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페라리가 미하엘 슈마허를 영입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바로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였죠. 슈마허도 이를 알고 더더욱 열심히 레이스에 임했습니다. 이적 후 첫 우승을 한 만큼 분위기를 탔다고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997년 좋은 분위기 이어간 슈마허실제로 슈마허는 1997년에도 좋은 흐름을 이어갑니다. 그해 성적은 챔피언십 우승에 도전할 만큼 좋았습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페라리와 슈마허 팬들의 기대감도 자연스럽게 높아졌습니다. 1997년 당시 슈마허의 라이벌은 캐나다 출신 자크 빌뇌브(윌리엄스 팀)였습니다. 그는 F1 2년차였지만 시즌 7승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인 선수입니다. 다만 동시에 5번의 레이스에서 중도 탈락하는 등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빌뇌브의 선전에도 많은 사람들은 슈마허가 1997년 챔피언십을 가져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빌뇌브에게 1점차로 앞서 있었고, 따라서 이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을 건 경기는 1997년 10월 26일 스페인에서 펼쳐졌습니다. 슈마허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베네통 시절 라이벌 아일톤 세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는 "(빌뇌브와) 둘이서만 하는 정면 승부를 기대하고 있다"며 "다른 팀이나 다른 드라이버들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빌뇌브는 "일단 탈락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고, 둘째는 슈마허보다 빨라야 한다. 그게 전부다"라고 전했습니다. 5번이나 레이스에서 중도 탈락한 만큼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반응이었죠. 경기가 시작되자 슈마허가 선두로 치고 나왔습니다. 바로 뒤에는 빌뇌브가 붙어 있었습니다. 4.4㎞ 트랙을 69바퀴 도는 결승전, 선두를 지키고 있던 슈마허와 빌뇌브의 거리가 47바퀴를 돌며 점차 좁혀졌습니다. 격차는 단 1초. 결국 빌뇌브가 48바퀴를 돌면서 슈마허를 추월하게 됩니다. 슈마허는 차에 문제가 생긴 듯 자갈밭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차를 운전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비기기만 해도 우승인데...반전은 여기서 나타났습니다. 사고 상황을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본 결과 슈마허가 빌뇌브의 차 옆구리를 친 것입니다. 당시 페라리 기술 디렉터로 근무했던 로스 브런은 "슈마허는 빌뇌브가 자신의 차를 친 줄 알았다"며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슈마허가 충돌 직후 화난 듯 보였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평소 침착하기로 유명한 슈마허가 취재진의 카메라를 밀어내며 신경질을 낼 정도였으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습니다. 빌뇌브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무리를 하는 바람에 우승을 놓친 것입니다. 페라리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슈마허의 계획이 틀어지게 됐죠. 루카 디 몬테제몰로 페라리 당시 회장도 "딱 10바퀴만 더 선두를 유지했으면 페라리와의 두 번째 시즌을 우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1997년 챔피언십은 빌뇌브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슈마허의 신경질적인 성격과 고의 충돌은 경기 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취재진들에게 짜증을 내는 듯한 행동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만큼 우승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는 증거"라며 슈마허를 치켜세우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F1에서 뛰었던 마크 위버는 "슈마허는 병적으로 완벽에 집착했다"며 "그는 경기장에서 자신과 싸우곤 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슈마허는 이러한 비판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전에 나를 찬양하기 바빴던 언론들이 그 경기(1997년 10월 26일) 이후 비난하기 시작했다"며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같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일어난 것"이라고 말이죠. 충격의 점수 박탈...준우승도 놓쳐F1 경기심사위원회는 이후 슈마허의 행동(고의 충돌)을 비신사적 행위로 규정, 시즌점수를 박탈했습니다. 준우승을 차지했던 기록마저 사라지게 됐습니다. 당시 시즌점수를 박탈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큰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슈마허는 이런 관심을 피해 노르웨이에 있던 별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겨울 스포츠를 즐기며 스트레스도 풀었습니다. 주변인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별장에서 머물렀던 시간 동안 F1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생 즐기고, 해온 일을 얘기하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는 큰 사고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다음해가 되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테스트 트랙에 복귀했습니다. 이곳에서 우승을 위한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즌 전부터 엔지니어를 비롯해 매니저, 수리공 등 팀원들과 소통을 강화했죠. 그는 '조용한 리더십'을 통해 페라리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팀원들의 사기도 자동으로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를 바꾼 페라리팀, 1998년은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요? 다음화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11-15 15:49:58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미하엘 슈마허가 1995년 '베네통'에서 선수로 뛰며 정상의 자리에 오르자, 그를 데려가려는 팀도 많아졌습니다. F1의 전통 강자 페라리도 그 중 하나였죠. 