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의 친할머니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화제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2년 넘게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11살 소녀의 친할머니가 지난 24일 아이의 큰 아버지와 함께 인천 연수경찰서를 찾았다. 이날 친할머니는 “손녀를 만나보고 싶다”며 아이를 맡아 키우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다. 하지만 아동보호전문기관은 갑작스럽게 친인척이 나타나면 아이의 심리적 안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해 면담을 허가하지 않았다. 경찰 또한 친할머니와 큰아버지가 학대 가해자인 친아버지 쪽 가족이기 때문에 섣불리 아이를 인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한편 최근까지 인천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소녀는 지난주 같은 지역 소재 병원으로 옮겼다. /news@fnnews.com 온라인편집부
2015-12-28 16:44:27▲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11살 학대 소녀의 친할머니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2년 넘게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11살 소녀의 친할머니가 지난 24일 아이의 큰 아버지와 함께 인천 연수경찰서를 찾았다. 이날 친할머니는 “손녀를 만나보고 싶다”며 아이를 맡아 키우겠다고 의사 표시를 했다. 하지만 아동보호전문기관은 갑작스럽게 친인척이 나타나면 아이의 심리적 안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해 면담을 허가하지 않았다. 경찰 또한 친할머니와 큰아버지가 학대 가해자인 친아버지 쪽 가족이기 때문에 섣불리 아이를 인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한편 최근까지 인천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소녀는 지난주 같은 지역 소재 병원으로 옮겼다. /news@fnnews.com 온라인편집부
2015-12-28 15:14:56▲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나타나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나타나 11살 학대 소녀의 친할머니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눈길을 끈다. 아버지와 그의 동거녀에게 3년 가까이 감금과 폭행을 당한 11살 소녀의 친할머니가 최근 경찰서에 나타나 손녀를 직접 양육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28일 인천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아동학대 피해자 A 양(11)의 친할머니인 B 씨는 지난 24일 위의 학대 사건을 수사한 인천 연수경찰서를 찾아 A양을 맡아 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B 씨는 A 양의 큰아버지와 함께 경찰서에 방문에 “손녀를 만나보고 싶다”며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news@fnnews.com 온라인편집부
2015-12-28 15:07:07▲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나타나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 나타나 11살 학대 소녀 친할머니가 나타났다. 친아버지로부터 2년 넘게 학대를 당하다가 탈출한 11살 소녀의 친할머니가 지난 24일 아이의 큰 아버지와 함께 인천 연수경찰서를 찾았다. 이날 친할머니는 “손녀를 만나보고 싶다”며 아이를 맡아 키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아동보호전문기관은 갑작스럽게 친인척이 나타나면 아이의 심리적 안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해 면담을 허가하지 않았다. 경찰 또한 친할머니와 큰아버지가 학대 가해자인 친아버지 쪽 가족이기 때문에 섣불리 아이를 인계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소녀는 최근까지 인천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지난주 같은 지역 소재 병원으로 옮겼다. /news@fnnews.com 온라인편집부
2015-12-28 15:02:54자신의 11살짜리 손녀딸을 성폭행해 임신시키고 9살 손녀딸까지 성추행한 인면수심의 할아버지에게 징역 200년이 선고됐다. 2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데일리뉴스 등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 몬타나 주 스티븐스빌에 사는 마이클 셰인 프루에트(55)는 지난 주 열린 재판에서 근친상간 등의 혐의로 징역 20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프루에트는 11세 손녀딸 A양을 성폭행해 임신시키고, A양의 여동생인 B양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며 그의 사회 복귀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프루에트는그가 105세가 될 때까지 가석방 자격이 없다. 두 자매를 돌봐왔던 푸르에트는 앞서 지난 6월 체포됐다. A양이 임신 32주 진단을 받았기 때문. A양은 처음엔 아동복지 당국에 "남자친구의 아이"라고 진술했지만 이후 할아버지의 협박 사실을 털어놨다. 결국 뱃속 아이의 아빠는 프루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까지도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던 A양은 "임신을 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몰랐고, 그래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A양은 또한 할아버지가 9살인 자신의 여동생을 성추행하는 것도 목격했다고 진술해 충격을 더했다. A양은 지난해 8월 결국 할아버지의 아이를 출산한 것으로 전해졌다. kjy1184@fnnews.com 김주연 기자
