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정상들이 28~2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재정위기 해법을 모색하지만,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금융시스템 부실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재정위기는 유럽 남부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주변국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은행위기는 남북 간 경계 없이 유럽 전역에 만연해 있다는 설명이다.
뉴욕타임스(NYT)는 28일 유로존에는 부실 은행이 가득하다며 프랑스나 독일도 은행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유로존 안정을 위해서는 EU 정상들이 이번 회의에서 은행 시스템과 관련한 광범위한 문제에 정면 대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은 최근 스페인과 키프로스를 휩쓸고 있는 은행위기가 다음에는 프랑스를 덮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관대한 유럽 기준을 적용해도 프랑스 4대 은행 가운데 소시에테제네랄, BNP파리바, BPCE그룹 등 3곳이 이미 자본 부족을 겪고 있으며, 나머지 한 곳인 크레디트아그리콜은 그리스에 대한 위험노출액(익스포저)이 커 올해 들어서만 주가가 27% 급락했다.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국제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지난주 글로벌 대형은행 15곳의 신용등급을 무더기 강등하면서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도 포함시켰다. 트레이딩 부문에 대한 의존이 지나치다는 이유에서다.
컨설팅업체 언스트앤드영의 마리 디론 이코노미스트는 "은행의 취약성이 유로존에 만연해 있다"며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은 수준의 은행부문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NYT는 그리스를 비롯한 유로존 일부 국가에서 재정위기가 불거진 것도 독일과 프랑스 은행이 과도하게 신용을 풀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위기 해법으로 급부상한 '은행동맹'에 대한 논의가 의미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브뤼셀 싱크탱크인 브뤼겔의 니콜라스 베론 선임 연구원은 "2개월 전에는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던 은행동맹을 모두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만도 엄청난 발전"이라며 "이제는 아무도 유로존 위기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인 금융시스템 문제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은행동맹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론이 우세하다. 정치권이 과연 범유럽 차원의 은행 감독권이 강화되는 것을 용인하겠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유로존 금융규제당국이 역내 은행을 상대로 실시했던 재무건전성 평가(스트레스테스트)도 투자자들의 불신을 사고 있다. 일각에서는 다음달 출범하는 유로존 상설 구제기금인 유로안정화기구(ESM)가 직접 역내 은행의 자본 확충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래야 정치적 부담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로존 은행권의 자본 확충은 어쨌든 이달 말 일단락될 전망이다. 유럽은행감독청(EBA)이 권고한 자본확충 시한이 끝나기 때문이다. 주요 은행들은 이미 구조조정 성과를 자신하고 있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던 은행들이 '다이어트'를 너무 급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은 은행간 자본시장에서 두드러진다. 은행들은 서로 남아도는 자본을 빌려주는데, 거래액이 최근 급감한 것이다. 은행들이 서로 믿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말 유로존 은행간 대출액은 3640억달러(약 419조6900억원)로 1년 전에 비해 5.9% 줄었다. 지난 2008년 말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은행들이 유럽중앙은행(ECB)에 쌓아둔 현금은 전날 기준 7470억유로(약 1077조9900억원)로 평상시 수준을 넘어섰다.
raskol@fnnews.com 김신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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