전설, 페라리로 이적하다가장 최근 열린 F1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우승자(카를로스 사인츠)를 배출할 정도로 강력한 페라리지만, 1995년 당시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해 그랑프리 우승도 캐나다 몬트리올(프랑스 출신 쟝 알레지), 단 한 차례가 전부였습니다. 1995년 치러진 17라운드 가운데 베네통이 우승을 가져간 횟수는 과반을 훌쩍 넘긴 11회입니다. 주변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페라리가 놓여 있는 힘든 상황이 오히려 슈마허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어릴 적 가난했던 탓에 낡은 고카트를 탔지만 우승을 밥 먹듯이 했던 그의 승부욕에 불을 붙인 것입니다. 그는 아마 '계속 고전을 면치 못했던 페라리에서 우승한다면 정말 전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지인들도 "폐타이어로도 우승했는데, 페라리에서 못할 것도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1996년, 슈마허는 결국 페라리에 입단하게 됩니다. 이적 후 그의 인기는 정말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디든 그가 가는 곳엔 카메라가 따라 붙었고, 베네통 시절보다 더 많은 팬들이 사진과 사인을 요청했습니다. 참고로 F1 역사상 가장 오래된 팀 중 하나인 페라리는 팬층이 아주 두껍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페라리를 종교처럼 생각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심과 압박은 비례관계따라오는 관심만큼 압박감도 커졌습니다. 루카 디 몬테제몰로 당시 페라리 회장은 "지난해 탁월한 드라이버 두 명이 있었지만, 올해는 스타(슈마허를 뜻함)가 있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페라리 드라이버는 엄청난 압박을 견뎌야 하는 자리다. 승리하지 못하면 '멍청이'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야 한다. 엄청난 책임을 맡게 되는 자리라는 소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단순 F1 차가 아니라 무엇과도 다른 차를 모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죠. 하지만 불행히도, 차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그의 팀 동료 에디 어바인(1996~1999년까지 페라리 소속)은 "차에 타자마자 다른 차와는 너무 달라서 걱정이 앞섰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걱정은 곧 현실이 됐다. 차는 재앙 자체였다"며 "차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딱히 손 쓸 방도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페라리의 차체는 아예 설계가 잘못됐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1996년 4라운드 바레인 그랑프리 전 퀄리파잉 1(Q1)에서 슈마허의 차가 멈춰섰습니다. 차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속도는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엔진 이상으로 차가 멈춰섰다고 분석했습니다. 당시 견인 트럭에 차와 함께 실린 슈마허의 표정이 무력해 보일 정도로 부진한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슈마허 "차 문제 너무 많다""문제가 너무 많아서 몇 달 안에 해결될지 모르겠습니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챔피언십을 위해 경쟁하고는 있지만, 행운이 많이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막연한 꿈일지도 모르겠네요."(슈마허) 평소 말이 없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슈마허가 페라리 이적 후 가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당시 차 상태가 얼마나 좋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는 "난 몽상가가 아닌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다"며 단순한 감정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페라리 차고의 불이 24시간 켜 있던 것도 이때부터 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슈마허가 있었습니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당시 슈마허는 정비공 세명과 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밤 늦게까지 차와 씨름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드라이버들도, 팀 관계자들도 모두 떠난 시간이었습니다. 차의 상태를 그만큼 중시한다는 그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의 아내 코리나 슈마허가 "그가 페라리에서 활동하는 동안 식당에서 제대로 식사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밤 10시까지 미팅을 하기도 했고, 계속 텐트에서 지냈다"고 말할 정도니, 그의 열정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역시는 역시...7라운드서 우승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1996년 6월 2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그랑프리 7라운드에서 슈마허가 결국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경기 전날부터 내린 폭우로 트랙이 좋지 못했지만, 슈마허에게는 핑계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릴적 비가 올 때마다 트랙을 달리며 연습했던 게 적중했던 것일까요. 슈마허는 이를 통해 빗길에서도 차량을 부드럽게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슈마허의 차는 혼자 비 속으로 사라졌다. 감히 쫓아갈 수 없는 속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적 후 거둔 첫 우승은 슈마허에게도, 페라리에게도 아주 의미가 컸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슈마허의 건재함과 전통 강자 페라리의 귀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경기가 됐죠. 팀 동료 이바인은 "(슈마허가) 어떻게 그 차로 우승했는지 모르겠다"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회상했습니다. 