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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한글날] 세계 “가나다라” 열공.. 국내선 ‘ABCD 공용화’ 논쟁

한류 바람을 타고 한글(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국격 향상과 국가 경쟁력 제고에 한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글 세계화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숙제도 산적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외국과 외국인의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국민은 한글의 중요성을 등한시하고 있다. 더불어 정부와 관련기관의 한글 보급 노력은 인근 중국과 일본에 비해 '걸음마'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해외 32개국서 한국어 능력시험

한국어능력시험(TOPIK)은 올해 국내 13개 지역과 해외 32개국 122개 지역 등 총 165곳에서 실시되고 있다. 특히 올 들어서는 불가리아와 도미니카, 멕시코, 투르크메니스탄 등 9개국이 한국어능력시험 시행국가로 새로 편입됐다.

한글표기 시범사업도 탄력을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 이어 남미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원주민인 아이마라족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한글 기 시범사업이 진행 중이다.부족 인구가 200만여명에 달하는 아이마라족은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어 스페인어를 차용해 왔다. 정부의 공식적인 한국어 보급 노력 외에도 각국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한국어 관련 과목 개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렇지만 이를 두고 한글 세계화 현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자국 언어의 국제화를 위해 막대한 정책적 지원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실제 미국의 경우 중·고교 중 5000곳이 스페인어, 1000곳은 중국어, 700곳은 일본어를 각각 채택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어를 채택한 중·고교는 65곳에 불과하다.

■한국 내 한글 위상은 추락

외국에서 한글 배우기 열풍이 확산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에서는 한글의 위상이 되레 떨어지고 있다. 영어 배우기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영어공용화' 논쟁도 지속되는 등 '영어 종속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영어 공용화 논쟁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작가 복거일씨가 저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 주장하면서 촉발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어 공용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반론에 부닥치면서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희삼 연구위원은 "영어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특권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작용하면서 국민의 관념이나 심리도 영어에 목을 매는 상황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외적으로는 한글 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는 와중에 내부적으로는 영어 공용화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작용하는 등 한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양면성이 극에 달하고 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영어 배우기 관련 사교육비는 전체 사교육비(21조원)의 30%인 7조원대에 이른다. 이는 부산시 예산(지난해 기준 7조8000억)에 육박한다.

■국론통합 위해 한글보존 절실

한글의 보존과 세계화의 중요성은 대내적으로 민족 정체성 확립과 국론통합 차원에서, 대외적으로는 국격 향상과 국가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강조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돌이켜보면 한반도의 역사는 사실상 한글의 수난 시대다. 한국인들의 선진국 언어에 대한 종속은 역사적으로 사연이 깊다. 조선시대까지 중국의 한자문화권에 속하면서 한글 보급은 지지부진했다. 특히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박제가는 '북학의'라는 책을 통해 중국어 공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조선시대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청나라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개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 일제강점기에 한글은 일본어에 자리를 내줬다. 문제는 광복 이후에도 일본어의 위상은 현재까지 각종 전문직종과 일상생활 속에 뿌리박혀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한국전쟁을 전후로 미국 군정이 실시되면서 영어에 대한 국민의 집착은 극에 달했고 최근에는 영어공용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이 세계 경제대국에 진입하면서 최근에는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추세다.

중앙대 강내희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한국은 고대나 전근대, 현재까지 강대국에 의존하는 경제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미국의 언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는데 현대사회에서 영어는 이 같은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최근 외국과 외국인 사이에 불고 있는 한글 배우기 열풍은 우리의 말과 글을 외국에 적극 알리자는 우호적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점에서 그나마 고무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과거 언어동화정책은 군사력을 앞세운 강압적 방식이 주류였다면 최근의 한글 배우기 열풍은 경제력과 문화경쟁력을 밑천 삼아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다문화 시대로 접어든 우리나라의 사회 및 인구구조 변화를 고려하면 한국어 보존과 확산은 내부 국론통합 차원에서도 필연적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특별취재팀 조창원팀장 김성환 강두순 강재웅 홍창기 이유범 이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