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

[한국 과학의 미래,이젠 노벨상이다] (2) ③ 응집물질 물리학 新 영역 개척

#. 20여년 전 연구비가 부족한 젊은 물리학자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서울 청계천에서 구한 고철과 부품으로 산화물 박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실험장비를 직접 만든 것이다. 당시 만화 속에 등장할 법한 이 실험실의 풍경이 향후 응집물질 물리학 연구의 새 영역을 개척할 첫 화수분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기초연구 인프라가 일천했던 시절, 비인기 분야에 겁없이 뛰어든 노태원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의 일화다.

노 교수는 현재 금속산화물(금속과 산소가 결합한 화합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물리현상의 기본 메커니즘을 밝혀 F램·R램·스핀트로닉스 등 금속산화물 기반 차세대 메모리 소자의 원천기술을 확보한 국내 응집물질 물리학 연구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그는 지난 1999년 피로현상이 없는 새로운 강유전체 물질을 만들어 강유전체 메모리 소자의 응용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국내외 연구자들이 강유전체를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 소자에 응용하기 위해 몰두했지만 메모리 소자를 여러 번 읽고 쓰면서 잔류분극의 크기가 줄어들어 기억된 정보가 손상되는 피로현상을 해결하지 못하던 차였다. 메모리 소자 응용의 가장 큰 난제를 해결한 이 연구결과는 네이처지에 실려 지금까지 1275번이나 인용됐다.

2006년에는 전기적 특성과 자기적 특성을 동시에 지닌 '다강체'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자연계에서 전기적 특성을 지닌 물질은 전기로, 자기적 특성을 지닌 물질은 자기로만 제어할 수 있다. 만일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지닌 다강체를 산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전기장으로 자성을 제어하거나 자기장으로 전기적 성질을 제어하는 새로운 개념의 소자나 소재 개발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노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 자연계에 지극히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다강체의 수를 늘리고 구조를 제어하는 등 전혀 새로운 다강체를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2008년에는 전압에 따라 저항이 변화하는 저항변화 현상을 근간으로 저항변화 메모리(R램)의 연구 방향을 제시했다. 1960년대부터 많은 물질에서 발견됐지만 물리적 이해가 부족했던 저항변화 현상의 구조와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삼성, 하이닉스 등이 주도하던 R램 연구에 새로운 지표를 제시했다. 이 연구결과들은 재료과학분야의 권위있는 학술지 '어드밴스트 머티리얼즈'에 보고됐다.

최근 노 교수는 금속산화물의 얇은 막뿐 아니라 면 전체(계면)로도 눈을 돌렸다. 산화물 계면의 새로운 물리현상을 규명해 기존 에너지나 전자소자의 한계를 극복할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산화물은 지구 표면의 97%를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응집물리학의 지식체계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런 점에 착안해 산화물의 새로운 물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더욱 확장하고 싶다는 그를 27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났다.

■노태원 교수는

1982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물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과정을 밟고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2000∼2009년 창의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대 산화물전자공학연구단을 이끌었으며 2010년 국가과학자로 선정돼 서울대 기능성계면연구단장을 맡고 있다. 2003년 일본 강유전체 커뮤니티가 수여하는 이케다상을 비롯해 한국과학상(2004),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2011) 등을 받았다.

/pado@fnnews.com허현아기자

■사진설명=노태원 교수가 서울 관악로 서울대학교 실험실에서 산화물 박막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