2015-01-30 10:54:20[파이낸셜뉴스] 초등학생 손녀가 욕실에 쓰러진 할머니를 구하려다 감전돼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21일 경북 포항남부경찰서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8시34분쯤 포항시 남구 장기면 한 주택 욕실에서 전기온수기로 반려견을 목욕시키던 할머니가 전기 감전 사고를 당해 갑자기 쓰러졌다. 할머니가 쓰러지자 손녀 A(11)양이 할머니 손에서 전기온수기를 치우려다 추가로 감전됐다. A양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가족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심정지 상태인 A양을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 A양의 할머니는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전기온수기를 잡고 있던 A양의 손에 탄 자국이 발견된 점 등을 미뤄 감전 사고로 A양이 숨진 것으로 보고, 가족을 상대로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moon@fnnews.com 문영진 기자
2023-03-21 15:26:22[파이낸셜뉴스] 국내 주식을 10억원 이상 보유한 미성년자(19세 미만) 주주 90명 가운데, 17세 청소년이 많게는 2000억원어치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고 2022년생인 2살짜리 아이가 20억원의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17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주식 평가액 기준으로 50억원 이상을 보유한 미성년자 주주는 19명, 이 중 100억원 이상을 보유한 미성년자 주주는 11명으로 조사됐다. 보유 주식 가치가 가장 큰 미성년자는 곽동신 한미반도체 부회장의 17세 아들로, 2006억원어치의 주식을 보유했다. 지난해 말 622억원에서 1384억원이 늘었는데, 이는 연초 100만7984주였던 보유 주식 수가 올해 7월 197만7921주로 2배로 증가한 데다 인공지능(AI)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 수요 급증에 연초 이후 한미반도체의 주가가 폭등한 영향이다. 지난해 말 종가가 6만1500원이었던 한미반도체 주가는 지난 12일 10만1400원으로 66%가량 상승했다. 솔브레인 정지완 회장의 11살 손녀는 솔브레인을 포함한 3개 상장종목 주식을 321억원어치 보유하고 있다. 정양은 지난 연말까지 487억원가량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후 주식을 일부 처분하면서 보유 가치가 약 34% 줄었다. 타이어뱅크 김정규 회장의 18세 자녀는 파멥신 유상증자에 참여하면서 이 회사 주식을 191억원어치 보유하고 있다. 한미그룹 창업주인 고 임성기 회장의 16~18세 손주 3명은 140억∼168억원의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가지고 있다. 임 전 회장은 손주들이 어릴 때부터 지분을 증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탄소배출권 사업을 하는 코스닥 상장사 에코아이의 최대주주인 전종수씨의 자녀로 추정되는 13~18세 자녀는 각각 137억원어치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의 17세 딸도 현대그린푸드 주식 116억원어치를 보유해 미성년자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정 회장은 지난 7월 현대그린푸드 지분 전량을 가족들에게 증여한 바 있다.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미성년자 주주 중 최연소는 덕산테코피아 대표의 2022년생 자녀로 22억원가량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억원 이상 미성년자 주주 중 최연소는 덕산테코피아 대표의 2022년생 자녀로 나타났다. 현재 22억원가량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한일철강 엄정헌 회장의 손주들로 추정되는 4세, 6세, 7세, 9세 주주도 16억∼17억원어치의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2024-09-17 14:09:51작년 총 영화 관객은 1억2513만 5886명이다. 전년보다 10% 늘었다. 역대급 증가율이다. 하지만 한국영화계는 여전히 우울하다. 규모가 20년 전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객 2억명 시장’(2013년~2019년)은 이젠 영화계의 “이루어질 수 없는 달콤한 꿈” 같다. 그래도 완전히 회복한 시장이 있다. 관람 등급별로 분석하면 전체관람가 관객은 전년보다 2.2배 증가해 2051만여명이었다. 딱 ‘2억명 시대’의 평균 규모다. 작년 관객 증가 주역은 천만 영화인 ‘서울의 봄’과 ‘범죄도시3’보다 그들이다. 총관객의 16%였던 그들은 어느 정도 12세 관람가(49%)와 호환하기에 시장에 미친 영향은 그 이상이다. 전체관람가 시장의 회복은 연간 관객 증가율보다 더 중요한 신호다. 그 중심에 외부 악재에 가장 취약한 동시에 미래 중심 관객인 유·초등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유초등 관객은 외부 악재에 가장 취약하다. 코로나19, OTT, 비싼 입장료. 