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체에 큰 파급효과를 미칠 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6일 TSMC 규슈 구마모토 1공장을 방문,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올리며 "현지 경제성장이나 임금인상, 고용 확대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며 "두 공장에서 고도의 기술전문직 3500명 이상을 채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지독한 저성장의 늪에 허덕였던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을 청산하고 새로운 경제 변곡점에 서 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정책이었던 '아베노믹스'의 후광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일본의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을 끊어내고, 경제에 다시 온기가 찾아온 건 기시다 정권에서다. 지금에야 '반도체 코리아'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반도체라는 제품이 세상에 처음 나올 때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호령하던 맹주였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여전히 현대 반도체의 원천기술 핵심은 대부분 일본이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 코리아' 역사의 서막도 일본에서 비롯됐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74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산 직전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기술자들을 데리고 거의 매주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사정하다시피 기술을 조금씩 배워 왔다. 그렇게 10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이 64K D램이다. 삼성은 수많은 반도체 중 하나인 메모리에 집중했다. 그 선택은 한국 경제의 코어가 됐다. 일본의 몰락은 1995년부터다.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 다자간무역협상을 근거로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면서 미국 기업들이 국제분업을 본격화한 것이다. 이때 미국은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인 팹리스(반도체 설계)에 집중했다. 공장 근로자들이 많이 필요한 반도체 제조는 동맹이면서 임금이 저렴한 한국과 대만에 맡기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스템을 구축했다. 애플, 엔비디아, AMD 등 미국 팹리스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같은 한국·대만 반도체 제조 분업화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일본은 왜 빠졌을까. 당시 일본은 반도체 왕국이라는 자존심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초호황을 누릴 때는 세계 50대 기업의 대부분이 일본 기업이었다. 1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을 위협할 정도였다. 현지에선 '도쿄를 팔면, 미국 전체의 땅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나올 만큼 일본인들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일본은 반도체 분야에서 두 발, 세 발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분업화가 아닌 모든 공정을 사내에서 처리하는 수직적 모델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매년 막대한 투자금을 쏟아부어야 유지된다. 호황은 버블경제의 둔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년을 버티지 못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투자 부담에 짓눌려 자멸했다. 일본 경제는 30년 만에 호황 사이클에 올라탔다. 주식과 땅값은 사상 최고를 찍었다. 물가상승은 임금인상으로 이어지고, 또 물가에 반영되는 선순환이 확인됐다. 조심스럽던 일본은행이 17년 만에 금리를 올리면서 디플레 탈출 선언도 시간문제가 됐다.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TSMC는 일본 1공장 개소에 이어 2공장도 구마모토에 짓는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3공장 건설까지 거론되고 있다. 1공장만 봐도 구마모토 지역 반도체 관련 설비투자의 경제효과는 2021년부터 10년간 약 9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TSMC의 일본 공장 건설은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 부활과 패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한 화룡점정이다. 기시다 총리가 TSMC 일본 공장에 10조7789억원(1공장 4760억엔·2공장 7320억엔)을 지원해도 아까워하지 않는 이유다. km@fnnews.com
