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삼성증권이 법인과 임직원을 위한 종합 자산관리 서비스 브랜드인 ‘삼성증권 AT WORK’를 론칭했다고 10일 밝혔다. '삼성증권 AT WORK'는 법인 임직원 주식보상 프로그램 관리부터 종합 자산관리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법인 대상 종합 금융 서비스이다. 삼성증권은 스톡그랜트, RSU(제한조건부 주식), ESPP(임직원 주식매입 프로그램) 등 다양한 주식보상제도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전용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법인뿐만 아니라 해당 기업의 임직원들에게도 삼성증권의 자산관리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이 특징이다. 법인은 'AT WORK' 서비스를 활용해, 임직원 대상 주식보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임직원은 체계적인 자산관리를 누릴 수 있다. 'AT WORK' 서비스는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실질 고객수 5만명을 돌파했다. 계약을 체결한 법인수는 316개사, 총 자산규모는 1조원이 훌쩍 넘는다. 또 삼성증권은 지난해 업계 최초로 고객별 니즈에 맞춰 주식보상제도별 특화 관리 시스템 구축, 임직원 대상 자산관리 교육 및 컨설팅 모듈 제공 등 서비스 고도화를 지속적으로 개발해 '삼성증권 AT WORK' 전용 시스템을 선보였다. '삼성증권 AT WORK' 전용 시스템은 법인고객의 임직원 주식보상 서비스 지원 기능을 중심으로 상장기업의 내부자거래 사전공시 관련 모니터링 기능과 해외주식 직접입고 기능 등을 갖춰 법인 담당자들의 편의성을 높였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최근 법인의 보상 체계가 다양화되고, 유연한 보상 제도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흐름 속에서 ‘삼성증권 AT WORK’는 단순 플랫폼을 넘어, 종합 금융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라며 “기업과 임직원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금융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hippo@fnnews.com 김찬미 기자
2025-06-10 08:54:44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은 시간이 걸린다. 이 말은 내가 열 두 살 아들 지미에게 우리가 노스캐롤라이나주 루서포드턴에 이사왔을 때 해 준 말이다. 그런데 어느 비 내리는 오후, 지미는 학교에 가고 남편 잭은 회사에 있는 동안 혼자 있던 나는 친구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저희가 여기 온 지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 주님." 비를 보며 생각했다. "아직 저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너무 외로워요!" 우리가 그 동네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잭은 상담사였고, 이 동네에서 처음 활동한 치료사 중 하나다. 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남편을 경계했다. 우리는 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다녔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장벽이 되었다. 그리고 북부 지역에서 온 잭과 나의 북부 억양은 느릿느릿 늘어지는 남부식 억양의 이곳에서 우리를 구별 지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집 문을 두드리며 친해지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울적하고 비 내리던 그날, 나는 브라우니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순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난데없이 떠오른 생각이어서, 분명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틀림없었다. '이웃에게 나눠 줄 브라우니를 만들자.' 지미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맛있는 초콜릿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가 멈추었고,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추었다. "브라우니 두 개는 먹어도 돼. 두 개는 아빠를 위해 남겨 두고. 나머지는 이웃에게 줄 거야." 지미에게 말했다. 지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토를 달지는 않았다. 입 안 가득 브라우니가 있는데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나는 브라우니를 나눠주기 위해 플라스틱 용기에 담으며 흥얼거렸다. 밖으로 나갔을 때, 의심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바보 같아 보였다. '나는 모르는 사람 집의 문을 두드려서 브라우니를 건네주는 일을 못해.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리면 어떡해?' 심호흡을 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집으로 걸어가서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어 준 여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브라우니를 만들고 있었는데요." 나는 수줍게 통을 올려 보였다. "혹시 맛 좀 보실래요?" 그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통을 그의 손에 쥐어주고 돌아섰을 때 그가 "고마워요!"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바로 집으로 뛰어갔을 거다. 돌아보니 그는 웃고 있었다. "저는 주디예요." 그가 말했다. 그 브라우니는 씨앗을 심었다. 이후 몇 달에 걸쳐, 그 씨앗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라났다. 잭이 주중 업무 회의를 하는 매주 월요일 밤, 주디는 나에게 코바늘 뜨개질을 가르쳐주러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잭의 사무실에서 시간제 업무를 하게 되었다. 첫 번째 브라우니를 성공적으로 전해주고 나서 근처 다음 집으로 갔다. "홈메이드 브라우니!" 여자가 문을 열며 말했다. "저는 요리를 안 좋아하는데 당신 덕분에 기쁜 하루가 되겠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자넷. 저는 에드너예요." 에드너는 우리 집에, 특히 휴일이면 저녁 식사에 자주 초대되어 오는, 우리가 좋아하는 손님이다. 그날 마지막으로 찾은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숨이 가빴다. "도와드릴까요?" 문을 연 여자가 물었다. "저는 자넷입니다. 새로 이사 왔어요." 집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방해한 걸까? "방해하고 싶진 않고요. 브라우니를 만들었어요." "음!" 그가 통을 받으며 말했다. "저는 마지예요. 우리 남편하고 아버지를 꼭 만나 보세요. 테라스에서 함께 얘기를 나눠요.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도 있어요. 복숭아 맛 좋아하셔야 할 텐데!" 아이스크림과 브라우니는 정말 잘 어울렸다. 마지의 남편 허먼은 정원 가꾸기 전문가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우리는 허먼이 풍성하게 수확한 신선한 농산물을 받아 먹었다. 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침내 주디, 에드너, 마지와 나는 매달 한 번씩 포틀럭 파티를 열기로 하고 사람들을 더 초대했다. 10년 이상 동네에 산 이웃들도 마침내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새로 이사온 동네가 한때는 텅 빈 정원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님은 우정을 쌓기 위해선 그저 약간의 달콤한 비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걸 아셨고, 그를 위한 완벽한 방법도 알려 주셨다.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My Brownie BreakthroughIt takes time to make new friends. That's what I told my 12-year-old son, Jimmy, when we moved to Rutherfordton, North Carolina. But at home by myself one rainy afternoon-with Jimmy at school and my husband, Jack, at work-I was the one who longed for a friend. We've been here a whole month now, Lord, I thought, looking out at the rain. And I still don't know anyone. I'm so lonely! Maybe we just didn't belong here. Jack was a counselor-one of the first therapists in the area. That made some people leery of him. We went to a different church than most folks around here. Another barrier. Then there were our Yankee accents-Jack and I were from up north-setting us apart in a sea of Southern drawls. Whatever the reason, nobody was knocking on my door to get to know me. On this dreary, rainy day, I decided I would make…brownies! A second later, another idea followed. An idea so out of the blue, it had to have come from God. I'll make brownies for my neighbors. By the time Jimmy got