다음화에서는 슈마허가 페라리에서 달성한 업적을 조금 더 다루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10-30 00:59:59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라이벌의 죽음으로 슬럼프 직전까지 갔다가 극복한 미하엘 슈마허와 새 라이벌 데이먼 힐. 1994년 우승의 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요? 이번화에서는 이 내용과 슈마허의 아내, 코리나 슈마허의 이야기도 좀 다뤄볼까 합니다. 경기 주도했지만..."아뿔싸" 벽에 부딪힌 슈마허1994년 11월 13일 호주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슈마허와 힐에게 쏠렸습니다. 그 전까지 번갈아 가며 우승을 가져간 덕분에 이 경기 직전까지 이들의 점수 차이는 단 1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슈마허는 "과감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주행을 할 것이다. 경기에서 펼치는 전술과 추월 방식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것 같다"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힐도 "어쩌다보니 슈마허와 챔피언십 경쟁을 하게 됐다"며 "정말 쉽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습니다. 경기 초반 슈마허가 특유의 빠른 시작으로 경기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승을 밥 먹듯 하던 그였지만, 이날 만은 "도저히 데이먼을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었다"며 "트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차와 싸우는 기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평소 '차와 한 몸이다'라고 하던 슈마허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니 긴장감이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슈마허와 힐은 20바퀴 전후를 앞뒤로 붙어서 달렸습니다. 그 후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기 전 자신만만하던 힐은 "(20바퀴 후) 그의 페이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슈마허가 살짝 방심했던 탓일까요, 그 순간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코너를 돌던 슈마허의 차가 턱을 넘어가며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1~2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속 300㎞를 넘나드는 F1의 특성상 순위를 뒤집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턱을 넘어가며 속도가 줄었고, 차체에 충격을 줄 만한 충돌은 아니었습니다. 이전화에서 설명했듯이, 최악의 경우 충돌은 드라이버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일톤 세나처럼 말이죠. 결승선 통과=우승...새 라이벌 데이먼 힐의 운명은 당시 슈마허는 "레이스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며 자신감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프로답게, 차체가 흔들리고 정신이 없는 순간에도 그는 핸들을 이리 저리 꺾으며 차에 이상이 없는지, 타이어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습니다. 이런 기회를 놓칠 힐이 아니었습니다. 1초가 채 안되는 짧은 시간, 1위 자리를 두고 두 '천재' 드라이버가 물고 물리는 싸움을 몇 차례 이어갔습니다. 사고는 그때 발생했습니다. 힐의 차가 슈마허의 차를 살짝 스쳤고, 그 충격으로 슈마허의 차가 다시 힐의 차를 치면서 슈마허의 차가 공중에 붕 떴습니다. 오른쪽 앞, 뒤 바퀴가 동시에 들리고 벽에 부딪힐 정도로 상당한 충돌이었습니다. 이미 그해 세나를 잃었던 F1이었기에 모두가 '더 이상의 사고는 안된다'며 소리쳤죠. 힐이 결승선을 통과하기만 하면 우승하는 상황. 경기가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힐의 차 역시 고장났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결국 힐도, 슈마허도 모두 경기를 끝내지 못하게 되면서 이전 경기까지 1점을 앞섰던 슈마허가 그 해 챔피언십 타이틀을 가져가게 됩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슈마허가 일부러 힐의 차와 충돌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서 벽에 한 차례 부딪혔던 슈마허가 차의 이상함을 느끼고 좋은 기회에 사고를 냈다는 것입니다. 힐도 "마지막 경기, 2위와 1점 차이나는 상황에서 라이벌이 치고 들어온다면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크게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과정이 어쨌든, 슈마허는 1994년 세계 챔피언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아내의 헌신도 한 몫...슈마허 "늘 그랬듯, 코리나 응원 큰 힘"미하엘 슈마허의 우승 뒤에는 아내 코리나 슈마허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오랜 연인입니다. 슈마허는 늘 경기를 따라오는 코리나에게 감사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카메라에 함께 서고, 인터뷰에서 코리나를 언급하며 그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1994년 세계 챔피언이 된 호주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도 "늘 그랬듯, 아내 코리나의 응원이 이 순간에도 큰 힘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둘이 행복하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모습은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 되기도 했습니다. 슈마허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코리나는 "한 번은 저녁을 하는데 미하엘이 유일하게 청소와 설거지를 같이 했다. 그때 정말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다"며 "유머 감각도 뛰어난 데다 근사한 사람이라 사랑에 빠졌다. (미하엘은)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코리나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F1은 전 세계에서 경기가 열리기 때문에 항상 시차가 발생하는데, 코리나는 슈마허의 충분한 수면을 위해 늘 배려했습니다. 코리나는 "한 번은 스즈키 경기 전 날 너무 잠이 안 왔다. 그래서 밤의 절반을 변기 위에서 보냈다. 미하엘을 깨우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서 내내 책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택에서는 미하엘이 코리나를 배려했다고 합니다. 코리나는 "집에서 미하엘이 일찍 나갈 때는 정말 조용히 준비한다"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가기 직전에 내 팔을 쓰다듬으며 '이제 나간다'고 속삭인다. 