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 2위의 가전제품 생산ㆍ수출국이 됐지만 첨단기술은 선진국과 격차가 크고 생산비용 면에선 신흥국에 밀린다.” 우리 가전업체들이 ‘타도 일본’을 외치며 세계화의 나팔을 불어대던 1997년 부즈앨런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넛크래커(호두까기) 이론이다. 게다가 생산비의 3분의1을 일본산 부품이 차지하는 기형적 산업구조여서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비관적 견해였다.
사실 1990년대 우리 가전산업은 일본을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소니ㆍ파나소닉 등이 세계를 주름잡을 때 삼성ㆍLG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에서 벗어나 자체 브랜드로 시장 개척에 안간힘을 쓰는 단계였다. 해외 유명 백화점의 노른자위 매장은 으레 소니가 차지했고 우리 제품은 구석에 처박혔다. 품질은 그럭저럭 쫓아가도 소비자들이 외면해 20~30% 싸게 팔 수밖에 없었다. “우리 기술도 소니에 뒤지지 않는다”고 항변해봤자 귀담아 듣는 이가 없었다.
만년 2등에 머물 것 같던 한국과 가전 종주국 일본의 위상 변화는 극적이다. 결정적인 것은 디지털 시대 적응력이었다. 기술격차가 좁혀지고 디자인 투자를 늘리며 2000년대 초반 순식간에 경쟁력이 역전됐다. 반면 일본은 장기침체와 엔고로 자멸했다. 삼성은 가전시장 종합 챔피언이 됐고,LG는 3년째 세탁기 1등이다. TV시장도 1,2위를 기록하며 3위 소니와의 격차를 벌려가고 있다. 최근엔 난공불락이던 일본 안방시장까지 스마트폰과 3D TV를 무기로 파고들고 있다니 속이 시원하다.
지난 7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막을 내린 유럽 최대규모의 ITㆍ가전 전시회 ‘IFA 2011’은 한국이 세계 가전제품의 새 종주국임이 됐음을 만천하에 알린 이벤트였다. 삼성과 LG는 전시회의 주빈(主賓)이었고, 두 회사의 3D TV와 스마트 가전 신제품은 최대 화제였다. 게다가 일본의 노쇠한 가전 명가보다 하이얼 등 중국 기업의 성장세가 돋보일 정도였다고 참관자들은 전한다. 세계를 휘어잡던 소니가 어느새 추격자로 전락해 삼성ㆍLG를 배우러 다닌다니 그야말로 금석지감이 든다.
그렇다고 삼성ㆍLG 앞에 레드 카펫이 깔려있는 것만도 아니다. 애플이 촉발한 스마트폰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가전과 IT(정보기술) 융합의 종착점은 짐작조차 어렵다. TV의 핵심 부품인 LCD 경기는 사상 최악이다. 삼성ㆍLG가 위기라는 지적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그러나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의 답은 “걱정하지 마시라”다. 지금은 전 부문 1등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한다. 이영하 LG전자 사장도 “2015년 생활가전 유럽 1위가 목표”라고 자신한다.
일본을 넘어 유럽까지 접수하겠다는 의욕들이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두 회사의 저력을 믿고 싶다.
/ryu@fnnews.com 유규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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