home from school, the house smelled chocolaty and delicious. The rain had stopped, and the sun shone through the windows. "You can have two brownies," I told Jimmy. "And save two for your dad. The rest are for the neighbors." Jimmy looked puzzled but didn't argue. How could he with a mouth full of brownie? I hummed as I packed the brownies into plastic containers to distribute. When I stepped outside, doubt struck. The whole project seemed foolish. I can't just knock on a stranger's door and hand them brownies, I thought. What if they refuse them? What if they shut the door in my face? I took a deep breath. I walked to the house nearest ours, knocked and introduced myself to the lady who opened the door. "I was making brownies," I said, shyly holding up the container. "I thought you might like some?" My neighbor blinked in confusion. I thrust the container into her hands and turned to go. I might have run right back home if she hadn't then said, "Thank you!" When I turned back, she was smiling. "My name's Judy," she said. Those brownies planted a seed. Over the next few months, it would grow in ways I couldn't have foreseen. Judy started coming over on Monday nights, while Jack had his weekly work meeting, to teach me how to crochet. She would even end up working part-time for Jack in his office. Having successfully handed out my first container, I moved on to the next house down the block. "Homemade brownies!" the lady who opened this door said. "I don't like to cook, so you just made my day. Nice to meet you, Jeanette. I'm Edna." Edna became a frequent and favorite dinner guest at our house, especially on holidays. The last house I visited that day was at the top of a hill, leaving me out of breath. "Can I help you?" asked the lady who answered the door. "I'm Jeanette," I said. "Your new neighbor." I could hear voices coming from the back of the house. Had I interrupted something? "I don't want to bother you," I said. "I made you these brownies." "Mmm!" she said, taking the container. "My name's Marge. You must meet my husband and my father. Come join us out on the deck. We've got homemade ice cream. I hope you like peach!" The ice cream and brownies went so well together. Marge's husband, Herman, turned out to be a master gardener. In the years to come, we would receive a bounty of fresh produce from Herman's abundant harvests. The blessings didn't stop there. Eventually, Judy, Edna, Marge and I organized a monthly potluck and invited even more people. Folks who'd been neighbors for more than a decade would finally meet. My new neighborhood had once seemed like an empty garden. But the Lord knew the soil needed to be sweetened only a little for friendships to grow, and he gave me just the right way to do it.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5-07-15 18:10:45삼성증권이 법인과 임직원을 위한 종합 자산관리 서비스 브랜드인 '삼성증권 AT WORK'를 론칭했다고 10일 밝혔다. '삼성증권 AT WORK'는 법인 임직원 주식보상 프로그램 관리부터 종합 자산관리 컨설팅까지 아우르는 법인 대상 종합 금융 서비스이다. 삼성증권은 스톡그랜트, RSU(제한조건부 주식), ESPP(임직원 주식매입 프로그램) 등 다양한 주식보상제도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전용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법인뿐만 아니라 해당 기업의 임직원들에게도 삼성증권의 자산관리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이 특징이다. 법인은 'AT WORK' 서비스를 활용해, 임직원 대상 주식보상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임직원은 체계적인 자산관리를 누릴 수 있다. 'AT WORK' 서비스는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실질 고객수 5만명을 돌파했다. 계약을 체결한 법인수는 316개사, 총 자산규모는 1조원이 훌쩍 넘는다. 또 삼성증권은 지난해 업계 최초로 고객별 니즈에 맞춰 주식보상제도별 특화 관리 시스템 구축, 임직원 대상 자산관리 교육 및 컨설팅 모듈 제공 등 서비스 고도화를 지속적으로 개발해 '삼성증권 AT WORK' 전용 시스템을 선보였다. '삼성증권 AT WORK' 전용 시스템은 법인고객의 임직원 주식보상 서비스 지원 기능을 중심으로 상장기업의 내부자거래 사전공시 관련 모니터링 기능과 해외주식 직접입고 기능 등을 갖춰 법인 담당자들의 편의성을 높였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최근 법인의 보상 체계가 다양화되고, 유연한 보상 제도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흐름 속에서 '삼성증권 AT WORK'는 단순 플랫폼을 넘어, 종합 금융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라며 "기업과 임직원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금융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hippo@fnnews.com 김찬미 기자
2025-06-10 18:45:13일어서서 손의 흙을 털며 정원을 자세히 살폈다. 초봄이었고 금잔화, 봉선화, 격자 시렁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등이 만개했다. 그렇지만 내게 자부심과 즐거움을 주는 건 틀림없이 장미였다. 흰색부터 진홍색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품종을 키웠다. 모두 잘 자라고 있었고 봉오리도 열리기 시작했는데… 딱 하나만 빼면 그랬다. 가장 최근에 심은 노란 장미였다. 노란 장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고, 묘목장에서는 이 작은 나무가 매우 건강하고 생기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심고 나서 몇 주 만에 나무는 말라 죽기 시작했다. 들쭉날쭉하고 불쌍한 꼴이 되었다. 잎은 갈색으로 변해서 시들어 갔다. 장미는 까다롭기로 악명 높다. 새로 들인 장미에 세심하게 물과 비료를 주고 말까지 걸었다. 어느 것도 효과가 없는 듯했다. 낙담했다. 최근 들어 그런 기분을 많이 느꼈다. 작은딸 에밀리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뒀고 몇 달 후면 대학 진학을 위해 떠날 터였다. 큰딸 앨리슨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예비 신랑은 독일에 주둔하는 군인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후면 큰딸은 바다를 넘고 6400㎞를 넘어 그와 함께 날아갈 터였다. 앨리슨은 인생의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두 딸 모두 그랬다. 딸들을 생각하면 매우 기뻤다. 에밀리의 수업 얘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앨리슨의 결혼 계획을 돕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혼자 아이들을 키우면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모든 걸 혼자 해야 했던 스트레스는 내게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 장미가 죽어 가고 있었다. '내일 파 내야겠어.'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날 밤 침대에서 속삭였다. "주님, 너무 외로워요. 당신께서 저희를 보살피시면서 거기 계시며, 모든 게 괜찮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신호를 주세요." 다음 날 아침 에밀리가 등교하려고 문 밖으로 나섰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뭔데?" "장미요! 와서 보세요!" 에밀리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죽었다고 생각한 작은 장미나무? 이제 그 나무는 녹색으로 활력이 넘쳐 보였다. 나무에서 장미가 촘촘하게 무리 지어 돋아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미 세 송이였다. 