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빠질만한 제법 큰 수족관 앞. 비키니 차림의 젊은 여성이 결연한 표정으로 서 있다. 이어 똑딱거리는 초시계 소리와 함께 그녀는 물 속을 흘러다니는 물체를 기민하게 입으로 물어 꺼내기 시작한다. 가슴까지 수족관 속에 집어넣은 여인이 입으로 건져 올리는 것은 조그만 쥐들의 시체다. 큰 상금이 걸린 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견디어야 할 위험은 그 뿐만 아니다. 그 수족관 속에는 살아서 이리저리 헤엄치는 물뱀들까지 뒤얽혀 있다.
미국의 엽기 TV들이 인간의 상상력에 도전하고 있다. 역겹고, 무섭고, 황당한…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깐 온갖 내용들이 시청자들을 호객하기에 바쁘다.
미국 방송의 이런 엽기성 프로그램은 몇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바로 순수 엽기, 그 자체를 소재로 한 것들이다. 벌거벗은 여성 위로 살아 있는 끔찍한 생물들을 잔뜩 올려놓고 견디게 하는 게임이 대표적이다. 얼굴에는 바퀴벌레가, 몸통에는 뱀들이, 다리에는 전갈의 무리가 산을 이루고 있다. 패닉 상태에 빠진 여인의 비명소리가 끝이 나면 다음 게임이 기다린다. 이번엔 큰 물통에 가득 찬 지렁이를 입으로 물어서 옆의 물통으로 옮기는 게임이다. 지렁이들 속에 얼굴을 푹 묻었다가 한 입 가득 물어 올리는 사내의 안경에도 지렁이들이 걸려 있다.
이어 시리즈로 연결되는 것이 인간의 공포와 모험심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이다. 빌딩 5∼6층 높이의 수평 풍차 위를 한바퀴 돌아 목표물에 도착하는 게임이 그 예다. 물론 떨어지면 그 아래가 물이지만 높이도 엄청나고 돌고 있는 풍차 위를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헬리콥터에 매달린 드럼통을 타고 하는 로데오경기, 자동차로 집을 부수고 들어가서 나가기 등 영화에서 흔히 보던 장면들이다.
그 다음이 백만장자 꿰차기 프로그램이다. 돈 많은 미혼 남자 하나를 놓고 수십명의 여성이 경쟁을 벌이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여성들을 몇날 며칠을 사귀면서 단계별로 추려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짝이 되기 위한 경쟁이 눈물겨울 정도다. 여기에 여성 백만장자가 참여해 잘 생긴 소방수를 배필로 낙점하기도 했고, 몇달 전에는 ‘조 밀리네어’라고 가짜 백만장자까지 등장시켜 화제를 모았었다.
또 유명인사를 사칭한 개그성 프로그램도 심심치 않다. 연예인들을 닮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최근에는 클린턴과 비슷하게 생긴 사내가 한바탕 웃음을 몰고 왔다. 경호원, 방송기자들을 대동한 전직 대통령이 어느 날 동네 비디오가게에 나타나 종업원에게 속삭인다. “뭐 좀 화끈하게 야한 것 없소?” 긴장했던 가게 종업원 얼굴이 점차 안도감으로, 다시 희죽거리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 화면에 커다랗게 잡혀온다. 사내가 골라내오는 변태 섹스 비디오테이프들을 클린턴이 만족스럽게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에 ‘아기 아빠 찾아주기’ 프로그램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적미적 발뺌하는 사내와 ‘네 아이 책임져’를 주장하는 미혼모가 등장하는 쇼다. 아이의 아빠인 것이 증명되면 앞으로 양육에 대한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에 양쪽 집안끼리 서로 고성과 욕설까지 예사롭게 오간다. 남자와 아이의 디옥시리보핵산(DNA) 조사를 통해 서로의 관계를 밝히는데 드라마가 따로 없다. 만약 아이의 아버지인 것으로 밝혀지면 남성 쪽이 완전히 초상집인데 비해 여성 쪽에서는 ‘거 봐라’는 듯이 기세등등하다. 또 반대로 지목한 사내가 아버지가 아니면 남성은 만세를 부르고 잘못 짚은 여성은 통곡을 하며 다른 문을 통해 방송국을 빠져 나간다. 낙태가 자유롭지 않은 탓에 수많은 미혼모들의 출연 신청이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방송들이 한국인들을 가끔씩 도마에 올린다. 이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한국인들의 ‘개 식용 관습’이다. 유럽, 미국, 호주 등 이른바 서구의 문명권 사회는 개의 존재를 가족 개념으로 받아들인지 이미 오래다. 그것의 시비를 가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쨌거나 그들의 시각은 한마디로 ‘아니, 가족을 잡아먹어?’다.
최근 아시안들이 폭스 TV의 엽기 일본인이 등장하는 ‘반자이쇼’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아시안아메리칸 미디어액션네트워크라는 단체는 동양인들에 대한 인상을 왜곡시킬 우려 있다는 이유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항의 캠페인까지 벌이고 있다. 이와 함께 지난 봄 보신탕을 언급하며 한국인들을 비하한 NBC 방송사에 대해 아시안들이 뭉쳐 항의전화와 e메일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뒤늦은 이 항의가 엽기 방송의 기를 살려주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걱정이다.
/ 양헌석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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