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재회하게 된 것은 큰 축복입니다. 마침내 나의 과거와 뿌리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게 돼 정말 기쁩니다." 42년 전 실종돼 독일로 입양된 A씨(46세, 실종 당시 4세, 독일 거주)는 친모 B씨와 16일 극적으로 만나며 이같이 밝혔다. A씨는 지난 1981년 1월 수원버스터미널에서 실종된 이후 독일로 입양됐다. 이후 성인이 돼 지난 2009년 국내 입국해 '가족을 찾고 싶다'며 수원서부경찰서에 방문해 유전자를 채취했으나, 당시에는 일치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친모 B씨가 지난해 6월 여주경찰서에서 '헤어진 아들을 찾고 싶다'며 유전자를 채취했고, 이를 계기로 지난해 7월 두 사람의 유전자 간에 친자관계 가능성이 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이 나왔다. 정확한 친자관계 확인을 위해 두 사람의 유전자를 재채취해 정밀한 2차 유전자 분석 작업이 필요했다. 문제는 A씨가 독일에 거주하고 있어 국내에 입국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경찰은 A씨에게 재외공관에서 유전자를 재채취할 수 있음을 안내했고 A씨는 지난해 11월 주독일 대한민국대사관에 방문해 유전자를 재채취했다. 국립과학수사원 감정 결과, A씨가 친모 B씨의 친자임이 올해 1월 최종 확인됐다고 한다. 이후 A씨와 가족들의 상봉을 추진하기 위해 여주경찰서와 아동권리보장원 입양인지원센터는 함께 상봉 일정·장소·방식 등을 조율했다. 상봉 이전에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상담·안내해주는 등 입양인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42년의 기다림 끝에 마련된 가족 상봉을 위해 A씨는 모국인 대한민국을 찾았다. 이어 친모 B씨가 직접 운영하는 경기 여주에 있는 식당을 방문 친형과 함께 세가족이 대면했다. 이날 A씨는 "도와주신 경찰, 대사관, 입양인지원센터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또 친모 B씨는 "둘째 아들을 찾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는데, 유전자 등록 덕분에 결국 아들을 찾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해외에 거주하는 A씨가 가족을 만나기까지는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청, 외교부, 아동권리보장원은 관계부처 합동으로 시행 중인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는 지난 2020년부터 시행됐다. 재외공관(14개국 34개)에서 입양인의 유전자를 채취·분석해 한국의 가족과 친자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 A씨는 '해외 한인 입양인 가족 찾기' 제도를 통해 가족을 만난 세번째 사례다. 앞서 정부는 지난 2020년 미국인 C씨의 모녀와 지난 2021년 캐나다인 D씨의 남매의 상봉을 도왔다. 경찰청 관계자는 "장기실종자 발견은 실종자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라며 "이번 상봉이 더 많은 실종아동을 찾게 되는 기폭제가 되길 기대한다"고 희망했다. beruf@fnnews.com 이진혁 기자
2023-03-16 18:31:42"어머니는 아직도 겨울이 되면 '경미가 추울텐데'라며 잠도 잘 못 주무세요. 살았는지 알아야 마음이 말끔해 질 것 같아요."42년 전 사라진 막내 여동생을 찾는 큰오빠 이경호씨(52)는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면 좋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경호씨는 어린 마음에 여동생만을 찾아다니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앞장서서 가족찾기에 나서고 있다.2일 경찰청, 실종아동전문기관에 따르면 이경미씨(47· 실종당시 5세)는 1977년 4월 1일 부산 연제구 연산동 연산시장에서 장을 보러 간 어머니를 따라나섰다가 실종됐다.저녁 장을 보러 간 어머니를 몰래 따라나선 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장이었던 만큼 여러 목격담도 들려왔다. 경호씨는 "누가 경미를 흰 차에 태워갔다는 말도 있었고,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 진술도 있었다"며 "당시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가서 많이 팔아먹던 시대였다"고 상황을 설명했다.40년이 넘는 시간인 만큼, 막내 여동생 찾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제보를 알려주겠다'며 돈을 요구한 사기도 당했다.경호씨는 "아버지는 전단지를 1t 트럭에 가득 싣고 전국 반상회란 곳은 다 다녔다. 신문, 공중파 등 안 나가본 데가 없다"고 전했다. 그런 사이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씨의 부모가 가족 찾기에 몰두하는 사이, 두 오빠는 친척집에 머무르며 가족의 손길과 멀어졌다.경호씨는 "경희가 실종된 이후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은 적도 없고, 남동생도 '부모님 찾으러 간다'며 열살 때 집을 나섰다 10년만에 폐결핵을 얻어 돌아왔다"며 "어린 마음에는 '우리 형제가 더 피해 많이 봤다'며 야속한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은 여동생을 열심히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부산지역에서 '초등학교 동창이 이씨와 닮았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경호씨는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며 "이해는 하지만, (장기실종 수사) 경찰관이 너무 적어서 여력이 너무 적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bhoon@fnnews.com 이병훈 기자