2024-04-09 18:10:18전공의들이 의대정원 확대에 반발해 집단으로 병원을 떠난 지 3주째가 넘어가고 있다. 전공의에 더해 서울대 의대 교수들까지 전원 사직을 예고했다. '강대강' 국면은 계속되고 도통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올해 의대정원을 지난해보다 19명 늘어난 9403명으로 결정했다. 현재 3058명인 한국의 3배를 웃도는 규모다. 일본만 그럴까. 의대정원이 8000~9000명가량인 독일과 영국은 2030년까지 우리나라의 5배에 달하는 1만5000여명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일본은 1960년대 의대정원이 한국과 비슷한 3000명 수준이었으나 인구 증가로 꾸준히 정원을 늘려 1981년에는 최대 8280명까지 신입생을 뽑았다. 이후 일본 경제가 장기침체 늪에 빠지고, 의사가 공급과잉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의대정원을 2007년 7625명까지 줄이기도 했다. 이때 일본 의료계에 터닝포인트가 되는 사건이 터졌다. 만삭의 임신부가 구급차에 실려 이송됐지만 여러 병원에서 거부당했고, '응급실 뺑뺑이' 끝에 결국 사망한 것이다. 전국적인 분노가 들불처럼 번졌고, 의사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의대 증원을 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일본은 2008년 168명 증원을 재개하며 최근 17년간 의대 정원을 1778명(23.3%) 늘렸다. 지역의사 확대정책도 동시에 진행해 지난 10년 동안 의사가 4만5000명 증가했다. 그럼에도 지방의 의사인력 부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지자체들은 의대 증원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원이 줄면 지방으로 오는 의사 수가 더 적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정부 역시 여전히 의대정원 조정이 필요하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의료붕괴를 막으려면 의사 증원이 필요하다며 오히려 의사와 의대생이 서명하는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우리 정부는 2035년 의사 수가 1만5000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의사인력 1만명 확충안(의대 증원 2000명×5년)을 발표했다. 수십년간 업계와 대화하고 천천히 의대정원을 늘려온 일본과 비하면 너무 급한 감이 있다. 일본은 의료개혁은 백년을 내다보는 대업으로 보고 해마다 지역수요에 맞춰 100명 안팎의 인원을 천천히 증원해 왔다. 일본과 우리의 상황이 다르지만 일본이 정원을 늘리는 과정에서 왜 일본 의사회가 적극 찬성했는지 우리 정부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뜻하지 않게 현장을 떠나 모처럼 여유가 생긴 우리 의사들도 졸업장 속에 적힌 '제네바 선언'을 다시 읽어봤으면 한다. 의사로서 양심과 품위를 가지고 환자의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는 그 다짐과 사명감이 아직도 유효한지 각자 확인해볼 때다. "현재 우리나라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해외 사례처럼 단순히 임금을 올려달라는 게 아니라 의사 부족으로 인한 환자의 피해를 전제로 돈을 더 벌겠다는 것"이라는 듣기도 민망한 말들이 왜 나오게 됐는가도 생각해야 한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은 대학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군 병원을 개방하면서 '환자 진료가 의료진의 당연한 책무인 만큼 관련 사안을 외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군대전병원 관계자는 언론에 "군의 존재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비단 환자를 치료하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 군의 책무여서만일까. 군인 이전에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테다. 고된 현장에 있다 보면 의사들도 처음 의사가 될 때의 마음가짐이 흐려질 수 있다. 직업인으로서 내 밥그릇부터 챙겨야 환자 생명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의사를 존중하는 것은 단순한 직업인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km@fnnews.com
