허임은 선조 때에도 궁에서 다른 신하들의 중상모략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시금 반복되는 것이 끔찍했다. 사실 전교를 거절했다는 것은 어명을 거역한 것이다. 신하들은 허임이 군부(君父)를 무시했다면서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고 했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두도록 했다. 허임이 선왕 때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1644년(인조 22년) 허임은 말년에 자신의 침구 경험을 정리한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편찬했다. 당시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서문에 “나는 우둔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나 어려서 부모님이 병환을 앓아 의학에 전념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노력하여 의학의 문호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노쇠하여 바른 치료법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염려되어 평소에 듣고 본 것을 가지고 대충 편을 묶고 차례를 만들었다. 감히 옛 사람들의 저술에 견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 동안 노력하여 마음으로 얻은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자가 마음을 쏟는다면 급한 환자를 구하고 목숨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책을 만든 이유를 적었다. 이 책을 통해서 허임의 침구술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침구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침법이 중국이나 일본의 침법에 대해서 탁월할 효과가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데, <침구경험방>은 그 근거가 되고 있고 조선의 침술을 알리는데도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중 조선 최고의 침의라면 허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 제목의 〇〇은 허임(許任)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宣祖 37年 9月 23日. 初更末, 上所患偏頭痛急發, 傳于直宿醫官, 欲爲受針, 入直承旨啓曰: “醫官等, 獨爲入侍未安. 入直承旨及史官, 竝入侍何如?” 傳曰: “非受針也, 欲問證勢, 承旨等勿入.” 又啓曰: “許任, 已到閤門矣.” 傳曰: “入來.” 二更三點, 入侍於便殿, 上曰: “施針如何?” 浚曰: “證勢緊急, 不可拘於常例. 屢度受針, 似爲未安. 而針醫等每曰: ‘必施針, 消散熱氣, 然後痛勢’ 可歇云, 而小臣則不知針法. 渠輩所言, 如此故啓之矣. 許任常言, 引經後, 可以進針於阿是. 此言似有理.” 上命設屛, 王世子及醫官, 入侍於房內, 提調以下, 皆在房外. 南嶸點穴, 許任執鍼, 上受鍼. (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 9월 23일. 1경 말에 상이 앓아 오던 편두통이 갑작스럽게 발작하였으므로 직숙하는 의관에게 전교하여 침을 맞으려 하였는데, 입직하고 있던 승지가 아뢰기를, “의관들만 단독으로 입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입직한 승지 및 사관(史官)이 함께 입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침을 맞으려는 것이 아니라 증세를 물으려는 것이니, 승지 등은 입시하지 말라.”하였다. 또 아뢰기를, “허임이 이미 합문에 와 있습니다.”하니 들여보내라고 전교하였다. 2경 3점에 편전으로 들어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송구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상이 병풍을 치라고 명하였는데, 왕세자 및 의관은 방안에 입시하고 제조 이하는 모두 방 밖에 있었다. 남영이 혈을 정하고 허임이 침을 들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 〇 鍼灸經驗方序. 전략. 愚以不敏으로 少爲親病하야 從事醫家하야 積久用功하야 粗知門戶러니 及今衰老하야 仍恐正法之不傳하야 乃將平素聞見하야 粗加編次하야 先著察病之要하고 幷論轉換之機하야 發明補瀉之法하고 校正取穴之訛하며, 又著雜論若干하고 且記試效要穴及當藥하야 合爲一卷하니 非敢自擬於古人著述이 只爲一生苦心을 不忍自棄니 覽者若能加之意則庶於救急活命에 或有少補云爾라. 河陽許任識. (침구경방서. 전략. 나는 우둔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나 어려서 부모님이 병환을 앓아 의학에 전념하게 되었고, 오랜 세월 노력하여 의학의 문호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노쇠하여 바른 치료법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염려되어 평소에 듣고 본 것을 가지고 대충 편을 묶고 차례를 만들었다. 먼저 병을 살피는 요지를 보이고 아울러 때에 따라 치법을 변화시키는 기틀을 설명하였으며, 보사의 방법을 밝히고 취혈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또 이런저런 의론을 약간 적고, 써보고 효과를 본 중요한 경혈들과 합당한 약들을 기록하여 한 권으로 묶었다. 감히 옛 사람들의 저술에 견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 동안 노력하여 마음으로 얻은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자가 마음을 쏟는다면 급한 환자를 구하고 목숨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양 사람 허임 적다.) 〇 頭面部. 偏頭痛하고 目䀮䀮不可忍風池 頭維 本神에 患左治右하고 患右治左호대 皆留鍼十呼하야 引氣면 卽差니 神效오. (편두통이 있고 눈이 아득하여 견딜 수 없는 경우풍지 두유 본신을 쓰는데, 왼쪽이 아프면 오른쪽을 오른쪽이 아프면 왼쪽을 치료한다. 모두 10번 숨 내쉴 동안 유침하며 기를 끌어 땅기면 곧 나으니 매우 효과가 좋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2023-08-02 15:21:45국제적 학술상인 삼성호암상을 시상하는 호암재단이 미래세대를 위한 과학기술과 인문지식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한다.세계적 수학자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사진) 등 국내외 최고 석학 8명이 참석해 청소년들의 미래설계를 위한 실질적 도움을 줄 전망이다. 호암재단은 오는 8월 1일부터 3일까지 여름방학을 맞은 전국 청소년을 위한 지식공유 강연회인 'Fun & Learn, 2023 Summer Cool Talk Festival!'을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강연회는 청소년들에게 최신 과학과 인문 지식을 제공한다. 구체적으로 △수학과 양자컴퓨터로 본 세상 △미래를 위한 준비 △세상을 바꾸는 K바이오를 주제로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김동호 기자
