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대북 첩보 켈로부대원, 55년만에 유공자 인정

6·25전쟁 때 ‘무명용사’로 적진에 침투, 첩보작전을 수행했던 80대 ‘켈로(KLO)부대원’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작전 중 큰 부상을 입었지만 관련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 무려 55년만에 공식 인정받은 것.

국민고충처리위원회는 ‘켈로부대원’이었던 임덕준옹에 대해 병상일지 등 관련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내린 국가유공자 ‘비대상 결정’을 재심의하도록 국가보훈처에 의견표명을 했으며 국가보훈처가 이를 수용했다고 20일 밝혔다.

이에 띠라 임옹은 지난 11일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증서를 받게 됐다.

임 옹은 6·25전쟁 당시 KLO(켈로)부대 첩보원이었다. ‘KLO’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첩보활동을 위해 설치한 ‘주한연락처’라는 의미의 KLO(Korea Liaison Office·켈로)의 영문 이니셜.

켈로부대는 북한의 첩보 수집, 적군의 병력·장비규모·보급현황 등 파악 및 해상첩보 등의 활동을 했기 때문에 대부분 북한실정에 밝고 연고가 있는 북한출신들로 조직됐다.

부대원들이 대부분 정식 군번을 부여받은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명용사’로 전해오다 1995년 ‘참전유공자 예우에 관 한 법률’이 제정돼 뒤늦게 참전유공자로 인정됐다.

그러나 병상일지 등 관련 기록이 없어 참전 중 부상을 입었어도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기는 어려웠다.

임옹은 작전 수행중 지뢰 파편이 우측 얼굴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으며 동료의 등에 업혀 극적으로 귀환했다.

임 옹이 제대 후 7년이 지난 뒤인 1961년 겨우 군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공상을 입증할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유공자 인정은 받지 못했다. 최전방에서 싸우다 부 상을 입어 군병원 등에서 정상적인 치료를 받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임 옹은 이에 1999년 11월과 2003년 4월 등 2차례에 걸쳐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신청을 했지만, 증빙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2004월에는 행정심판도 제기했지만 역시 기각당했다.

임 옹은 지난해 1월 다시 고충위에 “대한민국을 위해 고생한 노병(老兵)을 정말 도와달라”는 내용으로 청원서를 냈다.

임 옹은 청원서에서 “근무중 3차례나 침투해 큰 전과를 세웠고 부상을 입었으나 병상기록이 없어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면서 “전쟁 중에 적 후방 어디에 병원이 있어 병상기록이 있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았겠느냐”고 답답해했다.
그는 이어 “부대내 간이치료소에서 간호원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뒤 캐나다 병원선에서 특별치료를 받다 완치도 되기 전에 퇴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충위는 임옹을 응급치료한 당시 간호사의 증언, 임옹을 후송한 당시 소대장의 증언, 임옹의 부상이 지뢰파편에 의한 것이라는 다수 전문의의 소견서를 확보해 국가보훈처에 재심의를 권고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기존의 입장을 바꾸고 지난해 12월 27일 열린 보훈심사위원회에서 유공자로 의결했으며 지난 11일에는 임 옹에게 국가유공자증서를 발부했다.

/hong@fnnews.com홍석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