2024-03-12 18:40:18미국 대선이 9개월도 채 남지 않은 가운데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결구도가 굳어지는 양상이다. 초반부터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다. 지난 1일 시장조사기관 'SSRS'의 미국 전역 여론조사에서 바이든(45%)이 트럼프(49%)에 밀린다는 가상대결 결과가 나오자 과거 '트럼프 피해국'들의 불안은 더 깊어지고 있다.21세기 초까지 유지된 '지구방위대'라는 미국의 역할을 버리고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한 트럼프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현지 언론들은 '트럼프 2.0'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할 때라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은 트럼프 행정부와 '그나마' 잘 지낸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2016년 11월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트럼프에게 전화로 축하메시지를 보내고 곧바로 정상회담 일정을 결정지었다. 전 세계 수뇌부가 부러워한 미·일 관계의 초석이 이때 구축됐다. '미국은 동맹국에 퍼주기만 한다'고 인식한 트럼프의 청구서에 대비해 일본은 대미 투자실적을 주도면밀하게 설명하며 탈압박에 성공했다. 내어준 것도 많지만, 트럼프 집권 4년 동안 일본은 트럼프의 미국을 어떻게 파고들 것인가, 점점 과격해지는 발언과 약속에 흔들리지 않고 냉정하게 대처할 것인가를 공부하면서 그 나름대로 선방한 손익계산서 외교를 했다. 하지만 그때 일본에는 구심점 아베가 있었다. 만약 '트럼프 2.0' 시대가 온다면 이미 퇴진 위기인 20%대 지지율로 리더십을 상실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로 미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 많다.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기시다의 재선 전망이 불투명해지고 있는 가운데 차기 총리 후보라는 잠룡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는 현재 진행 중인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막겠다고 공언하며 벌써부터 대립각을 세워놨다. 반대 이유는 미국의 철강산업 기반 약화와 국가안보 등 역시 미국 우선주의다. 일본은 미국 대선이 있는 11월 전인 9월까지 인수합병(M&A)을 매듭짓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일이 잘 마무리된다고 해도 이후 트럼프의 보복이 무섭다. 불안한 일본은 '팀 아베'의 부활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마리 아키라 전 자민당 사무총장은 11일 후지TV에 출연, 트럼프가 11월 재선된다면 "아베 시절 협상 경험을 살려 당시 직원들을 총리실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아베 진영의 참모진은 경험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는 협상가다. 그의 성격과 방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베는 미국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동맹국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논리를 개발하는 등 천재적 행보를 보였다"고 말했다. 돌아온 트럼프는 돈(방위비)을 더 내지 않는 동맹국에 대해 '안보우산'을 거두겠다는 암시까지 하며 악당을 자처하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방위비를 충분히 내지 않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침공하도록 독려하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는 "당신이 체납자라면 보호하지 않겠다. 오히려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독려할 것이다. 청구서에 나온 대금을 납부하라"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재임 당시 '한국이 무임승차하며 미국을 벗겨먹으려 한다'고 수차례 공격했다. 트럼프는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5배 상향을 요구했고, 주한미군 철수까지 추진했다. 바이든 정권교체로 무산됐으나 퇴임 이후에도 트럼프는 두번째 임기에서 주한미군을 반드시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 나토와 러시아를 한국과 북한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우리도 '팀 아베'를 복습할 때다. km@fnnews.com
2024-02-13 18:44:142024년 1월 1일 오후 4시10분쯤.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집을 대청소할 때였다. 평소보다 꼼꼼하게 청소에 열중하고 있던 와중, 갑자기 현기증 같은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청소를 이어가려던 그때, 건물이 휘청휘청 크게 흔들렸다. 집 안의 화분 잎사귀와 주방에 걸린 조리도구, 벽에 걸린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더니 점점 잦아들었다. 일본 도쿄 15층짜리 맨션은 체감상 1분 남짓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난가을 새벽에도 규모 5 정도의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냥 '가까운 바다에 지진이 왔나 보다' 하며 일본 야후의 속보를 찾아봤다. 그런데 보통 지진이 아니었다. 진원지도 흔히 있었던 도쿄, 지바 인근 등이 아닌 그 반대편, 우리 동해 쪽이었다. 