한 송이는 앨리슨, 또 한 송이는 에밀리, 나머지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 노란 장미의 꽃말은 '널 생각해'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두 딸을 '생각하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늘 그러셨다. The Answer of Yellow RosesI got to my feet, brushing the dirt from my hands, and surveyed my garden. It was early spring, and so much was in bloom-the marigolds, the impatiens, the ivy climbing the trellis. But my pride and joy had to be my rosebushes. I had cultivated many varieties, with blooms that ranged from white to scarlet. All of them were thriving, their buds just starting to open… All except one. It was my latest addition-a yellow rosebush. Yellow roses are my favorite, and this little plant had looked so hale and hearty at the nursery. I planted it, but within weeks it had started withering. It became a scraggly, pathetic thing. The leaves turned brown and began to shrivel. Roses are notoriously finicky. I watered my new purchase carefully, fed it, even talked to it. Nothing seemed to work. I felt disheartened. I'd been feeling that way a lot lately. My younger daughter, Emily, was about to graduate high school. In a few months, she'd be off to college. My older daughter, Allison, was getting married. Her husband-to-be was in the military, stationed in Germany. Just days after the wedding, Allison would be going back with him-4,000 miles and an ocean away. Allison was entering a new phase of her life. Both my daughters were. I was thrilled for them. I loved hearing about Emily's classes. I loved helping Allison with her wedding plans. But as a single mom, I found the stress of juggling all the to-do lists and everything on my own was taking its toll. And now my rosebush was dying. I'll have to dig it up tomorrow, I thought, going inside to start dinner. That night, in bed, I whispered, "Lord, I feel so alone. Send me a sign so I know you're there, watching over us. So I know everything will be okay." The next morning, Emily headed out the door for school, only to turn back inside. "Mom, you've got to see this!" "What is it?" I asked. "It's your roses! Come see!" I followed her out into the garden. That little rosebush I thought was dead? It now looked green and vibrant. Sprouting from it was a tight cluster of roses. Three beautiful roses-one for Allison, one for Emily and one for me. In the language of flowers, yellow roses mean "I'm thinking of you." God was thinking of me and my girls. He always would.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5-03-25 19:16:55사무실에 있는 모든 이가 반쪽에게서 밸런타인데이 장미를 받았다. 나는 아니었다. 남편 존이 세상을 뜬 지 7년이었다. 여전히 그가 그리웠다. 올해는 평소보다 남편의 부재를 더 많이 느꼈다. 남편은 어떤 날이든 특별하게 만들 줄 알았다. 퇴근 후 귀갓길에 식료품점에 들렀다가 우리의 첫 밸런타인데이를 떠올리는 내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그날을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보냈다. 손을 잡고 대학 캠퍼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미술관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서점을 탐험했다. 존이 나를 저녁 식사에 데려갈 거라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깜짝 선물이 있었다. "스파게티 알리오에올리오(마늘과 올리브유로 만드는 스파게티)를 만들어 줄게요. 우리 할아버지의 레시피로요." 존이 올리브유에 마늘을 황금빛이 돌도록 볶고 그 소스를 스파게티와 파르메산 치즈에 섞자, 그의 부엌에서는 천국 같은 냄새가 났다. 요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음식과 이 남자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건 알았다. 식료품점 통로에서 이상한 충동을 느꼈다. "오늘 밤에 스파게티 알리오에올리오를 만들어." 나는 요리를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못하니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집 요리사는 남편 존이었다. 나 혼자서는 주로 가공식품을 먹었다. 재료를 샀다. 집에 와서 존이 하던 그대로 조리대에 재료를 늘어놓았다. 마늘을 더듬더듬 찾으면서 존의 여유롭고 느긋한 기운과 교신하려고 애썼다. 순식간에 주방이 그때와 똑같은 환상적인 향으로 가득 찼다. 다른 음식과 밸런타인데이의 추억이 밀려들었다. 식탁을 차리고 촛불을 켰다. 소스를 스파게티에 버무리기 전에 소금, 후추, 붉은 고추 조각을 더했다. 그런 다음에 면수 약간, 파슬리, 파르메산 치즈도 보탰다. "아주 좋아요!" 존이 하는 말을 거의 들을 수 있었다. 한 입씩 음미하는데 남편의 존재가 함께한다는 걸 느꼈다. 남편의 특별 요리를 만드는 건 이상한 충동이 아니라 경건한 유혹이었다. ■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Everyone at the office was getting Valentine's Day roses from their sweetheart. Not me. It had been seven years since my husband, John, died. I still missed him. This year, I felt his absence more than usual. John could make any day special. Stopping at the grocery store on my way home from work, I found myself thinking about our first Valentine's Day. We'd spent the day in Princeton, New Jersey. Wandered around the university campus, hand in hand. Lingered in the art museum. Explored bookshops. I'd thought John would take me to dinner, but he had a surprise. "I'm going to make you spaghetti aglio e olio," he said. "My grandfather's recipe." John's kitchen smelled heavenly as he toasted garlic in olive oil until golden, then combined the sauce with spaghetti and Parmesan. I knew nothing about cooking, but I knew this dish and this man were irresistible. There in the grocery aisle, I felt an odd nudge. Make spaghetti aglio e olio tonight. Odd because I don't like to cook and I'm not very good at it. John was the chef in our house. On my own, I ate mostly prepared foods. I bought the ingredients. At home I laid them out on the counter, just as John used to. Fumbling with the garlic, I tried to channel John's easy, relaxed presence. Soon the kitchen filled with that same heavenly aroma. Memories of other meals, other Valentine's Days, crowded in. I set the table and lit a candle. I added salt, pepper and red pepper flakes to the sauce before tossing it with spaghetti. Then a little pasta water, parsley and Parmesan. "Molto bene!" I could almost hear John say. I felt his presence with me as I savored every bite. Making his special dish hadn't been an odd nudge but a godly one.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5-02-11 18:07:08크리스마스트리 정리는 우리 가족에게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는 것만큼 중요한 전통이었다. 우리는 새해 첫날 일광욕실에 모여 트리를 정리하기 전에 각자의 추억을 나누었다. 딸이 유치원에서 아이스크림 막대로 만든 사슴. 