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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또다른 시각] (3) 신라의 도읍은 경주?

■역사서(歷史書)의 근거
신라가 992년간 경주에만 도읍(都邑)했다는 사실을 역사서를 통해 밝혀 보려고 한다. 고려 제17대 인종(仁宗·1122∼1146년) 때 쓰인 ‘삼국사기’를 살펴보자. ‘삼국사기’는 집필할 당시 23책을 고증(考證)해 저술됐다. 책 제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삼한고기(三韓古記) ②신라고기(新羅古記) ③화랑세기(花郞世紀) ④계림잡전(鷄林雜傳) ⑤고승전(高僧傳) ⑥낙본(樂本) ⑦한산기(閑山記) ⑧제왕년대역(帝王年代歷) ⑨진서(晋書) ⑩후한서(後漢書) ⑪위서(魏書) ⑫송서(宋書) ⑬삼국지(三國志) ⑭양서(梁書) ⑮남북사(南北史) ?수서(隋書) ?당서(唐書) ?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책부원귀(冊府元龜) ?자치통감(資治通鑑)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신라국기(新羅國記) 이상 23책 속에 2757권으로 돼 있다.

삼한고기와 신라고기, 고금군국지, 신라국기 등은 소실되어 몇 책으로 돼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3000권 정도라고 생각된다. 이 외에도 통지(通志), 한서(漢書), 진서(陳書), 주서(周書), 북제서(北齊書), 구당서(舊唐書), 회남자(淮南子), 남제서(南齊書), 사기(史記), 태평어람(太平御覽), 태평환우기(太平?于記),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구오대사(舊五代史),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죽서기년(竹書紀年), 목천자전(穆天子傳), 당양경성방고(唐兩京城坊考), 송사(宋史) 등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41책은 수천 권에 해당한다. 이들 책 속에는 신라가 경주에 도읍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경주에 도읍한 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다. 신라가 경주에 도읍한 근거의 서책을 수만 권을 뒤져도 찾지 못했다.

■신라는 어디서 도읍 했을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주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위경주부별호낙랑야(爲慶州府別號樂浪也), 순화소정(淳化所定)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경주를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했으며 이곳은 순화(淳化)에 정해졌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반도에 순화라는 곳이 있었는가. 필자가 아무리 지명을 조사해 보아도 없었다. 고대 순화의 땅이름을 찾아 대륙으로 갔다. 옛 서경(西京)인 지금의 서안(西安)에서 북쪽으로 순화현(淳化縣)을 찾아 그곳 책임자에게 물었더니 순화가 옛 경주로 불렸다고 했다. 하지만 도읍한 사실은 없다.

순화가 있는 곳은 고대 낙랑의 땅이었다. 다시 말해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서경인 지금의 서안 일대가 낙랑군(樂浪郡)이었던 것이다. 그럼 신라의 도읍지는 어디일까.

삼국사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육촌(六寸)이 진한(辰韓)의 육부(六部)다. 육부의 우두머리들이 양산(楊山)의 언덕에서 바라보니 우물가 숲 사이에서 말이 굻어 앉아 울다가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큰 알이 있었는데 껍질을 깨고 어린애가 나타났다. 즉시 거두어 길렀다.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늠름했다. 육부 사람들이 추대해 임금으로 모셨는데 이분이 신라 최초 임금인 거서간(居西干)이다. 이와 같은 문장은 해학적으로 엮었기에 기회가 주어지면 필자가 신라의 비사(秘史)를 소개하고자 한다. 거서간 21년에 금성(金城)에 축을 쌓아 호(號)를 금성이라 했다고 돼 있다. 26년 금성에 궁실(宮室)을 만든 것으로 돼 있다. 금성이 신라 최초의 도읍지로 돼 있다. 이곳은 경상도 경주가 아닌 대륙에 있는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다.

신라 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9년 봄 3월이었다. 밤에 금성 서쪽 숲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왕이 듣고 신하를 보내 궤 하나를 가져와 열어보니 어린 남자 아이가 있었다. 용모가 수려했다.
하늘이 준 나의 씨라고 하면서 왕은 매우 기뻐했다. 금궤짝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했으며 닭이 운 곳이라 하여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했다고 돼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 경주에는 신라가 도읍한 사실이 없었다.

/이중재 사단법인 상고사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