영화 시장의 악재를 뭐라고 진단하든 그들이 가장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관객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살아있다”고 “따따따 따 따 따 따따따”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니 영화계가 내놓는 외부 악재는 핑계일 뿐이다. 문제는 한국영화가 그들에게 갈 길이 없다. 한국영화는 ‘노키즈존’이기 때문이다. 당장 설 연휴에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손녀가 함께 ‘자막 없이’ 볼 수 있는 한국영화가 있었나? 봄방학 동안 초등학생 반 모임용 한국영화가 있었나? 'DMZ 동물 특공대'뿐이다. 참고로 이 조건들이 합쳐져 ‘겨울왕국’은 최초의 전체관람가 천만 영화가 됐다. 지난해 전체관람가의 89%가 외국영화 몫이었던 건 코로나19 탓이, OTT 탓이, 입장료 탓이 아니다. 아예 상관도 없다. ‘2억명 시장’ 때도 그랬으니까. 전체관람가 영화를 한국영화계가 만들 수 없는 이유는 있다. ‘애들 영화’는 돈이 안 된다는 계산. 어른들이 안 볼 것이라는 불신. 정말로 그럴까? ‘엘리멘탈’ 관객이 723만명, ‘짱구’ 극장판 2편 관객이 130만명. 웬만한 한국영화보다 더 관객이 많았다. 그래서다. 작년에 유튜브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캐리 언니와 슈퍼 콜라’와 ‘도티와 영원의 탑’은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극장판 ‘뽀로로’의 꾸준한 개봉은 말할 것도 없다. 비단 애니메이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전체관람가 ‘웡카’ 1주차 관객이 78만명이었다. ‘웡카’ 예매 관객의 49%가 30~40대다(CGV 기준). 그들은 20년 전 전체관람가 ‘해리포터’ 시리즈 관객이고, 5년 전 전체관람가 ‘알라딘’과 ‘미녀와 야수’의 관객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멍뭉이’(19만명)가 귀하다. 가령 ‘지구에 와서 초능력 쓰는 외계인 영화’, ‘세상을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 주인공 영화’를 누구에게 어떻게 팔 것인가? 영화 마케터 면접 질문이라면, 초호화 캐스팅, 유명 감독, 블록버스터가 정답이다. 기어코 ‘성인용 영화’로 팔아야 한다. 아무리 초등학생 관객이 호평해도 ‘초딩용 영화’로 파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이티’를 엄마 아빠와 봤던 어린이 관객이 어른이 되어 자녀와 함께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함께 본다는 것은 현재 한국영화로선 상상할 수 없다. 원래 한국영화에 전체관람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우뢰매’ ‘슈퍼 홍길동’도 있었고 ‘말아톤’ ‘우생순’ ‘마당을 나온 암탉’ ‘글러브’ 그리고 ‘집으로...’도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옛날 옛적 영화들이다. 왜 사라진 걸까? 기존 한국영화계가 전체관람가를 포기하고 12세와 15세 관람가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외국 전체관람가 영화를 보고 자란 유초등 관객이 20대가 됐다. 20대의 한국영화 호감도는 4050대보다 현저히 낮다. 한국영화계의 선택이 그런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한국영화가 완전히 무방비는 아니다. 뽀로로, 두다, 호기, 볼트, 자두, 차탄, 신비. 기존 한국영화계는 외면하는 주연 배우들이다. 그들은 4살에서 11살 관객이 12세, 15세, 청불 관객으로 가는 길목에 버티고 있다. 새로운 한국영화계가 출현할 때까지 그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김형호 영화산업분석가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2024-02-16 14:31:21[파이낸셜뉴스] "올브라이트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그의 역사가 미국의 역사입니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느냐는 것이라던 그의 말을 사는 동안 절대 잊지 않을 것"(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독재자들이 시간을 끌 때 매들린은 절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매들린은 독재자들을 압박하기 위해 달팽이 브로치를 달았다"(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장례식이 27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워싱턴DC 국립대성당에서 열렸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지난달 23일 지병인 암으로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추모 연설에 나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얼굴을 붉게 상기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브라이트 전 장관의 별세 소식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유럽으로 향하던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접했다면서 "나토 동맹이 오늘날 이토록 강력한 이유는 바로 올브라이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그의 선(善)함과 우아함, 인간미와 지성은 세상의 조류를 바꿨다"며 "그의 역사가 곧 미국의 역사"라고 올브라이트 전 장관을 추모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추모식 중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다음으로 올브라이트 전 장관을 발탁한 클린턴 전 대통령이 추모사에 나섰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고인이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냐다"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고인이 임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의 불명예스러운 유산을 공고히하는 역사적 실수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 점을 언급하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좋은 일을 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고 추억했다. 