아들이 3학년 공예 수업 때 만든 반짝이 공. 린제이와 스티븐이 청년이 되어 독립한 후에도, 아이들은 우리가 '장식 해체하기'라고 불렀던 과정을 좋아했고, 나 만큼이나 그 시간을 고대했다. 올해를 제외하고. 1월 중순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트리를 정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스티븐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5일째 되던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전기기사였다. 스티븐은 일터로 운전해 가다가 빙판을 밟고 절벽 위로 날아 버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아들은 겨우 스물한 살이었고 처음 아파트를 장만해서 몹시 기뻐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나에게서 아들을 데려가 버리실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기회도 주시지 않고. 스티븐이 받은 선물 중에는 아직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가문비나무 모양의 인조 트리 아래 있는 것도 있었다. 스티븐은 새해 첫날에 집에 와서 트리를 치울 계획이었다. 이제 다시는 스티븐이 트리 정리에 함께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준비가 안 됐어." 남편 로저가 물었을 때 내가 답했다. 그 트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정말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트리는 손도 대지 않고, 전구와 장식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채 세워져 있었다. 일광욕실은 한때 우리 집에서 가장 생기 돋는 방이었다. 지금은 그 방의 문턱을 넘는 일도 거의 없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캄캄한 트리를 몇 시간 동안 쳐다보며 스티븐을 생각했다. 스티븐은 감성적이거나 공상적이지도 않았고, 몽상에 빠지거나, 다른 친구들의 아들처럼 난데없이 꽃을 준다거나 달콤한 카드를 적어주는 일도 없었다. 스티븐은 현실적이고, 신뢰감 있는 아들이었다. 독립한 후에도, 나는 필요하면 언제든 스티븐에게 의지할 수 있음을 알았다. "내가 트리를 정리해 줄까?" 어느 날 로저가 물었다. "아니." 나는 의도보다 더 날카롭게 답했다. "그런 말은 다신 하지 말아 줘." 2월이 되었다. 로저는 트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트리의 장식을 철거하고 다시 꾸밀 때 찾아올 고통을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트리를 계속 남겨 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명을 켜야겠다.' 어느 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일광욕실에 들어가서 몸을 구부려 조명의 전원을 연결했다. 하단 가지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전에 보지 못한 장식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올려지는 정교하게 유리로 만든 순백의 천사였다. 빈티지 느낌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손으로 잡았다. 고리에는 손으로 직접 쓴 꼬리표가 있었다. "엄마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스티븐." 스티븐은 이 특이한 천사를 챙겨와서 내가 찾도록 트리에 숨겨 둔 것이었다! 현실적이고, 감상적이지 않은, 단 한 번도 깜짝 선물을 준 적 없던 아들. 하나님만이 내게 이 선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실 터였다. 나는 로저를 불러서 스티븐의 장식품을 보여주었다. "이제 트리를 정리해야 할 때야. 괜찮다면, 나 혼자 하고 싶어." 로저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장식을 하나씩 떼어 낼 때마다 상실감이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모든 장식을 상자에 담았다. 하나만 제외하고. 나는 그 하얀 천사를 일년 내내 햇빛에 빛나도록 스탠드에 걸어 두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처럼 스티븐의 사랑이 항상 내 곁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Angel in HidingTaking down the Christmas tree was as much of a tradition for my family as putting it up. We would gather in the sunroom on New Year's Day and take the ornaments off our tree, reminiscing about each one before putting it away. The deer that my daughter had made of Popsicle sticks in preschool. The glittered ball that was a craft project when my son was in third grade. Even after Lindsay and Steven had become young adults out on their own, they loved the "undecorating," as we called it, and looked forward to it as much I did. Except this year. It was mid-January, and we had not yet taken down the tree. I couldn't bring myself to do it. Steven had been killed in a car wreck five days after Christmas. He was an electrician. He'd been driving to work when his car hit black ice and went over a cliff. He was killed instantly. He was only 21 and so excited about getting his first apartment. How could God have allowed my son to be taken from me like this? Without a chance to even tell him I loved him one last time. Some of Steven's gifts still lay unwrapped under the tree, a tall artificial spruce. He had planned to pick them up when he came over on New Year's. Now he would never take part in the undecorating again. Maybe that was why I couldn't bear to do it. "I'm not ready," I told my husband, Roger, when he asked. Taking down the tree seemed so final, as if I were ready to accept that my son was gone. I didn't know if I would ever be ready for that. So the tree stood untouched, strung with lights, ornaments on every branch. The sunroom had once been the cheeriest room in our house. Now I rarely crossed the threshold. I sat on the family room couch and stared at the darkened tree for hours, thinking about Steven. He wasn't sentimental or fanciful, not the kind of boy who'd get lost in daydreams or give his mom flowers or a sweet card out of the blue, the way some of my friends'sons did. Steven was down-to-earth, dependable. Even though he'd moved out, I'd known I could count on him if I needed anything. "Would you like me to take the tree down?" Roger asked one day. "No," I said, more sharply than I intended. "Please don't mention it again." February arrived. Roger didn't bring up the tree. I wondered if I could just leave it up to avoid the pain that would come with undecorating and then redecorating. Maybe I should turn on the lights, I thought one day. I stepped into the sunroom and bent to plug in the lights. Something sparkly on a bottom branch caught my eye. An ornament I'd never seen before. A delicate glass snow cherub atop a Christmas tree. It had a vintage look. Gingerly I took it in my hands. Attached to the hanger was a tag with a handwritten note: "To Mom. Merry Christmas. Love, Steven." Steven had bought this whimsical angel and hidden it on the tree for me to find! My practical, unsentimental son, who had never given me a surprise gift. Only God could have known how much I would need this. I called for Roger and showed him Steven's ornament. "It's time to take down the tree," I said. "If it's okay, I'd rather do it alone." Roger nodded and kissed me on the forehead. With each ornament I put away, I felt a bit of my grief easing. At last, the ornaments were in their boxes. All except one. I hung the snow angel from a stand, where it stays year-round, shimmering in the sunlight. Reminding me that Steven's love, like God's, is always with me.