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점프볼> ‘돌파의 달인’ 정영삼(29,전자랜드)이 돌아왔다. 프로 데뷔 후 네 시즌을 소화한 뒤 남들보다 한참이나 늦은 시기에 군입대를 결정한 그는 어느덧 한국식 나이로 30세가 돼서야 전투모에 예비역 마크를 새겼다. 시즌 중반까지 SK, 모비스와 함께 선두권을 형성하던 전자랜드는 선수들의 계속되는 줄부상에 서서히 페이스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해결사가 되어 돌아온 정영삼의 종횡무진 활약 덕분에 3위 자리를 사실상 굳혀놓은 상황. 다가올 플레이오프에서 전자랜드 최종 성적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영삼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인천삼산월드체육관을 찾았다. ▲ 이제는 두 아이의 자랑스러운 아빠 군 입대로 프로농구 팬들과 잠시 이별을 고했던 지난 2년 간의 공백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정영삼은 프로데뷔 2년 차 시즌을 보낸 직후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입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깨를 다치면서 입소 자체가 불가능했고, 동갑내기 정병국이 그를 대신해 먼저 머리를 짧게 잘랐다. “부상 때문에 1년을 더 뛰고 상무에 갈 계획이었는데 그마저도 미뤄졌어요. 유도훈 감독님께서 부르시더니 ‘영삼아, 너 4년하고 가는 것이 무리인줄은 알지만 나를 믿고 따라와라. 너에게도 나중에 좋을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사실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시 한 번 미룰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정규리그 2위라는 좋은 성적을 남기고 떠날 수 있었죠. 어떻게 보면 제게도 기회를 한 번 더 주신 것인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규리그 2위라는 달콤한 결실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인들은 물론 운동선수들 가운데서도 그의 입대는 매우 늦은 편에 속했다. 특히 이른 나이에 결혼하면서 ‘두 아이의 아빠’라는 막중한 역할까지 짊어지고 있던 그였기에 군 생활은 힘든 순간의 나날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입대 당시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내와 첫째 아이, 친 형과 함께 논산 훈련소에 갔어요. 제가 스트레스가 심하면 장염이 찾아오는데 내려가는 길에 화장실만 열 번을 넘게 들린 것 같아요.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딸을 안아주려고 하는데…(정적)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열 맞춰서 들어가는데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에 손을 흔드니까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더라고요. 저도 눈물 참느라고 죽는 줄 알았어요” 이어 정영삼은 첫 외박을 마치고 복귀하던 순간에 대해서도 회상했다. 첫째 딸 정채연(5)양이 근무복 바지를 끌어안고 늘어지더니 가지 말라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는 것. 당시 ‘미치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는 게 정영삼의 설명이다. 결국 정영삼 역시 아내 문선이(30)씨와 끌어안고서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내가 더 힘들었겠죠. 아기는 두 명인데 수입은 없으니까 아무래도 경제적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잖아요. 아내가 마음이 여려서 제가 가고 난 뒤 아마도 많이 울었을 텐데 제 앞에서는 내색을 전혀 안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징징댔을 법도 한데 한 마디 불만도 없이 이해해줘서 너무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자 하나는 잘 만난 것 같아요. 하하” 정영삼은 군 시절 아이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었던 일로 ‘마음껏 놀아주기’를 꼽았다. 첫째 딸이 유치원에서 가족 체육대회를 할 때마다 함께 참여하지 못한 점이 그동안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는 것. 그는 공중전화 수화기 너머로 어린 딸을 이해시키고 달래야 하는 군인 신분의 현실에 특히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털어놓으며, 외박 및 포상휴가를 받을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사진=KBL> ▲ 못 다한 효도, ‘아버지’ 세 글자에 쏟아낸 눈물 2011년 8월31일. 아침 점호를 마친 정영삼에게 뜻하지 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날은 정영삼이 아내와의 백년가약을 맺은 지 3년째가 되는 날이기도 했지만 지금껏 자신을 묵묵히 뒷바라지 해왔던 아버지 故 정현태 씨가 영면(永眠)한 순간이기도 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찾아온 이훈재 감독의 말에 따라 정영삼은 즉시 옷을 갈아입고 행정반으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오열이 뒤섞여 있었다.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고, 결국 이모부로부터 믿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전해 들어야만 했다. “충격이었죠.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로부터 한 달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내려갔다왔는데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을 보고 너무 좋아하셨거든요. 당시에는 정말 건강하셨기 때문에 소식을 듣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멍한 기분이 들었어요” 정영삼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더없이 소중했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형편 탓에 농구 선수가 되는 것을 줄곧 반대해왔지만 끝내 아들의 고집을 꺾지는 못한 채 묵묵히 이를 뒷받침했던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농구장으로 발길을 옮긴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오리온스가 정영삼의 고향인 대구를 연고지로 사용하던 당시 아들의 원정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것. 이처럼 무뚝뚝하다고 여겼던 아버지의 감춰진 속마음을 정영삼이 온전히 느끼게 된 것은 바로 본인의 기사를 알게 모르게 스크랩 해둔 흔적을 발견한 뒤의 일이었다. “아버지께 못해드린 기억만 나는 것 같아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끝내 인터뷰 도중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사진=점프볼> 전역과 동시에 정영삼은 두 아이에게 자랑스러운 아빠, 아내에게 듬직한 남편으로 거듭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다. 비록 아들로서의 못 다한 효도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지만 정영삼은 뒤늦게나마 우승 반지를 손에 넣어 아버지 영전에 바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어쩌면 그의 부친이 이 모든 것을 이미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의 자랑스러운 활약이 더욱 훤히 들여다보일 저 높은 하늘 위에서. <2편에서 계속> /파이낸셜뉴스 스타엔 yuksamo@starnnews.com박대웅 기자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starnnews.com
2013-03-13 10:5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