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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주의에 치중한 경쟁,대학 건강 해친다

▲ 지난 9일 서울 남대문로 밀레니엄힐튼 호텔에서 열린 한·미 대학 전·현직 총장 긴급 좌담회에 참석한 정근모 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원 설립추진위원장, 미국 아주사퍼시픽 대학교 존 왈라스 총장, 아주사대 존 박 교수, 경인여대 박준서 총장(왼쪽부터) 등이 명문대 문제점 등을 진단하고 있다. /사진=김범석기자
“카이스트(KAIST)가 학생 평가제도를 바꿀 때 교육철학 기본에 더 충실했어야 했다.”(정근모 카이스트 설립자)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개념에 대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존 왈라스 미국 아주사퍼시픽대학 총장)

“명문대생일수록 실패 때 좌절감이 크고 우울증도 심각한만큼 카운셀링이 필요하다.”(박준서 경인여대 총장)

카이스트에서 올 들어 재학생·휴학생 4명이 잇따라 자살하면서 ‘베르테르 증후근(동조자살) 조짐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카이스트는 11일과 12일 수업을 일시 중단, 학과별로 교수와 학생간 대화를 통해 대책을 논의키로 했다. 또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18일 임시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에 출석, 카이스트 업무 및 현안을 보고한다.

카이스트생은 입학시 4년 전액 등록금 면제를 받지만 학점 3.0을 받지 못하면 학비를 내는 ‘징벌적 장학제도’를 시행중이다.

파이낸셜뉴스는 카이스트생의 잇단 자살로 인한 문제점 진단과 대안을 찾기 위해 지난 9일 ‘한·미 대학 전·현직 총장 긴급 좌담회’를 서울 남대문로 밀레니엄힐튼 호텔에서 가졌다. 이번 좌담회는 본지 전재호 회장이 주재했고 카이스트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설립자 정근모 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원 설립추진위원장(전 명지대 총장), 미국 아주사대학교 존 왈라스 총장, 경인여대 박준서 총장(전 연세대 교학부총장)의 3자 토론 형식으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카이스트의 위기는 인성이 빠진 무한경쟁 사회의식이 대학에 침투한 결과이고 진리 탐구를 위해 다양한 경험과 학문을 쌓아야 할 상아탑이 학점 관리, 취업, 자격증 취득 등에 매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카이스트생의 잇단 자살, 문제점은 뭔가.

▲정 위원장=건강한 경쟁은 필요하다. 카이스트 문제는 잘 하는 학생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게 아니라 못하면 페널티를 주는 것이다. 페널티는 학생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다. 반성해야 한다. 학생 컨설팅을 더 했어야 하고 더 교육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어야 했다.

절대평가든 비교평가든 대학이 평가 제도를 바꿀 때는 기본적인 교육철학에 더 충실했어야 했다. 깊은 생각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카이스트의 경우 교육 철학적인 이념이 단순 사고적인 물질주의와 연결됐다. 지식경제 사회의 특성에 맞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

빌 게이츠는 명문대인 하버드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뒀지만 세계 최고의 경영자가 됐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을 점수로 따지는 게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박 총장=카이스트처럼 좋은 대학일수록 경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어느 대학에서도 카이스트처럼 학생 성적을 돈과 결부시키는 명문 대학은 본 적이 없다.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학업 능력이 우수한 학생은 격려해야 한다.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학생이면 고등학교에서 다 우수한 학생들이다. 그런데 카이스트에서 뒤떨어졌을 때 좌절감이 컸을 것인만큼 좋은 대학일수록 성적에 고민하는 학생들에 대해 카운셀링을 더 잘해야 한다.

명문대의 많은 학생들은 우울증이 심각하다. 대학이 학생을 경쟁시키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서비스를 동시에 해야 한다. 교수들은 강의만 잘하는 게 아니라 학생 지도를 잘하록 해야 한다. 학생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한 교수 워크숍을 많이 해야 한다.

▲왈라스 총장=미국에서도 최근 대학생들의 스트레스가 이전보다 심해졌다. 스트레스 상황을 대학의 교직원뿐 아니라 가족이 함께 참여해 해결해야 한다. 미국 대학 교육 과정에는 학생들 행동에 대해 심층적으로 논의하는 틀이 있다. 모든 세대의 고민을 점검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심리학적 조치를 하든 카운셀러들이 학생들이 위험수준에 도달하면 대화를 해서 풀어 나간다. 미국도 공학 분야 학교에서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많은 게 사실이다. 유능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개념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남을 이긴다는 게 최고의 성공으로 배워왔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이란 ‘나 자신보다 남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도록 대학이 가르쳐야 한다. 신이 나에게 준 기프트(재능)를 내 이웃과 전 세계를 위해 어떻게 공헌하느냐를 먼저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취업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데 대학 차원의 대안은.

▲박 총장=한국은 고등학생의 85%가 대학에 진학한다. 세계 1위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실업자가 너무 많다. 국가적인 문제다. 교육과학기술부에는 교육역량 강화사업이 있다. 이 사업의 6개 지표 중 1개가 취업률이다. 취업률은 대학평가 지표 중 25%를 차지한다. 취업률에 따라 대학에 대한 지원금도 연계된다. 이처럼 국가에서도 대학의 취업률을 중요시한다. 전문대는 아무래도 취업 중심이다. 4년제는 취업뿐만 아니라 연구중심으로 가야 하는 고민을 함께 갖고 있다.