혼슈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지진'이라고 이름 붙여진 규모 7.6의 강진이었다. 지진 발생 직후 일본 기상청이 노토반도에 최대 5m 대형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NHK방송 화면에는 '쓰나미! 도망쳐!'라는 자막이 큰 글씨로 떴다. 경고 자막은 '쓰나미! 피난!' 'Evacuate!(대피하라)' 등이 계속 번갈아가며 전파됐다. 일본 방송에서, 그것도 공영 NHK에서 '도망쳐'라는 문구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분하게 속보를 전하던 여성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오후 4시13분 쓰나미 경보가 내려진 이후로는 더욱 크고, 다급해졌다.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순간이었다. 아나운서는 "쓰나미 경보입니다! 즉시 도망치세요!" "지금 당장 집을 떠나서 높은 곳으로 가십시오!" "멈추지 말고 바다에서 떨어진 곳으로 대피하십시오!"라고 격앙된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각지의 쓰나미 정보를 서둘러 보도했다. 직설적인 자막과 아나운서의 긴박한 음성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바로 알게 했다. 몇 초 뒤 현장 CCTV 중계화면에는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와 피신하는 모습, 건물 몇 채가 풍진에 휩싸인 듯한 모습 등이 그대로 방송됐다. 일본 정부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지진 발생 직후인 오후 4시11분 총리관저 위기관리센터에 대책실이 설치됐다. 관방장관과 방재담당상이 4시30분 이전 관저에 들어갔고 신속한 대응에 나섰다. 이튿날에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비상재해대책본부가 열려 본격적인 수습이 진행됐다. 기시다 총리는 지자체의 요청에 앞서 지원하는 '푸시형 지원'을 실시했다. 전국의 자위대와 경찰·소방 인력을 재해지역으로 급파했다. 공무원들에겐 3가지 지시사항을 강조했다. △인명제일로 전력 대응 △피난정보를 국민에게 적확하게 전달 △피해상황의 신속한 파악 등이다. 이번 강진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규모 9.0) 이후 가장 큰 지진이다. 6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5년 한신대지진(7.3)보다도 강하다. 노토반도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9일 현재 180여명으로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건 언론과 정부당국의 신속한 대응, 국민의 협조, 튼튼한 내진설계 등 민관의 '네박자'가 맞아떨어진 덕분이다. 이번 지진으로 '한반도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라는 말이 또 나온다. 2016년 경주 지진과 2017년 포항 지진 이후 '사골'이 되다시피 한 표현이다. 8년이 지났음에도 이 문구가 반복되는 건 공염불의 방증일 것이다. 우리는 지진이 발생할 때마다 허둥댔다. 재난방송은 부정확한 정보로 혼란을 부추겼다. 당국의 늑장대응은 시정되지 않았다. 전국 건축물 10개 중 8개가 내진설계가 안 된 것은 고사하고, 있어야 될 철근까지 빼먹는 '순살 아파트' 사건까지 발생했다. 지금 당장 일본과 같은 대형 지진과 쓰나미가 한반도에서 발생한다면 대규모 피해는 불 보듯 뻔하다. 국민들은 어떻게 생명을 지키고, 어디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km@fnnews.com
2024-01-09 17:59:56"새 시대를 향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완성하고 일본의 성장잠재력을 되찾겠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사장은 미국 산업화의 상징인 US스틸 인수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인수금액은 141억달러(약 18조3000억원)로 일본제철의 역대 인수합병(M&A) 중 최대 규모다. 피츠버그에 본사가 있는 US스틸은 지난 1901년 존 피어몬트 모건이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스틸을 사들여 세운 회사다. 업력만 무려 122년이다. 이 카네기스틸에 페더럴 스틸 컴퍼니, 내셔널 스틸 컴퍼니가 합병하면서 US스틸이 탄생했다. 세계 최대 철강회사가 된 US스틸은 사상 처음으로 기업가치 10억달러를 돌파한 회사로도 유명하다. 회사의 전성기였던 1943년 직원 수는 34만여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의 삼성전자(27만여명)보다 직원 수가 많으니 당시 얼마나 잘나갔는지 짐작이 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일본, 독일, 중국 등에 밀려 점점 주도권을 내주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의 글로벌 업계 순위는 27위까지 고꾸라졌다. 기업가치도 계속 쪼그라들었다.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였던 US스틸은 2014년 미국 주요 500개 대기업으로 구성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에서도 쫓겨났다. 