2023-07-18 18:14:40[파이낸셜뉴스] 국제적 학술상인 삼성호암상을 시상하는 호암재단이 미래세대를 위한 과학기술과 인문지식을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세계적 수학자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사진) 등 국내외 최고 석학 8명이 참석해 청소년들의 미래 설계를 위한 실질적 도움을 줄 전망이다. 호암재단은 오는 8월 1일부터 3일까지 여름방학을 맞은 전국 청소년을 위한 지식 공유 강연회인 'Fun & Learn, 2023 Summer Cool Talk Festival!'을 개최한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강연회는 청소년들에게 최신 과학과 인문 지식을 제공한다. 구체적으로 △수학과 양자컴퓨터로 본 세상 △미래를 위한 준비 △세상을 바꾸는 K 바이오를 주제로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김황식 호암재단 이사장은 "해마다 대한민국의 미래세대를 위한 배움의 장을 꾸준히 마련해 온 호암재단의 이번 강연회는 온라인만 아니라 현장 강연도 함께 한다"며 "빠른 사회 변화와 입시 경쟁으로 지친 청소년의 학습 동기와 진로 설계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hoya0222@fnnews.com 김동호 기자
2023-07-18 08:34:24[파이낸셜뉴스] 전력사업 관련 '개미군단'들의 협의체인 사단법인 한국전력산업중소사업자협회(KEISA·회장 김지곤)가 변호사 및 회계사 등 전문인력 영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KEISA측은 6일 보도자료를 내고 "허준 회계사, 송규종 대륙아주 파트너 변호사, 박동원 전 한국수력원자력 인재개발원장을 인재 확보차원에서 영입했다"고 밝혔다. 허준 회계사는 연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감사원 감사관을 거쳐 올해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경영평가위원으로 활동중이다. 강한 추진력과 꼼꼼한 일처리가 장점이다. 송규종 변호사는 전남 순천 출신으로 대검 공안기획관과 국가정보원 감찰실장을 지냈으며 검사 시절 뛰어난 기획력 등으로 주위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법조계 '신흥강자'로 떠오른 법무법인 대륙아주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중이다. 한국수력원자력 인재개발원장을 지낸 박동원 전 경기그린에너지(한수원 자회사) 대표이사는 원자력 등 에너지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실무형 인사로 정평이 나 있다. 김지곤 회장은 "중소, 중견기업의 권익을 대변하고 회원사간 협업을 통한 굳건한 네트워크 구축에 공을 들이고 있는 우리 협회에 뛰어난 실무 능력과, 인적 네트워크가 두터운 인재 분들을 영입하게 돼 앞으로 협회의 무궁한 발전에 기대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KEISA는 지난 4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중인 소형모듈원전(SMR) 산업 활성화를 위한 정부와 민간 협의체 구성에 참여하는 등 에너지 및 전력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SMR은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원전으로, 설비용량 300MW(메가와트) 이하의 소형 원전을 말하며 원자로, 가압기, 증기 발생기 등이 분리되지 않고 일체형으로 된 소형 구조가 특징이다. 글로벌 시장은 약 600조원대에 달해 앞으로 협회 소속 중소, 중견기업들의 해당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민관협의체 참여주체 중 원전분야 관련 순수 민간 협회로는 KEISA가 유일하다. 한편 KEISA는 2020년 2월 산업통상자원부의 인허가로 공식 출범했다. stand@fnnews.com 서지윤 서영준 기자
2023-07-06 11:37:24[파이낸셜뉴스] 한국계 수학자 최초로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겸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가 모교인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다. 그는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허 교수는 지난 29일 2022학년도 제76회 후기 서울대학교 학위수여식에 참여해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축사를 했다. 허 교수는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다"면서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 하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다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란다"며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준다"고 말했다. 이어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 이하 허 교수 축사 전문 > 안녕하세요, 07년도 여름에 졸업한 수학자 허준이입니다. 우리가 팔십 년을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하면 약 삼만 일을 사는 셈인데, 우리 직관이 다루기엔 제법 큰 수입니다. 저는 대략 그 절반을 지나 보냈고, 여러분 대부분은 약 삼분의 일을 지나 보냈습니다. 혹시 그중 며칠을 기억하고 있는지 세어 본 적 있으신가요? 쉼 없이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가 오랫동안 잡고 있을 날들은 삼만의 아주 일부입니다.