한편 이날 추모식에는 고인의 후임인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토니 블링컨 현 국무장관, 국무장관을 지낸 존 케리 대통령 기후특사,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참석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등 정계 인사들도 눈에 띄었다. ■ '브로치 외교'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1937년 체코 프라하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나치와 공산 정권을 피해 11살에 미국으로 왔다. 웰즐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84년과 88년 민주당 대선후보의 외교 고문을 맡으며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빌 클린턴 행정부 1기에 유엔 주재 대사를 맡았으며 2기인 97년 상원에서 국무장관 인준 투표에서 찬성 99, 반대 0의 만장일치로 통과되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국무장관에 취임했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99년 대북 포용정책인 '페리 프로세스'를 주도했으며, 2000년에는 미국 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상호 적대관계 포기·경제 교류협력 확대·평화체제 전환 노력 등의 내용이 담긴 '북·미 공동코뮤니케' 발표를 이끌기도 했다. 한편 올브라이트 전 장관은 '브로치 외교'로 유명했다. '브로치 외교'란 몇 마디 말보다 브로치라는 단 하나의 상징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의 외교 방식을 일컫는다. 2000년 미 현직 고위 인사 중 최초로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만날 당시엔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성조기 브로치를 달았다. 이라크 언론이 그를 가리켜 '사악한 뱀 같다'고 비판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뱀 모양 브로치를 달고 나타났다. 또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 협상을 위해 이고리 이바노프 당시 러시아 외교장관을 만나는 자리에는 미사일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해 화제를 모았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착용한 브로치들은 국무부 내 박물관에 영원히 남을 예정이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2022-04-29 01:24:44고(故)최진실의 딸 최준희 양이 외할머니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최준희 양은 5일 새벽 자신의 SNS를 통해 “현재 저는 중학교2 학년이고 아마 제 일생이 꼬이기 시작한건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부터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굳이 따지고 보자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인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최준희 양은 “11년 동안 함께 살붙이며 살아온 이모할머니를 갑자기 강제로 못 보게 한 것이 바로 초등학교4학년 때부터다”라며 “그 이후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우울증에 걸려 안 우는 날 없이 밤마다 외할머니에게 들키지 않으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목 놓아 엉엉 울었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날은 크게 말다툼이 일어나 저를 옷걸이로 때리려고 하셔서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근데 갑자기 제 손을 무셨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는 흉터가 남아 있다”면서 이후 외할머니로부터 받았던 폭행 및 폭언 일화를 밝혔다. 그러면서 최준희 양은 “지금 2017년 8월 5일 토요일 새벽 1시 55분인 지금도 집안이 다 박살났다. 경찰들도 찾아오고 정신이 없다. 지금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기에 일단 올리겠다”며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글을 마무리지었다. 이하 최준희 양 입장 전문.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잘알고 계시는 고 최진실의 딸이자 최준희 입니다. 제가 갑작스레 이글을 적게된 이유는 잘살고있었을것만 같던 제 일생에 대하여 폭로하고자 고민 끝에 용기내어 한글자 한글자 써내려가려합니다. 