일본 현지에선 이번 M&A를 두고 '오랫동안 유지됐던 미일 간 세계 철강업계의 구도가 재편된 대형 사건'이라고 떠들썩하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 철강업체들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가장 중요한 고객인 완성차 업체가 수익의 기둥이지만 미국은 진입이 좀처럼 쉽지 않은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엔 2가지 큰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지독한 보호무역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운송비용이었다. 미국 철강업계의 보호무역주의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의 영향이 컸을 때 이들은 반덤핑소송을 제기하고 다른 나라의 철강 제조를 철저히 거부했다. 최근에는 생산능력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는 중국이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도 여전히 리스트에 올라가 있긴 마찬가지다. 지리적 장벽도 크다. 완성차 업체와 같은 고객사가 많은 디트로이트 등 미국 동부에 수출을 하기 위해선 파나마운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운송비가 비싸다. 그런데 US스틸의 주요 기지는 디트로이트 인근 오대호 해안에 있어 일본 기업 입장에선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것이다. US스틸을 인수해 이런 장벽을 뛰어넘겠다는 게 일본제철의 복안일 것이다. 일본제철의 지난해 조강 생산량은 4만437만t으로 세계 4위였다. US스틸을 인수하면 곧바로 3위로 부상한다. M&A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그려진 세계 철강 거대기업의 지도가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이번 인수는 일본 기업이 미국에서 상당한 제조 입지를 구축하는 전략적 변화를 의미한다. 또 철강산업은 국가정책과 맞물려 있는 만큼 미일 간 국제 무역과 산업 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세계 철강시장의 새로운 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US스틸의 흥망성쇠는 100년 기업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US스틸의 전성기였던 1943년부터 회사가 무너져 팔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80년에 불과했다. 당대 최고의 기업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혁신이 끊기면 빠르게 망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산업계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도 이제 대기업을 중심으로 100년 기업을 목표로 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글로벌 장수기업이었던 US스틸의 몰락은 100년 기업이 10곳 남짓인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km@fnnews.com
2023-12-19 18:17:49인구가 줄면 지방은 소멸할 수밖에 없을까. 지역발전 불균형과 인구절벽 이슈가 대두된 후 지방소멸은 백약이 무효한 난제가 됐다. 그동안 셀 수 없는 토론과 지역활성화 시도에도 번번이 실패했고, 아직도 정답 찾기는 요원하다.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고민한 일본에서 괜찮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일본은 시골 마을을 휴게소로 만들면서 새 길을 찾았다. 한국처럼 고속도로 휴게소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국도변의 마을 자체가 여행의 경유지가 되는 개념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미치노에키'(道の驛·길의 역)라고 부른다. 미치노에키가 등장한 건 1990년대 중반부터다. 약 30년의 세월 동안 열도의 1200개가 넘는 미치노에키들은 일본 지역활성화의 거점이 되고 있다. 그중 수도권 북부 군마현에 있는 가와바무라는 민관 공동 프로젝트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미치노에키로 유명하다. '덴엔플라자카와바'라는 이름의 이 휴게소는 도쿄 신주쿠역에서 130㎞, 차로 2시간 남짓 떨어져 있다. 연간 240만명의 방문객이 찾고, 27억엔(약 240억원)을 소비한다. 웬만한 테마파크와 맞먹는 사업성이다. 2021년 일본 정부는 마을기업 전국 1위 모델로 선정했다. 마을은 작년에 150명을 직접고용했다. 1000여명의 마을사람이 이 휴게소와 관련한 직간접적 경제활동에 엮여 있다고 한다. 마을 전체 인구(약 3000명)의 3분의 1에 달한다. 항상 일손이 부족한 상태로 "언제든지 이사만 오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할 정도니 그야말로 '농촌 유토피아'다. 무엇보다 파산 위기까지 갔던 흔한 마을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뤄낸 스토리가 놀랍다. 인근 유명 관광지와 특산물로 승부를 보는 보통의 미치노에키와 달리 가와바무라는 내세울 아이템이 없었다. 인구소멸 지역이 된 것도 50년이 훌쩍 넘은 1971년의 일로, 그대로 두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동네였다. 