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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잘라파고스의 비극

[fn스트리트] 잘라파고스의 비극

전자제국 일본의 몰락이 갈 데까지 간 듯하다. 적자 수렁에 빠진 소니·파나소닉·샤프 삼총사의 신용등급은 정크(투자부적격) 수준으로 떨어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①잘라파고스 현상=일본 전자업계를 말할 때마다 갈라파고스 섬이 등장한다. 남태평양의 외딴섬 갈라파고스는 거북(스페인어로 갈라파고스)을 비롯한 희귀동물의 천국이다. '자연사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찰스 다윈은 진화론의 영감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만큼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다. 일본 전자업체들은 기술 맹신에 빠진 나머지 세상의 흐름을 외면했다. 그 결과 첨단 TV·휴대폰 시장에서 이렇다 할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 잘라파고스는 재팬+갈라파고스의 합성어다.

②내수 치중=배타적인 일본 시장은 외국 제품이 발 붙이기 힘든 곳이다. 인구는 1억3000만명이나 된다. 소니 등은 이 시장에 안주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일본 전자산업이 과거의 미국 자동차 산업을 닮았다고 분석한다. 내수에만 의존해 혁신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외국 경쟁사에 선두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③고리타분한 장인정신=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최근 '위기의 전자입국' 시리즈 샤프편에서 "삼성은 '팔리는 액정이 좋은 액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샤프는 '좋은 액정은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샤프의 장인정신에 공감하지만 그런 생각으론 지금의 샤프를 구할 수 없다"는 한 전자업계 간부의 말을 전했다.

④포르투갈화=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가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일본의 현실안주를 비판하면서 쓴 용어다('지식의 쇠퇴'·2009년). "과거 대항해시대 스페인과 세계를 양분했던 포르투갈 제국은 17세기 이후 400년을 '스몰 해피니스'로 만족하면 지내왔다. 이는 일종의 패배주의다. 이대로 간다면 일본도 포르투갈처럼 될 것이 분명하다." 전자업체에 국한된 용어는 아니지만 '잃어버린 20년'의 수렁에 빠진 일본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싫든 좋든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일본을 롤 모델로 삼아 전진 또 전진해왔다. 그런 일본의 쇠락은 우리에게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한창 잘나갈 때 소니·파나소닉·샤프는 지금의 애플·삼성전자·LG전자 같았다. 전자제국 일본의 태양은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꺾이는 건 한순간이다. 나라 안팎에서 한국도 결국 일본의 뒤를 따를 거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은 다르다는 걸 본때 있게 보여주자. 가장 먼저 물리쳐야 할 적은 자만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