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학위 수여식에 참석할 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한 자기 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나서, 아니면 충실하게 지내지 못한 대학생활이 부끄러워 십오 년 전 이 자리에 오지 못했습니다만, 여러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을 축하받기 위해 이를 무릅쓰고 이곳에 왔습니다. 졸업식 축사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요? 십몇 년 후의 내가 되어 자신에게 해줄 축사를 미리 떠올려 보는 것도,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축사를 지금 떠올려 보는 것도 가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연하게 떠오르는 말은 없습니다. 지난 몇천 일, 혹은 다가올 몇천 일간의 온갖 기대와 실망, 친절과 부조리, 행운과 불행, 그새 무섭도록 반복적인 일상의 세부 사항은 말하기에도, 듣기에도 힘들거니와 격려와 축하라는 본래의 목적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체화한 마음은 부적절하거나 초라합니다. 제 대학 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잘 쉬고 돌아오라던 어느 은사님의 말씀이, 듬성듬성해진 성적표 위에서 아직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지금 듣고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와 방향의 다름이 있을지언정 지난 몇 년간 본질적으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도전,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끝은 있지만 잘 보이진 않는 매일의 반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 수도, 생각만큼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오래전의 제가 졸업식에 왔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했습니다만 생각을 매듭짓지 못했습니다. 그가 경험하게 될 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가슴 먹먹하게 부럽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선물할 어떤 축사를 떠올리셨을지 궁금합니다. 수학은 무모순이 용납하는 어떤 정의도 허락합니다. 수학자들 주요 업무가 그중 무엇을 쓸지 선택하는 것인데,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가능한 여러 가지 약속 중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구조를 끌어내는지가 그 가치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하니 들뜬 마음에 모든 시도가 소중해 보입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theknight@fnnews.com 정경수 기자
2022-08-30 08:37:44[파이낸셜뉴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가 모교인 서울대 강단에 선다. 21일 서울대에 따르면 허 교수는 오는 27일 오후 4시 서울대 상산수리과학관에서 학생·교수들을 상대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풀이하는 특별강연을 펼친다. 허 교수는 강연에서 청중들을 상대로 그의 전문 분야인 대수기하학(代數幾何學·algebraic geometry)적 기법을 사용한 조합론(組合論·combinatorics) 난제 풀이 방법 등을 설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연 뒤에는 참석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한다. 한편 허 교수는 서울대 수리과학부·물리천문학부 학사 과정과 수리과학부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박사 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난 뒤 '리드 추측'과 '로타 추측' 등 오랜 수학 난제들을 하나씩 증명하면서 수학계에 명성을 떨쳤다. yesyj@fnnews.com 노유정 기자
2022-07-21 21:15:04[파이낸셜뉴스] "일이 잘 안풀리고, 좋아하고 싶은 것이 좋아하지 않게 되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 안될때, 여유를 두고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남이 독촉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독촉하면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기 어렵다. 포기할때 포기하고 쉴때 쉬어 가면서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13일 고등과학원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평가를 위한 공부를 하다가 대학에서 방황하고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던진 조언이다. 또한 허준이 교수는 수학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수학 공부를 할때 일시적인 스트레스에 압도당하다보면 수학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완전히 까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스스로에게 친절하면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쉴때 쉬면서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를들어 본인 체력 이상으로 하루 10~12시간 운동을 하다보면 부상당할 수 있는 것처럼 최선이 아니라는 것. 개개인의 체력을 생각하면서 조금씩 트레이닝을 하다보면 실력도 늘고 궁금해 하는 것들도 해결해 나가면서 꾸준히 성장할거라고 봤다. 허 교수는 수학의 매력에 대해 마라톤과 웨이트트레이닝을 얘기하면서 "수학은 어렵기 때문에 재밌다, 쉽다면 재미없을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멀리 뛰는 마라톤을 매년 준비해서 참가하고 무거운 역기를 들어야하는 웨이트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현실에 주눅들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기를 권했다. 