늘 배려해준다"고 전했습니다. 아내의 헌신 덕분인지, 슈마허는 이후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1995년에도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라 2년 연속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세계 최고의 드라이버’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죠. 정상의 자리에 오르자 그를 데려가려는 팀도 많아졌습니다. 다음화에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10-18 08:55:15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이번 화에서도 F1 전설, 미하엘 슈마허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특히 슈마허의 라이벌과 그의 죽음 등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F1 전설 슈마허, 그리고 라이벌 세나천재적인 드라이버 슈마허에게도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바로 브라질 출신의 '아일톤 세나'입니다. 그는 슈마허 이전 F1을 지배하던 선수로 월드 챔피언 경력도 세 차례나 있습니다. 세나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 좀 더 비중을 둬서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입니다. 1994년 5월 1일, 이탈리아 이몰라 서킷에는 슈마허와 세나를 비롯한 선수들이 여느 때와 같이 레이싱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챔피언 점수에서 슈마허에 뒤쳐지던 세나는 이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지게 되면 사실상 세계 챔피언은 슈마허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경기를 앞두고 세나가 굉장히 공격적인 레이싱을 펼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가 큰 사고를 당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경기가 시작되고 세나는 예상대로 공격적인 운전을 하며 1위로 레이싱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뒤는 슈마허가 바짝 따라 붙고 있었습니다. 몇 랩 후 세나와 슈마허가 탐부렐로 코너(2번 코너)에 진입했을 때, 1등으로 가던 세나의 차가 급격하게 흔들리며 벽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차가 반파되고, 바퀴 2개가 나뒹굴 정도로 큰 사고였습니다. 경기장에는 자동차 파편들이 여기 저기 흩뿌려져 있었고 사고의 충격으로 세나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진행요원인 마샬들이 긴급하게 황색기(옐로우 플래그)를 흔들며 수습에 들어갔습니다. 황색기가 나오면 일시적으로 추월이 금지됩니다. 이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마샬이 급하게 적색기(레드 플래그)를 사용하며 경기는 일시 중단됐습니다. 당시 슈마허가 몸 담았던 베테통의 팀 대표 플라비오 브리아토레는 "모두가 침묵했다"며 "이상한 공기가 경기장을 감쌌다"고 회상했습니다. 브리아토레는 올해 알핀팀을 통해 F1에 복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세나의 죽음과 전설의 슬픔들것이 등장하고, 구조 헬기가 세나를 데려갔습니다.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사고에도 대부분이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헬기에 실려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세나의 복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서킷을 재정비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기는 재개됐습니다. 주행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진행돼 쉽지 않았던 데다, 서킷 자체가 크지 않은 탓에 추월이 힘들었고, 기존 1위 세나가 빠진 상황에서 슈마허를 이길 사람은 없었습니다. 슈마허는 이때까지 세나의 죽음을 몰랐다고 합니다. 주위 사람들도 슈마허에게 "(세나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만 전달했다고 합니다. 슈마허는 우승 후 서게 된 시상식(포디움)에서 크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라이벌은 세나와 나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안다"고 할 만큼 세나를 존중했던 슈마허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죠. 슈마허는 우승대 위에서 세나가 혼수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슈마허는 "지금 코마 상태라고 하더라도 내일, 혹은 그 다음날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경기 2시간 뒤 세나가 위급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는 "꼭 나쁜 건 아닐 거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세나의 죽음이 알려진 후 슈마허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며 "한 두 경기를 놓치긴 하겠지만 다시 돌아와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습니다. 라이벌의 죽음 후, 슈마허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는 "2주가 넘게 세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운전대를 다시 잡기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영국 실버스톤 서킷에 갔을 때 많은 것들이 바뀌어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슈마허는 "일반 차량을 타고 실버스톤 서킷을 돌았는데, '이 지점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여기서 테스트도 많이 하고 경주도 많이 했는데, 이런(죽음과 관련한) 지점밖에 안 보였다"고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라이벌 '데이먼 힐'의 등장슈마허는 실제로 약간의 슬럼프를 겪었습니다. 물론 3위 안에는 꾸준히 들었지만 상당 기간 동안 1위를 하지 못했습니다. 세나의 죽음 이후 열린 영국,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모두 영국 출신 데이먼 힐이 우승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슈마허는 타고난 정신력으로 금방 페이스를 되찾았습니다. 이후 열린 스페인 헤레스 그랑프리에서는 1위를 되찾아올 정도였습니다. 1994년 세계 챔피언은 호주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결정됐습니다. 