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12-24 18:37:45추수감사절을 맞아 장보기 목록을 만들면서 오빠를 생각했다. 필 오빠를 떠올리는 일은 내게 지울 수 없는 명절의 일부분이었다. 존 필립 제이콥은 태어날 때부터 요리를 사랑했다. 수중에 무엇이 있든지 맛있는 요리를 잽싸게 만들어 내는 기쁨을 찾았다. 50년도 더 지났지만 오클라호마의 농장 가옥 주방에서 덩실거리면서 소매를 휘날리던 오빠를 여전히 마음속으로 그린다. 어머니가 우리를 떠난 후 홀로 네 아이를 키우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부엌에 남자가 있을 자리는 없다고 믿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퇴근했다. 필 오빠는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콩과 비엔나소시지에 관한 짤막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부엌 문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는 오빠의 어깨를 잡아챘다. 오빠가 아버지를 수납장으로 밀어붙이고 방충망 문으로 급히 달아날 때까지 두 사람은 드잡이를 벌였다. "나는 곧 열일곱이야. 공군에 입대할 거야. 아버지는 내가 강인해지길 바라니까 분명 그러라고 서명해 주겠지." 오빠가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찢어졌다. "편지해." "약속할게." 오빠가 입대했다. 편지가 올 때까지 6주를 기다렸다. "동생아, 신병 훈련소는 힘들었고 지금까지 편지를 쓸 수가 없었어. 다행스러운 점은 입대하기 전에 훈련 교관 같은 아버지를 뒀다는 거야. 군대는 잘 먹여줘."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줄어들었다. 1970년대 후반 즈음 나는 이혼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콜로라도에서 지냈다. 필 오빠도 이혼하고 기체(機體) 정비사로 전국에서 일했다. 내 신앙심이 깊어지면서 나 외에 다른 분이 오빠를 사랑하고 지켜 주신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할 때마다 오빠를 위해 매일 기도 드린다고 썼다. 필 오빠는 하나님 얘기보다는 레시피를 공유했다. 1982년에 아버지가 트랙터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오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 중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목장에서 만났다. 나는 오빠의 외모에 충격을 받았다. 지나치게 말랐고 한때 준수했던 얼굴은 술집에서 벌인 싸움들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묘지에서 우리는 끌어안고 울었다. 산산조각 난 우리 가족이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알았다. "나한테 편지 써." 다음 날 헤어지면서 속삭였다. 오빠는 아이다호에 있는 스네이크강의 강둑에서 편지를 썼다. "수중 펌프로 작업을 하고 있어. 스네이크강에서 물을 빼서 감자 농부의 밭에 물을 대고 있지. 방금 끝내 주는 감자 요리 레시피를 떠올렸어." 어느 해 추수감사절에는 오빠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두려움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반송됐다. 오빠가 살던 아이다호 작은 마을의 술집마다 전화했다.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오빠가 얼마나 지쳐 보였는지가 계속 떠올랐다. "주님, 저희 남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어요. 아빠는 애정을 보여 주지 못했고요. 그래서 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걸 믿기 어려워요. 부디 필 오빠가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 경찰서장인 친구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2주가 걸려 친구는 워싱턴의 감옥에서 오빠를 찾아냈다. 나는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오빠는 자신의 독특한 필기체로 여섯 장을 꽉 채워서 답장을 보냈다. 그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수감된 사정을 또다시 늘어놓는 대신, 감방 창밖에 보이는 모든 걸 자세히 묘사했다. 소나무, 가문비나무, 미루나무. 멀찌감치 붉은색 헛간도 있는데 우리가 농장의 헛간 다락에서 놀면서 느끼던 재미가 다시 생각난다고 했다. 오빠는 주방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기뻐하면서 알려왔다. "두 달이 지나고 드디어 재료를 마음대로 쓸 여지가 약간 생겼어. 사람들이 말하는 걸 네가 들었어야 하는데. 무척 단순한 재료였지만, 여기서는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으니까 조금만 달라져도 즐거워져." 그해 가을에 내가 물었다. "추수감사절 저녁에도 거기 있어?"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명절을 감옥에서 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렇겠지. 그래도 내가 여기 있으면서 요리하면 분명 사람들이 기뻐할 거야." 추수감사절 아침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동생아, 깜짝 선물이야!" "행복한 추수감사절 보내길. 오빠 목소리를 듣다니, 정말 근사한 선물이야! 출소했어?" "아니. 하지만 얼마 안 남았어. 오늘은 동료들을 위해 요리해. 콘브레드 드레싱(미국 남부에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자주 먹는 전통 음식)을 만드는 근사한 레시피가 있거든." "맛있겠다. 오늘 친구들이 오빠를 무척 좋아할 거야." "있잖아. 나는 레시피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는 언제나 레시피를 생각하니까." "아니야. 이건 달라." "무슨 뜻이야?" "인생 레시피를 말하는 거야. 여기서는 생각할 시간이 무척 많아. 우리는 모두 살면서 좋은 일, 나쁜 일, 약간의 기쁨, 얼마간의 어려움을 겪어. 성경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하잖아. 동생아, 사랑한다." 두 달 후 오빠가 편지를 보냈다. "집에 왔어. 내 작은 트레일러로 돌아왔고 마당의 잔디를 깎으면서 시간제로 일해. 날 받아 주겠다는 제안은 고맙지만, 너도 키워야 할 아들이 있잖아. 비틀거리는 나는 네게 필요 없으니까. 추신. 부엌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은 구미가 당겼어. 감옥에 있는 동안 내 생명줄이 돼줘서 고마워." 그 다음 4월에 워싱턴 파스코의 어느 바텐더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술집에서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바텐더 얘기로는 오빠의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에 구멍이 난 것 같은데 병원에 가는 걸 거부했단다. "오빠는 못살게 구는 남자한테서 어떤 여성을 지키려 했어요." 마침내 필 오빠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전해졌다. 오빠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장보기 목록 가장 위에 오빠가 어림짐작으로 알려준 콘브레드 드레싱 재료를 적었다. 우리는 평생 편지로 이어져 있었다. 오빠가 마침내 나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주신 그분께서 쓰신 가장 위대한 레시피를 이해했다는 점에 감사드리며 추수감사절에 콘브레드 드레싱을 만들려고 한다.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Letters From Phil Making my thanksgiving shopping list, I thought of my older brother, Phil, his memory an indelible part of the holiday for me. John Phillip Jacobs was born with a love for cooking. He took joy in whipping up simple, tasty dishes with whatever we had on hand. More than 50 years later, I can still picture him, sleeves flopping as he danced around our Oklahoma farmhouse kitchen. Too bad my father, raising the four of us children on his own after my mother had left us, believed boys had no place in the kitchen. One day, Dad came home unexpectedly from work. He appeared in the kitchen doorway just as Phil glided across the floor, singing a ditty about beans and wieners. Dad grabbed Phil by the shoulder. They tussled until Phil shoved Dad against a cabinet and bolted out the screen door. "I'll soon be 17," he said. "I'm gonna join the Air Force. Since Dad wants me to be tough, I'm sure he'll sign for me to do that." The thought of my older brother leaving ripped at my heart. "Write to me," I blurted. "I promise." He enlisted. I waited six weeks before a letter arrived. "Boot camp was hard, Sissy. I couldn't write until now. Good thing I had Dad as a drill sergeant before I joined