2019-12-02 19:04:19[파이낸셜뉴스] "어머니는 아직도 겨울이 되면 '경미가 추울텐데'라며 잠도 잘 못 주무세요. 살았는지 알아야 마음이 말끔해 질 것 같아요." 42년 전 사라진 막내 여동생을 찾는 큰오빠 이경호씨(52)는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면 좋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경호씨는 어린 마음에 여동생만을 찾아다니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앞장서서 가족찾기에 나서고 있다. 2일 경찰청, 실종아동전문기관에 따르면 이경미씨(47· 실종당시 5세)는 1977년 4월 1일 부산 연제구 연산동 연산시장에서 장을 보러 간 어머니를 따라나섰다가 실종됐다. 저녁 장을 보러 간 어머니를 몰래 따라나선 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장이었던 만큼 여러 목격담도 들려왔다. 경호씨는 "누가 경미를 흰 차에 태워갔다는 말도 있었고,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 진술도 있었다"며 "당시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가서 많이 팔아먹던 시대였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40년이 넘는 시간인 만큼, 막내 여동생 찾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제보를 알려주겠다'며 돈을 요구한 사기도 당했다. 경호씨는 "당시 경찰도 돈을 줘야 실종 신고를 빨리 처리하던 시대였다"며 "아버지는 전단지를 1t 트럭에 가득 싣고 전국 반상회란 곳은 다 다녔다. 신문, 공중파 등 안 나가본 데가 없다"고 전했다. 그런 사이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씨의 부모가 가족 찾기에 몰두하는 사이, 두 오빠는 친척집에 머무르며 가족의 손길과 멀어졌다. 경호씨는 "경희가 실종된 이후 가족이 모두 모여 밥을 먹은 적도 없고, 남동생도 '부모님 찾으러 간다'며 열살 때 집을 나섰다 10년만에 폐결핵을 얻어 돌아왔다"며 "어린 마음에는 '우리 형제가 더 피해 많이 봤다'며 야속한 마음도 들었지만, 지금은 여동생을 열심히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부산지역에서 '초등학교 동창이 이씨와 닮았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경호씨는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며 "이해는 하지만, (장기실종 수사) 경찰관이 너무 적어서 여력이 너무 적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bhoon@fnnews.com 이병훈 기자
2019-12-02 11:07:50생김새가 꼭 닮아 42년 전 사라진 딸인 줄만 알았다. 잃어버린 친딸을 찾았다는 생각에 지극정성을 쏟던 어머니는 어느 날 딸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다. 자신은 친딸이 아니며 단지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 거짓말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지만 실망보다는 위안으로 삼았다. 새로운 딸을 통해 새로운 동력이 생긴 어머니는 지금도 42년 전 사라진 친딸을 찾고 있다.24일 경찰청과 어린이재단 실종아동전문기관에 따르면 충북 청주시 운천동에 살던 신경하씨(47.여)는 지난 1975년 5월 9일 실종됐다. 어머니 한모씨는 이날 오전 세살 둘째딸과 6개월 막내아들을 데리고 시장에 갔다. 당시 다섯살이던 맏딸 경하는 동네 친구들과 놀겠다고 해 집에 남겨둔 채였다.오후 2시께 한씨가 집으로 돌아왔으나 경하는 보이지 않았다. 경하가 집에서 약 1.5㎞ 떨어진 할머니 댁에 가는 걸 봤다는 마을 주민의 말에 한씨는 마음을 놓았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됐지만 한씨는 경하가 당연히 할머니 댁에서 자고 올 줄 알고 신경 쓰지 않았다. 한씨는 "평상시 수시로 다니던 곳이어서 걱정도 안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섯살 애가 뭘 안다고 내가 너무 어른 취급을 했다"고 말했다.다음 날 아침 경하가 할머니 댁에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한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목격자도 없고 소지품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씨는 맏딸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무당을 찾아가 굿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몇 해가 지나 경기 안양시로 이사한 한씨에게 대구에서 친딸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급히 대구로 내려한 한씨는 경하의 어릴 적 모습을 빼닮은 스무살 여성을 보고 "너 경하 맞지"라고 물었고 여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여성을 집으로 데리고 온 한씨는 지극정성을 다했다. 딸과 함께 맛있는 음식도 먹고 쇼핑도 다니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3년을 함께 사는 동안 딸은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씨는 딸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다. 사실은 자신이 경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씨는 "딸이 '엄마를 보는 순간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라며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지에 힘이 쭉 빠져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고 전했다.하지만 경하가 아닌 새로운 딸을 얻은 경험은 오히려 한씨에게 큰 힘이 됐다. 경하를 못 찾았다는 실망감보다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안이 됐다. 고령에 몸이 불편하지만 덕분에 한씨는 친딸을 찾기 위한 활동에 다시 나설 수 있었다. jun@fnnews.com 박준형 기자