슈마허와 데이먼 힐은 마지막 경기 직전까지 단 1점 차이로 1·2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음화에는 1994년 마지막 경기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슈마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10-03 14:58:19[파이낸셜뉴스] 케이스톤파트너스는 스마트 헬멧 제조사 '세나테크놀로지'를 인수했다고 9월 30일 밝혔다. 카카오게임즈로서는 2021년 인수 후 매각이다. 케이스톤파트너스는 세나테크놀로지 지분 38%를 인수했다. 기업가치(EV) 기준 2000억원 이상에 거래다. 카카오게임즈는 이번 딜(거래) 후에도 지분을 보유한다. 한편 1998년 설립된 무선 통신장비 제조업체 세나테크놀로지는 무선 통신장비와 아웃도어 스포츠 및 산업용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 등을 제조하고 있다. 카카오게임즈는 2021년 7월 952억원을 들여 경영권을 인수했다. 세나테크놀로지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904억원, 영업이익은 144억원이다. ggg@fnnews.com 강구귀 기자
2024-09-30 16:16:43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지난화에는 2026년 바뀌는 F1 규정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앞서 예고한대로, 이번화부터 몇 화에 결쳐 여러 선수와 그 팀에 대해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선수는 미하엘 슈마허입니다. F1의 전설, 미하엘 슈마허7번의 세계 챔피언, 155번의 포디움(3위 이내), 68번의 폴포지션(출발선 맨 앞자리). F1의 전설, 미하엘 슈마허가 현역 시절 세운 기록들입니다. 물론 은퇴를 한 차례 번복하긴 했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죠. 독일 태생 슈마허의 등장은 말 그대로 '센세이셔널' 했습니다. 그는 1991년 조던-포드 소속으로 F1에 데뷔하고 그해 예선 7위를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당시 조던 팀이 기록한 가장 높은 예선 성적입니다. F1보다 2단계나 낮은 F3 선수였던 데다 사실상 기존 드라이버의 '대타'로 들어갔던 상황이라 큰 기대가 없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슈마허의 나이는 주변 드라이버들에 한참 못 미치는 22살이었습니다. 당시 잘 나가던 레이서들은 대부분 27~28살이었죠. 하지만 그의 레이싱을 본 사람들은 "얼굴에 수염도 하나 없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마초 같은 어른들에 맞서는 소년의 모습이다"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1년 뒤인 1992년 8월, 그는 결국 벨기에 스파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하게 됩니다. 당시 최연소 우승이었죠. 슈마허는 "(지금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독일 팬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린다. 부모님께 그냥 '안녕' 이라고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기뻐했습니다. 슈마허는 어릴 적부터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았지만 완벽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이런 성격은 F1 경기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완벽주의를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1983년 슈마허가 14살이었을 당시 독일 카르펜-만하임에서 월드 주니어 카트 챔피언십을 했는데, 어찌나 연습을 많이 했던지 경로를 다 외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기를 함께 하고 훗날(1998~1999년) 월드 챔피언이 된 미카 하키넨은 "(슈마허의) 운전 스타일은 정말 환상적이었다"며 "다른 드라이버들과 다르게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4살부터 카트 탔지만...힘들었던 가정형편 슈마허는 4살부터 카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카트는 슈마허의 아버지 롤프 슈마허가 직접 만든 '핸드 메이드' 제품이었습니다. 슈마허는 "(카트에) 타자마자 바로 빠져들었다"며 "단 한 번도 (카트를 타는 게) 싫증 난 적이 없다"고 회상했습니다. 롤프 슈마허는 이후 슈마허가 6살 되던 해 클럽용 고카트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슈마허는 그 옆에서 작업이 잘 진행되는지, 결과물은 어떤지 평가하곤 했습니다. 슈마허가 어릴 적부터 카트를 타긴 했지만 가족들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가족들은 한 푼을 더 벌기 위해 언제나 식당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죠. 다른 드라이버 집안처럼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비도 저렴한 걸 구해서 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슈마허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쓰다 버린 폐타이어를 사용했지만 우승은 늘 그의 몫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장비보다 열악한 장비로 우승하는 게 좋았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동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1983년 당시 국적을 바꿔 대회에 참가한 것도 돈 때문입니다. F1 업계에 따르면 선수 한 명을 키워내는데 필요한 돈은 약 100억원 전후입니다. 슈마허는 "독일 태생으로 신청하면 돈이 많이 들어가는 데다, 탈락하면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할 수 없어서 룩셈부르크 대표로 신청했다. 룩셈부르크 대표는 저 말고 없어서 비용 없이 본선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슈마허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워낙 형편이 어려워서 F1까지 못 올라갈 줄 알았다"고 입을 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8년 F1 매니저 윌리 웨버를 만난 후 상황은 급변합니다. 웨버 매니저는 "우리 팀 선수로 영입하고 싶었지만, 돈이 문제였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한 시즌을 뛰기 위해서는 당시 최소 60만마르크(약 4억5475만원)가 필요한데, 슈마허는 500마르크(약 38만원)도 없었죠. 