up." We wrote less frequently as adulthood caught up with us. By the late 1970s, I was divorced and living in Colorado with my young son. Phil was divorced and working jobs across the country as an airframe mechanic. As my faith grew, I would mention in my letters that Someone besides me loved him and was looking out for him. At the end of every letter, I told him I said a daily prayer for him. Rather than talking about God, Phil would share a recipe. When Dad died in a tractor accident in 1982, Phil was working in Saudi Arabia. We met at Dad's ranch. Phil's appearance shocked me. He was too thin, his once handsome face scarred by bar fights. At the cemetery, we held each other and cried, knowing that our fractured family would never heal. "Write to me," I whispered when we parted the next day. From the banks of the Snake River in Idaho, Phil wrote, "I'm working on these submersible pumps, pulling water out of the Snake to irrigate the potato farmers''fields. I just came up with a killer recipe for taters." One Thanksgiving, I couldn't find Phil. I panicked. My latest letter to him had been returned. I called every bar in his small Idaho town. No one had seen him. "Lord," I prayed, "we kids didn't get much love from Mama. Dad wasn't able to show affection. That makes it hard for us to trust that you love us. Please allow Phil to know your love." I went to a friend who was a police chief for help. Within two weeks, he located Phil in a Washington prison. I wrote my brother. He wrote back, filling six pages with his distinctive cursive. He was lonesome. Instead of rehashing how he'd landed in prison, he described everything outside his cell window in detail. The pine, spruce and cottonwood trees. The red barn in the distance that reminded him of all the fun we'd had playing in the barn loft on the farm. He happily declared that he had become head cook. "After two months, they have finally given me a little leeway on ingredients, Sis. You should have heard the guys. Such a simple ingredient, but everything is so much the same day to day in here that any little change brings a bit of joy." Later that year, in the fall, I asked, "Will you be there for Thanksgiving dinner?" It made my heart ache to think of Phil spending his favorite holiday in prison. "Probably," he said. "But the guys are sure glad I'll be here to cook." Thanksgiving morning, my phone rang. "Hey, Sis, surprise!" "Happy Thanksgiving," I said. "Such a wonderful gift to hear your voice! Have you been released?" "No, but soon. Today I'm cooking for my guys. I have this amazing recipe for cornbread dressing," he said. "Sounds delicious," I said. "Your guys are going to love you today." "You know, Sis," he said, "I've been thinkin' about a recipe." I laughed. "You've been thinking about recipes forever." "No, this is different." "What do you mean?" "Sis, I'm talking about a kind of recipe for life. I've had a lot of time to think in here. We all get some good, some bad, a sprinkle of joy and a cup of trouble in life until we're…well. There's a scripture that says,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I love you, Sis." Two months later, Phil wrote: "I'm home, Sis. Back in my little trailer, working part-time mowing yards. Thanks for your offer to take me in, but you have your son to raise. You don't need me stumbling around. P.S.: The offer to take over your kitchen was tempting. Thanks for being my lifeline while I was in the joint." The following April, I got a call from a bartender in Pasco, Washington. Phil was gone. There had been a bar fight. The bartender said Phil likely broke some ribs and punctured a lung but refused to go to a doctor. "Your brother was defending a girl from her bully boyfriend." Phil was finally safe in God's arms, where he was meant to be. I put the ingredients for Phil's by-guess-and-by-gosh cornbread dressing, at the top of my shopping list. I would make it on Thanksgiving, grateful that we'd stayed connected through a lifetime of letters and that, in the end, my brother understood the greatest recipe was written by Someone who loved him even more than I did.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11-12 18:26:209년 전, 나는 40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회복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버지니아비치의 한 중독치료센터에서 하는 알코올 중독자 재활협회 모임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그룹은 모임 후 종종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거기서 샘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해군에서 기상장교로서 24년간 복무한 뒤 이제 막 퇴직한 상태였다. 그 또한 오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다. 나는 샘이 모임에서 그의 경험을 공유하는 솔직한 모습에 감동 받았다. 그는 중독 치료 중인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처음 2년 동안은 진지하게 만난 건 아니었다. 우리 둘 다 결혼 생활 중의 상처로 인해 그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관계를 천천히 진전시켰다. 우리는 같이 교회를 다녔고, 우리 관계에서 하나님이 최우선임에도, 여전히 둘 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확신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샘과 내가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람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드렸다. 샘과 1년 반을 만났을 때, 막내딸이 텍사스로 이사와 그녀와 손녀들과 가까운 데서 살자고 말했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 내가 당신 발목을 잡게 하지 말고." 샘이 내게 말했다. 그의 대답에 놀랐고, 그것은 상처 그 이상이었다. 여전히 이사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파트 목록을 만들어 텍사스로 향했다. 샘과 나는 서로 몹시 그리워하며 매일 밤 통화했다. 그는 사실 내가 떠나길 바라지 않았지만,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내가 이사한 지 두 달 만에 샘이 비행기로 텍사스까지 날아와 청혼을 했다. 그는 버지니아주 노퍽 해군부대에서 계약직 기상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그만두고 텍사스에서 나와 함께 살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우리가 만난 버지니아비치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줄 중독치료센터의 모든 친구를 초대했다. 며칠 후, 샘은 나를 자신이 복무했던 해군부대로 데려갔다. 강 건너 조선소를 차로 지나 교차로를 지날 때였다. 