하지만 마을은 도쿄 세타가야구와 고향공사를 합작 설립하면서 제2막을 열었다. 결과는 대성공. 도쿄의 구민들에겐 가와바무라는 '제2의 고향'으로 인식됐다. 1981년 3만명이던 교류인구는 2021년 200만명을 돌파했다. 지방 부활의 아이콘으로 매스컴을 타자 마을은 휴게소가 아닌 여행 목적지로 위상을 높였다. 이제 이곳은 10명 중 3명이 10회 이상 재방문하는 만족도가 높은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생존전략은 민간 경쟁과 다를 게 없었다. 판을 까는 것을 지자체가 도와줬을 뿐 이후엔 철저한 무한경쟁을 이겨냈다. 질 좋은 제품이 강점인 가와바무라는 '도쿄 1%가 소비하는 물건을 만든다'는 고급화 전략이 적중한 케이스다. 최근에는 대기업들이 돈을 싸들고 와 호텔·관광사업을 제안하는 곳도 여러 곳이라고 한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의 지자체들도 이곳을 잇따라 방문, 벤치마크 의사를 밝혔다. 조만간 지방소멸을 타개할 한국형 '길의 역' 1호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2023-11-21 18:33:59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정치인에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은 마약과 같다. 특히 인기가 떨어진 정치인들은 이른바 '퍼주기' 포퓰리즘 정책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지금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처지가 딱 그렇다.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마이넘버 카드' 사태와 지속되는 고물가로 국민의 신뢰는 연일 바닥을 치고 있다. 주요 선거에서도 연이어 대패하면서 의석수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 해산 결정으로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 약발은 먹히지 않았다. 기시다는 올해 중의원을 해산(총리 권한)시켜 재선거를 통한 임기 연장을 노렸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지지율 반등이 없는 한 재선거는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에는 정권 수명을 측정하는 지표인 '아오키 법칙'이란 게 있다. 오부치 정권에서 내각 관방장관을 지낸 아오키 미키오가 만들었다. 내각 지지율과 여당 지지율을 합한 수치가 50% 미만일 경우 사실상 정권 유지가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 주요 언론사 여론조사 중 가장 낮은 마이니치의 경우 기시다 내각과 자민당의 합산 지지율은 48%로 벌써 적색경보가 울렸다.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마이니치를 비롯해 요미우리, 아사히, 교도통신, 지지통신 조사에서도 모두 정권 출범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아오키 법칙으로 현 국면을 보면 기시다는 벼랑끝에서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다만 아직은 대부분 50%를 소폭 웃돌고 있어 그나마 연명 중이다. 위기의 기시다는 결국 벼랑끝 포퓰리즘 카드를 꺼냈다. 이례적 고물가에 대응해 세수증가분 일부를 국민에게 돌려줄 생각이다. '한시적 소득세 감세'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야당과 현지 언론들은 노골적인 포퓰리즘이라며 거센 비난을 쏟아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시다 총리는 지난해 12월부터 방위비 확보와 저출산 대책을 위해 법인세, 소득세, 담뱃세를 올리겠다고 공언해 왔다. 총리의 말이 1년도 채 안 돼 번복되면서 정책 일관성을 스스로 저버렸다. 그렇다고 감세가 묘수였냐,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과거 감세를 했어도 선거에서 패배한 전례가 있다. 1998년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이 소득세를 포함한 2조엔대 특별감세를 단행했으나 그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해 퇴진 요구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 초반으로 기시다와 비슷하다. 기시다의 사정과 다른 것이 있다면 한국에는 아오키의 법칙이 없어 수장의 자진사퇴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또 무리한 포퓰리즘을 펼칠 유인이 적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지만, 우리 역시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라는 큰 이벤트를 앞둔 터라 모를 일이다. 여당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인 '문재인 케어'를 포퓰리즘이라고 지적했다. 한덕수 총리는 포퓰리즘 정책을 털어내는 정권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언급했다. 