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부산 중구 용두산공원 일대는 한때 일본사람이 우리나라와 외교·무역을 하던 초량왜관이 있었다.
자그마치 36만3000여㎡(11만평)에 2m 높이의 돌담을 치고 있어 장사하러 온 일본사람도 왜관 안에 있는 개시대청(開市大廳·장이 서는 대청)에서 장사를 할 수 있을 뿐 마음대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옛 장터와 같이 매달 3일과 8일에 동래상인이 일본상인과 상품시세를 매기고 무역거래를 했다. 청·일과의 중개무역도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문제는 이곳이 밀무역의 온상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상인들이 동래상인과 짜고 우리 국법을 어겨가면서 밀무역을 하는 잠상(潛商·밀수꾼)들과 빈번한 거래를 해 말썽을 부렸다. 그래서 일본과 조선 정부는 잠상을 근절하기 위해 1653년(효종 4년) 계사정식(癸巳定式)을 시작으로 2차례에 걸쳐 엄한 약조를 맺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때문에 1683년(숙종 9년) 8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이 이곳의 무역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대마도주와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가지에 대해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바로 그 조약이 계해제찰(癸亥制札)이며 그 내용을 간추려 비석에 한문과 일본어로 따로따로 각석(刻石·글자나 무늬 등을 돌에 새김)해 왜관 출입구에 세운 것이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다.
약조제찰비는 ①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넘어 나온 자는 크고 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②노부세(路浮稅·커미션)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면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③개시하였을 때 각방에 몰래 들어가 암거래를 하는 자는 피차 사형으로 다스린다 ④5일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 창고지기, 통역 등은 일본인을 붙들고 끌어내어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⑤피차 범죄인은 왜관 문 밖에서 함께 형을 집행한다 등 내용을 담았다.
밀무역에 대해 극히 엄하게 다스린 나라는 고대 로마였는데 반출 금지품목을 밀반출하려다 걸리면 사형에 처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청나라로부터 무기 밀수입을 하려다 들키는 바람에 역관이 참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근래에 와서는 5·16 군사정부가 밀수 두목 한국필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당시 혼란한 분위기를 틈타 활개를 치던 밀수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약조제찰비가 세워진 그 다음해, 분위기는 싸늘했다. 일본사람이 ‘인삼 629근’을 밀무역하려다 잡혀 금제조항에 따라 참형을 당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비석에 새긴 글자가 바래져 가는 것처럼 당시에도 느슨한 분위기를 타고 밀무역은 서서히 고개를 들고 활개를 쳤다.
/이용득 부산세관 박물관장
■사진설명= 지난 1978년부터 부산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는 약조제찰비(부산시 지정 기념물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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