인접한 두 표지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쪽 표지판에는 나의 결혼 전 성인 윌리엄스 애비뉴가 적혀 있었고, 다른쪽 표지판에는 샘의 성인 펜녹이 쓰여 있었다. 분명 우리는 서로에게 운명적인 사람들이었다. ■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You’re My DestinyNine years ago, I was at the end of my 40-year marriage and the beginning of my recovery journey. I started attending AA meetings at a recovery center where I lived in Virginia Beach. A group of us would go out for coffee afterward, and that's how I got to know Sam P. After 24 years of service in the Navy as a meteorologist, he had just retired. He too was going through a divorce after a long marriage. I was moved by the honest way Sam shared in meetings. It was clear he was passionate about helping others in their sobriety. We became good friends but didn't start dating for two years. We had both been hurt in our marriages and didn't want to ever go through that pain again. We took things slow. We went to church together and put God first in our relationship―yet we both still felt very guarded and unsure. I asked God to show me if Sam and I were meant to be together. A year and half into my relationship with Sam, my youngest daughter asked me to move to Texas to be closer to her and my granddaughters. "You've got to do what you think is right for you," Sam told me. "Don't let me hold you back." I was surprised―and more than a little hurt―by his response. Although I still wasn't sure about the move, I listed my condo and headed to Texas. Sam and I missed each other so much that we were on the phone every night. He admitted that he hadn't wanted me to leave but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do what God wanted me to do. Only two months after my move, Sam flew down to Texas and proposed. Although he'd been working as a contract meteorologist at the naval station in Norfolk, Virginia, he left that job and made plans to join me in Texas. We held the wedding ceremony in Virginia Beach, the place where we'd met, so we could invite all our friends from the recovery center to celebrate with us. A few days later, Sam took me to visit the Navy base where he used to work. As we were driving by the shipyard across the river, we came to an intersection with adjoining street signs that made us gasp. One sign read Williams Avenue―my former last name―and the other street was Pennock, Sam's last name. Clearly, we were meant to be together.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10-29 18:07:29나는 그날 오후 두 살배기 손녀 엘라를 봐 줄 수 있다고 말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인데도 벌써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그래서인지 에어컨을 켰는데도 아침 내내 어지러웠다. "할머니!" 엘라가 소리쳤다. "할머니랑 저랑 뚜영장, 뚜영장!" 그건 바로 우리 동네 수영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요청에 나는 놀랐다. 엘라는 단 한 번도, 그것도 열렬하게, 어떤 요청을 한 적이 없었다. "엘라, 예쁘게 말해야지." 며느리 아만다가 꾸짖었다. "오늘 제발 뚜영장 가요!"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아가." 내가 말했다. 나는 재택근무를 하는데, 그날 마쳐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도착할 즈음엔 엘라가 수영장을 잊어버렸길 바랐다. 그럼에도 혹시나 해서 수영복을 안에 입고 갔다. 멍한 기운을 떨어내려 노력하며 이메일로 업무를 보냈다. 아들 집으로 가는 길에 깜박하고 수건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엘라와 다시 우리 집에 들러야 했다. 그러면서 대신 인형집을 가지고 놀자고 설득해 볼 수도 있겠다. 수영복을 입은 엘라가 내게 인사했다. 아만다가 선크림까지 발라 준 상태였다. "할머니! 뚜영장!" 하, 이미 결정됐다. 수건을 가지고 와야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집으로 가는 길로 빠지지 못했다. 대신, 수영장으로 갔다. 저절로 물이 마를 만큼 날씨가 뜨거웠다. 그런데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엘라와 내가 발을 물에 담그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우리 이웃이었다. "폴리,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당신 집에 불이 났어요!" 소방서에서는 원인 불명의 가스 누출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오래된 우물에서 나온 메탄가스가 언젠가부터 쌓인 듯했다. 최근에 머리가 멍하고 이상했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물탱크의 자동 가스 점화 장치가 켜지면서 지하를 통과하며 폭발이 일어났고, 1층이 내려앉았다. 이제야 나는 무엇이 혹은 누가 엘라를 수영장에 가고 싶게 만들었는지 알 것 같다.My Granddaughter's RequestI called to confirm I'd be babysitting my two-year-old granddaughter, Ella, that afternoon. Though not quite noon, the day was already sweltering. Maybe that was why I'd been feeling light-headed all morning despite the air conditioning. "Grammy!" Ella shouted. "You and me go to s'pool!" That's what she called my neighbors' swimming pool. The request surprised me. Ella never suggested anything, let alone so enthusiastically. "Ella, you have to ask nicely," my daughter-in-law, Amanda, chided. "We go to s'pool today, peez!" "We'll see, sweetie," I said. I work from home and had a few tasks to complete. I hoped Ella would forget about the pool by the time I got her. Still, I put on my bathing suit underneath my clothes, just in case. Trying to shake off my brain fog, I finished up my work e-mail. I was on my way to my son's when I realized I'd forgotten my towel. Ella and I would have to stop back at the house. Maybe then I could convince her to play with her dollhouse instead. Ella greeted me, dressed in her swimsuit. Amanda had even applied sun lotion. "Grammy! S'pool!" Well, that settled it. I'd have to pick up my towel. But somehow I missed the turnoff for home. Instead, I drove to the pool. It was hot enough to air-dry. But what was up with me? As Ella and I dipped our toes in the water, my phone rang. It was another neighbor. "Polly, you're all right!?" "Why wouldn't I be?" "Your house is on fire!" The fire department said a gas leak of unknown origin―perhaps methane from an old well―might have been building for some time. That could explain why I'd been feeling so fuzzy-headed and strange lately. When the automatic pilot light for the water tank switched on, an explosion tore through the basement, bringing the first floor down. Now I understood what―or who―had made Ella insist on going to the pool.