기시다 내각과 달리 윤 정부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국정운영 기조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도 유권자의 관전 포인트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2023-10-24 18:19:05"종업원 부족으로 영업시간을 단축합니다." 일본 거리를 걷다 보면 이런 벽보를 붙인 음식점이 종종 보인다. 비단 영업시간 제한뿐일까. 미디어에서는 일본의 100년 기업들이 인력부족이나 대를 잇지 못해 결국 도산했다는 뉴스도 흔하게 등장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여파가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인력부족으로 도산한 일본 기업들은 상반기에만 110곳에 달했다. 이는 1년 전의 1.8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역대 최다 추세였다. 문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일하는 사람 수(7월 일본 취업자 6772만명)는 그 어느 때보다 많다. 그런데도 일손이 달리는 것은 한창 일할 나이인 25~44세 핵심노동인구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의 인구층은 2013년부터 약 10년간 오사카시 인구를 웃도는 290만명이 쪼그라들었다. 일본은 여성과 고령 취업자를 늘려 청년층의 노동력 감소를 보완하려고 했으나 한계는 분명했다. 요즘 일본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외국인들이 꿰찬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일본의 인구감소는 가속화하고 있다. 2022년 10월 시점의 총인구는 1억2494만명으로, 전년동기 대비 55만명이 줄었다. 여성이 생애 동안 낳는 아이의 수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은 1.3명으로, 인구 유지에 필요한 2.1명을 훨씬 밑돈다. 이런 속도면 2056년 1억명이 붕괴된다. 1950년 세계에서 다섯번째 규모였던 일본의 인구수는 현재 11위로 후퇴했다. 2050년에는 17위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인구절벽에서 추락 중인 일본은 살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 중이다. 하지만 일본조차도 저출산을 극복할 묘수는 없어 이것저것 다 해보는 분위기다. 여성, 노인의 취업환경 개선은 당연하고 외국인 이민도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더 나아가 로봇협업과 디지털전환(DX) 자동화 시대에 발맞춰 보통 사람들도 1인 2역을 기본으로 하는 세상이 곧 올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전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내달 발표될 새로운 경제대책의 5대 축 중 하나로 '인구감소 극복을 위한 사회변혁'을 내걸기도 했다. 한국의 인구 문제는 일본보다 더 심각하다. 올해 한국의 출산율은 2·4분기 0.7명까지 낮아지면서 연간 0.6명대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합계출산율이 1명보다 낮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15년간 한국 정부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300조원 넘는 예산을 쏟았지만 정책은 실패했다. 젊은이들은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을, 기성세대는 '라떼'(나 때는)를 반복하며 사회는 분열됐다. 그사이 생긴 인구공백은 30년 뒤 우리 경제를 침몰시킬 폭탄(한국개발연구원 2050년 한국 성장률 0.5% 전망)이 됐다. 20세기 후반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다. 21세기 한국의 인구감소는 '한강의 쇼크'라는 예고된 악몽이다. 맷집 약한 한국 경제가 버텨낼 수 있는 근본대책이 절실하다.김경민 도쿄 특파원 km@fnnews.com
2023-09-26 18:24:24일본 대표 기업인 히타치 제작소는 '잃어버린 30년'을 상징하는 기업이었다. 히타치 제작소는 전자제품, 반도체, 컴퓨터, 디스플레이, 통신기기, 조선, 의료기기 등 돈 되는 모든 것을 만들고, 팔던 '문어발' 회사였다. 한때는 자회사 숫자만 400여개에 달했다. 미국 포브스는 세계의 기업 베스트 2000에 일본 기업으론 유일하게 '복합기업'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기업 중에서는 LG전자와 절친이었다. LG전자는 전신인 금성사 시절인 1960년대 말부터 히타치와 제휴했다. LG전자와 합작한 외국계 법인인 'HLDS'(히타치-LG 데이터스토리지)를 통해 CD, DVD, 블루레이를 공급했다. 히타치는 20세기 말쯤부터 여러 일본 기업들이 그랬듯 정보기술(IT) 혁명의 물결에 밀려났다. 2001~2010년에는 누적 적자가 1조엔까지 눈덩이처럼 불었다. 2008년 7880억엔 적자 기록은 일본 제조업 역사상 최대였다. '가라앉던 거함'은 사업 분야를 제조업 중심에서 IT 중심으로 대대적인 사업재편에 돌입했다. 구조조정은 성공적이었다. 들쑥날쑥했던 실적은 2011년 이후 지진, 환율변동에도 매년 9조엔 이상의 매출과 흑자를 유지했다. 히타치는 최근 4분기 연속 순이익 5000억엔 돌파가 유력시된다. 회의적이던 시장도 '거함의 부활'을 확신하며 주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못난 일본기업'의 대표 격이었던 히타치의 부활에는 어떤 디테일이 있었을까. 