현재 저는 중학교2학년이고 아마 제 일생이 꼬이기 시작한건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이후부터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고보자면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인것같습니다. 엄마가 떠난 이후로 불행하게 살줄 알았던 저는 , 다른아이들과 똑같이 그저 지극히 평범하게 학교 다녀와서 스폰지밥을 보고싶어하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저에게 남은 가족이라곤 외할머니, 오빠, 이모할머니, 친가네 이정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외할머니랑 살지 않고 같이 살고있는 이모할머니는 누구인가에 대해 에스크를 올렸을때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셔서 알려드리자면 이모할머니는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지만, 제가 태어나자마 키워주셨고 다른 부모님들 못지않게 자랑스럽게 키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사실상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오빠만 이뻐하고 키우기 바빴습니다. 그런 저에게 사랑을 주고 저를 위해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오직 저 최준희를 위해 살아오신분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얘기를 이어가자면 외할머니는 이모할머니를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으나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이모할머니가 제 재산을 노리고 키운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하시더군요 그렇게 11년동안 함께 살붙이며 살아온 이모할머니를 갑자기 강제로 못 보게 한것이 바로 초등학교4학년때부터 입니다. 그땐 너무 어려서 5일 자면 오겠지 10일 자면 오겠지 했지만 끝내 어느날부터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11살이라는 나이에 제일 사랑하던 가족과 이별을 경험했고 몇일뒤에 외할머니는 충격에 빠져있던 저에게 뻔뻔하게도 "너랑 그년이(이모할머니)랑 같이 있는꼴을 못보겠어서 내가 그냥 집에서 나가라고 했어 , 너그년이랑 있으면 니인성 다망쳐"라며 너무나도 어렸던 저에게 더 큰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이후로 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으로 우울증에 걸려 안우는 날 없이 밤마다 외할머니에게 들키지않으려 베게에 얼굴을 파묻고 목놓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잠들고 하루일과라면 우는것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보고싶은나머지 큰 곰인형에 이모할머니가 들고 가지 못한 옷과 안경, 향수 양말들을 입혀 꼬옥 껴안고 잤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잔인하게도 그인형을 집어던지며 이모할머니의 물건들을 바닥에 던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전 너무 무서웠고 이모할머니랑 제가 뭘 이렇게 잘못했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몇일뒤 저는 정신적으로 멘탈이 다 산산조각났고 용기내어 이모할머니에게 연락을해보려 외할머니 몰래 카카오톡으로 연락을했습니다. 운좋게도 이모할머니에게 연락이 바로 닿았고 이모할머니는 그저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니가 빨리 성인이 되고 커야 우리가 만날수있어 라며 답장을 했고 전 더 눈물을 쏟을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전 거실에서 낮잠을 자고있었는데 제핸드폰이 없어져있었습니다, 몇분뒤 외할머니는 저에게 불만가득한 표정을 하시며 "너 비밀번호(패턴) 해놓는다고 못풀줄알아? 이모할머니랑 연락하는거 다알아"라고 말씀하시며 수시로 제 핸드폰 검사를 하셨고 조금 의심의 여지가 있었을땐 그저 말없이 가져가서 돌려주시질 않으셨습니다 몇주뒤 전 당시 성악부였고 성악부 담당 선생님께서 제사정을 알아 이모할머니께 연락을 드려서 이모할머니가 학교로 몰래 찾아와 달고나,산딸기 등 제가 어렸을때부터 즐겨 먹던 음식들을 챙겨왔습니다 전 먹는 내내 이모할머니 앞에서 차마 눈물을 보일수없어 웃음으로 대신했고 행복은 그저 거기까지였습니다 몇일후 이모할머니가 학교로 찾아오는 건 외할머니가 어떻게 아신건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해 준희랑 이모할머니 못 만나게 하라고 시켰고 선생님들께서도 제사정을 다아시지만 어쩔 수 없이 못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때 이후 처음으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그저 이모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고 우울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할머니의 윽박과 폭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고 학교에서 전 자연스럽게 친구들에게 더 의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겨 그나마 버틸만했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저에게 남자에 미쳤냐며 상처를 주셨고 어느 날은 크게 말다툼이 일어나 저를 옷걸이로 때리려고 하셔서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근데 갑자기 제 손을 무셨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 오른쪽 손가락 사이에는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는 게 아니었고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죽는 게 더 편할 것 같았고 정말 그냥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유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자해방법은 있는 데로 다해보았습니다. 