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의 서쪽, 알프스 산자락에 자리 잡은 토리노시는 1861년 통일된 이탈리아의 첫 수도이자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자동차 업체인 피아트(FIAT)가 1899년 설립된 유서 깊은 도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토리노는 '피아트의 도시'라 불릴 만큼 자동차 산업이 크게 번성해 유럽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80년대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의 경쟁이 심화되고 피아트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공장들을 국외로 옮기기 시작하면서 토리노의 경제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당시 산업건축의 백미라고도 불리던 길이 507m에 이르던 피아트의 공장이 폐쇄되자 실업률은 급속히 치솟았다. 토리노의 노동자들과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당시 엑소더스라 불릴 만큼 대규모로 토리노를 빠져나갔다.
30년이 지난 오늘날의 토리노는 어떠한가. 토리노는 더 이상 텅 빈 자동차의 도시가 아니다. 토리노는 폐허가 된 자동차의 도시에서 아름다운 '디자인의 도시'로 거듭나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가 됐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은 토리노 하면 '2006 동계올림픽', '2008년 세계디자인 수도' 등을 통해 보여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떠올린다. 산업시대의 거대한 유적과 같았던 피아트 공장은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의 손에 의해 호텔과 콘서트홀, 쇼핑몰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 토리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고 오래 전 폐쇄된 양조장 건물은 '이탈리아' 식당으로 다시 태어나 전 세계 미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등 사람들의 삶은 활기를 띠고 있다. 토리노의 유물들이 창조적인 인재들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유물들이 토리노 사람들의 삶을 바꾼 것이다.
지역 발전의 경쟁력과 원동력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 지역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돼왔던 천연자원, 산업입지, 시장접근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이라는 인간적 가치와 자연, 친환경과 같은 녹색가치가 더해져야 남다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양길에 접어든 광산업 대신 동강국제사진전을 통해 우리나라 유일의 사진특화지역으로의 발걸음을 시작한 강원 영월이나, 비엔날레 개최를 계기로 새로운 광산업과 함께 예술도시로서의 역량을 키워가고 있는 광주 등 문화·예술 등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접목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지역발전이라고 하면 산업단지조성, 공장신설, 도로확장 등의 단어들을 떠올린다. 선거 때마다 자치단체장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이런 공약들을 내세우고 지역민들은 그런 후보들에게 타성적으로 표를 던져준다. 산업적 대량생산, 제조업, 건설 등 하드웨어 중심의 지역발전의 패러다임은 공단과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생기고 차량들이 오가는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결국 솜씨 있고 창의력 있는 좋은 인재를 유치하지 못하고 지갑이 넉넉한 손님들도 별로 찾아오지 않아 그 지역 소득 창출 효과는 미미할 것이다. 오히려 편리한 교통여건으로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은 주변 대도시로 경제권을 유출시키고 번지르르한 건물·장비·교통수단들이 두고두고 지방 재정 부실의 원인이 돼 경제 파탄의 상황까지 이르는 곳도 생기고 있다.
지난해 11월 테크플러스(tech+) 포럼 연사로 참여한 토론토 대학의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그의 저서 '신창조 계급'에서 텍사스 오스틴을 사례로 들면서 창조성 있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지역은 흥미로운 음악무대, 공연 공간과 극장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는 활기찬 밤 문화가 있는 지역이며 기술과 음악은 둘 다 새로운 생각·창조성·개방성으로 통하기 때문에 텍사스 오스틴처럼 첨단 기술과 음악 무대는 공존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나라도 지역발전을 하드웨어 중심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 삶 중심의 소프트웨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수한 인재가 머무르고 지불 능력 있는 관광객이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술·문화·자연 환경이 생명력을 뿜어내야 한다. 우리의 아름다운 자연을 더 이상 시멘트 구조물로 난개발해 가치를 훼손시키지 말고 고부가가치형 지역을 만들어 나가도록 다양한 분야의 지역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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