2017-07-24 19:33:0242년 전 덴마크의 한 가정으로 입양된 명모씨의 어릴 적 모습. 42년 전 헤어진 가족을 찾고 싶다는 40대 여성의 사연이 접수됐다. 이 여성은 입양기관을 통해 덴마크의 한 가정으로 입양된 후 성인이 될 때까지 덴마크에서 거주하고 있다. 자신의 친부모 및 가족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는 상태다. 이 때문에 유관단체, 경찰, 복지시설, 시민들의 제보와 도움이 절실하다. 19일 경찰청에 따르면 명모씨(42.여)는 덴마크로 입양되기 전 맡겨졌던 위탁가정에서 한국이름을 얻게 됐다. 그녀는 1974년 1월 8일 오전 6시께 서울 강동구 명진고아원(현 명진보육원) 앞을 지나가던 시민에 의해 발견돼 인근 파출소로 옮겨졌으며 이후 홀트아동복지기관으로 보내졌다. 명씨는 다음 날인 9일 한 위탁가정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덴마크로 입양되기 전인 같은 해 6월 12일까지 보살핌을 받았다. 명씨는 덴마크 한 사립학교 교사였던 양부모와 한국에서 입양된 오빠, 여동생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성장하면서 허전함을 수시로 느꼈다는 것이다. 현재 명씨는 남편과 5세, 13세인 두 아들과 덴마크의 오르후스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부모가 된 후부터 명씨는 자신의 출생배경과 입양이유가 더욱 궁금해졌고 자녀들에게도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명확히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덴마크에서 자신을 사랑해준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냈지만 자신이 입양된 이유와 당시 상황에 대해 알고 싶었고 한국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지만 한국의 친척과 가족들이 그립고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다. 교육심리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사로서 자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입양아들은 물론,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명씨는 일하고 있다. 명씨는 늘 자신과 같이 입양된 아이들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실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해 가족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가족에 대한 정보가 없어 찾지 못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유전자(DNA) 검사를 한다는 사실을 듣고 그녀도 한 경찰서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다. '꼭 친가족을 찾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오는 7월 2일 덴마크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찾을 계획이다. 명씨는 "자식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로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지 느끼게 됐다"며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히 친부모님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나를 떠나보내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꼭 오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pio@fnnews.com 박인옥 기자
2016-06-19 16:25:05“까르르 웃으며 도망가던 동생을 끝까지 쫓아 단단히 붙잡지 않았던 그 짧은 순간이 40년이 넘는 헤어짐으로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42년 전 헤어진 여동생 박종순씨를 찾고 있는 종례씨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뒤를 돌아보며 골목 모퉁이로 사라지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실종 당시 종례씨 가족이 살았던 곳은 충남 청주시 내덕동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본인, 여동생 종순, 남동생 종국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어머니와 가족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셨어요. 지병이 있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행 때문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병을 고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셨어요.” 