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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기술 40년] 세상을 따라가던 과학에서 앞서가는 과학으로



#1. 1965년 5월 18일 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과의 공동 성명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우리나라에 대학을 지어줄 것을 제안했지만 경제발전의 핵심이 과학기술에 있다고 판단한 박 대통령이 연구소 설립을 강력히 요구한 결과였다. 그 후 KIST는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육성의 기반을 다졌고 이어 철강·조선·반도체 등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핵심기술 개발의 밑거름이 됐다.

#2. 2009년 4월 15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선 오는 7월말 과학기술위성 2호를 싣고 발사될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KSLV-1)의 지상 검증용 기체가 발사대에 세워져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다. KSLV-1은 비록 100% 우리 기술로 만든 로켓은 아니지만 한국 우주개발의 본격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는 KSLV-1 발사 경험을 토대로 우주발사체 자력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2018년엔 달 탐사에 나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21세기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성장동력의 핵심인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특히 변변한 자원 하나 없는 우리나라 입장에선 고도의 과학기술만이 미래 먹을거리 창출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경제개발에 적극 나서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통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 반도체와 조선 등의 분야에서 당당히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제42회 과학의 날(4월 21일)을 앞두고 우리나라 과학기술 40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알아본다.

■과학기술의 태동과 산업화 착근(60∼70년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정부는 지난 1962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수립해 과학기술 육성에 나섰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 수 없던 당시 정부는 중진 공업국가군의 최상위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선진기술 도입, 과학기술인력 육성, 특성 있는 기술 개발 등을 추진했다. 1966년엔 미국의 도움을 받아 KIST를 설립했으며 이어 1967년엔 과학기술처를 출범시켜 전문 행정체제를 갖췄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흑백 TV 생산을 시작했으며 최초 연구용 원자로(TRIGA Mark-2)를 이용, 원자력 기초연구도 수행했다.

1970년대는 연구개발 기반을 본격적으로 구축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에 나선 시기다. 대덕연구단지가 건설되고 다양한 분야별 출연연구기관도 설립됐다. 하지만 아직 연구개발 투자보다는 설비투자가 주를 이루며 민간 연구개발은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당시 과학기술처는 1972년 기술개발촉진법을 제정, 기업의 기술개발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또 1977년엔 이공계 대학의 연구역량 강화를 위해 한국과학재단을 설립했다. 1973년엔 국내 첫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이 세워졌고 1978년엔 고리원전 1호기가 준공돼 세계 22번째 상업용 원전 보유국이 됐다.

■핵심기술 육성를 위한 기술드라이브(80∼90년대)

8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독자기술 개발이 절실하다는 점을 깨닫고 기술드라이브 정책을 본격 추진했다. 그 동안 과학기술이 경제성장을 뒷받침했지만 이제 ‘선도’라는 능동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 정부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을 출범시켜 국가 미래에 꼭 필요한 기술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다. 80년대엔 정보기술(IT) 분야의 의미 있는 성과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1983년 64K 디램(DRAM)과 256K D램을 잇따라 개발해 선진국과의 격차를 5년으로 좁혔다. 1984년엔 전전자교환기(TDX-1)가 개발돼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거대 과학에 대한 관심도 싹텄다. 정부는 1988년 남극 킹조지섬에 세종기지를 설립, 앞으로 다가올 영토 및 자원 전쟁에 대비하기도 했다.

90년대 우리나라 연구개발의 키워드는 ‘선택과 집중’이었다. 또 장기적 안목의 과학기술정책 수립 기반이 마련됐다. 선택과 집중의 대표적 예는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이었다. 1998년 과기처는 과학기술부로 승격됐으며 과학기술 정책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도 출범했다. 이 밖에도 과학기술의 전문화에 따라 해양연구소, 항공우주연구소 등이 새롭게 출범,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92년 우리나라는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 첫 자체 개발 인공위성을 우주에 올려놨고 같은 해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는 쾌거를 이뤘다. 1994년 세계 최초로 개발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제품은 오늘날 우리 이동통신 기술의 근간이 됐다. 95년엔 한국 표준형 원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활짝 핀 과학기술, 그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자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지난달 발간한 ‘국가연구개발사업 성과총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07년 국가 총 연구개발비 세계 7위, 경제활동인구당 상근연구원 수 8위, 국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수 12위, 미국 특허등록 건수 4위 등 세계 수위권의 과학기술 역량을 보이고 있다.

또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2001년 과학분야 14위, 기술분야 21위를 기록했으나 2008년에는 과학분야 5위, 기술분야 14위로 발돋움했다.

세계 1위 분야도 속속 나오고 있다. 반도체와 조선, 디스플레이 분야는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세계 1위를 굳건히 하고 있고 자동차, 휴대폰을 비롯한 정보기술(IT) 기기들도 세계 선두권에 자리하고 있다.

또 전세계 선진국들의 우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지난해엔 한국 첫 우주인을 배출하기도 했고 올해 인공위성 첫 자력 발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는 2050년대 이후 청정 에너지원으로 각광받는 ‘핵융합’ 실험시설인 차세대초전도핵융합실험장치(KSTAR)를 건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성장세를 지속하기 위해선 국가 연구개발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아직 미약한 기초분야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을 만큼 기초분야가 뒤져 있고 소재 등 원천기술도 아직 갈길이 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과학기술 577전략’에서 오는 2012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5% 수준까지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고 특히 국가연구개발예산의 50%를 기초·원천분야에 투자키로 했다.

교과부 박항식 기초연구정책관은 “세계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기초과학 분야 투자를 늘리고 있다”면서 “기초분야에서 주도권을 잡는 나라가 경제발전에도 우위를 점할 것”이라고 말했다.

/economist@fnnews.com 이재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