하지만 슈마허가 마음에 들었던 웨버 매니저는 슈마허 아버지에게 직접 가서 "월급 2000마르크(약 151만6000원)에 차도 지급하겠다"며 "5년 계약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슈마허와 아버지도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슈마허가 있기까지 1등 공신은 웨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슈마허 이야기는 앞으로 1~2화 정도 더 다룰 생각입니다. 다음화에는 경쟁자의 죽음과 슈마허가 거쳐간 팀 등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09-20 03:08:11[파이낸셜뉴스] 무면허 상태로 전동 킥보드를 탄 의혹을 받는 프로축구 FC서울의 제시 린가드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과했다. 린가드는 17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동영상을 올리고 "전동 킥보드를 탈 때 헬멧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몰랐다. 더불어 운전면허 소지자만 탈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은 이 규정을 잘 확인했으면 좋겠다. 안전이 항상 최우선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앞서 린가드는 지난 16일 자신의 SNS에 전동 킥보드를 타는 영상을 남겼다. 하지만 린가드는 전동 킥보드를 타면서 헬멧을 쓰지 않은 데다 지난해 9월 영국에서 음주 운전으로 벌금과 함께 18개월 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던 터라 무면허 운전 논란까지 불거졌다. 결국, 강남경찰서는 17일 린가드의 운전면허 상태와 음주 여부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2024-09-18 22:58:30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히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포뮬러원(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F1 세계의 소식을 쉽고, 깊이있게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4화에서는 국내 F1 유치를 목표로 뛰고 있는 인천시가 올해 7월까지 만들어낸 성과·향후 계획에 대해 다뤄봤습니다. 이번화에서는 2026년부터 새롭게 바뀌게 될 F1 규정에 대해 소개드리겠습니다. 기술·안전·지속 가능..."현실 밀접 F1 규정 공개" "2026년 변화의 핵심은 진보적이며 지속 가능한 기술, 그리고 안전입니다." 모하메드 벤 술라옘 국제자동차연맹(FIA) 회장은 지난 6월 새롭게 발표한 F1 규정의 핵심을 이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F1 내 파트너들과 10개 팀, 그리고 우리 주주들과 함께 좀 더 현실과 밀접하면서 독특한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부연했죠. FIA 기술 이사인 니콜라스 톰바지스도 규정 발표 이후 "FIA는 이 규정을 통해 F1 DNA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차세대 자동차를 개발하고자 한다"며 "가볍고, 매우 빠르며, 민첩하면서, 기술의 정점을 달리는 차가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업계 기대감은 커졌습니다. 마침 F1 팬들도 좀 더 빠르고 스릴 있는 경기를 원하던 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새롭게 소개된 2026년 F1 규정은 크게 △100% 지속 가능 연료 사용 △차 무게 30㎏ 감소 △안전성 향상 △추월을 위한 새 시스템 도입 등입니다. 이 중 제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것은 '100% 지속 가능 연료 사용'입니다. 사실 그동안 F1이 비판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탄소 배출'도 한 몫 했습니다. 럭셔리한 차에 고급 소재, 값비싼 엔진이 들어간 데다 탄소까지 내뿜으니 반대하는 입장에서 좋게 보일 수 없었죠. 2022년 7월경에는 영국 실버스톤 서킷에서 열린 F1 경기 중간에 영국 환경단체 활동가 7명이 트랙 안으로 난입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2026년부터 100% 지속 가능 연료 넣겠다"이런 상황에서 FIA가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고 공식 발표한 건, 사실상 정면 돌파 행보입니다. F1은 파트너 아람코(국내 정유사 에쓰오일의 모회사)와 연구 및 테스트를 거쳐 2026년부터 모든 경주용 자동차에 지속 가능 연료를 넣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연료를 전 세계 모든 내연 기관 차에 사용할 계획도 있다고 했습니다. FIA는 2030년 전 세계에 약 12억대의 내연 기관 차량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해당 연료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톰바지스 이사는 "지속 가능 스포츠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파워 유닛의 전기 부품 확대, 자동차 효율 증가, 지속 가능한 연료 등을 선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목표 달성이 크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에서 20명 만이 경기에 참여하는 만큼, 전체 차 대수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FIA에 따르면 F1은 현재 전체 연료 사용량의 10% 정도를 에탄올 바이오(지속 가능 연료 일종)로 사용합니다. 지난해 기준 범위를 하위 리그 F2, F3까지 넓히면 지속 가능 연료 사용 비율은 55%까지 올라가죠. F1 팬들의 반응은 긍정적입니다. "더 이상 '환경 파괴범' 이라며 손가락질 받을 필요가 없다", "이제 마음 놓고 자유롭게 응원하겠다", "계획대로 되면 좋겠다" 등 대다수가 이런 결정을 반겼습니다. 팬들은 FIA가 차 무게와 크기를 줄인 결정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무게가 줄어든 만큼 선수들이 서킷에서 좀 더 역동적이고 빠른 경주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FIA에 따르면 2026년 F1 경기차의 최대 휠베이스와 폭은 각각 기존 대비 200㎜, 100㎜ 줄인 3400㎜와 1900㎜입니다. 무게 감소로 2026년형 차량의 최소 중량은 768㎏가 될 전망입니다. 2022년형 대비 30㎏ 줄어든 무게입니다. 이밖에도 전원 장치에 더 큰 힘을 공급하기 위해 배터리 요소를 기존 대비 약 3배로 늘리고, 경기 중 추월을 위한 새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FIA는 대회의 즐거움을 불어넣기 위해 다양한 규정을 만들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제조사, 선수 개인 능력 중요해질 것"F1업계는 규정 변화로 향후 차 제조사·선수들의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돌아봤을 때, 규정 변화에 맞춰 발빠르게 변화했던 팀이 우승을 많이 차지했기 때문이죠. 다음화부터는 몇 화에 걸쳐 F1 팀들의 역사와 대표 선수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바뀐 규정을 잘 활용해 실제 우승 횟수가 크게 늘어난 팀을 비롯해 역사가 깊은 팀, 인기 팀 등을 다양하게 포함할 예정입니다. 