실수없이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하기를 권했다. 이와함께 교육 정책을 만드는 관계자들에게는 학생들의 용기가 배신당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을 주문했다. 또한 허준이 교수는 초보 아빠라며 아들과의 수학공부에대해서도 공개했다. 첫째 아들이 매일 수학문제를 하나씩 만들어오면 그 문제를 허 교수가 푼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웠던 것을 살짝 변형해 만들어 온다는 것. 예를 들어 동그라미가 몇개인지 정확하게 세는 것이 문제다. 허 교수는 "동그라미 100여개를 같이 세오는 과정이 수학적이나 정서적 발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곱셈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즐겁다"고 말했다. 허준이 교수는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접한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 가운데 한국 학생들에게 느낀 점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허 교수는 "다는 아니지만 좁은 범위에서 정확하고 완벽하게 푸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말했다. 반면 "넓고 깊게 공부하는 준비는 비교적 덜 준비된 것 같다"고 했다. 이와관련해 "모든 학생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위권의 이공계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더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도록 고교 교육 제도가 잘 정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2022-07-13 17:51:19[파이낸셜뉴스] 수학계의 노벨상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가 13일 고등과학원 1층 국제회의실에서 오후 5시부터 2시간동안 특별강연을 펼친다. 고등과학원은 유튜브 고등과학원 수학부 채널에서 누구나 라이브로 시청 가능하다고 12일 밝혔다. 이날 강연은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가 직접 강의하고, 필즈상 해설 강연은 서울대 김영훈 교수가 진행한다. 이어지는 질의 응답 시간은 고등과학원 강남규 교수의 사회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수상강연 및 해설강연을 준비한 고등과학원 최재경 원장은 "이번 강연이 우리나라 수학자와 학생들에게 뜻 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필즈상(Fields Medal)은 국제수학연맹(IMU)이 4년마다 개최하는 세계수학자대회(ICM)에서 만 40세 미만의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수학계 최고의 상이다. 노벨상은 매년 시상하며 공동 수상이 많은 반면, 필즈상은 4년마다 최대 4명까지만 시상하고, 공동 수상이 불가해 노벨상보다 수상하기가 더 어려운 상으로 알려져 있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2022-07-12 16:34:16"젊은 수학자들이 부담감을 느껴 단기 목표만을 추구하지 말고, 큰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도록 여유롭고 안정감있는 연구 환경이 제공 됐으면 한다." '수학계의 노벨상'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는 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화상으로 국내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국내 교육의 보완점을 이같이 말했다. 허준이 교수는 공부나 인생의 롤 모델을 묻는 질문에 '수첩에 적혀 있는 수십명'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수학문제나 삶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배워야 할 것과 필요한 것들이 다 다른데 그때마다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나 스스로를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정해진 한 분을 보고 따라가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내 수첩에 정리한 분들을 따라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수십년간 수학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허 교수는 "수학의 매력은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이라고 답했다. 이와관련해 그는 공동연구가 활발한 현대 수학을 설명하면서 "혼자보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효율적이어서 더 멀리, 깊이 갈 수 있기때문에 그러한 경험들이 수학자들에게 큰 경험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릇을 옮길때마다 물의 양이 불어나면서 어느 수준이 되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난해한 구조를 해결한 충분한 과정이 됐다"고 설명했다. 허준이 교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국내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다양한 친구들과 하루종일 생활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좋았다"며 "따뜻하고 만족스런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나로 성장하는데 있어 자양분을 제공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특히, 허 교수는 유년시절 보드게임과 체스게임을 즐겼다는 내용에 대해 "논리적 사고를 요구한다는 공통점이 자연스레 끌렸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는 기자회견에 앞서 "큰 상을 받게 돼 기쁘고 주위분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줘 기쁨이 두배"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2022-07-06 18: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