어머니가 서울에 가신 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셨지만 결국 오빠와 두 동생을 보살피는 것은 자연스럽게 종례씨의 몫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근처에 살던 친척들이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다들 살기 어려웠던 때여서 빨래와 청소, 밥짓기 등 집안일부터 말썽꾸러기 동생들 챙기는 일은 아홉살 종례씨에게는 너무 고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종례씨가 큰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방앗간을 다녀왔는데 한 동네아주머니가 급하게 종례씨를 찾아 뛰어왔다고 한다. 동생들이 우물가에서 놀고 있는데 위험하다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다며 어서 가보라는 말에 서둘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우물가로 뛰어가 보니 동생들이 아슬아슬하게 우물에 매달려 놀고 있었다고. 놀란 종례씨가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 겨우 남동생은 붙잡았지만 여동생 종순이는 잽싸게 몸을 꼬며 도망가버렸다고 한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혼날까봐 무서웠는지 한번 힐끔 돌아보더니 그냥 내빼더라고요.” 종례씨는 여동생 종순이의 이름을 계속 불렀지만 집도 가까웠고, 근처는 종례씨와 동생들이 즐겨 놀던 곳이기 때문에 배가 고파지면 집으로 돌아오겠지 하는 생각에 남동생만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동생을 찾기 위해 컴퓨터 등에 소식도 올려보고 여러 기관에 도움도 청해봤지만 그동안 단한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어요. 몇년 전에는 종순이와 헤어졌던 곳에 가보고 싶어서 아들과 함께 청주에 내려갔는데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더군요. 다만 어렸을 때 살던 곳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큰 찻길이 나오고 그 앞에 커다란 성당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성당은 있더군요. 종순이도 그 성당은 기억할 거예요.” 지금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더욱 여자 형제인 종순이가 보고 싶어진다는 종례씨는 “이제 가족은 오빠와 남동생, 저, 종순이 이렇게 넷뿐인데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속절없이 흘러만 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oon@fnnews.com문영진기자
2011-01-09 16:43:49“이야기로만 들었던 어머니께 제가 이렇게 잘 자라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충남 보령의 대천예수사랑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목회를 하고 있는 고정숙 목사(42)는 얼굴 한번 뵙지 못한 어머니에 대해 그리움이 절절한 사연을 이어나갔다. 고씨가 어머니 최기옥씨와 생이별한 건 갓난아기였던 지난 1968년. 아들을 데리고 고씨의 아버지 고길만씨와 재혼한 어머니 최씨는 고씨가 생후 백일쯤 되었을 때 서울 봉천동의 집을 나갔고 그 뒤로 연락은 물론 소식도 뚝 끊겨 버렸다.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는 고씨가 열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고씨는 고모 집이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거처를 옮겨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태어났을 때부터 너무 순해 아명을 ‘순이’라고 불렀대요. 그리고 어머니가 데리고 온 오빠를 ‘욱이’라고 불렀는데 저랑은 열 살 정도 터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할머니와 아버지께 들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을 때의 이야기 전부예요. 그러니 추정한다면 지금 어머니는 70대 초·중반일 테고 오빠는 50대가 됐겠죠.” 어머니에 대한 아픔과 원망, 그리움을 안고 살았던 고씨는 할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사실상 어머니 찾기를 포기한 채 세월을 보내다 최근 한 기독교방송의 신앙간증을 들으면서 용기를 냈다. “그동안 뭐라도 단서가 있었다면 어머니를 찾아봤을 텐데 존함 석자만으로는 찾을 길이 막막했어요.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 어머니를 꼭 찾아뵙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어딘가에 살아계시다면 제 이름이나 혹은 돌아가신 친할머니 존함(이금순)이라도 기억해 저를 꼭 찾아주셨으면 좋겠어요.” /easygolf@fnnews.com 이지연기자
2010-05-30 16:58:31[파이낸셜뉴스 평택=장충식 기자] 마이클 A 빌스 미8군 사령관이 평택시 명예시민이 됐다. 경기도 평택시 미8군 사령관 내외와 평택시 간부 공무원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미8군 사령관 마이클 A. 빌스 중장에게 명예시민패를 수여했다고 26일 밝혔다. 이날 명예시민패 수여식에서 빌스 장군은 “42년전 작은 헬리콥터 기지였던 첫 발령지 캠프험프리와 친절했던 평택시민들을 기억한다”면서 “50만 대도시로 성장한 자랑스러운 도시 평택시의 일원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평택시민과 주한미군이 지역사회의 일원이자 좋은 이웃으로 발전적 관계 속에 더불어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에 대해 정장선 시장은 “빌스 사령관은 77년 평택에서 군 생활을 시작해 평택에서 마무리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며, “6.25 참전 용사이신 부친에 이어 2대에 걸쳐 한국과 뜻깊은 인연을 맺고 지역사회와의 화합과 한미관계 강화에 크게 기여하신 빌스 장군이 명예시민이 되신 것을 평택 시민과 함께 환영하고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빌스 사령관은 지난 2018년 1월 미8군 사령관으로 취임해 ‘한미 어울림 축제’ 공동 주최를 통한 평택시민과 주한미군의 화합의 장을 마련했으며, 시의‘평택 아메리칸코너’ 유치 활동을 적극 지원, 미국무부의 개설 승인에 크게 기여하는 등 한미 간 우호협력 증진과 상생의 가치 실현을 위해 앞장서왔다. jjang@fnnews.com 장충식 기자