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07-30 18:12:25옆집 부부가 우리 집 현관에 서 있었다. "두 분의 흰색 플라스틱 울타리에 저희 철조망 울타리를 붙이고 싶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남편 로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집 울타리는 경계선 안쪽에 있어요. 그래서 두 울타리 사이의 잔디를 모두 깎고 다듬어야 한다고요." "정말 말도 안 돼." 남자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경계선에 울타리를 설치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 부부는 화가 나서 떠났다. "여기 서서 저 남자랑 당신이 얼마나 많이 정치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로저에게 말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저 집 남편이 출장 간 동안 작년에 내가 마당 정리를 도와줬잖아." 로저가 말했다. 그러고부터 그들은 우리 부부가 손을 흔들며 인사해도 받아 주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언쟁을 잊어 보려 했지만, 뻔뻔하게 자기가 일을 보는 동안 자신의 개가 담장이 없는 우리 집 앞마당에 들어가게 내버려 두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 좋은 이웃이 된다." 몇 주 후, 나는 버터 접시가 깨져 하나 사러 갔다가 진열대에 놓인 파이 접시를 보았다. 제일 위쪽에 놓인 아이보리색 접시에는 파란색으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씌어 있었다. "네, 주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나는 그 접시를 사고 그래니스미스 사과(사과 품종 중 하나)도 잔뜩 담았다. 그날 오후, 파이 반죽을 밀면서 반죽이 찢어지지 않고 크러스트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사과의 의미를 담은 그 파이가 완벽하길 바랐다. "옆집 부부가 내 마음을 받아 주면 좋겠어." 남편 로저에게 말했다. "어쩌면 이 빵에 너무 많은 믿음을 주고 있는지도 몰라." 파이가 식자마자 나는 옆집으로 향했다. 겁이 나서 되돌아올 뻔했지만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 집에서 키우는 테리어 강아지가 미친 듯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남편 말고 부인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급하게 내뱉었다. 문이 열렸다. 부인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같이 먹으려고 애플파이 좀 만들었어요." 내가 말했다. 그가 손을 뻗더니 조용히 내 손에 있던 파이를 가져갔다. "접시는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그는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천천히 문을 닫았다. 나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상하게도,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오히려 그 반대의 느낌이었다. 나는 파이를 자르며 그릇 바닥에 새겨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문구를 발견하는 부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제발, 그 메시지가 잘 전달되길. 며칠 후, 앞마당에 나갔다가 옆집 부인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여자도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었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남편을 발견하고 말했다. "여자가 나한테 손을 흔들었어!" "당신 애플파이가 별로였던 것 같다고 걱정했잖아." 남편이 말했다. 옆집 남편이 경계선에 철조망을 설치했을 때도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비록 담장 사이에 있는 잔디를 깎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관계를 더 악화시킬 필요가 없어 보였다. 울타리가 별로일 때도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옆집 부인은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 해 준다. 하지만 그 남편은 여전히 우리를 피한다. 그러나 괜찮다. 우리의 이웃 관계 회복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입을 따를 것이다. ■원문으로 읽는 오늘의 이야기 The Apple Pie SoulutionOur next-door neighbors stood on our front porch. "We want to attach a chain-link fence to your white vinyl one," the wife said. "That's not going to work," my husband, Roger, said, shaking his head. "Our fence is inside the property line. We need to mow and trim between the two fences." "That's ridiculous," the husband said, his voice rising. "We have every right to put our fence on the edge of our property!" Before we could respond, the couple stormed off. "So much for the times you sat out here with him talking politics," I said to Roger. "And to think we helped her with yard work last year when he was out of town," Roger said. From that point on, our neighbors refused to acknowledge our waves hello. I tried to forget about the argument, but then they had the gall to start letting their dog use our unfenced front yard to do his business. I couldn't help but think of what Robert Frost once wrote: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 A few weeks later, I was out shopping for a replacement for my broken butter dish when I noticed a display of pie plates. The ivory one on top of the stack had LOVE THY NEIGHBOR spelled out in blue. "Okay, God," I said. "I get the message." I bought the plate and loaded up on Granny Smith apples. That afternoon, as I rolled out the dough for the pie, I prayed that it wouldn't tear, and that the top and bottom crusts wouldn't separate. I wanted my peace pie to be perfect. "I hope they'll accept my gesture," I told Roger. "Maybe I'm putting too much faith in my baking." Once the pie had cooled, I headed next door. I almost chickened out and turned back, but then forced myself to ring the doorbell. I could hear their terrier start barking like crazy. "Please let it be the wife and not the husband who comes out," I whispered. The door opened. It was the wife. "Hi! I baked this apple pie for you," I said. She reached out and silently took the pie from my hands. "Please keep the plate," I sputtered. She just looked at me for a moment, then slowly closed the door. I walked back to our house. Oddly enough, I didn't feel rejected at all. Quite the opposite, in fact. I envisioned the wife slicing into the pie and discovering LOVE THY NEIGHBOR written across the bottom of the dish. Hopefully, that message would get through. A few days later, I was out in the front yard when the wife passed me in her truck. My hand shot up in greeting. She returned my wave. I ran into our house and found Roger. "She waved back at me!" "And you were worried your apple pie wasn't good," he said. Still, we weren't surprised when the husband put up a chain-link fence right at the property line. Although we can't trim between the fences, we didn't say anything to the neighbors. It just didn't seem worth damaging our relationship further. Maybe even bad fences can make good neighbors. Meanwhile, the wife keeps waving and even says hello. Her husband still shuns us. But that's okay. I'll keep following those heavenly nudges, even though restoring our neighborly relationship might seem like pie in the sky. 글·사진=가이드포스트
2024-07-02 18:5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