혹시 궁금한 팀, 선수가 있으면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적극 참고하겠습니다.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09-06 08:21:26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3화에서는 ‘국내 F1 유치’와 관련한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해봤습니다. 이번화에서는 국내 F1 유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인천시가 올해 7월까지 만들어낸 성과 및 향후 계획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4월 日, 5월 모나코...동분서주 인천시인천시는 이르면 오는 2026년, 늦어도 2027년 국내 F1 유치를 목표로 잡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올해 4월 6일 일본 스즈카 F1 그랑프리를 방문, 유치 의향서를 제출했습니다. 유정복 시장도 동행해 이 자리에서 F1 그랑프리 개최 의사를 정식으로 밝혔습니다. 그리고 약 2주 뒤인 4월 23일 인천시 내 임시 전담조직을 꾸렸습니다. "해 볼만 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죠. 이후 6월 말 시의회로부터 대회 준비를 위한 서킷 디자인 용역 예산을 승인 받고 7월 임시 조직을 정식조직으로 개편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천시는 올해 안에 용역을 통해 적정 대상지와 서킷 조성 계획, 개최 효과 등 기본 구상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일각에서는 개최지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일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지만, 인천시는 "결정된 바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현재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F1측과 인천 대회 관련 여러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인천시의 진심은 5월에도 확인됐습니다. 앞서 4월 일본 스즈카 그랑프리를 방문한 인천시는 유 시장을 포함해 대표단을 꾸린 뒤, 5월 25일 모나코 F1 그랑프리를 방문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F1 그랑프리 인천 대회 개최를 위한 실무 논의를 진행했죠. 인천시 관계자는 "대표단이 20시간 가까이 이동해 현지에 새벽에 도착했고 바로 현장에 참여하는 등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며 "첫째날 현장일정 종료까지 시장을 비롯한 대표단이 거의 40시간 동안 제대로 된 잠도 못 자고 일정을 소화했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유 시장은 모나코 그랑프리에 참석 중인 스테파노 도메니칼리 F1 그룹 최고경영자(CEO)를 직접 만나 협력 의향서를 전달했습니다. 물론 F1의 인천 개최 내용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인천시에 따르면, F1측은 인천에서 대회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원칙적으로 공감했다고 합니다. 양측은 업무협약(MOU) 및 계약 체결을 위한 조건들을 점검했습니다. 이를 통해 올해 안에 공식 제안서를 제출하겠다는 계획입니다. "경제적 효과 끌어올릴 수 있다...접근성도 우수"인천시가 F1을 개최하려고 하는 이유는 외부 관광객 유치와 함께 경제적 효과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F1은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앞서 2화에서 말씀드렸지만, 지난해 기준 전 세계 TV 시청자가 15억명을 넘어설 만큼 인기 있는 스포츠입니다. 일례로 업계는 지난해 11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F1 대회가 32만여명의 관광객을 끌어 모았고, 약 1조75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냈다고 추산합니다. 인천시는 F1 그랑프리 대회를 유치하면 최소 5년에서 10년 이상 장기적으로 개최할 계획입니다. 따라서 경제적 효과를 이어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전남 영암에서 실패한 사례가 있는 만큼, 인천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국내 F1 유치 내용은 3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일부 시민단체들은 대회 개최에 따른 지방재정 악화, 성공 가능성 여부, 환경문제 등을 이유로 F1 유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재정 악화를 가장 크게 걱정합니다. "전남 때와는 다르다"...인천시 자신감 원천은하지만 인천시는 성공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전남 영암에서 했던 '전용 경주장' 방식의 서킷이 아니라 '시가지 서킷', 즉 도심 레이스로 기획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예 처음부터 경기장을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초기 비용 등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따라서 재정을 크게 악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인천시 관계자는 "인천국제공항 등 편리한 교통망이 있어 해외 관광객의 접근성이 우수하고, 특급호텔 등을 다수 보유해 숙박도 편리하다"며 "2600만명 이상의 수도권 배후인구가 있어 대회 흥행을 위한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지난 2014년 아시안게임 같은 큰 대회를 치룬 경험이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힙니다. 인천시는 F1 관련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면 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입장입니다. 인천시는 "F1 그랑프리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과 인천의 위상을 제고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새로운 분야의 스포츠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물론 F1을 유치하는 데 적지 않은 돈이 드는 건 사실이고 반대 의견도 있지만, 인천시의 F1을 향한 진심 만큼은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음화에서는 2026년 새롭게 바뀌는 F1 규정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국내 관심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2026년 전 미리 알아두면 좋은 정보이기도 합니다. 