2019-11-26 14:11:15경남도는 3∼6일 나흘 일정으로 통영시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제58차 국제음악콩쿠르 세계연맹(WFIMC) 총회'를 개최한다고 2일 밝혔다. WFIMC 총회가 아시아 국가에서 열리는 것은 지난 1972년 일본 이후 처음이다. WFIMC는 유네스코(UNESCO) 산하기구로, 국제교류 및 음악콘텐츠 발굴.발전을 목적으로 창설된 세계기구다. 전 세계 3000개의 음악콩쿠르 가운데 최상위권에 달하는 130여개 콩쿠르에 한해 가입된 연맹 대표들이 해마다 총회를 개최한다. 경남도는 2006년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가 WFIMC에 정식 가입했다. 이후 2008년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열린 제52차 총회에서 유치 신청을 했고 2012년 네덜란드 스헤르토헨보스 등에서 개최된 제56차 총회에서 스페인 도스헤르마나스, 칠레 비나델마르와 열띤 경합 끝에 2014년 총회 개최도시로 만장일치로 선정된 바 있다. 이번 총회는 지난해 11월 준공된 통영국제음악당 개관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은 13회 통영국제음악제와 연계해 진행된다. 3일 환영리셉션을 시작으로 4∼5일 총회 및 세미나 개최, 6일 통영의 관광명소를 돌아보는 일정으로 짜여 있다. 경남도 최낙영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이번 총회 개최를 통해 '문화예술의 도시 경남'의 이미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물론 클래식 마니아의 경남 방문으로 이어져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강재순 기자
2014-04-02 17:32:09파이낸셜뉴스와 공동으로 '잃어버린 가족 찾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경찰청 182 실종아동찾기센터에 33년 전에 헤어진 딸, 42년 전에 외출한 뒤 실종된 아들을 찾아달라는 사연이 각각 접수됐다. 16일 경찰청 182센터에 따르면 김모씨(56·여)는 지난 1980년 11월 1일께 남편의 형한테 맡겨졌던 딸 진아씨(33·여·당시 생후 1개월)를 찾고 싶다는 사연을 최근 접수했다. 김씨는 양복점 기술자로 근무하던 남편 이모씨(60대 초반 추정)를 알게 된 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기도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남편과 김씨는 이후 서울 마포구로 이사하면서 딸 진아씨를 임신하게 됐다. 남편은 평소 김씨를 정겹게 맞아 주었지만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했으며 이 때문에 남편 몰래 집을 나와 광주광역시 친구 집에서 거주하면서 딸 진아씨를 낳게 됐다. 친구의 도움으로 생활하던 김씨는 딸을 키울 여건이 안되자 생후 1개월이 지난 진아씨를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던 남편의 형한테 맡겼다는 것이다. 당시 생후 2개월된 아들을 키우고 있던 남편의 형은 남편보다 세살 연상이었다고 김씨는 기억하고 있다. 김씨는 이듬해 '딸을 직접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딸을 맡겼던 남편의 형이 거주하는 정릉동을 방문했으나 마을은 철거됐고 딸은 이미 다른 가정에 입양된 이후였다. 김씨는 마을의 한 아주머니로부터 '딸은 아들 2명이 있는 집으로 입양됐다'는 말과 함께 딸의 이름이 '진아'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남편의 형과 연락을 취했으나 여의치 않자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딸에 대한 소식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김씨는 "2~3세 무렵 딸이 입양됐고 이름은 진아라고 한다"며 "가정불화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잠시 맡겼던 딸과 30년이 지나도록 만날 수 없어 너무 답답하고 마음 아프다"고 전했다. 또 최모씨(77)는 지난 1971년 2월께 외출한 뒤 실종된 아들 경택씨(53·실종 당시 12세)를 찾아달라는 사연으로 경찰청 182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최씨는 실종 당시 아들은 점심식사 이후 비가 내리자 검은 장화, 검은 바지, 검은 목티를 착용하고 오후 2시께 외출한 뒤 소식이 두절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아들은 병원 진찰 결과 '뇌신경마비' 판정을 받았었다. 아들이 귀가하지 않자 최씨는 이웃 주민들을 상대로 아들의 행방을 찾던 중 마을과 버스 한 정거장 거리인 부산 거제리역 인근을 지나가는 아들을 목격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러나 거제리역 인근 어디서도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최씨는 전했다. 최씨는 "아들은 뇌신경마비 증상으로 학습능력이 떨어졌으나 말투는 정상이었다"며 "낯선 사람을 잘 따랐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 방과 후 집으로 귀가하지 않아 경찰서에 보호돼 있는 것을 자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pio@fnnews.com 박인옥 기자
2013-06-16 16:2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