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노무현 후보 정치 역정] 청문회스타서 대통령후보로 ‘우뚝’


민권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 지역주의를 깬다며 무모한 선거에 잇따라 도전, 유권자의 기억을 되살리던 ‘바보 노무현’이 14년만에 ‘노풍’을 타고 집권여당의 대통령후보로 우뚝 섰다.

이른바 ‘5공 청문회 스타’에서 집권 당 대선 후보로 오기까지 노무현 후보의 정치인생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노후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일부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부터다.

그간 평범한 변호사 생활을 하던 노후보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거리에서 맞은 후 이석규씨 사건으로 구속되고 변호사업무 정지처분까지 받은 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지난 88년 4·26 총선(13대)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5공 실세 허삼수 후보의 대항마로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닮으로써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것. 초선 노무현은 88년 5공 청문회에서 다른 여야 의원들이 깍듯이 예우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로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이후 89년 3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5공 청문회 참석거부에 항의, 의원직을 내던졌다가 ‘패기 있다’는 격려보다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난받고 결국 17일만에 사퇴를 번복하는 해프닝을 빚음으로써 정치 현실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그 뒤 김대중 총재의 신당에 참여, 부산지역에서 각종 선거에 출마했다가 줄줄이 고배를 마신 쓰라린 경험을 맛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정권교체후인 98년 7월 보선에서 국민회의 후보로 종로에 재도전, 오랜만에 금배지를 달고도, 2000년 4월 총선에서 다시 종로를 뒤로 한 채 부산(북강서을) 표심을 두드렸다가 예상대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한 전력도 소지하고 있다.

한편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노무현 후보는 친근하고 성실한 성품에 통솔력과 지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돼 있는 등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을 예고하기도 했다.

/박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