혹시 권마허의 헬멧에서 다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08-23 15:44:49세계 3대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인기가 많지만 유독 국내에는 인기가 없는 ‘F1’. 선수부터 자동차, 장비, 팀 어느 것 하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 세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격주 주말, 지구인들을 웃고 울리는 지상 최대의 스포츠 F1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무거운 주제들을 다양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다루겠습니다. F1 관련 유익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원하신다면, ‘권마허의 헬멧’을 구독해주세요.[파이낸셜뉴스] 2화에서는 리버티미디어의 F1 인수 이후 바뀐 점과 ‘빅딜’이 가져온 경제적·사회적 효과에 대해서 짚어봤습니다. 이번화에서는 ‘국내 F1 유치’와 관련한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2010년 10월, 한국에서도 F1 열렸다2010년 10월 21일, 많은 국내 F1 팬들이 잠을 설쳤습니다. 다음날인 22일, 국내에서 역사상 최초로 F1 그랑프리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전남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KIC)에서 개최된 행사에는 연습주행에만 경찰 추산 1만여명의 팬들이 몰리며 흥행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당시 1만6000여석이었던 메인 좌석은 절반 가량 찼고 경주장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사람과 이를 막는 경찰 사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죠. 경기장 주변 숙박업소와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 찰 만큼 ‘F1 특수’를 톡톡히 누렸습니다. 평상시와 비교했을 때 외국인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특히 F1 대회 스태프들과 관광객들이 저녁 무렵 술집에 모이면서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다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불만이 나왔습니다. F1 전설 미하엘 슈마허(당시 메르세데스)는 “스피드를 낼 수 있도록 잘 구성된 서킷”이라며 만족했지만 루이스 해밀턴(당시 멕라렌)은 “지금까지 달려본 서킷 중 이물질이 가장 많았다”고 밝혔습니다. 제바스티안 페텔(당시 레드불)도 “오전에 이물질이 많아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소기의 성과'는 달성..."마무리는 아쉬워"우려 반, 기대 반 속에 열린 첫 번째 대회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우선 연습주행-예선전-결승전, 3일 동안 16만여명의 관중이 몰리는 등 주최 측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숙한 대회 운영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대표적으로 주차장과 그랜드스탠드 사이 거리가 멀었다는 점, 경기장 내 화장실을 찾기 어려웠던 점, 일부 스탠드가 경기 당일까지 완성되지 못했다는 점 등 관람객들의 불만은 상당했습니다. 여기에 고가 좌석에는 빈자리가 많았다는 점과 대기업 스폰서가 많지 않다는 점, 정부 관심이 떨어지는 점도 일부 한계로 지적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F1 측과 개최권료 협상이 결렬되며 기존 2017년까지 열기로 했던 대회는 2013년까지밖에 열지 못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4000억여원을 들여 건설한 전남 영암 서킷과 4년에 걸쳐 쌓인 약 2000억원에 이르는 적자였습니다. 자동차업계는 F1 개최 비용에 투입한 예산을 1조원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F1을 “반쪽짜리 성공”이라고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F1이 사상 처음 한국에서 열렸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마무리가 아쉬웠다는 의견이 많죠. "구조적 문제에 부정적인 국민 여론까지"그렇다면 한 번 열렸던 F1이 왜 아직까지 국내에서 열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업계는 크게 구조적인 문제와 부정적인 국민 여론 등을 이유로 꼽습니다. F1업계에 따르면 F1이 건너온 유럽은 왕족이나 국가가 경기 스폰서를 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이들은 국민이 즐기는 스포츠의 지원을 ‘사회 공헌적인’ 성격으로 생각하죠. 한 F1 관계자는 “가까운 나라 일본은 완성차 업체들이 공동으로 대회를 연다”며 “매년 타이틀 스폰서를 바꾸면서 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도 이 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나 기업들의 눈에 띄는 지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F1이 국민 스포츠도 아닌 데다 당장 지원을 해도 돌아오는 효과가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F1 경기가 열렸던 당시 정부는 대회 관련 100억원 가량을 지원했지만, 대부분 적자는 전남도에서 해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3년에는 그나마 있던 대기업 스폰서도 떨어져 나갔죠. 부정적인 국민 여론도 한 몫 합니다. 또 다른 F1업계 고위 관계자는 “여전히 국민들 중 대다수가 F1을 ‘럭셔리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며 “어차피 타지도 못하는 차를 보기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상황이 이런 탓에 국내 F1 유치는 사실상 쉽지 않다는 게 업계 시각입니다. 하지만 F1을 개최했던 경험이 있다는 것은, 언제든 다시 대회를 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목소리도 많습니다. 이에 도전하듯, 올해 인천시가 오는 2026년 또는 2027년을 목표로 F1 개최를 위해 다방면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음화에서는 F1 개최 관련 열심히 뛰고 있는 인천시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겠습니다. 혹시 권마허의 헬멧에서 다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 메일이나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물론 피드백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kjh0109@fnnews.com 권준호 기자
2024-08-06 0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