커터 칼로 손목도 그어 보았고 샤워기로 목도 매달아보고 하지만 살고 싶은 의지가 조금 있었는지 항상 실패했고 그때마다 흉터만 남고 결국 전 죽지 못 했습니다. 몇 일뒤 할머니께서 제 유서를 발견하시고 저에게 유서를 왜 썼냐며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전 그때까지 만해도 "아 할머니가 그래도 나를 걱정했구나"라고 생각을 했으나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유서에 외할머니를 쓰지 않고 오빠와 이모할머니에게만 썼다는 이유로 화를 내셨고 또 폭행을 하셨습니다. 더 심했던 것은 북유럽으로 저랑 오빠랑 외할머니랑 가족여행을 갔었을 때 갑자기 외할머니가 저를 방으로 부르시더니 저는 엄마가 잘못 낳았다고 하시고 옷걸이로 절 때리시고 목을 조르셨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황당스러운 것은 외할머니께서 니가 그때 말을 안 들어서 훈육을 한 것 뿐이야 라고 할 때마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그냥 장난으로 그런거에요 라고 해명하는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유서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외할머니께서 절 못 키우겠다 하시면서 미국으로 갈래 이모할머니한테 갈래라고 2가지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허나 이모할머니한테 갈 경우 생활비를 10원도 주지 않겠다 말씀하셨고 마음만은 이모할머니에게 가고 싶었지만 미래를 생각하여 미국으로 가겠다고 결정 했습니다 그 후 제가 엄마의 공로상을 받았고 아무도 모르게 유학준비를 차근차근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당시 MBC 다큐 사랑을 찍고 있었습니다 방송에는 정말 노력하고 행복 해보이는 장면으로 연출 됐을지 몰라도 전 정말 괴로웠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진경이모와 신라호텔에서 외식을 했고 전 몰래 진경이모에게 가기 싫은 눈치를 주었고 진경이모는 제 편을 들어주며 안 가면 좋겠다는 쪽으로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그이후로 진경이모 욕을 하며 걔네가 뭔데 참견하고 지랄이냐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다음은 영자이모가 김대오기자 등 여기저기 얘기를 했고 준희를 어떻게 도울까 생각하다가 친가네로 연락을 했고 친할아버지께서는 "조씨도 아니고 우리 손자 손녀 아니니까 신경 안 쓸껍니다"라며 무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났을때 전 아는 집에 맡겨지기로 했으나 거의 입양수준이었고 더 심각했던 건 제가 머물러야했던 집은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불안정한 상태의 가정이었고 전 우리나라가 아니라서 더 겁이 났습니다. 결국 미국으로 떠났고 가서도 휴먼다큐 사랑을 촬영 했으며 거기서 다닐 학교도 보니깐 이상한 사이비종교로 이루어진 학교였습니다. 전 더 겁이 났고 내가 과연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의심만 커져갔습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할머니한테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제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그런데 왠일로 할머니가 오랜 고민 끝에 다시 한국으로 가자해서 모든 계획은 다 파토가 났고 전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전 할머니의 원망이란 원망은 다 들었고, 전 다시 숭의초등학교를 다니려했으나 유학절차가 아닌 퇴학절차로 해서 다시 초등학교를 재학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전 몇 달 동안 학교를 가지 않았고 할머니는 절 오빠네 국제학교로 같이 보내려 했습니다 그동안 빡세게 공부를 시켰고 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으나 국제학교에 합격되야 한다는 주위의 큰 부담 때문에 더욱 힘들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치고 아플 무렵 할머니와 전쟁은 끝난 듯 했지만 다시 시작됐고 전 계속 공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일요일 아침에 전 토요일 저녁에 공부하느라 늦게 잤고 할머니는 교회 갈 준비를 하시며 화장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고 있는 저에게 자신의 아이라이너가 없어졌다며 저를 도둑으로 몰아갔습니다 . 하필이면 제일 예민하고 피곤 했을 때 저를 도둑년이라 칭하며 넌 어렸을 때부터 도둑질만 했다면서 저에게 또 상처를 주었습니다 일단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지금 2017년 8월 5일 토요일 새벽 1시 55분인 지금도 집안이 다 박살났습니다 경찰들도 찾아오고 정신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실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것 같기에 일단 올리겠습니다 긴 얘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lshsh324_star@fnnews.com 이소희 기자 사진=최준희 SNS
2017-08-05 09:4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