획기적인 히트상품이 나오면서 반전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3·4분기 매출 전망치는 8조8000억엔으로 30년 전에 비해 1조엔이 조금 넘는 정도다. 회사는 오히려 몸집 불리기를 버리고, 이전에는 일본에서 금기였던 적극적인 사업매각을 통해 살 길을 찾았다. 일본에서는 회사를 공동체로 간주해 인재와 사업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도 뿌리 깊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환경과 최첨단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최근에는 이런 일본식 자전주의가 문제로 지적됐다. 히타치도 낡은 생각을 과감히 폐기한 게 결정적 한 수였다. 히타치화학과 히타치건설기계 등 22개나 됐던 상장 자회사는 매각과 흡수로 올해 3월 모두 정리됐다. 현재 히타치를 이끄는 것은 파워그리드·철도·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 등의 인수 사업이다. 총액 3조엔에 이르는 일련의 매수를 지휘한 히가시하라 도시아키 회장은 "인수합병(M&A) 없이는 지금의 히타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히타치의 성공은 일본 산업계의 패러다임을 전환시켰다.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르네사스와 미쓰비시중공업 공작기계(니덱에 인수)가 히타치의 뒤를 밟아 성공적인 M&A 사례를 남겼다. 이제 히타치는 새로운 이야기를 써 가고 있다. 엔저로 살아난 일본의 무수한 '히타치들'이 '다시 찾은 30년'을 준비 중이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2023-08-29 18:24:37"일본인들의 유지·보수 능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수준이에요."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한 대기업 임원은 일본인들의 건물 관리능력에서 장인정신을 볼 수 있다면서 그 대표적인 예를 골프장으로 들었다. "일본에는 2200개의 골프장이 있고, 도쿄 인근에만 10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버블경제 시기였던 1980~1990년대 지었어요. 그런데 보세요. 얼마나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한국이었으면 애초에 다 재개발했겠죠? 있는 걸 닦고, 조이고, 고쳐서 최대한 오래 쓰는 게 일본 사람들이 사는 법이에요." 겉으로는 일본 문화에 대한 존중을 말하면서도, 왠지 그의 말투에선 '아직도 이런 걸 쓰고 있다'는 반어적 뉘앙스도 살짝 풍겼다. 최근 일본을 찾는 지인들도 전통 있는 노포가 많아 좋다면서도 '옛날의 그 세련되고 깔끔한 일본이 아니다' '몇 년 전과 똑같아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서울이 많이 따라잡았다' 식의 저평가하는 인상을 전하기도 했다.경지에 이른 일본인들의 유지·보수 능력은 '잃어버린 30년'을 살아내기 위한 어쩌면 당연한 생존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근 30년간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새로운 것보다는 있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사실 지난 30년은 무턱대고 벌려놓은 일들을 수습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 시간이었다. 2200개의 골프장은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완벽하게 보존된 옛것의, 이미 현대적이었던 모습들은 '아니 도대체 그때 얼마나 잘살았던 거야' 하며 잘나갔던 일본의 전성기를 상상하게 한다. 버블 붕괴 후 30년을 버텨낸 일본에서 이제 "미래가 밝다"는 말이 나온다. 도산 공포에 질려 현상유지 경영에 방점이 찍혔던 일본 기업들은 세대교체되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값싼 중국으로 떠났던 일본 기업들이 자국으로 컴백했다. 일본의 올해 봄철 평균 임금인상률은 1993년 이후 최고인 4%(후생노동성 조사 3.60%·게이단렌 조사 3.99%)에 육박했다. 모든 산업에서 일본 기업들은 두자릿수 이상 증가하는 규모의 투자계획을 세웠다.2·4분기 일본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5% 증가했다. 한국(0.6%)의 2배가 넘는 수준이다. 1·4분기에도 일본은 0.9% 성장해 한국(0.3%)을 앞섰다. 같은 추세라면 일본의 연간 환산 성장률은 6.0%로 25년 만에 한국을 역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최대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잃어버린 30년의 끝을 맞이하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일본 경제가 멍에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들어선 것 같다"고 평가했다. 금융과 실물경기 전반에 온기가 돌면서 일본 경제는 재도약을 위한 발을 뗐다. 과거를 추억하며 유지·보수에 급급했던 일본의 낡은 골프장들이 새 옷으로 갈아입을 날도 멀지 않았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2023-08-22 18: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