▲정 위원장=명지대 총장으로 재직할 때 대부분 학생들이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봤다. 대학은 학생들이 졸업 후 한국의 몇 개 대기업에만 취직하도록 매달리게 교육을 하기보다는 해외에 나가 봉사하면서 전세계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현실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선 더 넓은 시야의 교육도 필요하다.

또 직업 분야가 우리 사회에서 지칭하는 것들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간 특성을 모두 무시하는 현재 교육풍토에 깊은 생각을 해야 한다.

▲왈라스 총장=미국 100대 대학에 속하는 아주사대학은 전 세계 6∼7곳에 캠퍼스를 두거나 추진중이다. 영국 옥스퍼드, 독일 하이델베르크, 남아프리카에도 캠퍼스가 있다. 아주사 대학이 전세계에 설립한 캠퍼스는 현지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본교의 미국인 학생들과 교수들을 보내기 위한 것이다. 아주사 대학 학생들이 전세계에 나가 공부해서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정 위원장=뉴욕공과대도 본부는 뉴욕시에 있는데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에도 캠퍼스가 있다. 어느 캠퍼스에 가도 학점을 다 인정해준다. 뉴욕대의 경우 글로벌 캠퍼스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 이야기의 핵심은 국내 학생들이 취업을 하기 위한 파이를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만이 아닌 전세계를 상대로 해야 한다.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맞춘 취업시장을 대학이 찾아 줘야 한다.

―대학 윤리 교육의 중요성은.

▲정 위원장=대학은 진리에 대한 추구가 핵심이 돼야 한다. 그러나 삶의 근본 문제보다 지엽적인 경쟁이 부추겨져 안타깝다. 카이스트를 처음 설립하고 가장 먼저 만든게 카이스트 교회였다. 아인슈타인은 ‘신앙이 없는 과학은 장님이고 과학이 없는 신앙은 절름발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대학생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함양할 기회를 줘야 한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다들 동조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연구 가치와 교육 가치를 함께 키워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치가 따로 떨어진 게 대학에 만연화됐다. 팀워크 강화가 중요하다. 새로 설립을 추진중인 국제원자력대학원은 이런 점에 중점을 둘 계획이다.

▲박 총장=비뚤어진 성공지향주의가 논문 표절을 낳아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대학에서도 윤리문제가 강조돼야 한다. 윤리 교육은 인성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실용교육 위주로만 가는 것은 재고해봐야 한다.

▲왈라스 총장=미국의 유명한 풀브라이트 장학금은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학생들을 지원, 교육 혜택을 누리게 한 제도다. 해외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이 가장 많이 받은 것이기도 하다. 이 장학금을 지원한 기본 바탕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귀절을 실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윤리는 이처럼 ‘네 이웃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과 같다’고 여기는 의식를 깨우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간담회 참석자 프로필

▲정근모 한국전력(KEPCO) 국제 원자력대학원 설립추진위원장(72)=현 교육과학기술부 전신인 과학기술처 12대(1990년), 15대 장관(1994∼1996년)을 지냈다.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미시간 주립대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 KAIST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설립을 주도하고 2대 부원장도 맡았다. KAIST 설립 공로패(1975년), 미국 과학재단 최우수상(1982년), 캐나다원자력협회 국제상(1998년), 세계원자력한림원 공로상(1998년), 대한민국 은탑산업훈장(1987년), 대한민국청조(1급)근정훈장(1991년)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 세계 원자력한림원 회장과 세계 에너지회의 부의장 및 종신 명예 부의장을 지냈다. 뉴욕공과대학 전기 및 핵물리학과 부교수, 미국 국무부 국제개발처(AID) 자문위원, 명지대학교 총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을 지냈다.

▲박준서 경인여대 총장(71)=서울대 법과대학과 연세대 신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예일대 신학대학교에서 석사를, 프린스턴신학교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신과대학 구약학 교수, 신과대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 연구처장, 대학원장, 교학부총장을 지냈으며 지난 3월부터 경인여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난 2006년부터 현재까지 연세대 명예교수와 명지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박 총장은 지난 1월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KIFA) 신임 회장에 선임됐다. KIFA는 한국과 이스라엘 간 민간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1966년 창립된 단체다.

▲존 왈라스 미국 아주사 대학교 총장(57)=아주사 대학에서 36년간 재직하며 12년째 총장직을 맡고 있다. 경영학박사이며 아주사대에서 경영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백석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매년 한 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 중이다. 아주사대는 1899년 메리 히어스라는 여성 선교사가 캘리포니아주 아주사에 창립했다. 학부와 대학원에서 학생 9000명이 공부하고 있는 대형 크리스천 대학이다.
40개의 대학 프로그램과 22개의 대학원 프로그램이 있다. 아주사대는 3년 연속 프린스턴 리뷰에서 미국 서부지역 최고 대학 중 한곳으로 선정됐고 바이오, 간호학, 경영 등 관련 학과를 모두 갖춘 종합대학으로 기독교 계열 미국 대학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아주사 대학의 의학부 예과 진학률은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분교(UCLA) 못지 않다.

/rainman@fnnews.com김경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